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못 성지
오천은 치안과 국방을 담당하던 수영(水營)이 있었고 수군 통제사가 있던 곳이다. 이곳 갈매못이 순교지가 된 이유중에 하나로 오천면에 속하는 외연도와의 관련성이다. 외연도(外烟島)는 황해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46년 6월에 불란서 해군 제독인 세실 함장이 세척의 군함을 끌고 서울 한강으로 진입하려고 하였으나 한강을 못찾고 외연도에 정박하여 당시 임금이었던 헌종에게 1839년(기해박해)에 불란서 선교사 앵베르 범 주교님, 모방, 샤스땅 신부님 등 3명의 불란서 선교사를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만 상자에 남겨놓고 돌아간 적이 있다. 이와 같은 세실 함장의 조선 영해 침입사건을 계기로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님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1866년 3월30일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들을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 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 수영으로 안 다블뤼 주교님, 오 오메트로, 민 위앵 신부님, 교우 황석두와 장주기 등 5인을 끌고와 외연도를 향하여 목을 쳐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는 병인양요때 불란서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였으나, 조선군은 이를 물리치고 나서 불란서군이 진출하였던 양화진 절두산에서 1866년 10월에 수천명의 신자들을 목베어 죽인 것과 같은 이유에서 이곳은 서양인 처형 장소 선정과 관련이 있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대원군은 경북궁을 다시 짓는 바람에 백성들의 원성을 듣게 되엇다. 거기다 북방에서 침략을 일삼는 러시아와 담판을 짓기 위해 불란서 주교를 불렀으나 공소에 나가 있던 주교가 이를 알지 못하여 지체하게 된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대원군은 드디어 박해를 일으킨다. 조선 제5대 교구장이엇던 다블뤼 안 주교는 대원군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만나려 했으나 실패하자 내포로 돌아와 전교에 힘쓰던 중 뜻밖에도 신부와 교우들이 마구 잡혀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관에 나가 잡힐 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얼마 후에 포졸들이 그가 머물던 합덕 거더리 마을로 왔을 때 잡힐 것을 예상, 동료 오 신부, 민 신부에게 자수를 권하는 편지를 보내 합덕 거더리에서 함께 포졸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1845년 조선 땅에 입국한 다블뤼 주교는 조선 교구 4대 교구장이었던 베르뇌 주교의 순교로 1866년 3월 7일 제5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됐다가 4일 만인 11일 그의 복사였던 황석두 루가와 함께 내표 지방에서 체포되었던 것이다. 다블뤼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들은 오메트르 신부와 위앵 신부도 자진해서 잡혀 서울로 압송됐다. 그러나 때마침 고종이 병을 앓게 되고 국혼(國婚)도 가까운 시기여서 조정에서는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못한 징조라 하여 이들을 250여 리 떨어진 보령 수영(保寧水營)으로 옮겨 처형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이들 네 명은 갈매못으로 향하는 250리 죽음의 행진을 떠나게 됐는데 여기에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 장주기가 합세, 모두 5명이 함께 자진해서 죽음을 향해 떠나갔다. 이들 세 성직자와 두 전교회장이 갈매못을 향해 가는 도중에 길목인 내포 땅 아산군 음봉면 길가의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걸리로 목을 추기고 마지막 설교를 한 다음 성가를 부르며 끌려갔다는 대목은 장엄하기 까지 하다. 그 때 그 바위는 지난 1973년 음봉 삼거리에서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광장으로 옮겨져서 '복자 바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84년 다섯 분 모두 성인품에 오른 후 '오성 바위'라고 고쳐 부르고 있다. 3월 30일 수난주일 충청 수사(水使) 앞에서 배교를 거부한 안주교가 제일 먼저 칼을 받았고, 이어 오 신부, 민 신부, 황 루가, 장 요셉이 차례로 치명하였다. 이때 다블뤼 주교는 조선에 입국한 지 21년이 되고, 전임 베르뇌 장 주교를 도와 9년간 부주교직에 있다가 조선교구의 제 5대 교구장이 된지 21일 되는 날이었다. 이들 5인의 순교 성인 중 황석두 루가 성인의 유해는 가족들이 거두어 연풍에 안장했고 나머지 네 분의 유해는 사흘 뒤 사형장 부근에 매장됐다가 홍산으로 옮겨졌고 브랑 신부에 의해 일본 나가사키로 이장, 다시 1900년에 명동 대성당, 1960년대에 시성 시복 운동이 전재되면서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장됐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갈매못 순교성지 소개지
