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
박인호❙금오공과대학교 교수
❙목 차
1. 머리말
2. 김중청의 생애
3. 17세기 퇴계학파의 분화와 월천계의 동향
4. 김중청의 학문 연원과 교유관계
5. 김중청의 활동과 월천계 내 위상
6. 맺음말
1. 머리말
구전 김중청(1567[명종 22]~1629[인조7])은 퇴계학파의 재전 제자로, 월천 조
목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월천의 일부 후학들이 광해군대 대북정권에 참여하였
다가 대북정권의 몰락과 함께 지역사회에서 배척되면서 오늘날 당시 월천계의 동
향에 대해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다. 여기서는 17세기 초 분기되던 퇴계학파 내의
월천계 동향과 함께 월천계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김중청의 활동과 위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김중청에 대한 연구는 그 사상사적 위상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연구
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천록 을 통해 북경으로의 사행 당시 허균과의 갈등 양상
을 소개한 논문1)과 임진왜란 때의 의병활동에 대한 발표2)가 이루어졌을 뿐이다.
김중청의 생애를 볼 수 있는 자료로는 문집과 조천록 그리고 강원일록 을 들
1) 박현규, 「金中淸의 『朝天錄』과 부정적인 許筠 모습」, 열상고전연구 22, 2005.
서인범, 「金中淸, 『朝天錄』의 사료적 가치」, 梨花史學硏究 51, 2015.
2) 김세현, 「구전 김중청공을 통해 본 임진란과 복구활동」, 봉화지역의 임진란사 연구 , 2016년 10월 12일
발표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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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3) 이들 자료를 바탕으로 17세기 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이에 따른 구전 김
중청의 활동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2. 김중청의 생애4)
金中淸의 字는 而和, 號는 苟全 혹은 晩退이다. 本貫은 安東이다. 1566년(明宗
21) 12월 20일 奉化縣 晩退里에서 태어났다. 안동김씨의 시조는 金宣平으로 고려
때 壁上三重大匡 太師를 지냈으며, 大司諫을 역임한 寶白堂 金係行은 공의 5대조
이다.5) 보백당은 현재 안동의 묵계서원에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공의 선대 집안
은 대대로 안동부 풍산현에 세거하여 왔다. 영해 교수를 지낸 承議郞 金世殷에 이
르러 軍威 凝谷里에서 奉化 晩退里로 옮겨와 자리잡았다. 조부 訥巖 金廷憲은 성균
관 진사가 되었으며, 퇴계 문인이었다. 아버지 金夢虎는 折衝將軍 僉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어머니 潘南朴氏는 左議政 朴訔의 玄孫인 忠義衛 朴承仁의 딸이었는
데, 박승인은 스승인 소고 박승임의 형이었다. 형제로는 金得淸과 金守淸이 있었다.
서인계의 대표적인 척화론자인 淸陰 金尙憲, 仙源 金尙容과는 12寸이 된다. 첫째
부인은 長水黃氏로 翼成公 黃喜의 玄孫이었으며, 둘째 부인은 永川李氏로 奉事 李
永承의 딸이었다. 아들은 柱旻, 柱國, 柱宇, 柱漢, 柱衍, 柱美 6형제를 두었다.
여기서는 연보를 통해 김중청의 일대기를 연도별로 살펴보고자 한다.
1566년(명종 21) 12월 20일 奉化縣 晩退里에서 태어났다.
8살(1573) 外祖父의 동생인 嘯皐 朴承任에게서 글을 배웠다.
12살(1577) 奉化의 현아로 나아가 縣監으로 부임하였던 月川 趙穆에게 受
業하였다.
14살(1579) 월천 조목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으므로 월천서당으
3) 김중청, 苟全先生文集 1, 2, 韓國歷代文集叢書 2245, 2246, 1997(金中淸, 苟全先生文集 , 苟全先生文集
國譯重刊推進委員會, 1999),
김중청, 구전선생문집 , (影印標點)韓國文集叢刊 續 14, 민족문화추진회, 2006.
김중청, 조천록 , 임기중편, 燕行錄全集 12, 23, 동국대학교 출판부, 2001.
김중청, 구전선생강원일록 , 후손가.
4) 이 부분은 구전집 수록 「연보」와 「행장」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
5) 최은주, 보물은 오직 청백뿐, 안동 보백당 김계행 종가 , 예문서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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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나아가 글을 배웠다.
15살(1580) 母夫人 朴氏의 喪을 당하였다. 부인의 성품은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다.
17살(1582) 長水黃氏 夫人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翼成公 黃喜의 玄孫이
자 사과 賀의 따님이었다.
19살(1584) 장남 柱旻이 태어났다.
20살(1585) 嘯皐 朴承任이 근무하였던 창원부에 가서 관아에서 漢書 를
배웠다.
21살(1586) 정월 소고 선생이 돌아가셨다. 차남 柱國이 태어났다.
26살(1591) 4월 부인 黃氏의 상을 당하였다.
27살(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柳宗介와 함께 義兵을 일으켜 參謀
로 종군하셨다. 유종개가 전투 중 전사하자 봉화의진은 재정비되어 任屹이 의
병대장, 金涌이 의병부장, 선생이 참모와 서기를 담당하였다. 선생이 군무를
담당하면서 의병대장과 관찰사에게 편지를 올리고 일을 기미에 맞게 처리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의 재능과 기국에 탄복하였다.
28살(1593) 永川李氏 부인에게 장가들었다. 부인은 奉事 李永承의 따님이
었다.
31살(1596) 책을 상자에 넣어 천상의 월천서당에 가서 공부하였다.
32살(1597) 5월 월천을 모시고 靈芝山을 유람하였다.
33살(1598) 3남 柱宇가 태어났다.
35살(1600) 봄 월천 선생에게 나아가 문안을 드렸다. 월천은 제자의 방문
에 대해 “온 봄의 소식을 매화 가지에서 보는 듯하다”고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36살(1601) 11월 월천 선생을 모시고 淸凉山을 유람하였다.
37살(1602) 4남 柱漢이 태어났다.
38살(1603) 부인 李氏의 상을 당하였다.
40살(1605) 정월 천상으로 가서 월천의 병을 간호하였다. 얼마 후 월천의
병이 나았다. 2월 과거 응시를 위해 서울을 다녀왔다.
41살(1606) 집에서 1리쯤 떨어진 槃隱洞에 書齋를 지었다. 고요한 곳에 은
거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실을 짓고 중으로 하여금 그것을 수
호하도록 하였다. 讀書를 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쳤다. 槃泉子로 자호하였다.
10월 월천 선생이 돌아가셨다.
42살(1607) 4월 안동부로 한강 정구를 찾아가 뵈었다. 한강은 안동부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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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하면서 선비들을 모아 心經 을 강독하였으므로 찾아가 뵙고 머물면서
강독하였다. 8월에는 다시 안동으로 가서 더 배우기를 청하였다. 유형경의 아
들 柳忻을 대신한 봉화현감 任奕과 김이화 집안과의 갈등으로 봉화현감 임혁
은 부친을 체포하여 형틀에 씌우고, 수령을 모함하였다는 이유로 김중청을 잡
아오도록 하면서 선생의 두 아들을 구금하였다.6) 임혁은 김중청의 죄목을 8
가지를 들면서 감사 이상신에게 보고하였으나 감사는 관대하게 처분하였다.7)
11월 봉화현감을 피해 부친은 溫溪로, 김중청은 外川의 영천 이씨 집으로 피
신하였다.8)
43살(1608) 禮安縣 南陽里로 이사하였다. 마을 이름을 따라 호를 草廬라고
하였다가 苟全居士로 고쳐 불렀다.
44살(1609) 豊基 東堂의 終場에서 장원을 하였다.
45살(1610) 문과 시험인 明經科 覆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漢城府參軍(正
7品)에 임명되었다.
46살(1611) 司憲府 監察(正6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시 權臣의 誣陷으
로 罷職되었다.
47살(1612) 가을 아들 주우가 15살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의 회시에 합격
하였다.
48살(1613) 成均館 典籍(正6品)과 禮曹佐郞, 禮曹正郞兼知製敎(正5品)에 임
명되었다.
49살(1614) 북경으로 가는 千秋使兼謝恩使의 書狀官으로 4월 21일 출발하
였다. 지난해 12월 사은사 서장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출발이 늦어졌다가 천추
사겸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출발하였다. 7월 북경에 도착하여 8월에 명나라 황
제에게 하례하였는데 당시 명은 태후의 장례가 있었으나 천추사는 길례에 해
당한다고 특별히 연회를 베풀려고 하였다. 그러자 김중청은 과군의 슬픔은 우
리들 배신의 슬픔이라고 하면서 연회를 베풀어주는 것을 사양하였다. 이 건의
는 예부의 허락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문장의 논리가 정연하는 칭찬을 들었다.
50살(1615) 1월 11일 복명하였다. 명으로의 사행 길에 정사는 許筠이었는
데 일을 행하거나 비밀리 조사하는 과정에서 선생과 언제나 반대가 되었다.
6) 계암일록 , <1607, 8. 11>, <1607. 8. 18>.
7) 계암일록 , <1607, 8. 19>.
