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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중심인 달 10월, 성지순례지는 천주교 4대교난중 병인교난과 인연이 있는 성지인 청양 다락골 성지다. 다락을 한문으로 풀어 적으면 다음과 같다. 樓(루)가 된다. 높다는 표현이다. 다락골은 청양의 시내가 내려다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위치한다. 그리고 교난의 난세를 피하려고 수많은 천주학쟁이들은 높은 산중에 숨어 들어었다. 그러나 청양다락골 성지는 죽어 들어와 들꽃이 피듯 신앙의 소중함이 하느님의 거룩하고 자비로우심으로 죽음은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꽃을 피운 곳이다. 성지참례와 성지 주변 하느님의 반영 고스란히 깃든, 자연을 걸어서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는 작은자들, 작은 몫만으로 이 세상을 관조하며 가난하고 겸손한 행실외연을 넓혀 나가려 남행의 길로 향 하였다.
어느달 보다 참가 신청과 관련하여 부침이 심했던 10월이었다. 당혹스러웠다. 하루 앞두고 날라오는 참석할 수 없다는 연락은 준비하는 진행자와 총무 역활자에게는 가혹한 일이다. 이미 차량은 대형차량으로 주문이 끝난 상태인데.... 어찌하란 말인가! 총무께서 당혹해 하시며 여러차례 연락을 주셨다. 듣는 순간 이외의 미참석 숫자에 한순간 멍했다. 그리고 난 다음과 같은 말로서 위로하였다. 우리 표정관리 잘하며 다녀오죠. 이것도 또한 사람사는 구석의 일이 아닌가! 벼란간 생긴 일로 어쩔 수 없는 결심이기에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 하며 내일 출행을 생각하며 잠을 청했다. 그리고 5시10분 기상, 속전으로 모든 것을 챙긴 후 길을 나섰다. 새벽 공기가 차다. 그래도 가는 길에 아직도 많은 형제, 자매님들과 함께 할 수 있으니 기분 좋은 일이다. 모여 서로 인사를 챙긴 후 청양을 향해 떠났다. 신중하시며 과묵하신 기사님이 오늘 우리들의 동선 도우미로 오셨다. 박수로 환영해 모신 후 간략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드렸다.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 오늘 저희의 아름다운 공동체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은종과 평화를 내려 주옵소서! 여긴 모인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모으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간절히 기도 드리나이다. 하고성지와 관련된 설명을 마치고 출발하여 예정시간보다 30분 늦은 시간에 청양 다락골 성지에 도착 하였다.
차에서 내리니 수녀님께서 반갑게 맞아 주시며 신속하게 성지관련된 자료와 미사참례에 대하여 설명해 주셨다. 그리고 메일편에 우리들 방문 소식을 전하며 후미에 수녀님 사랑합니다. 라고 적었다 했더니 수녀님께서 환하게 웃으시며 꼭 잃어 보시겠다 하시어 모두를 웃게 만드셨다. 소나무 그늘에 모였다. 기념촬영을 갖기 위해서다. 소나무를 한문으로 松이라 적는다. 나무중에 귀한 나무가 바로 소나무다. 우리민족과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 온 삶의 역사가 깃든 나무다.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고 소나무 가지 땔감으로 짓은 밥을 소나무 상에 차려 소나무 그릇과 수저로 먹었으며 관솔로 등불을 삼고 이 세상을 하직할 때는 소나무로 짠 영면의 집에 들어 집 뒤 소나무 아래 양지바른 곳에 영원히 잠이 들었다. 그래 그랬는지 다른 나무들과 달리 귀한 대접을 하였다. 여인들이 사용하던 농들도 보통 소나무 뿌리로 만들었는데 소나무 향이 계속 묻어 나는 농과 함께 기거하며 변하지 않고 청초한 품위를 앓지 말라는 교육적 뜻도 있다 한다. 그리고 청양 다락골 성지에는 무명순교자들이 많은데 그 분들이 계신 곳에 아름다운 소나무들이 서 있다. 이름도 신분도 모르는 무명순교자들은 들꽃 같은 분들이시다. 화초는 사람들이 키우지만 들꽃은 하느님이 키워 주신다. 자연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반영 그 자체이다. 청양 다락골 무명 순교자들의 지킴이가 소나무라는 생각이 문드 들어 우선 순례단원들을 소나무 밑으로 모신 것이다. 그리고 여러장의 사진을 남긴 후 개인적인 묵상을 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입당하였다.
