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dern JAZZ
BOB은 재즈에서의 그 확고부동한 위치는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 뒤 모든
재즈의 유형이 밥에서 나왔다는 건 거짓이 아니다. 현재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는 것들은 재즈 록, 퓨전, 팝 재즈, 뉴 에이지형의 재즈이지만 밥의 살아
숨쉬는 생동감과 뛰어난 Improvisation 은 견줄 바가 없다 하겠다.
30년대말 Benny Goodman, Glenn Miller,Tommy Dorsey 을 필두로 많은 뮤지션
등은 -특히 백인 음악인들- 뜨거운 스윙의 열풍을 등에 업고 고소득과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많은 음악인들이 대중들의 인기에 편승하면서 상업적
인 음악이 판을 치게 되었다.
그러나 Lester Young, Coleman Hawkins, Roy Eldridge 등 스윙 시대의 가장
선구적인 연주자들은 새로운 음악이 태어나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1940년경 일부 의식 있는 젊은 음악인들이 그 전과 다른 음악을 하기 시작
했는데 이것이 밥이다.
세션형태로 연주되는 이 음악에선 재즈의 본질인 즉흥성이 강조되고 리듬
파트가 보다 부각되었다. 이 전까지는 단순한 타임 키퍼 역할만을 했던 드럼
이 멜로디 악기와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또 밥 스타일의 즉흥 연주는
속도가 빠르고 자유스러운 풍부한 전개였다. 멜로디 흐름도 그리 순조롭고
감미롭지 않으며 잦은 싱커페이션을 사용했다. 밥 연주인들은 자신의 즉흥연
주를 위해 멜로디 진행보다 코드 진행에 더 중점을 두는 것 같다.
Charlie Parker (as), Dizzy Gillespie (tp), Thelonious Monk (p),
Kenny Clark (dm) 으로 대변되는 밥 스타일은 Miles 의 70년 `Bitch's blew'가
발표되기 전까지의 모든 재즈의 유형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빅 밴드
의 음악이나 스윙 스타일이 모두 전멸한 것은 결코 아니다. 빅 밴드의 음악이
40년대 중반부터 쇠퇴한 사실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그래도 항상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분야로, 별개의 존속 형태로 본다면 무난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으로 인해 재정 상태가 곤란해진 빅 밴드들의 잦은 해체가 캄보 형태의 재즈
를 형성하게 했고 밥이란 새로운 사조가 탄생하게 돠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밥이란 음악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방대한 모던 재즈의 역사를 말한다는
자체가 황당한 일이지만 되는 데까지 이야기해 보겠다.
40년대는 모던 재즈의 서막을 여는 시대였다. 전의 스윙은 댄스 음악으로서
대중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으나 음악적으로는 전체의 조화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즉흥 연주를 잘하는 실력있는 음악인들에게는 불만스러웠다. 그런 그들의 정열
을 만족시킨 것이 일을 마치고 몇몇이서 행했던 잼 세션이었다.
잼 세션은 캔사스의 흑인 음악인들에게서 많이 행해졌는데 그들 대부분이
뉴욕으로 진출함에 따라 더욱 성행되었다. 이 잼 세션의 역량있는 음악인이
바로 스윙과 모던을 이어주는 레스터 영과 찰리 크리스찬이다. 그 뒤 밤마다
클럽에서 연주되는 잼 세션은 비밥이란 혁신적인 스타일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모던의 시발이자 핵인 찰리 파커, 디지 길레스피, 셀로니어스 몽크는
이 새로운 음악을 하나의 사조로 재즈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다.
40년대 초의 비밥의 출현 뒤 45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 본격적으로 비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캄보 형태의 악단 구성이 정착이 된 것도 바로 이때부터
이다. 경제의 불황으로 빅 밴드가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나 비밥은 빅 밴드
의 팬들을 흡수하지 못했다. 사실 밥이 대중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전의 스윙에 판이하게 춤을 출 수 없다는 것이
그렇고 또 그에 따른 가수의 부족 현상도 그렇다. 즉흥 연주의 멜로디와 원래
곡과의 비교도 감상자에게는 어려운 문제여서 감상자가 즐길 여유가 없었다.
