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곳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고, 서울 수유리에 산다.
공부한 곳
연세대 국문과 졸업
한강의 생각
젊은 사람이 어두운 얘기에 왜 관심이 많냐는 얘기를 종종 듣는다. 하지만 나는 젊기 때문에 더 어두워지는 것이다. 90년대가 되어 마치 새로운 날이 온 것처럼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고 죽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매진」 97년 11월
좋아하는 작가
임철우, 오정희
데뷰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가 당선되고,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붉은 닻」이 당선되어 데뷰했다.
작품
1998년 <<검은 사슴>>(문학동네)
2000년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 비평사)
2002년 <<그대의 차가운 손>>(문학과 지성사)
삶과 글
한국 문학사상 `가장 큰` 이름을 가진 작가.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내놓았을 때부터, `치밀하고 빈틈없는 세부, 비약이나 단절이 없는 긴밀한 서사구성, 풍부한 상징과 삽화들 같은 미덕으로 한 젊은 마이스터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는 파격적인 찬사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 임철우의 글을 읽으면서 소설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이 그의 운명을 결정지웠다. 대학에 진학해서는 학교에 갔다 오는 도중에 차에서 많은 시를 읽었고,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했다.
한강의 소설은 신세대 소설가답지 않게, 세상을 다 살아버린 자의 좌절과 비애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결손 가정이나 비참한 죽음을 과거사로
안고 있거나, 발작이나 허무한 복수의 장면을 연출하거나,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으로
살아간다. 이러한 비탄한 삶을 통해 실존의 문제에 천착하며 서정적 방식으로 이를 풀어 나간다.
그늘진 정서의 소설을 즐겨 쓰는 데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저 그늘진 풍경을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한다. 자신의 소설을 읽고 너무 슬펐다는 독자를 만났을 때가 가장
기쁘다고도 했다.
작업 중에는 새벽 3,4시에 일어나 오전까지 글을 쓰고, 작업이 잘 되지 않으면 줄곧 살아온 수유리 일대를 산책한다. 마지막 탈고를 끝낼 때까지 줄곧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스타일이다. 작품이 완성되면 그만큼 해방감도 크다. 『검은 사슴』을 내고 나서는 너무 좋아서 방안을 왔다갔다 하다가 스테플러에 찔려서 제법 피가 나기도 했다.
지출은 많지 않지만 그 중 상당 부분이 책값이다. 교보나 종로서적 같은 대형서점을
들르거나 단골인 동네 책방도 자주 찾는다. 아홉 평 남짓한 책방의 주인은 그에게 `무기한 무한정'책을 빌려줄 정도로 친밀한 사이라고 한다.
「샘이깊은물」 「출판저널」 「샘터」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1995년 7월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을 펴낸 후, `사놓기만 하고 못 읽었던 책도 읽고 여러 곳을 여행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었다. 전남 장성으로 귀거래한 소설가 한승원의 고명딸이며,
오빠 한동림(본명 한국인)도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소설가 집안이다.
*한강이 쓴 한강의 약력
▲ 1970
광주 변두리, 기찻길 옆의 셋집에서 어머니는 나를 배어 낳았다. 십일월이 끝나가던
즈음의 오전이었다. 아버지는 철길 옆 둑방에 내 태를 묻었다고 했다. 세 살이 되기 전에 그 동네를 떠났으므로 나에게는 그 집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이상한 것은 내가 기차에 대해 갖고 있는 애착이다. 기차 타기를 좋아할 뿐 아니라, 레일과 침목과 역사의 이미지,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 따위에 자신도 모르게 사로잡히곤 한다. 그것이 혹 태중에서 들었을 열차 소리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사
년 전 쯤이다. 스무살 즈음 북과 장구의 소리에 매혹된 적이 있었는데, 그 역시 기차
소리의 리듬과 어딘가 유사했던 까닭은 아니었을까.
