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머리에 피가 몰리고 소름이 돋았다. 가슴 속 저 깊은 곳에서한 무리의 야생동물이 달려오는 것처럼 웅웅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전화를 끊고 난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창 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환청처럼 희미하게 아베마리아가 들려왔다. 성악과 연습실에서 누군가 아베마리아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십 년만이었다. 내가 그녀의 번호로 전화를 건 것이.
아내가 내 연구실에 와서 통장과 도장, 그리고 카드를 압수해 간 날이었다.
좋은 며느리이고 좋은 형수이고 좋은 올케이고, 또 훌륭한 어머니인 아내가 내 연구실에서 한 행동은 거의 폭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아내에게 화는 났지만 미워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미워한다면 아내가 나를 미워해야 할 것이다. 아내가 내 연구실에 와서 그녀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은 모두 나의 잘못 때문이었다.
보름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논문을 쓰느라 바쁘기도 했고, 몽골에서 연구년을 보내기위한 준비도 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8월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지병이 도지듯이 매년 8월이면 자신을 방기하는 그런 행동들을 했다. 골목에 쑤셔 박혀 쓰러져 있었던 것도, 차 안에 에어컨을 켜놓은 채 잠들었던 것도, 일주일 내내 술을 마시고 병원에 실려 간 것도, 낯선 여자의 방에서 3박 4일 동안 잠 들어 있었던 것도, 누군가를 죽이겠다고 고함지르며 울었던 것도 다 8월에 생긴 일이었다.
연구실 문을 닫으며 아내는 말했다.
“이제, 나를 미워하세요.”
자신을 미워하라는 아내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내에게는 미운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 그 동안 아내는 잘 참았다. 오히려 긴 시간 너머에 있는 서영이 미웠다. 재 속에 남아 있던 불씨처럼 서영에 대한 미움이 불길처럼 일기 시작했다. 증오심이 내 이성의 통제를 넘어서는 순간,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난대요.”
“네. 정현준씨”
그녀는 그렇게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어제 만나고 오늘 통화하는 사람 같았다. 나는 온 몸을 떨었다. 오금이 저리고 아랫배에 통증이 느껴졌다. 봉인이 풀리고 묶여 있던 괴물이 천천히 사지를 펴는 것 같았다.
“집사람이 통장과 카드를 빼앗아 갔어요.”
나는 그것이 그녀의 탓인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그녀도 그것을 들어야 할 이유가 것처럼 들었다.
“그랬어요.”
“보름 동안 술 마시고 집에 못 들어갔거든요.”
“그랬군요.”
그녀의 순순한 대답 때문에 그녀에 대한 나의 분노는 사라져버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그녀의 숨소리가 들렸다. 그냥 그렇게 가만히 있어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가 말을 그치면 전화도 끊어 질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다음 학기에, 저 몽골 갑니다. 안식년이거든요.”
“중국과의 갈등은 진정되었나요?” ”
“중국은 신해혁명 후까지도 몽골을 속국처럼 지배했는데, 1920년경 몽골의 영웅 수흐바타르 장군의 지도 아래 러시아 적군의 도움을 받아 독립했습니다.”
“공산주의 정부로?”
“그 때 몽골의 인구가 100만이었는데, 소련은 군인과 민간인들을 100만 명 정도 이주시켜 경공업, 광산개발, 소비재판매 등 핵심적인 산업을 독점하면서 몽골을 실질적으로 지배했습니다. 소련연방이 붕괴한 후, 1990년 몽골은 실질적인 독립국가가 되고 또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지금은 민주주의 체재인가요?”
“1990부터 1992년 사이에 몽골은 복수정당 정치로 옮겨갔습니다.”
“그런데 중국은 아직도 몽골을 외몽고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자치주쯤으로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몽골인은 중국에 30일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지만 중국인들은 비자를 발급 받아야 몽골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구나.”
“그러나 몽골의 중국 의존도는 아주 높습니다. 중국이 국경을 막으면 몽골은 10일도 못가서 굶어 죽을 것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실제로 2006년도에 달라이라마가 몽골을 방문했을 때 중국이 국경을 1주일간 폐쇄했는데, 그 때 몽골의 물가는 거의 200%나 치솟았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나는 여행객으로 다녀와서 그런지 광막한 초원, 너무 넓어서 오히려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던 그 느낌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네요.”
나는 숨을 멈추었다. 서영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 것 같았다. 그녀의 숨소리 대신 안내방송이 들렸다.
‘봉체조는 연습실1로 초급 요가는 연습실2로 모여주세요. 여러분의 건강을 지키는 휘트니스 투데이입니다.’
“운동하는 중입니까?”
“네. 지금 프로그램 시작한다고 방송 하네요.”
‘30분부터 시작합니다. 등록 회원님들은 연습실로 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지키는 휘트니스 투데이입니다.’
다시 안내 방송이 나오고 서영은 전화를 끊었다.
휘트니스 투데이는 지하3층 지상10층의 스포츠 센터였다.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당장 그녀에게 달려 가야할 것처럼 조급증이 생겼다. 내 속에서 웅웅거리는 짐승의 소리를 들으며, 이를 악물고 어둠 속에 버티고 서 있었다.
서영은 나의 첫 여자였다. 대학에 입학한 그 해 봄은 공기 중에 분홍빛과 연두색을 살짝 뿌려 둔 것 같았다. 벚꽃이 지고 새잎이 돋았다. 그러나 버스를 내려 강의동까지 가는 길에는 흙먼지가 날렸다.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는 마른 꼬챙이처럼 줄지어 서 있을 뿐이었다. 모두들 축하한다고 하는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데, 고통스럽고 또 하염없이 슬프기도 했다. 나는 입술을 지근지근 씹으며 강의실로 도서실로 돌아다녔다. 오월이 되자 축제의 일환으로 토요일마다 연구동에서 세미나가 열렸다. 나는 학보사 견습 기자 신분으로 그것을 취재했다.
그 날은 종교문제연구소에서 주최한 세미나가 연구동 22층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미리 받은 순서지에 의하면 1부는 ‘무가를 통해 본 한국인의 인생관’이라는 제목으로 만속학과에서 주제 발표를 하고, 2부는 내림굿을 촬영한 영상을 보는 것이었다.
연구동은 빈 건물처럼 조용했다. 세미나 내용이 학생들에게 생소한 주제이기도 했지만 날씨 때문이기도 했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잔뜩 낀 춥고 음산한 날씨였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춘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누군가 짐을 옮기거나, 아니면 엘리베이터를 잡아 놓고 딴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연구동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 건물에 나 혼자뿐인 것 같았다. 그 때 계단 위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나의 온몸은 촉수로 변한 것 같았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나를 향해 다가오는 그를 기다렸다. 내가 멈추어 서자 계단 위에서도 누군가 멈추어 섰다. 나는 눈을 들어 그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늘색 봄 코트를 입고 파란 베레모를 쓴 여학생이었다. 계단의 좁은 난간에서 우리는 마주보고 서 있었다. 모든 소리는 사라지고 시간도 멈춘 것 같았다. 이 세상에 두 사람만 있는 것 같았다. 그 때 구름이 걷히고 그녀의 얼굴에 빛이 비치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이 과장되어 내 의식에 각인된 것은 그날 세미나에서 본 내림굿 때문이었을 것이다.
현대무용을 전공하고 시립무용단에서 수석을 했다는 젊은 여자는 그 날 신 내림을 받고 무당이 되었다. 내림굿은 해 뜨기 전에 시작하여 늦은 밤까지 했다. 신을 받아 모시고 난 다음 신어미가 새끼 무당에게 자신의 방울과 부채를 주었다. 그 때 신어미는 신딸을 위해 일종의 축원을 하였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구슬퍼서 평범하지 않은 그녀의 운명을 대신 울어주는 것 같았다.