밥이 아무리 복잡하고 수준이 높은 연주를 추구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감상자
에겐 소용이 없다. 그래서 재즈는 퓨전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 음악의 흐름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찰리 파커가 정상에 있을 무렵, 비밥을 익힌 백인 음악인들 사이에서]
또다른 스타일이 생성되고 있었다. 당시 상황에서는 드물게도 찰리 파커의
영향을 받지 않은, 60년대에 보사 노바의 대중화에 앞장 섰지만 전에는 리 코니츠
와 같은 쉽고 가벼운 톤으로 연주했던 스탄 겟츠와 천재 맹인 피아니스트
레니 트리스타노, 그리고 그를 따랐던 리 코니츠, 원 마쉬, 빌리 바우워등이
바로 그들이다.
50년대는 재즈사에서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초반의 쿨의 탄생과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형성, 그리고 하드 밥의 출현이 바로 그것이다.
1.COOL의 탄생
쿨 재즈가 연주되었던 시기는 원래 46년부터 레니 트리스타노와 함께 했던
그의 제자(?)들이었다. 50년 마일즈에 의해 녹음된 쿨의 탄생 (Birth Of Cool)
에도 참여했던 리 코니츠는 트리스타노를 따르는 열렬한 추종자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쿨을 마일즈의 산유물로 생각하고 있지만 마일즈가
트리스타노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다는 추측은 그리 어려운 생각이 아니다.
쿨 사운드는 가볍고 드라이한 비브라토가 들어있는 톤이 기초가 된다.
50년에 녹음한 마일즈 9중주단의 쿨의 탄생은 밥의 연주 형식에 그리 강조되지
않던 편곡이 곳곳에 섞여있는 독특한 음악이었다. 40년대 후반에서 50년대 초에
걸쳐 쿨은 전성기를 누렸다.
2 .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형성
쿨 재즈는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국 전쟁으로
침체된 동부와 대조적으로 활기있던 서부 허리우드의 스튜디오 뮤지션들에 의해
형성된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은 부드럽고 건조한 감촉의 경쾌하고 가벼운 음색이
주류를 이루었다. 초기 밥보다 더 매끄럽고 릴랙스한 사운드를 연주했던 음악인들은
제리 멀리건 (Gerry Mulligan), 쳇 베이커 (Chet Baker), 데이브 브루벡 (Dave Brubeck),
폴 데스몬드 (Paul Desmond)를 중심으로 한 백인 플레이어들이 많았다. 치코 해밀튼,
쇼티 로저스, 짐 홀, 밥 브룩마이어, 멜 루이스, 아트 페퍼 모두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을 했던 이들이다.
3. 하드 밥의 출현
50년대는 웨스트 코스트와 하드 밥의 두 개의 재즈 스타일이 압도적이었다. 하드 밥은
웨스트 코스트보다 약간 늦게 발생하여 오래 존속되었다. 웨스트 코스트와 하드 밥의
차이점을 알아내기는 쉬운 일이다. 쿨에 영향을 받은 웨스트 코스트는 가볍고 밝은
연주에 단순한 임프로비제이션을 사용했지만 초기 밥에 직접 발전한 하드 밥은 어둡고
무거운 음색과 어려운 주법에 격렬하고 힘든 임프로비제이션을 사용했다. 흑인이 주류를
이룬 하드 밥은 흑인 가스펠의 요소를 갖추고 있었고 디트로이트나 뉴욕에서 인기를
끌었다. 하드 밥 플레이어로서는 피아노의 호레이스 실버, 토미 프래나간, 윈턴 켈리,
조 자비눌 등이고 색스폰의 캐논볼 애덜리, 웨인 쇼터, 소니 롤린즈, 존 콜트레인,
클리포드 조단이 활약했으며 트럼펫에서는 케니 도햄, 클리포드 브라운, 아트 파머가
명성이 높았다. 하드 밥의 견인차 역할을 한 아트 블레키는 약박이 강박보다 선행되는
싱커페이션을 원시적인 아프리카 리듬에서 분석하여 밥에 적용시켰다.
재즈사의 핵이라 볼 수 있는 50년대의 음악은 재즈가 가지고 있는 특질이 뚜렷이 나
60년이 되기 전, 웨스트 코스트와 하드 밥이 장식하고 있던 50년대의 뒷 모퉁이에선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모든 재즈인들이 도달하고 싶어했던 클래식의 접근이
바로 그것이었다.
