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희성(서강대 종교학과)
I. 연구의 범위와 방법
본 연구는 한국불교 연구사 80년의 성과를 점검해보려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한국불교 연구의 쟁점들을 정리하고 한국불교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한 것이다. 한국불교 연구사 <80년>이라 함은 한국불교가 1500년이나 넘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불교를 <한국>불교로서 의식하고 그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불과 100년이 못된 일임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본래 <연구>란 그 대상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내지 소외를 전제로 하는 행위이며, 이는 특히 연구가 그 대상에 대하여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하면서 이루어지는 학문적 연구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
한국의 전통적 불교 사상가들 가운데도 한국불교를 <한국> 불교로서 의식한 사람이 물론 있었다. 다시 말해서 불교 혹은 불법(佛法)이라는 종교가 머나먼 인도 땅에서 발원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이라는 땅에 이르렀으며, 한국 고유의 토착적 전통이 아닐 뿐 아니라 같은 불교지만 우리 나라의 불교가 다른 나라의 불교와 구별되는 전통을 지니고 있음을 명확하게 의식한 사상가 내지 학자가 있었다는 얘기이다. 아마도 그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일 것이다. 그는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인물로서, 원효(元曉)나 제관(諦觀) 같은 인물로 대표되는 <해동> 불교의 위대한 전통을 뚜렷하게 의식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현대적 의미에서의 불교사가나 불교학자는 아니었다. 전통적인 불교사상가들이 다 그러했듯이 의천에게는 불교란 당시 그가 알고 있는 세계 전체, 곧 인도와 동아시아 전체를 망라하는 보편적 종교이지 결코 한 특정한 지역이나 나라에 국한된 종교, 혹은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염두에 두면서 연구할 대상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불교사상가들에게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식이나 역사의식이라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보편적 종교로서 불법의 영원한 진리를 확신하고 있던 고승들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뚜렷한 역사의식과 시대의식, 그리고 폭넓은 세계문화사적 시야와 비교종교학적 안목 등을 전제로 한 현대적 의미의 불교사학이 우리 나라에서 시작한 것은 역시 조선조라는 폐쇄적 사회가 근대의 개방적 사회로 넘어오면서 비로소 가능했던 일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개화기가 주로 일본의 식민통치와 일치했던 만큼 우리 나라에서 근대적 불교사학 내지 그것에 준하는 학문적 관심과 안목이 생기게 된 것이 일제시대부터였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일본의 경우에도 역시 근대적 의미의 불교학과 불교사 연구가 성립한 것은 명치유신과 더불어 시작된 개화기 이후 서양과의 접촉을 통해 서구의 동양학 내지 불교학과 접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던 현상이다. 결국 한국불교의 연구는 일본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는 1910년을 전후로 하여 시작해서 1990년대 말에 이르기까지 약 90여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우리 나라의 개화기와 일치한다는 사정 외에도, 아주 특수한 의미에서 한국불교 연구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곧 민족의식의 고취이다. 본래 서구에서 동양학이란 서세동점의 근대사의 일환으로 전개된 면이 강하다. 동양을 연구한 서구학자들의 개인적인 동기야 어떠했든, 그들의 연구는 결과적으로 서구의 제국주의적 확장과 식민통치와 발을 맞추어 진행되었던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서구적 학문의 안목을 갖춘 일본인 학자들이 한국의 문화와 종교를 연구한 것도 역시 식민통치라는 역사적 맥락을 떠나서 이해하기 어렵다. 사실 초기 일인 학자들의 한국불교 연구는 노골적인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이러한 태도는 물론 학문의 이름으로 한국불교에 대한 왜곡과 폄하를 초래했다. 이에 대항하여 자연히 한국 불자들과 학자들 가운데는 한국불교의 독자성과 역사적 성격을 규명하려는 작업이 싹트기 시작했다. 더욱이 조선조 500년 동안 온갖 박해와 멸시 속에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오던 한국불교는 일제의 개막과 더불어 승려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고 포교활동도 자유롭게 되었다. 이에 불교계에는 새로운 자각과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으며 불교의 중흥과 개혁뿐 아니라 민족운동, 교육사업 등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학문적인 자기정립도 꾀하게 되었다. 근대적 한국불교 연구는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하여 시작된 것이다.
한국불교사 연구 90년을 되돌아봄에 있어 우리는 필연적으로 그 범위를 제한할 수밖에 없다. 우선 '한국불교사'라 함은 한국불교의 역사적 총체를 가리키는 말로서 한국불교의 주요 인물들의 전기와 사상, 저술과 문헌, 제도와 의례 등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한국불교 전통 전체를 망라하는 개념임을 밝혀둔다. 다만 불교 미술만은 그 범위도 너무 넓고 전문적 식견을 요구하는 별도의 영역이기 때문에 본 연구사의 검토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무수히 많은 개별적 논문들과 준 학문적 성격을 띤 수많은 크고 작은 논문들도 대부분 제외하고 주요 논문들만을 언급하는 데 국한했으며, 논문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논점에 대한 상세한 검토는 다음 연구과제인 "한국불교사의 주요 쟁점들"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본 연구는 필자의 판단으로 한국불교사 연구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여겨지는 포괄적 연구의 성격을 띤 단행본 저서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다. 여러 학자들의 논문들을 모아 놓은 논문 모음집의 성격을 띤 저서들의 경우는 그 가운데서 연구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개별적 논문만을 언급하는 데 그쳤다. 석사학위 논문은 다루지 않았고 아직 출간되지 않은 박사학위 논문의 경우 누락된 것들도 있으리라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불교 원전의 우리말 번역의 경우 학술적 의미를 지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언급하지 않았다.
연구사적으로 중요한 저서나 논문들, 학자들의 연구업적들을 가능한 한 많이 다루려고 노력하였으나, 결국 검토대상의 취사선택은 불가피했으며 어디까지나 필자의 제한된 능력과 주관적 평가에 근거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없다. 이것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결함은 전적으로 필자의 책임이라는 것 또한 자명하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제한된 연구를 통해서나마 한국불교사 연구의 전체적 흐름과 방향, 문제점들과 쟁점들이 부각되리라 믿는다.
본 연구를 수행함에 있어서 우선 부딪치는 가장 어려운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 다양한 연구문헌들을 어떤 기준과 관점에서 정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이다. 첫째로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지금까지의 한국불교사 연구물들을 범주별로 구분한 다음 발표연대순으로 다루는 방법이 있겠다. 한국불교사 연구에는 한국 불교전통 전체를 다루는 총론적이고 통시적 성격을 띤 연구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제한된 주제 혹은 범위만을 다루는 각론적 연구들이 있다. 후자는 다시 시대별 연구와 주제별 연구로 대별될 수 있다. 시대별 연구는 불교 일반을 다루되 어느 한 시대, 예컨대 신라시대에 초점을 맞춘 분야별 연구이며, 주제별 연구란 한국불교의 한 종파나 제도, 고승들의 전기나 사상 등에 초점을 맞춘 연구를 말한다. 이러한 범주별, 각론적 고찰과는 달리 지금까지의 한국불교 연구성과를 논문이나 단행본을 가리기 않고 엄격하게 출간 연대순으로 정리해 나가는 방법도 있다. 어느 방법을 선택해도 엄격한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고 중첩과 누락을 피하기 어렵다.
본 연구는 위의 두 가지 부류의 정리 방법을 엄격하게 구별하지 않고 주로 그 연구의 발표 내지 출판연대순으로 검토해 나가되 때로는 연대순을 무시하고 주제별 혹은 학자별 연구성과를 함께 묶어 검토하는 방법을 동시에 사용함으로써 연관된 연구들이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했다. 다만 한 학자의 논문모음집의 경우는 이것이 쉽지 않지만 대략 그 학자가 왕성하게 연구활동을 한 시기를 기점으로 삼아 검토했다.
II. 주요 연구업적들
현대에 있어서 인문과 사회연구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역사적 사고방식과 시각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사물들 ― 제도, 사상, 관습, 관념 등 ― 은 반드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변화해 왔다는 생각은 모든 인문학적, 사회과학적 인식에 있어서 하나의 기본적 가정이 되었다. 인간에 의해 산출된 모든 제도나 이념은 하늘에서 떨어진 초역사적, 형이상학적 본질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언제 어느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사회적 조건과 시대적 상황 속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분명한 인식이야말로 사물에 대한 현대적 인식의 출발점이다. 그리고 어떤 현상이 현재의 모습이 되기까지는 반드시 그 역사적 변천과정과 경로가 있기 마련이라는 생각 또한 필수적이다. 이러한 역사적 시각은 초역사적 진리를 주장하는 종교의 경우 더욱 필요하며, 특히 불교와 같이 복잡다단한 현상인 경우 더욱 그러하다. 오늘의 한국불교는 어떠한 역사적 경로를 거쳐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가를 묻는 일은 한국불교의 이해에 첫걸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어도 역사의식이 발달된 현대인들의 경우에 역사적 이해는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한국불교에 대하여 이러한 역사적 시각을 처음으로 도입하여 한국불교 전체를 조명해보고자 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불교사 연구가 시작된 것은 1910년 한일합방 이후부터였다. 한일합방은 나라를 잃은 지식인들로 하여금 사회, 문화, 종교, 사상 등 민족의 전통에 대하여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일본 지식인들과의 접촉이나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적 학문에 접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특히 불교계는 일본 제국주의 통치가 시작되면서 사찰령(寺刹令) 등을 통해 통제를 받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조선조의 억불정책으로부터 벗어나는 전기를 맞기도 했다. 특히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 같은 법도 폐지되고 불교의 포교활동도 자유롭게 되는 등 불교계는 자못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 더불어 불교계에서는 한국불교의 전통을 새롭게 자각하고 그것을 학구적으로 탐구하고 선양하려는 운동이 일기 시작했으며 이는 불교 잡지들의 창간으로 표출되었다. 1912년 2월에 창간된 『朝鮮佛敎月報』가 1913년 8월에 19호를 내고 종간 되었고 그해 11월에는 『海東佛報』가 창간되어 1914년 6월까지 8호를, 『佛敎振興會月報』는 1915년 3월부터 12월까지 9호를, 『朝鮮佛敎界』는 1916년 4월부터 6월까지 3호를, 『朝鮮佛敎叢報』는 1917년 3월부터 1921년 1월까지, 그리고 『佛敎』는 1924년 7월부터 1933년 7월까지 총 108호를 출간했다. 金煐泰는 이들 잡지에 실린 글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들 초창기의 불교전문지에 실린 불교사는 매우 간략하거나 부분적인 역사물이 대부분이며, 그 문장도 옛 글체로 되어 어려운 편이다. 또한 그 잡지들에는 고승들의 전기와 비문들이 비록 체계와 순서는 정연치 않으나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러한 불교잡지는 일본의 불교 및 새로운 문화에 영향 된 것으로 볼 수가 있겠으나,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우리 불교계의 역사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그 성과야 어떻든 간에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가 있다.
이들 불교 전문잡지들을 편집하고 발간하는 데 가장 두드러지게 활약한 사람은 누구보다도 권상노(權相老)와 이능화(李能和)였다. 그리고 이들 두 사람에 의해서 한국불교 전체를 통사적으로 다루는 저술이 처음 이루어졌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 權相老, 『朝鮮佛敎略史』(1917)
이 책은 한국불교사 전체를 다루는 최초의 저서이다. 각 사원이나 지방 학림에서 교과서로 쓰게 할 목적으로 저술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한국불교계의 변화된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즉 경전공부를 주로 하는 전통적인 사원의 교육방식을 넘어서서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역사적 인식의 필요성을 자각한 데서 저술된 것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책의 제목이 말해 주듯 하나의 한국불교 <약사>로서, 편년체로 엮어졌다. 서문에서 권상로(1879-1965)는 인도, 중국, 일본 등 불교가 있는 곳마다 다 불교사가 있는 데 유독 우리 조선만 없다고 개탄하면서 우선 완사(完史)는 아니지만 약사(略史)라도 저술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더 능력을 갖춘 학자가 이에 자극 받아 더 완전한 불교사를 쓸 것을 촉구하고 있다. 비록 별다른 해석 없이 연도에 따라 事實 내지 史實들을 기계적으로 나열해 놓은 책이지만, 한국불교사 전체의 윤곽과 역사적 전개를 서술하려는 첫 소박한 시도로서 의미가 크다. 제 1편은 삼국불교, 제 2편은 고려불교, 제 3편은 이조불교를 다루고 있다. 비록 '약사'라고는 하나 부록까지 포함하여 300쪽을 넘는 결코 작지 않은 책이다.