8) 계암일록 , <16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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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9개월간의 사행 기록으로 조천록 이 문집의 별집에 남아 있다. 원래 조천
사적으로는 일록과 문견사건 두 종류가 있었는데 두 가지를 함께 편집하면 중
복되는 것 같아 조천록 으로 하나의 기록으로 만들었다. 이 일은 주관한 이
는 李光庭이었다. 중국 국경 안에 들어간 이후에는 사건에서 상세히 기술하였
으며, 일록에서는 단순히 상세하게 나타난 사건만을 기록하고 있어 두 가지를
모두 참고하여야 그 상세한 전말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이광정은 의주 이전
은 전적으로 일록을 위주로 하고 중국 국경에 들어간 이후에는 사건의 기술
내용을 중심으로 재편집하였다.9) 특히 사건은 보고용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용된 臣자는 余자로 바꾸거나, 선배의 휘는 별호로 고쳐 썼다. 조천록 의
끝에는 문견사건 중에 수록되었던 사행과정에서 목도하였던 10가지의 문제점
의 시정을 요청한 글이 남아 있어 그 흔적을 볼 수 있다.10) 4월에는 侍講院
文學(正 5品)에 임명되어 宣祖實錄 편수에 참여하였으며, 원종2등 공신으로
통훈대부에 가자되어 兼弼善에 임명되었다. 당시 광해군 하에 집권 북인계 관
료들은 월천 문인들을 시험하기 위해 선생을 司諫院 正言(正 6品)에 임명하여
폐모론에 반대했던 梧里 李元翼을 탄핵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선생은 李翼과
함께 停啓하자는 논의를 발의하여 집권층으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 이에
부친 봉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兵曹의 司果兼春秋館記事官(正 6品)에 보
임되었다가 9월 慶尙右道 試官으로 차출되었다. 이때 고향 근처로 오게 되면
서 한강 정구, 회곡 권춘란, 백암 김륵, 여헌 장현광 등을 방문하였다. 복명하
기도 전에 고령현감에, 복명 후에는 新安(星州) 현감에 임명되었다.
51살(1616) 정월 11일 하직 인사 후 12일 부임하였다. 매일 正廳에 앉아
朝服을 갖추어 입으시고 하루 종일 일을 처리하여 비뚤어지고 잘못된 행정이
바로 잡아 지고, 외롭고 고달파 의지할 곳이 없는 백성들의 생활이 되살아났
다. 옥사의 처결을 분명히 하여 원통한 옥사가 없게 하였다. 정인홍이 한강에
게 역적 모의를 하였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관찰사에게 보고하였는데 김중청
9) 구전집 별집, 「조천록」, <識[李光庭]>. “朝天事蹟 有日錄有聞見事件 事件亦日錄也 入境之後 致詳於事件 而
日錄只書詳見事件 必須參考二件而後可究其詳 而俱編二錄 亦似重複 輒忘其僭 參究事實 通爲一錄 而義州以前
全用日錄 入境以後則以事件爲主而間附日錄 至其文字相碍 不免脩改 如臣字改余字 書先輩諱字改以別號 盖謂之
日錄則不得便用事件例也 其間亦不無刪煩取約去冗從便者 極知妄猥 而有不得不然者 覽者恕之 光庭謹書”
10) 구전집 별집, 「조천록」, <聞見事件末端獻說>. 내용은 使臣과 書狀官의 엄정 선발할 것, 軍官·子弟·譯官의
冒濫과 同行에 제한할 것, 물품과 비용은 謄錄에 의하도록 할 것, 사신단의 내·외부 출입에 대해 제한할
것 등 사행 기간 동안 느겼던 점을 조목별로 지적하고 있다. 말미에는 1812년에 姜必孝(1764~1848)가
쓴 〈末端獻說跋〉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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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 사이에서 주선하여 무사하게 되었다. 2월에는 석채례, 사직단 제사를
지냈으며, 천곡서원을 참배하였다. 한강 선생과 회곡 선생을 찾아 뵙기도 하
였다. 5월에는 주연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봄과 가을의 석채례와 이어지는 행
사에서 선생이 관아에 있을 때는 반드시 정갈하게 받들었다. 고향에는 창해서
원을 건립하여 퇴계와 월천을 모셨다.
52살(1617) 5월 월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고, 지나는 길에 여헌 장현광을
방문하였다. 월천의 연보 초고를 만들기도 하였다. 6월에는 사수에 가서 한강
을 뵈었다. 9월에는 회곡 선생을 조문하였다. 10월 사수로 가서 한강을 뵙고,
또 지나는 길에 여헌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집, 장흥효, 이윤우 등과 같이 잤
다. 11월에는 성주의 檜洞에 있는 외선조인 야성군 송공의 묘소에 제사를 지
냈다. 12월에도 한강 선생을 찾아 뵈었다.
53살(1618) 둘째 아들 柱國이 지난 겨울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므로 부친에
게 데리고 가서 주연을 열었다. 3월에는 한강 선생이 와서 함께 유숙하였다.
소고 박승임 선생의 언행록 초를 작성하였다. 4월에는 순영에 갔다가 한강을
찾아 뵈었으며 최현과도 만났다. 윤달에는 여헌 선생을 길에서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5월에는 회곡 선생의 제사에 참석하였다. 6월에는 파직되어 돌아가는
관찰사 尹暄을 尙州까지 전송하고 지나는 길에 愚伏 鄭經世를 방문하였다. 9
월 箋文差使員으로 서울에 가서 허균이 가져왔다는 임거만록 에 대한 변론
이 있었다. 10월에서 12월에는 네 번이나 사수를 방문하였다.
54살(1619) 이해에도 여러 번 한강을 찾아 뵈었다. 이때 최현, 이윤우 등
과 같이 유숙하였다. 정월에는 통정대부로 승급하여 고향에서 주연을 베풀었
다. 6월 16일 한강 선생을 모시고 浮江亭 아래에서 뱃놀이하였다. 한강 선생
이 蓬萊로 목욕하러 떠날 때 병이 있어 따르지 못하고 牛巖에서 李潤雨, 李彦
英, 李濯, 그리고 아들 金柱宇를 전송하였다. 8월, 대간의 탄핵이 있다는 소식
을 듣고는 즉시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마을 주민들은 성문에 늘어서서
고을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만퇴리 옛 집으로 왔다가 桂場洞 셋집으로
옮겼다. 계장동은 옛 집에서 북쪽으로 2리쯤 떨어졌고 봉화현에도 가까웠는데
그윽한 절경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경치를 아껴서 집을 세내어 거처하였다. 11
월 큰 아들인 柱旻이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55살(1620) 정월 한강 선생의 부음을 듣고 곡하다. 2월에는 창해서원의 위
판이 바르지 않음을 보고 아들 주우를 시켜 고쳐쓰게 하였다.
56살(1621) 봄 九未堂이 완성되어 은거할 집을 마련하였다.11) 구미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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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되지 아들 주우로 하여금 귀거래사를 써서 벽에다 붙이고 완상하다가 그
운에 차운하였다. 8월에는 龍山書院에 晦谷 權春蘭을 봉안하는 글과 상향문을
초하였다. 용산서원을 후에 周溪書院이 되었다. 9월에는 三全室12)이 완성되었
다. 12월에는 지제교를 겸하였다.
57살(1622) 3월에는 分承政院承旨에 임명되었으며, 4월에는 宣諭使에 차출
되어 嶺南 지역을 안찰하였다.13) 선유사는 군량 부족을 염려하여 각도의 곡
식을 모집하였는데 이름을 모속사로 하였다가 선유사로 고쳐 부른 것이다. 성
주를 지나다가 한강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58살(1623) 3월 復命하면서 각 고을의 폐단을 진달하다. 당시 집권세력은
선생이 여러 고을 순행하면서 이이첨을 배척하는 여러 선비들과 함께 비밀리
도모하려고 하였다고 죄를 얽어매려고 하였다. 연이어 11일 반정이 일어나 知
製敎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고향으로 내려 갔다.
59살(1624) 2월 李适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公州로 피란하였다. 영남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선생은 고을의 의병장이 되어 행재소로 가다가 이괄이 죽었
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생이 여러 장수들과 함께 대궐로 나아가 하례를 드리고
소를 올렸다. 소에 대해 인조는 충성과 의리가 매우 가상하며 소의 내용은 마
땅히 깊이 생각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를 당하여 경상감사 閔聖徵이 도
내 인심이 머뭇거리고 관망하는 기색이 있으므로 왜관의 왜인들을 적지에 나
아가게 하도록 하자고 주청하였는데 선생이 우복 정경세와 함께 이에 대해 변
명하는 소의 초를 작성하였다. 6월에는 주우가 廷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60살(1625) 4월 부친상을 당하다. 상복이며 장례와 제사를 한결같이 주자
가례대로 하였다.
62살(1627) 정묘년 봄 오랑캐가 침입하여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선생은 상복을 벗고 일어나 달려가려고 하였다. 당시 인조의 기복하라는 명
11) 경북 봉화군 明湖面 豊湖里 餘浦마을의 苟全宗宅에 정면 3간, 측면 3칸의 8작 지붕 건물로 이루어진 九未
堂이 있다. 「연보」에서는 구미당의 당호가 慈未具(자애로움을 갖추지 못하고), 配未全(배우자도 온전히 못
하며), 交未博(교유도 넓지하지 못하고), 書未讀(책도 제대로 읽지 못했고), 學未就(학문도 성취하지 못했
고), 道未修(도도 제대로 닦지 못하고), 居未定(거처도 안정되지 못하고), 仕未信(벼슬살이도 신임받지 못했
고), 謗未止(비방도 그치지 않는다)의 선생께서 아홉 가지 일을 못한 것을 이르는 말이라고 적고 있다.
