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죽은 여자 자라나는 머리카락 속에서 반짝이는 핀과 같고
눈먼 사람의 눈빛을 잡아끄는 그림 같고
앵두향기에 취해 안개 속을 떠들며 지나가는
모슬린 잠옷의 아이들 같고
우기의 사바나에 사는 소금기린 긴 목의 짠맛 같고
조금씩 녹아들며 붉은 천 넓게 적시다가
말라붙은 하얀 알갱이로
아가미의 모래 위에 뿌려진다
오늘
네가 아름답다면
매립지를 떠도는 녹색 안개
그 위로 솟아나는 해초냄새의 텅 빈 굴뚝같이
멜랑콜리아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집시의 시간
검교 뾰족한 모자를 쓴 여자, 교훈을 싫어하는 여자다
권태로 새하얘진 아이들의 혓바닥을 칼로 긁어내며
자두향기 쏟아지는 그늘로 데려갔다
그녀는 우리의 작은 귓속에 술을 부었다
처음 마신 포도주 같은 이야기들
보랏빛 가죽주머니에선 날카로운 시간을 꺼내주었다
없을 땐
마시던 술병을 내리쳤지
그녀와 함께 누운 모래밭의 밤하늘
검은 미꾸라지들이 반짝이는 유리조각에 찔리며
파닥거렸다
더 캄캄한 날엔
그녀가 쏟아졌지. 사내아이들의 몸속으로
어두운 복도에 달린
단 하나의 좁은 창문으로
달빛이 쏟아지듯
또 무엇을 훔칠 수 있을까?
불은 꺼졌고 공기는 한없이 차가운데
아이들의 흰 목덜미에 은하수처럼 길게 빛나는 스카프를
칭칭 감아주고
검은 기차를 타고서 그녀는 떠났다
선 밖으로 몸을 내미는 것은 위험합니다
플랫폼 푯말을 쓰러뜨리며
창밖으로 가슴을 내밀어 마지막 인사를 해주었지
우리는 하늘처럼 파란 젤리를 씹으며
오래 묵은 담배냄새가 피어나는 꽃잎무늬 소파에 앉아
그녀가 보낸 엽서들을 큰 소리로 따라 읽었다
얘들아, 도시가 점점 납작해져
끈적거리는 누런 기름접시처럼 납작해지면
내가 준 참나무 설거지통에
담가주길
또는, 새로 만든 도시의 카탈로그를 동봉한다
밤공기의 부드러운 혀를 찢고
그녀의 모자가 별처럼 솟아오르길
작은 아이들은 공책 밖으로 삐져나오는 글씨 연습을 하고
조금 자란 아이들은 황도대 밖으로 새들을 쫓으며
계속되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그녀가 두고 간 탬버린처럼 몸을 떨었다
라, 라, 라푼젤
그는 도둑고양이와 그림자를 사랑하고 그가 누운 관에선 흰 비둘기가 날아오른다 나는 드넓은 상치밭을 가꾸고 푸르고 여린 잎들 사이로 불쑥 솟은 거대한 굴뚝에 사네 낡은 성당의 저녁종이 들판에서 울려퍼지고 그의 목소리 가까이 들린다 계단도 없고 문도 없으니 아가씨, 좁은 창문으로 너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 좀 내려줘
아주 오래 연주되기 위해서
긴 머리를 가진 여자들······
벌써 여덟 번째야 그가 머리채를 잡고 올라와 내 목을 친 것이, 그가 머리통을 창문 밖으로 던진다 나는 바람 빠진 공처럼 튀어오르며······ 소리지른다 여보세요 야옹, 야옹 저도 고양이의 일종이에요 나는 오늘로 아홉 번째 태어났다 그러니까 달팽이는 백 마리 아무도 그려지지 않은 검은 도화지 속을 나 혼자 뛰어가기
찢어진 상치잎들, 바람에 날아오르며 얼굴을 후려친다
푸른 셔츠의 남자
한참 떨어지다
공중에 걸려 있다
이 나뭇가지는 여리고 부드럽다 그녀는 곧 부러질 것이다
둘이서, 또는 따로
추락의 투명하고 긴 허리를 애무하며
녹색 장미 꽃잎같이
활짝 벌어진 옆구리의 상처를
풀려난 두 팔로 휘저으며
아래로
아래로
연애의 법칙
너는 나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어제 백리향의 작은 잎들을 문지르던 손가락으로.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부드러운 모래로 갓 지어진 우리의 무덤을
낯선 동물이 파헤치지 못하도록.