그후 권상로는 『新撰朝鮮佛敎史』(년대 미상)와 『朝鮮佛敎史槪說』(1939)을 저술했는데 그 성격상 약사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다만 국한문 혼용으로 씌어졌던 『조선불교약사』와는 달리 이 두 권의 한국불교사는 읽기 편한 현대 한국어로 씌어진 개설적 불교사라는 데 의미를 둘 수 있다. 그 중에서 『신찬조선불교사』는 『조선불교사개설』보다 내용이 더 풍부하나 유감스럽게도 고려시대에서 그치고 만 미완의 저술이다.
2) 李能和, 『韓國佛敎通史』(1918)
권상로에 이어 한국불교사 전체를 서술한 사람으로서 우리는 누구보다도 이능화(1869-1943)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권상로의 책이 나온 바로 이듬해에 나왔음으로 이 대저(大著)가 권상로의 약사에 영향이나 자극을 받아 씌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능화의 책이 오랜 준비와 작업을 요하는 대작이기 때문이다.
권상로의 시야가 주로 불교에 집중되어 있었던 반면에 이능화의 학문 세계는 매우 다채롭고 다방면으로 전개되었다. 신광철의 지적대로 그는 "개항기 이후에 발생한 종교적 상황의 변화에 상응하여 '종교'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모색한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이능화는 조선조 사회의 유교 일변도의 이념적 폐쇄성이 무너지고 새로운 사상과 종교들에 의해 도전 받으며 다원화되어 가는 시대를 맞아 "당대의 종교적 상황을 '종교들의 공존'과 '종교영역과 사회(정치)영역의 분리현상'으로 인식한" 지성인으로서, 그의 불교연구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하에서 전개된 것이었다.
충청도의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이능화는 어린 시절부터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당연히 과거시험을 통과해서 전형적인 출세의 길을 모색할 사람이었으나,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이후 밀려드는 새로운 문물의 물결 속에서 1889년 서울 정동에 있는 영어학당에 입학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중국어, 독일어, 불어, 그리고 일어 등에 능통하여 외국어학교 교관, 한성 법어(독일어)학교장, 한성외국어학교의 학감을 역임하였다, 1910년의 한일합방과 더불어 한성외국어학교가 폐교되면서 그는 외국어 교육을 떠나 한국 종교와 문화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그 첫 큰 결실이 곧 3권으로 된 『朝鮮佛敎通史』(1918)이다.
그후 이능화는 『朝鮮基督敎及外交史』, 『朝鮮解語花史』, 『朝鮮巫俗攷』, 『朝鮮女俗攷』, 『朝鮮道敎史』등 한국 종교 및 문화에 관하여 수많은 귀중한 연구들을 남겼다. 이 서명들만 보아도 그의 지적 관심의 폭이 얼마나 넓고 개방적이었는가를 한 눈에 알 수 있으며, 그가 활동하던 시기로부터 불과 20년 전만 해도 그와 같은 새로운 부류의 학자의 출현은 생각조차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국의 종교와 문화에 대한 폭넓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이능화는 개인적으로는 확고한 불교신자였으며 그의 학문적 연구활동 역시 불교에 가장 많은 관심을 쏟았다. 양은용은 이능화 불교연구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첫째, 개신교 신자인 부친과는 달리 그는 불교신앙을 택함으로써 신앙의 기반 위에서 불교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둘째, 이 신앙적인 기반과 관련하여 그의 학문은 불교운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불교잡지를 통해 거사불교운동 내지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셋째, 그는 민족문화, 민족의식에 입각하여 불교를 민족신앙으로 파악하고 있다. 넷째, 그의 연구업적은 특히 사료의 정리라는 특징을 띠고 있으며, 다섯째, 종교사적, 비교종교학적 연구방법도 사용하고 있다.
이능화의 불교연구가 그의 신앙과 민족의식과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불교연구가 호교론적이거나 신채호나 박은식 등의 역사연구처럼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편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百敎會通』은 불교를 중심으로 하여 종교의 교설들을 비교하고 회통하는 저술이지만 결코 불교의 우월성을 입증하려는 호교론은 아니며, 그의 주저이자 한국불교 연구의 초석과도 같은 『朝鮮佛敎通史』역시 사료의 수집과 비교, 고증 등에 기초한 역사적 연구이다. 순 한문으로 저술된 『조선불교통사』 2권은 상, 중, 하 3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권마다 '李能和 尙玄居士 輯術, 崔南善 六堂學人 校閱'이라고 밝히고 있다. '거사'라는 말은 이능화가 스스로 불자임을 의식하고 밝히는 말이며 '집술'이라는 것은 이 책이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성격의 책임을 밝히는 말이다. 그리고 당시의 석학 최남선이 교열을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얼마나 그의 수고가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상권은 '佛化時處,' 곧 한국 땅에서 부처님의 교화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 별로 왕의 재위 년도에 따라 편년사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중요한 불교사적 사건을 강(綱)으로 하여 서술하면서 비고(備考)와 참고(參考)를 목(目)으로 하여 보충하는 식으로 편집하였다. 비고에서는 인용의 출처를 밝히고 있으며 참고에서는 보충될만한 사항들을 첨가하여 강(綱)의 서술을 뒷받침하고 있다.
중권은 '三寶原流'라고 하여 불교종파의 전개를 다루고 있는데, 석가모니의 전기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를 약술한 다음 각 구사종(俱舍宗), 성실종(成實宗)을 비롯하여 선종(禪宗)에 이르기까지 종파들의 연원을 밝히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선종, 선종 가운데서도 특히 임제종(臨濟宗)의 전통을 가장 상세히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선종이 임제종의 적손(嫡孫)임을 밝히는 뜻에서 太古普愚로부터 시작하여 西山休靜과 浮休善修에 이르는 법맥을 서술하고 있다. 하권은 '雜項'이라 하여 한국불교 관련 200개의 주제를 따로 선정하여 다루고 있다.
『조선불교통사』를 현재의 학문적 안목에서 평가할 때 가장 가치가 없는 부분은 중권의 三寶原流이다.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 및 종파의 연원과 한국 임제종의 계보를 서술한 부분으로서, 오늘날의 비판적 불교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전통적이고 도식적인 불교사이기 때문에 학문적 가치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유의할 점은 이능화가 여기서 임제종을 부각하여 대서특필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특히 한국 선종이 임제의 적손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국 임제선의 계보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선이 과연 임제선이냐 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는 문제이지만, 여하튼 이 복잡한 문제를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고 한국 선의 맥을 임제 적손으로 전제하고 근 200여 쪽에 달하는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은 특별한 설명을 요한다. 입증하기는 어려우나 이것은 아무래도 한일합방 후의 한국 불교계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듯 하다. 이능화가 이 책을 집필하고 있을 무렵 이회광(李晦光)은 당시 원종(圓宗)이라 일컫는 한국불교 종단을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연합하려고 시도하였으며, 이에 맞서서 박한영(朴漢永), 한용운(韓龍雲) 등이 한국 승려는 임제종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임제종 운동을 펼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능화는 아마도 이에 자극 받아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의미에서 중국과 한국의 임제종 법맥을 대서특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중권과는 달리 상권과 하권의 가치는 실로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상권(약 670쪽)은 마치 권상로의 약사를 풍부한 자료로써 보충하여 엮어 놓은 것과 같으며, 하권의 자료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던 불교학과 한국연구에서 이러한 정도의 자료를 수집해 놓았다는 것은 그야말로 초인적인 노력과 정성을 필요로 했을 것이며, 그의 노력의 결과가 모든 후학들의 한국불교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못 한다.
3) 高橋亨(타카하시 토루)의 『李朝佛敎』(1929)와 韓國佛敎史 硏究
高橋亨은 일본의 한국학 연구에 초석을 놓은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한국의 어문, 민속, 문헌 연구, 그리고 유교, 불교 연구 등 거의 손을 안 댄 것이 없을 정도로 초기 한국문화 연구의 독보적 존재다. 1902년 동경제국대학 한문학과를 졸업한 그는 다음 해에 이미 한국과 인연을 맺기 시작하여 1909년에는『韓語文典』을 출간할 정도였으며,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조선총독부로부터 조선의 종교 조사업무를 위촉받아 고서와 금석문 등을 수집하는 일을 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조선 유생들의 동향을 조사하기 위해 충청, 전라, 경상도 지방을 돌아다녔다. 이를 통해 그는 조선 유생들, 특히 영남 유생들의 기개에 감명을 받아 한국유교 연구의 결의를 다진다. 그의 표현대로, "이조 중세 이후 조선에 있어서 가장 절제 있고 그러면서도 합리적 신념에 의해 움직이는 단체는 영남의 유생이다"라는 것이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규장각 도서와 『李朝實錄』 등 방대한 문헌들을 마음대로 접하면서 유교 연구를 진행하였고 『朝鮮圖書解題』를 공저로 지었다. 그 이듬해 1912년 여름, 그는 사고(史庫)를 조사하러 오대산에 갔다가 우연히 월정사를 방문하여 선승(禪僧), 학승(學僧), 염불승(念佛僧)등 그곳 승려 60-80여명이 정진하는 모습을 보고서 종전에 한양 부근에서 보던 조선불교의 구차하고 타락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접하면서 한국불교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는 한국불교가 이조 500년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기회만 오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절감하여 한국불교 연구를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李朝佛敎』는 본래 『朝鮮思想史大系』의 제 1책으로 출간되었다. 『조선사상사대계』는 조선의 유학, 조선의 불교, 조선 특유의 종교 3부 작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그 중 조선의 불교는 다시 三國新羅高麗佛敎, 李朝佛敎의 2편으로 나뉘는데 후자만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와의 그의 관계가 말해주듯이 그의 한국연구는 결코 순수한 학문적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가 42세에 받은 박사학위의 논문제목 『朝鮮의 敎化와 敎政』 자체가 이 점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의 연구 모두를 무조건 식민주의적 편견에 사로잡힌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의 해박한 지식이나 자료를 정리하고 소화하는 엄청난 능력, 그리고 80여 평생에 산출한 9개의 저서와 근 100편에 달하는 논문 등을 볼 때 그가 위대한 학자임은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다.
우리의 관심인 그의 한국불교사 연구를 볼 때, 그는 확실히 한국불교를 독창성이 결여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조선불교가 대체로 중국불교의 일 분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조선유학이 중국유학에 있어서와 마찬가지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그의 논문 가운데는 한국불교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식민주의적 관점을 드러내는 것도 있다. 그 가장 좋은 예는 그가 1936년에 쓴 논문 "朝鮮佛敎의 歷史的 依他性"으로서, 그는 여기서 한국불교가 역사적으로 권력에 종속되어 왔으며 독립성 내지 독자성이 결여된 무기력한 종교임을 논하고 있다. 특히 그는 엄청난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항거조차 제대로 못한 조선조 불교야말로 이러한 무기력성의 전형적 예라고 보며, 그러한 관점에서 그의 『李朝佛敎』를 서술해 나가고 있는 것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高橋亨의 한국불교관에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면이 없지 않음을 우리는 인정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불교와 왕실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국불교가 대중적 신앙에 뿌리 내리기보다는 호국불교의 이념 아래 지나치게 왕실 의존적이었고 지배계층 지향적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조선조 불교가 교리나 사상 면에서 독창적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그의 평가 또한 쉽게 부정하기 어렵다. 여하튼 그의 조선조 불교연구는 실로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일목요연하게 역사적 전개를 서술한 대작으로서, 현대 한국불교의 모습과 상황, 그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연구임에 틀림없다.