▲ 1974
중흥동의 한옥집이 나에게 기억되는 최초의 공간이다. 이 연도를 기억하는 것은 남동생이 태어난 해이기 때문이다. 창호지문을 검지손가락으로 뚫고, 어두운 방 아랫목에서 어머니의 피로 물든 이불을 대야에 짜고 있던 외할머니의 모습을 엿보았다. "애들은 이런 것 보는 거 아니다"라고 고모에게 머리를 쥐어박히고도 넋을 놓고 있었다. 그
집의 대문을 나서면 맞은편에 한전의 긴 시멘트 담장이 보였고, 오른쪽으로는 흰 화강암으로 가득한 채 석장이 있었다. 그 전형적인 도시 변두리의 풍경이 아직까지 나에게
고향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자그마한 포도 넝쿨과 동백나무가 심어진 그 집 마당에서
딱따구리 그레이트 북스와 계몽사 문고, 이원수 마해송 권정생의 동화들을 읽었다.(권정생을 가장 좋아했다.) 고등학교와 대학에 다니던 고모들과 삼촌이 살 때였는데, 조금씩 나이를 먹으면서는 그들이 읽던 책들이며 대학신문, 문예지들을 훔쳐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 1979
두 번의 이사와 전학 뒤에 풍향동의 아파트에서 일 년쯤 살았는데, 그때 집에 굴러다니던 낡은 공병우식 타자기를 장난감삼아 배웠다. 앞면을 쓰고 남은 종이를 거꾸로 끼워 '숲'이나 '풀잎'이나 '아름다움' 따위, 보거나 듣기에 아름답게 느껴지는 단어를 골라 치면서 놀았다. 어떤 말을 듣거나 발음할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거기 해당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곤 했다.(삼벌식 문장용이라고 불리는 이 자판은 한글 2.0 버전부터는
개량되어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만드는 동생의 도움으로 한글
3.0에 접목하여 쓰고 잇다. 그러니까 오로지 내 컴퓨터로만 작업이 가능하다)
▲ 1980
1월 26일-이상하게 이 날짜를 잊지 못한다-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옮겨왓다. 커다란 트럭 앞에 타고 고속도로를 달렸다. 이삿짐을 덮은 커다란 천의 그림자가 아스팔트 바닥에서 펄럭거리며 뒤쫓아오던 것을 기억한다. 광주 시절부터 서울에 올라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모두 다섯 번의 전학을 했다. 일 년 이상 친구를 사귀어본 경험이 없고, 교가를 끝까지 외워 부른 적 없엇따. 그렇듯 낯선 환경과 아이들에게 적응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보니 서울생활이라고 해서 특별히 힘들지 않앗다. 다행이 철이 완전히
들기 전에 가족의 가장 가난했던 시기를 통과해 나온 셈이다. 우이동 22-3번지, 그 후
이십 년 가까이 살게 도니, 지금도 그 자리에 있는 집으로 이사하기 전에 어머니와 함께 구경을 갔다. 대문 안에서 목련나무 잎사귀가 햇빛에 반짝였다. "정말요?" "정말 여기가 우리 집 돼요?" 빛이 만들어준 아름다움에 흘려 거듭 물엇던 기억이 있다. 그때만 해도 수유리는 거의 시골 같았다. 겨울이면 물이 잘 나오지 않아 새벽이면 커다란
고무 '다라이'들을 줄이어 놓고 수차를 기다렸다. 어머니와 함께 빨래통을 들고 북한산 냇가로 나가면 빨간 내의를 빠는 여자들 과 그 옆에서 노는 추운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 1988
아버지는 허리를 앓앗고 어머니는 큰 수술을 받았다. 볼륨이 높여져 잇으나 아무도 보지 않는 텔레비젼, 전구가 켜져 있으나 아무도 거기 있지 않는 부엌-그 시기의 이미지들은 마치 잉크를 너무 묻혀 검게 망친 동화판 같다. 막상 기억해보면 웃고 즐거웠던
때도 많았는데 그렇다. 사춘기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부터 진지하게
소설쓰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내 안에 유황불 같은 것이 타고 있다고 느꼈다. 때로
무섭고 끔직했고, 때로는 독한 마음이 되기도 했다. 87년 겨울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88년 한 해 동안 서울역 옆의 학원 종합반에서 지냈다. 염천교를 거널 때 보고 했던 서행하는 기차의 불빛, 생선 좌판의 비린내, 올림픽 성확 시가지를 지나던 날의 먼 환호성 소리를 기억한다.