12) 三全室 현판은 현재 구미당 건물에 같이 있다. 아마도 원래의 구미당에 별도의 한 공간을 추가로 마련한
다음 선생께서 주로 기거하면서 그 정침의 이름을 삼전실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13) 광해군대 선유사 시기의 역할에 대해 인조반정 이후 비판적인 평가가 있다( 광해군일기 권176, 광해군
14년 4월 을유(20) 및 계암일록 , <1622. 4. 23>, <1622.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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령이 있었으며 우복 정경세와 여헌 장현광이 각기 영남 좌도와 우도의 호소
사가 되었다. 그러나 선생은 병이 들어서 길을 나서지 못하였다. 6월에는 상
복을 벗었다.
64살(1629) 6월 13일 乃城의 寓舍에서 사망하였다. 9월 3일 奉化縣 南面
太子山에 장사 지냈다.
3. 17세기 퇴계학파의 분화와 월천계의 동향
1) 서애와 월천의 대립
퇴계 이황에 의해 창도된 퇴계학파의 학맥은 다음 세대에 월천 조목, 서애 유성
룡,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 등으로 계승되었다. 특히 월천, 서애, 학봉, 한강계는
가장 많은 제자를 거느리며 그룹화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월천은 1538년 15살
때 퇴계를 스승으로 모신 이후 퇴계 이황이 사망하는 1570년까지 30여년을 퇴계
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퇴계가 사망한 뒤에는 상을 주재하였으며, 스승을 애도하
기 위해 1년 동안 베로 만든 띠를 매었으며, 3년 동안 잔치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월천은 퇴계가 사망 후 도산에서 직접 강학을 열기도 하였다. 월천은 처음부터 끝
까지 오로지 퇴계를 모시는데 일생을 보내었다. 학문적 자세도 스승을 이어 퇴계학
을 심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14) 따라서 월천은 퇴계의 여러 제자 가운
데 학통을 잇는 제자로 이미 향촌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말부터 학파가 분기하면서 각 계열마다 갈등이 노정되기 시작하
였다. 16세기 말과 17세기 초는 퇴계집 편찬과 주화오국 문제로 서애계와 월천계
가 대립하였으며, 17세기 초 중반에는 유성룡과 김성일의 위치시비로 서애계와 학
봉계가 대립하였다.
월천은 스승이었던 퇴계가 사망한 직후인 1571년(선조 4)부터 선사의 문집을 편
찬 간행하는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서애와 학봉은 모두 사환하고 있었기 때문에 문
집 편찬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문집은 월
천의 주관 하에 진행되었다. 서애의 절삭 주장이 있었으나 월천의 전고 수록 방침
14) 권오영, 「월천 조목의 언행과 학문성향」, 국학연구 28, 2015.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85
에 따라 초간본인 경자본이 1600년(선조 33) 도산에서 간행되었다.15) 월천은 퇴
계집의 판각으로 이제 퇴계의 적전으로서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비록 수록 원
칙에 대한 의견 차이에서 시작되었으나 퇴계집의 편찬 주도권 다툼은 서애와 월천
계의 대립 구도 속에서 양 파가 갈등하게 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16)
서애계와 월천계가 문도간의 대립을 감정적 차원으로 끌어 올린 것은 주화오국
문제였다. 북인계인 李爾瞻 등에 의해 1598년(선조 31)에 시작된 유성룡의 온건한
한일 문제 해결 방식에 대한 비판은 9월 들어 성균관 유생 李好信, 文弘道 등에
의해 송나라 때 충신 岳飛를 죽이고 화친을 추구하였던 秦檜와 같은 간신배로 몰
아붙이면서 본격화하였다. 이들은 유성룡이 和 자로 국가의 대사를 그르쳤으며, 정
인홍이나 조목과 같은 인재의 등용도 막았다고 지적하였다. 主和誤國으로 계속 상
소가 일어나면서 유성룡은 12월 삭탈 관직되었다. 그런데 조목은 이 탄핵 이전인
1597년(선조 30) 이미 유성룡에게 상국께서 성현의 책을 읽고 배운 것이 오직 ‘講
和誤國’ 넉자 뿐인가라고 비판하고 있다.17) 유성룡으로서는 동문의 인사로부터의
誤國 비난을 받은 것은 큰 충격이었다.
월천이 사망하자 문인인 김택용이 「월천언행록」을 지었는데 월천이 서애에게 講
和誤國한다고 비판하였던 1597년의 편지를 장황하게 인용하고 있었다. 1660년대
조목의 외손인 金確이 언행록을 보여주면서 동계 鄭蘊에게 월천의 신도비문을 청
탁하였다. 정온은 신도비문 끝에 이 부분의 내용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이러한 사
실이 서애계에 알려지면서 월천계와 서애계는 본격적으로 대립 구도속에 빠져들었
다. 당시 서인의 집정으로 북인과 연계되었던 예안의 월천계는 차츰 향내에서 위축
되기 시작하였고, 오히려 서애계는 인조반정 이후의 친남인 정책에 따라 차츰 중앙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도비문의 내용은 두 문도들 사이에서
의 갈등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학사 김응조는 이 문제에 대해 주화오국은 이
15) 서정문, 「퇴계집의 초간과 월천 서애 시비」, 북악사론 3, 1993; 조선중기의 문집편간과 문파형성 ,
2006, 12-48쪽.
16) 월천 조목과 서애 유성룡이 동문 수학한 사이이지만 학문에서부터 정치적 성향과 세계관에 이르기까지 기
본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입장에서 그 차이점을 드러내는 연구가 일반적이다.
서정문, 「퇴계집의 초간과 월천 서애 시비」, 북악사론 3, 1993.
이수건,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학맥」, 한국의 철학 23, 경북대 퇴계연구소, 1995.
정만조, 「월천 조목과 예안 지방의 퇴계학맥」, 한국의 철학 28, 경북대 퇴계연구소, 2000.
설석규,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필사본 월천선생문집 해제」, 국학연구 5, 2004.
17) 월천집 , 「부록」, <월천신도비명>.
86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이첨이 당시 유성룡을 비롯한 남인 당국자들을 악의적으로 정계에서 몰아내기 위
해 이용한 문자인데 이를 월천계인 김택용와 김확이 의도적으로 적어 놓아 논란이
분분해지도록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18)
2) 월천계의 도산서원 장악
1572년 4월 조목을 비롯한 예안 지역의 동문들이 도산에 서원을 건립하는 문제
를 논의하여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이후 본격적으로 서원
건립에 나서 1574년 7월 전교당을 준공하였다. 1575년 8월 서원을 낙성하였으며
선조가 한석봉에게 쓰도록 한 陶山으로 사액을 받았다. 1576년 2월에는 묘우인 상
덕사를 준공하고 퇴계의 위판을 봉안하였다. 조목은 위패를 봉안하는 제문을 지었
으며, 춘추 향사에 사용하는 축문을 지었다. 한편 도산서원이 건립되자 초기 원장
은 대부분 조목의 문인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19) 자연스럽게 원생도 월천계로
채워지게 되었다.20) 김중청도 1582년 입록하였다.21)
한편 월천의 사망 후 그의 월천계 문인들에 의해 광범위한 추숭사업이 일어났다.
월천의 제자들은 3년 상이 끝난 1608년부터 바로 월천의 문집을 정리하기 시작하
였다. 처음은 朴守謙, 蔡衎 등이 易東書院에서 시작하였으나22) 바깥의 여론 때문
에 龍壽寺로 옮겨서 작업을 진행하였다.23) 이 작업은 김중청을 비롯하여 김택용,
이덕홍의 아들 6형제, 박수의, 박수겸, 채간 등 월천의 문인들에 의해 이루어졌
다.24)
월천 문집이 어느 정도 정비되자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건을 추진하였다.25) 종향
18) 김응조, 학사집 권5, 「잡저」, <서애변무록>.
19) 우인수, 「조선후기 도산서원 원장의 구성과 그 특징」, 퇴계학과 유교문화 53, 2013, 97쪽.
20) 김형수, 「17세기 초 월천학단과 예안지역사회의 재건」, 민족문화연구 65, 2014, 306-307쪽.
21) 유원록 , <1582>.
22) 계암일록 , <1608. 11. 3>.
23) 김령은 김중청과 이립이 용수사에 출입하는 것에 대해 “저들이 바야흐로 죄망에 걸려 있으면서 버젓이 모
여드니, 아주 해괴하고 경악할 일이다”는 여론을 전하고 있다( 계암일록 , <1608. 11. 28>).
24) 서애계와 갈등을 빚은 내용을 거론하고 있는 金澤龍(1547~1627)의 「월천언행록」, 鄭蘊의 「월천신도비명」
등의 수록 여부로 서애계와 갈등을 빚으면서 실제 문집의 간행은 1666년경 예안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되었
다. 양측의 합의에 의해 일부 직접적인 문제가 되는 구절이 있는 내용은 삭제되고 6권 3책에 연보와 제문
이 수록된 부록 1책이 추가되어 모두 4책으로 간행되었다. 그 뒤 일부 부분이 수정되어 개간본이 간행되
었다. 한편 12권 7책의 필사본이 도산서원 광명실에 수장되어 있는데 목판 간행 이전의 교정용 필사본으
로 간주되고 있다(설석규, 「해제」, 월천선생문집 , 2004).