해변의 따스한 자갈, 해초들
입 벌린 조가비의 분홍빛 혀 속에 깊숙이 집어넣었던
하얀 발가락으로
우리는 세계의 배꼽 위를 걷는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포옹한다
수요일의 텅 빈 체육관, 홀로, 되돌아오는 샌드백을 껴안고
노오란 땀을 흘리며 주저앉는 권투선수처럼
방랑자
오래 걸으면
장화 속의 공기가
붉은 솜처럼 젖어들었다
공터 폐타이어에 앉아
검은 무릎 위로 불꽃을 날리는 작은 아이들
지붕의 암탉들
양철처마 끝으로 따듯하고 하얀 달걀이 굴러 떨어진다
그는 천천히 지나간다
막사의 해진 빨랫줄 아래
배배 꼬인 채
물방울 흘리는
여자들의 푸른 스타킹으로 이어진 국경을 따라
검은 숲은
몽상하는 자들의 어두운 녹색 방패를 번쩍이며
도시에서 날아오는 대다을 막아내고
너도밤나무의 잘린 팔 같은 침목 위를
짓누르며 달려가는 기차바퀴
부서지며 날아오르던 잎새들이
고요하게 떨어진다
모노레일을 가로지르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의 주변을 맴돌면서
-저 기다란 두 개의 은빛 젓가락은
무얼 집으려는 거지?
회색의 풀들이
수챗구멍 위의 머리카락처럼 붙어 있는 시냇가
들릴 듯 말 듯 흘러가는
징검다리. 십이월 초. 흠뻑 젖은 양말로
이 별에서 저 별로
한 소녀에서 다른 소녀에게로
영원한 녹색에서 영원한 회색으로
건너뛰면서
대답해 보아
나는 누구의 연인인가?
얼어붙은 자신의 발들에게
마지막으로 그는 물었다
신발장수의 노래
나는 원인을 찾으러 오지 않고 원인을 만들러 온자
-기원전 387년, 헤라크산티페
저녁바람에 날아간 메모 중에서
너는 모르지 네가 황급히 떨어뜨린 슬리퍼 한 짝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오늘밤도 종이 울리고 나는 네가 흘린 슬리퍼들을 주우러 다니지
네가 뭘 보고 웃었는지 너는 잘 모르지
나는 일러주러 왔다
커다란 발을 가진 재미난 사내를 만들기 위해
무한히 신발을 줍고 있는 밤이야
다 가져가도 좋아
나의 젖은 손과 나의 취한 시간과 나의 목소리
고장난 시간들로 붐비는 시계를 좋아해 너는
잘 돌아가는 빅벤을 열고
작은 나사 하나를 던진다
혁명의 텔로스는 빛나는 구름 위로 숨겨드렸지
그러니 우린 그냥 지나가는 길에
뻐꾸기들의 익살스런 울음을 위해
5시 25분 26분 27분
쉬지 않고 노래하는 새들의 빨갛게 젖은 깃털을 위해
유리 숲으로 슬리퍼를 던지네
폭탄은 정각에 터지지 않네
구름은 매일 흩어진다네
그래도 저기 오는 가난한 유리장수
손목에 한 번도 시계를 차본 적 없는 추억처럼
나는 너를 사랑했네
하나뿐인 흰 발을 사랑했네
우리는 매일매일
흰 셔츠 윗주머니에
버찌를 가득 넣고
우리는 매일 넘어졌지
높이 던진 푸른 토마토
오후 다섯 시의 공중에서 붉게 익어
흘러내린다
우리는 너무 오래 생각했다
틀린 것을 말하기 위해
열쇠 잃은 흑단상자 속 어둠을 흔든다
우리의 사계절
시큼하게 잘린 네 조각 오렌지
터지는 향기의 파이프 길게 빨며 우리는 매일매일
앤솔러지
나에게는 다섯 명의 시인이 있지
첫번째 사람
그는 아파
모두가 떠나간 검은 빌딩의 불 켜진 한 층처럼
밤새
통증이 빛난다
눈먼 시간들이 부딪치는 어느 모서리에서
두번째는 용감해
유리 꽃잎이 부서지는
청춘의 안티노미에서 출발
목의 후드를 부풀린 코브라와 녹빛 총구들
침엽수림처럼 솟아오르는 국경을 향해
행진!