그밖에 大覺國師 義天이나 虛應堂 普雨大師에 대한 그의 연구 등도 간과할 수 없는 연구 성과물들이다.
4) 金映遂의 한국불교사 연구
권상로와 이능화에 이어 한국불교사 전체를 서술한 학자는 包光 金映遂(1884-1967)이다. 김영태(金煐泰)에 의하면 김영수의 『朝鮮佛敎史稿』는 일제시대에 불교전문학교 및 사찰의 강원에서 사용하도록 저술된 것이라고 한다. 간략한 한국불교사로서 단지 프린트 본으로만 유통되던 것이다. 정확한 저술연대를 알기 어려우나 아마도 그가 1928년 경성의 중앙불교전문학교에 교수가 된 후 교재용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그러나 현재 그 내용을 보면 1940년대 초의 불교계 역사까지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후 기회가 닿는 대로 당시 불교계의 새로운 동향을 보충하여 서술한 것 같기도 하다. 김영태의 평대로 이 『조선불교사고』는 "비록 분량이 많지 않은 프린트 본이지만 우리 글(한자혼용)로 쉽게 풀어쓴 최초의 한국불교 전반의 개설서라는 점에서 매우 의의가 크다." 여기에는 이미 김영수가 후에 여러 논문들을 통해 밝힌 五敎九山, 五敎兩宗 등과 같은 한국불교 종파사의 구도가 서술되어 있다.
김영수의 연구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震檀學報』에 실린 그의 2편의 논문이다. "五敎兩宗에 對하여"(1937)는 한국불교 종파사의 맥을 잡아주는 결정적 역할을 한 논문으로서, 그는 신라, 고려 양대에는 승려의 소속이 어디까지나 수법사(受法師)보다는 득도사(得度師) 중심이었음을 주장하면서, 고려 중기부터 조선조 세종대까지의 종파사가 五敎(涅槃宗, 戒律宗, 法性宗, 華嚴宗, 法相宗) 兩宗(天台宗, 曹溪宗)의 안정된 체계를 이루고 있었음을 논증하고 있다. 이 논문에 이어서 씌어진 "曹溪禪宗에 對하여"(1938)는 다른 종파들과는 달리 현대 한국불교에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조계종의 전통을 고찰하는 논문으로서, 조계종의 창시자를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로 본 이능화의 견해와는 달리 조계종이라는 이름이 천태종 개창 이후 비로소 사용된 九山禪門의 통칭(通稱)임을 논하면서 조계종의 종지를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사상에서 찾고 있다. 그는 기본적으로 같은 견해를 다른 논문들, "朝鮮佛敎宗旨에 대하여"(『新佛敎』 9호, 1937), "曹溪宗과 傳燈通規"(『新佛敎』 43, 44, 45, 1942-1943)에서도 천명하고 있다. 김영수의 이론 가운데서 五敎兩宗說은 대체로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으나 최근에는 여러 가지 이설이 제기되고 있으며, 조계종의 기원과 종지 등에 관해서도 여전히 논란이 많다.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검토하고자 한다.
5) 忽滑快天(누카리야 카이텐)의 『朝鮮禪敎史』(1930)
이 책은 권상로, 이능화, 김영수에 이어 한국불교 전통의 전모를 다루는 네 번째 책이며 일인 학자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진 최초의 저술이다. 본래 저자가 코마자와(駒澤) 대학에서 강의한 원고를 간행한 것이다. 이 역시 『조선불교통사』처럼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지은 역작으로서 정광진, 권상로, 이능화와 같은 한인 학자들의 도움이 컸음을 저자는 밝히고 있다.
忽滑은 한국불교사의 흐름을 禪과 敎로 파악하여 각 시대를 특징짓고 있다. 총 4편으로 되어 있는데, 제 1편은 '敎學傳來의 時代'로서 한국불교의 기원부터 신라 말 선불교의 도입 이전까지를 다루고 있으며, 제 2편은 '禪道蔚興'의 時代'라 하여 신라 말 선불교의 유입을 다루고 있다. 제 3편은 '禪敎竝立의 時代'로서 고려불교사를, 그리고 제 4편은 '禪敎衰頹의 時代'로서 이조불교사를 서술하고 있다. 서문에서 밝히듯이 "먼저 禪學思想史를 엮어서 중국에 있어서 禪道가 쇠퇴한 연유를 밝혔고, 지금은 또 朝鮮禪敎史를 편찬하여 해동에 있어서 禪道가 變衰한 원인을 진술하고자 한다"고 저술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
忽滑이 본 한국불교사의 윤곽은 지금까지도 한국불교사의 구도를 파악하는 데 영향을 끼치고 있다. 五敎九山이나 五敎兩宗, 그리고 禪敎兩宗이라는 말로 요약되곤 하는 한국불교 종파사의 이해와 근본적으로 동일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朝鮮禪敎史』는 한국불교사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서술한 최초의 책이라 평해도 좋을 것이다.
高橋亨과 마찬가지로 忽滑快天은 "조선의 불교는 支那佛敎의 연장으로서 禪宗 같은 것도 支那禪宗의 직수입에 불과하다"고 평하면서 한국불교의 독특성이나 창조성을 부정하는 식민사관적 견해를 보임으로써 한국불교 연구가들, 특히 한국 학자들로 하여금 한국불교의 특성과 정체성에 대하여 탐구하도록 촉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자신도 고려 지눌(知訥)의 선(禪)을 평함에 있어서는 "신라의 道義 이래 조선의 祖道는 支那禪學의 연장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神宗王代에 이르러서 지눌이 命世의 偉才로써 독립의 宗을 創唱하였다" 함으로써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다.
6) 崔南善의 朝鮮佛敎論
일제 식민통치는 한국 지성인들로 하여금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탐구를 통해서 민족적 자긍심을 높이려는 동기를 제공했다. 불교연구에 있어서도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 정도로 보는 일인학자들을 의식하면서 한국불교의 특성을 밝히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것이 최남선(1890-1957)의 "朝鮮佛敎: 東方文化史上에 있는 그 地位," 『佛敎』74(1980년 8월)로서, 1930년 7월 하와이에서 열린 범태평양 불교대회에서 발표한 이 글에서 최남선은 한국불교의 특징을 원효의 사상에서 구현된 '通佛敎,' '全佛敎,' '綜合佛敎,' '統一佛敎'의 실현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인도의 서론적 불교, 중국의 각론적 불교와 대비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그후 줄곧 한국불교의 특징을 규정하는 지배적 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최남선은 이 글에서 석굴암이나 고려대장경과 같은 문화재, 일본에의 불교 전수 등을 한국불교의 찬란한 업적으로 찬양하고 있다.
7) 江田俊雄(에다 토시오)의 한국불교사 연구
일본인 학자로서 한국불교 연구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사람 둘을 꼽으라면 아마도 高橋亨과 江田俊雄일 것이다. 그는 高橋亨이나 忽滑快天과 같이 하나의 통사적 대저를 내지는 않았으나 수많은 통찰력 있는 논문들을 써서 한국불교사의 이해에 크게 공헌했다. 그의 논문들은 경성의 중앙불교전문학교서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 조명기(趙明基) 등이 뜻을 모아 수집하여 『朝鮮佛敎史의 硏究』(1977)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여기에 실린 논문 29편은 대개 1920년대 말부터 1957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씌어진 논문들이다.
江田의 한국불교 연구에서 우선 돋보이는 것은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연장 내지 아류로 보는 이전의 견해를 넘어서서 한국불교의 특성을 그 다양한 역사적 모습에 근거하여 밝히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불교의 일반적인 특징, 시대별 특징, 그리고 한국 선불교의 특징 등을 그는 냉철하고 예리한 눈으로 고찰하고 있다. 일제시대 일인 학자들의 연구는 쉽게 제국주의적 편견에 물들여진 것으로 매도되는 경향이 있으나, 江田의 연구는 비교적 학문적 공정성을 잃지 않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연구 성과를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의 연구가 종전의 기계적이고 평면적인 연대기적 연구를 능가하는 깊이와 넓이를 가지고 있음을 말할 수 있다. 그의 연구는 한국불교사의 연구와 인식을 한 단계 고양시켰다 해도 손색이 없으며, 그후 한국불교 연구는 그의 연구들을 무시하고 이루어지기는 어렵게 되었다.
8) 趙明基의 한국불교사 연구
조명기는 일제시대의 한국불교 연구자들과 해방 후 동국대를 중심으로 하여 배출된 한국불교 연구자들 사이를 이어주는 학자이다. 한국불교사 연구에 대한 그의 공헌은 두 저술로 대변된다. 『新羅佛敎의 理念과 歷史』(1962)와 『高麗 大覺國師와 天台思想』(1964)이다. 전자는 주로 元曉, 義相, 圓測, 太賢, 憬興의 전기와 저술들을 해제와 더불어 소개하는 책으로서, 본격적인 사상연구는 찾아보기 어렵다. 조명기는 이 책에서 신라 한국불교사상의 특성을 '總和佛敎' 혹은 '通佛敎'임을 거듭 거듭 강조하면서 원효야말로 이러한 통불교 정신을 가장 잘 구현한 인물로 극찬하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한국불교는 五敎九山으로부터 五敎兩宗이 되고 다시 禪敎兩宗이 되어 禪과 敎 즉 전 불교가 합하여 一宗이 된 것도 元曉理想에서 보면 결코 우연한 것은 아니다"라고 한다.
아무도 한국불교가 결과적으로 '통불교적'이 되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겠지만, 조명기 이후 한국불교를 천편일률적으로 이러한 시각에서 보는 경향이 보편화되었다는 점은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한국불교계에서 거의 교조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러한 시각이 한국불교사를 올바로 인식하거나 평가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지나 않은지 물어야 한다. 통불교에 대한 찬양은 곧 화쟁(和諍)의 명수 원효에 대한 찬양과 항시 같이 간다. 최남선, 조명기로부터 시작하여 이기영(李箕永)에 이르러 극치에 이르고 있는 원효 찬양이 한국불교사의 올바른 이해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역시 심사숙고해 볼 문제이다.
조명기의 다른 책은 대각국사 의천에 대한 상세한 연구로서 高橋亨의 논문 "大覺國師義天의 高麗佛敎에 대한 經綸에 관하여"(『朝鮮學報』10, 1936) 혹은 "大覺國師 義天과 高麗佛敎," 『朝鮮』 276(1938)과 더불어 고려불교와 의천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저서이다.
9) 金煐泰의 한국불교사 연구
李能和와 忽滑快天 이후 불행하게도 우리 나라 학계에서는 한동안 한국불교에 대한 통사가 씌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우선 방대한 한문 자료들을 섭렵하고 정리할만한 학자가 일제시대나 해방 후 신교육을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더군다나 해방 전후의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그리고 곧 이어서 6.25 전란으로 인한 학문의 단절기가 있어서인지, 196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독자적으로 씌어진 한국불교사의 출현을 보게 된다. 그 첫 작품이 金煐泰, 禹貞相의 공저『韓國佛敎史』(1969)이다. 이능화나 권상로, 김영수가 한국불교 연구 제 1세대라면 조명기는 제 2세대, 그리고 김영태, 우정상은 제 3세대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국불교사』는 두 사람의 대학 강의 노트를 정리하여 교재용으로 만든 책으로서 앞에서 소개한 김영수의 프린트 본 불교사나 혹은 권상로의 『조선불교사개설』을 약간 더 보충하여 엮은 책과 같다. 내용의 풍부함에 있어서 이 책은 이능화나 忽滑의 책과는 비교가 안 되게 소략하다. 다만 이 책은 해방 후 첫 한국불교사이고 문체도 표준 현대식 한글로 평이하게 씌어진 첫 한국불교사라는 데 의의가 있다.