그 날의 기억은 나에게 비현실적이고 불길한 느낌으로 남아 있었다. 봄 같지 않게 음산했던 날씨도 그렇고, 운명의 사슬 같은 굿이 주는 샤머니즘의 분위기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위험한 무엇 같았다. 계단에서 만났던 여학생에 대한 기억도 그 날의 분위기 때문에 생긴 나의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계절 내내 그것은 내 의식 깊은 곳에서 전설처럼 애틋해지고 신화처럼 비장해지고 있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친구들은 살아있는 여자를 만나야 한다고 놀렸다. 그리고 한 동안 친구들은 낯 선 여학생만 보면 나에게 말했다. 여기는 정현준 거기는 누구? 친구들은 그렇게 나를 놀리며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여자에 대한 집착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랐다.
그리고 가을이 되었다. 봄에는 마른 꼬챙이를 꽂아둔 것처럼 줄지어 서 있던 은행나무는 신록이 짙어질 무렵 잠시 노르스름한 싹을 틔우더니 가을이 오기도 전에 벌써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수강신청을 하고 한 학기를 다시 시작했다.
현대정치의 이해, 정치학 원론, 세계화와 국제관계, 민주주의와 공공성의 리더십, 권력의 이해 등. 그 때 우리가 들어야 했던 강좌였다. 법대 정원 120명 중 반 이상이 사법고시를 준비했다. 나도 3학년이 되면 사법고시를 쳐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함께 수업을 듣고 몰려다니는 그 순간들을 좋아했다. 그날도 금요일 3교시 수업 ‘권력의 이해’ 가 끝난 후 도서실 앞에 앉아 떠들고 있었다. 금희와 도경이 주로 말하는 편이고 나는 듣는 편이었다. 금희는 밝고 구김이 없고 순진했다. 그러나 직관력이 있어서 문제의 핵심을 잘 짚어내었다. 그 때 우리는 마키아벨리즘에 대해서 얘기했다.
“여우와 같은 간사한 지혜와 사자와 같은 강한 힘”
“군주에게는 군주의 도덕이 있고, 일반 국민에게는 그들의 도덕이 있다.”
“군주가 국가를 통치함에 있어 필요하다면 일반 국민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윤리에서 벗어나더라도 군주의 윤리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도덕과 정치는 별개의 영역이다. 어느 정도 맞는 말일까?”
“정치에서 종교적인 선을 기대하는 것은 심한 얘기이지만, 정치가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지. 그렇지 않나?”
“그가 말하는 것은 낡은 도덕이나 위선적인 종교이고, 또.....”
“강력한 지배자가 필요한 시대였지.”
“맞아. 분열된 이탈리아의 통일과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목적이 있었지.”
“그래, ‘불가피한 상황이라면 그리고 더 큰 정의를 위해서라면’ 이라는 전제가 있잖아.”
“권모술수를 피상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정치권력의 원리를 과학적으로 밝혀내었고,...”
“윤리의 영역에서 정치를 분리시켰다는 점이 중요하지.”
“그런 점에서 근대 정치학의 시조라는 평가를 받고 있잖아.”
금희는 교수님의 억양으로 얘기를 정리하였다. 그리고 안타깝다는 듯이 덧붙였다.
“마키아벨리는 단편적으로 이해되고 비난받는 것의 본보기인 것 같아.”
“그의 인생은 그가 죽은 후 다시 시작되었다고 한다잖아.”
“하기야 살아있는 나도 누가 제대로 이해해 주냐?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우리는 무리를 지어 식당 쪽으로 몰려갔다.
그 때 금희가 손을 들고 누군가를 불렀다.
“서영아”
한 여학생이 금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스웨터에 청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이 사내아이처럼 짧았다. 얼굴이 작아서 여자라기보다는 소년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우리 쪽으로 오다가 갑자기 멈추어 섰다.
“왜 무슨 일이야?”
금희가 뛰어 갔다.
“아니, 괜찮아.”
금희는 그 여학생을 데리고 우리 쪽으로 왔다.
“여기는 정외과 정현준.......”
금희의 말이 끝나기 전에 도경이 말을 받았다.
“그리고 거기는 누구?”
도경의 장난스러운 말에 그 여학생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윤서영. 신문방송학과.”
서영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맑았다. 그래서 그 눈에 내 모습이 비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친구. 소울 메이트 그런 정도는 아니야.”
금희와 서영은 다음 주까지 마쳐야 하는 리포트에 대하여 얘기를 했다. 금희는 서영과 미학개론을 함께 듣는 모양이었다.
“배고프지? 오늘 메뉴가......, ”
“김치 볶음밥, 떡라면, 국밥. 돈까스. 자, 골라봐.”
우리는 떠들며 왁자하게 식당으로 들어갔다.
도경이 조금 먼저 가서 식권을 사고, 나는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그러나 금요일에는 식당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줄을 서서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교직수업이 금요일 1.2교시에 몰려 있고, 교양 필수인 영어와 컴퓨터는 금요일 6.7교시에 있었다. 또 인문대 강당에서 하는 철학개론은 200명이 동시에 수강하는데 한 시 정각에 시작하였다.
우리는 여유 있게 테이블 둘을 차지하고 앉아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은 후 서영은 리포트를 준비해야 한다며 먼저 도서실로 올라갔다. 그리고 도경은 오후에 축구 시합이 있다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나는 금희와 함께 스쿨버스 승강장으로 갔다.
“바쁘니?”
“지금?”
“오늘 6시부터 8시까지.”
“신문사에 기사를 넘기고 나면, 별 일 없어. 그 다음엔 새끼랑 놀 생각이야.”
“새끼?”
“아, 고양이.”
“왜, 하필이면 이름이 새끼야? 욕하면서 카타르시스 하려고?”
“아프리카 어느 부족의 말인데, ‘나에게 기쁨을 주는 당신’ 뭐 이런 뜻이래.”
금희는 웃었다.
“새끼, 오늘 6시 시민회관으로 와라.”
“정말 욕하는 줄 알겠다.”
“네가 오늘 나에게 기쁨을 주는 당신이 되어주어야겠다.”
거절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시민회관? 6시?”
“응.”
“왜?”
“발레 백조의 호수”
“그런대?”
“나는 약속 있거든.”
“그래서?”
“그거보고 리포트 써야 해.”
“보고, 쓰고, 전부 다 하라고?”
금희는 두 손을 앞으로 모우고 부탁하는 시늉을 했다.
“그거, 비싼 표야. R석이란 말이야.”
R석이 아니라도 나는 금희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이 태권도 학원에 다니는 동안 어머니는 나를 발레 학원에 보냈다. 그 무렵 어머니와 함께 국립 발레단이 공연한 백조의 호수를 보았다. 24마리 백조의 군무는 내 기억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내가 정말 좋아한 것은 매튜 본이 안무한 백조의 호수였다. 에릭 쿠퍼의 도약은 힘과 관능미가 넘치고 맹렬하고 공격적이었다. 그의 근육은 하나하나가 힘으로 꿈틀거렸다. 그 후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이 남자라고 생각했다. 나의 고민을 들은 정신과 의사는 웃었다. 그것은 자기애의 일부라고. 그리고 나에게 헬스를 하라고 권했다. 결국 발레는 내 몸을 좀 더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으로 끝났다.
신문사에 갔다가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공연장에 갔다.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막이 열렸다. 샤워를 하지 않고 그냥 왔더라면 늦지 않고 여유 있게 도착했을 것이다.