너는 곧 죽을 거야
라고
말린 넙치 위에 쓰인 글자들을
맛있게 씹으며
묽은 침 흘리며
다시 출발
-저런, 턱이 부서진다
그러니까
암살자 태양이 뜨는 백야에
세번째 시인은 의사 흉내를 내지
나는 아무도 없는 어두운 대성당이다
라고 그는 외친다
자기 그림자로 병자를 치료하던 성 베드로를 좋아해
네번째 나의 시인은 천재
그는 결코 노래하지 않아
바닥에 엎드려
영원히 입 맞추는 꿈을 꾸네
꿈의 꿈속에서 물고 있는
거대하고 말랑한 풍선 꼭지
별의 내부는 그의 숨결로 가득하다
마지막 한 사람은
엉터리
그의 갈라진 목소리 안데 또 다른 다섯이 살고 있어
저마다 녹색 침을 퉤퉤 뱉는
다섯 마리 새들을 키운다
새들은 깃털 수만큼의 이미지를 품고 있어
뽑힌 나무들 너머
덜덜거리는 굴착기 위에서
잿빛 깃털들이
여러 빛깔고
흔들리며
떨어지네
마지막 사람은 엉터리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
인공호수
죽은 식물과 동물의 냄새가
내 얼굴에 배어 있다
조금만 햇빛을 쬐어도
슬픔이 녹색 플랑크톤처럼
나를 덮는다
Summer Snow
진리는 낡아빠진, 그리고 감각적인 힘을 상실한 은유들이다
-니체
아담이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지?
아교에 늘어붙은 머리털들의 아름다움
바람이 검은 잔디처럼 불어온다
아담, 언 호수 밑엔
첫번째 도시가 있어
얼어가는 물고기
회색 벽이 내뿜는 물방울을 먹는다
그 물고기의 이름은?
불타는 지느러미
나는 시인입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어요
나는 불타버린 지느러미를 휘젓는다
거울 숲으로부터
사과 파는 여자가
쟁반에 두 개의 빨간 유방을 담아온다
아담, 너는 한입 가득 베어 물며
묻는다 이름이 뭐냐고?
나는 헤롯이며 요한의 잘린 머리
내가 죽인 모든 장자들의 아버지인
은유는 없다
그것은 푸른 얼음
따스한 구멍 속에서 녹아버렸다
아담, 이름이 뭐냐고?