▲ 1992
연세대 국문과 적을 두고 4년을 보냈다. 수유리 집에서부터 학교까지는 버스로 왕복
세시간이 걸렷다. 맨 뒤의 창가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시집들을 읽었다. 소설은
몰래 쓰고 사람들에게는 "나는 시를 써요"라고 말했다. 나는 늘 회의가 많았고 지나치게 근원적인 고민들을 했고 그래서 외로웠던 것 같다. 술 때문에 위장을 버린 것도 그즈음이고 반쯤 미친 듯이 거리를 쏘다녔던 것도 그즈음이다. 4학년이 되던 봄, 정현종
선생님의 시창작론시간에 그간 써뒀던 시들 중 세 편을 제출했다. 그 중 '이월'이라 는
시를 선생님이 첫 시간에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며 "무당기 같은 게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힘이 됐다. 그해 가을 교내신문사에서 주관하는 문학사에 시 '편지'가 당선됐다. 상금으로 받은 이십오만 원으로 부모님게 속옷을 사드리고 친구들에게 조촐히 술을 샀다.
▲ 1993
졸업을 앞둔 2월 동숭동에 있는 샘터사 출판부에 들어갔다. 그해 여름 같은 회사에 근무하시던 시인 김형영 선생님의 소개로 '문학과사호'에 시 스무 편을 보냈는데 겨울호에 '서울의 겨울'외 4편을 싣겠다는 연락이 왔다. 출근 전의 새벽과 퇴근 후의 밤이면
소설을 썼다. 비밀스럽게 황혼이 타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퇴근하자마자 계단을 뛰어내려가 전철에 올랐다. 집까지 오르는 언덕길도 한달음에 내달렸다. 얼른 책상 앞에 앉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때 쓰던 소설의 배경이었던 인적 없는 골목에서 늦도록 배회하곤 했다.
▲ 1994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됐다. 단편 '진달래 능선'과 '질주'.
'야간열차'를 발표햇다. 꼭 6개월만 자유롭게 소설만 쓰고 싶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그만뒀다. 중편 '어둠의 사육제'와 '저녁빛', '여수의 사랑'을 써서 그 중 '여수의 사랑'을
발표했다. 그러니까 93년 가을부터 94년 가을까지 만 1년 동안, 이후 창작집에 들어가는 소설들을 모두 쓴 셈이다.
▲ 1995
'저녁빛'과 '어둠의 사육제'를 발표한 뒤 여름에 창작집 '여수의 사랑'(문학과 지성사)을 냈다. '출판저널'과 '샘터' 잡지부에서 일했다. 이해에는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 1996
다시 직장을 그만두고 단편 '철길을 흐르는 강', '흰 꽃'을 발표했다. 제주도의 세화리에서 방을 얻어 두 달을 지내면서 장편소설의 첫머리를 썼다 지웠다 했다. 햇빛이 밝은 곳이라 아주 정착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서울에 오르내릴 생각도 했으나, 서울로 돌아와 '내 여자의 열매'를 초고에 써두고 12월에 결혼했다.
▲ 1997
화계사 옆의, 숲과 약수터 가까운 작은 빌라에서 단편 '내 여자의 열매'를 완성해 발표했다. 장편소설 '검은 사슴'의 초고를 썼다.
▲ 1998
'검은 사슴'을 탈고하는 동안 중편 '어느 날 그는'을 써서 발표했다. 여름에 '검은 사슴'(문학동네)이 출간되고, 열흘 뒤 문예진흥원에서 지원하는 미국 아이오와 대학의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참가하기 위해 떠났다. 8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삼 개월 동안 제3세계에서 온 작가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 뒤 한 달간 뉴욕과 캘리포니아와 뉴멕시코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시 '캄캄한 불빛의 집' 외 2편을 발표했다.
▲ 1999
중편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 '아기부처', 시 '천국의 계단'외 3편을 발표했다. 고향과 같았던 슈유리를 떠나 회기동의 아파트로 옮겨왔다. 번화가가 가까운 곳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다. 이삿짐이 오던 날, 같은 빌라에 살던 얼굴 창백한 아주머니가 가득 파랗게 담긴 대추알을 내 손에 부어 주었다. 그것이 지금까지 마치 어떤 상징처럼, 아릿하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