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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도.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도 풍성했을 것이다. 이 '상상도'를 그린 사람은 운보 김기창 화백이었다.(1973년도에 '표준영정'으로 지정됨.) 6.25 당시 불의의 화재로 인해 임금의 초상화, 즉 어진이 3점(태조 이성계, 영조, 철종)밖에 남지 않아 세종대왕의 어진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는데...문제가 되는게 세종대왕의 초상화 얼굴을 김기창 화백의 얼굴과 유사하게 그렸다는 점. 참고 : (http://tvpot.daum.net/clip/ClipView.do?clipid=23345138&q=%EC%B9%9C%EC%9D%BC)
광화문 광장에 세워진 동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상상도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BUT 제작자인 홍익대 김기창 교수는 '표준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하셨다... 역시...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터라 뒤통수가 따끔따끔할 거 같다. 하지만 원래 왕이 있으면 무관이 그 앞을 지켜야 하니 왕에게 뒤통수를 보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원문은 天縱之聖(천종지성)인데 사실 이 말은 공자나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관용구이다. 딱히 세종에게만 쓰인 유니크한 표현은 아니지만 정인지는 물론 당시 신하들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중에서 "영묘조(英廟朝: 세종 시대)[세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에서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대 왕 치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가령 세조 시대는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서 따 '광묘조(光廟朝)'라고 불렀다.]는 우리 나라의 제일 으뜸가는 문명의 기회였기 때문에 도덕과 문장의 선비만 배출한 것이 아니라, 예악(禮樂)을 만들고 정비하는 시대라서 백공(百工)의 비상한 기능을 가진 자로 박연 같은 이들도 시대에 응하여 태어났으며 경쇠를 만드는 옥이나 율(律)을 만드는 기장이 역시 시대에 응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년) 1월 9일[ 이날 기록을 보면 원경하가 선조 때의 인재들(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등)을 열거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고 물었다. 영조의 물음에 대한 원경하의 대답.]
-생몰년-
음력 : 1397년 4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 : 1397년 5월 7일 ~ 1450년 3월 30일 (52세 340일)
출생 : 조선 한양 준수방 잠저
사망 : 조선 한양 영응대군저 동별궁
-재위기간-
음력 :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 :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31년 210일)
태종 이방원의 셋째 아들이자 조선의 제4대 임금. 언어학자. 정식 시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世宗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존경받는 인물을 뽑으라면 광개토호태왕, 이순신과 함께 들어가며 한글을 창제한[태국의 글자 또한 당시 왕이었던 람캄행이 만든것이다. 허나 완전히 새로운 글자를 창조한 세종대왕과는 달리 기존에 있던 크메르 문자를 개량한 것.] 휘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 아명은 막동(莫同)이었다고 한다. 막냇동생인 성녕대군 종은 한참 터울을 두고 태어났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중 막내였을 것이다. (아명 '막동이'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왕자 시절- 1408년에 충녕군으로, 1413년에 충녕대군으로 승격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이미 될성부른 떡잎을 보여, 한 번 잡은 책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선 양녕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 없게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은 제버릇 못고치고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며 세종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 선대 태종이 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한국 역사상 손꼽히는 명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한편 둘째인 효령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그러지는 못했던 듯하다. 참고로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에서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지만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잘 못하는데 세종은 잘 마신다는 것. 좀 더 자세히 보면 세종의 자기 PR 덕이기도 하다. 세자시절 양녕이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낸다거나, 양녕의 행태에 직언으로 간하는(물론 열받은 양녕이 따지자 데꿀멍) 장면 등이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즉 양녕 대군이 자신이 덕이 부족함을 깨닫고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했다는 것이 낭설인 것처럼, 세종은 원래는 왕위에 일절 관심이 없었고 학문에만 관심이 있었다는 것 또한 낭설로 충녕도 내심 왕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이는 그 자식에게도 이어져 훗날 세조가 되는 둘째 수양대군도 자신의 강건함을 일부러 세종과 당시 세자였던 형 문종앞에서 과시하기도 했다.
거기에 태종은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멸문하였으며, 문제는 정작 다음 보위를 이을 양녕은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바로 이 외가에서 자라 이들과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는 것. 태종이 숙청한 이들은 양녕에게 있어 외삼촌인데, 만약 이들이 양녕의 정치적인 기반으로 작용한다면 왕조의 운명은 알 수 없던 상황. 따라서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비교적 궁궐에서 지낸 햇수가 많고 외가와는 거리가 있던 충녕을 왕위에 올린 것이 태종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정작 양녕은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 마냥 내던졌다(...)]
