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목어 함부로 잡지 마라- 헤스터 교수를 기리며 | |
|
이른바 지상파 공영방송에서 설악산,점봉산, 곰배령 있는 내린천 계곡 특집을 방영하면서 열목어 산천어 잡이 하는 장면을 내보내다니. 복잡한 도회를 버리고 그곳 산수좋고 인적드문 곳에 가서 친환경 자연생활을 하는 게 또 얼마나 좋으냐,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만든 프로인 것 같은데, 어째서 천연기념물 보호어류를 그물 따위로 마구잡이 하는 모습을 내보낸단 말인가. 분명 어족 보호를 위한 조사 차원이 아니라 맛나는 별미 무공해 자연식품이 이렇게 지천으로 깔려 있다고 자랑하기 위한 프로 같았는데.
국가가 지정한 보호종이 아니라 해도 그렇지, 친환경 자연생활이란 게 훼손되지 않은 자연속에 들어가 인간 마음대로 씨가 말라가는 생물을 마구 훼손해서 끝내 씨를 다 말리는 걸 목적으로 삼나? 그리고 공영방송은 그렇게 훼손해도 될 정도로 이렇게 아직 훼손되지 않은 자연이 멀쩡하게 남아 있도다! 자, 봐라, 많지? 우리가 찾아냈지롱. 이렇게 자랑하려고 그런 프로를 만들었나? (물론 거기 등장하는 그곳 사람들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열목어 함부로 잡지 마라. 너는 한 번 남에게 열목어 눈만큼이라도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 ^^
왜 한국 사람들은 맑은 계곡에 가면 그물이나 어항을 떠올리며 고기잡이 해야지, 하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힐까. 아예 산이나 강에 갈 때 고기잡이 도구를 차 트렁크에 싣고 가는 게 오히려 센스있는 행동으로 치부되지 않나. 왜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러기나 청둥오리 등 철새 떼를 보면 잡아먹을 생각을 하고, 너구리나 고라니를 보기만 하면 술 한 잔 생각나고 입맛부터 다실까. 온 산에 놓인 숱한 올무, 덫들이 모두 전문 밀렵꾼들 짓만은 아닐 것이다. 보통사람 중에도 별 생각 없이 산짐승 잡는 걸 너무나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나. 그러니까 공영방송 뉴스나 특집에서 무슨 명절이나 휴가철 시민들이 모처럼 자연을 찾아 이렇게 즐겼노라는 걸 보여줄 때 거의 천편일률적으로 계곡이나 강에서 그물이나 어항으로 고기잡거나 소라 고둥 잡는 걸 비쳐주면서 최상의 놀이, 최상의 휴가로 칭송하는 것 아닌가.
예전에 사람들이 가난해서 먹을 게 없거나, 또한 지금보다는 새들과 물고기들이 많았을 때야 그럴 수밖에 없었고 또 그렇게 해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그렇게 해서 살아남았고 그 덕에 진화해왔으니까, 그건 자연스런 일일 수 있었겠다. 야생동물들이 인간의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을 테니까. 왠만큼 잡아도 자연 복원력이 작동해 파국으로 가진 않았다.
하지만 산업화 이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자연환경이 인간 거주지구와 활동영역 확대에 비례해 급격히 파괴당하고 축소되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수많은 동식물들이 번성하는 인간의 수요 때문에 멸종당했고 또 무서운 속도로 멸종을 향하고 있다는 건 생물학자 등 전문가의 견해를 들어볼 것도 없이 우리들 주변에서 쉽게 목격할 수 있을 지경이 됐다. 인간의 파괴력은 상상을 절할 정도로 막강하고 파괴 정도와 범위도 비약적으로 확장돼서 이젠 한번 훼손되기 시작한 자연을 되돌리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 됐다. 오죽하면 천연기념물이라는 보호장치를 만들었겠나.
고라니나 멧돼지의 민가 출현 등을 두고 야생동물이 오히려 너무 늘어나서 탈인데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녀 성차별 문제를 거론하면, 그거 언제적 얘긴데 아직 그러구 있냐, 지금은 오히려 남성 역차별을 걱정해야 할 시대 아니냐, 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와 비슷하다.