궁중무도회 장면은 화려하고. 스물네 마리의 백조들이 호수에서 추는 춤은 여전히 환상적이었다.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것은 우아한 백조 오데트와 도발적인 흑조 오딜이었다.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나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데트를 저주에서 풀 수 있는 것은 지그프리드 왕자의 변치 않은 사랑이라는 말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다. 인간에게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가. 사람들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곧 객석의 불도 꺼졌다. 그리고 무대 장치를 치우기 시작했다. 미로를 빠져 나가듯 객석 사이를 걸어 나왔다. 누군가 출구에 서서 내 이름을 불렀다.
“정현준씨?”
빛을 등지고 서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맞네요. 정현준씨”
윤서영이었다. 나는 특별할 것도 없는 우연에 놀라움과 함께 가슴 설레는 기쁨을 느꼈다.
“윤서영씨. 우리 여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어요?”
서영은 웃었다.
“혼자 왔어요?”
“금희 대신에.....”
“아, 그랬구나.”
“그럼 공연을 보았으니 리포트도 써야겠네요?”
“어떻게 아셨어요?”
“금희와 같은 수업 듣거든요. 미학개론”
벽에는 홍보물이 붙어 있었다. 오데트의 아라베스크와 지그프리드 왕자의 아티튀드였다.
“배고프지 않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것 같아요.”
“방금 그 소리 들렸어요.”
“정말 들렸어요?”
“그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게 안 들릴 것 같아요?”
“아니, 머리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배에서는 꼬르륵거린다는 것이...... ”
“그래서 인간 존재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갈등이라고 하는 모양이지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혼자 웃었다. 도경과 친구들은 허리상학과 허리하학의 갈등이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 그것은 우리 수준의 음담이었다.
“여기 식당 쿠폰 있는데 같이 밥 먹을래요? 저녁 시간이 애매하잖아요. 그래서 티켓과 함께 식권도 구입했어요. 할인해주거든요.”
건물 위층에는 관람객들을 위한 쇼핑센터와 식당이 있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내 앞에 서 있는 서영의 머리에서 희미한 샴푸 냄새가 났다. 어쩌면 서영도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느라고 저녁을 못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패스트푸드부터 퓨전 요리까지 몇 가지 메뉴를 선택할 수 있었다.
“김치 볶음밥, 떡라면, 국밥. 돈까스. 자, 골라봐.”
서영은 그렇게 말하고 나를 보고 웃었다. 그것은 오전에 식당에서 내가 했던 말이었다.
“여기는 없는 메뉴 뿐 인데, 배달도 해주나요?”
주문을 받으러 왔다가 내 말을 들은 아르바이트생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또 웃었다. 나는 크림 파스타를, 서영은 해물 파스타를 주문했다.
“발레를 좋아하나요?”
“별로. 우선 공연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오늘 공연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점을 말씀하신다면.......”
서영은 인터뷰하는 것처럼 나에게 물었다. 나도 기자의 인터뷰에 답하는 관객처럼 말했다.
“음, 숭고의 극치로 상징되는 오데뜨와 공격적이고 간악한 오딜을 동시에 연기하는 발레리나의 대변신이 기억에 남습니다.”
“네, 러시아 인민예술가라고 불리는 볼쇼이 대표 무용수 스테파넨코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다는 칭찬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발레 백조의 호수 공연 현장에서 윤서영이었습니다.”
“정말 기자 같은데요?”
“백조의 춤에는 우아함과 숭고함, 비장함이 다 느껴져요.”
“오데뜨의 춤은 우아하고 오딜의 춤은 역동적이고..... ”
“백조의 춤에는 망설임과 주저함이 있었지만 흑조의 춤은 단호하고 강력했어요.”
“백조는 연약하고 불완전해서 상처받기 쉽고, 결국 무력했지만 흑조는 힘차고 강하다.”
“결국 악이 승리할 수밖에 없겠는대요?”
“다른 힘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예를 들면?”
“착한 사람이 이기기를 바라는 관객의 마음 같은 것..... ”
“선한 신의 개입 같은 것?”
“권선징악과 해피엔딩은 서영씨 만의 바람은 아닌 모양인데요?”
서영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오늘 공연은 차이코프스키 원작에 충실한 비극적 결말이지만, 오데뜨와 왕자가 행복해지는결말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해피엔딩이 좋은데.”
그 말을 하는 서영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손을 뻗어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나의 충동에 당황하여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영도 따라 일어났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서늘했다. 가을이 되면서 매일 조금씩 기온이 낮아지고 있었다. 서영의 하얀 쉬폰 블라우스는 추워보였다. 긴 팔이었지만 얇은 천이었다. 에스컬레이터 옆에 여성용 소품을 파는 코너가 있었다. 나는 그 앞에 가서 섰다.
“서영씨. 스카프 하나 골라볼래요?”
“어머니, 누나, 여자친구?”
“그냥 서영씨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주세요.”
서영은 보라색 스카프를 골랐다.
“손님에게 잘 어울리겠는데요. 목에 둘러보세요.”
판매원은 스카프를 접어서 서영의 목에 매어 주었다. 서영에게 잘 어울렸다.
“지금 세일 중이어서 가격도 비싸지 않아요.”
서영은 나를 보면서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웃었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판매원이 대신 했다.
“가을 꽃 같아요.”
나는 서영에게 말했다.
“밤이 되면서 기온이 내려가서, 밖에 바람도 부는데, 감기 들 것 같아서..... ”
말을 할수록 이유가 진부한 것 같았다. 서영을 염려하는 내 마음을 한 마디 말로 전할 수 없었다. 서영은 나를 바라보다가 방긋 웃었다. 그리고 설명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안다는 듯이 내 팔을 잡았다.
“선물이에요? 정말 예쁘고 마음에 들어요.”
그 때 한 우리 곁에 한 노인이 서 있었다. 머리는 거의 백발이었지만 자세는 꼿꼿했고 차림새도 험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노인이 물건을 사려는 줄 알았다. 그런데 노인은 무엇이라고 웅얼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소음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노인의 말이 내 귀에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 내가 처음 알아들은 노인 말은 그것 이었다. 노인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 모금 물을 찾아 하염없이 걸어야 할 밤이 오더라도.....”
그는 노인 특유의 방식으로 웅얼거리듯이 말했다.
“그대가 천 번을 죽어나간다 해도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예요."
서영은 내 손을 꼭 잡았다.
“이것은 피의 이야기,
사랑을 구하는 피의 이야기”
노인이 주술을 거는 것 같았다. 이제 주술에 걸려 윤회를 거듭해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버지, 여기서 뭐 하세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노인과 마주 서 있는 나를 보았다.
“아버지께서 무슨 말씀 하셨나요?”
나는 무엇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
여자는 노인을 데리고 가면서 말했다.
“아마 시나 평생 보셨던 책을 외우신 걸 거예요.”
노인이 가고 난 다음에도 서영은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하1층에서 지하주차장으로 가거나, 지하 지하철로 갔다. 그래서 시민회관 앞 광장은 넓고 비어 있었다. 가로등과 벌써 가을 색을 띠고 있는 플라타너스와 멀리 보이는 도로의 불빛.
“놀랐습니까?”
서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느낌이 이상하기는 했어요.”
서영은 내 손을 가만히 놓았다. 내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그 때야 깨달은 것 같았다. 그리고 말했다.
“무서웠어요.”
나는 서영이 놓은 그 손을 다시 잡았다. 그리고 서영에게 말했다.
“사실 나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리고 서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지난봄에도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거든요.”
"봄에...... “
“오월 축제 기간에, 세미나 취재를 하러 연구동에 갔는데.....”
“보통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2층까지 올라가는데, 그 날은 걸어서 올라가고 있었어요.”