승리의 성모성당, 2006년 10월말에 봉헌하였다. 승리의 성모성당 (새 성전) 승리의 성모성당
승리의 성모성당 성당 입구 십자문과 오른쪽 승리의 성모자상 승리의 성모상 성당 십자문
승리의 성모자상
승리의 성모성당 내부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승리의 성모성당 제대 승리의 성모성당 제대와 부활 초 승리의 성모성당 제대 십자고상
제대 독서대
승리의 성모 성당 한쪽 벽면에 있는 십자가의 길 14처 미사광경, 순례자가 많을 경우 성당 뒷문을 열고 뒷마당과 계단식으로 된 뒷산에 앉아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미사광경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승리의 성모 성당 뒷 마당
승리의 성모 성당 감실 옆에 있는 목각 성모자상 승리의 성모 성당 감실 옆에 있는 목각 성모자상
성체조배실 입구 석비 승리의 성모 성당 성체조배실, 성당 아래층에 있고, 색유리를 통한 은은한 조명이 아주 아름답다. 승리의 성모 성당 성체조배실 (출처- http://info.catholic.or.kr/) 승리의 성모 성당 성체조배실 승리의 성모 성당 제의실 승리의 성모 성당 제의실 승리의 성모성당 오르는 길의 십자가의 길
승리의 성모 성당으로 올라가는 경사로 모습이다. 2006년 10월 말에 봉헌된 성당으로 계단과 오르막 경사로를 통해 성당으로 올라갈 수 있고, 오르막 경사로 한쪽 벽에는 작은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워 기도하면서 올라갈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다. 성당 입구에 도착하면 십자문과 그 오른쪽에 승리의 성모자상이 세워져 있다.
승리의 성모성당 십자가의 길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성지 성모자상, 경당과 성당 사이에 세워져 있다.
성당 아래 사무실 옆의 십자가장식
구 성당 (경당)
갈매못이 순교 성지로 눈길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1975년 9월 대전교구 대천 본당 주임이었던 정응택(요한) 신부가 순교 당시의 위치를 확인하고 순교복자 기념비를 세우면서 부터이다. 그 후 1985년 9월에 다섯 분의 순교 성인 기념비와 야외 제단이 세워졌다. 이곳에서 순교한 5명 모두 1984년 5월 6일 성인 반열에 올랐다. 교구에서는 기념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경당
경당 옆모습 경당
조각가 김송필(클라우드)씨가 '성 황석두루가 회장' 성상과 함께 6개월 간에 걸쳐 제작한 다블뤼 주교 성상은 높이만 220㎝ 크기로, 오른손으로 구원의 세례를 베풀고 왼손에는 소박한 나무 목장을 들고 있는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성지내 성당 정문 좌우에 세워졌다. 경당 우측에 있는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1813-1866) 일명 '재건'으로도 불리는 성 황석두 루가는 충청도 연풍에서 양반집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하여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보러 상경하던 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다. 그 후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가면서 교리서적을 탐독하였고 그 결과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도 입교하였다. 이같이 뛰어난 덕행과 교리지식으로 그는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로, 또 회장으로 활동했다. 또 고 페레올 주교에게 금욕과 절제를 위하여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생활을 하였다.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여 교회서적 출판에도 참여했다.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는 안 주교를 몇 십리나 따라가 결국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장주기 등과 함께 군문효수형을 받고 54세로 순교했다.
경당 좌측에 있는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Daveluy) 주교(1817-1866) 상 오른손에 들고 있는 작은 그릇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물(세례수)을 형상화 한 것이다.
