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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고고학 스크랩 성서고고학 (연세대 교수 박준서 교수)
이지명 추천 0 조회 104 13.02.19 23:4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출처: http://user.chol.com/~simjy49/ritual/r2/r2_007.htm>  



(1) 성서고고학의 정의

     성서고고학이란 어떤 학문인가?


  현대 성서고고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W.F.올브라이트는 이렇게 정의하였다. "성서고고학이란 고고학적 연구로  조명된  성서학이다."

  이 말은 성서고고학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를 바르게  이해하고 탐구하는 성서 연구의 한 분야라는 말이다. 

  성서고고학의  이러한 학문적인 성격은 지금까지의 성서 고고학자들이 거의가 다  성서학자들이었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올브라이트의  제자이며 하버드 대학의 성서고고학 교수였던 G.E.라이트도 같은 입장에서 성서고고학을 정의하였다. 즉, "성서고고학은 성서를 이해하는 데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모든 고고학적  사실은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성서고고학은 성서 연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일반 고고학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성서고고학이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학문이지만, 목적은 성서의 기록들을 단순히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만은 아니다. 성서의 많은 기록들이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증명'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서고고학의 목적은 성서 기록의  '증명'이라기보다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서 '성서의 세계'를  밝힘으로써  성서에 기록된 말씀을, 기록된 당시의 역사적  문화적 맥락 안에서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있다.


     (2) 성서고고학 연구의 지리적 범위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기록된 역사는 진공관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들은 폭넓은 고대 근동 세계의 역사  문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어 내려왔다. 즉, 고대 근동 세계의 문화와 역사는  직접  간접으로 성서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고대 근동 세계 전체는 성서고고학 연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성서고고학 연구의 초점이 되는 지역은 '성지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땅(팔레스티나)은 성서에 기록된 역사가 전개되니 무대 및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서고고학의 지리적 중심은 '성서고고학(Archaeology of the Holy Land 또는 Palestinian Archaeology)'이다.


     2. 성서고고학의 역사


  성서고고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계를 거쳐서 과학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그 과정을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1) 성서고고학 준비 단계(1798  1890)


  성서고고학의 출발은 고대 근동 세계의 재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체로 19세기 이전까지는 찬란했던 고대 근동 세계의 문명은 땅속에 파묻혀 완전히 잊혀진 문명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서서히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고대 근동 세계의 문명을 새롭게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건은 나폴레옹의 에집트 원정이었다.

  1798년 나폴레옹은 에집트 원정의 장도에 오를 때 약 175명에  달하는 학자  예술가  과학자를 대동하였는데, 그들로 하여금 고대 에집트 문명의 유물과 유적을 면밀하게 조사  기록하게 하였다. 그 결과,  총24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분량의  <에집트의  모습(Description de l'Egy-pte, 1809 - 28)>이 출판되어 유럽 지식인 사이에 선풍적인  화제가 되었는데, 이 책을 통해서 유럽 사람들은 처음으로 찬란한 고대 에집트 문명에 접하게 되었고, 고고학적 연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 책의 출간 후, 특히 다음의 4가지 발견과 연구는 고대 근동 세계의 고고학 연구에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1) 로제타 석비(Rosetta Stone)의 발견과 상형문자의 해독


  나폴레옹의 에집트 원정 때, 한 프랑스 병사가 나일강이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델타 지역인 로제타(현재 라시드)에서 현무암 석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로제타 석비이다. 위부분이 잘려진  이 석비는 3가지 언어로 기록되었는데, 맨 윗부분의 14줄은 고대 에집트의 필기체 문자의 일정인 데모틱(Demotic)체로 기록되었다.  밑 부분의 54줄은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 그 내용은  에집트왕  프톨레마이오스(B.C.203  181)의 업적을 기린 것으로, B. C.195년에 세운 것이다.

