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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
생명과 사랑에 천착하는 시인, 조명 시인
인터뷰 - 김정수(시인, 사이펀 편집위원) | 사진 - 김삼환 시인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시 한 편 꼭 쓰고 싶어요”
계간 《사이펀》 ‘주목, 이 시인을 만나다’는 ‘예버덩문학의집’ 대표 조명 시인을 만났다. 2003년 계간 《시평》에 「여왕코끼리의 힘」 외 5편의 시를 발표하며 등단한 조명 시인은 “여왕코끼리의 막강한 힘이 행복과 평화를 위한 것이듯, 조명의 활기도 긍정적이고 개방적”(신경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15년부터 강원도 횡성에서 ‘예버텅문학의집’을 운영하며 한국 문학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는 시인을 새해 벽두에 찾아가 만났다.
김정수 지난해 11월 초에 이어 두 번째 방문이네요. 시를 쓰러 와야 하는 데 시인만 만나러 오네요(웃음). 2003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할 때 심사위원이 신경림 선생님이셨습니다. 그 인연으로 첫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민음사, 2008년)의 해설을 써주신 것인가요?
조명 아니요. 그게 좀 다릅니다. 저의 등단은 공모와 심사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경림 선생님 추천으로 이루어졌어요. 등단하기 9년 전에 한국문학학교에서 1년 동안 선생님으로부터 시를 배웠습니다. 제 문학의 근원이라 할 수 있지요. 신경림 선생님께서 당신 이름을 걸고 신인을 추천한 일은 문단 생활 48년 만에 처음이었다고 해요. 저로서는 큰 영광이지요. 그 얘기를 나중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김정수 신경림 선생님과 그런 인연이 있었군요. 사실 누군가를 추천한다는 것 쉬운 일은 아니지요. 문단에 나가 문명을 날릴 만한 실력을 갖췄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요.
조명 신경림 선생님께 시를 배우고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와 유수 문예지에 응모했는데 여러 차례 최종심에 올랐다가 실패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유명 문예지 최종심에 혼자 올랐는데 막판에 40대 여성이라는 이유로 떨어지기도 했죠. 3년 후에 그 사실을 전해 들었어요.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이처럼 엉엉 울었어요. 아, 그 시절에 얼마나 마음이 간절했는지요.
김정수 일부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나 유력 문예지에서 나이를 따진다는 이야기를 저도 들어봤습니다. 등단 확정 전에 나이를 확인한다고 하더군요. 꼭 그래야 하는지는 의문입니다.
조명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를 주셨어요. 이제 충분히 준비되었으니 ‘내가 직접 추천하겠다’며 등단을 하자고요. 저는 1년만 더 스스로 해보겠다고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어요. 그리고 다시 도전을 해보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2003년 봄에 신경림 선생님의 추천으로 계간 《시평》을 통해 데뷔하게 되었습니다. 등단 후 김수영문학상에 시집 한 권 분량의 신작시로 응모해 저를 포함한 2명이 최종심에 올랐습니다. 상은 놓쳤는데 민음사로부터 첫 시집 출판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신경림 선생님이 크게 기뻐하시면서 제 첫 시집 해설을 쓰겠다고 먼저 말씀해 주셨어요(웃음). 저에게 신경림 선생님은 큰 스승이자 평생의 은인이시죠. 선생님의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으려면 제가 정말 시를 잘 써야 하는데 말이에요.
김정수 신경림 선생님은 등단작 중 한 편인 「여왕코끼리의 힘」을 ‘조명의 특징을 고루 갖추고 있는 시’라면서 ‘자잘한 것들에 구애받지 않는 데서 오는 힘’이 느껴진다고 평했습니다. 이 시를 쓰게 된 동기가 있나요.