한국 이름은 안돈이(安敦伊), 조선교구 제 5대 교구장. 성 안 안토니오 다블뤼 주교는 한불사전, "신명초행", "영세대의"등 많은 번역과 저서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각고 끝에 자료를 수집하여 "조선 순교자 비망기"를 만들어내는 큰 업적을 이룩했다.프랑스 '아미앙'의 상류 가정에서 자란 관계로 한국 풍속에 익숙해지기가 퍽 어려웠고 더더욱 위장병과 신경통으로 고통이 심하였으나 굳은 의지로써 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고 한국말을 잘하고 또 보신탕도 즐기는 등 가장 한국적이었다. 그는 김대건 신부의 저 유명한 '라파엘호'를 타고 1845년 10월 조선에 입국하여 전교 신부로 12년, 보좌주교로 9년, 그리고 제 5대 교구장으로 22일, 실로 20여 년 간 이 땅의 양떼를 위해 봉사하다 마침내는 순교의 영광까지 누렸다. 안 주교는 병인년 박해가 일어나자 3일 11일 홍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동반 순교자인 민 신부와 주교의 복사 황석두 루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천주교에 대한 공격을 반박하여 다른 이들보다 너 포악한 형벌을 받았다. 때마침 왕이 병중이고 또 곧 결혼하게 되어 그의 처형은 서울 대신 충청도 수영 '갈매못'으로 결정되었다. 안 주교 일행(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장주기)은 곧 서울을 떠나 3월 30일 수영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형리들은 주교 일행을 마을에 조리돌리며 형 집행을 지연시키려 했는데 마침 이날이 '주님 수난 성금요일'이었으므로 안 주교는 그들의 계획을 반대하고 당일 사형집행을 굳이 요구하여 청대로 실행되었다. 형장인 '갈매못'은 수영에서 약 10리 떨어진 보령 지방의 강가인데 순교 장면의 목격자인 이 힐라리오는 "포졸이 맨 먼저 주교를 칼로 쳤다. 목이 완전히 베어지지 않고 반만 잘렸다. 주교의 몸이 한 번 크게 경련을 일으켰다. 이렇게 망나니가 목을 반만 벤 다음 수사에게 자기의 수고 값으로 양 400꿰미를 요구했다. 수사는 주겠다고 승낙했다. 망나니는 다시 안 주교에게 다가가 한 번 더 목을 치니 안 주교의 목이 몸에서 완전히 떨어졌다"고 전했다. 안 주교의 그 때 나이는 49세, 그는 예수께서 돌아가신 바로 그 날 어쩌면 바로 그 시간에 순교의 영예를 차지하였다.
성 다블뤼 주교 프랑스 후손들 방한 프랑스 아미앵교구 방한단(대표 버나르드 가페)이 2004년 4월 20일 열흘간 일정으로 방한, 아미앵교구 출신으로 제5대 조선대목구장을 지낸 성 다블뤼(1818~1866, 한국명 안돈이) 주교의 사목현장과 순교성지 그리고 한국 문화 전반을 직접 체험했다. 서울대교구 갈현동본당(주임 용동진 신부) 초청으로 내한한 방한단은 아미앵 교구장 장 룰 부이에레 주교를 포함한 25명으로, 이들은 다블뤼 주교 사목거점이었던 대전교구 당진군 합덕면 신리공소와 갈매못성지를 찾아 다블뤼 주교의 신앙적 숨결을 직접 호흡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다블뤼 주교의 유품인 중백의(수단 위에 입는 흰 웃옷)를 기증하였다.
성 황석두 루카 회장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 일명 '낙소'로도 불리는 성 장주기 요셉은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재 경기도 화성군 양감면 요당리)에서 출생했다. 1826년 영세 입교한 후 박해와 친척들의 방해로 충청도 배론으로 이사하여 회장직을 맡아보며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1855년 배론에 신학교가 설립될 때 자신의 집을 신학교로 쓰게 하는 한편 자신은 신학교에 딸린 토지의 농사일과 잔일을 맡아 했다. 1866년 3월 1일 배론 신학교에서 신 뿌르띠에 신부와 박 쁘띠니꼴라 신부가 체포될 때 그는 제천 부근의 '노럴골'로 피신했으나 다른 교우들이 피해를 입을까 염려되어 자수하여 서울로 압송되었다. 서울의 포청에서 고문을 참아내며 끝까지 신앙을 지켜 때마침 홍주의 '거더리'에서 압송되어온 안 주교, 민 신부, 오 신부, 황석두 루가 등과 함께 사형선고를 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군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6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성 민 루가 위앵 (Huin) 신부(1836-1866) 한국 성은 민(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 프랑스 '랑그르' 교구 출신인 민 신부는 1861년 사제가 된 후 1865년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로 백, 김, 서 신부와 함께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는 도착지인 충청도 내포에 머물면서 안 주교로부터 한국말을 배운 후 홍주 황무실에 부임하여 전교하였다. 