  1822년 프랑스의 천재적인 학자J.F.샹폴리옹(1790-1832)이 14년 동안의 연구 끝에 마침내 이 석비에 기록된 상형문자를 해독하는 데  성공하였다. 상형문자의 해독은 고대 에집트 문명의 신비를 여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2) 베히스툰(Behistum) 암벽의 기록과 쐐기문자의 해독


  1835년 영국군 장교 H.롤린슨이 이란 베히스툰 지역에서 깎아지른 듯한 100m 높이의 암벽에 새겨진 고대 기록을 발견하였다. 그는 목숨을 내걸고, 암벽에 매달려 일부를 탁본하고 필사하는 데 선공하였다.  이 기록은 3가지 종류의 고대어, 즉 고대  페르샤어,아람어,바빌론어로 쓴 것으로서, 사용한 문자는 모두 쐐기문자(설형문자)였다.  롤린슨은 이 쐐기문자를 해독하기 시작했고, 또 독일인 G.그로테펜트및  아일랜드의 신부 E.힝크스 등의 연구 결과, 1850년대에 마침내 이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개가를 올렸다. 쐐기문자의 해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인 아시리아와 바빌론 제국의 문명 연구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3)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의 발굴과 토판문서의 발견


  1850년대 초, 영국인 A.H.레이야드가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를 발굴 하였다. 니느웨성은 고대 근동 세계를 제패했던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답게 성의 둘레가 13K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였다. 여기에서 레이야드는 산헤립왕(B. C.704  681) 의 궁전과 업적을 기록한 산헤립왕 업적비를  발견하였다.  또  1852  54년에는  H.라삼도  아슈르바니팔  대왕(B. C.668  627)의 거대한 왕궁과 방대한 규모의 왕실 도서관을  발굴하였다. 아슈르바니팔 대왕이 세운 왕실 도서관에서 발굴된 수많은  토판 문서들은, 모두 대영박물관으로 옮겨져 소장되었다.

  그 후 1872  73년 G.스미스가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니느웨 발굴의 토판 문서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된 노아 홍수 이야기와 비슷한 바빌론의 홍수 설화(길가메시  서사시) 기록의 일부를 발견하였다. 이 발견은 당시 영구에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몇 년 후인 1875년 스미스는 또 바빌론 지역의 창조 신화 실화 기록을 발견하였다. 영국 사람들의 흥분은 절정에 달하였고, 런던의  일간지 데일리 텔리그라프는 바빌론의 홍수 설화 기록의 나머지 부분이  토판 문서를 발굴하기 위해서 스미스를 니느웨로 보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스미스는 니느웨에 가서 그것을 기적적으로 찾아냈다.

  이러한 일련의 발견과 연구 결과는 고대 근동 문화에 대한 관심과 고고학적 연구에 박차를 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특히 1865년 영국에서는 팔레스티나 발굴 기금(Palestine Exploration Fund)이라는 연구단체가 발족되어, 최초로 팔레스티나 지역이 지도를 만드는 등 성지 고고학 발전에 대단히 크게 공헌하였다.


     (2) 제1단계(1890  1914)


  성지 이스라엘에서 과학적 방법으로 고고학적 연구가 시작된 것은 1890년의 일이다. 이 해에 영국의  고고학자  F.페트리(1853  1942)가 에글론(현재의 텔엘 헤시)을 발굴하였다.  페트리는 이 역사적 발굴에서 다음 2가지 공헌을 하였는데, 이는 과학적 학문으로서  성서고고학의 기초가 되었다.

  첫째는 텔의 발견이었다. 페트리 이전에는 텔(히브리어로는 Tel, 아랍어로는 Tell이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다. 텔이란 고대 사람들이 한 지역에 오래 살게 됨으로써 지반이 점차 높아져서 형성된 '언덕'을 말한다. 즉, 고대에 한 주거지역이 전쟁이 나 화재로 파괴되고,  다시 재건되는 과정에서 주거층(stratum)이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는 사이에 지반이 높아져서 자연히 텔이 형성된 것이다.

  페트리는 에글론 발굴에서 가가 주거층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가는  식으로 발굴하는 주거층별 발굴 방법(stratification)을 도입하였는데,  이것은 고고학 발굴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페트리의 주거층별 발굴 방법은 미국 학자 G.라이스너와 C.피셔에 의해서 더욱 정밀하게 발전되었다.