그것은 우리가 오래전 떠나온 지하실
검은 달의 계단 아래
쌓인 참나무 술통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포도알의 오줌
그것은
사라지는 푸른 얼음의 거울
강바닥에 내리는 불탄 살갗의 눈송이다
호수 밑에는
첫번째 도시가 있고
눈보라 먹으며 지나가는 물고기가 있고
불타버린 이름들의
검푸른 수면이 물결무늬 모자이크를 만들며 얼어간다
물속에서
가만히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내가 모르는 일이 흘러와서 내가 아는 일들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떨고 있는 일
나는 잠시 떨고 있을 뿐
물살의 흐름은 바뀌지 않는 일
물속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푸르던 것이 흘러와서 다시 푸르른 것으로 흘러갈 때까지
잠시 투명해져 나를 비출 뿐
물의 색은 바뀌지 않는 일
(그런 일이 너무 춥고 지루할 때
내 몸에 구멍이 났다고 상상해볼까?)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조금씩 젖어드는 일
내 안의 딱딱한 활자들이 젖어가며 점점 부드러워지게
점점 부풀어오르게
잠이 잠처럼 풀리고
집이 집만큼 커지고 바다가 바다처럼 깊어지는 일
내가 모르는 일들이 흘러와서
내 안의 붉은 물감 풀어놓고 흘러가는 일
그 물빛에 나도 잠시 따스해지는
그런 상상 속에서 물속에 있는 걸 잠시 잊어버리는 일
어느 날
바다는 에메랄드빛 커다란 눈물방울이었다가 모래 한 알 속에 전부 스며들었다. 나는 흰 양파를 썰며 웃었다. 불꽃을 아무렇게나 던지며 너는 마멀레이드를 씹었다. 차가운 야구공이 운동장을 굴러다녔다. 수평선의 새들은 소리 지르며 파란색으로 추락했다.
흰 고래에게 한쪽 귀를 선물했다.
너는 오늘도 마셔야 했다. 하늘의 물렁한 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진흙 구름에 반쯤 묻힌 소라고둥,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아야 했다.
오렌지 만(灣) 위로 달콤한 태양이 떠올랐다. 해안선의 긴 혀를 따라 지붕의 자줏빛 이파리가 무성해졌다. 마음은 빗자루에 엉겨붙은 먼지덩어리였다. 호두나무를 닮은 여자인지도 몰랐다. 팔을 펼쳤다. 커다란 호두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놀이터의 끊어진 그넷줄처럼 흔들렸다. 모든 게 빛나는 한 쌍이던 시대는 가버렸어 너는 외쳤다. 쇳소리 나는 오후 내내, 사라진 오후를 찾아다녔다. 햇빛은 9회말 마지막 공격의 야구장이었다. 어디에나 가득했다. 나는 만루의 투수처럼, 외롭지 않았다. 호두까기 병정의 부서진 턱뼈가 상점 진열장 밑 마른 바닥에서 바스락거렸다.
나에게
하얀 소녀의 가슴처럼 머뭇거리며
조금씩 볼록해지는 의문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슬프고 흐릿한 오후들이여 안녕
금관악기들의 아름다운 구멍들이여 안녕
닫힌 책의 검은 표지들이여 안녕
뜨거운 빵의 흠집 없는 표면들이여 안녕
갈라지는 틈에서 태어나는 감각들
모닥불 위에 놓인 거북의 껍질처럼
딱딱한 책을 태워라
무엇인가 점쳐라
우연을 사랑하라
책 속의
불은 꺼졌다
난로 위에 무엇을 올렸는지 기억하지 마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의미보다 넓은 말-무성한 풀밭 위에