멧돼지가 민가에 자주 출현하고 고라니가 밭작물을 자주 망치는 건 사실이고, 그들 개체수가 늘어난 것도 사실일 것이다. 분명히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산엔 나무가 엄청 늘었고 야생동물도 많이 늘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이 인간의 영역을 침범해 인간이 가꾸는 작물들을 훼손해서 농가에 엄청난 피해를 안긴다는 것도 틀린 얘기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놈들 보는대로 잡아죽여야 한다? 가끔 심심찮게 인가에 출몰한 멧돼지를 사냥개들까지 풀어 이리저리 몰아서 총 놓아 죽이고는 살려고 발버둥치다 처참하게 피흘리며 죽어자빠진 시체 주위를 잡은 사냥꾼들과 구경꾼들이 장한 일 했다는 듯 에워싸고 의기양양하게 포즈를 취하는 장면을 방송 뉴스에서 본다. 인간의 양식거리를 훼손하는 야생동물 죽이는 건 선이며 상찬받을 일이다! 하고 선전이나 하듯 뉴스를 전하는 기자나 앵커의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가 있다. 가련하도다 멧돼지여! 어느날 배가 고파 맛나는 냄새를 쫓아 갔다가 무참하게 두들겨맞고 시신으로 누워 있는 너를 찾아 온 산을 헤맬 너의 동료나 어미, 아내(남편) 또는 형제를 생각하노라니.
멧돼지나 고라니가 인간이 없는 산이나 들에 먹을 거리가 늘려 있는데도 인가에 출몰할까. 인간이 재배하는 식물이 더 맛이 있어서 산과 들에도 지천으로 늘려 있는 자연먹이들을 외면하고 굳이 인간과 경쟁하며 그것을 탐하는 걸까? 멧돼지와 고라니가 인가에 출몰하고 알곡이나 채소를 훼손하는 것은 크게 보면 결국 먹을 게 없거나 부족해서다. 지금 야생동물들 피해를주로 입고 있는 농가들 논밭들은 대개 야생동물이 사는 야산에 가까운 곳들에 있다. 따지고 보면 그들 농가는 좀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이 살지 않던 그냥 야산이었다. 인구가 늘고 인간세계가 번성하며 끝없이 팽창함에 따라 거주공간과 양식생산 공간 부족사태가 생기고 그 결과 인간들은 끝없이 예전의 야생지대로 확장, 개간해 들어가 산과 계곡을 인간의 양식을 생산하는 논밭으로 바꾸었다. 이는 야생동물들 처지에서 보면 끝없는 그들의 생존공간 축소요 파괴다. 자동차가 보편화하면서 예전엔 사람이 들어가 살기 어려웠던 오지들에도 아스팔트 길이 닦이고 집들이 들어서고 당연히 논밭이나 과수원도 줄줄이 들어섰다. 야생동물 서식지에 자라던 나무와 풀들은 인간의 적이 돼 모조리 잘려나가거나 불태워져 그들의 먹이가 급속히 사라졌고 그들 자신의 거주공간도 급속히 쪼그라들었다.
고라니나 멧돼지가 민가에 출몰하는 것은 인간이 좋아서가 아니라 먹이를 구하기 위해서다. 예전 그들의 먹이가 깔려 있던 산과 들은 모조리 인간들이 대신 차지하고 있으니 어쩌랴. 그들 개체수가 늘어난 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고 또한 의도하지 않은 인간행위의 결과이기도 하다. 산업화 이전 한반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동식물들이 살았을 것이다. 고니나 기러기 청둥오리 도요새 등 철새나 텃새들도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그들이 인간세계의 팽창과 산업화와 전쟁 등을 거치면서 급속히 줄어들었다. 20세기 이 땅에 기계산업을 이식한 일본 제국주의 침략시대부터 야생동물들은 멸종위기 시대로 진입했다. 총포류 등 신식 대량살상무기들이 화살 등 전통무기들을 대체하면서 멸종의 속도가 가팔라졌고 대륙침략을 위한 도로 철도 건설이 야생동물 서식지를 빠른 속도로 파괴했다. 산업화와 더불은 인구팽창과 식량 수요 폭발도 야생동물들에겐 재앙이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과 전쟁, 분단 등을 거치며 세계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한 조선의 산천은 일제의 조직적인 벌채와 개간, 살아남기 위해 풀뿌리까지 캐서 연명해야 했던 기아선상의 조선인들의 산천초목 약탈의 결과 오지나 능 주변 보호림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히 파괴당했다. 벌거벗은 민둥산에서 야생동물이 어떻게 살아가랴.