성전으로 드는 작은 로비에 " 기뻐하여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복음 말씀이 우릴 반긴다. 그리고 그 옆으로 성모님께서 어서 오너라 하신다. 마음을 두르려 깨운 후 작은 목소리로 안녕하셨어요? 성모님하며 꾸벅 인사를 드린 후 성전 안으로 들었다.
모처럼 함께해 주신 김정융 안드레아 형제님과 최옥련 말가릿다 마리아 자매님께서 묵상으로 신심을 불러 모으고 계신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오랜 시간을 내어 중국 종교활동과 여행을 끝내고 돌아 오신 세레나 자매님도 지금 기도중...
아네스 자매님도 기도중...
묵언과 묵상을 통해 사려의 시간을 보내신 순례단원들은 무명순교자의 1 - 3 묘역을 참례하기 위하여 성전을 나섰다.
이곳에 묻히신 무명순교자님들과 관련된 교난(敎亂)은 병인교난이다.
1863년 12월 13일, 창덕궁에서 어린 고종(高宗)이 제26대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 때 나이 12세였다. 당시 표면상 정치는 조 대비가 하는 것 같았으나 모든 실권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손아귀에 있었다.
고종이 즉위한지 한 달도 못되어 안동 김씨의 세력은 깨끗이 밀려났고 그 대신 풍양 조씨 일파가 대궐 안에서 활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들의 득세는 적지 않게 천주교의 앞날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후 안동 김씨 세력 하에서의 14년 간 천주교회는 비교적 큰 박해 없이, 어떤 면에서는 나라의 묵시적 비호를 받아가며 전교 활동을 벌여 크게 발전하였다. 고종이 즉위하던 1863년 12월, 조선에는 장 주교 이하 8명의 성직자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교우 수는 2만 3천명에 이르렀다.
1864년 8월, 장 주교의(당시 국내에 들어 와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당시 상황을 적은 보고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금년 1월에 철종이 돌아가자 국권이 조 대비에게 돌아가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12세 된 이를 맞이하여 왕위에 올리니 세도가 흥선군에게 넘어 갔습니다. 이 사람은 성교를 해롭게 할 마음이 없고 8명의 성직자가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와 관계 있는 외인 고관에게 주교 이야기도 한 적이 있습니다. 대원군은 그에게 “통상을 요구해 오는 러시아 사람을 물리쳐 주면 성교에 대해 자유를 주겠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회답을 보냈는데 이 말이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임금의 유모는 교우로서 대궐에 머물러 있지만 금년에도 성사를 받았습니다. 임금의 모친 부대부인은 성교를 알아 문답을 좀 배우기도 하고 경문(기도문)을 날마다 외우며 아들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감사 미사까지 나에게 드리기를 청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게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정권을 잡은 조 대비는 본디 성교를 해롭게 하던 집안의 부인으로서 이제까지의 대신이던 김씨들을 모두 물리쳤는데 김씨들은 성교를 해함이 별로 없었으나 지금 대신들은 능히 해롭게 할 사람들입니다. (중략) 지금 새로이 네 가지 책을 모두 목판에 새겼고 명년에도 세 가지 책을 더 새길 예정입니다. 그 책은 <요리문답> 1권, <공과>(기도서), 한 질(4권), <예규>(예절지침서) 2권, <신명초행>(神明初行) 2권, <회죄직지>(悔罪直指) 1권, <영세대의>(領洗大意) 1권, <성찰기략>(省察記略) 1권, <주교요지>(主敎要旨) 1권 등 모두 13권입니다. 교우들을 해마다 겨우 한 번씩 만나게 되므로 다 가르칠 수 없어서 여러 가지 책으로 교리를 알게 하고 기도를 드리도록 권유하고 힘쓰고 있으나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 편지가 발송된 후 얼마 안 있어 박해는시작되기 시작한다.