김영태는 1960년대 이후 한국불교를 연구 해 온 학자들 가운데서 가장 연구활동이 활발하고 많은 업적을 낸 학자이다. 그는 한국불교의 철학이나 교학사상보다는 구체적인 신앙세계와 역사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그는 『삼국유사』 등에 나오는 불교설화들을 분석하여 신라인들의 불교 신앙세계를 밝히는 논문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의 『新羅佛敎硏究』(민족문화사, 1987)는 50년대 말부터 발표해 온 이러한 논문 23편을 추려서 출간한 그의 논문집이다. 『三國時代의 佛敎信仰 硏究』(불광출판부, 1990)도 역시 그의 논문모음집으로서 삼국의 神呪신앙, 彌陀신앙, 彌勒신앙, 法華經敎 신앙, 觀音신앙 등을 다루고 있다. 신라불교에 대비해 연구가 소홀히 되어 온 백제불교에 대해서도 김영태는 많은 논문들을 썼으며 일본측 자료까지 동원하여『百濟佛敎思想 硏究』(동국대출판부, 1985)로 출판했다.
1986년에 김영태는 단독으로 1969년에 나온 『한국불교사』의 문제점을 수정, 보완하여 『韓國佛敎史槪說』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보다 많은 자료를 동원하여 "학구성 있는 廣史를 새로 간행할 계획" 중에 있는 저자가 우선 당분간 강의 교재용으로 저술한 개설사이다. 앞의 책보다 내용도 더 풍부하고 서술도 유려하며, 각주에 원전과 그 출처를 밝히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그러나 공저에 비해 획기적으로 달라진 점은 발견되지 않는다. 역시 본격적인 연구서라기보다는 교재용 개설서이다. 유감스러운 것은 위의 두 책이 아무리 개설서 류의 책이라 해도, 전후 새로운 세대에 의해 씌어진 첫 한국불교사가 江田와 같은 일인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연구성과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뚜렷한 역사적 통찰이나 관점이 결여된 지극히 평면적 서술로 일관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불교사개설』의 특징 가운데 가장 주목할 점은 부록으로 첨부되어 있는 "韓國宗派史理解"이다. 여기서 김영태는 한국 불교사에서 전공 공부분야로서의 '學宗'이 아니라 이름을 가진 교단적 '宗派'가 성립된 것은 고려말 경이라고 주장하면서 김영수 이후 학계의 통설로 받아들여져 온 五敎九山과 五敎兩宗 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파격적인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통설을 뒤집기에는 그의 논거가 아직은 빈약한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한국불교의 종파 내지 종단사 문제는 조계종의 법통설(法統說) 등과 함께 상당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문제로서, 다른 기회에 정밀한 검토를 요한다.
김영태는 1997년에 『한국불교사개설』을 다시 수정 보완하여 『한국불교사』(경서원)라는 이름으로 출간했다. 내용도 보충하고 문체도 다듬어 새로운 면모를 보이고 있으나 그의 한국불교사를 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 다만 과거의 왕조별 시대구분에 따른 서술을 각 시대 불교의 특징 내지 주제를 파악하여 서술한 것이 주목할만하다. 1편은 "초기불교의 국가적 수용과 전개"라 하여 삼국시대의 불교를 다루고 2편은 "민족불교의 완성"이라는 제목 하에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를 다루고 있다. 3편 "祈禳적 경향의 불교"는 고려불교, 4편 "山僧時代의 불교"는 조선불교, 그리고 5편 "개화 격동기의 불교"는 근세 불교사를 서술하고 있다. 유감스러운 것은 정작 오늘의 한국불교를 이해하는 데 보다 직접적으로 중요한 현대불교사, 즉 해방후부터 1990년대까지 약 50여년의 역사를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며,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한국불교 내일에의 전망"을 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록으로 담고 있는 <한국불교의 종파 역사>는 『한국불교사개설』에서 이미 제시했던 것과 기본적으로 마찬가지이며 '學宗,' '業宗' 등 다소 혼란스러운 개념들을 사용하는 가운데 종래의 학설을 뒤엎으려는 그의 입장과 주장에 논거가 명확하게 제시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10) 朴鐘鴻의 『韓國思想史 (佛敎思想編)』(1972)
한국 철학계에서 한국의 전통사상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열암 박종홍(1903-1976)이다. 그는 불교학자이기 이전에 서구 철학과 사상을 연구하는 철학자로서 그의 관심 범위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학사상에까지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그가 "한국철학사"라는 제목으로 『韓國思想』이라는 잡지에 게재했던 글들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제목은 『한국사상사(불교사상편)』라고 되어 있으나 통사적 한국불교사상사는 아니고 한국불교 사상가 가운데서 주목할만한 철학적 사상을 전개한 몇몇 대표적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고구려의 승랑(僧郞), 신라의 원측(圓測)과 원효, 고려의 의천과 지눌의 사상이 요령 있게 다루어지고 있다.
비록 이 책이 한국불교 사상사 전체를 유기적으로 다룬 저서는 아니지만 우선 한국불교 <사상>을 다룬 첫 번째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명쾌한 분석에 입각하여 위에 언급한 불교사상가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놓은 책으로서, 한국불교 사상사의 맥을 잡아 놓고 연구 수준을 한 단계 높인 책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실은 아직도 한국 불교사상사에 대한 한 개인의 저술에 관한 한 이 책을 능가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특히 원효 사상의 분석은 탁월하며, 그의 화쟁 사상을 위시하여 종파적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고 다양한 사상을 융합적으로 소화하는 원효 사상의 회통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박종홍의 연구도 조명기의 신라불교 연구와 더불어 한국 불교사상에 대한 통불교적 담론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11) 李喜秀의 『土着化 過程에서 본 韓國佛敎』(1971)
한국불교 연구는 불교학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한국사 연구를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국문화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불교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희수는 역사학자로서 한국불교의 특성을 밝히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그 결과 토착화 과정에서 본 한국불교를 펴내게 되었다. 제목 자체가 말해주듯이 저자는 출세간적 성향과 심오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불교가 한국의 토착적 문화풍토와 만나서 어떻게 변화되어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 라는 관점에서 한국불교사를 살피고 있다. 佛敎의 普及 시대, 諸宗分立 시대, 禪敎?隆 시대, 諸宗廢合 시대, 불교의 抗日 시대, 佛敎再建 시대의 6기로 한국불교사를 구분하여 서술하면서 이희수는 한국불교의 현세구복성, 호국신앙적 성격, 토착신앙과의 습합(習合) 등을 강조하고 있다. 자칫하면 승려들의 전기의 나열이나 추상적 교리 소개로 빠지기 쉬운 불교사에 대중신앙으로서의 한국불교의 구체적인 모습을 다양한 사료에 따라 밝히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저서로서, 이전의 한국불교사 연구에 보완적 가치를 지닌 연구서이다.
이 책의 가장 큰 결함은 많은 불확실성에 둘러싸인 한국불교 종파사 내지 종단사를 너무 안이하게 도식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미 오류로 판명된 이능화나 이종익(李鐘益)의 설에 따라 고려의 조계종(曹溪宗)과 선적종(禪寂宗)을 구별하고 전자를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창시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12) 安啓賢의 한국불교사 연구
1960-70년대에 주로 이루어진 안계현의 한국불교사 관계 연구논문들은 그의 사후 여러 단행본으로 묶어져 출판되었다. 『韓國佛敎史硏究』(동화출판사, 1982)는 그의 유고를 정리하여 출판한 것으로서 불교사가로서의 안계현의 진면목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안계현은 아마도 국사학자로서 한국불교사 연구에 전념한 최초의 학자일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배경을 반영하듯 『한국불교사연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금까지 고찰한 한국불교사 연구들과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불교를 한국의 역사, 사회, 문화와 연계시켜 보려는 그의 역사적 안목이 돋보인다. 종전의 한국불교사 연구가 주로 고승들의 전기나 사상 혹은 종파나 중요 사찰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 반면, 안계현은 해박한 지식으로 한국불교사의 사회적, 시대적 배경과 토착적 전개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안계현은 또한 일본의 한국불교 연구자들의 연구 동향과 업적에도 많은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김영태, 박종홍, 안계현의 연구는 상호보완적 성격을 띤다 해도 좋으며, 이 셋을 통해 이제 우리는 한국불교사의 다양한 측면들과 함께 그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83년에 출판된 안계현의 또 하나의 논문집 『韓國佛敎思想史 硏究』(동국대 출판부)도 불교학자요 역사학자로서의 그의 학문세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주로 신라 정토사상 관계 논문들이 많이 실려 있으며, 신라 정토사상은 사실 안계현이 가장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분야이다.
13) 신라 淨土思想 연구
안계현의 신라 정토사상 관계 연구들은 한데 모아 『新羅淨土思想史硏究』(아세아문화사, 1976; 같은 이름으로 현음사, 1987)로 출판되었다. 彌陀淨土와 彌勒淨土 신앙에 관한 교학적 논문들이 일반적으로 대단히 전문적이고 번거로워 요점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일반적 사실을 감안할 때, 안계현은 정토교학의 핵심 논점들을 중심으로 하여 신라 정토사상가들의 교설을 상호 비교해가면서 잘 정리해 놓고 있다. 한 가지 문제점으로 지적해 둘 것은 안계현이 『遊心安樂道』를 원효의 저술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부정하고 있다.
안계현에 이어 신라 정토사상에 대한 새로운 연구들이 많이 이루어졌다. 우선 신라 정토 교학사상의 특징을 중국과 일본의 정토사상과 비교하면서 밝힌 일인 학자 源弘之의 "新羅淨土敎의 特色"(金知見, 蔡印幻 편,『新羅佛敎硏究』, 동경, 1973)과 惠谷隆戒의 "韓國淨土敎의 特性," 『印度學佛敎學硏究』(24-2, 1976)가 있다. 신라 憬興의 정토사상 연구로는 渡邊顯正의 『新羅 憬興師述文贊의 硏究』(京都: 永田文昌堂, 1978)가 있으며, 약 10년 후 신라 정토사상에 대하여 2개의 박사학위 논문이 한국 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 씌어졌다. 하나는 章輝玉의 동경대학 박사논문 『新羅淨土敎의 硏究』(1988)이고 다른 하나는 경도 불교대학교에 제출한 韓普光(泰植)의 논문『新羅淨土思想의 硏究』(1989)이다. 이 가운데서 한보광의 연구는 같은 이름으로 후에 출판되었는데(大阪: 東方出版, 1991) 지금까지 신라 정토사상에 대하여 이루어진 국내외 연구 성과를 총 정리하고 한 단계 넘어서는 매우 포괄적이고 철저한 연구서이다.
저자는 신라의 정토신앙과 사상의 변화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시기에 초점을 맞추면서 정치, 사회적 배경에 연결시켜 이해하고 있으며, 교학사상적으로는 신라 정토교학의 계보를 원효를 중심으로 한 如來藏思想 계통과 경흥에 의해 대표되는 唯識思想 계통으로 대별하여 보고 있다. 무엇보다도 원효의 『遊心安樂道』찬술 문제를 종래의 來迎院本 대신 그보다 훨씬 오래된 자료인 明曆本에 근거하여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것은 이 책의 큰 공헌으로 여겨진다. 한보광과 관점은 다르지만, 정토신앙과 신라사회를 연결시켜 보는 해석은 이미 일본학자 八百谷孝保("新羅社會와 淨土敎," 『史潮』 7/4, 1937), 江田俊雄("新羅佛敎에 있어서 淨土敎,"『支那佛敎史學』3/3, 1939), 三品彰英("新羅의 淨土敎,"『塚本博士頌壽紀念佛敎史學論集』(京都大學, 1961) 등의 연구가 있다.
