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세붕 묘역(경남 기념물 33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주세붕선생 묘역 전경 |
조선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신재(愼齋) 주세붕(1495∼1554) 선생의 묘소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도 열성적이었다. 중종 17년(1522)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중종 36년(1541)에 풍기 군수가 되었다. 중종 38년(1543)에는 풍기 지방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뒤의 소수서원)을 세웠다.
명종 6년(1551)에는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해주에 수양서원을 창설하여 최충을 모시기도 하였다. 죽은 뒤 선생의 유언에 따라 고향에 장사 지내고 조정에서는 예조판서의 벼슬을 내렸다. 선생의 묘는 아버지 문보, 큰 조카 조의 묘와 함께 조성되어 있다. |
▲ 묘역 입구에서 조금만 걸어 들어가면 묘역이 보입니다. |
▲ 묘역에 오르면 3기의 봉분이 나란히 위치하고 있는데 가운데 봉분이 주세붕선생 묘역입니다. |
'목민과 도학, 구현 노력한 주세붕' 주간 경북인신문 2015년 01월 10일
[이재업의 儒佛 에세이] <연재-주세붕과 소수서원에 대해>
소수서원은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면서 또한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순흥은 우리나라에 유학을 최초로 받아들인 안향의 고향이다. 최근 영주시는 이 일대에 선비촌을 건립하는 등 새롭게 단장했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선비촌 안에 공자·주자·안향·주세붕·이황의 초상화를 조각해 놓았는데 공자는 유교의 조종으로서, 주자는 주자학의 태동시킨 주역으로서, 그리고 안향은 주자가 철학의 반열로 격상시킨 유학(주자학)의 도통을 우리나라에 가져온 분으로서, 주세붕은 그러한 도통의 연원을 강학할 수 있는 서원을 최초로 지은 사람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기에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인 것은 퇴계 이황을 조각해 놓은 상이었다. |
▲ 하단 봉분은 주세붕선생 큰 조카인 조(造)의 묘역입니다. |
▲ 봉분 앞의 상석 전면이 묘비를 대신하고 있습니다. |
소수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인물은 안향과 주세붕 그리고 안향의 후손인 안축과 안보다. 이것은 통상적인 제향방식이다. 도산서원에 이황과 함께 그의 고제 월천 조목이 배향된 것은 그가 도산서원 건립은 물론 물심양면으로 스승과 스승사후에는 가족들을 돌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소수서원에 퇴계 이황이 모셔져 있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알다시피 이황은 풍기군수로 재직할 당시 조정에 청원하여 소수서원이 사액서원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관례로 보면 당연히 제향 되어야함에도 무슨 연유인지 그렇게 되지못했다. 아마, 당시에 지역적으로 사람을 가르는 편향된 시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늦은 감이 있지만 늦게라도 영주시가 선비촌 안에 퇴계의 조각상을 모셔놓은 것은 어떤 연유에서든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
▲ 주세붕선생 묘역은 중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제향인물 -주세붕-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漆原)면에서 태어난 주세붕은 본관이 상주(尙州)이고,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1522년(중종 17) 생원 때 별시문과(別試文科) 을과에 급제한 뒤 정자(正字)가 되고, 검열(檢閱)·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다 김안로(金安老)의 배척을 받고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좌천되었다.
1541년 풍기군수(豊基郡守)로 나가 이듬해 백운동(白雲洞:順興)에 안향(安珦)의 사당 회헌사(晦軒祠)를 세우고, 1543년 주자(朱子)의 백록동학규(白鹿洞學規)를 본받아 사림 자제들의 교육기관으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 : 紹修書院)을 세워 서원의 시초를 이루었다. 그리고 서원을 통하여 사림을 교육하고 또한 사림의 중심 기구로 삼아 향촌의 풍속을 교화하려는 목적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서원에서 유생들과 강론(講論)하는 등 열성을 보였다. |
▲ 주세붕선생 묘역 전경 ▼ | |
그러나 처음에는 이 지역 사림의 호응을 받지 못하다가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의 사액을 받고 공인된 교육기관이 된 뒤 풍기사림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그 후 이를 모방한 서원들이 각지에 건립되었다. 직제학·도승지·대사성·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51년 황해도관찰사 때 해주(海州)에 수양서원(首陽書院:文憲書院)을 세워 최충(崔冲)을 제향하였다.