조명 벌써 20여 년 전 일입니다. 서울대공원 장미원에 장미꽃이 만발하던 봄날이었는데, 동물원에 새끼 호랑이가 태어났어요. 그리고 거짓말처럼 대공원에 근무하던 친지의 호의로 그 아기호랑이를 품에 안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설레는 마음으로 동물원을 찾아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해요. 그 무렵 테드 휴스(Edward James)의 「표범(The Jaguar)」이라는 시에 매료되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태어난 지 한 달쯤 지난 호랑이는 인간에게 맹수였기 때문에 따로 격리해 사육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실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또 거짓말처럼 한 사육사가 새끼 호랑이보다 더 어린 재규어를 데려와 내게 안겨주었어요. 그 어린 맹수의 튼튼한 뼈대, 뻣뻣한 터럭, 당당한 숨결은 내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렬했죠. 그때 검은 재규어를 품에 안고 사육장 밖 붉은 줄장미를 바라보며, 나는 내 야생의 심박을 직감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수의사의 안내로 장미 향기와 동물 냄새가 섞이는 봄날 오후의 동물원을 한 바퀴 돌았는데, 그분은 태생적 이야기꾼이었어요. 그날 그 운명의 코끼리 우리 앞에서 이야기가 무르익었는데 코끼리에 대하여, 코끼리의 모계사회에 대하여, 여왕코끼리의 심리 세계와 그 위력을 이야기할 때 내가 정말 무더운 바람과 그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과 여왕코끼리의 결연한 의지와 꿈이 일렁이는 건기의 아프리카 초원에 있는 듯했죠. 그리고 직관으로 알 수 있었어요. ‘이것은 시(詩)다’ 하고 말입니다.
보아라, 나는 선출된 여왕이므로 곧 법이다
가장 강한 그대는 우리들의 길잡이, 나의 남편이 되어라
선두에 서서 몸 바치는 백척간두의 생
최고의 건초와 여왕의 믿음을 받으라
행여, 그대가 독불장군의 힘을 믿게 된다면
나는 뭉쳐진 무리의 힘을 사용할 것이다
짓밟힌 만신창이로 추방될 것임을 미리 알라
두 번째 강하고 매력적인 당신, 그대는 여왕의 경호원 애인
나의 배후에서 우리들의 길잡이를 견제하라
달콤한 건초와 은밀한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대 또한 징벌의 본보기가 될 수 있음을 잊지는 말라
부드러운 경고는 두어 번뿐이다
우리는, 씨방을 말리는 건기의 샘을 찾아가는 여정
나의 무리들은 모두 기억하라
한 마리 코끼리의 목숨을 위해서라면
나는 너희들과 함께, 젖줄과 숨줄과 힘줄로 한 덩어리 되어
한 마을을 초토화할 것이다
천둥과 폭풍과 해일을 넘어서는 힘으로
그리하여 우리는, 한 조각 정신의 이탈도 없이
생이 버거운 너무 커다란 몸뚱이를 뚜벅이면서
종족보존, 그 운명적 목표를 위한 젖샘에 도달할 것이다
그날의 노을은 유독 붉은 핏빛이 아니겠느냐
공룡은 죽고 코끼리는 살아남았느니라
한 무리 사자가 한 마리 코끼리를 어려워한다
온갖 초식동물들이 코끼리와 더불어 한가롭다
- 「여왕코끼리의 힘」 전문
그 인연으로 야생의 심장이라도 얻은 듯 거침없이 「여왕코끼리의 힘」을 썼습니다. 그렇게 탄생한 「여왕코끼리의 힘」은 2003년 계간 《시평》 봄호의 등단작이자 표제시가 되었지요. 그 후 한동안 몇몇 시인들로부터 ‘그 여왕코끼리가 이 여왕코끼리입니까?’라는 농담 어린 인사를 받곤 했죠.
김정수 문청 시절 저도 테드 휴스의 시작법을 읽었습니다. 첫 번째가 ‘동물의 이름을 머리와 가슴속에 넣고 다녀라’로 기억합니다. 테드 휴스가 「표범」을 비롯해 동물시를 많이 썼지요. 그 영향도 좀 있는 것 같군요. 그동안 쓴 시 중에 대표작이랄까, 애착이 가는 시가 있을까요.
조명 테드 휴스의 「표범」을 비롯해 「고양이」, 「나뭇가지에 앉은 매」 등이 인상 깊었습니다. 제 대표작이라면 「여왕코끼리의 힘」과 「모계의 꿈」을 생각하게 되고, 애착이 가는 시라면 「세족」과 「목단꽃 타투」를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세족」이 적잖은 매스컴과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파급되고 있어서 어쩌면 대표작이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그러나 시인에게 있어 자기가 쓴 시는 다 제 새끼 같아서 이런 말을 하고 나면 나머지 시들에게 마음이 쓰입니다.
김정수 두 번째 시집 여는 시가 「세족」이죠.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조명 맞습니다. 「세족」은 두 번째 시집의 맨 앞에 수록된 시지요. 2018년 《현대시학》에 발표한 이후 평론, 신문, 몇몇 라디오 프로그램, TV조선 ‘앵커의 시선’ 등 여러 매체에서 언급을 했습니다. 지난해 ‘부부의 날’에는 서울 시내 어린이집과 유치원 학부모들 수수만 명에게 가정통신으로 나간 일도 있고요. 올 1월 22일에는 KBS <아침마당>에 나왔다고 지인이 사진을 찍어 보내와서 놀랐어요. 양소영이라는 변호사가 부부에 관한 특강을 하다가 「세족」을 예로 들며 낭송을 했는데 부부가 서로 마음을 보듬어주고 스킨십을 자주 해주면 오래 잘살 수 있다는 얘기예요. 은근히 기분이 좋더군요. 일반 독자에 의해 지상파에 시가 소개되는 것이 흔한 경우는 아니잖아요.