네 손 안에서 서영의 손이 긴장한 것처럼 꼼지락 거렸다.
“계단에서 누군가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뭐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날씨 때문이었겠지요.”
“그렇지만 내 마음 속에 신화적인 원형처럼 남아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서영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여학생만 보면 나를 소개시키려고 하지요. 환상 속에서 현실로 나오라고, 오늘 서영씨 만났을 때도 그랬잖아요.”
“여기는 정현준 거기는 누구?”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그거 친구들이 놀리는 말이었어요.”
“봄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오늘 노인의 말을 들었으니.....”
“거절할 수 없는 운명의 손이...... ”
나는 장난처럼 말했다. 그런데 웃을 수 없었다. 그리고 서영도 웃지 않았다.
그러나 서영이 나에게 기쁨이고, 아픔이고
“제가 할 거 아니에요.”
“밖에 나가면 좀 서늘할 것 같아서..... ”
지난 십 년 간 나는 얼마나 자주 그녀를 보았던가. 길을 건너다가 마주 오는 그녀를 보기도 하고, 붉은 신호등을 받아 멈추어 서 있는 동안 지나가는 행인들 사이에 서 있는 그녀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치과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앞자리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내가 느낀 것은 그녀에 대한 살의였다. 나는 휘트니스 투데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러나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냥 앉아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였다. 이 시간이면 이곳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강기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렸다. 승강기는 유리벽으로 되어 있었다. 골프 가방을 든 사람들이 떠나고, 수영 가방을 든 사람들도 나갔다. 지난 10년의 시간이 그녀를 아줌마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알아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을 하자 변명거리가 생각난 것처럼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그 때 다시 승강기가 내려오고 있었다. 그 속에 탄 사람이 유리 상자 속에 든 인형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신음하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영아’
그녀였다, 지난 10년간 내 속에 살아있던 그녀였다. 모든 여자들의 모습에서 발견하던 그녀의 단편이 아니라 그녀 전부가 나에게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동안 온몸이 아팠다. 그녀는 승강기에서 내려 맞은편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나도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창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도시는 하나씩 불을 밝히며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죽어있던 거대한 생명체가 다시 그 몸을 일으키듯 도시는 그렇게 생기를 회복하고 있었다. 서영은 위스키 잔을 앞에 놓고 책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표정으로 가끔씩 문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한 눈에 알아본 만큼, 그녀는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 달라보였다. 힘센 손이 그녀에게서 살을 조금 훑어낸 것 같았다. 목은 더 길어 보이고 얼굴은 더 작고 갸름해보였다. 여전히 예쁘지는 않았다. 서영은 그 곳에 1시간 이상 앉아 있었다. 그러나 서영이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어나 문 쪽으로 갔다. 나는 그녀 뒤를 따라 나갔다. 내가 부르자 그녀는 몸을 돌리고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낯 선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아니면 나를 넘어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목소리에도 표정에도 의외라는 기색은 없었다.
“몽골에는 언제 가세요?”
“다음 학기, 아마 그 때쯤 갈 것 같아요.”
서영은 그냥 내 앞에 서 있었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면서 마주 서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난 듯이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뭐 하세요?”
나는 나의 질문이 적당하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서영이 그냥 앉아 있었다고 대답했을 때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한기를 느낀 것처럼 서영은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마음을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나야말로 서영의 어깨를 흔들며 묻고 싶었다. 무슨 일이냐고.
“나 좀 바래다줄래요?”
나는 서영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서영에게 택시를 잡아주고, 서영이 다시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나는 도시 가운데 막막하게 서 있었다. 갈 곳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와인바 하데스로 갔다.
하데스는 작지만 항상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다. 윤지는 조명 아래에서 검은 보랏빛으로 보이는 목이 파인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대부분 목에 다이아몬드로 깍은 가느다란 십자가 목걸이를 할 뿐 귀걸이도 하지 않고, 반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하데스가 번성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실내에는 M 라벨의 볼레로가 낮게 흐르고 있었다. 윤지는 한 남자의 시중을 들며 그의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이 곡은 같은 테마가 반복되는 것이...... ”
“지루하세요?”
“지루하지는 않은데......”
“그럼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요?”
남자는 고개를 오른편으로 슬쩍 기울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삶은, 말 그대로 그냥 사는 것일 뿐이니까.”
윤지는 남자의 말에 웃었다.
“단순한 것 같은데, 절정을 향해 가는 힘겨움 같은 것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 하잖아요.”
“고통스러운 삶을 드러냈다는 건가요?”
“그야 모르지요.”
“가만히 들으면, 서서히 불을 올려 물을 데우는 것 같아요. 그런 것이 삶인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손이 느껴지지 않아요?”
서영은 모리스 베자르가 안무한 볼레로 영상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루빈슈타인이 지휘한 볼레로를 먼저 알고 있었다. 관현악법의 완벽한 경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조르주 동이 춤추는 볼레로는 포르노그래피 같았다. 빨간 원탁 위에서 춤추는 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인 것 같았다.
고대의 제의가 성적인 부분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공감했다. 19명의 무용수들이 둘러싼 가운데 빨간 원탁 위에서 추는 조르주 동의 춤은 노골적이었다. 두 개의 주제가 반복되면서 크레센도를 향해 나아가고, 악기가 하나 둘 늘어나면서 음색이 풍부해지고 음량도 점점 커졌다. 그리고 그 반복의 리듬은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을 만들어 절정을 향해 나아갔다. 그것은 제사의식 같기도 하고, 절정을 향해 움직이는 성적교합 같기도 했다.
윤지가 내 앞에 와인 잔과 마른 과일을 가져다 놓았다. 그녀의 미세한 손가락 움직임에서 윤지의 기다림을 읽었다. 윤지는 내가 오늘 자신의 방에서 자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안다. 그러나 내가 그녀의 몸을 안고서 달려가는 그 환락의 끝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모를 것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연구실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잠이 깨었다. 연구실 창을 통해 하늘이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푸른 하늘을 보며 심한 공복감을 느꼈다. 술 마신 다음날 느끼는 속이 빈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서영에 대한 그리움도 허기처럼 간절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경이 문을 열고 머리를 안으로 들이밀며 말했다.
“일찍 출근한 거야? ”
“야, 들어올 거면 들어오고, 아니면 문 닫아,”
도경은 혀를 끌끌 차면서 연구실로 들어왔다.
“저 성질 하고는....... 또 연구실에서 밤 샌 거잖아.”
그리고 내 기색을 살폈다.
“어제...”
“어제 뭐?”
“아니, 제수씨 입장에서는 오래 참았잖아? 요즘에 그런 마누라가 어디 있냐.”
“누가 뮈래?”
“야, 그걸 알면 어제 같은 날은 집에 가서... ”
“맞아, 그래야겠지.”
내가 순순히 인정을 하자 도경은 더 말하지 않았다.
“야, 밥이나 먹으러 가자.”
“아침 안 먹고 나왔어?”
“나도 논문 마무리 하느라고 집에 못 들어갔어.”
“그 놈의 교수평가제가....”
“연구의 질은 떨어뜨리고 논문 편수만 늘여서 무엇을 하려는지. ”
“그래도 정박사는 교수평가제 시혜자 아닌가?”
도경은 나를 놀리는 것처럼 말했다.
“하기야, 그나마 논문 편수라도 있으니까 안 쫓겨나지, 그렇지?”
“개구신 짓을 한다는 것을 알기는 아는 모양이지?”
도경은 나의 등을 치며 웃었다.
도경의 석사 논문과 박사 학위 논문은 한국현대정치사에서 자주 인용되는 중요한 연구였다. 그러나 교수평가제가 시작되고 난 다음에 쓴 논문은 거의 읽을 만한 것이 없었다.