덤으로 태종은 이후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하고,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킨다. 1,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당한 셈이다... 다만 태종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어머니와 누이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지만 장인 심온은 아들 문종대에 가서야 사면되는데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의한 것으로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여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세종의 업적- ●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이는 사실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의 개입에 의한 것) ●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의 4군 6진 개척. ● 정책 연구 기관 집현전 설치. ● 훈민정음 창제. ● 박연이 음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악기를 만듦. 정간보 발명. ● '속윤전', '등록' 등의 법전 편찬 및 정리. ●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와 '측우기(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 등의 발명. ● 유교사상과 불교사상의 발전.(초기에는 태종의 영향으로 억불정책을 폈다.) ● 전세제도의 확립. ● 총통, 신기전, 화거를 비롯한 각종 화약무기의 대대적 개발, 개량 ● 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의 편찬을 명함 이 중 전세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토지 질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세법인 '공법'을 제정하려 할 때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행하기도 했다. 1430년 전국의 17만여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반 년 남짓 소요되었는데 공법 찬성은 9만 8천여표, 반대는 7만 4천여표였다. 한마디로 말해 인문, 과학, 예술, 국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발전을 도모하였다.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를 존중하며 학문을 장려하고 재사를 등용하는 이상적인 유교적 성군(聖君)으로 꼽히며 당대에 이미 고대 중국의 성군인 요(堯)와 순(舜)에 비견되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칭송받았다. 일반적으로 태조 시절은 신권이 강하고, 태종 시절은 왕권이 강하며, 세종 시절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때로 여겨진다. 다만 세종 후기에는 왕권 강화-종친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맡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왕권/신권 대립 문제가 애초에 존재 자체부터 문제시 되는 떡밥 중 하나. 예컨대 신권의 대표자였던 정도전은 막상 태조가 없으면 아무 힘도 쓸 수 없었고, 태종의 방식은 정도전 방식보다 특권층의 권한을 확장시켜주는 식이었다. 세종 중기를 거치며 특권층이 짝짓기(…)를 시작하면서 세종의 정책에 반발할 세력을 키웠기에 세종도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열거하지만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업적은 훈민정음의 창제. 일부에서 가림토문자, 신대문자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학계에서는 신빙성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참고로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의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시호라고 한다. 이것은 4군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으로,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한국사 상 마지막 정복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하자 하였으나 문종(즉 세종의 장남)이 반대하고 4군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해야한다 주장했던 것. -먼치킨으로써의 능력- ① 희대의 책벌래! 유명한 일화 하나. "어느 날 세종이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데 멀리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세종은 내관에게 어떤 학사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하였다. 내관이 말하기를, "집현전 학사 신숙주가 공부를 하고 있사옵니다." 감격한 세종은 자신도 계속 글을 읽었다. 닭이 두 홰를 운 뒤에야 집현전의 불이 꺼졌고, 세종이 거동하여 보니 신숙주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종은 손수 자신의 곤룡포를 신숙주의 등에 덮어 주었다." 결론적으론 신하가 공부하다 임금보다 먼저 뻗어버린 장면. 아침에 깨고 신숙주가 얼마나 당황했을지 눈에 보인다. 세종의 자상함을 이야기할 때 주로 쓰이는 '훈훈한' 일화이지만...사실 세종은 경학에도 뛰어나서, 본래는 왕이 중신(이면서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자리인 '경연'을, 되레 신하들이 왕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자리로 만들어버린 괴수이기도 했다. 공부하다가 졸았던 것을 그런 왕에게 들킨 신숙주가 어떤 느낌을 받았을지...(역시 경학에 밝았던 조광조가 세종 시대 사람이었다면, 천일전쟁급으로 경연이 길어졌을지도...) 그래서 일단 과거 붙어서 관리가 되면 당연하게 관리들은 공부를 안하지만, 이것때문에 계속 공부했어야 했다고... 근데 조광조가 없었어도 천일전쟁급이었다. 당시 경연은 정책토론장의 역할도 겸했는데, 세종의 정책수립 방식은 예시를 들자면 간식으로 롯X리아과 X도날드 중 선택을 하라면 모든 메뉴판을 늘어놓고 각 메뉴의 칼로리를 계산하고 영양학적 분석, 맛, 포만감, 가격대 성능비, 재료의 산지, 소화 불량 가능성, 먹어본 사람의 의견, 법적 근거(…) 등등을 다 검토한다. 그리고 검토를 마치고 간식을 선택하면 때는 이미 저녁식사 시간(…). 그래도 이런 결과를 거쳐 나온 정책들의 완성도는 매우 높았다. 세종 대 입안된 거의 모든 정책이 조선을 지탱하는 제도가 되었으며, 농지개혁의 경우 입안에서 시행까지 13년이 걸렸지만 대한제국이 근대 양전 사업을 시행하기 전까지 400년 넘게 이걸로 우려먹었다. 오히려 18~19세기에 가서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성리학자(+실학자)들이 '도대체 이거 어떻게 만든거지?'라고 경탄했을 정도. 문제는 이걸 전부 도맡아 했으니 몸이 안 아프고 배길리가 없었다는 점. 