숫자는 숨겨졌다 유황냄새로 숲을 감싸고
진동의 발명가가 돼라
마지막 시를 달라
이 사물은 미학적으로 낡았지만 마음을 이동시킨다
저곳에서 이곳으로
흔들리는 물그릇같이 젖는 시인
늘 폐허로 돌아오는 사람
부서진 벽 너머 길게 펼쳐진 하늘 깃털을 좋아하는 사람
파란 깃털들이 천천히 내려앉는다
쟈스민 지뢰, 들장미넝쿨의 낡은 탱크 위에
여자와 아이들의 구멍난 얼굴 위에
깨진 목욕통에
가득 채울 물의 표정을 달라
실패한 시인
실패한 혁명
불꽃
분홍 플라스틱의 고약한 연기 속에서
다시 실패하라 더 잘 실패하라*
물속의 불꽃들
* Aamuel Becket, Nohow On (1989)
닭이 울기 전에
나의 등에 뚫린 구멍으로 새들이 날아오르고
마른 쑥의 씁쓸한 냄새가 찬 바닥에 깔린다
나는 어금니로 접속사들을 깨물어본다
사과 속의 오븐이 그립다
나를 모른다고 해줘
벌써 새벽이 온다
깊은 의미, 따듯한 빵과 쉽게 굳는 진흙 같은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너무 푸른 안개 자욱한 새벽이
혼자 아픈 날
말라가는 건초향기가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오후야
너를 기다리며 이파리 사이에 달린
검은 버찌알들 전부 빛나게 닦아놓았어 방문 앞엔
바람에 흔들리는 종이별을
문을 활짝 열지는 마, 약봉지들이 멀리 날아가네
먹지 않고 숨겨둔 알약들은
길 잃은 아이들의 손바닥에
가본 길로는 결코 되돌아가지 않을 오누이들에게
그런 자작나무숲과 새들에게, 너에게만 말해줄게
내 몸엔 점이 여섯 개야 나는 오늘 과일칼을 깎았어
고통과 긴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자는 살인에는 관심이 없대
아무래도 미치광이 같아, 아름답게 찌르는 일에 중독된
그리고 나는
검정 속의
오렌지 같아 아무래도 점점 흐릿해지는
이 병에서는 무슨 냄새가 날까?
페스트는 익은 사과냄새 홍역은
막 뽑은 깃털냄새가 난대
초록과 빨강 사이에서 문득 깨어나고 싶다면?
검지 손가락 위의 꿀 세 방울과 성난 말벌의 벌통 사이에서
화려한 접시 장식보다는 푸른 아스파라거스밭의 초조함 사이에서
오늘 밤엔 어떤 병을 앓고 싶니? 어떤 詩를?
내 몸엔 점이 여섯 개뿐이야
달아난 한 개를 찾으러 밤의 손가락이 무한히 길어지고 있어
잘려나간 밑둥들이 송진냄새 뿜어내는
그곳에서
마지막으로 너를 기다릴게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목도리
검은 토끼. 빨간 눈을 반짝이며 곱슬거리는 거짓, 또는 북구의 겨울처럼 긴 따스함을 목에 두르고 안녕하세요? 블라디미르 붉은 광장 묘지에 누운 빳빳한 검은 콧수염. 자본의 뚱보들은 옆구리가 환상적으로 따가우시네. 안녕하세요? 블라디미르 캄캄한 무대를 배경으로 꼬챙이처럼 솟아오르는 나무들. 거기에 찢어질 붉은 비단 바람 같은 고도를 기다리며 안녕하세요? 블라디미르 당신의 익살맞은 리스트를 좋아해요. 검은 설탕물의 흐르는 귀에 미끈거리는 오미자를 담그세요. 안녕? 소녀들. 안녕? 소년들. 검은 피스톨의 동그란 총구를 향해 발사되는 관자놀이의 피냄새처럼. 바지 압은 구름 블라디미르도 안녕? 이제 내 앞에도 탕, 탕, 탕 은빛 텅스텐 같은 서른여섯 개의 겨울이 배달되었어. 블라디미르블라디미르. 먼지들의 흩어지는 어깨에 잠시 흘러내리는 긴 이름 같은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목도리. 환상적으로 어여쁜 그녀가 검붉은 털실로 내게 만들어 준.