한보광의 포괄적 연구 이후 시각을 달리 하면서 또 다른 신라 정토사상에 대한 폭넓은 연구가 국내 국사학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金英美의『新羅佛敎思想史硏究』(민족사, 1994)로서, 제목과는 달리 거의 대부분 신라 정토신앙과 사상에 대한 연구서이다. 본래 이화여대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新羅 阿彌陀信仰 硏究』를 보완하여 출판한 것이다. 이미 한보광의 연구에서도 시도되었지만 신라의 정토신앙과 사상의 변화를 신라 사회의 역사적 변화와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본래 국사학계에서 이러한 연구 시각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李基白으로서, 그의 연구성과는『新羅思想史硏究』(일조각, 1986)라는 논문집으로 출판되었다. 이기백은 신라 정토신앙을 유형적으로 구분하면서 그러한 신앙을 수용하는 사회계층과 연결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으나 너무 단선적인 해석이라는 인상을 준다. 김영미의 연구는 정토사상을, 적어도 그 한 유형을, 신라 사회의 소외계층과 연계시켜 염세적이고 도피주의적인 것으로 보는 이기백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훨씬 더 다각적인 노력을 보이고 있다.
14) 신라 교학사상 연구
신라불교 연구는 한국불교사 연구 가운데서 가장 많은 관심을 모아 온 분야이다. 이미 언급한 신라 정토사상의 연구 이외에도 신라 불교의 다양한 측면들이 연구되어 왔다.
조명기, 박종홍의 뒤를 이어 신라 불교사상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1980년대와 90년대에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원효와 화엄사상에 관한 연구는 압도적이다. 우선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신라 정토사상을 제외한 나머지 교학사상 내지 신앙에 대한 연구들을 살펴보자.
첫째 언급될 연구는 金知見, 蔡印幻 편, 『新羅佛敎硏究』(山喜房佛書林, 1973)이다.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신라불교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불교에 대한 여러 가지 논문들을 모은 책으로서, 신라불교는 정토사상에 관한 논문이 3편, 원효에 관한 논문 2편, 기타 2편이 실려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불교문헌에 관한 몇몇 중요한 서지학적 연구 혹은 텍스트의 校注와 復元을 싣고 있다.
金知見은 "新羅 華嚴學의 系譜와 思想"(『학술원논문집』 12, 1973)이라는 논문에서 義相係가 신라화엄의 주류이고 元曉係가 방계임을 밝혀 그 후 대체로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신라 하대의 화엄에 관한 연구로는 金福順의 『新羅華嚴宗硏究』(민족사, 1990)가 있으며, 1991년 金相鉉은 『新羅華嚴思想史硏究』(민족사, 1991)를 펴냈다. 김상현의 책은 특별히 주목할만한 역저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의 이데올로기로 보는 국사학계에 널리 퍼진 해석(李基白, 崔炳憲, 蔡尙植 등)과 신라하대 화엄사상의 흐름을 지나치게 세분화한 김복순의 연구 등 종래의 연구들을 균형감각 있게 비판하면서 신라의 화엄사상과 신앙의 다양한 형태들을 착실히 규명하고 있다. 특히 蛇福說話에 대한 분석과 佛國寺와 화엄사상과의 연관을 밝히는 작업은 뛰어나다. 그러나 김상현의 책은 신라 화엄학의 계보는 비교적 소상하게 고찰하고 있으나 제목과는 어긋나게 정작 의상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원효 등 신라 화엄사상가들의 사상 자체는 별로 다루지 않고 있다.
동국대의 全海住는『義湘華嚴思想史硏究』(민족사, 1992)에서 의상의 『華嚴一乘法界圖』를 중심으로 하여 화엄의 性起사상에 초점을 맞추면서 한국 화엄사상사를 정리하고 있다. 性起의 개념을 다소 불명확하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인 제 5장 "義湘 性起思想이 普照禪에 끼친 영향"에서 지눌이 『法界圖』를 어떻게 인용하고 해석하는지를 고찰하는 가운데 뒤늦게 명확해지는 느낌이다. 처음부터 性起개념을 體와 用, 性과 相, 不變과 隨緣 등의 친숙한 개념들로써 분명하게 정의한 다음 시기적으로 소급하여 의상의 性起사상을 논의하는 방법을 취했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의상의 화엄사상 연구로서 전호련, 『신라 의상의 화엄교학 연구』(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1990)도 있다.
신라 불교사상가들 가운데서 아무래도 가장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인물은 원효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원효 사상의 전모를 체계적으로 밝히는 단일 학자의 연구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원효 사상의 한 측면만을 다루는 연구서와 박사학위 논문들을 들자면, 우선 李箕永, 『元曉思想』1: 世界觀(원음각, 1967)이 있다. 이 책은 제목과는 달리 원효 사상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아니라 그의 『大乘起信論』에 관한 주석(疏, 別記)을 풀이 내지 해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효 사상에 대한 그의 대단한 열정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많은 논문과 글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원효 사상 전모를 밝히는 연구서를 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1982년에 출판된 그의 『韓國佛敎硏究』(한국불교연구원)는 그 때까지 씌어진 원효에 관한 논문들과 기타 한국불교에 관한 글들을 모아 놓고 있으며 1994년에 출판된 그의 『元曉思想硏究』I(한국불교연구원, 1994) 역시 1976년부터 1993년 사이에 씌어진 원효에 관한 논문들과 기타 글들을 모은 책으로서, 원효에 대한 하나의 포괄적 연구를 바라는 기대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기영에 이어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학자치고서 원효를 다루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원효에 관한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李鐘益의 『원효의 근본사상: 十門和諍論硏究』(동방사상연구원, 1977), 李晩鎔, 『원효의 사상: 和諍思想을 중심으로』(전망사, 1983), 최유진, 『원효의 화쟁사상 연구』(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88). 李平來, 『新羅佛敎 如來藏思想 硏究』(민족사, 1991), 은정희, 『起信論疏, 別記에 나타난 원효의 一心思想』(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983), 은정희 역주, 『大乘起信論疏, 別記』(일지사, 1991), 橫超慧日, 村松法文 共編, 『二障義』(京都, 1979), 신현숙, 『원효의 인식과 논리: 判比量論의 硏究』(민족사, 1988), 김준형, 『원효의 敎判觀硏究』(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1988) 등이 있다. 위에 언급한 은정희의 원효 『대승기신론』주석서의 번역 외에 이기영 역, 『金剛三昧經論』(대양서적, 1980), 이영무 역, 『校訂國譯 涅槃經宗要』(대성문화사, 1984)가 있다. 최근 일인 학자 佐藤繁樹는 원효에 관한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1993)을 『元曉의 和諍論理』(민족사, 1996)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無二不守一'이라는 사상적 관점에서 해석하면서 원효의 화쟁논리를 조명하는 연구서로서, 원효사상의 전모를 밝히는 연구라기보다는『금강삼매경론』에 관한 연구서이다.
신라 唯識思想에 관한 연구로는 황성기, 『圓測의 唯識學說硏究』(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76), 오형근, "元曉思想에 대한 唯識學的 硏究," 『唯識思想硏究』(佛敎思想社, 1991), 정영근, 『圓測의 唯識哲學』(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4), 이만, 『新羅 太賢의 唯識思想 硏究』(동쪽나라, 1989), 방인, 『太賢의 唯識哲學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5)가 있는데 오형근의 논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박사학위 논문들이다.
신라불교의 계율사상에 대해서도 이기영의 "元曉의 菩薩戒觀" 등 여러 논문들이 있으나 종합적인 연구로는 蔡印幻, 『新羅佛敎 戒律思想硏究』(1977)가 있다.
15) 신라불교의 성격에 관한 연구
한편, 최근에는 신라의 불교 전래와 수용에 관하여도 종래의 학설을 비판하는 새로운 관점들이 제시되고 있다. 辛鍾遠의『新羅初期佛敎史硏究』(민족사, 1992)는 신라 불교수용에 관한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들을 비판적 시각에서 다각적으로 검토하면서 불교공인 이전에 민간차원의 불교수용을 강조하는 수정적 견해들을 제시하고 있다. 장지훈의 『한국 고대 미륵신앙 연구』(집문당, 1997)는 삼국의 불교수용을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의 확립과 왕권강화라는 시각에서 해석해 온 김철준("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 『역사학보』2, 1952), 이기백(『신라사상사연구』, 1986) 등의 기존 학설을 비판하면서 삼국의 彌勒信仰을 중심으로 하여 불교수용의 종교적, 문화적 동기를 강조하고 있다. 불교의 수용을 귀족과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지배체제의 정당화와 강화보다는 끊임없는 전쟁과 격변하는 사회변동 속에서 사회통합을 이루는 기능 속에서 찾고 있으며 호국불교의 이념도 護法을 통한 護國이라는 正法治國思想에 있음을 강조한다. 장지훈은 또한 불교 이전에 무교가 이미 왕권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지적하며 미륵신앙과 무속의 습합도 논하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참신한 이론을 많이 제시하고 있는 저서이며, 불교의 정치사상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가 돋보인다.
신라불교의 巫佛習合에 대하여는 김택규, "신라 및 고대일본의 神佛習合에 대하여," 『韓日古代文化交涉史硏究』(을유문화사, 1974)와 "신라상대의 토착신앙과 종교습합," 『新羅宗敎의 新硏究』(신라문화선양회, 1991)가 있다.
한편 설화문학의 관점에서 신라불교를 바라본 연구로서 黃浿江의 『新羅佛敎說話硏究』(일지사, 1975)가 있다. 불교설화를 "가시적 표현을 빌어서 <佛像>(Image of Buddha)을 부각시켜 주는 것"이라고 정의하면서 業報輪廻, 菩薩行化, 靈異, 求法, 功德, 名稱緣起, 往生의 7 범주로 설화자료들을 분류하여 고찰하고 있다. 자료를 변역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하는 것은 이 책의 큰 결함이며, '言說의 彼岸에 있는 佛像'이라는 표현이나 왕생을 열반과 혼동하는 데서 보이듯이 저자의 불교이해에 명백한 한계가 보인다.
16) 신라 禪불교 연구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라 말기에 전래되어 한국불교의 판도를 바꾼 禪佛敎에 대한 연구도 많이 진척되었다. 우선 주목할만한 연구는 九山禪門의 성립을 사회사적 관점에서 신라 말의 정치적 상황과 화엄종단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한 崔柄憲의 "新羅下代 禪宗九山派의 成立,"『韓國史硏究』7(1972)과 "羅末麗初 禪宗의 社會的 性格,"『史學硏究』(1975)이다. 같은 구산선문의 성립을 고찰하면서도, 그 사회적 성격을 지방 호족들과의 연계라는 관점에서 파악한 최병헌과는 달리 고익진은 "新羅下代의 禪傳來," 『韓國禪思想硏究』(동국대 출판부, 1984)에서 선의 정착을 신라 말 왕실 내부의 역학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羅末麗初의 禪을 九山으로 파악하는 학계의 관행에 대하여 許興植의 "禪宗九山과 禪門禮懺文의 問題點," 『歷史敎育論集』(경북대 사학과, 1983)은 『선문예참문』의 고찰을 통해 후대의 불교계 상황을 과거로 투사하는 시대착오적 문제점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라 선불교에 대한 가장 포괄적 연구는 鄭性本의 『新羅禪宗의 硏究』(민족사, 1995)로서, 신라 선불교의 역사적 성격을 보는 시각은 이전의 연구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한 비판적 연구는 신라 선사상 및 역사에 관하여 학계에서 별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들을 많이 밝히고 있다.
17) 高翼晉의 古代佛敎 연구
한국불교 연구에 누구 못지 않게 심혈을 기울인 학자는 고익진이다. 그의 『韓國 古代 佛敎思想史』(1989)는 본래 동국대 박사학위 논문(1988)으로서, 그의 일주기를 맞아 출판된 것이다. 삼국의 불교전래와 정착과정의 고찰로부터 시작하여 신라 말 선불교의 전래까지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저자의 탄탄한 연구가 돋보이는 대작이다. 신라 교학사상 일반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정토교학은 다루지 않고 있다. 아마도 신라 교학사상에 대한 단일 저자의 연구로서는 지금까지 나온 것 가운데 가장 포괄적인 연구일 것이다. 그러나 원효, 의상 등 몇몇 중요한 학승들의 사상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온전한 <사상사>라 불리기에는 미흡하다. 또한 조명기나 박종홍 등의 연구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제기될 수 있는 근본문제 가운데 하나는 僧郞이나 圓測과 같이 중국에서 활약하다가 중국에서 입적한 스님들을 과연 <한국> 불교 사상가로 간주할 수 있을지 하는 문제도 한번쯤 생각해볼 문제이다.