이뿐만 아니라 왕자 시절 책만 읽어서 건강을 해칠까봐 우려한 아버지 태종이 세종 방의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는데 우연히 딱 하나 남은 <구소수간(歐蘇手簡):송(宋)나라 구양수와 소식 사이의 편지를 묶은 책)>을 주구장창 읽어댔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며, 밥을 먹으면서까지 책을 손에서 뗄 줄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신하가 있으면 가기 전에 꼭 이들을 불러들여 "일본에 뭔 책이 있다는데 오는 김에 좀 구해보셈.", "명나라에 국내에 없는 뭔 책이 있다는데 갔다 오는김에 겸사겸사 좀 알아봐염." 이런 식으로 구매대행을 시켰을 정도. 사실 신숙주도 책 읽고 싶어서 당직을 다른 사람과 바꿔 자기가 대신 근무를 서 가며 독서할 정도의 지독한 책벌레였지만 이쪽은 더 심했으니 신숙주가 GG치고 먼저 뻗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무서운 사람들.(...) 하긴 세종 본인도 "내가 궁궐에 있으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라고까지 말할 정도였으니 말 다한 셈. ② 음악 개인적으로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소양은 꽤 되었고 악기도 나름대로 잘 다룰 줄 알았는지 양녕대군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절대음감에 가까운 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할 때의 모습을 보면,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KBS <한국사 전>에서 실험을 한 결과 편경 음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일반인이 그냥 귀로 듣고 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런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ㅎㄷㄷ. 세종 본인의 이런 음악적 감각은 정간보 간행이나 조선의 음악 정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예 종묘제례악 중 몇 곡과 여민락 등은 세종이 주장막대를 땅바닥에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쟝 바티스트 륄리가 서양음악에서 처음 지휘봉을 도입했을 때의 사용법과 유사하다.]ㅎㄷㄷㄷ. ② 언어학 거기다가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정도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언어와 음운학에도 관심이 많아 이 부분을 심층적으로 공부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이제의 언문은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 칠음(四聲七音)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26년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까놓고 말하면 "너님들 지금 설총은 옳고 임금은 옳지 않다고 하는 거임? 또 아는 것도 없으면서 임금에게 깝치냐?"는 의미다. 이런 아버지 태종도 신랄한 독설가였는데, 세종 또한 이런 아버지의 습성을 잘 물려받은 셈이다. 실제로 이 때 뿐만 아니라 흔히 상식적으로는 세종이 집현전에다가 "너희들. 새로운 문자를 좀 만들어 봐라." 라고 명령해서 집현전에서 뚝딱 한글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집현전의 높은 학자들 중에서도 한글을 창제해서 반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더군다나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한글 관련 일을 시키면 하지도 않고 그냥 집에 가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에 세종은 황의정승에게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다고 하는 기록이 실록에 존재한다. 또한 신숙주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 몇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도 사실이 아니다. 민정음은 세종대왕이 거의 ""혼자서"" 만든 것이고[왕자와 공주도 창제과정에서 도움을 줬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온다. 정확히는 실록에 나오지 않고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정의공주가 편찬에 도움을 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신숙주, 정인지, 성상문도 편찬에 도움을 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젊은 집현전 학자들조차 한글창제에선 한 일이 없다.[흔히들 신숙주가 세종의 어명을 받아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면서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들 하는데 사실 신숙주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년 6개월 뒤이고 언어학자를 만난 이유도 중국어 음운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이다.]그렇다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세종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가 한글 28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것의 쓰임새와 해설을 좀 달아봐" 라고 명령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즉 훈민정음의 해설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만들었을 뿐이지 한글 자체는 세종대왕이 만든 것이 맞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서 만들어진 한글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문자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저명한 과학잡지 디스커버리는 94년 7월호에서 한글을 소개하면서 여러장을 할애했을 뿐만이 아니라 "the world's most rational alphabet" 이라고 극찬하였다. 세종이 언제부터 한글을 창제하고자 마음을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만의 문자를 만들고자한 그 결단은 애민정신은 물론 한민족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결단 중 하나로 남아 있다. ③ 역사학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우리의 문물이 신라를 계승했으니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 지내요"라는 상소에 "삼국이 나란히 정립해서 막상막하였는데 어떤 건 버리고 어떤 것만 신경쓸 수는 없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조선의 조상으로 인식했던 세종의 균형잡힌 역사감각을 보여주는 대목. 또한 재위기간 내내 <고려사> 편찬에 직접 개입하여 퇴짜와 수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결국 죽을 때까지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1년(1451년)에야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 완성작을 보고도 세종이 OK 했을지는 미지수. 어쨌든 문(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정말 하늘이 내렸다 싶을 정도의 엄청난 먼치킨이었다.