미친 사랑의 노래
여름
낡은 장미무늬 카펫 위로 걸어가
하얀 먼지를 털면서
방망이로 비의 투명한 심장 두드리며
돌멩이는
녹색으로
죽음은
막대사탕으로
노래는
치즈에 뚫린 구멍들로
(묘사하면서)
너의 늘어나는 다리를 부드러운 달의 접시에
꽂아라
새로운 기호의 쥐들이 달려오도록
가득한 마음
어둠 속 잔디에서
바질향기의 초록 스프링이 튀어오른다
정신없이 자다가 곰팡이냄새 어두운 보랏빛 벽에 얼굴 부딪힌다 겨울 하숙집, 차가운 바닥에 영인판 니체 전집도 쏟아버리고 내년엔 수목원으로 열리는 창문 있는 집으로 이사 가자 향기나는 목걸이만 걸치고 뛰쳐나가나는 벌거숭이 소년을 만나러 그땐 네게 따뜻한 호밀빵도 구워주지 기억의 커다란 자수정을 쥐오줌 얼룩진 천장에 빛나게 달아줘 휘어진 책장 치운 환한 창 너머로 노란 활자 촘촘촘 양탄자에 뺨을 대고 잠들던 시절, 책으로 집을 짓던
친애하는 비트겐슈타인 선생께
별빛이 젊은 예술가의 이마 위에
어둠의 긴 자루에서 빠져 날아오는 낫같이 찍힌 후
더 깊은 심연으로 되돌아가는 밤입니다
로댕 씨의 작업장은 아주 넓고 아름답습니다
저는 지르던 비명을 완성하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석고상이나 팔다리 없이 영원을 향해 애무의 몸짓을 던지려는 청동 토르소 사이를 거닐고 흰 라일락의 턴테이블에서 밤공기의 검고 낡은 음반이 돌아가며 흘리는 향기를 맡습니다. 타블로이드판 신문냄새, 새로 깐 파리대로의 타르 냄새, 노동자들의 오래된 가죽 장화냄새가 소음처럼 뒤섞이는 곳에서 저는 이곳 주인장의 명성과 그가 만든 조각들의 탄생과 죽음을 써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혀에 익숙한 맛이 아니라면 파리에 계속 머물기는 힘들겠지요. 이 고요하고도 소란한 저녁 무렵 친애하는 선생 재단 사무원의 갑작스런 전화에 저는 이런저런 상념에서 깨어났습니다. 선생께서 약속하신 금화 천 크로네를 받을 수 있는 몇몇 작가로 물망에 올랐음을 전하고 과거 다른 독지가로부터 지원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한없이 망설이면서 그것이 무척 소액의 지원이었다는 사실과 아마도 구약처럼 먼 시대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가 조금 어리석은 사람이었다면 제 목소리와, 회색 털 빠진 개의 간절한 눈빛으로 고리지어져 흔들리는 녹슨 사슬 소리를 혼동할 수도 있었을 테지만 사실상 저로 말씀드리자면 금화 따위에는······ 저녁마다 뜰 앞의 작은 돌들을 뒤집어 축축한 달의 뒤편을 어루만지는 저로서는······ 신시집과······ 빈의 끝없이 이어지는 니힐한 골목들만이 저의 텅 빈 심장 속에······ 그러나 선생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아내와 딸아이가 하나 있고······
존경과 감사를 담······
라이너 마리아 릴······*
* 릴케가 파리 근처 뮈동에 있는 로댕 작업장에서 지내던 시절 그의 영수증 묶음 사이에서 발견된 편지.
그림
도시 가운데로 난 길을 남자가 걸어갑니다
도시 변두리에서 한 여자가 수수께끼를 덮고 잠이 듭니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습니다
여자가 거리를 뛰어다니는 동안
남자는 푸른 플라스크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가 지하도와 안개 가득한 거리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도서관의 유리 기둥 위에 누워 책을 읽었습니다
박노해와 네루다에 밑줄 긋는 여자
잠과 엘리엇을 암송하는 남자
그가 음악회에서 첼로를 멋지게 연주하는 동안
그녀는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뚱땅거립니다 음악실 옆
작은 길은 숲으로 나 있습니다
동쪽에서 달을 몰고 오는 여자
그게 나의 이름입니다
서쪽에서 해를 타고 오는 남자
그게 당신의 이름입니다
더 높은 곳에 모든 걸 그리는 순간이 있어
오른쪽 그림과 왼쪽 그림을 잇습니다
다른 풍경은 검은 페인트로 간결하게 생략됩니다
70년대産
우리는 목숨을 걸고 쓴다지만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것이 비극이다
세상을 허리 위 분홍 훌라호프처럼 돌리면서
밥 먹고
술 마시고
내내 기다리다
결국
서로 쏘았다
나의 친구
별과 시간과 죽음의 무게를 다는 저울을
당신은 가르쳐 주었다
가난한 이의 감자와 사과의 보이지 않는 무게를 그리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곤충의 오랜 역사와 자본의 시간
우리는 강철 나무 속을 갉아 스펀지동굴로 만드는 곤충의 종족이다.
