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27일 원명 정사 법문.
惠庵 門人 淸峯 淸韻 선사 의역 강설
62. 도명 화상 (道明 和尙)
도명화상이 황매로부터 노행자를 쫓아서 대유령에 이르니 다급하게 된 노행자가 의발을 바위위에 던져놓고 이르기를 “이 의발은 믿음을 표하는 것이거늘 어찌 힘으로 다투겠는가? 그대 마음대로 가지고 가보라” 도명화상이 들어도 움직이지 않자 이르기를 “나는 법을 위해서 왔음이요 의발때문이 아니니 원컨대 행자는 법을 열어 보여주시오”하자 노행자가 이에 하여금 돌위에 앉아서 마음을 고요하게 하시고 인하여 말씀하기를 “그대는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그러할 때를 당해서 어느 것이 이 도명 상좌의 본래면목인가? ”하시자 도명화상이 말아래 크게 깨닫고 온몸에 땀을 흘리며 울면서 예(절)을 하고 갔었다.
강설: 도명화상은 5조홍인의 제자로서 처음 법명은 혜명이었으나 6조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뒤 6조 혜명대사의 혜자를 같이 쓰지 않고자 겸허한 마음에 도명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다.
“선도 악도 생각 않을 때 어느 것이 그대의 본래면목인가?” 묻는다면 무엇이라 답하겠는가?”
“본래면목이라 해도 옳지 않느니라”
63. 유관 화상 (惟寬和尙)
유관화상이 백거이가“이미 분별이 없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닦나이까?” 하고 묻는것에 인하여 사께서 이르시기를 “마음은 본래 손상이 없거늘 어찌 닦는 것을 필요로 한다 하는가? 더럽거나 깨끗한 것을 논하지 말고 일체 생각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또 묻기를 “더러운 것인 즉 생각하지 아니하면 깨끗함도 생각지 않음이 옳나이까?” 사께서 이르시기를 “사람의 눈알위에 한 물건도 머무르지 아니함과 같나니 금가루가 비록 보배이지만 눈에 있으면 또한 병이 되느니라”
또 묻기를 “닦는 것도 없고 생각함도 없다면 또한 범부와 어찌 다르겠사옵니까?” 사께서 이르시기를 “범부는 진리에 어둡고(무명) 2승은 집착이니 이 두가지 병을 여의면 이것이 참으로 닦는 것이 되니 참으로 부지런한즉은 집착에 가깝고 잊어버린즉은 무명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마음의 긴요함(지극함)이니라”하였다.
강설: 白居易(백낙천)는 중국의 뛰어난 문장가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백거이가“분별이 없다면 무엇으로 마음을 닦을 수가 있느냐?” 즉 분별이 없으면 생각도 없지 않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유관화상이 마음은 본래 不增不減이고 不垢不淨으로 청정한 것인데 닦을 필요가 있는가? 하시고 깨끗하거나 더럽다는 생각으로 분별하지 말고 일체의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닦을 것도 또한 없다하신 것이다.
백거이가 또“더러운 것을 생각지 않는다면 곧 깨끗한 생각도 하지 않음이지 않는가?”라고 함에“본래 마음은 맑아 깨끗하여 마치 금가루가 아무리 보배라 해도 맑은 눈에 들어가면 병이 되는 것과 같아‘깨끗하다’는 생각도 또한 분별심이라 청정본성에 허물을 일으키는 것이다”하시니“닦음(수행)이 없고 생각도 없다면 범부에 머물지 않겠는가?”하자“범부라는 것은 진리에 어두움(무명)을 말하는 것이요, 2승이라는 것은 집착(아집)이니 참으로 닦는다는 것(수행)은 닦는다는 생각도, 무기나 혼침에 떨어지지도 않아 이 두가지를 여의고 본성 그대로 맑아 깨끗하여 밝아 성성한 그대로가 마음의 지극함이라”하였다.
이것이 평등(진여)문인 돈오법문인 것이다.
닦는다는 생각(부지런함)도 망각(침잠)도 모두 병인 것이다.
점법(차별문)으로야 물론 수행 없는 깨달음이 얻어질 수 없음인 것은 분명한 것임도 간과해서 치우친 소견을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64. 염관 화상 (鹽官和尙) 회하승(會下僧)
염관화상 아래 한 주사(사찰 일을 맡은)승이 있어서 장차 죽으려고 할 때에 저승사자가 와서 잡아가려 하거늘 스님이 고하여 이르기를“내가 몸이 절 살림 하느라고 수행할 여가가 없었으니 비노니 7일만 허용할 수가 있겠느냐? 하니
저승사자가 이르기를“기다려보라. 염라대왕께 아뢰어 대왕이 만일 허락한즉 곧 7일후에 올 것이고 허락하지 않은즉 금방 다시 올 것이다”하고 말을 마치고 가서 7일후에 와서 그 스님을 찾아봐도 볼수가 없었다.