④ 과학 조선의 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썻는데 이순지,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해 대간의,소간의,혼천의등의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고 대명(大明)이쓰던 역법(歷法)을 바꾸기 위해 이순지에게 명해 한국식 달력인 칠성산 내편,외편을 편찬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부록에 내편, 외편 두개다 실려 있다.]자격루와 옥루를 만들어 흠경각을 만들어 그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앙구일부, 자격루, 측우기, 수표교 등을 만들어 설치를 담당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집현전 학자였던 김예몽, 유성원등에게 명해 의방유취 초본을 만들게 하였고 이후 김문,신석조, 이예, 교리 김수온에게 명해 의관을 모아 편찬케 하였으며 세종 27년인 1445년에 365권으로 이루어진 조선최대의 의학백과사전 "의방유취"를 편찬케 했다. 이게 얼마나 자료가 많았냐면 성종 8년때 30부가 편찬 되었다. 금속활자도 새로이 만들어 이전 이천에게 명해 불편하던 활자를 개량하여 "경자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하루에 30부씩찍어 낼수 있는 "갑인자"를 새로이 만들었다. ⑤ 기타잡기에 대해
현재 세종대왕의 어필로 전해지는 유일한 글씨인 '가전충효세수인경'. 세종이 친히 전의 이씨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뜻이다.
독서와 토론, 공부는 광적으로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의외로 시짓기나 서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들의 어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세종의 어필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실록에서도 '예기(藝技)에 정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래 왕자들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가꾸기, 바둑과 같은 잡기에 흥미를 갖도록 교육받기 마련이었는데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사슴이나 화초 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언급하거나, '두시(당나라 두보의 시)와 같은 것은 풍월을 읊조리는 것이니 유자의 정식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런 '잡기'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는 있었으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던 듯. ⑥ 부작용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학구열과 과로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눈이 많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인 타격은 자치통감훈의 편찬 때문이다. 세종 스스로가 이 일에 대해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임했는데 자치통감을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 양이 정말 장난 아니다. 그런 책의 해설서를 만들어냈으니...거기다가 완벽주의자 세종은 조금의 문제점도 내버려 두지 않아 결국 거의 모든 업무를 본인의 관할 아래 추진했다. 결국 책의 편집과 자신의 안과질환을 맞바꾸게 되었고, 만년에는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고... 세종이 당뇨병이었다는 이론이 있는데,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망막질환이 결정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했으며, 실제로 세종 말년의 대부분은 세자인 문종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문종이 요절하지 않았다면 성군이 됐을 거라고. 그럼에도 죽음의 원인도 과로라고 생각된다.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했기 때문. 심지어 죽음을 맞기 3일 전 거의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직접 정무를 봤을 정도였는데 이 때 물 흐르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밀린 정무를 깨끗이 처리하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고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실록해당기사(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13202014_003&tabid=k) 솔직히 이 정도면 성군 소리 들을 만 하다...그 즈음 문종이 종기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실록기사(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id=kda_13202014_001&tabid=k)
덤으로 문종이 죽은 이유는 3년상을 치른 후 체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기 때문.(…) 3년상이 아직 일반화되기 이전인 조선 초기에는 3년상을 치른 후 상주도 가버리는 줄초상이 종종 발생했다. 참고로 하루 일과표가 이랬다고 한다. -특이한 기록들- ① 칠삭둥이 세종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은 칠삭동이 미숙아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바로 위의 형인 효령대군은 1396년 음력 9월 생인데 세종은 1397년 음력 4월 생이다. 윤달이 끼었나도 싶지만 1396년과 1397년은 모두 윤달이 끼지 않은 해다. 기록에 의하면 효령이 태어나고 정확히 7개월만에 세종이 태어났다는 소리. 생월을 오기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 기록이 맞다면 세종은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다. ② 세자빈 문제 자신이 장자가 아님에도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죄책감을 지녔던 세종은 다음 왕위만은 첫째에게 물려주려 했다. 첫째인 문종은 왕이 되는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부인 복이 별로 없었다. 어쨌냐면 며느리들이 잘못된 길에 빠졌다. 3번째인 현덕왕후는 잘못된 길을 가진 않았지만, 단종을 낳고 단명했으니 결국은 며느리 복이 없었던 셈이다. 첫번째 세자빈은 이상한 짓(문종이 자신을 찾지 않으니까 남편의 신발을 태워 그 재를 자기 방 앞에 뿌리는 비방을 썼다. 미신을 억제하고 유교를 장려하던 나라의 궁중에서 그랬다는 것은 폐위감.)을 하다 쫓겨났고, 두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레즈비언으로서, 시녀를 불러 남녀의 삐리리한 행위를 흉내 내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참고로 저런 행위를 맷돌부부라고 한다. 이 때문에 문종에게 남녀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종의 후궁이자 다음 세자빈이 된 현덕왕후 땐 무난했던 걸 보면 첫번째 세자빈 때는 여성에 대한 관심이 적었고, 두번째의 경우는 현덕왕후를 사랑했던 탓에 세자빈에게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따지고 보면 문종 탓도 크다. ③ 육식 매니아
세종대왕의 식성을 잘 보여주는 짤방.