18) 『韓國佛敎全書』와 한국불교 문헌연구
고익진은 한국불교 문헌을 집대성한 『韓國佛敎全書』(총 12권, 1979-, 동국대학교 불전간행위원회 편)의 편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학자이다. 불교사 연구가 무엇보다도 책임 있는 문헌의 수집과 편집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전서는 실로 기념비적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전서는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가 편찬한 『韓國佛敎撰述文獻總錄』(동국대 출판부, 1976)에 근거하고 있다. 한국에서 찬술된 불교문헌들을 조사하여 그 현존여부와 소장처 등을 밝히고 있는 책이다.
고익진은『韓國撰述佛書의 硏究』(민족사, 1987)라는 책도 펴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중요한 한국불교 문헌들에 대한 치밀한 문헌학적, 사상사적 연구 논문들을 담고 있는 책이다. 종래 원효의 저술로 전해져 오던 『遊心安樂道』를 치밀한 비교문헌적 연구를 통해 8세기초에서 9세기초 사이에 신라에서 누군가가 원효의 『無量壽經宗要』를 '增補改編'한 것임을 밝히고 있으며, 知訥의 저술인지 아닌지 많은 논란이 있어 온『念佛要門』(念佛因由經)이 그에게 假託된 것임을 설득력 있게 입증하고 있다. 또 하나의 주목할 논문은 "碧松智嚴의 新資料와 法統問題"로서, 한국 선불교의 법통 문제를 둘러싼 종래의 논의에 진일보한 지평을 열어주고 있다. 즉 正心-智嚴-靈觀-休靜-惟政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선맥은 사상면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보조 지눌을 계승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休靜의 법맥을 臨濟-太古까지 소급하는 법통설은 휴정-유정의 문도들에 의해 懶翁-無學-己和 법통설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밝히고 있다.
19) 고려불교 연구
고려불교 연구는 신라 불교에 비해 비교적 소홀히 여겨져 왔던 분야이다.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한국불교에 대한 일종의 퇴행적 사관이 지배적인 것 같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는 통일신라에서 정점에 이른 후 내리막길을 걸었다는 시각이 일반화된 탓인지 고려불교나 조선조 불교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된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시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물론 교학적 측면에서 볼 때 그러한 견해도 수긍이 가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모든 역사가 다 중요하며 오히려 현대 한국불교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는 고려와 조선조 불교사가 더 직접적인 중요성을 띤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행이 1970년대부터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고려불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많은 연구 성과를 내고 있다.
우리는 이미 대각국사 의천을 중심으로 한 고려불교 연구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의천에 이어 본격적인 연구 대상이 된 것은 한국 불교사상과 전통의 이해에 있어 핵심적 위치를 점하고 있는 普照國師 知訥이다. 李鍾益의 『韓國佛敎의 硏究 ― 高麗 普照國師를 中心으로 하여』(國書刊行會, 1980)는 지눌 연구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역저이다. 본래 이 책은 저자가 일본 大正大學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논문인 『高麗普照國師의 硏究』를 출판하면서 제목을 바꾼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의 생애와 사상을 다루는 최초의 포괄적이고 철저한 연구서로서, 그 이후의 지눌 연구에 토대가 되었다. 저자는 이 연구서 외에도 다른 논문들을 통하여 평소부터 지눌의 조계종 宗祖說을 주장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여기서도 물론 같은 주장을 펴고 있다. 이 문제는 그러나 대단히 복잡한 문제로서 지금까지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한국불교사 연구의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인 이 문제는 다른 주장들과 대비하여 다시 한번 철저하게 다지고 정리되어야 할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언급을 피하고 다음 기회로 미룬다.
지눌의 선사상에 관한 중요한 논문들로는 金芿石의 "佛日 普照國師," 『佛敎學報』 제 2집(1964)과 朴鍾鴻의 "知訥의 思想," 『韓國思想史』(1972), 宋天恩의 "知訥의 禪思想," 『崇山朴吉眞博士華甲紀念 韓國佛敎思想史』(1975) 등이 있다.
한편, 고승들의 전기나 사상 혹은 종파나 교학사상에 중점을 두는 불교학자들의 연구와는 달리 李載昌은 고려 시대의 사원 경제에 관한 연구를 내어 주목된다. 그의 『高麗 寺院經濟의 硏究』(아시아문화사, 1976)는 일인 학자 族田浜(하타다 타카시)의 논문 "高麗朝에 있어서 寺院經濟,"『史學雜誌』(XLIII, 5, 1932)에 이어 한국 학자에 의한 최초의 본격적 연구이다.
한국불교사 연구는 불교학자와 국사학자들의 공통된 관심분야로서 양자의 연구가 보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데에 이견이 있을 수 없다. 다행이 고려불교사 연구에 한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많이 참여하여 상당한 연구성과를 내고 있다. 우선 역사학자로서 일찍부터 불교사 연구에 관심을 가진 대표적 학자는 金哲埈으로서, 고려초 한국 天台學이 중국불교에 미친 영향을 고찰한 "高麗初의 天台學 硏究 ― 諦觀과 義通," 『東西文化』2(1968)가 있다. 고려초 천태학의 대가 諦觀의 연구로는 李永子 譯註, 『天台四敎儀』(경서원, 1988)가 있다. 이영자는 또한 1982년 대정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에 기초하여 그간 천태학에 관하여 발표된 논문들을 모아 『韓國 天台思想의 展開』(민족사, 1988)를 출판했다.
김철준의 뒤를 이어 국사학자로서 불교사 연구에 매진한 사람은 崔炳憲으로서, 이미 언급한 신라 九山禪門에 대한 연구를 제외하고는 그의 연구는 주로 고려불교사에 집중되고 있다. "天台宗의 成立,"『한국사』6(1975), "高麗時代 華嚴學의 變遷,"『한국사연구』30(1980), "高麗中期 玄化寺의 創建과 法相宗의 隆盛,"『韓?劤博士 停年紀念史學論叢』(1981), "韓國華嚴思想史에 있어서의 義天의 位置,"『韓國華嚴思想硏究』(1982), "高麗中期 李資玄의 禪과 居士佛敎의 性格."『金哲埈博士 華甲紀念史學論叢』(1983), "太古普愚의 佛敎史的 位置,"『한국문화』7(1986) 등의 주목할만한 논문들이 있다. 한편 최병헌 만큼 고려불교사 연구에 관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閔賢九는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震檀學報』36(1973)에서 지눌의 修禪社 운동과 최씨 무신정권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매우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여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앞서 무신정권과 불교계의 움직임에 대한 연구로서 주목할 것은 金鍾國의 일어 논문 "高麗武臣政權과 僧徒의 對立抗爭에 관한 一考察,"『朝鮮學報』21-22(1961)이다. 민현구의 "高麗의 對蒙抗爭과 大藏經," 『韓國學論叢』1(1978)도 있다.
지눌의 뒤를 이어 수선사를 주도한 고승 眞覺國師에 대한 연구로는 秦星圭, 『고려 후기 眞覺國師 慧諶硏究』(중앙대 박사학위 논문, 1986)가 있으며 權寄悰의『高麗後期의 禪思想 硏究』(동국대 박사학위 논문, 1987)도 지눌과 진각국사 등의 선사상을 다루고 있다.
세계에 자랑할만한 국보 고려대장경에 관한 연구로는 일찍이 일인 학자 池內宏(이케우치 히로시)의 "高麗朝의 大藏經,"『東洋學報』, 13권 3호, 14권 1호, 大屋德城(오야 토쿠조)의 "朝鮮海印寺經板攷 ― 특히 大藏經補板 및 藏外雜板의 佛敎文獻學的 硏究,"『東洋學報』15권 3호(1920)가 있고, 고려 續藏經에 관해서는 그의 『高麗續藏經彫造攷』(京都, 1937)가 있다. 그 외에 安啓賢의 "고려 대장경과 그 가치,"『韓國佛敎史硏究』(동화출판사, 1982)는 고려 대장경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논문이다.
불교와 왕권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면서 고려 화엄사상, 특히 均如의 화엄사상이 光宗의 전제왕권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金杜珍의『均如華嚴思想硏究』(일조각, 1983)는 역작이긴 하나 화엄사상에 대한 혼란된 이해, 무리한 해석 등으로 인해 불교학계의 공감을 받기 어려운 연구이다. 균여 화엄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金知見 編注,『均如大師華嚴學全書』(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77)가 도움이 된다.
20) 許興植과 고려불교사 연구
역사학적 입장에서 고려불교사 연구에 가장 활발한 학자는 고려의 사회문화에 초점을 맞추어 고려불교 전반을 폭 넓게 연구해 온 許興植이다. 그의 연구성과는『高麗佛敎史 硏究』(일조각, 1986)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고려불교 연구의 수준과 범위를 한 단계 끌어올린 대작이다. 고려 불교계와 국가, 僧政과 僧階制度, 교단 혹은 종파사의 연구, 그리고 자료의 수집과 서지학적 고찰 등에서 기존의 연구보다 한층 더 깊이 파고들려는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며 성과도 거두었다. 특히 五敎九山, 五敎兩宗 설로 정착되다시피 한 기존의 宗派史를 다시 한번 점검하면서 <종파>의 개념과 그 성립 요건 등을 논하여 한국불교에서 진정한 의미의 종파의 성립은 중앙 국가권력의 불교계 장악이 느슨해진 신라 말을 거쳐 고려 초에 성립되었으며, 고려불교도 五敎兩宗 대신 고려 초에는 曹溪宗(禪宗), 華嚴宗, 瑜伽宗, 그리고 나중에는 의천이 개창한 天台宗을 합하여 4대 종파의 구도로 파악되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기존의 연구를 넘어서려는 의욕이 앞서서 아직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가설이나 근거가 박약한 이론들이 많이 제시되고 있으며, 저자의 문체가 전반적으로 명료하지 못한 점도 흠이다.
허흥식의 왕성한 고려불교 연구는『韓國中世佛敎史硏究』(일조각, 1994)라는 또 하나의 저서로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고려불교사연구』에서 제시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보완하는 성격의 연구서이다. 조계종의 기원과 법통 문제에 대한 논의가 특별히 주목된다. 허흥식은 또한 무신집권기 천태종의 法華結社 운동인 白蓮社의 제 4대 주지 眞靜國師의 시문집 『湖山錄』을 校勘譯註하고 진정국사에 대한 그 간의 연구 논문들도 함께 실었다(『진정국사와 호산록』. 민족사, 1995).
한편 같은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고려불교 연구에 매진한 蔡尙植도『高麗後期 佛敎史 硏究』(일조각, 1991)를 내었다. 고려후기 불교사 연구라 해도 그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다. 주로 무신정권 수립을 전후로 한 修禪社와 白蓮社 結社運動의 사회적, 계층적 배경에 대해 다각적 조명을 시도하고 있으나 기존의 연구를 넘어서는 이렇다 할만한 성과는 보이지 않고 있다.
21) 조선조 불교의 연구
조선조 불교연구는 신라불교나 고려불교에 비하면 너무나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 그 이유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 대부분이 불자들이며 자연히 억압받고 위축되었던 시대의 불교에 관한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는 조선조 불교는 어느 시대의 불교 못지 않게 중요하다.
먼저 고려말 조선초의 儒佛交替에 대한 연구로는 李相伯, "儒佛兩敎 交代의 機緣에 대한 一硏究," 『韓國文化史論攷』(1948)와 韓?劤의 논문, "麗末鮮初의 佛敎政策," 『서울대학교논문집: 인문사회과학』6(1957)이 있으며, 李逢春의『朝鮮初期 排佛史 硏究』(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1)도 있다. 조선조 사원경제에 대한 연구로 金甲周의『朝鮮時代 寺院經濟 硏究』(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82)가 있다. 조선 초기의 배불사상에 대해서 불교 측 護敎論을 전개한 己和 得通(1376-1433)의 사상에 관해서는 朴海?의 『己和의 佛敎思想硏究』(서울대 박사학위논문, 1996)가 있다.