(우두 법융선사가 4조도신 대사를 친견한 후에 온갖 새들이 꽃을 물고와도 찾지를 못한 것과 같다)
강설: 우두 법융선사가 4조 도신 대사를 만나기 전에는 온갖 새와 짐승들이 공양을 올렸는데, 4조 도신대사를 만나 경책을 받은 후에는 새들이 오지 않았다. 왜냐하면 수행이 깊지 못해서 묻 짐승들의 눈에 드러났기 때문이며, 법융스님의 바른 선정에 묻 짐승들의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니, 이 주사승이 공부가 깊어져 있음에 저승사자의 눈에도 띄지 않아 잡아가지 못했다 하는 이야기이다.
65. 형악 혜사선사 (衡岳 惠思禪師)
(천태종의 종조 천태지자(지의)대사의 스승인)형악 혜사선사가 항상 앉는 것(坐)을 익혀서 하루에 오직 한끼밥만 먹고 법화경 등 경을 외우다가 드디어 도를 얻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이에 혜문선사의 처소에 가서 법을 받고 낮과 밤으로 마음을 다스려 여름에 앉기를(하안거) 삼칠일을 지나서 숙지통(숙명통:전생을 통해 앎)을 얻고서 갑절이나 더 정진하였다.
이윽고 장애를 일으켜 사지가 늘어지고 약해져서 걷지도 못하게 되자 스스로 생각해 이르기를“병은 업으로부터 생겼고 업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남이나 마음의 근원은 일어날 것이 없으니 바깥의 경계가 어떤 형상인가? 병과 업과 더불어 몸이 모두 구름과 그림자 같도다”이와같이 관하고 나서야 뒤바뀐 생각이 없어져 가볍고 편안(輕安)하기가 옛과 같았으나 여름이 다가도 오히려 소득이 없음에 마음 깊이 부끄러워하며 (長坐不臥를 국집하던)몸을 놓아 벽에 기대니 등이 닿기도 전에 법화삼매 최상승선을 활연히 크게 깨달아서 한순간 밝게 사무쳤다.
강설: 있음에 국집하던 형악선사가 육신이 무너지게 되자 이제 사유하기에 이르러 ‘병은 과거의 악업으로부터 생겼고 업은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나, 마음은 본래 생길 것이 없어 본래 청정한 것인데 외부의 경계는 그럼 무엇인가? 그 또한 본래없는 허망한 것이 아닌가?’이렇게 관해본 후에는 외경에 끄달리지 않아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 졌으나 대오확철 하지는 못함에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고 눕지 않고 앉음에 국집하던 몸을 쉬기 위해서 벽을 기대 편안하게 하고자 하여 몸을 눕히려 하는데 순간 몸이 벽에 닿기도 전에 법화삼매(묘법연화경의 요의삼매:제법실상) 최상승선을 대오확철 하게 되였다 하는 것이니 깨달음은 마음으로써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4대를 구속함으로 얻는 것이 아닌 것이다.
제자인 천태지자 대사가 형악 혜사선사로부터 법을 잇고 천태종을 일으켰으며 이후로 천태종과 법상종에서는 법화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게 되었다
66. 조과 화상 (鳥?和尙)
조과도림화상이 시자 회통이 하루는 사직하고 가려하자 조과화상이 이에 묻기를“너는 지금 어디로 가려느냐?”하니
이르기를 “저는 법을 위해 출가했으나 화상께서 자비를 베풀어 가르쳐 들어 보여주심을 입지 못했음에 지금 여러 곳 제방을 향해 불법을 배우고자 갑니다”하자
사께서 이르기를“그와(是) 같은 불법이라면 나의 여기에도 역시 조금 있느니라.”하니 회통이 이르기를“어떤 것이 화상의 여기 불법입니까?”하자 사께서 몸에 걸치고 있던 누더기에서 실오라기를 뜯어서 입으로 휙 불자 시자가 이로 인하여 크게 깨달았다.
강설: 누더기의 실오라기를 들어 부니 시자 회통이 대오했다 했는데 이것이 무슨 도리이기에 회통스님이 크게 깨달았을까?