바다가 섬의 발을 씻어 준다
돌발톱 밑
무좀 든 발가락 사이사이
불 꺼진 등대까지 씻어 준다
잘 살았다고
당신 있어 살았다고
지상의 마지막 부부처럼
섬이 바다의 발을 씻어 준다
- 「세족」 전문
김정수 세족식은 예수께서 유월절 예식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에서 유래된 의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건한 종교적인 의식이죠. 이 시를 쓰게 된 동기가 있을까요.
조명 남편의 70회 생일을 한두 해 앞두었을 때였어요. 어떤 선물을 해주면 좋을까 슬금슬금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발을 씻어주는 이벤트를 해줄까’라는 생각이 났어요. 신혼여행 때 쑥스러워하는 남편을 굳이 앉혀 놓고 장난스럽게 발을 씻어준 일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죽음이 갈라놓기 전에 한 번 더 발을 씻어줘야지 생각하니 ‘아, 됐다!’ 싶고 마음이 즐거워지더라고요. 그 후 어느 날 제주도로 연수를 가게 되어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다가 함덕해수욕장 부근에서 창밖으로 파도가 잔잔하게 일렁이는 풍경을 바라보는데 문득 바닷물이 저만치 있는 자그마한 섬의 발을 씻어주는 것 같았어요. 그때 바로 ‘바다가 섬의 발을 씻어준다’라는 첫 구절이 떠올랐죠. 그다음 생각하니 섬의 특성상 물이 닿는 위쪽은 주로 나무가 있고 아래쪽은 돌만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돌처럼 굳은 발톱이 연상이 되고 생각이 불 꺼진 등대로 이어지면서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습니다. ‘아, 시다!’ 싶었던 거죠. 그렇게 태어난 시가 바로 「세족」입니다. 시인 아내가 남편에게 줄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이 되었죠.
김정수 저도 오늘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발을 씻어줘 볼까요(웃음). 두 번째 시집에 「파린의 계절」, 「파린의 쇄빙선」이라는 시가 수록되어 있고, 첫 시집 <파린>이란 시에서 ‘당신도/ 파린을 아세요?’ 묻고 있습니다. 도대체 파린이 무엇인가요.
조명 어느 날 문득 ‘사랑해요’라는 말로는 연인 사이의 애틋한 감정을 오롯이 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일반화되고 객관화되어 너무 폭넓게 사용되는 경향에 따라 밀도가 낮아지고 농도가 묽어져 애초에 표현하고자 했던 언어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요. 그래서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꿈꾸며 서로를 닮은 아기를 낳고 싶을 만큼 사랑에 빠진 연인들에게 딱 맞는 단어가 따로 있었으면 싶었어요. 그 단어를 제가 만들어 본 거죠. 국어사전에도 없고 백과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예요. 사랑에 빠졌을 때 그 설레는 마음과 파닥이는 심장을 떠올리며 만들었어요. 오직 사랑으로만 사랑하는 연인이 있다면 ‘파린해요’라고 말해보세요.
김정수 아내의 발을 씻어주며 ‘파린해요’ 하면 되나요. 좀 쑥스러울 것 같습니다. 분위기를 전환해볼까요. 첫 시집에서 아버지가 ‘22년 전 늦여름, 두 달 뒤의 죽음을 예고하며 내게 시 한 편을 유품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준 시를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조명 아니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어요. 아버지가 저에게 그 시를 주실 때 저는 신혼의 행복과 두 돌배기 아들에게 폭 빠져 있었습니다. 친정에 갔는데 아버지가 노환으로 자리에 누운 채 당신이 앞으로 두 달 더 살게 될 거라면서 친필 시 한 편을 주셨어요. 너무 의외라 받아 들고 그냥 있었더니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눈으로 읽고 있었더니 소리 내 읽어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정성 들여 소리 내 읽었더니 당신이 살아온 생애에 대한 시라고 하면서 책장의 족보에 잘 끼워놓으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했죠. 그때 저는 뭔지 특별한 상황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시에 대해 도무지 생각이 없었어요. 아버지가 두 달 후에 돌아가시리라는 생각도 전혀 없었고요. 저는 아버지를 늘 자랑스러워했고 좋아했고 아버지도 저와 소통하기를 좋아하신다고 느끼며 자랐는데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버지를 향한 사랑보다 아들을 향한 사랑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날 새벽 거실의 유리창이 쨍! 소리를 내며 깨지는 꿈을 꾸고 깨어나 불길한 생각이 들어 무작정 친정엘 갔는데, 그날 새벽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마당에 흰 천막을 치고 장례 준비를 하고 있더라고요. 나중에 생각이 나서 따져보니 정말 딱 두 달 후 그날 돌아가셨어요. 그 후 큰오빠가 집을 팔고 이사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그 시가 떠올랐어요. 아차 싶어 오빠에게 전화해 그 시를 꼭 나에게 달라고 했는데 족보를 다 뒤져도 없다는 거예요. 조카들에게 현상금까지 걸어보았지만 없더라고요. ‘아, 정말!’ 울고 싶더라고요.
