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구(世龜)의 장자 감(堪)은 문과에 급제하고 의정부 사인이다. 전배위 창녕조씨는 동돈녕 윤무(允武)의 딸로 조윤무는 군수 계하(繼夏)의 아들이며 부사인 구서(九敘)의 손자다. 조구서(曺九敘)는 창녕조씨 부제학공파로 부제학 조상치(曺尙治)의 손자이며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5대조인 유홍(柳洪)은 조구서의 종고모부가 되고, 계하(繼夏)의 동생 계상(繼商)은 이 시기 창녕조씨 문중의 대표적인 인물로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후에 찬성에 까지 올랐다. 계상의 후손에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주로 소론계열의 명문가들과 통혼을 하며 좋은 문벌을 이루었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은 조계상의 증손서이다.
조계상(曺繼商)의 부인은 덕수이씨인데 사간 의무(宜茂)의 딸이고 이의무는 찬성 윤회(尹淮)의 외손녀다. 윤회는 무송윤씨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구슬을 삼킨 거위에 얽힌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조계상의 처남은 맏이 절도사 권(菤)으로 부제학 최만리(崔萬里)의 손서이고 둘째는 영의정 기(芑)로 영의정 윤필상(尹弼商)의 외손서이며 셋째는 좌의정 행(荇)이다. 대제학을 지내고 판서인 이안눌(李安訥)은 이기의 증손이고 역시 대제학을 지내고 판서인 이식(李植)은 이행의 현손이다. 이들 가문이 덕수이씨에서 최고의 문벌을 이루었다.
그리고 창녕조씨의 보계를 보면 경북 일원에 후손이 거주하는 지산 조호익(芝山 曺好益)은 상치(尙治)의 동생인 부사 조상명(曺尙明)의 후손이며 남명 조식(南溟 曺植)의 가문은 상치의 고조부 당시에 이들과 분문하였다.
조계하의 부인은 전주이씨로 모양군 직(牟陽君 稙)의 딸인데 모양군은 태종왕자 경녕군(敬寧君)의 아들이며 앞에서 설명 한 바 있는 지봉 이수광(芝峰 李晬光)은 모양군의 후손이다.
감(堪)의 후배위는 교하노씨이다. 첨정 첨(僉)의 사위인데 첨(僉)은 영의정 노사신의 증손이다. 당시 낙봉공 집안에서는 노사신의 자손들과 혼인이 여러 번 있었는데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세린(世麟)의 아들 의(儀)가 노첨(盧僉)의 사위이니 감(堪)의 손위동서이고, 현감공(諱 軫)의 사위이며 감(堪)에게는 재종고모부가 되는 직장 노찬(盧燦)은 노사신의 손자이며 군수 노공석(盧公奭)의 아들이다. 노찬(盧燦)은 감(堪)의 부인에게는 재종조가 된다. 노첨(盧僉)의 조부는 찬성 공필(公弼)이고 아버지는 풍저창수 섭(燮)이다.
외조부는 부윤 한찬(韓纘)인데 한찬은 판돈녕 한치인(韓致仁)의 아들로 한치인은 좌의정 한확(韓確)의 아들이며 후손은 조선 후기에 청주한씨 가문에서 가장 흥성했던 가문이다. 영의정을 지낸 한익모(韓翼謨) 한용구(韓用龜), 대제학을 지낸 한 장석(韓章錫) 그리고 친일기업인으로 유명한 한상룡(韓相龍)은 모두 한치인의 후손이다.
노첨(盧僉)은 섭의 아들로서 당숙인 정랑 종(種)의 아들로 출계를 했는데 종(種)은 판서 임사홍(任士洪)의 사위이다. 그러니 임사홍의 외손자인 셈이다. 임사홍의 아버지 임원준(任元濬)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찬성에 올랐으며, 임사홍은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에 얽힌 이야기를 연산군에게 고자질하여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 중종반정으로 실각하고 처형되었다.
노사신의 졸기 중 일부이다.
흉금(胸襟)이 소탈하여 겉치레를 일삼지 않고 규경(畦逕)을 생략하였으며 치산(治産)을 경영하지 않았다. 뜻이 활달하여 서사(書史)를 박람하여 관통하지 못한 것이 없었으며, 불경(佛經)·도서(道書)까지도 역시 모두 보았다. 다만 세조가 일찍이 용문사(龍門寺)에 거둥하여 손으로 구름 끝을 기리키며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백의(白衣)를 입은 관음(觀音)이 현상(現象)하였다.’ 하니, 여러 신하들은 쳐다보기만 하고 능히 대답을 못하는데, 사신만이 크게 ‘관음이 저기 있다.’고 외치니, 사람들이 그 아첨을 미워하였다. 성종조에 정승이 되었으나 건명(建明)한 바는 없었고, 금상이 즉위한 처음에 수상(首相)이 되었는데, 왕이 대간(臺諫)에게 노여움을 가져 잡아다가 국문하려 하니, 사신이 아뢰기를 ‘신은 희하(喜賀)하여 마지 않는다.’ 하였고, 태학생(太學生)이 부처에 대해서 간(諫)하자 귀양보내려고 하니, 사신이 또한 찬성했으므로, 사림(士林)들이 이를 갈았다. 그러나 그 성품이 남을 기해(忮害)하는 일은 없었다.