재차 대사성·성균관동지사(成均館同知事)를 지내고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에 이르렀다. <도동곡(道東曲)〉〈육현가(六賢歌)〉〈엄연곡(儼然曲)〉<태평곡(太平曲)〉등 장가(長歌)와 〈군자가(君子歌)〉등 단가 8수가 전한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칠원의 덕연서원(德淵書院)에 배향되고, 백운동 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에《무릉잡고(武陵雜稿)》, 편서로는《죽계지(竹溪誌)》《동국명신언행록(東國名臣言行錄)》《심도이훈(心圖彛訓)》 등이 있다. |
▲ 주세붕선생 묘역 우측 전방에서 바라 본 모습 |
주세붕에 관한 간략한 연보인데 그는 기실, 뛰어난 목민관이면서 훌륭한 학자였다. 주세붕이 황해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을 때 대간에서 주세붕은 학문이 깊어 성균관에 있으면 학생들의 훌륭한 스승이 될 것이고, 경연을 맡으면 임금을 도울 만한 인재가 될 수 있다하여 외직으로 보내지 말 것을 요청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임금은 그가 아니면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할 수 없다고 하여 관찰사로 내 보냈고, 풍기 군수로 재직할 시는 기근 때 백성들을 잘 구휼하여 당시 어사로 있던 이황의 형 이해로부터 가장 우수한 목민관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
▲ 봉분 정면에는 묘비, 우측에는 신도비, 묘역 전방 좌우로 망주석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 망주석이 사각이기도 하지만 망주석 중에서도 특이한 편입니다. 좌측 망주석에 새겨진 숙비인자(孰非人子) |
▲ 우측 망주석에 새겨진 수무부모(誰無父母) |
소수서원은 1541년(중종36년) 7월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듬해 1542년 8월, 순흥 출신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 8월에 사당 동쪽에 서원을 설립하고 이름을 주희가 강학한 백록동을 본 따서 백운동이라 했다. 주세붕이 소수서원을 건립하게 된 배경과 심경은 그가 도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고 불교의 폐단을 지적하는 상소에서도 드러나듯 그는 목민과 도학을 동시에 구현하려고 했다. 그는 안향의 후손인 안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
▲ 주세붕 아버지 주문보(周文甫) 묘역 전경 |
“부임한 후 며칠 만에 옛 순흥부에 이르렀는데 소가 울고 있는 숙수사 옛터가 있었다. 이곳은 문정공 안축이 ‘죽계별곡’을 지은 곳으로 신령한 거북 모양의 산 아래에 죽계가 있으며, 구름에 감싸인 산, 소백산으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 등 진실로 백록동서원이 있는 중국 여산에 못지않다. 흰 구름이 항상 골짜기에 가득하므로 감히 이름하여 백운동이라 하였다. 그리고 감회에 젖어 배회하다가 비로소 사당 건립의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지금도 서원 근처 바위에는 이황이 새긴 백운동이라는 글자가 있고 주세붕이 새겼다는 경(敬)자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다. 주세붕은 이 글자를 새기면서 사묘와 서원은 비록 허물어져도 경자만은 마멸되지 않고 천년 후에라도 경석이라고 불리리라고 하였는데 아직까지 건재한 것으로 보아 그의 예견은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
▲ 주세붕 묘역 뒷편으로 부모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
▲ 주문보선생 묘역 앞뒤에서 바라 본 모습 |
한편 주세붕은 죽계사와 도동곡을 지어 배향된 선현을 제사 지낼 때 노래 부르게 했다. 죽계사 3장은 안향의 신위 앞에서 분향하고 불렀는데 그 내용은 서원의 풍광과 안향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때까지 안향은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성리학을 전래하고 섬학전을 마련한 공이 있기 때문에 문묘에 배향되었다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세붕은 안향에 대한 세간의 이러한 저평가를 뛰어넘어 그를 우리나라 도학의 조종으로 받들려는 복심을 갖고 있었다. 즉 안향이 성리학을 이색과 정몽주에게 전수하는 등 도통의 연원이 안향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각시킨 것이다. |