서영과 헤어진 후 하루에 18시간씩 책을 보았다. 학문의 순수함이 죽음 곁에 서 있는 위험한 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아내가 잡았다. 아내의 눈에 나는 술과 담배와 공부 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다.
“야, 정현준. 너는 좋겠다. 공부만 열심히 하면 학교에서도 안 쫓아내고 집에서도 안 쫓아내고,”
“그런가? 나는 참 착한 사람이네.”
“그래. 참 잘했어요. 도장 찍어줄까?”
“그럼, 어제 행패를 부린 것은 부당하지 않나?”
“뭐? 무슨 말이야?”
“술과 담배와 공부, 그것만 열심히 했는데......”
“야, 말 된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해라. 오늘은 집에서 자라. 알았지?”
“마누라가 원하는 남편이 그런 것이라니까?”
“야, 속이 비어서 헛소리 하나 보다. 할매집 순대 국밥 먹으러 갈까?”
“그냥 교수 식당 가자.”
“어제, 술 마셨잖아?”
“괜찮아.”
식당에서 합석한 생명공학부의 한 교수는 생물학저널에 실린 슬픈 거북이 얘기를 했다.
“독일 튀빙겐대학 연구팀이 메셀 화석 유적지에서, 암컷과 수컷이 한 쌍인 채로 화석화 된 것을 발견했는데, 이미 멸종된 ‘Allaeochelys crassesculpta’ 종으로, 교미 중인 상태였답니다.”
“이들은 4700만 년 전의 사랑을 화석으로 남긴 한 커플인 거지요.”
“매년 수많은 동물들이 죽거나 태어나며, 이중 일부는 뜻하지 않은 환경을 통해 화석으로 남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미 중에 화석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내가 어제 연구실에서 그런 행패를 부리지 않았다면 나는 서영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10년처럼 또 10년이 지나고, 다시 10년이 지나고 10년이 또 지나면 서영도 내 가슴 속 어느 지층에 화석으로 묻히고, 그리고 잊혀질 것이다.
모로코 남쪽 사하라 사막 이남으로 내려가면 온통 자갈뿐인 지역이 나온다. 그곳에는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민둥산에서 나무 막대기 하나 들고 자갈산을 들추는 아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은 공룡의 화석조각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그날 나는 그녀에게 내가 즐기는 녹차와 음악 테이프와 내 연구실에 있던 도자기 한 쌍 중 오른편의 것과, 그리고 복숭아 한 가지를 가져다 주었다. 학교 앞 과수원에는 그 때까지 복 숭아가 남아 있었다. 나는 주인을 부르고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가지째 복숭아를 꺾어 왔다. 그리고 내가 쓴 책을 주었다.물론 그동안 책을 전혀 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수업을 위한 교재이거나 아니면,이 분야 전공자들을 위한 번역이었다.그러나 이 책은 내 연구의 한 기점을 만드는 중요한 저서일 뿐 아니라,학자로서의 내 위치를 가늠하게 하는 연구 결과였다.그녀는 내가 쓴 책을 펼쳤다.마치 그녀가 내 마음을 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나의 책은 전문적인 것이어서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로부터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있었다.
“하루 열 여덟 시간씩 공부했습니다.”
그녀는 그 책 행간마다 담겨 있는 나의 증오를 읽지는 못할 것이다.
“대단한 열정이네요.”
“칭찬입니까?”
“아니요.아마 염려에 가까울걸요.”
“염려?나를 걱정한다는 말입니까?”
내 음성이 높아지자 그녀는 책으로부터 시선을 들었다.그리고 나를 보았다.
“아직도 나를 미워하고 있네요.”
그것은 탄식에 가까운 소리였다.
불과 얼마 전
나는 그녀가 가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잠깐만,전화 좀 하고요.”
그녀는 그 말을 하면서 일어섰다.
실내가 조용하여서 내가 앉은 자리에서도 그녀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옛날 친구를 만나서 저녁을 먹고 들어가겠다고 그녀는 누군가에게 말했다.자리에 돌아와 앉는 그녀에게 나는 시비 걸 듯이 말했다.
“나는 당신하고 친구같은 것 할 생 각 없습니다.”
“그러면 원수 할까요? 외나무 다리 에서 만난...”
나는 낄낄 웃으며 말했다.
“원수,그게 차라리 나을 것 같네요.”
그런 나를 그녀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그녀의 그 모습이 내 감정의 균형을 깨트렸다.거기서부터 일이 꼬인 것 같았다.저녁을 먹으러 간 곳에서 술을 주문했는데,나는 그녀에게 이것저것 여러 가지 얘기를 했다.아내에 대한 얘기도 하고 아이들 얘기도 했다.그리고 곧 몽골로 떠나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그러나 그 다음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긴 목의 커피잔을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몽골로는 언제 떠나지요?”
“지금이라도 가면 됩니다.”
“안식년?그럼 1년 동안만 있다가 돌아오겠네요?”
“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죽지 말고 살아 있어요.”
그 말을 하는데 갑자기 목이 메였다.나의 간절함과는 상관없이 그녀는 웃었다.
“나를 죽이고 싶다며?”
“네?”
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날 그랬잖아?”
아마 내가 술을 먹고 그녀를 죽이고 싶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그 날,내가 실수를 많이 했나요?”
“실수?실수....글쎄?”
나는 내 마음을 들킨 어색함을 감추기 위해 손가락으로 총 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빵 빵,킬러처럼 보입니까?”
“나는 그 총에 죽어서는 안 될 것 같은데...”
그녀는 혼자말처럼 그렇게 말했다.나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고 생각했다.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옛날에도 그녀는 지금처럼 나에게 높임과 낮춤말을 섞어 사용했었다.
“왜,무례하게 느껴져요?”
“아니.뭐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다 보았다.그녀는 나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말하기 시작했다.
“지난 번 나에게 죽어버리라고 소리 칠 때...”
그녀는 그 말을 하다가 잠시 멈추어 나를 보다가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그리고 잠시 후 천천히 말했다.
“이제 너무 오래 전의 일이어서 별 의미가 없겠지만,얘기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하고...”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이 궁금했다.그리고 두려웠다.
“20년 전,영덕에서...”
나는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슴에 예리한 칼날을 대는 것처럼 섬뜻한 느낌이 들었다.그리고 내 속에 들어있던 무참한 세월들이 아물지 않은 상처가 되어 다시 피를 흘리는 것 같았다.기억의 필름도 낡아서 끊어진다면 벌써 여러 번 끊어졌을 것이다.나는 그 순간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편집하고 재생하고,다시 또 복원하는 과정을 수십 번도 더 했다.
그녀는 대학원을 마친 후 영덕여고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그 때는 대구에서 포항까지 고속도로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도도 완전하게 개통되지 않았다.그래서 그녀는 그곳에서 자취를 해야했다.대부분 주말이면 그녀는 대구로 돌아왔지만 가끔은 학교의 일 때문에 오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 날도 그녀는 당직을 하느라 대구로 오지 않았다.나는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오후 4시 무정차를 타고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영덕으로 갔다. 6시 10분에 도착하여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그런데 그녀는 학교에 없었다. 5시 반쯤 야간 당직자와 교대하고 나갔다고 했다.자취방에도 그녀는 없었다.나는 그녀의 방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기다림의 시간이 점점 길어지자 내 마음 속에서 그리움이 염려로,불안으로 그리고 노여움으로,분노로 결국은 절망감으로 바뀌었다.