어제 달에서 방금 떨어진 예언을 나는 만져보았다
먼 우주에서 떨어진 꿈에는 언제나 무수한 구멍이 뚫려 있지.
어둠 속에서는 어떤 보폭으로
야광오렌지 알갱이를 터뜨려야 하는지?
어떻게 기계와 자유가 라일락과 장미향기처럼 결합하는지?
우리가 인간이라는 창문을 열고 그토록 높은 데서 뛰어내릴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대답의 끝없는 사막에
낯선 물음, 빛나는 피의 분수가 쉴 새 없이 솟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물론 모든 걸 그리는 건
내 마음 가득한 지하수, 어쩌면 푸르고 고요했던 강물이겠지만
너는 무심코 던져진 돌멩이,
강가에 이르도록 퍼지는 물음의 무한한 동심원을 만드는
너는 내 손에 쥐어질 얼마나 날카로운 칼인가!
높은 기념비, 예술가들, 철학자들, 위대한 정치가들보다도
나의 곁에서
어리석은 모세, 붉은 바다를 가르는 지팡이
확신의 갑옷을 두른 모든 시대의 병사들을
전부 익사시키는.
그것을 믿자, 강철 부스러기들이
우리를 황급히 쫓아오며 시간의 거대한 허공 속에서
흩어진다,
죽음과 삶의 자장(磁場) 사이에서.
그것을 믿자, 숱한 의심의 순간에도
내가 나의 곁에 선 너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신하듯
친구, 이것이 나의 선물
새로 발명된 데카르트 철학의 제1 원리다.
달로 가는 비행기
이 노래에 어떤 프로펠라를 달아야 할까
내가 스무 살이냐 열 살이냐
아기아기 내 아기
달이 부른다
내 비행기에 어떤 프로펠라를 달아야 할까
엄마의 눈빛 같은 달로
날아가는 비행기
나는 크고 단단한 날개를 원한다
고막이 터지도록 요란한 프로펠라를 원한다
내가 그린 빛나는 달로
내가 그린 요란한 비행기 날아간다
그림 속이 고요해
들여다본다
그림 속 달은 황달에 걸린 남자 동공 같다
그림 속 비행기는 프로펠라 같은 흰 꽃잎 달았다
내 한숨에 그림 속으로 바람이 분다
달로 가는 프로펠라가 한 잎 두 잎 날린다
내가 울다 고개를 든다, 저기 달로 가는 비행기
달이 긴 그림자 손으로
토닥인다
내일 다시 그려
유년 시절
너무 높은 푸른 벽돌로 둘러싸인 시간
따듯한, 반짝이는 거짓말로 된 시간
겨울 태양은 붉은 벨벳 장갑으로
토끼의 언 귀를 어루만진다
목덜미를 따라 얼음이 미끄러진다
놀라서 너는 어른이 되고
안개 속을 더듬거리며 공책을 펼친다
짙은 잉크의 서툰 문장 위에 빗방울
사브레 과자와 딸기나무 침대로도
잠들지 않는 불행들이 가시 울타리에 걸려 있다
요통은 달빛 모르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간다
너는 천천히 허리를 구부린다
부드러운 배 밑에는 차가운 물결
밤새 하얗게 패어가는 모래들과
낯선 해안으로 실려간다
잠 깨어 조개껍데기를 열면
떨리는 눈썹에 찔린 유년의 눈알들
깜짝 놀라 쳐다본다. 새빨개진 진주처럼
러브 어페어
그런 남자랑 사귀고 싶다.
아메리카 국경을 넘다
사막에 쓰러진 흰 셔츠 멕시코 청년
너와
결혼하고 싶다.