  둘째로, 페트리는 각 주거지층에서 출토된 토기(pottery)로써 그 주거지층의 연대를 측정하는 토기 연대측정법(potter chronology)을  발전시켰다. 토기는 잘 깨지는 값싼 것이었으므로, 고대 사람들은  줄곧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토기는 어떤 주거 지층에서나 풍부하게 발굴된다. 그런데, 페트리는 각 시대마다 독특한 모양  빛깔 무늬의 토기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토기를 시대별로 체계화함으로써 토기가 발굴된 주거 지층의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페트리가 개척한 토기 연대측정법은 올브라이트와 라이트에 의해서 고도로 정밀화되었다. 또한 이 기간에 일어난 중요한 일은 1900년 예루살렘에 미국 학자들이 성지 고고학 연구소(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arch)를 설립한 것이다. 이 연구 기관은 오늘날까지 성지 고고학 연구와 발전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3) 제2단계(1918 - 48)


  이 기간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부터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할  때까지로, 성서고고학의 '황금 세대'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기간은 대표적 고고학자는 올브라이트이다. 그는 드빌(Debir, 현재의 텔베이트 미르심) 발굴에서 토기 연대측정법을 정밀하게 체계화하였다. 그는 위대한 고고학자일 뿐 아니라 많은 고고학자를 배출하였다. 또한 영국 고고학자 휠러와 휠러-케년 발굴법을 고안하였다.

  이 기간에 일어난 획기적인 사건은 사해 두루마리의 발굴이었다. 사해 근처 쿰란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는 구약성서 원문 연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4) 제3단계(1948  70)


  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한 후, 성지 고고학의 주도권은 이스라엘  학자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은 자기 나라를  발굴한다는 유리한 입장에서 활발하게 고고학 연구를 추진해서 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특히 Y.야딘의 마사다와 하솔의 발굴은 이스라엘  고고학계의 대가로서의 위치를 확인 시켰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성지 고고학 연구는 이스라엘 학자들만이  독점한 것은 아니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케년은 예리고가 B. C.7000년부터 이미 성으로 둘러싸인 성곽도시였다는 것을 확증하였다. 따라서  예리고는 역사상 최고의 성곽도시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 라이트의 세겜 발굴과, 드 보의 쿰란 발굴은 모두 역사에 기록될 중요한 업적들이다.


     (5) 제4단계(1970년 이후)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성서 고고학계에는 신고고학(New Archaeology)이 일어났다. 이 신고고학은 방법론적으로 여러 학문이 연계되어 공동으로 연구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즉, 신고고학은 지질학자,토양학자,뼈 전문가, 인류학자, 생태학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팀을 이루어서 연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신고고학에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만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고대인들의 경험 세계 전체, 즉 환경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문화 현상 전체를 재구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3. 성서고고학과 성서 연구


  오늘날 성서고고학의 연구 결과는 성서를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성서고고학은 성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확증'해 주는 경우도 있고, 성서의 기록을 '보충'해 주는 경우도 있다. 이 중에서  구약을 중심으로 대표적인 경우를 소개한다.


     (1) 바니 하산의 벽화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는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오늘날 우리들은 그들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에집트 카이로의 남방 250km 지점에 있는 바니 하산에서 발견된 벽화이다. 이 벽화의 연대는 B. C.1900년경으로, 이스라엘 조상들의 연대와 매우 비슷하다.

  내용은, 37명의 가나안 사람들이 눈 화장을 즐겨 하는 고대 에집트 여자들에게 '눈 화장품'을 팔기 위해서 에집트로 옮아가는 장면이다.

  선두에는 검은 피부의 에집트인이 이들을 인도하고 있는데, 찬란한 채색 옷을 입고 있으며(창세 37:3의 요셉의 '장신구를 단 옷'을 연상시킨다), 나귀는 물건을 운반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고고학적으로 B. C.1900년경에는 아직 말과 낙타의 사용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남자는 모두 수염을 기르고 활  창  도끼와 같은 무기를 들고, 신발은 샌들을 신고 있다. 여자들은 모두 독특한 머리형을  하고  있으며, 남자와 다른 신발을 신고 있다. 또한, 물 담는 가죽 부대 악기 가축(염소와 산양) 등도 보인다.

  이러한 바니 하산의 벽화를 통해서 거의 같은 시대에 속하였던 이스라엘 조상들의 모습과 생활 형태를 추정할 수가 있다.


     (2) 마르닙타왕의 전승 기념비


  1896년 에집트의 테베(Thebes)에서 마르닙타왕(Marniptah;Merneptah, B. C.1224  11)의 전승 기념비가 발견되었다. 이 전승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스라엘은 황무하게 되었다. 그의 후손은 멸절되었다."