거의 씨가 말랐던 야생동물들은 1960년대 한국의 산업화와 70년대 연탄 사용 일반화, 그 뒤의 석유와 천연가스 도입 등 연료혁명을 거치면서 다시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금도 자유로를 타고 가다 임진강 너머 북한 쪽 산야를 보면 확인할 수 있지만, 연탄이나 석유, 가스가 없으면 연료를 자연속의 풀 나무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리되면 산에 나무가 남아나지 않는다. 지금 북한의 산들은 남벌로 황토까지 드러나 벌겋게 보인다. 동해에서 휴전선 넘어 금강산 갈 때 좌우에 보이는, 옛날에는 이름난 화가들의 화폭에 곧잘 올랐을 빼어난 산천들이 거의 모두 벌거숭이 황무지로 남아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연료혁명 이후 아무도 손을 대지 않게 된 남한의 산들엔 수목이 우거지기 시작했고 오지로 오지로 숨어들었던 소수의 살아남은 야생동물들도 개체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여기엔 소득수준 증가에 따른 음식혁명도 기여했을 것이다. 굳이 야생동식물에 눈을 돌리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게 됐고 이젠 과영양 비만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영양가 높은 음식들이 넘쳐나게 됐다.
야생동물 중에서도 고라니나 멧돼지 등 주로 풀 따위를 뜯어먹고 사는 동물들이 늘어난 것은, 인간의 개입에 의한 먹이사슬의 파괴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 산하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일제 때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인들은 일본엔 없던 호랑이 사냥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총을 들고 뽐내며 죽은 호랑이를 앞에 두고 찍은 일본인들 사진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온갖 민담에 등장하는, 그만큼 많이 분포했던 조선 호랑이는 그때 멸종당했다. 먹이사슬 최정상을 지키던 호랑이와 곰, 늑대 등 초식동물 포획자들이 인간 때문에 사라진 것도 고라니 멧돼지의 증가에 한 몫했다.
좌우간, 고라니 멧돼지가 늘어난 것은 가난했던 시절 산천초목이 철저히 파괴당했던 시절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옛날에 비해 절대수가 더 늘어난 건 아니다. 인간의 거주공간, 식량생산 공간의 확대와 포획수단의 비약적 발달, 교통수단의 폭증 속에 야생동물은 여전히 멸종위기에 처해 있으며 그 정도는 별로 개선되지 않았다. 멧돼지 고라니 처럼 인간의 연료혁명과 먹이사슬 교란으로 상대적, 제한적, 일시적 혜택을 받아 개체수가 좀 늘어난 종도 있지만 그보다 파괴당해서 줄어들고 사라지는 동식물들이 훨씬 더 많다.
요즘 정말 돈이 많아졌는지, 하루가 다르게 새로 들어서는 고속도로급 국도들을 보면 겁이 날 정도다. 자르고 깎고 뚫고 쌓아대는 도로건설로 대한민국 국토는 갈갈이 촘촘히 차단당하고 분단당하고 있다. 어디를 가든 반듯반듯하게 깔린 아스팔트, 시멘트 도로들 위로 자동차 행렬이 굉음을 내며 달리고 있다. 얼마전 어느 외국인이 얘기했듯이 한국에서 다람쥐나 토끼 정도 이상의 큰 야생동물이 살아남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와 같다. 야생동물 통행로라고 어쩌다가 하나씩 생색내듯 만들어 놓은 시설들, 그것도 인간이나 알아서 건너기에 좋은 좁다란 다리 같은 빈약한 시설들은 종횡으로 산천을 잘라놓고 있는 도로들의 역기능을 보전하는데 거의 아무 소용이 없어보인다. 마치 바둑판처럼 차단당한, 21세기형 엔클로저 운동으로 사방이 도로로 차단당한 좁은 땅에 고립당한 채 이동조차 불가능한 야생동물들이 제대로 살아남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늘어나는 뱃살을 걱정하는 과잉영양 시대를 살면서도 왜 사람들은 모처럼 자동차를 몰고 간 산천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덫을 놓고 매운탕을 끓이고 회를 쳐 먹으며, 왜 언론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선전하듯 보도하고 있을까. 석기시대나 중세의 수렵, 농경시대에 만들어진 유전인자가 아직도 나무와 숲과 물만 보면 무의식 중에 발동해서일까? 예전엔 좀 잡아도 괜찮았지만, 이젠 대부분의 야생동물이 멸종지경에 들어간 상황에서 왜 사람들은 산과 들판으로 나가기만 하면 여전히 원시 수렵인과 중세 농경인으로 돌변해버리는 걸까. 그 한심한 정도가 시장에서 밀렵 야생동물들을 버젓이 내놓고 팔고 있는, 그것이라도 팔아야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베트남이나 태국, 중국, 인도의 가난한 시골 농민들과 다를 게 있을까.