바그다드로 가서
푸른 장미
꽃봉오리 터지는 소리가
폭탄처럼 크게 들리는 고요한 시간에
당신과 입맞춤하고 싶다,
학살당한 손들이 치는
다정한 박수를 받으면서.
크고 투명한 물방울 속에
우리는 함께 누워
물을 것입니다
지나가는 은빛 물고기에게,
학살자의 나라에서도
시가 씌어지는 아름답고도 이상한 이유를.
나의 할머니
아침 거미줄로 뒤덮인 검은 장롱이었다
쿠마이의 여자 무당처럼 점점 줄어들었다
항상 커다란 치마를 입었다
바람의 부드러운 대패질로 모든 것이 얇아졌다
나의 오므린 무릎 사이를 빠져나가난 갈색 종이같이
킬킬거리며 그녀가 커다란 치마를 펼쳤다
기차 삼등칸처럼 함께 붙어 실려가던
탄식의 선홍색 의자들
노란 치자꽃잎처럼 겹겹이 모여든 세간에서 피어나는 술과 오줌냄새
썩은 이빨 나기 시작한 어린애가 소리 질렀다, 웃었다
오므린 입술의 주름을 타고 흐르는
한두 방울 알코올 속에서
장마가 지고 겨울이 몇 번 커다란 입을 벌리고 지나갔다
모든 순간과 짝 지어가는 고통의 무리를 가득 실은 방주를
얼어붙은 가슴으로 천천히 밀면서
그녀는 잎이 모두 진 월계수 가지에
한 장의 젖은 카드처럼 매달렸다
나는 가지를 툭, 부러뜨려 땅속에 묻었다
주어(主語)
먼지의 예절
지나가다 멈춰 선 짧은 목례와 같았다
다시 거울 위에 푸른 콩이 쏟아지듯
눈빛들이 흩어졌다
우리가 바람의 무덤 속에 매장하는 향기들
실패에서 풀려나오는 실을 감으려는
그림자 손가락 같았다
사물들은 올리브유의 초록처럼
내내 투명했다
다른 시간 속에허 활활 타오를 것 같았다
엉겅퀴와 찔레
노란 탱자나무가 반복되는 가시나무 뜰의 정원사
그의 눈먼 손가락이 그 이름들을 건드릴 때
붉은 피로 젖어드는 습자지의 식물들과 같았다
대기의 습도를 맞추기 위해
검은 휘장 속에서 뻐꾸기가 울고 있었다
티베트어로 묘사된 달밤, 세계는 읽을 수 없이 아름다워
천 개의 팔에 불안의 아이들을 안고
날아가는 천사와 같았다
너의 집 쪽으로 향하는 골목들의 미로
비단으로 된 계단
집 안으로 영원히 들어서지 않는
빛나며 찢어져가는 거리들과 같았다
누군가가 엄지로 폐동맥을 누르다 떼는 듯
불명료함의 심장에서 솟구치는
무언가와 같았다
서커스단과 파란 천장 같은 궁륭에서
별들이 떨어졌다
반대편으로 건너가기 위해
외줄을 놓아버린 곡예사 소년처럼
무한의 흰 손목을 놓칠 것만 같았다
어떤 노래의 시작
너는 추위를 주었다
나의 언 손가락은 네 연둣빛 목폴라 속에
버들강아지처럼
너는 어둠을 주었다
나의 눈은 처음 불 켜진 지하실의 눈부심 속에
입술이 나에게로 열렸다
향나무 불타는 난로의 숨결에 이어진
연통의 어리둥절한 뜨거움
너는 돈을 주었다
처음 산 물건의 기억, 작은 지우대 달린 연필
너는 내게 칼을 주었다
처음으로 애호박과 흰 손목을 썰어본 감촉
내게 눅눅한 이불을 주었다
자줏빛 고사리 냄새의 침묵이 떠도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죽은 별
포자(胞子)의 시간
그리고 야릇한 것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