25)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 논의 전말은 이상현, 「월천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논의 - 17세기 영남사족 동향의
일단」, 북악사론 8, 2001 참조.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87
건은 1609년 裵龍吉이 처음 제기하였으며,26) 1610년에는 도산서원 원장에 재임
중이던 琴應壎도 이 문제를 논의하였으며,27) 1611년에는 김택용이 감사에게 정문
을 올리는 방안을 제안하였다.28)
1612년에는 琴憬이 도산서원 원장에 취임하자 본격적으로 월천 종향건을 재론
하였다. 1612년 1월 5일 도산서원에서 열린 알묘회에서 종향론을 중장하는 월천
계가 회의를 주도하면서 2월 중정일에 월천을 도산서원에 종향하기로 결의하고 영
천의 이산서원과 안동의 여강서원에 통문을 보냈다.29) 이 일은 고향에 내려와 있
던 김중청을 비롯하여 김택용, 금경, 박수의, 이립 등이 주도하였다.30)
이 결정에 대해 안동을 중심으로 한 의성김씨, 안동 유곡의 안동권씨, 온계의 퇴
계 후손, 예안 오천의 광산김씨 계열 인사들이 從享을 道統의 계승으로 간주하면서
크게 반발하였다. 각 서원이나 문중에서 보내 온 의견도 부정적이었다. 오천의 김령
은 일기 기록을 남기면서 종향 당시의 여론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는 이덕홍의
아들들이 퇴계의 도통이 조목에서 김중청, 그리고 자신들에게 이어진다는 적전 의식
에서 이러한 일을 꾸민 것으로 보았다. 게다가 그들은 스승을 추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높이려는 술책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31) 정구는 종향의 같은 중대사는
예조에 계품해야 하며 독단적으로 결정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32)
이듬해인 1613년 4월 도산서원 원장 琴憬과 李苙 등은 경상감사 尹暉가 예안을
방문한 자리에서 예안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한 종향의 呈文을 예조에 올려줄 것을
요청하였다.33) 당시 예조좌랑에 있던 김중청은 예조를 통해 주상에게 종향을 啓稟
하였으며, 강해군은 ‘啓’자를 적어 수의할 것을 재가하였다.34) 김중청은 李光胤, 朴
守誼, 朴守謹 등과 함께 영남 사람으로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열거하여 다
시 漢陰 李德馨에게 올렸다. 그러자 영상 및 원임대신들이 모두 하나같이 재가해
줄 것으로 회계하였다.35)
26) 계암일록 , <1609. 1. 12>.
27) 계암일록 , <1610. 5. 10>.
28) 계암일록 , <1611. 1. 6>.
29) 조성당일기 , <1612. 1. 5>.
30) 계암일록 , <1612. 2. 11>.
31) 계암일록 , <1612. 2. 8>, <1612. 2. 13>.
32) 계암일록 , <1612. 2. 11>.
33) 계암일록 , <1613. 4. 28>.
34) 계암일록 , <1613. 6. 26>. <1613. 8. 5>.
88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종향의 건으로 1614년 1월 19일 안동 향교에 모여 가부를 결정하였는데36) 참
석자 82명 가운데 반대 22명 외는 모두 찬성하였다.37) 이러한 과정을 거쳐 월천
을 도산서원에 종향하는 것이 최종 결정되었으며, 종향 관문이 9월에 도착하였
다.38) 김령은 중신 뿐만 아니라 정인홍, 이이첨 등이 힘을 다하였고 조목의 문인
들을 기용하여 이를 도모하였으니 어찌 이루어지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고 하면서
이강이 이이첨의 치질을 핥음과 이광윤이 碩光에게 아부함과 김중청이 권세가와
안팎이 된 것과 이잠의 허장성세는 일일이 거론할 것도 없다고 한탄하였다. 도산서
원 원장 김택용은 회문의 도착을 계기로 절목을 상의하기 위한 회의를 9월 13일
개최하였다.39) 11월 9일 도산서원에서 종향이 거행되었다.40) 그러나 월천계가 중
심이 되어 종향을 이루어내었으나 월천계는 친대북적인 정치 성향으로 인해 향촌
에서 차츰 고립되어 갔다.
월천계는 예천에는 李光胤, 朴守謹 등이 중심이 되어 1611년 퇴계 선생을 모
신 鼎山書院을 세웠다가 1615년 3월 25일 조목을 종향하였다.41) 1677년(숙종
3) 사액되었다. 봉화에는 金中淸 등이 중심이 되어 1616년 퇴계 선생을 제사지
내고 월천 선생을 종사하는 昌海書院을 건립하였다가42) 1617년 9월 봉안제를
지냈다.43) 1694년(숙종 21) 문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35) 계암일록 , <1613. 8. 5>.
36) 계암일록 , <1614. 1. 18>.
37) 계암일록 , <1614. 2. 4>.
38) 계암일록 , <1614. 9. 7>.
39) 계암일록 , <1614. 9. 7>.
40) 계암일록 , <1614. 11. 4>.
41) 계암일록 , <1615. 3. 26>.
42) 구전집 권6, 「제문」, <昌海書院尊德祠奉安祭文 賜額文巖>, <月川先生祔享尊德祠祭文>.
구전집 , 「연보」, <四十四年丙辰 先生五十一歲>.
43) 계암일록 , <1617. 9. 8>. “晴而風 午後伊溪金進士得硏丈過 以廬江院長 徃奉化 觀金中淸輩昌海書院奉安
祭而回也 祭日會者 禮安則琴憬李有道李之馨金琡鄭得李尙迪柳時元等幾二十人 榮川則李崇道及其二子金汝燁
汝煜及宋姓諸人凡十餘人 安東三四人率皆名不聞者 豊基亦然 醴泉金錫堅 其餘皆奉縣及奈城人也 奈城權尙賢
亦徃矣 此會者 皆中淸之黨與 不然皆脅從或旅進 而其中亦有中無所主趨勢畏禍而赴之者 近境士子 稍號爲有識
有聞者 皆不徃矣 夫以先生書院 榮安禮三邑 自昔固有 而其他追建者 或于先生 有平日之緣 或出於欽慕而致誠
至若昌海 中淸本意不在先生 只在於其師月川 而慮人心不服 借先生憑藉 而歸重月川 月川雖名從祀 其實主也
(중략) 且其書院 創於十年前 士論皆云淸也 搆自已書院 中間經變故 久不就 至是乃逞其胸臆焉” 창해서원이
건립이 쉽지 않았던 과정을 거쳤음은 김령이 서원을 10여년 전에 창설되었는데 유림 여론이 김중청이 자
기 서원을 짓는다고 여겼으며, 중간에 진행시키지 않다가 이제 그 속마음을 드러내었다고 적고 있다.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89
4. 김중청의 학문 연원과 교유관계
1) 김중청의 학문 연원
김중청은 어릴 때 집안의 문호를 부지할 인물로 촉망을 받았다. 커서는 퇴계 이
황을 사숙하였으며, 嘯皐 朴承任, 月川 趙穆, 寒岡 鄭逑을 스승으로 모셨다. 經學의
精邃는 조목에게서, 文章의 奧健함은 박승임에게서, 禮學의 순수함은 정구에게서
물려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44)
먼저 소고 선생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김중청은 8살(1573, 선조 6) 때 부친 僉知
公의 명으로 嘯臯 朴承任 先生(1517~1586)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다. 1585년(선조
18) 무렵에는 창원부사로 재임하였던 소고 선생에게 한서 를 배웠다.45) 1586년
(선조 19) 때 소고 선생이 사망하자 곡을 올렸으며, 1618년(광해 10) 때는 소고선
생언행록 의 초를 작성하였다. 이듬해는 한강 선생에게 소고 선생의 묘갈명을 작성
해 주기를 청하기도 하였다. 김중청은 스승을 위해 행장과 제문을 지었다.46) 김중
청은 스승이 3대의 조정에서 두루 벼슬을 하였는데 그 동안 여러 사화가 일어났으
나 홀로 참화를 면한 것은 일생 동안 청신하고 근칙하였기 때문이라고 평하였다.47)
한편 월천 선생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12살(1577, 선조 10) 때 月川 趙穆에게
나아가 수업하였다. 당시 월천은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선생은 월천을 관
아에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였다. 14살 때인 1579년(선조 12)에는 당시 월천이 벼
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열었던 월천서당에 나아가 글을 배웠다. 월천서당에
서 문하의 여러 학자들과 종유하게 되었다. 월천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신달도는 선
생의 만사에 1596년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4) 구전집 , <苟全先生文集序[李光庭]>. “外高祖苟全先生 私淑陶山之門人 盖甞往來嘯臯月川寒岡三先生之門
一時之論先生者 謂經學精邃 傳鉢於川翁 文章奧健 承楷於臯老 而禮學純粹則襲訓於泗水也”
45) 한서 의 수학시기에 대해 연보( 구전집 , 「연보」)에서는 “檜山有感詩 自註云嘯臯朴先生由諫院左遷 來莅此
府 余從學漢書于衙內 時乙酉春也(회산유감 시에 자신이 주를 달기를 소고 박선생이 사간원에서 좌천되어
이 부에 부임하여 왔을 때 내가 현의 관아 안에서 한서 를 배웠는데 그 때가 바로 을유년(1585) 봄이었
다)”라고 적고 있다. 그런데 소고 선생은 계미년(1583) 5월 공조참의를 사직하고 고향으로 왔다가 7월 사
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나 8월 창원부사로 임명되어 9월 부임하였다. 을유년(1585) 정월 아들 澡가 사망하
자 2월 해직되어 돌아왔다. 따라서 한서 의 수학 시기는 소고 선생이 창원부사로 있었던 때인 20살 무렵
에 배운 것으로 보인다.