고기를 무척 좋아해서 실제로는 비만. 세자 시절부터 이미 당뇨병을 달고 살았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이유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가히 종합병원(…). 수라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라는 얘기가 나올정도로 고기매니아. 오죽하면 태종의 유언도 '충녕이 고기를 좋아하니 내 상을 치를 때는 고기를 먹게 할 것'(당시 3년상을 치를 때 고기는 상주에게 금지되었다.)이었고, 임금이 초가집에서 살고 고기반찬을 금함으로써 하늘에 속죄해야 하는 가뭄 때에도 고기반찬을 거르지 않았을까…(위인전의 내용은 페이크). 설렁탕도 세종이 선농단 제일 때 잡는 소를 보고 군침 다시다 만든 음식이라는 야사가 있을 정도(물론 사실이 아니다. 설렁탕은 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음식이다.[단, 이에 대해서는 설렁탕과 같은 형태의 요리 자체가 몽골의 영향으로 생겨나기는 했으나 설렁탕이라는 이름과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선농단에 어원이 있다는 의견이 있으니 설렁탕을 무조건적으로 몽골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세종대왕 초상화의 후덕함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심지어 큰아버지인 정종이 죽었을 때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태종이 이를 보고 한 말은 압권.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여삐 보지 않겠는가!" 그러나 의외로 세종대왕은 그렇게 고도비만 수준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이 김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 허리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 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과인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젊었을 때 매던 허리띠가 헐거워져서 허리둘레가 줄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데다가 살쩍에 흰 터럭이 나 있다고 말하는 장면. 이걸 보면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젊었을 때보다 살이 빠져 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게다가 식욕 뿐 아니라 성욕도 왕성해서, 후궁 포함 7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보았다 문제는 왕자들의 능력도 과연 세종의 아들답게 뛰어나자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는 바람에 문종 사후 조선의 정치에 파란을 부르게 된다. 뭐 성적으로 왕성한 것은 점잖지 못하다 하여 묻히긴 했지만. 이후 남정네들의 일부다처제 지지 근거로 써먹히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야사에는 아버지 태종의 여자를 건드리다가 죽도록 두드려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래서인지 세종은 임질에도 걸렸었다. 이 임질이 성병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 그런데 한의학에서 말하는 임(淋)은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요로결석, 혈뇨 등을 포함한 배뇨장애의 총칭이며, 크게 다섯가지의 오림(五淋)으로 나뉜다. 육식을 즐기고 비만했던 세종의 기록을 보면 고림(膏淋: 소변이 쌀뜨물 같고 기름기가 많아 점성이 높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질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도 증상이 요도에 잘생할 질환에 가깝게 설명되고, 심지어 아버지의 성기를 빨아 임질을 낫게 했다는 효자(...진짜 효성이 지극한 거 같다...)이야기도 있다.]
④ 평생직장
● 관련 글(http://daejinuniv.blog.me/80148498803).
황희, 조말생, 김종서 등 세종 때 신하들은 죄를 지은 것이 아닌 이상 은퇴도 마음대로 못 했던 듯 하다. 황희만 봐도 노환 등을 이유로[실제로 황희 정승은 매우 장수했다.]사직을 여러 번 청했으나 세종은 언제나 거부했다. 이징옥 등 다른 신하들도 여러 번 이런 저런 이유로 사직 신청을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http://pgr21.com/?b=10&n=110384). 그래서 황희는 세종 치세 내내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정승직을 계속 맡아야 했다.