그로부터 7년 후 우연히 동생을 따라 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공부가 깊어질수록 아버지가 저에게 유품으로 주신 그 시를 간직하지 못한 데 대해 사무치는 회한에 빠져들곤 했어요. 그러니 제가 첫 시집을 내면서 ‘첫 시집을 아버지께 바친다’는 말을 시집에 넣을 수밖에 없었죠. 민음사로부터 첫 시집 증정본을 받은 바로 다음 날 아버지 산소에 찾아가 뜨겁게 드렸습니다. 지금 저에게 그 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 글을 쓰다 보니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가 저를 시인으로 만드셨나 싶은 생각도 드네요.
김정수 아버지의 시적 감수성을 물려받았나 보네요. 첫 시집에서 아버지를 ‘희랍인 조르바’ 같았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좀 들려주세요.
조명 아버지는 작은 시골마을의 어른이셨어요.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젊은 분들이 찾아와 의논하던 기억이 나요. 자식들에게 유별스럽게 유교적 예의범절을 가르치기도 하셨고요. 그렇다면 좀 근면 성실하고 적지 않은 땅을 가지고 계셨으니 농사도 훌륭히 짓고 하셔야 맞는 것 같은데 아버지는 그러지 않으셨어요. 한국전쟁 당시 『정감록』을 읽고 황해도 해주에서 계룡산 자락으로 가족을 이끌고 내려와 자리를 잡으셨다는데, 저의 어린 눈에 마을의 다른 아버지들과 많이 달랐어요.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해야 할지 창의적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 그랬어요. 남들은 생각조차 안 하거나 생각은 있어도 꿈으로 그칠 뿐 실행하지 못하는 일들을 아버지는 실제 벌이곤 하셨죠. 예를 들면 내륙에 살면서 가족들 다 두고 사과 궤짝에 돈을 담아 지고 당진 어촌 마을에 가서 배를 구입해 떠나온 고향 황해도 해주를 생각하며 어업을 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돌아와 집 바깥채에 공간을 만들어 인조견을 짜는 직조공장으로 운영하기도 했어요. 그때는 온 마을 어느 집에도 없던 트랜지스터라디오가 공장 기둥에 매달려 있어서 하루종일 노래가 흘러나오곤 했는데, 베 짜는 언니들이 종일 따라 부르곤 했어요. 이미자 노래를 가장 많이 불렀는데 그 바람에 어린 저도 이미자 노래를 일찌감치 다 꿰었죠. 그때 제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공장의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빛의 기둥 속에 서서 반짝이며 떠다니는 인조견 먼지를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그런가 하면 가볍고 질긴 나일론의 출현으로 인조견이 사양 산업이 되자 아버지는 바로 염색가마를 엿가마로 바꿔 엿 공장을 하셨는데, 아침마다 바깥마당에 엿장수들이 리어카를 끌고 모여들곤 했죠. 그것을 모티브로 쓴 시가 「프리즘」입니다.
묵직하고 신비로운 장난감이었다.
마음을 만드는 수정 삼각기둥. 눈에 대고 보면 뭉게구름의 가장자리나 일개미의 촉수에서도 무지개가 피어났다. 열세 식구의 희로애락들 그 기둥을 통과했다면, 눈부시지는 않게 빛의 스펙트럼을 얻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의 공장에서는 인조견을 짰다.