46) 구전집 권6, 「제문」, <嘯臯先生祠廟>. 「행장」, <嘯臯朴先生行狀>.
47) 嘯皐集 「附錄」 下, <記聞錄>. “先生歷事三朝 當乙巳己卯之歲 羣少釀禍 互相傾軋 淸班縉紳之家 盡入於網
打之中 而先生獨免慘禍者 蓋一生淸愼謹飭之力也 門人金中淸日錄”
90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병신년 책을 짊어지고 천상에 가서 공부하면서 공을 알게 되었다. 서로 권
하고 격려하여 깊이 마음을 합하였다. 나의 어리석음을 충고하고 나의 조급한
행동을 책망하였다. 학문의 연원을 캐어 멀리 이락까지 올랐으며, 시간을 아
끼면서 예서를 깊이 탐구하였다.48)
1597년(선조 30) 정월에는 월천을 모시고 靈芝山을 유람하였으며, 1601년(선조
34) 11월에는 월천을 모시고 淸凉山을 유람하였다. 1605년(선조 38)년 정월에는
월천이 아프다는 말을 동문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의원을 데리고 가서 병 간호를
하였다. 월천은 “평소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주 볼 수 없었던 것이 한이 되었는데
이제는 병이 들어 죽게 되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겠는가!”고 아쉬워하였다. 월천
이 제자인 구전을 아낌이 지극하였음을 볼 수 있다.49) 병이 조금 나았다가 이듬해
인 1606년(선조 39) 10월 월천 선생이 돌아가셨다. 이에 제문과 만사를 지었다.
1616년(광해군 8) 신안현감으로 재직시 고향 사람들의 논의를 모아서 李滉을 제사
지내고 趙穆을 종사하는 昌海書院을 세웠다.50) 경상북도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에
있던 이 서원은 1694년(숙종 20) 文巖書院으로 사액되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 1617년(광해군 9)에는 말미를 얻어 月川廟에 제사를
지내고 월천의 연보 초고를 작성하였다.
寒岡 鄭逑는 1607년(선조 40) 4월 당시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선비들을 모아
심경 을 강독하였는데, 김중청은 선생을 찾아가 뵙고 머물면서 강독에 참여하였다.
8월에 다시 가서 더 배우기를 청하였다. 1615년(광해 7)부터는 경상도 일원에 출
입할 때마다 한강을 찾아 뵈었으며, 신안 현감으로 재직시 한강이 내암 정인홍으로
부터 역모 밀고를 받았으나 이를 중간에 무마하기도 하였다. 1620년(광해 12) 정
월 한강의 부음을 듣고는 곡을 하고 만사를 지었다. 선생 사후에도 경로에 있을 때
마다 들려 한강 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제문에서 김중청은 정구와의 관계에 대
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8) 구전집 , 「연보」.
49) 구전집 , 「연보」. “三十三年乙巳 先生四十歲 正月侍疾川上 同門報月川先生病篤 節迎醫往侍 月川執手曰常
以居遠不得源源爲恨 今病且死矣奈何 其見愛重如此 已而月川病愈”
50) 구전집 권6, 「제문」, <昌海書院尊德祠奉安祭文 賜額文巖>, <月川先生祔享尊德祠祭文>.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91
아! 나라의 운명이 쇠하려고 할 때에 선생께서 병이 드셨고, 유교의 바른
맥이 장차 떨어지려고 할 때 선생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두 번 다시 대궐에서
호소할 수 없게 되었는데 어떻게 인륜과 기강을 부지할 수 있겠습니까. 나아
가 의문을 질정할 곳이 없어졌으니 우리 후학은 쓸프기가 끝이 없습니다. 이
제 사양의 물가는 황폐하고 쓸쓸하며 매원도 적막하게 되었습니다. 공경심을
지니고 의리를 밝히시려고 평생 동안 힘을 쓰셨으며, 유를 나누어 능력을 발
휘하고 가르침을 주시는 큰 공을 세웠습니다. 호방하고 의젓하신 자질을 가지
고 계셨으며, 영특하고 순수한 모습을 지녔습니다. 소자가 문하에 들어간 것
은 많은 사람들보다 나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주의 수령으로 있던 4년동안
곡진하신 가르침을 배불리 받았습니다.51)
김중청은 한강의 만년 제자이면서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은 제자였다. 한강 선생
이 65살 안동대도호부사에 부임하였을 때 42살의 김중청과 처음 만났다. 그 이후
신안현감으로 근무할 때는 고향에 오가면서 반드시 사수에 들러 한강을 뵙고 갔다.
이에 대해 金是瓚은 공자 문하의 자유와 자로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52)
2) 김중청의 교유 관계
김중청의 교유관계는 청년기의 경우 스승인 월천으로부터 이어지는 학맥으로부
터 많은 교유관계를 보이고 있다. 장년의 1615년 이후에는 한강 정구 및 여헌 장
현광과 그 제자들과 밀접한 교유관계를 보이고 있다. 그외에도 김중청은 회곡 권춘
란을 스승으로 모셨다.
1615년(광해군 7) 경상우도 시관으로 가면서 晦谷 權春蘭(1539~1617)을 방문
하였다.53) 회곡이 사망하자 1617년(광해군 9)에는 부친을 뵈려가는 길에 회곡을
조문하였다. 후일 용산서원에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을 때 봉안문을 올렸으며, 회곡
을 위한 상향 축문에서는 “인은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않았고 학문을 오직 도를 구
하였을 뿐이었네, 재능을 감추고 뜻을 돈독히 하였으며, 높은 지조는 잘 다듬었네”
51) 구전집 권6, 「제문」, <祭寒岡先生文>. “嗚呼 邦國欲瘁 先生病矣 道脉將墜 先生逝矣 叫閽未再 孰扶倫紀
就正無地 哀我後學 泗濱荒凉 梅園寂寞 持敬明義 平生着力 發揮分類 垂敎膚公 豪毅之資 英粹之容 已矣難覿
視天夢夢 小子及門 三千之後 宰縣四載 飽蒙諄誘”
52) 구전집 , 「跋[金是瓚]]. "晩又出新安 從遊殆無虛月 自處孔門之游路"
53) 구전집 권6, 「제문」, <祭晦谷先生文>에서 소자와 선생으로 관계를 표시하였다. “哭我小子 嗚呼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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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하였다.54)
한강 정구와 마찬가지로 旅軒 張顯光도 수시로 방문하면서 학문을 구하였다.
1615년 경상우도 경시관으로 내려가면서 방문한 후 1617년(광해군 9)과 1618년
(광해군 10)에는 수 차례 여헌을 찾아가 방문하였다. 한강과 여헌을 방문할 때는
그 제자인 金潗, 張興孝, 李潤雨, 崔晛, 李彦英,李濯 등과도 교분을 쌓았다. 1618
년(광해군 10)에는 상산의 愚伏 鄭經世를 방문하여 교분을 쌓았다. 이광정은 愚伏
鄭經世(1563~1633), 旅軒 張顯光(1554~1637), 沙溪 金長生(1548~1631), 石潭
李潤雨(1569~1634), 踈庵 任叔英(1576~1623), 溪巖 金坽(1577~1641) 등 여러
선비들이 선생을 존경하는 벗으로 여기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니 선생이 그 때에
중히 여김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고 적고 있다.55)
한편 중앙 관료로 근무할 때의 친우관계는 1614년(광해군 6) 千秋使兼謝恩使의
書狀官으로 명나라 수도 북경으로 갈 때 조정의 친우들이 적어 준 詩章을 묶은 책
인 부경별장 을 통해 볼 수 있다. 처음에는 2책으로 粧帖하였다가 나중에 3권으
로 分冊하였다.56) 후일 문집에 수록하면서 23명의 시를 수록하면서 <燕行贈遺>로
축약하였다. 이에는 친구인 任叔英의 서문과 말미에 1788년(정조 10) 李光庭이 쓴
跋文이 추가되어 있다.57)
지역에서 교분이 있는 이로는 대표적으로 외천의 영천이씨를 들 수 있다. 특히
봉화현감 임혁과 김중청 집안간의 갈등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1608년 외천의
李蒔, 李苙 등이 김중청을 구하기 위해 감사에게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58) 다만
이 때 가까운 고을의 사람들의 이름까지 모두 적어 연명하여 올렸는데 허락받지
않을 사람의 명단도 있어서 지역에서 문제가 되었다.59) 외천의 6형제 가운데 막내
인 李慕는 선생의 문인이면서도 사위가 되었다.
54) 구전집 권6, 「제문」, <龍山書院晦谷先生奉安文 賜額周溪>. <晦谷先生常享祝文>.
55) 구전집 , <苟全先生文集序[李光庭]>. “當時愚伏旅軒沙溪石潭踈庵溪巖諸賢 無不推先生爲畏友 則先生之見重
於一時可知也”
56) 부경별장 , 한국국학진흥원, 2004. 1904년 김형상이 쓴 제첩후기에 따르면 김형상은 구전의 후손인 金洛
鎭의 요청에 따라 상하 2질의 책을 3책으로 분책하여 장정하였다.