“ ! ”
67. 대위 화상 (大?和尙)
대위(懷秀)선사께서 이르기를“아깝도다. 이 僧중(회통시자)이 말(口頭)소리와 형상(色)을 알아(體認) 평생을 마땅히 쓰는 자기의 광명이 하늘은 덮고 땅을 덮어서 부딪치는 곳마다 나타나 이룬것임을 알지 못했었도다.”하였다.
스스로 본래 구족해 있음을 모르고 이제 소리와 색을 통해서야 드디어 체인했음을 말씀하셨으나 실은 깨달음을 인가하신 말씀인 것이다.(이 대위선사는 위앙종의 종조가 되는 위산 대위 선사가 아닌, 황룡 선사의 손인 大? 懷秀 선사를 칭함)
68. 나안 화상 (懶安和尙)
위산 영우선사의 법을 이은 복주 나안화상이 대중에게 보여 이르기를“너희들 모든 사람이 모두 이곳에 와서 나안(내게서)에게 무엇을 구하느냐? 만약에 부처를 짓고자 한다면 너희들이 스스로 곧 부처이거늘 문득 옆집 문으로 가볍게 날뛰어 달리는 것이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에 달려가는 것과 같으니 어느 때에 상응함을 얻겠느냐? 너희가 부처를 짓고자 할진대 다만 뒤바뀐 반연과 망상과 잘못된 깨달음 더러운 욕망과 깨끗하지 못함을 없게 할 것이니 중생의 마음이 곧 너희가 문득 처음 마음에 바른 覺인 부처인 것이거늘 다시 어느 곳을 향하여 따로 찾을 것인가?
너희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값(한량)없는 큰 보배가 있어서 눈(眼門)으로부터 방광(작용)하여 산하대지를 비추며 귀(耳門)로 방광하여 모든 좋고 나쁜 음성을 받아 들이니라.
六門(안이비설신의)이 주야로 항상 광명을 놓으니 역시 방광삼매라고 이름 하는 것이나 너희들이 스스로 알지 못하여 그림자(허망한 상)만을 취하니라.
사대의 몸가운데 안과 밖으로 버티어 지켜서 넘어지지 않게 하고자 함을 사람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외나무다리 위로부터 지나가되 또한 미끄러지지 않게 함과 같으니라.
자 말해보라! 이 무슨 물건이 부지하여 이와 같이 넘어지지 않고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가? 너희가 만약 찾아보려 하면 털끝만치도 곧 보지 못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지공화상이 이르기를‘경계위에서 행동할 적에 혼연히 크게 있으나 안팎중간을 구해도 모두 없다’고 하였느니라”하셨다.
강설: 스스로 갖추고 작용하는 것을 모르니, 경계에 끄달리고 망념을 일으키지 않게 지켜야 하는 것이니 이 지켜 바르게 함이 곧 이것이라.
“이렇게 안팎중간을 찾아도 있음이 없는데 무슨 물건이 곧 그것인가?”
“물건이라 해도 맞지 않도다”
69. 양산 연관선사 (梁山 緣觀禪師)
양산 연관선사가 대양연(大陽延)이“어떤 것이 이 무상도량(형상없는 마음)입니까?”하는 물음으로 인하여 사께서 관세음보살상을 가리키면서 이르기를“이것은 곧 오(화가 吳道者)처사가 그린 것이니라”대양연이 말을 하려고 하자 사께서 급히 다그쳐 이르기를 “이것은 상이 있는 것이니 어떤 것이 상이 없는 것이냐?”하자 대양연이 말 아래 깨달아 보고 예배(절)하고 본자리로 돌아가서 있으니 사께서 이르기를“어찌 한마디 말을 하지 않느냐?”하자 대양연이 이르기를“말인즉 사양하지 않거니와 지묵에 올릴(흔적이 남을 )까 두렵습니다”하자 사께서 하하 웃으며 이르시기를 “이 말이 돌 위에 올라갔도다.(지금 한 말이 더 큰 흔적) 이 일 후에 과연 비석에 올라갔(쓰여지게 됨)다”
강설: 대양연이 참으로 조사선을 깨우쳤던 것이다.
말과 상이 허물임을 알아 묵언하였으며, 양산 연관선사의 추궁의 덫에도 걸려들지 않고 해도 함이 없는 한마디로 위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깨달은 바의 견처를 자취를 남기지 않고 일러보였기 때문이다.
화선지에 쓰이니 돌(비석)에 쓰였느니 하는 상을 쫓아 살피면 도와는 멀어짐을 빨리 투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