밀려드는 황금빛 노을 속에 서서 맨살에 대어 보면, 미모사의 숨결이 스며들었다. 비바람과 좀벌레들을 견디기엔 너무 연약했던 인조 비단. 그러나 프리즘 너머 아버지의 공장에서는 세상에 없는 생비단을 짜고 있었다. 바빴다, 늘 말수가 적었던 어린 종달새. 푸른 물을 들이던 무쇠 염색 가마에서 무지개 피어오르는 둥근 수평선을 보는 일, 불룩한 쌀독의 둘레에서 산등성이를 찾는 일들.
아버지가 건네주신 프리즘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혼자 놀곤 했다.
아버지의 인조견이 더 가볍고 질긴 나일론에 밀려 사라지던 날, 유품이 되어 버린 첫 번째 선물. 무지개 피어나던 수평선과 산등성이도 천천히 나를 떠나갔다. 오늘 근시 안경을 끼고 모니터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한다. 아버지의 품속으로 놀러가고 싶다. 빈 쌀독과 녹슨 염색 가마에서 흐려지던 것들의 소맷부리를 가만히, 당겨 보는 것이다.
「프리즘」 전문
그 밖에도 여러 사연 중에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가 친구분들을 불러 술을 마실 때면 항상 시조창을 하던 모습이 있어요. 어느 날은 친구 분들이 기생을 데려와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해 주시기도 했는데 엄마가 아프던 때라 어린 제 마음이 좋지 않았어요. 종국에는 농협 조합장을 하는 친구 분과 동업으로 산에서 소를 키우는 목장을 하셨는데, 어느 순간 소들이 다 죽어버렸어요. 그 무렵 그 동업자 친구 분이 찾아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수그리고 뭔지 조용히 말했는데, 아버지가 불이 들어 있는 화로를 방바닥에 엎어버렸죠. 그래도 큰 소리로 싸우지는 않으셨어요. 그런저런 세월이 꿈같이 흘러가고 아버지도 쇠락해 가던 어느 날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마을 어느 집에도 없는 자주달개비꽃을 마당가에 공들여 심으셨는데 먼 미래의 넷째 딸인 저는 그 모습을 잊지 못해 예버덩문학의집 마당가에 자주달개비꽃을 심어 놓고 꽃이 필 때마다 아버지를 꽃처럼 바라본답니다.
김정수 ‘그 여름 아버지 없는 아열대의 뒤뜰에서/ 어린것들은 어미 치맛자락 붙잡고 덩달아 울었다’(「자귀꽃나무가 서 있는 정원」)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밤을 새워도 다 못 하겠지요. 12년 만에 낸 두 번째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민음사, 2020년)로 넘어가 볼까요. 두 번째 시집을 읽어보면 기독교·불교·힌두교 등의 종교와 그리스로마신화·북유럽신화·인도신화·중남미신화·동남아신화 등의 신화, 무속과 민담 그리고 우주물리학의 세계를 거침없이 넘나들고 있습니다. 이처럼 폭넓은 세계를 담기가 쉽지 않을 텐데요.
조명 아, 이 질문은 저에게 과분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박식한 지식인이 못 됩니다. 그래도 굳이 설명하자면 제가 본래 가르치는 일보다 배우는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생활인으로서는 엄청 취약한 편인 반면에 낭만, 사색, 판타지, 철학적 사유, 광활한 것들에 관한 동경 등 뭐 그런 쪽으로 마음이 가는 사람인 것 같고요. 예를 들면 그리스로마신화는 김원익 선생님으로부터 일주일에 하루씩 그럭저럭 1년을 공부한 적이 있고, 기독교 성경은 아들 임신했을 때 태교를 위해 정독을 했고, 불교 경전은 시를 잘 쓰고 싶어서 조금씩 공부하고 있고, 인도신화는 인도에 대여섯 차례 여행하면서 자연히 매력을 느껴 읽어보게 되었고, 북유럽신화는 제가 신화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알고 입주작가 두 분이 책을 선물해주셔서 기쁘게 받아 읽었고, 중남미·동남아 등은 아마도 제가 시를 쓰다가 막히면 백과사전을 찾아 읽는 버릇이 오래되다 보니 그중에서 흡수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라서 저의 공부는 다 얇은 공부입니다.
김정수 참 겸손하시네요. 시를 읽다 보면 시인의 관심 분야와 그 분야에 대한 깊이가 느껴지거든요. 두 권의 시집을 정독하면서 깊이와 넓이에 감탄했습니다. 제 부족함이 부끄럽기도 했고요. 문학 공부하면서 읽은 책 중에 기억에 남는 책이 있나요.
