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GUCCI의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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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명품 중에서 우리나라 젊은이에게 가장 인지도가 높은 명품 브랜드는? 바로 구찌! 이미 2년 전, 한 여론조사기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아직까지 그 명성을 따라올 브랜드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구찌 제품 중에서도 "구찌백"은 젊은 여성들이 가장 먼저 관심을 갖게 되는 제품이라고. 구찌가 대중적으로 깊이 파고든 것은 90년대 중반, 젊은 미국 디자이너 톰 포드를 영입하면서부터. 톰 포드가 선보인 구찌 컬렉션은 전통을 고수하는 대신 가장 현대적인 섹슈얼리티를 추구, 패션계는 이에 열광했다. 가슴을 깊게 드러낸 남성풍 슈트, 광택을 내는 트렌치코트 등은 오랫동안 이어져온 패션의 유산에 혁명을 일으킨 것. 그 바람은 살랑살랑 우리나라에까지 시나브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여전히 미풍이 남아 구찌의 향기를 풍기고 있으니, 향기의 유효기간은 어느 정도일지.
Karl Lagerfeld로 인한 Chanel의 멋진 컴백처럼 Gucci 역시 Tom Ford로 인해 화려한 컴백이 가능했다. 1994년 Tom Ford가 creative director로 채택되기 이전의 구찌는 파산 위기에 처해 있었다. 가족간의 불화와 세금회피로 인한 가족들의 투옥 등이 그 원인. 게다가 1998년 3월, 마지막 구찌의 남자 상속작인 Maurizio Gucci가 이혼 전의 부인에게 살해되면서 그 스캔들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가족간의 치열한 투쟁은 구찌 상속권에 있어서도 늘 공존했고 매우 복잡한 상황으로 얽혀들어가기도 했다.
1913년, 구찌오 구찌가 피렌체에 고급피혁 제품점을 오픈했다. 더블 G 마크가 붙은 캔버스와 빨간색과 그린색 조화 워브라인등을 발표, 1960년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됐는데 거기에는 끈질긴 장인 정신과 일상을 넘어서는 획기적인 크리에이티브, 뛰어난 품질을 위한 노력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세가지는 명품이라면 지녀야할 필수 요소. 그리고 동시에"GUCCI"의 신화를 일으킨 원동력이기도 하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과 인내 끝에 구찌는 1953년 해외 매장의 성공적인 진입과 함께, 세계 유명 인사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명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오늘날 "GUCCI"의 이름 뒤에는 1백년 전통이라는 수식어와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찬사가 붙고 있다. 덧붙여 "GUCCI"는 정통성을 기반으로 한 클래식한 패션, 디자이너 브랜드의 일관성, 현대적 패션과의 조화를 통해 "GUCCI"만의 스타일을 완성, 그 명성을 더해가고 있다.
더블 G (Double G)
재키 백 (Jackey Bag)
비트 모카싱 (bit moccasin)
구찌 공화국의 르네상스에는 데 졸레, 톰 포드 쌍두마차의 콤비 플레이가 큰 위력을 발휘했다. 데 졸레의 경영전략과 톰 포드의 감각이 결합해 경영자와 아티스트간 절묘한 조화가 이뤄진 것. 두 사람은 "섹스어필" "부" "화려한 매혹"(glamour)이라는 세가지 모토를 구찌의 상품 제작에 적용, 도산 직전의 구찌를 1998년 10억달러, 2000년에는 14억 9,400만달러 매출이란 신화적인 기록을 달성한 것이다.데 졸레, 톰 포드 콤비가 구찌 가문의 분쟁과 경영 실패로 낭떠러지 끝에 섰던 구찌 브랜드를 부흥시킨 것보다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은 그동안 세계 패션업계의 체질변화를 주도해 왔다는 점. 그들은 패션업계에 새로운 비즈니스 개념을 도입한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한편, 구찌로서는 또 다른 위기도 있었다. 1999년 크리스찬 디오르, 지방시, 셀린 등 세계 최고급 브랜드 10여개를 가지고 있고 모에 샹동, 헤네시 등 고급 주류회사와 파리의 르봉마르셰 백화점을 거느린 세계 초대 패션그룹 루이뷔통이 구찌를 탐냈던 것. 구찌와 루이 뷔통위 피말리는 전쟁이 시작됐다. 루이 뷔통의 베르나르 아노 회장은 무주공산 상태인 구찌 지분을 비공개로 34.4%까지 확보, 경영권 인수를 시도했다. 그러나 데 졸레는 우리사주 2,000만주를 발행, 물타기를 시도해 이를 막았고 "이탈리아 명품 구찌가 프랑스 아노 손에 들어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대응했다. 이에 루이 뷔통이 우리사주 발행 무효 확인 소송을 내자 데 졸레는 프랑스의 유통재벌 피노 프랭탕 르누트(PPR)그룹에 도움을 청했다. 구찌는 신주 3,700만주를 발행해 PPR로부터 30억달러의 투자유치에 성공, PPR는 이브 생로랑 등을 거느린 미국의 패션기업 사노피사를 사들여 이를 구찌에 되팔았다. 결국 2년 동안 끌어오던 싸움은 지난해 루이 뷔통이 구찌 지분 858만주를 PPR그룹에 넘기면서 종결됐다. 구찌그룹코리아의 출범에 맞추어 지난 2월말 한국을 방문한 데 졸레 회장은, "지난해 한국시장이 세계적 불황 속에서도 큰 폭의 상승세를 기록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지난해 매출에서도 전년대비 44% 성장률을 기록해 일본과 비슷한 성장을 기록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운 아시아 지역에서도 구찌의 저력은 기죽지 않음을 보여준 셈. 바야흐로 구찌의 르네상스 시대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