바다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랜돌프 T. 헤스터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교수가 한겨레 2009년 8월 27일치에 기고한 다음의 글을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란다. 마구잡이 자동차 도로 건설이 부른 자연환경 파괴에 대한 어느 방한 외국인의 우려스러운 눈길처럼, 헤스터 교수도 한국에서 진행되는 대규모 자연파괴를 너무나 안타까워 하고 있다. 때론 외부자의 시선이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느끼지 못하는 우리 내부 문제의 심각성을 잘 드러내줄 때가 있다. 지율 스님이 천성산 터널공사나 4대강 개발에 대해 끊임없이 발해온 경고를 여러 검증되지 않은 경제지표들을 동원해 거부하면서 스님이 제기하고자 한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스님의 진정성을 한낱 성장을 가로막는 훼방거리로 호도해 조롱하면서 오히려 스님을 욕보이는 더러운 짓거리들을 보라. 만일 같은 얘기를 지율 스님이 아니라 외국인들이 했더라도 그런 식으로 반응할까.
그런 사정 제껴 놓고라도, 헤스터 교수의 심정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담론과 성찰>(한길사)이라는 무크지에 실린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지리학)의 글 '홍천강변에서 20년- 어느 지리학자의 주경야독 농촌생활기'도 꼭 읽어보시기 바란다. 우리 정신의 황폐가 어느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아주 조용하고 담담하면서도 얼얼하도록 무섭게 증언해 줄 것이다.
자, 그럼 헤스터 교수의 글을 소개한다.
저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경관건축·환경계획학부의 교수로 최근 한국을 방문하여 인천의 송도갯벌이 광범위하게 훼손된 현장을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전세계의 과학자들은 인천의 갯벌이 다양한 종(種)들의 생존에 매우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조사로 송도갯벌이 세계의 습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이 더 분명해졌습니다. 람사르협약의 기준을 훨씬 초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연구가 저어새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는 합니다만, 다른 과학자들은 적호갈매기와 노랑부리백로 역시 이곳의 간척사업으로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검은머리갈매기, 흑꼬리도요, 청다리도요는 송도 지역에 의존하고 있는 많은 멸종 위험 종 가운데 일부입니다.
갯벌이 매립되면 새들은 좁은 곳으로 내몰리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한 과밀현상은 보튤리즘(조류에 치명적인 미생물)이나 다른 질병의 창궐 가능성을 높일 것입니다. 선진국들은 람사르협약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갯벌을 큰 축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 정부가 계속해서 갯벌 매립을 허가하고 있다는 사실과 심지어 이것을 친환경적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이 이미 인천 갯벌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최근 조사 결과에 따르면 소래포구 근처에 약 1000㏊의 송도갯벌이 아직 남아 있고 저어새가 바로 그 근처에 둥지를 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는 인천시와 한국 정부가 이 지역의 갯벌 매립을 중단하고 마지막 송도갯벌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보전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개발을 위해 매립하고 일부만을 야생서식지로 남겨두자는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송도갯벌 매립은 작년 람사르총회에서 한국 정부가 밝힌 습지보전 약속을 위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송도갯벌은 야생조류 서식지로서나 인천시민의 삶의 질 향상에 지대한 공헌을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만약 매립사업이 계속된다면 저는 이 사실을 국제적으로 알릴 것입니다. 저는 이미 환경파괴를 감추기 위해 친환경이라는 용어들을 부정직하게 사용하는 한국의 태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친환경’ 선언은 습지 파괴를 감추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합니다.
미국에서 습지 매립은 이미 30년 전에 중단되었습니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하나의 습지를 매립하고자 하면 그 2배의 대체습지를 만들어야 합니다. 설령 그렇더라도 몇몇 연구에서는 새로 조성된 습지가 사라진 습지를 대신하기에는 수많은 세월이 걸린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천시가 송도갯벌 매립계획에서 사용하는 저감(낮추어 줄임)이라는 용어는 잘못된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국제적인 사기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습지 파괴는 선진국들 중에서 최악입니다. 인천시가 이러한 사기에 기초하여 경제자유구역을 개발한다면 미국의 대학들은 인천에 캠퍼스를 짓는 일을 다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인천시가 갯벌 매립을 중단하고 저어새 등 멸종위기의 생명들을 위해 갯벌 보전을 결정한다면 언제든지 협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갯벌은 발전의 장애물이 아니라 진정한 녹색도시를 위한 공간이며 지역주민과 방문객들에게 자연체험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인천시의 신중한 결정을 기대하며 마지막 갯벌에 대한 인천시의 계획을 알려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