임사홍의 아들 셋은 모두가 당대의 권력자들과 혼인을 맺었다. 맏아들 광재(光載)는 현숙공주(顯淑公主)에게 장가를 들어 예종의 부마가 되고 풍천위(豊川尉)에 봉해졌으며, 다음 직제학인 희재(熙載)는 판의금 구수영(具壽永)의 사위이니 구수영은 영의정 구치관(具致寬)의 조카이고 세종왕자인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사위이다. 영응대군은 효령대군의 처남인 해주정씨 참판 정충경(鄭忠敬)의 사위이며 기대승(奇大升)의 증조부인 감찰 기축(奇軸)과는 동서이다. 구수영의 아들들은 첫째가 현감 숭경(崇璟)으로 참판 윤보(尹甫)의 사위이며 찬성 윤임(尹任)의 고모부가 된다. 둘째는 현감 희경(希璟)으로 판서 신수겸(愼守謙)의 사위이고 영의정 신승선(愼承善)의 손서이며 희경의 후손이 능성구씨 가문에서 가장 현달하였다. 다음 승경(承璟)은 영의정 김안로(金安老)와 사돈이 되었으며, 문경(文璟)은 연산군의 사위가 되어 능양위(綾陽尉)에 봉해졌다. 그리고 신경(信璟)은 부사로 아들 한(瀚)이 중종의 부마가 되어 능창위(綾昌尉)에 봉해졌다. 그리고 구치관의 장손인 구장손(具長孫)은 노사신의 사위이다. 임희재(任熙載)는 점필재 문하에서 공부하였다는 이유로 갑자사화 당시 화를 입었다.
임사홍의 셋째 아들 숭재(崇載)는 휘숙옹주(徽淑翁主)에게 장가를 들어 성종의 부마가 되었으며 풍원위(豊原尉)에 봉해졌다. 임숭재의 졸기를 본다.
숭재는 임사홍(任士洪)의 아들로서 성종(成宗)의 딸 혜신 옹주(惠愼翁主)에게 장가들었는데, 간흉하고 교활하기가 그 아비보다 심하여, 곡진히 위를 섬기어 사랑을 받으려고 왕의 행동을 엿보아 살펴서 상(上)이 마음 먹고 있는 것을 다 알았다. 그리하여 여러번 미녀(美女)를 바치니, 왕이 이로부터 매우 총애(寵愛)하고 신임하여, 숭재의 집 사면에 있는 인가 40여 채를 헐어내고 담을 쌓아 창덕궁(昌德宮)과 맞닿게 하였다. 그리고 매양 거기에 가서 마시고 노래하면서 밤을 세웠는데, 숭재는 그 누이동생인 문성정 이상(文城正李湘)의 처를 시침(侍寢)하게 하였으며, 왕은 옹주까지 아울러 간통하였다. 하루는 왕이 숭재의 집 작은 정자에 앉아 이르기를, ‘이 정자가 매우 맑고 깨끗하도다.’하니, 숭재가 꿇어앉아서 아뢰기를, ‘신이 이 정자를 열어 놓고 봉연(鳳輦)을 기다린 지 오래이옵니다.’ 하였다. 숭재는 노래와 춤이 능하여 춤출 때에 혹 몸을 움츠리면 아이들처럼 온 몸의 지절(肢節)이 재롱을 떨어 기변(機變)의 교(巧)와 같았으며, 더욱 처용무(處容舞)에 능하고 또 활쏘기에 말타기도 약간 알았으므로, 왕이 기뻐하여 혹 노래도 하고 혹 춤도 추고 혹 활도 쏘고 혹 말도 달리는데, 날마다 숭재와 짝이 되었다. 숭재도 스스로 은총만을 믿고 그 아비와 더불어 날마다 흉모를 꾸며, 평일에 혐의 있는 자는 보복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비록 비천한 무리라도 반드시 천거하여 쓰게 하였으므로, 조정을 흐리게 하고 왕의 악을 점점 더 자라게 하는 데에 못하는 일이 없었다. 왕이 그가 병들어 괴로워한다는 말을 듣고, 중사(中使)를 보내서 할 말이 무엇인가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죽어도 여한이 없으나, 다만 미인을 바치지 못한 것이 유한입니다.’ 하였다. 그가 죽자 왕은 몹시 슬퍼하여, 승지 윤순(尹珣)을 보내 조문하게 하고 부의를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빈소를 차린 후에 왕은 그 처를 간통한 일이 빌미가 될까 염려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관(棺)을 열고 무쇠 조각으로 시체의 입에 물려 진압(鎭壓)시켰다.
노첨(盧僉)은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판서 윤금손(尹金孫)의 사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