조명 제 공부 얘기 중에 좀 특별한 게 하나 있어요. 스무 살 안팎에 지독히 앓던 학력 콤플렉스를 벗어나고픈 지적 욕구로 도스토옙스키 전집을 샀어요. 왜냐하면 그때 저는 제 나이에 고등학교를 못 갔거든요. 그래서 이 책들을 20대에 한 번, 30대에 한 번 정독했어요. 너무 어려워 잘 이해도 못 하면서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식으로 끝까지 매달리던 모습을 생각하면 눈물겹기도 하고 웃음이 나오기도 해요.
김정수 저는 군 제대하고 복학을 앞둔 그해 겨울에 독서실에 처박혀 무모하게도 동서양 사상전집을 읽었지요.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학력 콤플렉스와 문학에 대한 열정이 예버덩문학의집 운영에 영향을 줬나요.
조명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예버덩문학의집은 제 개인 창작실이 아니라 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의 창작공간입니다. 제가 강원도 주천강을 낀 강원도 횡성 산골 강마을인 예버덩을 처음 만난 건 아마 1982년 초봄이었을 겁니다. 벌써 40년이 되었네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예버덩에 푹 빠져 살고 있습니다. 당시 예버덩 낮은 구릉에 오래되고 너무나 멋진 진초록 향나무 한 그루가 우뚝 서 있었어요. 예버덩은 ‘고평’(古坪)이라는 옛 지명의 순우리말로, ‘오래된 들녘’이거나 ‘옛 들녘’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지요. 들녘이라고 말하기에도 쑥스러운 자그마한 버덩입니다. 아마 강원도에 워낙 높은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다 보니 치악산 자락의 이 작은 버덩에도 들녘 평(坪)자를 붙였나 봅니다.
김정수 말씀에서 예버덩에 대한 애정이 뚝뚝 묻어나네요.
조명 당시 결혼한 지 2년쯤 되었지요. 그해 봄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시부모와 남편과 같이 조상의 산소가 여럿 있는 시아버님 고향을 방문했어요. 서울에서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오면서 심하게 멀미를 했지요. 산을 굽이굽이 돌고, 높은 고개를 넘고, 까마득한 골짜기를 지나 횡성군 강림면 강림리에 도착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겨우 속이 진정됐어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봤는데 마음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강마을이 다 있다니!’ 끌리듯 강으로 걸어 내려가 바닥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맑은 물에 손을 씻었어요. 그리고 고개를 들어 건너다본 마을이 바로 예버덩이었지요. 첫눈에 홀딱 반해버렸어요. 혼잣말로 ‘아, 예뻐라’ 했는데 시아버지가 그 말을 들으시고는 강 건너 그곳에 200평 좀 못 되는 작은 밭이 있다고 하셨어요. 마치 꿈같았지요. ‘저렇게 예쁜 곳에 우리 땅이 다 있다니!’ 그 후 서울에 살면서도 시간만 나면 남편을 졸라 예버덩 밭에 찾아왔어요. 나무그늘 외엔 쉴 공간도 없는데 말이에요. 당시에는 강을 건널 다리도 없어서 둘이 겨우 앉을 만한 목선을 타고 줄을 잡고 건너가고 건너와야 했어요.
김정수 ‘첫눈에 반하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예버덩과 질리지 않는 사랑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버덩문학의집 홈페이지에 들어갔더니, ‘오래된 고요’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눈길을 끌더군요.
조명 어릴 적 텅 빈 집 툇마루에 혼자 앉아 마주쳤던 첫 고요 같은 것이지요. 그 고요에 잠겨, 같이 고요가 되어 글을 쓸 수 있는 곳입니다. 대문도 울타리도 없는 예버덩문학의집에서 오래된 고요를 만날 수 있어요. 갯버들군락 너머 강물 위를 나는 백로들, 커다란 나무에 우두커니 앉은 매, 꾀꼬리 파랑새 다람쥐 수달 고슴도치 초록뱀 풀꽃 그리고 잣나무와 가문비나무 숲이 햇살과 강바람 속에서 아득히 고요를 자아내지요.