1866년 3월 11일 안 주교가 체포되자 안 주교의 지시로 자수하여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악형을 겪은 후 사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형장이 충청도 수영으로 결정되어 안 주교, 오 신부와 함께 3월 30일 수영에 도착, 그곳 '갈매못'에서 당일로 군문효수되었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이 땅에 신앙의 씨앗을 뿌리고 주님 품에 안겼다.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Aumaitre) 신부(1837-1866) 한국성은 오(吳),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66년 병인년에 순교한 프랑스인 선교사. 프랑스 '앙굴램' 교구 출신인 성 오 베드로 오매트르 신부는 1862년 사제로 서품되어 이듬해인 1863년 6월 임지인 조선 땅을 밟았다. 그는 경기도 수원 근방 샘골에서 한국말을 익히고 곧 충청도 홍주의 '거더리'에서 전교에 종사했다. 그러나 1866년 박해가 일어나고 동년 3월 안 주교가 체포되자 한때 피신코자 배를 탔으나 거센 역풍으로 뜻을 못 이루고 다시 '거더리'로 돌아와 즉시 체포되는 몸이 되었다. 그는 동반 순교자인 안 주교, 민 신부 등과 함께 일단 서울로 압송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충청도 수영 '갈매못'에서 3월 30일 처형되었다. 오 신부는 안 주교 다음 두 번째 칼날에 29세의 젊은 나이로 자신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였다.
◆ 박 베드로 박 베드로는 본디 충칭 신창 사람이라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도리를 배워 열심히 수계하더니 창말서 살 적에 무진년에 홍주 포교에게 잡혀 "네 천주학을 하느냐?" 묻거늘 "내 과연 성교를 하노라" 하매 즉시 잡아 본관에 가 문목한 후 수영으로보내어 진 친 곳에서 베어 죽이니 나이 34세더라. 증인은 면천 찻티 사는 그 아우 박 필립보이다 (증언록 130번 224쪽,치명일기 727번, 수영). ◆ 손치양 사도 요한 손치양 사도 요한은 기해년에 치명한 손 안드레아의 사촌이며 흥주 거더리에 살더니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로 가 몇 달 동안 갇혔더니, 이에 대원군 아버지 남연군 묘 굴총하던 배 주인이라 하여 큰 죄인으로 잡아 수영까지 보내어 치명하니 나이 50세요, 때는 무진년 5월이라 증인은 재종손 요한이라. (증언록 85번 143쪽, 치명일기 728번, 충주) ◆ 이영중 본래 공주 서면 사람이라 무진년에 경포에게 잡혀 서울에 갇혔더니, 이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때 태워 온 배의 주인이라 하여 손치양과 한가지로 수영까지 끌고가 효수하니 나이 45세더라 (치명일기 729번, 수영) ◆ 이 발토로메오 본디 충청 덕산 사람이라 그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히 수계하더니 병인년 군란 때 경포에게 잡혀가다 도망하였더니 경오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수영으로 가 진터에서 참수되니 나이 24세더라 (증언록 130번 222쪽, 치명일기 730번, 수영) ◆ 임운필 임운필은 임 토마스(치명일기 636번 순교자)의 재당숙이라 여러 일가의 문장되므로 수하 사람을 잘 교훈하여 성교에 열심하더니 병인년 군난 때 모든 가족들이 많이 잡혀가 죽고 나미 많은고로 피하여 나가지 못하여 집에 있어 끝을 보려 하더라. 홀연히 수영 포교가 들어와 잡거늘 "내 집은 성교함으로 인하여 아랫사람들이 많이 죽고 나도 성교를 봉행하니 너희뜻대로 하라" 한즉 잡아 수영으로 가 수사가 문초한 후 즉시 교하여 죽이니 나이 70세라. 증인은 해미 마새 사는 그 재종손 임 베드로이니 나이 43세다. (증언록 120번 237쪽) 경당 내부
경당 제대
경당 감실 경당 내부
경당 모형물
경당 제의 경당 박해 조각 경당 박해 조각 성지 마당 성지 안내석 성지 안내석
예수성심상 예수성심상
순교성인비, 순교복자비 순교성인비 순교복자비
마당 십자가의 길 1처
2처
3처
4처
5처
6처 7처
8처
9처 10처
11처 12처 13처
14처
성지 사무실 |
출처: 성화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성화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