클래식 연주인들이 도달해야 할 필생의 과제인 클라리넷의 황제 베니 굿맨은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재즈 음반보다는 클래식 음반이 더 눈에 많이 띈다. 비제의 칼멘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요절한 버드는 그의 임프로비제이션에 상당부분 클래식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하드 밥의 기수의 하나였던 모던 재즈 쿼텟도 50년대 후반에는 클래식의
접근에 시도하여 `Toccata For Trumpet And Orchestra' 같은 수준 높은 곡들을
남겼다. 뒤에도 많은 클래식컬한 작품을 남긴 모던 재즈 쿼텟과 써드 스트림과
아방가르드를 연결시켜주는 찰스 밍거스는 60년대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베이스와 피아노를 다루는 찰스 밍거스는 일반 캄보 형태에 첼로등을 넣어
보다 클래식컬하고 약간은 난해한 아방가르드 재즈의 선두 주자로 60년대
프리 재즈가 발생하게 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60년대 초까지 모든 재즈인의 무대였던 뉴포트 재즈 페스티발에 반발하는
일련의 음악인들은 좀 더 혁신적이고 파격적인 연주 형태를 원하고 있었다.
오네트 콜맨과 에릭 돌피로 대변되는 프리 재즈는 코드 진행에 중점을 두는
이전의 주법에 상응되는 무조에 의한 연주 형태를 취했다.
하지만, 프리는 말 그대로 음조의 완전한 자유와 템포와 강약의 완전한
자유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 연주에 대응하는 즉흥적인 자신의
임프로비제이션을 함으로써 집단 즉흥 연주를 꾀하는 음악 형태인 것이다.
그래서 상당한 실력이 아니면 프리를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네트 콜맨과 돈 체리는 프리 재즈의 환상의 파트너로 항상 흠 잡을데
없는 앙상블을 만들어냈다.
60년대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존 콜트레인은 마일즈 5중주단에서
나와 자신의 쿼텟을 결성한 뒤, 60년이 되기 전까지는 레드 갈란드와 윈턴
켈리와 연주하면서 자신의 낭만주의를 펼쳤다. 그러나 피아노의
맥코이 타이너가 들어온 뒤부터 콜트레인은 아프리카 음악과 접속시키는
실험적인 연주들을 했고, 결코 음조에 연연하지 않는 강하고 정열적인
연주로 그가 67년 에 죽을 때까지 많은 훌륭항 작품들을 남겼다.
한편, 획기적인 모드 주법의 'Kind Of Blue' 를 발표한 이후 마일즈는
길 에반스의 빅 밴드에서 편곡일을 했고 빅 밴드를 나와 68년에 자신의
새로운 그룹을 만들었다. 마일즈의 새로운 동료로 건반에 허비 행콕,
조 자비눌, 칙 코리아, 키스 자렛이, 베이스로 론 카터, 데이브 홀랜드,
마이클 핸더슨이 그리고 드럼과 퍼커션에는 잭 디조넷, 빌리 코햄,
토니 윌리암스, 에어토 모레이라가 새로 들어와 마일즈와 걸맞는 막강한
리듬 섹션의 철옹성을 갖추게 되었다. 새로운 동료들과 함께 일렉사운드의
접근을 시도하면서 드디어 70년에 그 유명한 'Bitches Blew' 가 나오고
나중에 그의 사이드맨들은 퓨전의 기수로써 활약하게 된다.
상업적으로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한 밥이란 음악은 댄스 뮤직이었던
스윙 재즈가 예술로서 감상의 대상으로 올라서게 하는데 그 의미를
크게 둘 수 있겠다. 즉흥 연주라는 것은 엄청난 실력을 필요로 한다.
재즈를 해서 유명해지고 돈을 버는 이들은 전체 재즈인들의 극히
일부분이다. 사실 알려지지 않은 많은 이들도 다들 훌륭한 실력자
들인 것이다. 지적이고 세련된 곡을 만드는데 클래식 작곡가들은
1년이 걸리지만 재즈 음악가는 3분이면 족하다고 Bob James 는
주저없이 말했다. 퓨전이 득세하는 요즘 한 곡의 밥 스탠다드는
듣는이의 가슴을 씻어줄 것이다.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