57) 구전집 , 「부록」, <燕行贈遺>. 임숙영의 서문과 이광정의 발문을 제외한 <詩章>조에 沈喜壽, 李好閔, 柳
根, 李時發, 金尙容, 金尙憲, 金涌, 車天輅, 李舜民, 李埈, 曺友仁, 金坽, 金奉祖, 李景義, 李明漢, 權來, 金繼
宗, 金光爀, 金是柱, 李弘重, 李之馨, 朴守緖이 수록되어 있다. 문집으로 간행하면서 부경별장 의 내용을
축약하였다.
58) 계암일록 , <1608. 4. 15>.
59) 계암일록 , <1608. 8. 5>. <1608. 8. 11>.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93
아래 표에서 볼 수 있듯이 김중청의 교유권은 중앙 정계의 요로에 있던 인물에
서부터 지역에 교분이 있던 인물과 문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다. 임
숙영은 서문에서 김중청을 알고 지낸지 20년이 되었는데 영남지방에서 배출된 인
물 가운데 문장과 행실에게 김중청보다 나은 이가 없다고 칭송하고 있다.60) 김중
청은 이 시첩에 대해 “그 내용을 보니 간혹 옹색한 나에게 장황하게 걱정할 것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힘쓰게 하고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다. 인도하여 나아가게 하고 부끄럽게 여겨 격려하는 것이 나를 힘쓰게 하고 경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었이겠는가”61)고 적어 중국으로의 사은 기간 동안 자
신의 마음을 경계하는 징표로 삼고자 하였다.
<표-1> 부경별장 을 통해 본 교유권
60) 구전집 , 「부록」, <燕行贈遺>. [序(任叔英)].
61) 구전집 권5, 「잡저」, 「跋」, <書赴京別章帖後>. “第見其中 或有張皇於拙者 至加以不虞之辭 是亦勉而戒耳
引而進之 耻而激之 非勉戒余而何”
이름 본관 자 호 제향처 비고
沈喜壽靑松伯懼一松상주 봉암서원 좌의정, 시호 文貞
李好閔延安孝彦五峯지례 도동서원 좌찬성, 시호 文僖,
柳根晋州晦夫西坰괴산 화암서원 좌천성, 시호 文靖
李時發慶州養久碧梧형조판서, 시호 忠翼
趙存世楊州善繼聽湖공조참판
朴漉潘南子澄蟠谷의금부도사
金緻安東士精南峰, 深谷경상도관찰산
金尙憲安東叔度淸陰양주 석실서원 외 영의정, 시호 文正
金涌義城道源雲川안동 덕봉서원 외 병조참의
車天輅延安復元五山봉상시 첨정
裵大維金海子張慕亭병조참의
李舜民全州皞如淸狂, 伊峰울산부사
柳活興陽源叔泰宇이조정랑
成以敏昌寧退甫三古堂공조정랑
李埈興陽叔平蒼石상주 옥성서원 외 대사간
朴鼎吉密陽養而凝川병조참판
宋光啓冶爐君沃사정
邊應垣九江
金頊安東汝愼
曺友仁昌寧汝益峴南, 梅湖, 頤齋
琴愷奉化彦康望月軒헌납
李尙伋星州思彦習齋증 이조판서, 시호 忠剛
李景稷全州尙古石門강화유수, 시호 孝敏
任叔英豊川茂淑疎庵부수찬
94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이름 본관 자 호 제향처 비고
楊萬古淸州道一鑑湖, 遯湖군자감정
朴守緖咸陽景承尤溪순흥 도고서원 우승지
崔挺雲
曺應休昌寧德符漢彦현감
金廷益慶州士謙得地
黃中允平海道光東溟좌부승지
金坽光山子峻溪巖증 도승지, 시호 文貞
全以性竺山性之雲溪합천군수
鄭遵海州行之이조정랑
安崇儉伯恭五芝
朴善長務安汝仁水西예안현감, 경상도사
任屹豊川卓爾龍潭동몽교관
金尙容安東景擇仙源강화 충렬사 외 이조판서, 시호 文忠
吳汝橃高敞景虛敬菴대구도호부사
金是柱義城以立開湖병부랑
金奉祖豊山孝伯鶴湖예조정랑
辛翰龍鷲城鱗伯
李景仁延安
未詳
李慕永川孝思益陽, 小白
金瀅相光山1904년 3책 분책 후 발문
金光爀安東晦卿東林광주목사
李景義延安子方晩沙이조참판
李明漢延安天章白洲대제학, 시호 文靖
權點鐵崖布衣
朴檜茂潘南仲植六友堂영천 산천서원 의금부도사
權주(黑+主)
金繼宗孝叔
安悟
權來安東樂而 眞休子, 石泉
吳奫景泓思巖
孫祐月城人以吉
李之馨眞城汝薰적성현감
李弘重眞城龜巖
裴尙益大丘益哉癡巖천곡 봉계서원 진주판관
徐兢
朴惟一
琴援
權在璣醴泉
權在璿醴泉
李榮國永川
未詳
未詳
李慕永川孝思益陽, 小白
李慕永川孝思益陽, 小白
金中淸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95
5. 김중청의 활동과 월천계 내 위상
1) 김중청의 활동
김중청은 월천의 문집 편집과 예조좌랑 재직시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 신안현감
재직시 창해서원 종향에서는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특히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에는 서울에서 예조에 근무하면서 정문을 올린다거나 서울에 관직에 있는 사
람들의 서명을 받아 올리거나 월천의 종향에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는 주장에 논
박하는 등62) 논의의 진행과정에서 북인의 집권 당로자들과 연락을 취하면서 일의
성사를 주도하였던 것도 사실이다.63) 김령은 김중청을 영남 상도 출신으로 시류에
영합한 자로 거명할 정도였다.64) 또한 북인정권에 밀착되었던 이덕홍의 자제들과
는 혼인 관계로 맺어지고 또한 중앙에 있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나 북인정권 자체는 김중청은 그렇게 지지하는 입장은 아니었다. 당시 예안
지역에서 대북정권과 밀접하게 관련된 이들은 외천의 영천이씨, 온계의 고창오씨,
서촌의 덕산윤씨 등이었다.65) 오히려 영천이씨의 6형제 내에서도 대북정권에 한
걸음 물러선 이도 있다. 김중청은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 과정에서는 친북인계 입장
에 강하였으나 이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는 대북정권에 그렇게 밀착된 모습을 보이
지 않았다. 오히려 차츰 부포의 봉화금씨, 한곡의 예안김씨 등과 함께 차츰 북인정
권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615년 정언으로 있으면서 북인정권의 요청을 거부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직
62) 안동의 鄭士信이 조목의 배향에 대해 반대하는 여론을 조성하였다는 혐의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았다( 광해
군일기 권74, 광해군 6년 1월 정사[4일]). 김령은 이 논박도 실은 김중청의 힘이었다고 보고 있다( 계암
일록 , <1614. 2. 4>).
63) 대북정권의 월천 종향에 대한 지원과 예안내 대북세력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이상현, 「월천 조목의 도산서원 종향논의」, 북악사론 8, 2001.
박현순, 16-17세기 예안현 사족사회 연구 ,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5.
김성우, 「광해군대 정치 지형의 변동과 경상도 예안 사족들의 대응」, 역사학보 , 226, 2015.
64) 계암일록 , <1615. 7. 12>, “是時嶺南上道之爲時輩者 淸愷埁及草頭輩 乃其魁 又有朴守緖群從 爲之表裡
緖爲禮郞 得拜淸職 如安聃壽辛義立金友益輩 不足道也”
65) 인조반정 후 지역사회에서 毁家黜鄕되거나 削籍된 이들은 지역 단위에서 가장 적극적인 대북 지지세력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암일록 ).
3월 28일 榮川 : 李茳, 李藏, 李榮久, 琴大雅, 李埁, 李光啓, 李光烈[吳汝穩, 金汝燁]
3월 29일 安東
4월 3일 禮安 : 孫祐[吳奫, 吳汝杠, 尹東昌, 尹東老, 李弘益]
4월 5일 豊基 : 徐兟, 南自新, 李慕
4월 6일 온계 : 徐兢
96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하였다. 1616년 신안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차츰 북인과는 결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66) 1616년(광해군 8) 1월 25일 합천의 정인홍을 만나러 갔는데 정인홍에게
요즘 월천 문하에 스승을 등 져야 사귈 수 있다고 대감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이는 문인들에게 선사를 배반하라는 말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저는 학술도 모
르는 귀머거리나 장님과 같아도 청천백일을 청천백일이라고 하는 것은 안다고 하
면서 저는 월천을 독실히 믿고 있는데 어찌 선사를 배반할 수 있겠는가고 항의하
였다.67)
예안에서의 친우이었던 김령도 종향 건이나 창해서원 건립 건, 그리고 광해군대
각급 재직시에는 김중청을 비난하였으나68) 인조 반정 후 봉화로 귀향한 후로는 김
중청과의 직접적인 관계가 크게 악화되지 않았으며, 김령과 김중청의 아들과 좋은
관계를 지낼 뿐만 아니라 김령의 자제가 김중청의 아들 김주우의 집에 출입하는
등 인조반정 후에는 김중청과 좋은 관계를 이끌고 가고 있다.