그녀의 자취방은 학교 뒤쪽의 개울을 건너,밭 가운데에 있었다.큰 방을 미닫이로 나누어,반은 주인 할머니가 쓰고 나머지 반은 그녀가 사용했다.마치 어린 손녀와 할머니처럼 두 사람은 같은 방에서 함께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그런데 가끔씩 할머니가 딸네 집에 가고 나면 그녀는 혼자서 잠을 자야 했다.그날도 할머니는 딸네 집에 갔는지 집은 비어 있었다.내가 그곳에 서 있는 동안 마을에서는 불이 하나 둘 꺼지고 완전히 어두워졌다.창조 이전의 카오스처럼 나는 어둠의 일부로 혼돈 가운데 서 있었다.멀리서 빛이 비치고 오토바이 소리가 들렸다.그리고 그녀가 한 남자의 등 뒤에서 내렸다.어둠을 밀치고 그녀의 모습이 내 앞에 드러나는 순간,나는 거의 폭발할 것 같았다.그러나 그것이 반가움인지 아니면 분노인지 나는 구분할 수 없었다.
훗날 내가 그 순간을 생각할 때에도 그 감정의 정체를 구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때 내 격정의 훨씬 많은 부분이 반가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노여움과 그리움이 복합된 나의 격정 앞에 파랗게 눈에 불을 켜고 서 있을 뿐,아무 것도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결국 나는 그녀에게 내가 믿지도 않는 폭언을 했다.
발정난 암캐처럼 헤매고 다닌다고.
그리고 1년 후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했다.
“그 때 나와 같이 영덕여고에 부임 했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은 일본에, 또 한 사람은 미국에 있고,박사 학 위를 취득한 후 대학으로 옮긴 사람 도 있답니다.물론 지금은 거의 연락 이 없지요.”
그 얘기를 하며 그녀는 나를 건너다 보았다.
“우리는 그곳에서 많이 답답해 했답 니다.그래서 더 많이 어울려 다녔겠 지요.특별히 할 일이 없으니까.그날 은 내가 당직하는 날이었는데,근무 교대를 한 후 함께 바다 낚시를 갔 지요.후포 등대 아래에서 바다를 끼 고 들어가면 아주 멋진 곳이 있거든 요.자식들은 다들 장성하여 도시로 나가고 노부부만 남아서,날씨가 좋으 면 배 띄우고 날씨가 궃으면 둘이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고,손님이 오 면 방 빌려주고 밥 해달라면 밥 해 주고....”
그녀는 정말 옛날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 날 오후에 우리 중 몇 사람은 노인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 로 나갔지요.그리고 나머지 사람은 할머니와 함께 저녁을 준비하기로 하 고...우리는 미주구리 몇 마리를 잡 아서 돌아왔습니다.저녁을 먹고 놀다 가 다른 사람들은 그곳 민박집에 남 아있고 저는 돌아왔습니다.다른 사람 은 그곳에서 자고 그냥 출근할 수 있지만 저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다가 나는 웃었다.그녀가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었다.그녀는 내게 왜 웃느냐고 물었다.나는 고개를 흔들었다.그러자 그녀는 테이블 아래로 내 발을 가볍게 찼다.
“에이,별 것을 다 기억하고 있네. 그 날 첫시간에 보충 수업이 있어서 돌아온 거예요.”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남의 집에 가서는 된장찌개도 안먹고 숭늉도 못마시고 화장실에도 못가고...,그 때는 그랬다.그녀가.
그녀가 택시를 부르려고하자 음악선생이 오토바이로 그녀를 태워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고 했다.
커피를 리필하는 동안 그녀는 테이블 너머로 나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잠시 후 말했다.
“사실 나는 배추장사를 할 생각도 하고 있었는데...”
배추장사는 그 무렵 우리 사이에 뗘돌던 은어였다.상대방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헌신한다는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다시 고시 공부를 해야할지 아니면 취직을 해야할지,지금 결혼을 해야할지 아니면 나중에 해야할지.불과 스물 다섯 아니면 여섯일 뿐인 그 때, 나의 고민이었다.젊음이 가능성이라는 것은 젊은 동안에는 모른다.젊은 그들에게는 그것이 버거운 짐처럼 느껴질 뿐이다.그러나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그것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진다고하더라도 그녀와 함께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가슴을 문질렀다.
“그 때 그렇게 말하지,왜 가만히있었어요?왜 설명하지 않았는데?왜나를 다시 부르지 않았는데...,”
나는 그녀와 헤어진 후 고통스러웠다. 질투와 분노 때문에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잠이 들었다.그러나 술이 깨는 새벽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있고 싶었다.나는 이제 그녀를 내 곁에 묶어두고 싶었다.사랑한다는 말과 생각,추상적인 관념만이 아니라 내 살과 뼈,내 생활의 일부로 그녀와 함께 살고 싶었다.사법고시를 그만두고 직장을 구하고 그리고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도교수을 찾아가서 취직자리를 추천해달라고 했다.지도교수는 나를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나는 이미 학교에서 유명인사였다.장학생으로 입학하여 재학 중에 고시에 패스할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받는 유망주였으나 제대로 고시를 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졸업할 무렵에는 학점이 모자라 교수회의에서 교수들 전원에게 공개적으로 미친 놈 취급을 받았고,술마시면 술통이고 욕하면 욕쟁이고,거의 인격파탄지경이었다.그런데 대학원에 진학하라고 말했다.유급조교를 하면서 석사과정을 마치면,시간을 줄 터이니 힘들더라도 살 수는 있을 거라고 말했다.
“사실 그 무렵 나도 불안정했어. 석사 학위를 끝낸 후 공부를 계속할 만큼 재능도 없고 또 돈도 없고... 게다가 그 무렵 어머니의 병이 암이 라는 것을 알았고...어쨌든 내가 너 의 불안과 노여움을 이해했을 때는 이미 나는 너무 멀리 와 있었어.”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런데 결국은 그것이 암이었던 것이다.정말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나는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또 그녀를 떠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무렵 나는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아프지 않았다면 나는 좀 더 오랫동안 성질이 고약한 너의 연 인 노릇을 했을까?아니,그렇지 않았 을 거야.나는 네가 나를 의심한다 는 그 사실을 용서할 수 없었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너를 나에게서 풀어준거야.”
“풀어주다니?”
“아,너는 못 느꼈니?”
“무얼?”
“대학교 1학년 가을....”
그녀는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대학교 1학년 가을,종교문제연구소 세미나에서였다고 말했다.그녀는 그 때 학보사 견습기자로 취재하기 위해 그곳에 왔을 것이다.그리고 나는 그 때 종교문제연구소에서 아르바이트로 자료 정리를 하고 있었다.
“토요일 오후이고 바람이 불고 비까 지 내려서 연구동은 빈 건물처럼 조 용했지.나는 마치 이 세상에 남은 마지막 사람같은 느낌이었어.”
비오고 바람부는 가을,아무도 없는 그 곳에서 그녀가 느꼈을 쓸쓸함을 생각했다.
“그 때 나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지.검은 옷을 입고 얼굴이 하얀
....”
“그게 누구지? 연구동에 사는 귀신 인가?”
“나는 숨을 멈추고 그가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는 말을 멈추었다.
“그래서 다가와서는,그 다음은?”
그녀는 잠깐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더니 깔깔 웃으며 말했다.
“나를 스쳐 그냥 지나갔지 뭐?”
“그래,그게 누구였는데?”
“그게 누군가하면?”
그녀는 아이에게 무서운 얘기를 해 주는 것처럼 몸을 앞으로 내밀고 말을 길게 뺐다.
“그래,그게 누군데요?”
“그게 바로,너다.”
그녀는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와서 숨을 잠깐 멈추었다가 작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나는 깜짝 놀랐다.
“어때 운명적인 만남처럼 느껴지나요?