김정수 예버덩문학의집을 운영하면서 늘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조명 글쎄요. 저에게는 문학이라는 피가 흐르는 동류의 작가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큰 즐거움입니다. 그리고 인생 후반에 제가 마련한 작은 공간과 좋은 마음을 내어 집중할 수 있는 집필공간과 약간의 뒷바라지가 필요한 작가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드릴 수 있다는 사실이 큰 기쁨이고요. 작가들이 예버덩문학의집에서 집필한 작품으로 엮은 따끈따끈한 책을 보내올 땐 정말 뿌듯한 보람을 느낀답니다. 그리고 작가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방갈로 집필실을 헐고 새로 지어주고 싶은데 경제적인 여건상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두어 해만 좀 기다려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괴로운 일은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제가 처음 예버덩문학의집을 열 때부터 목적으로 두었던 세계적인 고전이 될 만한 작품 3편을 실제로 얻어내는 일입니다. 그중에 한 편은 제가 쓰고 싶고요. 어쨌든 예버덩문학이집을 운영하면서 요즘 드는 제 마음은 ‘이 이상 더 뭘 바랄까. 그냥 이렇게 살면 잘 사는 거지.’ 그런 편편한 마음입니다. 별것 없어요.
김정수 지금까지 많은 문인이 다녀갔겠지요. 기억에 남는 시인이나 에피소드, 그런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조명 2015년 7월부터 현재까지 1년에 30명 안팎으로 다녀가셨으니 모두 200여 명 될 것 같습니다.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너무 많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한 번은 동시 쓰는 한 여성 시인이 매일 산책을 두세 차례씩 하면서 예버덩문학의집 주변 자연에서 얻은 소재로 한 달 동안에 한 권 분량의 초고를 잡아 1년 만에 시집을 내서 저를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한 여성작가는 인생의 허리가 꺾일 만큼 큰 슬픔을 당해 두세 달 동안 글은 못 쓰고 힘겹게 마음을 다스리면서 작가들을 위한 여러 가지 좋은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남은 평생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죠. 한 가지 더 얘기해 보자면, 예버덩문학의집을 지은 이래 한 5년 지나도록 꽃을 꺾어본 일이 없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살았는데 재작년에 한 작가가 부러져 있었다면서 쑥부쟁이꽃을 가져다 화병에 꽂아 놓았습니다. 그 화병에 꽂은 꽃을 바라보는 마음이 너무 좋아 그 후로는 나와 작가들이 계속해서 꽃을 꺾어다 화병에 꽂아놓곤 했죠. 그 마음이 무엇일까 오래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쩌면 내가 짓고 쓰는 시 한 편 한 편이 다 인간의 숨결이 들어간 언어의 꽃다발이 아닐까 싶어요.
이곳에선 겸손해진다 물살 크게 휘돌아 모난 돌
둥글게 뱉어놓는 곳
개망초보다 더 낮게 앉아 흰 빛 우러르는 곳
산비둘기 목 쉰 울음
산과 산이 한 호흡으로 다가서는,
검은실잠자리 떼 무리지어
이곳과 저곳의 경계 수시로 지워내는 곳
밤마다 물안개 창 밑까지 밀려오고,
금잔화 노란 눈동자 흔들려 젖은 것들 더 젖게 만드는 곳
젖어 기꺼이 한 방울 이슬로 맺혀
마침내 내가 나를 떼어놓고
저 강물 따라 나설 수 있는 곳
- 장옥관의 「예버덩에서」 전문
김정수 입주작가들이 없는 겨울에는 적막할 것 같은데요. 주로 무엇을 하는지요.
조명 저는 이곳에 혼자 있을 때가 참 좋아요. 혼자 있으면 아주 특별한 고요를 만날 수 있어요. 적막과는 다른 확연한 고요랍니다. 제가 열 살 무렵 학교에서 돌아와 텅 빈 집 툇마루에 앉아 뙤약볕 내리는 흙마당을 무연히 바라보다가 맞닥뜨린 첫 고요가 있었습니다. 예버덩문학의집을 짓고 개관하기 전에 혼자 도서실 발코니에 서 있는데 문득 까맣게 잊고 살았던 그 유년 시절의 고요가 훅 들어오는 거예요. 하 너무 신기하고 가슴이 뻐근했어요.