러시아의 통상요구로 긴장감이 감돌던 일도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으나 시중에는 대원군을 괴롭히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운현궁에 천주학쟁이들이 드나들면서 대원군이 그들과 협력하여 국가를 농단하려 한다는 괴소문이었다. 끝내 대원군을 밀었던 조대비마저 비난하고 나서자 대원군은 박해를 도모하기 시작한다. 병인교난의 배경에 그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 여파는 내포중심이었던 홍주에까지 미치게 된다. 당시 참형을 당했던 사람들을 몰래 빼내어 경주최씨 집성촌이며 최양업신부님의 생가가 있던 청양다락골로 옮겨 매장하여 지금의 다락골 줄무덤이 생긴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시신을 은이에서 미리내까지 옮기듯 그런 과정을 거친 곳이 바로 청양다락골 줄무덤 성지다. 당시 교난을 피해 산골로 숨어든 천주학쟁이들은 옹기쟁이, 숯가마쟁이, 새우젖장사로 변신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생계를 유지하고 각 고을을 돌면서 정보도 얻을 수 있어 그들에게는 알맞는 직업이였다.그런 의미를 되새겨 14처 조형물을 항아리로 만들어 설치한 곳이 바로 다락골 십사처다. 십자가의 길을 끝낸 후 일행은 소나무 군락지 밑에 있는 제1 줄무덤을 찾아 참례를 시작하였다.
병인교난이 닥차기 바로 전 네 신부의 입국과 푸르티에 신 신부의 조선교회실정 보고가 있었는데 당시의 국내사정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장 주교의 요청으로 1865년 5월말 네 명의 프랑스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이들은 도리 金(Dorie) 신부, 브르트니에르 白(Bretenieres) 신부, 위앵 閔(Huin) 신부, 볼리외 徐(Beaulieu) 신부 등이다. 이들은 內浦를 통해 입국, 따로따로 서울로 올라가 장 주교를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이 때에 배론 신학교를 맡아보던 푸르티에 신 신부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의 부탁으로 조선의 사정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이 나라에는 아직 성당이 없어서 조그마한 움막집 속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널판자 하나를 벽에 붙여 겨우 제대를 꾸미고 십자가를 흙벽에 모시니 방은 비좁고 천장은 낮아 머리가 닿을 지경입니다. 남녀 교우가 서로 나뉘어 앉으나 어깨를 비비고 있어야 할 정도로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두터운 신앙심과 양순한 마음씨는 본받을 만 합니다. 이곳 교우들도 머지않아 크고 좋은 성당에서 미사 참례를 하고 더욱 믿음을 굳게 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도 장차 이 상복을 벗을 날이 올 것이고 주막집에서 주는 상한 고기와 시래기 국을 면할 날이 올 것으로 굳게 믿습니다.
병인년 교난을 두 달쯤 앞두고 보낸 이 편지에서 당시의 교회 형편과 민심의 동향을 알 수 있다. 그 해 말, 평안․황해․경상도 지방에서 뜻밖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 병인 박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천주교와 관련된 유언비어가 나돌자 대원군은 위기에 몰리자 병인교난을 일으킨 것이다. 병인교난 때 죽어나간 천주교인들의 숫자는 일만명이 넘었다. 당시 상황을 머리속에 그리며 십사처 언덕을 올라 제1 줄무덤에 섰다. 가을빛이 따스하고 바람도 솔솔했다. 청양 다락골이 집성촌이었던 경주 최씨 문중 묘역과 함께 있는 무명순교자 묘역, 앞서 찾아 나섰던 순례객들이 떠난 터라 적막했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이름모를 들꽃들이 순례자들을 반기고 있었다.
자리를 펴고 그 위에 조촐한 상을 차렸다. 밤, 신앙의 뿌리를 지키겠다는 약속의 표시로 올렸고, 대추, 끝없는 선교로 수많은 사람들을 하느님의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로 올렸다. 그리고 감, 하느님과 그 백성들과의 접목의 의미로그리고 포와 헌주는 무명순교자님들을 위로하려 마음으로 준비하고 참례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 순례단의 마음이다. 늘 그렇듯이 집사는 세례자 요한 형제가 맡고 제주는 안드레아 형제님이 맡아 주셨다.