물론 세종 치세 때는 신하들이 세종을 따라 강도높은 업무를 계속 해야 했으므로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얼마나 심했냐면..(http://2.cdn.orbi.kr/data/file/united/3667439405_wBIfeVC3_EC84B8ECA285EBB680EBA0A4EBA8B9EC96B4EBA789.JPG) 신하들도 세종이 세자에게 업무를 이관하는 것을 막으며 나름 보답(?)은 했다. 참고(http://pgr21.com/?b=10&n=111360)
⑤ 자손
세종이 수립한 기록에서 또 다른 특이한 부분은 조선왕조 역사상 정실 왕비과 후궁 소생을 막론하고 아들 많이 낳은 기록(18남)(덧붙이자면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5위다.)과 정실과의 사이에서 가장 자식을 많이 낳았던 기록(10명, 8남 2녀)[중전 소생이 많은 기록으로는 태조가 1위(11명)지만, 사실 신의왕후 한씨 소생 8명(6남 2녀)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3명(2남 1녀)을 합친 것이므로, 정실 부인 한 사람만의 보자면 소헌왕후가 1위다.]으로, 특히 소헌왕후와의 금슬이 좋아 그녀가 사망하자 그녀를 위해서, 수양대군(세조)을 시켜서 불경 관련 책을 하나(석보상절) 편찬했을 정도다. 또한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한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마 앞에서 말한 태종이 상왕일 때 장인 심온을 사사했던 과거가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종에 관한 후궁기록은 세종 4년에 태종이 간택령을 내리는 것이 최초 기록이다. 그 후 태종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등으로 실제 후궁이 들어온 것은 세종 6년이니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하다. 게다가 후궁소생의 첫아들은 세종 7년에 태어났다. 2008년에 방영된 사극 대왕 세종의 인기와 관련해서 나오기 시작한 세종 관련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이 기록에 따르고 있다.
-해동요순, 그에 대한 비판- 세종의 업적도 찬란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 업적 뒤에는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인 것은 사실이다. 물론 세종도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있는 면도 있기는 하지만 요즘 '성군으로 포장된 세종이 아닌 인간 세종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비판이 존재하니 문제.
① 대명사대외교(對明事大外交) 세종은 지금에 와서야 자주적인 왕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세종 역시 사대주의를 표방했다. 그의 통치기간 중 몇몇 법들이 "중국이 하니깐"이라는 이유로 통과된 경우도 있곤 했다. 그러나 당연히 전부 그렇지는 않았다. 정말 열렬한 사대주의자였으면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 터. 당시 명나라는 활발한 정복전쟁 중이었고, 명은 당연하게도 조선에 대해 엄청난 공물을 요구했다. 태종 때부터 쇄도한 공물은 세종 때도 이어졌고, 세종은 그 많은 군수품과 공물을 대기 위해 백성들을 빨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명은 공물 뿐 아니라 말이나 환관, 심지어는 처녀까지 요구했고, 그 때문에 딸 있는 집안은 딸을 숨기거나 나이를 속이기에 바빠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처녀들은 명황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발되었는데도 기록을 보면 기피한 것 같다. 기록에 명 사신 앞에서 병신 흉내를 내기까지 해서 명 사신이 벙졌다는 기록도 있다. 마치 내외처럼 되어 고려왕이 고려에 들어가기 싫다면서 왕위를 서슴없이 내던지거나 뭇 사람들이 원나라 황실에 줄을 못대어 안달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런 공녀제도가 폐지된 건 성종 때이다.) 사냥을 좋아하던 명의 선덕제는 조선의 해동청과 큰개, 시라소니를 원했고, 조선의 모든 지방관들의 1차목표는 바로 해동청, 큰개, 시라소니의 포획이었다. 당시 조선 8도가 선덕제의 요구로 인해 이리저리 들쑤시고 시끄러웠다고 하니, 백성들의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명의 사신접대에 대한 과도한 지출도 대단한 문제였다. 일단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하는 의주에서 한번 잔치를 베풀고,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하면 또 잔치,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한양에 도달하면 문무백관과 왕이 한대모여 접견한 후, 태평관에서 하마연이라고 잔치, 그 다음날도 익일연이라 잔치, 왕의 특별잔치, 종친의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송별연을 벌여 잔치, 길목인 개성-황주-안주-의주 이렇게 또 잔치를 베풀었다. 다만 과도한 사신 접대만으로 까인다는 건 좀 안타깝기는 하다. 명군으로 이름난 고려의 문종은 송나라 사신이 오면 길게는 3개월 내내 직접 접대했고, 송나라와 사신 교환을 위해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려다 관둔 일도 있으니까. 당연히 그 잔치비용은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때문에 길목인 황해도 지방은 후유증이 상당했고, 도적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대명 사대외교는 태조 이래 조선의 국가 이념이자 국가 전략이었다.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은게 아쉬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이를 세종의 잘못이라 볼 수는 없다. 당시의 대명(大明)의 황제는 그 유명한 영락제였다. 바로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하고 몽골과 베트남까지 원정했으며, 이전까지 원나라 때를 제외하면 중국에게 있어서 '바다 멀리 골치아픈 놈들이 있었지' 수준이었던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고, 정화를 파견해 인도양까지 진출한 인물이었다. 