  구약 외에서 이스라엘이 언급된 최초의 기록인 이 기념비는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3) 예루살렘의 수구


  예루살렘은 천연적 요새지로 난공불락의 도성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땅에 정착생활을 한 이후에도 200년 이상 예루살렘만은 정복하지 못한 채, 가나안 원주민 여부스족들이  그대로  살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이 왕이 되자 곧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였다.

  그러면, 다윗 왕은 예루살렘을 어떻게 정복하였을까? 구약이 기록을 보면 다윗 왕은 부하들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수구를 타고 올라가서 그 성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였다(2사무 5:8).

  예루살렘의 수구의 발견은 지금부터 약 100년 전에 영국인 C.워런에 의해 이루어졌다. 영국의 팔레스티나 발굴 기금은 1867년 영국군 장교 워런을 성지로 파견하였다. 워런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탐색작업을하던 중 놀랄 만한 발견을 하였다. 히즈키야 터널(Hezekiah Tunnel)을 탐사하던 중에 암벽을 뚫어서 만든 지름 2m 정도의 원통형으로 된  수직 터널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지하로 뚫은 이 수직 터널은 통해서  기혼샘으로부터 물을 긷던 장치였다.

  기혼샘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수원이었다. 그러나 기혼샘이 성 밖에 있었기 때문에 적에게 성이 포위당했을 경우에는 물을 길으러 밖으로 나올 수 없었으므로, 주민들은 성 안에서 지하 터널을 파서 성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을 길었다. 이것이 바로 예루살렘의 수구인데,  다윗 왕의 부하들은 이 수구를 타고 올라가서 기습 작전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수구를 발견한 사람을 기념해서 워런 수구(Warren Shaft)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지하 터널을 파서 성 밖으로 나가지 않고 지하 터널을 통해서 성 밖의 샘물을 얻는 방법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하솔,게젤,므기또,기브온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4) 히즈키야 터널


  B. C.701년경 유다의 왕 히즈키야는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침공하려고 할 때, 급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 기혼 샘으로부터 지하 터널을 파서 기혼샘의 물을 예루살렘의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2열왕 20:20; 2역대 32:30).

  이것을 히즈키야 터널 또는 실로암 터널이라고 부른다.  이 터널은 총 길이 535m로 완전한 암석 지대를 파서 만든 터널이다. 기혼샘의 위치는 해발 636m이며, 이 물이 예루살렘성 안으로 흘러들어 생겨난 실로암못의 높이는 해발 634m 이다. 즉, 2m의 고저차를 535m의 지하 터널을 통해서 기혼샘에서 발원한 물이 완만하게 흐르도록 만든 것이다.

  이 터널을 만든 과정은 1880년 실로암못 근처의 돌벽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서 밝혀졌는데, <실로암 기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굴이 뚫린 과정은 아래와 같다. 양편에서 중심부로 향해 파 나가다가 중간 지점에 거의 도달해서 3자쯤 남았을 때, 우리들은 반대쪽으로 서로 부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침내 굴이 마주 만났을 때, 사람들은 돌을 깎아 나갔고, 돌 깎는 도끼와 도끼가 서로 부딪혔다.  그리고 샘(기혼샘)으로부터 물은 저수지(실로암)로 1,200자 거리를  흘러 들어갔다."

  그런데 히즈키야 터널에 관해서는 아직도 남아 있는 수수께끼가 있다. 그것은 이 터널이 직선이 아니고, 대략 S자형의 곡선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곡선으로 된 터널을 중간 지점을  향해서 양편에서 파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중간 지점에서 만났을 때 양편의 고저의 차는 불과 30cm 미만의 오차가 있었을 뿐이다. 왜 직선으로 파지 않고 복잡하게 곡선으로 만들었을까? 그 이유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분명히 알  수가 없다. 일설에 의하면, 근처에 있던 유다 왕들의 무덤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5) 히즈키야 성벽


  히즈키야왕은 터널을 파서 예루살렘의 급수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성벽을 새로 쌓아 방위를 견고히 하기도 하였다.

  히즈키야왕이 쌓은 성벽은 1970년대에 이스라엘의 고고학자  N.아바가드에 의해서 발굴되었다. 폭이 7m나 되는 철통같은  성벽이었는데, 흥미 있는 사실은 기존의 가옥을 허물고 민가 지대  위에  세워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굴로 히즈키야왕이 '가옥을 헐어 성벽을 세웠다'는 <이사야서> 22장의 말씀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되었다.