김중청이 심한 정신착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가라
는 안타까운 마음을 보이고 있으며,69) 김중청이 죽고나서 그의 집을 수색하면서
이복동생이던 金得淸의 흉한 일이 드러나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일을 겪었는데70)
이에 대해서도 김령은 안타까운 심정을 말하고 이 일을 현명하게 처리한 봉화 수
령을 칭찬하고 있다.71)
김중청은 월천의 종향과 추숭 작업을 강력히 추진하는 과정에서 중앙정계에 있
으면서 북인의 힘을 빌리는 등 친북인적 자세를 취하였으나 이 일이 마무리 된
이후에는 차츰 북인과는 관계가 소원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인조 반정 이후
고향에 있으면서는 사이 벌어졌던 예안의 사족과의 갈등이 봉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김중청의 월천계 내 위상
문집에는 23분이 쓴 만사와 제자들이 만든 제문이 있다. 김중청 사후 李曾孝,
66) 이 시기의 일기 기록으로 강원일록 이 남아 있다.
67) 강원일록 , <1616. 1. 25>.
68) 예안 사족 사회의 위계질서를 북인정권에 대한 태도와 결부한 김성우의 연구에서는 친북인 강경파로 간주
하고 있다(김성우, 앞의 논문, 139쪽).
69) 계암일록 , <1628. 11. 5>.
70) 인조실록 권23, 인조 8년 9월 계묘(27).
71) 계암일록 , <1630. 3. 15>.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97
南亨會, 朴燉, 裴淑全 등 문인들이 공동으로 올린 제문에서는 스승인 김중청의 일
생을 간략히 소개한 다음 다음과 같이 소회를 적고 있다.
뜻밖에도 병에 걸리셔서 마침내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시골
에서는 모범이 될 만한 분이 없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자문 역할을 할 분을
잃게 되엇다. 이런 일은 사람이 주관하는가 귀신이 주관하는 가. 하늘에 물어
봐도 알 수가 없다. 아! 슬프도다, 우리 무리의 소자들은 다행히도 선생의 강
당에 의탁하였는데 우리를 어리석다고 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가르치고 지도
하여 학문의 방향을 알게 하였으니, 이루어지고 만들어진 은혜는 의리가 어버
이와 같다. 그런데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학업을 어디다 질정을 하겠습
니까? 서로 쳐다보면 울음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만 줄줄 흘러내립니다.72)
친구이자 사돈이기도 한 李蒔는 구전의 학문에 대해 “학문에서 연원이 있어 명
망은 동방에 알려졌다. 유림의 마루가 될 만하고, 나라의 기강을 부축할 만하다”73)
고 적고 있다.
한편 주위에 있던 친우들은 선생이 사망하자 만사를 작성하여 보내주었다. 만사
작성자인 金尙容, 朴鼎善, 李好閔, 朴東善, 裴尙益, 都汝兪, 權益昌, 睦長欽, 金光炫,
申達道, 權宏, 金坽, 柳袗, 朴漉, 睦性善, 黃㦿, 高仁繼, 金光爀, 柳碩, 柳穎, 金得硏,
金烋, 金瑮 등은 모두 당대 퇴계학파내 각 계열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 만사에서는 김중청의 학적 위상과 학문적 위상을 보여준다.
만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김상용은 “일가 중에 다행하게도 공같이 어진 분이 있
었네”고 적어 일족의식을 보여준다. 신달도는 “근원을 궁구하며 멀리 이락까지 거
슬러 올라가고, 푼과 치를 예서에서 깊이 비교하였다 상대방도 장부이고 나도 장
부라 여기며 선진의 자취를 따랐지만 힘이 마음대로 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함이
여, 세월이 빨리 지나감이 애석하도다”고 학문을 같이 한 동지임을 밝히고 있다.
김율은 “월천 문하에서 함께 학업을 닦을 제, 당시 재주와 학문은 공을 가장 칭송
했었지. 문장은 여사로 부질없이 무리에게 친해졌고, 도의는 감화를 이루어 뭇 어
72) 구전집 , 「부록」, <祭文[門人李曾孝南亨會朴燉裴淑全等] “何意一疾 竟至難醫 鄕無矜式 國失蓍龜 人耶鬼耶
問天莫知 嗚呼痛哉 吾儕小子 幸托鱣堂 不我悾悾 誘我知方 作成之恩 義同爺孃 遽隔幽明 質業於何 相向失聲
涕淚傾河”
73) 구전집 「부록」, <祭文[李蒔 善迂堂]>. “早得依歸 溪月波光 學有淵源 名擅東方 儒可爲宗 國可扶綱”
98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리석은 이를 깨우치게 하였네”라고 월천 문하에서 공의 재주와 학문이 가장 뛰어
났음을 적고 있다.74)
연보와 행장에서도 선생의 문장과 경술은 동류75) 가운데 가장 으뜸이었다고 적
고 있다.
선생의 文章과 經術은 동류들에게 있어 으뜸이었다. 본래부터 세상을 다스
리고 백성을 구제할 뜻을 지녔지만, 혼탁한 조장을 만나 능력을 제대로 발휘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인조가 반정한 뒤에는 또 유언비어에 의해 여러 차례
모함당하는 바가 되었다. 선생이 효상을 관찰하고 점을 쳐보고는 전원에서 여
유있는 생활을 하며 생도들을 가르치는 것을 즐기며 근심을 잊고 있었다. 愚
伏 鄭經世는 매번 선생과 함께 經筵에 오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겼으며,
沙溪 金長生은 매번 선생의 禮學에 미치지 못한다고 탄복하였다.76)
당시 사우가 월천 선생 문하의 선비들을 품평하면서 번번이 제일 먼저 공
을 꼽았다.77)
유성룡계인 오천의 김령은 비록 종향 논의과정에서 김중청을 비판하는 관점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월천계의 적지 않은 후학들이 월천의 도통을 구전 김중청이 잇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립의 무리들이 퇴계 선생의 도통이 월천에게 전해졌고, 월천은 중청에서
전했다는 한다. 대개 그 전에도 이미 이런 말이 있었는데 오늘의 이 소행은
이 같은 생각에서 나온 것에 불과하다. 심하도다. 소인배의 허물이여!78)
74) 구전집 「부록」, <만사>. “同宗何幸有公賢(金尙容)”, “竆源遠泝於伊洛 分寸深較於禮書 彼丈夫我丈夫 追武
前脩 懼力不任兮 惜居諸(申達道)”, “共立川門雪白中 當時才學最稱公 文章餘事空流輩 道義薰成擊羣蒙(金瑮)”
75) 김형수는 광산김씨 후조당 소장 月川先生門人錄 과 權是中, 櫟亭逸稿 , 「附錄」, <同門錄>을 종합하여 32
명을 동문제자로 정리하였다(김형수, 「17세기 초 월천학단과 예안지역사회의 재건」, 민족문화연구 65,
2014, 299~304쪽).
76) 구전집 , 「연보」, <九年己巳 先生六十四歲 六月十三日>. “先生文章經術 俱爲儕流所先 雅有經濟之志 遭遇
昏朝 不得有所展布 而改玉之後 又爲飛語所中 先生觀象玩占 優游田舍 敎授生徒 樂而忘憂 鄭文肅公每歎經席
不得與先生同升 金沙溪長生常服先生禮學不可及云”
구전집 , 「부록 , <行狀[李光庭]>. “鄭文莊公每恨經席不與公同登 而金沙溪每服公論說禮經而相疑難 以爲不
可及云”
77) 구전집 , 「跋[金是瓚]」. “當時士友月朝月門士 輒先僂指公”
78) 계암일록 , <1612. 2. 13>. “况李苙輩 以先生道統 傳之月川 月川傳之中淸 盖自前日 已有此言 今之所爲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99
들으니 봉화의 서원에서 9월 5일 퇴계 선생을 봉안하고 월천을 종사한다고
한다. 이는 모두 김중청이 농간을 부린 것이다. 원장 금학고가 통문을 내어 각
읍의 향교와 서원에 경제적 도움을 청하였다고 하니 더욱 무리한 짓이다.79)
퇴계를 모신 서원은 영천, 안동, 예안 세 고을로서 옛날부터 본디 있었던 것
이다. 그 밖에 뒤따라 세운 것들은 혹 선생과 평소에 인인이 있었거나 혹은 흠
모하여 정성을 다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창해서원은 김중청의 본 뜻
이 선생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스승인 월천에게 있을 뿐이다. 그런데 사
람들이 마음으로 승복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선생을 빙자하지만, 월천을 귀중하
게 여기는 것이다. 월천이 이름은 비록 종사라고 하지만 사실은 주벽이다.80)
비판적 언급이지만 이를 통해 보면 월천계나 서애계가 모두 공통적으로 월천
의 도통을 김중청이 잇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의 활동에서
도 김중청은 월천을 가까이 모시고 학문을 이어갔으며, 영지산과 청량산에 직접
모시고 다녀 왔다. 예조좌랑으로 재직시 월천의 도산서원 종향을 주도하였으며,
봉화에 퇴계와 월천을 모시는 창해서원의 설립을 주도한 명실상부한 월천계의
적전이었다.
한편 말년 구미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활동으로 「구전선생문인록」81)에서 보이듯
이 월천의 제자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의 문인을 거느리고 있다. 제자들의 분포를 보
면 봉성 금씨, 영천 이씨, 반남 박씨, 영양 남씨, 안동 권씨, 원주 변씨, 야성 송씨
등 봉화 특정 집안의 인물들이 일괄적으로 문인록에 등재된 경우가 다수이다. 이들
의 거주지는 대체로 봉화, 영주, 예안, 안동 등 경상도 동북부 지역에서 분포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간재 李德弘의 육 형제인 蒔- 苙- 茳- 茂- 蒧- 慕가 모두 김
중청에게서 학문에 입문하였다.