주변국이 개기면 바로 밟아버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뻘짓했다가는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물론 까짓거 붙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② 사민 정책(徙民政策) 4군 6진 개척 당시, 삼남 이남 지방의 백성들을 강제 이주 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고, 강제로 징발된 백성들은 북쪽으로 가는걸 회피하기 위해 심지어 자해까지 벌였지만, 세종은 자해한 백성들까지 강제로 북쪽으로 올려보냈고, 그 과정에서 돈있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주한 백성들은 그날로 수천명이 죽었다. 추운 날씨도 날씨고, 야인들도 야인들이지만 중국 사신들에 대한 접대 비용으로 수탈당했고, 흉년이 겹치고 역병까지 돌아 또 수천명이 죽었다. 세종이 개척한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4군이라 불릴 지경이었다. 당시 그 때문에 세종에 대한 원성이 높았다 한다. 그런데 원성은 높았지만 당시 변방의 사정상 사실 어쩔 수 없었다. 세종은 북방 개척을 위해 고려시대 동북 9성과 관련한 역사를 깊이 연구했고, 안정된 영토 확보를 위해서는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 그 지역의 인구를 늘려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그만큼 북방 안정이 시급했기에 세종 본인도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한 것이다. 당시 사민정책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진언에 본인이 직접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해서야 되겠느냐!"고 버럭했을 정도로 그 집념은 대단했다. 실제로 4군은 비록 실패했지만 6진은 세종대에 성공했다. 고구려의 영토를 대고 하악댄다든지, 조선이 북진정책에 소홀했다면서 까던 사람이 이런 걸 가지고 세종을 까는 걸 보면 뭐라 말할 수 없이 당혹스럽기도 하다. 원래 영토확장이라는 것은 원래 가진게 없는 떠돌이 목축족이 아닌 이상 백성들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고통을 주게 마련이다. 만약 당사자라면 광개토호태왕시절의 고구려 백성이 좋겠는가 아니면 땅만 파먹으면 살 수 있는 평화로운 시기의 조선조를 택하겠는가?
③ 부민고소금지법(수령고소금지법) 자세한 사정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현대인들의 시각만 강요한 주장이지만 조선시대 최대 악법이라는 말이 있는 "수령 고소 금지법(부민 고소 금지법)" 또한 세종 때 제정되었다(정확히는 태상왕 태종과 공동 통치 기간때). 세종 전만 하더라도 백성들의 마지막 끄나풀로 관리를 고소할 수 있었지만, 허조[당대 예론의 최고 전문가로 태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이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조선의 예학 정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수행하여 젊은 신하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가 눈물 탄식하면서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라고 청하자 들어 주었다. 그 법은 세조가 폐지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원한을 풀어달랍시고 으흑흑...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장화홍련전에도 반영된 신원설화의 배경이 어디서 온 것 같은가? 조선 초기 토호들과 중앙집권을 이루려는 중앙정부간의 싸움이 부민고소금지법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조선왕조 실록에 자세히 나오는데,
"예조판서 허조 등이 상계했다. '......전조(고려)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의 관리와 품관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의 안위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은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현대에 '인간 세종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세종의 흠을 찾는다는 이유로 이 법안을 들면서 '세종은 흔히 말하는 애민군주가 아니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것을 악법이라 보기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조선의 지방통치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은 상태라서 마을의 세력 있는 자들이 되지도 않는 이유로 수령 고소를 남용한 경우가 많았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수령을 꼬투리 잡아 고소할 정도의 배경과 지식을 갖춘 이들'이 과연 평범한 농민이었을까? 정말 억울한 경우도 있었지만 안정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배웠겠지만, 조선은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한 최초의 정권이다. 고려까지도 지방은 그 지역의 유력가나 호족이 대를 이어서 통치하고 있었다. 아무리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지만 지방의 토호 세력을 약화시키고 행정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지방관들에게도 무기가 필요했다. 또한 법 제정은 했지만 세종 본인은 이것을 완화하고자 노력했고 이 법안을 처음 발의한 허조와도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허조가 아뢰었다. "부민의 원억(冤抑)을 호소하는 소장(訴狀)을 수리하여, 관리가 오판한 것을 처단하게 하는 것은 존비의 구분을 상실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일 소신이 헌책(獻策)한 것에 따르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고금 천하에 어찌 약소한 백성은 원억함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의 뜻은 좋지만, 정사로서 실시하기에는 정당하지 않다." 허조가 물러가니, 임금이 안숭선에게 말하였다. "허조는 고집불통(固執不通)이야."