작가들이 모두 퇴실하고 혼자 남으면 평소처럼 새벽 3시쯤 일어나 두어 시간 책을 읽거나 시를 쓰거나 하고 나서 새벽산책을 나가요. 강가에 나가 강물이 흐르는 방향으로 따라 걷다가 쿵쿵소를 한참 바라보고 가문비나무숲을 지나 빙 돌아오는 느린 산책이죠. 그리고 간단한 아침식사 후 빈둥빈둥 놀다가 미루어 놓은 책들 좀 찾아 읽고 또 나가 햇빛 받으며 산책을 하고 돌아와 잡다한 일을 좀 하다가 점심을 먹고 잠깐 낮잠을 자고 일어나 또 그럭저럭하다가 짓고 쓰는 데 시간을 보내다 보면 하루가 가죠. 그냥 그래요. 올겨울은 하루에 한 문장이라도 꼭 써보겠다는 목표를 정했기 때문에 지키려 노력하고 있어요. 이제 나이도 들었으니 건강을 위해 잘 먹고 잘 자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하는데 예나 지금이나 그쪽에는 별 관심이 없는 편이라 그 점이 좀 걱정이 되긴 해요. 그래서 하루에 한 끼는 맛집을 찾아가서라도 음식을 잘 먹어봐야지 생각도 했는데 그 또한 번거로운 일이라 잘 안 돼요. 참, 오늘은 봄이 오기 전에 150그루 사과나무에 유기농 퇴비를 주는 일을 마무리 했어요. 빨리 자라 애초에 계획한 대로 ‘책 읽는 사과나무 정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김정수 서울에 집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가족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조명 하나 있는 아들은 결혼해 따로 살고 있는데 너무 귀여운 손녀를 하나 낳았어요. 두 돌 좀 넘겼는데 이름이 ‘진’이에요. 시인 할머니가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제가 지어준 이름이죠. 성과 이름을 붙이면 ‘천진’이랍니다. 두 번째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의 ‘작가의 말’에 쓴 ‘진’이 바로 그 아이 이름이기도 해요. 서울 집에는 남편이 살고 있어요. 남편은 퇴직교수인데 아직 강의 요청이 좀 있고, 친구들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서울에 일이 없을 때 일주일에 한 이틀 내려와요. 저는 예버덩문학의집을 운영하다가 서울에 일이 있을 때 올라가고 하며 살고 있어요. 재작년부터는 시어머님이 노환으로 편찮으셔서 서울 집에 함께 사시기 때문에 저도 웬만하면 주말마다 올라가 예쁜 짓을 좀 해드리고 오곤 하죠. 그러면 91세 시어머님은 매번 용돈 10만 원을 주시면서 ‘내려가다가 새말에서 너 좋아하는 곤드레밥 사 먹고 들어가거라. 늘 속이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한 거여’라고 하세요.
김정수 첫 시집은 5년 만에, 두 번째 시집은 12년 만에 냈습니다. 세 번째 시집은 어찌 준비하고 있는지요.
조명 첫 시집 『여왕코끼리의 힘』은 멋모르고 마음껏 썼다는 생각이 들고, 두 번째 시집 『내 몸을 입으시겠어요?』는 긴 슬럼프에 빠져 몸에 병을 키우면서까지 겨우겨우 썼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 번째 시집은 제 생애 마지막 시집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혼신을 다해보리라 다짐하는데 생각과 달리 아직도 헤매고 있어요. 그래도 독하게 해 봐야죠. 마음으로는 광활하고 웅숭깊은 시를 쓰고 싶은데 잘 풀리지 않아 자잘한 시들이나 쓰고 있습니다. 어쨌든 세 번째 시집은 출간의 간격을 좀 좁혀 볼 생각입니다.
김정수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면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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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 두 권의 시집을 내는 과정을 통해 저는 저 스스로를 ‘생명과 사랑에 천착하는 시인’이라는 인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그쪽으로 더 깊어지고 더 넓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세 번째 시집에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거는 마음이 있다 보니 책임을 생각하게 되고 책임을 생각하다 보니 저의 문학적 태도를 고민하게 되고 그렇습니다. 또 그러다 보니 제 말 한 마디, 글 한 줄 하는 데 그 반향의 범주를 세계 속에 두어 아주 작은 파장이라도 만들어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는 중입니다. 그건 그렇고 죽기 전에 제가 꼭 쓰고 싶은 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시 한 편’이에요.
김정수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독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조명 글쎄요. 독자들을 생각하며 글을 쓰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누구나 다 좋아할 수밖에 없는 기막히게 아름다운 시 한 편은 꼭 쓰고 싶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누군가 제 시집을 읽다가 마음에 쏙 들어오는 시가 있어 바로 가슴에 새기는 일이 생긴다면 저는 더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 제가 소녀 시절 신석정 시인의 시집을 읽다가 ‘운석처럼’이라는 시를 가슴에 새겼던 것처럼요.
그러나저러나 변변찮은 제 시집을 이렇게 공들여 읽어주시다니요. 김정수 시인께 참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터뷰 처음인데 물 흐르듯 이끌어 주셔서 얘기를 풀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김정수 ‘생명과 사랑에 천착하는 시인’이 쓴 세 번째 시집이 벌써 기대가 됩니다. 고요 속에 녹인 사랑과 생명의 시편이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일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예버덩문학의집이 한국문학의 산실로 오래 자리매김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오랜 시간 고생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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