     (6) 기브온의 못


  예루살렘에서 약 13km 북서쪽에 있는 기브온에 큰 못이 있었다.  이 못가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이스보셋(사울 왕의 아들)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접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이 못은 1956  57년 J.프리처드를 단장으로 한 미국 팀에 의해서 발굴되었는데, 지름 11m, 깊이 25m의 원형으로 파졌다. 그런데 발굴 결과, 물을 저장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지하 부분에 있는 샘물 부분에 도달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통로임이 판명되었다. 층계를 내려가서 밑바닥 부분에 이르면, 더 밑으로 내려가는 작은 입구가 있고, 입구를 통과하여 내려가면 암반을 파서 만든 경사진  터널을  만난다.

  79개의 계단을 밟고 이 지하 터널을 내려가면, 지하 25m 위치에  맑은 샘물이 괸 지점에 도달한다. 이 못도 예루살렘의 수구와 마찬가지 기능을 했던 것으로, 기브온 성 안에서 지하 통로를 통해서 물을 긷기 위해 만든 것이다.


     (7) 모압 기념비


  1868년 모압 지방(현재의 요르단)의 디본에서 검은 돌에 34행으로 기록된 기념비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 기념비는 모압 왕 메서(B. C.830년경)가 자기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사실은 내용 중에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이 모압 지방을 정복한 일이 있었다는 기록이다. 구약에 기록된 오므라왕의 업적에는 그러한  사실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1열왕 16:23-27). 모압 기념비의 기록을  통해서 우리들은 이스라엘의 오므리왕은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여 정치적 업적을 많이 남긴 왕이란 것을 알 수 있다.



     (8) 아시라아 왕 샬마네셀 업적비


  1846년 영국인 H.레이드가 아시라아 제국의 중심지의 하나였던 갈라(Calah)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념비를 발굴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샬마네셀 3세(B. C.859  825)의 업적을 기록한 것으로, 독특한 모양의 검은 돌에 기록되어 있다.

  이 업적비의 특이한 형태 때문에 샬마네셀의 오벨리스크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리고 혁명에 성공한 예후왕(B. C.842  815)이 아시리아 제국을 방문하여, 샬마네셀왕 앞에 무릎을 끊고 엎드려 조공을 바치는 장면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예후왕의 모습은 이스라엘 왕 중에 그 모습이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이스라엘에서는 '형상을 만들지 말라'는 제2계명 말씀에 근거해서 왕의 형상을 만들지 않았음). 그런데 이  샬마네셀왕의 업적비에는 예후왕이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쓰여 있다. 오므리 왕조를 혁명으로 거꾸러뜨리고 왕이 된 예후를, '오므리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부정확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서  오므리왕은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쳤던 왕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 산헤립왕 업적비


  B. C.701년 유다의 히즈키야왕 때 아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왕은  유다왕국을 침략하여 유다의 모든 성읍들을 정복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였다.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아시리아 군대에게 공격을 당한 예루살렘의 운명은 백척간두의 상황이었다(2열왕 18-19장). 이때 예언자 이사야는 하느님께서 예루살렘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하였다(이사야 36-37장). 그러나 히즈키야왕은 금 30달란트(1달란트는 약 34kg), 은 300달란트를 아시리아 왕에게 조공으로 바치고 굴복하였다.

  이러한 당시의 상황이 1850년대 초 H.레이야드가 니느웨성의  산헤립왕 궁전에서 발굴한 기념비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히즈키야에 대해서 말하면, 그 유다인은 내게 굴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산헤립왕)는 유다의 46개의 견고한 성읍들과 작은 마을들을 함락시켰다. 나는 20만 150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고,  말, 귀, 낙타, 소, 양을 빼앗았다. 그는 (히즈키야) 그의 왕궁이 있는 성,  예루살렘에 새장의 새처럼 갇혀 있었다. 나는 포위하여 아무도 그 성에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다. 히즈키야는 나의 위엄에 기가 질렸다. 그가 예루살렘을 수비하려고 모은 장병들은 우리와 감히 싸우지 못하였다. 그는 내게 금 30 달란트, 은 800 달란트, 붉은빛이 나는 석재, 상아로 장식한 침상과 의자, 또 그의 딸들과 궁전의 여자들 및 노래하는 념녀자, 또 그의 딸들과 궁전의 여자들 및 노래하는 남녀를 대신을 시켜 조공품으로 니느웨로 보내고 내게 굴복하였다."