실제로 조선왕조 전 기간동안 수령의 범죄나 가혹행위를 다스리기 위해 고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에는 고발자의 죄를 면해 주는 제도나, 법률의 수령을 '자기 고을의 수령'만으로 제한한 제도(예를 들면, 부산진 백성이 동래부사를 고소하는 경우에는 부민고소금지법에 저촉되지 않음)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 이런 제도들이 조선왕조 전 기간동안 유지됐던 것은 아니지만. 여튼 이것을 악법이라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현대의 관점으로 조선 사회를 이해한 것이다.
④ 화폐개혁貨幣改革)
세종의 오점 가운데 가장 비판받아야 할 시책이라면 이미 자기 아버지인 태종이 하려다가 처참히 발렸던 화폐개혁 시도였다. 세종은 중국의(특히 당(唐))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건국 초기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지금의 지폐와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가 재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태종이 열심히 통용하려고 빡세게 나갔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을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하는데,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는 농본주의 조선에서 화폐경제체제가 그리 쉽게 정착될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띄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과 조선은 상황이 달라 화폐개혁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번째는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의 역량부족이었다. 조선은 전 왕조에 걸쳐 고질적인 재정부족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국가 자체의 영세적인 측면도 있지만 조선왕조가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정부 재정확충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육로교통의 미발달로 거둔 세미를 전부 조운선을 통해 강이나 바다로 운반했는데, 종종 배가 침몰하여 애써 모은 세미가 홀랑 날아가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며 기껏 운반해온 쌀도 습기에 젖어 불어버리거나 썩어버리기 일수였다. 이러니 충분한 화폐를 제조할만한 비용이 마련될리 없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동전제조에 사용할 재료마련도 힘들었다. 전국의 금속이란 금속을 모아도 모아도 모자라 결국 동네북인 절을 또 두들겨(...) 종까지 다 뺏어와 녹여야 했다. 이정도면 말 다한셈.
두번째는 조선의 교역경제 미발달이었다. 당나라 때를 비롯해 중국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유통했으며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때문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상품의 양이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협소한 영토와 그나마도 산지가 많은 지리적 조건 때문에 풍부한 물자가 양성되지도, 그리고 그 물자가 유통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많은 물자를 먼 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화폐의 필요성도 별달리 생기지 않았다.
국내 교역이 미약한 상태에서 해외와의 교역이라도 활발하면 또 모르겠는데 한반도의 국가들은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대외교역이 꾸준히 쇠퇴(...)하는 국가구조를 가지고 있어 고려시대부터 사상들의 교역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 와서는 해상무역 자체가 아예 소멸하고 육로무역도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통한 제한적인 무역이나 국경에 설치된 작은 교역소를 통한 교역에 불과했기에[이나마도 물물교환의 형식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조선이 가져간 물건을 진상하고 중국 황제가 이에 대한 답례물건을 하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나 일본과의 교역은 무역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에 가까워 제대로 된 거래가 형성되지 않았다.]중국의 화폐역시 별달리 유입되지 않았다.
세번째는 조선이 가지고 있는 농업위주의 자급자족 경제구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농공상의 사고방식이 조선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조선 초기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의 구별만 있었으므로 이런 신분구별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도입된 유교에 의해 위의 신분구별은 어느정도 구체화 되어 있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분구별은 조선중기무렵 절정을 이루었으며 조선후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때문에 모든 경제구조가 농업을 위주로 돌아갔다. 이러다보니 쌀이 자연스럽게 화폐의 위치를 대행하게 되었고 상업이나 공업이 위축되어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만들고 정 모자라는 물건은 쌀이랑 좀 교환해서 사오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처럼 화폐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의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간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민중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됫박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백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하고 아내는 목을 메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마침내 한양 성안이 폭동전야로까지 흉흉해지자 세종은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도입이 잘 될리가 없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시장경제가 활성화되고 전국각지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시대를 한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다.[광해군의 수미법을 시작으로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 여각 이런 발달들이 영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진정 시대를 앞서 나갔다.]아무리 이상이 크고 높아도 현실의 벽은 엄연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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