不過如此而已 甚矣小人之尤也”
79) 계암일록 , <1617. 8. 17>. “聞奉化書院 將以九月初五 奉安退溪先生 從祀月川 皆金中淸之所弄也 院長琴
學古 通文乞貨物於各邑鄕校書院 尤無理”
80) 계암일록 , <1617. 9. 8>. “夫以先生書院 榮安禮三邑 自昔固有 而其他追建者 或于先生 有平日之緣 或出
於欽慕而致誠 至若昌海 中淸本意不在先生 只在於其師月川 而慮人心不服 借先生憑藉 而歸重月川 月川雖名
從祀 其實主也”
81) 구전선생문인록 은 별도의 책자로 고서상에서 판매된 적이 있다. 동일한 내용을 적은 것이 국역 구전선
생문집 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다.
100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표-3> 구전선생문인록
이름 자 본관 거주 이력 비고
琴以古靜如鳳城生隆慶辛未, 生員, 僉知 應時 子先生 妹弟
李光洽(永川)
李榮係(重吉) (永川) 說書 笠 子
朴煒明甫潘南入格
南錫圭英陽入格
權欖伯涉入格
權慶蘭子聞安東奉化生壬午, 入格
琴援道濟鳳城生萬曆壬午, 生員
金益淸而敬安東生萬曆壬午, 勵節校尉
李時蘤
金世鳴善叔英陽奉事 介臣 子, 生萬曆戊午, 入格
李大培延安入格
李菖永川
琴尙古賁如鳳城生萬曆癸酉, 將仕郞
權檢入格
權在璿醴泉入格
權在璣醴泉入格
朴燧陽甫潘南通訓
琴友古穆如鳳城生萬曆甲申
琴純古樸如鳳城友古 弟, 生萬曆丁亥, 生員
黃有文汝郁平海禮安入格
黃有章汝貞/時發平海有弟, 入格
琴大有鳳城僉知
琴大遂亨伯鳳城生萬曆丙子, 生員
琴信古孚如鳳城生萬曆丙子, 訓導
朴燉晦而/晦甫潘南奉化號 梅巖, 生壬辰, 生員
李振南偉仲花山奉化生壬辰, 僉知
琴是修身之鳳城以古 子, 生萬曆壬辰, 虞侯
宋大健冶城榮川訥翁 碩忠 玄孫, 同知
宋大德冶城榮川號 屛巖, 副護軍 福綏 孫, 贈左承旨
金執+金宣城榮川知事
李時馣聞若原州
號 晩聞, 生員 澤 子, 幼學 東溟 金世濂 後學 先生, 先生
孫壻, 文都事
李光庭 祖父
李時謙全州安東
邊有翰原州安東號 鶴皐, 副正 鑰 子, 癸巳 生
李蒧師聖永川榮川號 太白/天遊子, 艮齋 德弘 子, 翰林
權赫安東松巢 孫, 入格
尹希賢國輔襄陽安東
李曾孝學可眞城安東號 磨峯
權喆安東赫 弟
權楫
金淮生員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101
* 구전선생문인록 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 )와 비고는 필자가 보충한 것이다.
이름 자 본관 거주 이력 비고
金鍌汝精宣城
號 孤山/梅鶴, 生萬曆丙辰, 孝誠出天, 天啓乙丑別試及第,
興海郡守
李埁羽溪順興濟用監正 孝鱗 子, 文科, 郡守
琴是理(之性) 鳳城是修 弟, 生萬曆甲申
趙任道致遠/德勇咸安號 澗松, 立巖 埴 子, 生萬曆乙酉, 師傅, 佐郞
金柱明光夏安東勵節校尉 益淸 子, 生戊申, 享年八十五, 護軍
琴是胤之嗣/似之鳳城是理 弟, 生萬曆己亥
邊銓字平原州奉化
權鈞
權和重安東慶蘭 子, 入格
申弘望望久鵝洲號 孤松, 贈吏曹參判 之悌 子, 生萬曆庚子, 同副承旨
南亨會貳元英陽號 塔窩, 錫圭 子, 生萬曆丁未, 生員
琴世謙撝吉鳳城生員 援 子, 生萬曆丁未, 進士
琴是律子聲鳳城尙古 子, (生萬曆庚子), 入格
琴是呂子行鳳城判官 胤古 子, 生萬曆辛丑
趙咸世(五宜軒)
趙崇周全州
權鎚
柳尙馦全州
李鍝益精延安大培 子, 生員
柳尙馣致遠全州生己酉
柳尙時時裁全州生己酉
南亨久英陽亨會 弟, 入格
張徽
柳亨立(時遇) 全州生員
權霂安東安東冲齋 權橃 后, 參奉
洪鑽南陽
柳貞立全州亨立 弟, 文科, 縣監
琴亨達叔夏鳳城生萬曆丙辰
琴致謙光吉鳳城是胤 子, 生萬曆丙辰 進士
李慕孝思永川艮齋 德弘 子, 先生 婿, 修撰
李榮復永川入格李命弘 - 蒙 子
裵淑全興海翰林 龍吉 子
琴尙協汝成鳳城見龍 子, 生萬曆丙申, 壽階 嘉善, 護軍
李榮國 永川入格李福弘 - 衡 자
琴大雅正始鳳城生丁巳, 生員
琴益謙子受鳳城司宰監正 夢祥 子, 生萬曆己丑, 入格先生 孫壻
琴大振鳳城入格
李愼承可述永川進士
權尙載德汝(安東) 進士
南孝恪入格
宋大年冶城榮川生員
鄭承先東萊入格
102 ◂2017년 한국학 학술대회 보백당 김계행의 청렴정신과 그 전개
김중청에 대한 추모사업으로는 1669년(헌종 10)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선생이
강학하던 鳳城의 槃隱洞 書齋 아래에 있는 골짜기 松楸 밑에 槃泉精舍를 건립하였
다. 廟宇 3間, 講堂 8間이었다. 선생이 북경에 갔을 때 공자의 화상을 구해왔는데
1614년 서재에 봉안하였다가 1669년 정사가 완성되자 강당의 북쪽 벽에다 옮겨
봉안하였다. 1677년에는 사림에서 선생의 위판을 반천정사에 봉안하였다. 1787년
지역 사림들이 중심이 되어 서원 승원운동이 일어나 榮川의 伊山書院과 順興의 鄕
校 명의로 인근 각 서원으로 陞院 통문을 돌렸다. 그 후로도 승원을 위한 지역에서
거듭된 요청에 의해 1831(순조 31) 봄 마침내 槃泉書院을 설립하였다. 이 때 각
문중과 서원에서는 서원 건립에 따른 경비를 위해 부조금을 냈었다. 그러나 1870
년(고종7)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반천서원도 毁撤되었다.82) 그러나 선생의 후
손들과 지방 유림들이 儒稧를 결성하여 세의를 돈독히 하고 선생의 유지를 받들었
다.83)
2004년 봉화 유림들이 선현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송천서원, 반천서원, 백록
리사 등 3개 원사를 한 곳에 통합 복원하고 그 이름을 松麓書院으로 명명하기를
결의하였다. 이듬해 착공하여 2007년 9월 20일(목) 개원하였는데 구전 김중청 등
지역 출신 10현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김중청의 글로 赴京別章 3책과 講院日錄 1책이 남아 있다. 赴京別章 은 김
중청이 1614년(광해군 6) 천추사겸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중국 북경에 가게되자 조
야의 지인들이 친히 시를 적어 전별을 표시하였는데 이때 모은 시들을 시첩으로
만든 것이다. 원래는 상하 2첩으로 장정되어 있었으나 후일 상, 중, 하 3책으로 새
로 장정하였다. 일부 내용이 문집의 연행유증 에 수록되어 있으나 축약되기 전의
원본이다.
講院日錄 은 1615년(광해군 7) 3월 10일 세자시강원 문학에 임명되면서부터
이듬해 신안 현감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10월 30일까지의 일기다. 김중청의 정치적
입장에 대한 내밀한 생각이 드러나 김중청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이다.
한편 김중청의 시문은 문인 塔窩 南亨會이 김중청의 손자 金楊烈과 함께 편집하
여 10여권으로 만들어 懶隱 李東標(1644~1700)에게 교정을 부탁하였다. 이동표의
82) 槃泉書院陞號時實記 .
83) 槃泉稧帖 , <序[權相文]>( 국역 구전선생문집 「부록」 소수).
박인호 _ 17세기초 퇴계학파의 동향과 구전 김중청의 활동▸103
사망으로 작업이 중지되었는데 김중청의 外玄孫인 訥隱 李光庭(1674~1756)이
1744년 후손인 金爾銘, 5대손 金泰運 등과 함께 다시 수정하고 행장과 연보 등을
첨부하여 6권으로 편차하였다. 그럼에도 인쇄에 넘기지 못하다가 후손 金榮宅 등
이 유고를 바탕으로 金是瓚의 校正을 거쳐 1829년 金鼎均(1782~1847)에게 서문
을 받아 1831년 경 목활자본 문집을 간행하였다. 인쇄본은 原集 6卷, 年譜, 附錄,
別集[朝天錄] 등, 합 4책으로 되어 있다.
6. 맺음말
(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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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樂民(장달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