그리고 모두 엎드려 절을 드리며 존경심과 함께 위로의 마음을 전하였다. 누구인지도 모를 이들은 들꽃같은 존재들이시다. 시복도 성인의 반열도 불가능하다. 이름도 출신도 모르기에.. 단지 들꽃은 하느님께서 직접 키워 주시는 것처럼, 모든 하느님의 반영물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 받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할 적마다 가슴조여 오고 아려 온다. 그리고 아프다.
모두 일어서서 성가를 부르고 위로와 존경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기도를 드렸다. 기도문을 하나 하나 글을 읽어내려 갈 적에는 바람의 미동도 없었다. 그 순간에는 새들의 노랫소리도 멈췄다. 단지 순례자들의 기도문 소리와 숨죽여 호홉하며 참례를 하는 순례자들의 잔기침 소리만 조금 들렸을 뿐이다. 그렇게 제1, 2 묘역 참례를 끝낸 우린 마지막 참례장소인 제3 묘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그 앞에 섰다.
다들 조심스럽다. 다락방처럼 느껴지는 무명순교자 제3묘역, 송림 언덕밑으로 펼쳐진 모습이 꼭 하늘의 음악당 같았다. 나는 노천극장이구나 하다 말을 바꿨다. 지천극장(地天),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극장이란 뜻이다. 비탈진 곳이라 상차림은 맨 아래단으로 정했다. 혹시 쓸려 내려가면 큰일이다.
뒤에서 보니 다 아름답다. 하늘이 그렇고 무명순교자들 모습이 그렇고 그들을 기억하며 순례하고 있는 형제 자매님들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조촐함으로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순교의 길로 떠나신 무명순교자님들을 기억하고 존경심을 담아 성가를 부르고 기도문을 외우고 절을 하는 참례를 이어 나갔다. 모든 절차를 마친 후, 우리들은 모여 음복 나눔의 시간을 갖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름다운 공동체를 위하여 가난하고 겸손된 마음으로 이 모든 이들이 한마음으로 순례자의 길을 멈추지 않고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하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모든 이들을 무명순교자 옆으로 올라 가 앉도록 하였다.
그렇게 앉으니 여간 보기 좋은 것이 아니다. 무명순교자 다락골 산상 음악회를 연 것이다. 하모니카 합주가 시작되었다. 연주자는 데레사 총무님과 하모니카 도반으로서 하모니카를 사랑하시는 열정적 연주자들이다. 선곡은 다 성가였다.
천상에서 내려 보내는 소리만 듣고 계셨을 당신들에게 우리들의 소리를 들려 드리고 싶어 이런 음악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하모니카 소리처럼 우리들의 참배가 사랑과 평화와 은총으로 일체되어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는 진정한 평화로 거둡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옵소서 하는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음율도, 가사도 듣는 이들의 마음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구성하는 인자가 되었다. 아름다운 소리는 허공을 돌아 다락골 전체를 휘감으며 송림 가지마다 엉켜 자리를 잡았다. 순교에는 독특한 향이 풍긴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란 향기다. 그 향을 맡으면서 아주 단순하고 명료한 기도를 떠 올렸다. " 너희들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다들 박수로 성가 합주를 오래토록 기억하겠다는 약속을 표시한 후 이어서 연주자들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내고 앵콜을 청했다. 표정이 모두 밝았다. 마음도 들여다 보니 맑았다. 모든 것이 기븜의 순간이었다.
다시 앵콜을 청해 듣고
이 모든 것을 평화로 모으기 위하여 사랑해야 한다는 표시로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렸다. 송림의 그림자도 하트 모양으로 우리를 도왔다. 다들 내려서서 음복 나눔을 하였다.
오늘따라 청주 맛이 기가막힌다. 밝은 마음으로 종이잔을 들어 마셨다. 그리고 힁대로 서서 고별인사를 드린 후 참례의식을 전부 끝냈다. 산자락을 돌며 내려서자 추색이 완연하게 보였다. 동내 아낙들이 들고 온 농산물을 사서 들고 차에 오른 후 다음 일정을 향해 차를 이용하여 떠나 오서산 휴양림에 도착하였다.
