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을 때,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하신 일이 두가지였는데 하나는 성찬이었고, 또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찬에 대하여는 많이 알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신 일에 대하여는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시다가 일어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만약 식사를 위하여 손과 발을 씻는 봉사였다면 식사 전에 하셨을텐데 식사 중에 하신 것을 보면 여기에 섬김과 봉사의 교훈 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렀을 때 베드로는 발을 내어놓기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셨고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곧 마음을 바꾸어서 "주여 내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하시고는 갑자기 "너희가 깨끗하나" 하시면서, 제자들을 둘러 보셨습니다. 그러시고는 "다는 아니니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더러운 것은 발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었습니다. :11에 보면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팔게 될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유다에게 "회개하라" 하시던지, 유다의 발만 씻기시면 되지 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의 발을 씻기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가룟 유다를 보호하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유다야, 네게 마귀가 들어가고 있어, 너 나를 팔려고 하지, 내가 다 안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가룟 유다의 마음을 모르도록, 회개하고 돌아오면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단지 가룟 유다만은 알아 듣도록 여러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대야에 물을 떠서 모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식사를 하시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찬이라 부릅니다. 왜 이 식사를 성찬이라 하느냐 하면 이 식사시간 때는 다른 때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 떡은 내 몸이니…"(마 26:27) 하셨고, 포도주를 주시면서는 "이 잔은 내 피니…"(마 26:28) 하셨기 때문입니다. 곧 엄청난 내용으로 떡과 잔에 축복하셨던 것입니다.
고전 10:16-17에 이 축복된 떡을 먹고 축복된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축복하는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예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예함이 아니냐..." 곧 이 축복된 잔과 축복된 떡을 받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이것이 성찬의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성찬에 또 한가지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찬을 받는 사람들도 서로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고전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예함이라"
성찬을 받는 자는 그 축복된 떡 때문에 예수님과 한 몸이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두 한 떡에서 떼어 먹었기 때문에, 성도들도 모두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잘난 것도 모두가 잘난 것이요, 허물도 모두의 허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죄를 저지르지만, 그것은 다른 제자들의 죄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발도 안드레도 발도 씻으셔야 했고, 베드로가 발을 내어 놓지 않으실 때,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도 함께 책임져야 할 가룟 유다의 죄를 씻겨 주심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물론 당시 제자들은 이 의미를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7절에서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교우의 죄를 볼 때, 자기만 죄 짓지 않았으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교우들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에 대하여는 책임감을 느끼고 사랑을 베풀 줄도 알면서도, 마음이 삐뚜러진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에는 인색한 것을 봅니다. 또 교회 밖의 사람들의 허물에 대하여는 관대하면서도 유난히 같은 교인의 허물과 죄에 대하여는 못 마땅해 하고, 비난하는 이들을 봅니다. 아직 성찬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 성찬을 받았다면 우리는 이제 남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우 중에 여러분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짜증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속회 같이 하기도 싫고, 선교회 같이 하기도 싫고 봉사 같이 하기도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싫으십니까? 그러면 지금 잘 둘러 보시고 성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찬을 받고나면 그 사람의 허물이 여러분의 허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제까지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으시겠습니까? 사랑할 사람, 좋은 사람과만 성찬을 받겠다면 그것이 성찬이 되겠습니까? 성찬을 통하여 허물 많은 그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생각만 하지 말고, 주님께서 허물많은 나와 하나가 되어 주셨다는 은혜를 먼저 아셔야 합니다. 은혜를 아는 자가 은혜를 베풀게 됩니다.
미국의 한 성도가 고아원에 찾아와 입양신청을 하면서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을 아이가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 내외는 매우 십하게 등이 굽은 열 살짜리 여자아이를 입양했습니다. 그 아이 이름은 마시 굿페이스(Merch Goodfaith)였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아이오와 주 고아원 감사실장이 한 고아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고아원은 가정과 같은 곳으로 깨끗하고, 음식도 훌륭하며 특히 그곳 원장은 사랑이 넘쳐 흐르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다. 이곳에 수용된 어린이는 모두 잘 보살펴지고 있으며, 원장은 넘치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 그들이 저녁식사 후에 피아노 앞에 모여 섰을 때 나는 다른 고아원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분위기를 느꼈다. 나는 결코 그 원장의 눈과 같은 아름다운 눈을 본 적이 없다. 나는 고이원을 나오면서 원장의 얼굴이 보기 흉하고 허리가 굽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 버렸다. 그 원장의 이름은 머시 굿페이스이다."