     (10) 라기스의 오스트라카


  오스트라카(단수는 오스트라콘)란 깨진 토기 조각에 글씨를 써 기록한 것을 말한다. 라기스는 유다 왕국에서 예루살렘 다음으로 크고  중요한 도시였다. 그런데 1935년 라기스의 발굴에서 불탄 성문 옆  잿더미 부분에서 21개의 오스트라카를 발굴하였다. 그 연대는 B. C.588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 대왕이 라기스를 불 지르기 직전이었다. 그  내용은 라기스 근청의 경비 초소의 책임을 맡은 호사야가 라기스의 주둔군 사령관 야오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거기에 보면, 당시 유다 왕국의 군사령관 고니야가 에집트에 내려갔다는 구절이 있다. 바빌론 군대가 침공한 위급한 상황에서 유다의 군사령관이 에집트를 방문했다는 것은 에집트에 군사 원조를 구하기 위해서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에제 17:15 비교).

  또 다른 오스트라콘에는, "우리들은 라기스의 신호를 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세가의 신호는 이제 끊어졌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러한 내용은 진군하는 바빌론 군대의 말발굽 아래 유다의 도시들이 하나씩 함락 당하는 모양을 잘 나타내고 있다.


     (11) 바빌론 제국 역대기


  <열왕기하> 24장의 기록을 보면 바빌론 왕 느부갓네살은 B. C. 597년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여호야긴왕을 바빌론으로 잡아가고, 그 대신  시드키야를 왕으로 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바빌론에서 발굴된 <바빌론 제국 역대기>에 보면, <열왕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즉, B. C.605년 느부갓네살이 바빌론 왕으로 등극하고, B. C.597년 유다 왕국을 정복하여 시드키야를 왕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의 역사적 기록의 정확성이 고대 근동의 다른 기록을 통해 확인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12) 여호야긴왕의 포로 생활


  <열왕기>의 기록은 B. C.597년 바빌론에 잡혀간 여호야긴왕의 포로 생활의 기록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그(여호야긴왕)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생계를 잇게 하기 위하여 왕(바빌론 왕)은 그에게 매일 음식을  제공하였다"(2열왕 25:30). 이 말은 여호야긴왕이 바빌론 왕으로부터 물자를 공급받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고고학자 R.콜데위는 1899년부터 1917년까지 바빌론을 발굴 하였고, 그는 이 발굴작업에서 바빌론 제국 왕실 문서 보관소를 찾아냈다. 거기에서 많은 토판 문서가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잡아온 왕족  귀족들에게 기름과 보리를 나누어 준 기록이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식량 배급 명단에는 유다 왕 여호야긴과 그의 다서 아들에게 물자를 배급해 준 기록도 들어 있다. 이러한 바빌론의 기록은 포로 생활을 한 여호야긴왕의 상황을 실감나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4. 성서고고학의 현황과 전망


  성서고고학은 약 100년밖에 되지 않은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그 동안 놀라운 업적을 이룩하였다. 그리고 성서를 연구하고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도 이스라엘에는 20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발굴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여기에 전 세계로부터 모여든 자원 발굴자들이 참여함으로써 고고학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땅에는 적어도 6,000이상의 장소에서 고고학적 예비 조사가 이루어져서 발굴 가치가 있음이 밝혀졌는데, 그 중에서 발굴작업이 이루어진 곳은 약 200개소(약 3%) 정도이다. 200개소의 발굴지 중에서도 대규모의 발굴작업이 진행된 곳은 불과 30군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0.5%). 이러한 상황을 P.랩은, "성지 고고학은 이제 유아기 단계(infancy)는 넘어섰으나, 아직 유년기(childhood)는 넘지 못했다"고 말하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고고학 연구가 이루어진 성지 이스라엘의 상황이 이러하다면, 고대 근동의 다른 지역에도 앞으로 연구되어 야할 것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두말한 나위 없다.

  이러한 사실은 앞으로 성서고고학이 연구해야 할 분야가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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