삼국시대의 불교에 대하여 수많은 논문을 발표한 金煐泰는 조선조 불교의 중심인물인 서산대사 休靜에 관하여『西山大師의 生涯와 思想』(박영사, 1975)을 펴냈으며, 禹貞相의 서산대사 연구, "西山大師의 禪敎觀에 대하여,"『朝鮮前期 佛敎思想硏究』(동국대출판부, 1985)와 高橋亨의 『李朝佛敎』에 있는 서산대사 부분과 더불어 휴정에 대한 중요한 연구업적이다. 서산대사의 『禪家龜鑑』에 대한 연구로는 申法印의 『서산대사의 선가구감 연구』(新紀元社, 1983)가 있다. 한편 휴정의 제자로서 승병을 일으켜 큰 활약을 한 松雲大師 惟政에 관한 연구로는 김동화, 김영태, 목정배 공저, 『護國大聖四溟大師硏究』(동국대 불교문화연구소, 1971)가 있다.
의상대사의 『화엄일승법계도』는 균여를 비롯하여 고려시대의 화엄사상가들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조선조에서도 계속하여 그 해석학적 연구전통이 이어졌다. 그 한 예가 雪岑 金時習(1435-1493)의 『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인데, 번역과 해설을 실은 金知見의 연구 『大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 金時習의 禪과 華嚴』(대한전통불교연구원, 1983)이 있다.
22) 한국 근현대 불교사 연구
조선조의 억불정책에 의해 억압받던 불교계는 한일합방과 더불어 승려의 도성 출입금지가 해제되는 등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에 대한 불교계의 태도, 조선 총독부의 불교정책, 불교계의 다각적인 움직임, 그리고 해방 후 비구승과 대처승의 대립을 둘러싼 불교종단의 갈등 등, 근현대 불교사의 정확한 인식은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과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조선조 불교연구가 등한시되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근현대불교사 연구도 활발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비로소 근현대불교사에 대한 총체적 인식을 도모하는 학문적 노력들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첫째 시도는 姜昔珠, 朴敬勛이 중앙일보에 연재한 『近世佛敎百年』(중앙일보사, 1980)이며, 그후 불교사학회에서 편집한 『近代韓國佛敎史論』(민족사, 1988)이 이 분야를 연구한 朴敬勛, 鄭光鎬 등의 논문을 싣고 있다. 한편, 徐景洙의 불교학 논문 유고를 편집해서 출판한『불교철학의 한국적 전개』(불광출판부, 1990)는 근현대불교에 대한 서경수의 논문들을 다수 싣고 있다. 정광호의 『近代韓日佛敎關係史硏究』(인하대학교출판부, 1994)는 제목 그대로 한국 근대불교사에 얽힌 일본불교와의 관계를 다룬 연구이다. 김광식의 『韓國 近代佛敎史 硏究』(민족사, 1994)는 이 분야에 대한 단일 학자의 연구로서는 가장 체계적인 연구서이다. 김광식은 그후 다시 일제시대의 불교계 청년운동과 해방후 불교계의 동향을 다루는『韓國 近代佛敎의 現實認識』(민족사, 1998)을 펴냈다. 金敬執의 『한국근대불교사』(경서원, 1998)는 1876년 개항기로부터 1911년 일제의 사찰령이 제정되기 전후의 불교계의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
한편, 억불정책으로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조선조불교, 특히 한국 선 전통을 중흥시킨 鏡虛(1846-1912) 선사에 대한 연구로서 이홍우, 『경허선사: 공성의 피안길』(민족사, 1996)과 한중광, 『경허, 길 위의 큰스님』(한길사, 1999)의 단행본이 있고, 그밖에 많은 논문들도 씌어졌다. 근대불교의 위대한 인물 韓龍雲에 대한 연구도 비교적 많은 편이다. 박노준, 인권환의 『韓龍雲硏究』(통문관, 1960)가 있고 임중빈, 『韓龍雲一代記』(정음사, 1974) 등이 있다. 근대불교의 또 하나의 거봉 白龍城(1964-1940)에 대하여는 그의 大覺敎운동에 초점을 맞춘 한보광의 『龍城禪師硏究』(감로당, 1981)가 있다.
23) 韓基斗의 한국불교사 연구
1960년대에서 80년대를 통해 한국불교를 그 사상 면에서 가장 왕성하게 연구한 학자 가운데 하나는 원광대학의 한기두이다. 한국불교사상에 대한 그의 폭넓은 관심은 이미 1973년에 출판된 그의 『韓國佛敎思想』에 잘 나타나 있다. 첫 부분에서 한국 불교사상의 흐름을 정리한 다음 한국의 화엄사상, 천태사상, 그리고 선사상을 서술하고 있다. 단일 연구자가 이 정도 한국의 불교사상을 정리해 놓은 것도 당시로서는 큰 업적으로 평가할만한 일이었다.
한기두는 그후 한국 선사상 연구에 집중하여 『韓國 禪思想 硏究』(일지사, 1991)를 내었다. 그의 원광대 박사학위 논문(1975)에 토대를 둔 것으로서, 한국의 선사상을 신라의 初期禪, 고려의 中期禪, 조선시대의 後期禪으로 구분하여 서술하고 있다. 그는 신라시대의 선을 山門禪, 고려시대의 선을 禪敎和會禪, 그리고 조선시대의 선을 祖師禪으로 규정하고 있다. 현재까지 출판된 한국 선불교에 관한 저술들 가운데서 가장 포괄적인 성격을 띤 역저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의 글이 논리적으로 투명하지 못한 곳이 많다는 사실이다.
24) 鎌田茂雄(카마다 시게오)의 한국불교 연구
鎌田의『朝鮮佛敎史』(1987)는 일제시대 일인 학자들에 의해 씌어진 한국불교사 이후 오래 만에 나온 한국불교사로서, 저자는 한국어판(신현숙 역, 『韓國佛敎史』. 민족사, 1987) 서문에서 밝히기를 한국불교를 중국불교의 아류 정도로 보고 한국불교를 가볍게 보는 일본 학계의 그릇된 경향을 바로잡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중국불교, 특히 중국 화엄사상 연구의 대가이기도 한 저자는 1970부터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한국불교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표명해 왔으며, 그 첫 학문적 결실로 나타난 것이 『朝鮮佛敎의 절과 역사』(1980)라는 가벼운 한국불교 소개서이며, 그 후 7년이 지나 『조선불교사』가 나왔다.
鎌田은 한국불교의 특징을 호국불교적 정신, 종합불교적 사상, 그리고 도교, 무교, 라마교, 풍수지리설 등이 혼합된 복잡한 신앙체계에서 찾고 있다. 그는 한국불교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고려불교라고 보며, 이때부터 한국불교는 중국불교권에서 이탈하여 독자적인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고 본다. 知訥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韓國禪의 발전, 禪敎兩宗 체계의 확립, 道詵과 太祖王建에 보이는 혼합적 신앙, 鎭護國家와 祈福禳災를 목적으로 한 각종 도량과 불교의례 등을 꼽고 있다. 이와 같이, 鎌田의 『한국불교사』는 비록 평이하게 씌어진 간략한 책이지만 여러 가지 뛰어난 통찰과 관점들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또한 마지막 장에서 한국의 불교미술과 의례, 그리고 사찰들도 소개하고 있다.
鎌田은 이 책을 전기로 하여 본격적인 3부 작 한국불교사를 저술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아직은 그 제 1권을 쓰기 위한 준비작업의 성격을 띤『新羅佛敎史序說』(1988)만이 나와 있다. 제 1부는 신라불교의 전개를 다루고 있으며, 제 2부는 義湘大師의 연구로서 그의 전기 내지 행적에 관한 연구로는 가장 상세하고 철저하다.
25) 불교 신앙 및 儀禮 연구
한국불교사 연구는 주로 고승들의 전기와 사상, 혹은 종파나 교학사상의 발전을 중심으로 하여 연구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불교는 처음부터 출가와 재가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출가자의 불교가 열반과 해탈이라는 출세간적 가치를 추구하는 수행 중심이라며 재가 불교는 왕실이나 서민을 막론하고 현세와 내세의 복락을 위해 공덕을 쌓는 일이나 불보살을 향한 신앙과 각종 기복적 의례에 집중되어 왔다. 정토신앙에 관한 연구는 이미 소개했으므로 여기서는 여타 신앙 및 의례에 관한 연구를 소개한다.
세간적 관심을 축으로 하는 재가불교의 역사적 모습을 다루는 연구로서 金三龍의 『韓國彌勒信仰의 硏究』(동화출판사, 1983)는 대표적이다. 오래 동안 한 주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해 온 저자의 노력의 결실인 이 책은 미륵신앙의 기원부터 시작하여 고대에서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미륵신앙의 발자취와 시대적 특징을 살피고 있으며, 특히 옛 백제 지역을 한국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조명하고 있다.
한국의 불교의례에 대하여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학자는 洪潤植으로서, 그의 일어 저서『韓國佛敎儀禮의 硏究』(隆文館, 1973)는 한국 불교의례의 골격을 다루는 종합적 연구서이다. 이어서 저자는 한국의 불교의례가 불교미술사나 고고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에 주목하여『韓國佛畵의 硏究』, 『韓國의 佛敎美術』, 『高麗의 佛敎美術』을 냈고 『三國遺事와 韓國古代文化』(원광대 출판국, 1985), 『韓國佛敎史硏究』(교문사, 1988)에서도 불교의례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개별 불교의례들에 관한 연구를 여기서 다 열거할 수는 없으나 대표적 의례인 八關會와 燃燈會에 관한 연구로서 안계현, "八關會攷," 『東國史學』 제 4집(1954)과 "燃燈會攷," 『白性郁博士 頌壽記念 佛敎學論文集』(1959)이 있으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일인학자 二官啓任(니노미야 케이닌)의 "高麗朝의 八關會에 관하여" 『朝鮮學報』9(1956), "高麗朝의 上元燃燈會에 관하여," 『朝鮮學報』12(1958)가 있다. 呂東贊의 『高麗時代 護國法會에 대한 硏究』(1970)도 참고할만하다. 한편 미국 U.C.L.A.의 박사학위 논문으로서 김종명의 고려불교 의례에 관한 연구, Buddhist Rituals in Medieval Korea(918-1392)가 있다. 김종명은 팔관회, 연등회가 토착적 조상숭배의 영향을 받아 주로 왕의 장수무병과 조상의 명복을 비는 왕실에 국한된 의식이었음을 밝히면서 <護國佛敎>적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한국불교사 연구에서 또 하나 소홀히 취급되어 온 분야는 密敎연구로서, 徐閏吉의『韓國密敎思想史硏究』(불광출판부, 1994)는 이 공백을 어느 정도 메워주는 연구서이다. 제목은 密敎思想史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밀교 의례와 신앙, 종파 등의 연구에 치중하고 있다. '密敎'라는 개념의 범위가 다소 불명확하여 저자는 각종 호국불교 의례나 풍수지리 신앙 등을 모두 포함시키고 있다. 자료가 그리 많지 않은 가운데서 한국 밀교신앙의 역사적 자취를 더듬어보는 노력이 돋보인다.