“나는 전혀 기억이 없는데. 2학년 봄,그 때 하늘색 코트를 입고 정 금희 옆에 앉아 나를 째려보던 그게 처음 기억인데..”
“3학년 2학기 ‘현대문학의 이해’ 를 듣고 대학원에 가야겠다고 결심하 기 전까지,우리 정말 농땡이었어요.
앞에서 교수님이 수업하는데 살금살금 기어서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고.하 여튼 웃기는 짓은 다하고 다녔으니까. 그 날도 3교시 고시가론을 마친 후 도서실 앞 벤치에 앉아 우리는 떠들 고 있었는데,금희는 얘기하고 나는 주로 들었지만...”
나도 그 순간은 기억한다.금희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우리과 동기인 성재용과 민규,경재였다.나는 그들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냥 도서실을 향해 걸어갔다.그 때 누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았다.내가 그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나는 그녀를 보았다.그녀는 내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던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아주 묘한 느낌이었다.어머니와 동생 이외에 낯선 여자의 얼굴을 그렇게 정면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째려보았다고요?”
“거의 그것하고 비슷한 느낌이었지.”
“그 때,나는 주문을 걸고 있었답니 다.저 사람을 나에게 달라고.나에게 로 오라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나는 그녀에게로 갔다.그녀는 나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듯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영덕에서 질투와 의심에 사 로잡혀 분노하는 모습을 보며,이제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
20년이라는 세월을 넘어 나를 미칠 듯이 흔들었던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나는 처음 순간부터 그녀에게 몰두했다.만난지 이틀 만에 대학노트에 다섯 장이 넘는 장문의 글을 써서 그녀에게로 갔다.그것은 프로포즈였다.
성재용을 비롯하여 나의 친구들은 그런 나를 비웃었다.예쁘지도 않고 부잣집딸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안달을 하느냐고.사법고시에 패스하고 나면 예쁜 여자들이 너의 출세를 위해 돈과 권력, 그 모든 것을 준비하고 줄서서 기다릴테니 정신차리라고.
3학년 가을에 그녀는 금희와 함께 기숙사에 들어갔다.금희는 무역사 시험을 준비하고 그녀는 대학원에 갈 공부를 했다.나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그녀를 만나러 여학생 기숙사로 갔다.여학생 기숙사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고 잔디밭이 넓었다.나는 그 연못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잔디밭을 가로질러 나에게로 오는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기쁨이었다.그리고 그녀에게 편지를 주었다.그러나 그녀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그 순간의 감정은 변하고 편지만 남아 자신을 부끄럽게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나를 좋아하기는 했냐고.나의 질문에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해가 질 무렵 내가 잠깐이라도 너 를 생각하면,전화가 오든가 아니면 너는 벌써 내 뒤에 서서 웃고 있었 어.”
3학년2학기,나는 쌍계사로 들어갔다.정말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1년 동안 열심히 하여 고시에 합격해야 했다.열심히 했다.엉덩이가 무르고 새 살이 돋았다.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그녀가 보고 싶었다.어떤 날은 정말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았다.그러면 나는 산을 내려와 그녀에게로 갔다.
“그래서 내가 부르면 항상 내 곁으 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지.
나는 어느새 너에게 신화적인 순결성 을 부여해 버렸어.”
그녀가 백발마녀의 전설에 대하여 얘기 했던 것이 생각났다.그냥 통속적인 무협영화의 한 에피소드였지만,그녀는 그것을 몇 번이나 말했었다.순간의 의심으로 사랑을 잃어버리고 눈덮인 산에 앉아,백발로 바뀐 자신의 여인을 기다리는 남자.그 남자는 자신의 여인을 만나 그 백발을 다시 푸른빛 도는 흑발로 바꾸었을까?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어떻게 그런 상상을 할 수 있었지?우리는 우스울 만큼 순진했잖아?”
그녀는 웃으며 물었다.정말 나는 지나칠 만큼 조심했다.그녀 가까이 서 있으면 온 몸이 그녀를 느끼고 있었다.마치 강한 자기장이 있어서 나를 당기는 것 같았다.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서고 걷고 앉았다.그 자기장 속으로 들어가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내 머리 속에 있는 유일한 여자였다.내 몸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든지,내 머리와 내 가슴 속에 있는 여자는 오직 그녀밖에 없었다.그러므로 그녀는 가장 아름답고 순결하며 동시에 가장 음란한 나의 여자였다. 그녀도 이제는 알 것이다.
“그 밤에 나를 의심하지 말고 차라 리 안아주었더라면.어쩌면 그것이 나 의 마지막 껍데기였을지도 모르는데. 두꺼비의 껍질을 벗고 공주가 되었을 지도 모르는데,마법에서 벗어나 잠에 서 깨어날 수도 있었을텐데.왕자의 사랑으로 사람이 되었을텐데”
그녀는 시를 읊듯이 그렇게 담담하게 말했다.그리고는 한참 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건이 학교에서는 일종의 스캔들이었다고 말했다.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는 아무 생각 없이 어머니 간호만 했지.”
“수술을 하고 항암 치료를 받고, 통원 치료 기간을 거쳐 집에서 안정 하는 시간까지 1년이 걸렸어.그 때 는 일년 내내 구름끼고 바람불고 비 가 내렸던 것 같아.어머니 곁에 앉 아 있으면 바람 소리와 계곡에 물이 불어 거세게 흘러가는 소리가 들렸어. 그런데 어느 날 커튼을 닫다가 하늘 에 별이 떠 있는 것을 보았지.
어머니가 잠든 후 집 앞에 있는 공 원까지 걸어갔어.종일 비가 왔기 때 문에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어.나는 회전목마 앞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았 어.계곡을 따라 물 흐르는 소리와 밤에만 맡을 수 있는 약간 비릿하면 서도 신선한 냄새가 났어.
울었어.처음에는 눈에 안약을 넣은 것처럼 눈물 한방울 툭 떨어졌지. 그리고는 수도꼭지 잠금장치가 고장난 것처럼 눈물이 흘러나왔지.한 시간 쯤 후에 집으로 돌아왔어.그리고 네 가 쓴 편지를 다 챙겨서 박스에 넣 었어.그 박스는 패물상자로 쓰기 위 해 나무로 정교하게 만든 것이었어. 나는 그것을 옷장 속에 넣어두었어. 그런데 며칠 후 내가 산책을 갔다가 돌아오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은수 저랑 몇가지가 없어졌다고,내 방도 확인해 보라고 말했어.그러나 나는 잃어버릴 만한 값진 것을 가지고 있 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있는 시간에 도둑이 들어오지 않은 것만을 다행으 로 생각했어.그런데 옷장을 열다가 무심코 그 상자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어.처음에는 내가 다른 곳에 둔 것이 아닌가 한참 생각했어.그런데 찾다가 없으니까 네가 다시 가져간 것처럼 생각되었어.아마 도둑은 내 방에서 가장 값진 것이 그 상자에 들어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야.네가 나 에게 있었다는 것을 증명 할 유일한 물건이 사라진 것 같은 생각이 들었 어.그리고 우습게도 그 다음 날부터 매파가 줄을 이었어.마치 그 상자가 있는 한 다른 남자는 내게 접근할 수 없었던 것처럼.
행정고시 패스한 사람,약사,치과의사 어느 국회의원보좌관 등등.”
그녀는 물을 마시려는 것처럼 컵을 들었다.그러나 마시지 않고 다시 놓았다.당시 중매판에서 매긴 그녀의 상품성은 어떠했을까?