▲ 주문보선생 묘역에는 묘비는 없으며, 봉분 전면 호석에 비문(세붕 撰, 밀양박준 書)이 새겨져 있습니다. ▼ | |
이렇듯 주세붕은 당초 서원 설립의 목적은 안향을 배향함으로써 성리학적 이데올로기를 갖게 된 것이고 이것은 곧, 성리학적 교화를 위한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주세붕의 이러한 생각과 시각은 대다수 풍기사림들이 서원설립에 반대하는데도 끝까지 굴하지 않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밀고 나간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이곳 사림들은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어 있는데다 향교가 있고 기근이 심하며 성현을 배우는 것은 그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주세붕의 서원론을 불필요한 교육기관이라며 배격했다. 그러나 그는 도덕적 질서 없이 세상이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켜 오늘날의 소수서원이 있게 했다. - 이하 생략 - |
▲ 주문보선생 묘역 후측면에서 바라 본 모습. 아래 위치한 원형 봉분이 아들 주세붕 묘역입니다. |
주세붕 선생 탄생지 유교마을 조성 유교신문 2014-10-16
백운동서원을 창건한 주세붕 선생의 탄생지가 유교마을로 조성된다. 경상남도 함양군(군수 차정섭)은 주세붕 선생의 탄생지인 함안군 칠서면 무릉마을을 유교마을로 조성한다고 밝혔다. 무릉마을의 유교마을 조성은 함안군이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 일반농산어촌개발 공모사업에 응모해 10억의 국비지원을 받게 됨에 따라 가능해졌다.
은행나무생태광장 등 기초생활 기반확충사업에 5억, 실개천 정비 등 경관개선사업에 3억, 그리고 지역공동체아카데미 등 주민역량강화사업에 2억이 단계적으로 투입된다. 무릉마을에서는 앞으로 유소년 대상 유교문화 체험교육을 운영하는 등 유교문화 활성화 사업이 진행된다. 함안군 관계자는 “이번 사업이 우리 농촌지역발전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창의적인 체험사업 등을 발굴하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적극적 노력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
주세붕 초상(보물 717호) |
주세붕 초상(周世鵬 肖像)은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로 가로 62.5㎝, 세로 134㎝ 크기이다. 주세붕(1495∼1554)은 중종 38년(1543)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후의 소수서원)을 세워 학문진흥에 힘썼다.
◀ 문화재청 사진 |
주세붕 영정(경남 유형문화재 142호) |
조선시대의 문신인 주세붕(1495∼1554) 선생의 초상화로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을 옮겨 그린 것이다.
검정색의 사모를 쓰고 앉아있는 모습이 어색해 보이고, 얼굴의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뛰어난 화가의 수법은 아닌 듯 하며, 풍만한 얼굴 인상과 큼직한 눈과 코, 짙은 눈썹은 마치 무인과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 문화재청 사진 |
주세붕선생 묘역 위치도 |
시작 지점에 주차. 빨간선 끝 지점에 주세붕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소재지 : 경남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576 |
지도 상단의 A 지점에 주세붕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주변의 IC들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
첫댓글 주세봉선생의 묘
뭔가의 학자로서 풍기는 전경이네요
집안의 가풍으로 묘의 조성도
그 오래전에 잘해 놓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