26) 로버트 버스웰(Robert Buswell Jr.)과 해외의 한국불교 연구
1980년대 초에는 普照國師 知訥에 대한 연구가 해외에서 2권 간행되어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해외 한국불교 연구에 중요한 촉진제가 되었다. 그 첫 번 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L.A)의 교수 로버트 버스웰의 연구이다. 그는 본래 순천 송광사에서 수년간 출가생활을 하기도 한 불자이자 뛰어난 불교학자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그는 송광사의 창건주이자 한국 선불교 전통의 핵인 지눌의 저서를 『華嚴論節要』만 제외하고 모두 영역하는 큰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결과 The Korean Approach to Zen: The Collected Works of Chinul(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3)이 출판되었다. 해외의 동양학에서는 번역이란 언제나 번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일단 영어로 번역을 하려면 아무리 어려운 불교 개념도 확실히 알지 못하고는 하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에 불교문헌의 번역은 그만큼 정확한 지식을 촉진하게 된다. 버스웰의 번역은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긴 소개의 글과 더불어 지눌이 인용한 글의 출전을 일일이 밝히는 등 풍부한 註를 달고 있다. 이 한 권의 출간으로 인해 한국불교의 독특한 전통, 특히 한국 禪의 모습이 세계 학계에 확실하게 인식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서 1984년에는 吉熙星(Keel, Hee-Sung)의 Chinul: the Founder of the Korean S?n Tradition(Berkeley Buddhist Studies Series, no. 6. Berkeley: Institute of South and Southeast Asian Studies, 1984)도 미국 학계에 출판되어 버스웰의 번역과 더불어 지눌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불교 전통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이미 소개한 李鍾益의 책과 더불어 지눌의 생애와 사상 전반을 다루는 포괄적인 연구서이다. 한편 沈在龍은 하와이 대학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of Korean Buddhism: The Integration of S?n and Kyo by Chinul(1979)에서 지눌의 禪敎一致 사상을 고찰하고 있다.
버스웰은 그 후 한국불교에 관하여 많은 논문들 외에 2권의 중요한 저서를 내었다. 하나는 The Formation of Ch'an Ideology: The Vajrasam?dhi S?tra, a Buddhist Apocryphon(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9)으로서, 원효와 그의 『金剛三昧經論』찬술에 얽힌 설화 등의 분석과 『금강삼매경』의 사상내용의 분석을 통해 이 경이 아마도 7세기 중엽쯤 중국 東山宗의 禪思想을 잘 알고 있는 신라승, 아마도 法郞에 의해 당시 새로운 사상인 선에 경전적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찬술되었을 가능성을 논증하고 있다. 버스웰의 또 다른 저서 The Zen Monastic Experience: Buddhist Practice in Contemporary Korea(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2)는 서양에서 왜곡되어 인식되고 있는 선불교의 실제 모습을 바로잡기 위하여 저자가 송광사에서 한 수도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한국 승려들의 생활과 선 수행의 실제 모습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 책이다. 놀랍게도 한국불교 연구는 지금까지 교리나 사상에 치중하여 한국불교의 수행전통이나 현재 사찰의 생활 모습에 대한 구체적 소개나 연구가 소홀히 되어 온 것이 사실이며, 버스웰의 책은 이러한 결함을 제거해 주는 훌륭한 책이다.
버스웰 외에도 해외 학자로서 한국 불교를 연구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덴마크의 소렌슨(Henrik Sorensen)과 호주의 조겐슨(John Jorgensen) 등이 주목된다. 서양 학자들의 연구는 다분히 한국 학자들이나 일본 학자들의 연구에 많이 의존하고 있지만, 근거 없는 추측이나 막연한 주장을 삼가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연구정신이 언제나 높이 살만하다.
한국 고대불교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인 覺訓의 『海東高僧傳』에 관한 연구로 Peter H. Lee의 탄탄한 번역 Lives of Eminent Korean Monks: the Haedong Kos?ng Ch?n(Harvard University Press, 1969)이 있다. 삼국유사의 자료가 되기도 했던 이 『해동고승전』에 관한 연구는 비교적 소홀히 되었으나 최근 章輝玉의 『海東高僧傳: 현대적 풀이와 주석』(민족사, 1991)이 나왔다. 현대적 풀이와 더불어 직역을 포함한 꼼꼼한 주석적 연구가 돋보인다.
한편 러시아의 불교연구와 한국학 전통을 이어 받아 쓴 볼코프(S. V. Volkov)의 초기 한국불교사 연구가 『韓國古代佛敎史』라는 이름으로 경희대의 박노자(티호노프)에 의해 최근 번역된 것은 학계를 위해 매우 기쁜 일이다. 역사학자인 저자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불교 사상이나 신앙보다는 불교교단의 사회경제적 위치와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 '번역 서문'에 있는 최병헌의 말은 이 책에 대한 좋은 소개이다:
한편 볼코프 교수의 『한국고대불교사』는 한국 고대 불교교단의 역사를 개관한 일종의 한국 고대불교사 개설서인데, 그 내용은 주로 교단의 구조, 僧職제도, 교단과 국가의 관계, 사원경제, 한국불교의 대외적 역할 등의 교단사에 관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한국의 고대 불교교단사를 세계불교사 ― 나아가서 세계종교사 ― 의 문맥 속에서 이해하려는 접근방법은 본서의 주요 특징으로 주목된다. 본서는 한국 고대불교를 일차적으로 동아시아 불교권의 일부로 파악하여 정치와 종교 관계의 모델을 '국가의 外護 國恩에 대한 교단의 儀式的 보답' 형으로 규정짓고 있다. 따라서 국교인 불교와 통일신라 시기의 통치이념인 유교는 상호 보완적인 공존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고 해석하고, 나아가 이러한 평화적인 공존 관계는 국가 권력이 신성시됨으로써 일체의 종교와 이념들이 治國濟民의 방편으로 인식되어 온 동아시아 문화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규정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대개 김철준, 이기백 등에 의해 제시되어 우리 나라 국사학계의 지배적인 관점이 되다시피 한 한국불교의 국가종교적 성격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고대불교가 <국가불교>로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한 역할은 인정되지만, 이와 동시에 왕권과 국가를 불교화하여 <불교국가>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종교적 측면 또한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 이 문제는 한국불교사를 보는 근본적인 관점에 관련된 것으로서 학자들 간에 시각 차가 발견되며 앞으로 보다 공정하고 정밀한 논의를 필요로 하는 문제이다.
본서의 말미에 실린 '譯者 後論'은 본서의 장단점을 잘 평하고 있는 하나의 훌륭한 논평문이다.
27) 정의행의 『한국불교통사: 우리 민중불교사의 복원』
역사를 보는 눈은 그 대상인 역사 자체 못지 않게 변하기 마련이다. 1970년대, 80년대에 전개된 반 독재 투쟁은 역사를 움직이는 민중의 힘을 자각하게 만들었으며, 이는 학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젊은 학자들 가운데서 이른바 民衆史觀이라는 것을 탄생시켰다. 종교계에서 일어난 민중신학, 민중불교 운동은 민중사관과 연합하여 한국 종교사를 새로운 눈으로 읽게 만들었다. 정의행의 『한국불교통사』(한마당, 1991)는 이러한 민중사관에 입각한 한국불교사로서 매우 주목할만한 책이다. 저자의 변대로, "우리 불교사는 전면적으로 다시 씌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낡은 지배질서를 옹호하며 그 속에서 안주하며 명리를 한 몸에 누렸던 일부 고승들보다도 오히려 '무상 변화의 법칙'과 보살 행을 온몸으로 실천하며 민중과 더불어 살았던 수많은 무명 승려와 불교도를 역사의 주체로 당당히 복원시켜야 한다"(17-18쪽)는 것이다.
확실히 학계의 주변부에서 활동해온 한 '재야학자'에 의해 씌어진 이 책은 한국불교사를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으며, 종래의 진부하고 유사한 한국불교사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참신성을 지니고 있다. 문체와 서술 또한 유려하고 명료하다. 저자는 흔히 민중사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과장이나 근거 없는 주장의 남발을 자제하는 지혜도 보이고 있다. 그 한 예로서, 한국 민중불교의 대표적 존재, 아니 '우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원효에 대한 서술에서도 저자는 균형 있는 시각을 보이고 있다. 민중불교사적 관점의 좋은 예로서 우리는 조금 길지만 다음과 같은 글을 인용하고자 한다. '원효 정토교의 의의와 한계'라는 항목에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원효는 일단 지배계급이 향유하는 귀족불교의 권위를 타파하고 불교를 모든 민중이 향유하게 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제도적 왕권불교에 대응하고 새로운 사회(淨土) 실현을 위해 민중의 공동체적 노력을 수렴할 수 있는 민중불교 결사(結社)와 같은 조직화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그가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널리 포교한 정토교는 불가피하게 아미타불 타력신앙에 수반하는 내세주의와 숙명적, 체념적, 내세주의적 신앙으로 오도될 여지를 남겼다.
이러한 정토교의 한계는, 이제 구세주 미륵의 하생(下生)을 기다리는 이름 없는 승려들의 갈망과 좌절을 거쳐, 마침내 현실의 고통과 모순을 스스로 타파함으로써 이 땅에 미륵 용화세계를 건설하려는 민중의 조직적 투쟁을 통해 극복되어야 할 시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저자가 원효의 정토사상을 논하기 위해 많이 의존하고 있는 『遊心安樂道』는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원효의 저술이 아님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는 점을 저자가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중사관이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한계는 역시 자료의 부족이라 할 것이다. 분명히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실제로 남아 있는 사료들은 주로 식자층, 지배층들에 의해 그들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료상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잊혀진 역사를 복원하려는 민중사가들의 노력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그러한 과정에서 역시 상식과 <실증성>을 무시하는 유혹은 늘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III. 맺음말
결코 완벽을 기하지는 못했지만 지금까지 고찰한 한국불교 연구의 성과를 보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연구상의 문제점들과 앞으로 더 연구되어야 할 과제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연구상의 문제점들을 거론하면 다음과 같은 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중복되는 연구가 많다는 점이다. 학자들 사이에서 타인의 연구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거나 도외시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특히 국사학자들보다는 불교학자들 사이에 더 두드러진 현상이다. 연구사적 의의가 드러나지 않는 논문들이 많고 논문의 각주에 다른 학자들의 연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서구어로 된 연구들은 말할 것 없고 일본 학자들의 연구도 도외시되는 경우가 많으며,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학자들끼리도 서로의 연구를의식하지 못하거나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둘째,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글이 투명하고 논리적이지 못해 연구자의 주장이 명료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글의 투명성은 사고의 투명성과 직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문제점이며, 연구성과가 편집자의 엄격한 편집과정 없이 출판되어 온 관행도 시정되어야 한다.
셋째, 연구분야가 치우쳐서 조선조 불교사나 근현대 불교사 연구는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가 아직 빈약한 형편이다. 李逢春의 지적대로, 가야불교, 고대 한일 불교교섭사, 排佛과 興佛 이외의 조선불교의 諸問題, 근대불교, 특히 해방이후 불교의 諸相 등이 소홀히 된 연구분야들이다.
넷째, 불교사상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강조하면서 불교를 정치와 사회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역사학자들의 노력이 많은 경우 확실한 증거 없이 막연한 추측에 의거하여 제시되는 경향이 강하다. 불교사상을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추상적으로만 연구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근거가 박약한 설득력 없는 주장들은 학문의 발전에 오히려 장애가 된다.
다섯째, 고승들의 저술을 비롯하여 한국불교 관계 문헌들의 정확한 번역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은 모든 연구의 기초로서, 정확한 번역 없이 연구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불교관계 金石文, 寺誌, 각종 史書와 文集 등 불교관계 자료들의 정확한 번역 작업도 매우 시급하다.
여섯째, 僧郞이나 圓測과 같이 중국에서 일생을 보내고 입적한 스님들을 <한국> 불교사상가로 간주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일종의 <터부>와도 같아 지금까지 심각하게 제기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을 한국불교사에 포함시켜야 하는 이유를 밝히는 작업은 필요하다.
이상과 같은 한국불교 연구상의 전반적인 문제와 더불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더 철저하게 규명되고 정리되어야 할 쟁점으로 제기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한국 불교전통 전체를 <通佛敎> 적 시각에서 보는 담론과 한국불교 정체성의 문제.
(2) 한국불교 종파사와 조계종의 정체성에 관한 혼란된 견해들.
(3) 한국불교의 국가불교적 성격을 둘러싼 문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어 온 이 문제들은 아직도 정리되지 못한 채 혼선을 빚고 있다. 이 문제들은 사실 상호 연결된 문제들로서, 한국불교의 성격과 정체성을 구명하기 위한 핵심 과제들이다. 이 문제들에 대하 보다 상세한 고찰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