‘키 163, 몸무게 48,석사과정 마치고 박사과정 준비중, 4남매 중 둘째, 언니는 외국계 회사대리와 결혼하여 미국거주,동생 하나는 서울대 재학 중, 막내는 고등학교 재학 중.아버지는 공무원 부동산 약간 있음’
“그런데로 상품성이 있었을 것 같은 데,왜 팔려가지 않았지?”
“그들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이었어 그들은 평생 먹을 재산에다가 평생 헌신할 육체를 가지고 자신에게 올 여자를 구하고 있었을 거니까.
게다가 나는 그 당시 내 한몸 부양 하기도 벅찬 상태였는걸.
그리고 중매하는 아줌마들이 우리집에 들락날락하는 동안 깨달은 것이 있었 어”
그녀는 설명하기 어려운 듯 단어를 여러 가지로 바꾸어가며 말헸다.그녀가 어떤 미사여구로 수식하여 말하든 그것은 한가지 얘기였다.자신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 자신을 잠깐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곧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알고는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그래서 늘 불안했다는 것.그 말을 들으며 화가 났다.
“정말, 한 방 칠 것 같은 얼굴인 데?”
그녀는 나의 분노를 위로하듯이 손을 가볍게 저었다.그리고 말했다.물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그 동안 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지극한 마음으로 대했는가를 알고 있었다고.그리고 돌아가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그럼 미안하다고 말하지 그랬어? 아니 전화라도 하지....”
“두 번,전화를 했지.”
어머니는 내가 모처럼 마음먹고 공부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셨다.그래서 그녀가 전화했다는 것을 나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으로 안 되면,또 했어야지?”
“내가 그 얘기하지 않았던가?내가 보고 싶다고 생각을 하면,내 생각에 답하듯이 전화가 걸여오든가 아니면 벌써 내 뒤에 서서 웃고 있곤 했다 는 걸.내 사랑의 마법은 풀려버린 것 같았어.”
그녀는 더 이상 내가 자신에게 속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가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석사과정에 등록한 후 나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학부과정에서 미흡했던 부분을 보충해야 했고,우선 유급조교로 학교의 업무를 처리하기에도 분주했다.그러나 매일 다짐했다.나는 곧 그녀에게 가리라.그리고 누가 무어라고 말하더라도 반드시 같이 살리라.함께 밥먹고 함께 웃고 함께 잠들고,그렇게 같이 살리라.그런데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한 자료를 조사하러 자료실에 들렀을 때,그녀의 친구 금희로부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녀를 죽이고 싶은 증오심으로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잠도 잘 수 없고 밥도 먹을 수 없었다.객관적인 자료 속에 나를 몰아넣고 내 머리 속에 그녀가 남아있지 못하게 문을 닫았다.모두들 박사학위 논문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칭찬을 하였다.그 해에는 박사과정에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교수 전원이 나를 추천하였다.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지우기 위해 공부하고,그녀를 잊기 위해 공부하고.이미 나는 이 분야에서 무시할 수 없는 논문을 여러 편 썼다.그런데 그녀에 대한 증오심은 잦아들지 않았다.
나는 그녀에게 몽골로 같이 가자고 말학고 싶었다.몽골 학국어 학당에는 한국에서 파견된 교사가 많았다.그 곳에서 일년 만 있다가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 때 그녀가 갑자기 말했다.
“나를 사랑하세요?”
그럼 사랑하지.너를 사랑하지.그러나머리 끝까지 피가 몰리며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증거를 보여주세요.”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이 가슴을 열어 보여주랴?어떻게 하면 내 사랑을 너에게 보여 줄 수 있단 말인가?그녀는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말했다.
“내가 예쁜 동안만 사랑할거지요? 내가 미운 짓하면 미워할거지요?”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그녀는 잠시 멈추어 나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어때요?사랑을 구하는 어린아이 같 지 않아요?사랑받는 자의 불안이지요. 오랫동안 내가 그렇게 행동했다는 것 을 알아요.
그러나 아직도 어리석지만 이제는 더 이상 유치하지는 않아요”
나는 당황스러움을 누르며 물었다.
“이제는 사랑받는다는 것이 불안하지 않습니까?”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어떤 증거 를 보여주어도 그 사랑을 믿지 못하 잖아요?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그 믿음이 사랑의 증거이니까요.”
그녀는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그러자 그녀와 더불어 한 생을 산듯한 느낌이 들었다.나는 그녀를 증오함으로,그녀는 내가 믿음이 부족하여 잃어버린 그 사랑으로 또 다른 누구를 사랑함으로.
초원에는 일찍 겨울이 온다.풀들은 다 말라버리고 양과 말들을 데리고 징기스칸의 후예들은 이 겨울을 견디어야 할 것이다.그러나 곧 봄이 오고,또 봄이 올 것이다.나는 바람부는 초원에 그녀를 풀어주었다.내가 이름을 불러도 이 초원에서는 돌아오는 메아리가 없다.
제목:나의 누이,내 사랑하는 자
공기 중에 분홍빛과 연두색을 살짝 뿌려 둔 것 같았다. 벚꽃이 지고 새잎이 돋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버스를 내려 강의 동까지 가는 길에는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는 아직 마른 꼬챙이처럼 줄지어 서 있었다.
이렇게 죽은 것처럼 서 있다가, 다른 나무들이 신록이 짙어질 무렵 노르스름한 싹을 틔웠다. 그리고 가을이 오기도 전에 벌써 낙엽이 지기 시작했다.
많은 시인이 느끼고 말한 봄의 시작을 나는 실감하고 있었다.봄의 시작은 고통스럽고 또 하염없이 슬프기도 했다. 나는 입술을 지근지근 씹으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목적에 가장 충실한 존재, 그게 누구일까?”
“아마, 신이겠지? 선한 의지를 가진 전능의 신......”
그 때 금희가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소리쳤다.
“아, 알겠어. 목적에 완벽하게 충실한 것.......”
“뭔대 그게?”
“악마”
“뭐, 악마?”
“응. 망설임이 없잖아.”
“하기야 악을 행하기 전에 망설이는 것은.....”
“우리에게 양심이 있다는 것이지.”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는 단호함. 그것이 악마야.”
그리고 10년이라는 세월이 우리 사이를 무참하게 흘러갔다.
배꼽 아래로 무릎까지 풍성한 깃털을 단 이들은 모두 남자다. 덕분에 벗은 상체를 그대로 드러낸 이들은 단단한 근육을 보이며 부드러운 날갯짓을 선보이는 이율배반적인 몸동작으로, 객석의 마음을 흥분과 감동 사이에서 방황하게 한다. 이마에서 눈썹 사이를 까맣게 칠하고, 오른쪽 팔을 머리 앞쪽으로 구부리거나 허리를 90도로 꺾어 종종걸음으로 내달리는 모습은 영락없는 백조의 모습이다. 메인 백조가 뿜어내는 카리스마. 그가 한 번씩 고갯짓을 할 때마다, 두 팔로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사뿐히 뛰어오를 때마다 두 팔에 소름이 돋는다. 그의 상체는 생선뼈처럼 가지런한 갈비뼈 사이로 적당한 크기의 근육을 톡톡 드러내었는데, 근육도 성형수술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름답다. 그리고 춤. ‘춤을 얼마나 잘 추느냐’는 내적인 느낌을 끌어올려 외적으로 얼마나 정교하게 표현하느냐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메인 백조가 단연 돋보인 것은 바로 정교한 춤 동작, 포인(발레에서 발끝을 쭉 펴는 동작)한 발끝이며 어깨와 매혹적인 각도를 이루는 턱선에서까지 고혹적인 느낌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3막에서는 그 백조가 낯선 남자로 나타나 여인들을 유혹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몸동작이 얼마나 우아하면서도 섹시한지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다.
가 춤추는 백조는 감동적이었다. 내가 남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