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9 : 10 - 19절
“기도하는 중이니라”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처럼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이렇게 적극성을 가지고 순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고 자기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모세도 처음에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불순종하는 모습을 조금 보이고 있고, 요나 선지자 같은 경우는 적극적으로 반대를 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향의 반대 방향으로 도망까지 갔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명령에 반항을 했던 한 사람이 나타나고 있는데 다메섹에 살고 있던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상 가운데 “아나니아야” 부르시니까 아나니아가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셨냐면 “직가라는 거리로 가면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에게 너를 보내어 안수 기도할 때에 다시 보게 되는 환상을 이미 보여 주었다. 그러니 가서 그를 위해 기도해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나니아가 13, 14절 말씀에 보면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이렇게 대구를 하면서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쳤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나니아 입장에서 보면 “한 사람한테 들은 것도 아니고 여러 사람한테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런 나쁜 사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겠습니다.” 이런 의미로 하나님께 반항을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아나니아의 주장이 전혀 틀리지가 않습니다. 사울의 과거 행적이나 현재 진행되고 있는 상황으로 봐도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는 원수 중에 원수인데 그런 사람을 위해, 그것도 눈을 뜰 수 있게 기도해 주라고 한다면 누가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나아가겠습니까?
솔직히 제3자의 입장에서 말씀을 읽고 있는 우리들조차도 쉽게 수긍할 수 없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같았으면 그리스도를 대적하다가 재앙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 우리끼리 고소하다고 축하하면서 많은 위로를 받는 것으로 끝이 났을 것입니다.
아나니아도 크게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것인데 그런 반항심을 가지고 있던 아나니아에게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무슨 소리를 하느냐? 그런 생각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아나니아, 네 생각이고 나는 그를 통해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전하려고 택한 나의 그릇이다.” 우리가 흔히 밥그릇 싸움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인류 최초로 밥그릇 싸움을 하셨던 것입니다. “내가 택한 내 그릇인데 아나니아야, 네가 무슨 상관을 하고 판단을 하느냐?” 이런 의미로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은혜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던 사울이었기 때문에 로마서 14장 4절에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내가 하나님의 택한 그릇이듯 다른 사람들도 모양은 다르고 쓸모는 달라도 하나님의 그릇으로 택함을 받은 것인데 그것을 가지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맞지 않다는 주장을 사울은 했던 것입니다.
이런 논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서 결국은 아나니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서 기도를 해 주었고 18, 19절 말씀에 보면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아나니아가 말한 것처럼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사람이었고 그로 인해 벌을 받아서 앞을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식음을 전폐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울에 대해서 이런 은혜를 내리신 이유가 뭐냐면 아주 간단합니다. 11절 말씀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는 기도하는 중이니라” “사울이 지금 기도하고 있지 않느냐? 물론 그가 과거에 잘못한 것은 맞지만 그래도 지금 기도하고 있는데 어찌 내가 그를 모른 채 할 수 있고 기도하는 그를 어떻게 그냥 내 버려 둘 수 있겠느냐?”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기도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종교적 행위 정도로 생각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도전을 주고 경각심을 주는 말씀인지 모릅니다. 방금 전까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를 갈면서 살기가 등등하여 잡아서 옥에 가두려고 했던 사람조차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면, 기도하는 중에 있는 사람이 되면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회복을 허락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정도로 기도를 좋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까지 명령을 하셨냐면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고깝게 생각하면 안 되는 것이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울에게 보여 주셨던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하나님의 그릇으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이 땅에서 왕이 되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문지기가 되는 것이 낫다고 표현을 하는데 하나님의 그릇이 될 수만 있다면 값비싼 도자기뿐만 아니라 간장 종지처럼 작고 별 쓸모없는 그릇이 될지라도 감사하고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기도는 하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다고 말을 하는데 딱 맞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고 핍박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멍들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사울이고 그런 까닭에 앞을 볼 수 없게 만들어 놓고서도 기도하는 사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을 바꾸셔서 사울을 하나님의 그릇이 될 수 있도록 택하셨던 것입니다.
처음 부분에 요나에 대한 언급을 잠깐 했었는데 니느웨성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성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전한 복을 듣고서 그 성 사람들이 회개를 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욘3:8) 이런 니느웨성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결정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욘3:10) 하늘 보좌가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체통도 없이 그 마음을 순식간에 바꾸셔서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 얼마나 위대하고 대단한 시간인 줄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하루에 몇 시간 이상 기도해야 합니다. 집사님 정도 되면 몇 시간 정도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이런 말을 많이 듣다 보니까 기도에 대해서 부담감이 생기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고 종교적인 행위나 짐처럼 생각이 되어서 기도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는 경우가 나타나는 것인데 사울처럼 기도하는 중에 있으면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그릇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릇이라는 자존감을 가지고 그 그릇 안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채우는 영광스러운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2007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뉴질랜드 카터튼이라는 시골 마을에 살던 피터 폭스라는 사람이 잠을 자다가 화재경보에 놀라서 새벽 4시에 재빨리 집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잠을 자다가 엉겁결에 밖으로 빠져 나왔는데 알몸상태였던 것입니다. 폭스는 집안에 가득 찬 연기를 보면서 순간 화재 신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문제는 급하게 나온다고 전화기를 놓고 나온 것입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하는 수 없이 번지는 불길을 무릅쓰고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렵게 찾아들고 나온 무선 전화는 불길에 전원이 타버려 사용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는 인근에 있는 이웃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해서 새벽길을 힘껏 달려가다 자신이 알몸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달려가다 보니 알몸이라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왠지 우습다는 생각이 들어 할 수 없이 발길을 되돌렸다"고 합니다. 두 번 다시 생각하지도 않고 불길과 연기에 휩싸인 집안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간 그는 몸을 낮추어 불길과 연기를 피하면서 어렵사리 팬티와 휴대전화를 찾아들고 다시 밖으로 빠져나오는데 성공을 합니다. 그는 얼른 휴대전화로 화재 신고를 한 뒤 팬티를 입고 정원 호스를 들고 혼자 진화를 작업을 시작했지만 정원 호스로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소방차가 달려왔을 때는 집의 3분의 1 정도가 이미 불에 타 재로 변한 뒤였고 소방서의 조사 결과 화재는 굴뚝에서 튕긴 불똥이 지붕위에 떨어져 일어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전화기가 필요해서 목숨을 걸고 들어가서 전화기를 가지고 나온 사람을 보면서 성도님들은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집보다 전화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생명인데 너무 무모하고 어리석다고 생각을 하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더 어리석고 무모한 사람들은 기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는 중이면 하나님의 진노도 피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도 될 수 있는데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인 기도를 하지 않아서 이 엄청난 은혜와 복을 거부하고 있다면 불타오른 집 안으로 전화기와 팬티를 가지러 들어간 그 사람보다 우리가 나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중에 있는 사람을 절대 그냥 내버려 두시지를 않습니다. 때로는 그 사람의 과거가 안 좋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대적했던 사람일지라도 기도하고 있는 중이라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조차도 설득을 해서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게 하고 안수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우리는 뼈저리게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이 시간보다 더 위대한 시간은 없습니다. 기도하는 우리들보다 하나님 앞에서 더 사랑스러운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회복이 되고 치료가 되고 음식을 먹으며 강건해 지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이 될 줄 믿으시고 명령하신 대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으로 귀하게 쓰임을 받다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나누는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