계곡입구에 앉아 점심을 챙겼다. 여러사람 몫으로 점심을 준비해 주시는 아네스 자매님과 데레사 자매님 항상 고마워하며 성찬을 나눈다. 참 성가신 일인데.... 점심 나눔한 후 두 팀으로 갈랐다. 1-2시간 휴양림 인도를 따라 걷는 팀과 오서산 억새를 보기위하여 등반하는 팀과 나눴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휴양림쪽 코스는 짦은대신 가파르지만 많은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때 다녀올 수 있는 코스다. 잔돌이 많아 미끄러운 곳이다.
2시간 예정으로 오르기 시작하였다. 월정사 위 언덕, 본격적으로 오서산 정상으로 달라붙는 지점이다. 가을빛이 고즈넉했다. 가만히 샷다를 눌러 보았다. 화인더 안으로 가을빛이 고요하게 퍼지고 있었다. 낮고 길게.....
그리고 다시 가을빛 앞에 세자매를 불러 세웠다. 산벚나무 아래라 근사했다. 이른 봄날 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얼마나 근사한지 모른다. 화려함의 극치가 바로 그 때다. 그러나 가을이 오면 이들이 제일 먼저 낙엽과 단풍이 되어 흙으로 되돌아 간다. 화려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쏱아 붓었는지.. 늦은 가을까지 버티지 못하고 일찍 동면으로 들어 가는 것이다. 다시 화려한 꽃으로 돌아 오기 위하여 긴 휴식을 하는 모양이다. 화인더 속으로 보이는 가을 정경이 피사체들과 어울려 가을의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어렵사리 올라 선 철계단 끝, 호서지방 특유의 가을풍경이 가득했다. 산자락 사이사이로 숨어 있는 황금물결이 마음을 풍요롭게 이끈다. 그리고 억새가 곱게 피었다. 억새 사잇길을 지나 드디어 정상에 섰다. 흰빛 표지석이 석양빛에 자신의 이름감춰 이름 없는 백비가 되어 버렸다. 점점 석양빛으로 다가 가고 있는 가을빛 아래 모두 모였다. 그리고 오르며 느껴야 했던 힘든 일들을 전부 가을 하늘위로 날려 보냈다. 하늘이 참 맑다.
은빛 억새밭으로 몰려 가 다들 환호하며 가을을 즐겼다. 서해로부터 몰려 오는 바닷바람도 미풍이다. 사그락 거리는 억새잎 부딪치는 소리가 근사하고 정겨웠다.
데레사 총무님이 요즈음 사진을 잘 챙겨 주신다. 맨날 순례자들 사진만 찍느냐 자신 사진은 없다는 생각에서 찍는단다. 순간포착을 얼마나 잘 하셨는지.... 근사한 사진을 만들어 주셨다. 감사합니다.~~ ^*^. 꾸벅
저 멀리 서해바다에 해가 걸어 갈 길이 만들어 지고 있었다. 해는 자신이 떠날 방향으로 꼬리를 남기며 부지런히 걷기 때문에 낙조 길을 예측 할 수 있다. 9월 안면도 해안에서 보았던 황홀한 일몰이 생각났다. 그러나 오늘은 볼 수 없다. 산을 내려서서 바로 서울로 귀경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쪽 하산길을 바로 어두워진다. 빛이 빨리 사라지기 때문이다. 서둘러 6시경 휴양림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서울로 출발 다시 반포 식당에 모여 하루를 결산 한 후 걸음여행 끝인 귀가를 서둘렀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11월, 성지와 걸음여행은 전북 고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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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락골 성지의 성당은 울창한 산속에 자리잡은 아름다운 성지였습니다.
"기뻐하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가슴에 다시한번 세기며 감사와 소원을 빌었습니다.
십사처를 하며 줄무덤으로 향하는 길에는 소나무 향기가 저희들을 반겨주며....
마지막 3줄무덤에서의 하모니카 합주는 무명순교님들의 영혼을 길이며
걸음여행 형제 자매님들을 더욱 행복하게~^~*
숲속에서의 점심의 만찬은 친교와 사랑을 나누는 시간되었읍니다. 늘 수고와 사랑을 주시는 대장님, 총무님께 감사드리며.
함께한 형제 자매님들께 사랑을 나눔니다.
평화를 빕니다.
함께해 주셔서 행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맘마도 무척 맛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