성경 안에는 서로 다른 사람이 한 몸이 되는 원리를 두 경우에 적용하였습니다.
하나는 부부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드시고도, 하나님 스스로 그 창조물이 "좋지 않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 피조물이 혼자였다는 것입니다.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그러시고 하와를 만드신 후에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창 2:24) 하셨습니다. 부부가 싸우지 않고, 서로 성격 맞추어 사는 것만도 이렇게 힘든데, 한 몸이 되라니 너무 심한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 자신이 하나 되신 분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가 하나가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자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되는 속성을 부여하여 창조하셨던 것입니다. 부부는 자신들이 사실은 한 몸이라는 것을 알 때 가장 행복합니다. 이 말은 아내는 남편의 허물이 곧 자기 허물로, 남편은 아내의 잘못을 곧 자기 잘못으로 받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몸되는 원리가 적용되는 또 하나가 교회입니다. 곧 성찬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인 것입니다. 이 말은 성도들은 서로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관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분명히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 하였습니다. 이 말은 나의 죄를 사하여 달라는 기도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죄도 자기 죄로 여기고 회개하며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죄는 김집사가, 박권사가 지었지만, 그가 회개하지 못하면 나라도 회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성찬을 통하여 주님과 하나되는 것은 감사한 일이지만, 성도들과도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은 부담스럽게 여기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토록 남의 허물에 대하여 자신이 책임을 지는 것이 싫습니까? 그러나 우리도 언제가 다른 사람의 사랑의 신세를 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허물이 덮여지고, 죄가 가리워지고 온 성도들이 재판관이 아니라 죄를 함께 책임져 주는 교회" 이처럼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성찬의 은혜를 깨닫기 전에는 성찬을 받으면서도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없이 다른 성도들에게 비판적이었습니다. 싫은 사람은 싫은 사람이고 나쁜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아니라도 속으로는 사람에 대하여 매우 엄격하였습니다. 교회 현실에 대하여도 나라에 대하여도 매우 비판적이었습니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일과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찬의 은혜에 눈이 뜨인 후, 그것이 바뀌었습니다. 특히 성찬 떡을 먹을 때마다 저는 무너집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갈 제자들에게 당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떡이란 먹으면 몸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찬을 받은 제자들과 예수님은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주를 배반하고 도망갈 그 제자들과 한 몸이 되시려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셨을까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히 7:25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를 책임지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느날 성찬을 받으면서 참회의 기도를 하는데, 내 마음에 도무지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나는 깨닫기는 했지만, 그들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성찬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때, 주님의 성찬 떡을 받아 먹으면서 나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주님께는 얼마나 큰 고통이 될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저는 울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내가 주님과 한 몸이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날 성찬식 후, 저는 문제가 많은 사람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전에는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렇구나" 하고 주님께 나아가 회개하게 됩니다. 저는 허물 많은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허물 많지만 교회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성찬의 은혜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성찬은 정말 놀라운 은혜의 시간입니다. 주님과 우리도 그렇지만, 성찬을 함께 받는 우리 모두가 하나되는 시간입니다. 성도들이 허물도 같이 나누고 서로의 죄도 함께 회개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그러나 성찬을 받았다고 저절로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찬의 교훈에 순종할 때 진정한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과연 이런 교회가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노아는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홍수 심판 때, 하나님께서 택한 자들을 구원할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고 산 위에 배를 건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려 137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배입니다. 노아는 이 배를 100년이 넘게 지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멀쩡한 대낮에 산 위에 그 엄청난 배를 짓는 노아를 보고 사람들은 조롱했을지 모릅니다. 불가능하다고 했을 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순종하여 방주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방주를 완성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렇게 교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고비는 계속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