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진 vs 나훈아, 나훈아 vs 남진 라이벌전, Round 3. ‘라이벌전의 백미’ 1972년, 시민회관에서의 엇갈린 승부
국내 최대의 라이벌 구도, ‘남진 대 나훈아, 나훈아 대 남진의 라이벌 대결’은 결과적으로 한국가요를 발전시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 라이벌전의 명승부가 여전히 세간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이다. 우리 가요사에 영원히 남을 명승부, 제3라운드. 1972년 시민회관을 무대로 펼쳐진 대결은 그중 백미였다. 시민회관 리사이틀 관객동원 기록 경쟁, 나훈아 시민회관 피습사건, 남진의 ‘mbc 가수왕’ 타이틀을 마지막으로 화염에 휩싸이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이곳. 당시 시민회관을 배경으로 펼쳐진 명승부. 이번 호는 당시 나훈아의 입장을 중심으로 재조명해본다. 글 l 박성서 (대중음악평론가, 저널리스트) 옛 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에서 ‘남진 데뷔45주년 기념공연’ 막 올려 오는 3월 5일, 남진은 자신의 데뷔45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펼친다. 이를 시작으로 전국 투어에도 나설 예정이다. 출연료를 둘러싼 자존심 싸움, 쇼 단체 나훈아 보이콧 사건 지난 호에서도 거론했듯 시민회관에서의 리사이틀 관객동원 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다시 1972년으로 돌아가 보자. 특히 나훈아는 다섯 가지의 다양하고 화려한 춤을 선보임과 동시에 본인이 직접 기획, 연출까지 맡은 단막극 ‘갑돌이와 갑순이’를 무대에 올렸다. 남진 또한 이에 질세라 한 달 뒤 펼친 두 번 째 ‘남진리사이틀’에서 ‘비빔밥 춘향전’을 무대에 올리며 응수했다. 이도령 역은 본인이 맡았다. 결과적으로 이 공연은 통기타음악과 록그룹사운드 음악에 밀려 급격히 퇴조하던 트로트의 부활을 알리며 붐을 일으키는 기폭제로 작용했다. 이러한 배경에는 새롭게 등장한, 속칭 ‘오빠부대’의 출현도 한몫했다. 부작용도 잇달았다. 72년 2월21일, 경찰은 ‘나훈아의 꿈’ 리사이틀에 10대 소녀들의 소란을 문제 삼아 행사를 주관한 프린스쇼 대표(단장 노병욱)를 입건했다. 또한 일부 언론들도 이 ‘오빠부대’를 ‘기성부대(奇聲部隊)’라고 몰아붙이며 ‘인기는 기성(奇聲)에 의해 만들어 지는가’라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10대 소녀들을 초대권으로 동원한 인기전략의 자작극이라는 의혹까지 제기했다. 관객몰이에 대성공을 거둔 이 리사이틀은 곧바로 출연료를 둘러싼 자존심 대결로 이어졌다. 당시에는 24개 쇼단체장이 모인 연예단장협회(단장 김영호) 측이 정한 ‘등급별 가수 출연료 리스트’가 있었다. 이무렵 연예단장협회 측은 ‘쇼 흥행의 극심한 불황을 이유로 가수들 출연료 인하’를 선언했다. 동시에 가수들의 출연료를 하향 조정해 발표했는데 나훈아의 경우 1일 출연료를 3만원, 하춘화는 2만원으로 발표했다. 이에 하춘화, 그리고 나훈아 는 즉각 반발했다. ‘출연료는 가수의 자존심’임을 강조하며 ‘어떤 근거에 의해 일방적으로 정하느냐’며 이의를 제기했고 이에 연예단장협회는 나훈아, 하춘화를 자신들의 쇼에 출연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다. 이를테면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결국 쇼 단체장 모임인 연예단장협회와 가수들의 권익단체인 한국연예협회 가수위원회(위원장 박일호)의 논쟁으로 번졌다. 가수위원회 측은 ‘가수의 출연료는 가수마다의 인기에 비례하는 것인데 어떻게 친목단체가 일괄 책정할 수 있느냐’며 오히려 단장협회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하한선이지, 상한선이 아니다’며 반발했다. 횡포에 가까운 담합의 부당함을 고치지 않으면 가수 전체가 쇼를 보이콧하겠다며 초강수로 맞대응에 나섰다. 결국 이러한 단체 간의 마찰 끝에 결국 4월, 나훈아와 하춘화는 출연료 인상에 합의를 했지만 미묘한 기류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이 같은 등급 결정을 한 연예단장협회장이 바로 남진리사이틀을 기획했던 AAA쇼프로덕션의 단장이었다. 그 때문에 나훈아가 등급에 대해 가진 불만의 계기는 남진과의 격차였다는 뒷말이 더욱 무성했다. 출연료 등급에 이은 전속금액 자존심 경쟁 72년 2월 나훈아는 전속기간 만료와 함께 데뷔 때부터 몸담았던 오아시스를 떠나 지구로 말을 바꿔 탄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히트메이커, 작곡가 박춘석 사단에 합류한다. 바로 남진이 버티고 있는 캠프로 말이다. 이렇게 결심을 굳힌 결정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나훈아 또한 고민은 없었을까. “당시 나훈아씨는 2월 전속기간 만료를 앞두고 사장과 수차례 면담을 했어요. 오아시스에 계속 있고 싶어 했고 그러기 위해서 자신의 인기에 걸 맞는 전속금액을 다시 책정해달라고 요구했지요. 그러나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은 이 제안을 들어주지 않았어요. 만약에 이 협상테이블에서 나훈아씨가 지구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고 언급했거나 최소한 힌트만 주었어도 상황은 달라졌겠죠. 그러나 나훈아는 라이벌 지구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자신의 몸값을 올려 받고 싶어 하지 않았죠. 본인도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만큼 손사장의 자존심도 지켜주고 싶었겠지요. 그게 나훈아예요.” 당시 레코드업계의 양대 산맥인 지구와 오아시스의 자존심 대결, 이 메이저음반사 간의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그 파워게임에 얽힌 아이러니한 일화가 많다. 그중 나훈아의 출세작 ‘사랑은 눈물의 씨앗’에 관한 일화 한 토막. 이 노래는 처음 발표 당시 손석 작사, 유용현 작곡으로 음반에 표기되었다. 손석은 오아시스 손진석 사장의 예명이고 유용현은 유현석 전무의 예명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남국인 작사, 김영광 작곡이다. 이 둘은 당시 모두 지구 전속작가였다. 그 때문에 경쟁사 음반에 자신의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두 인물 모두 ‘지구 대 오아시스, 나훈아 대 남진의 경쟁 구도’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김영광은 무명의 남진을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울려고 내가 왔나’의 작곡가이자 나훈아의 출세작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작곡한 인물. 나훈아 또한 매우 아끼는 곡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아줌마들의 절대 팬 층을 거느린 나훈아는 늘 정치인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를 정치에 입문시키려고 정치인들이 제의해올 때마다 그가 던지는 말은 한결같다. “그럼 사랑은 눈물의 씨앗은 누가 부르라꼬?”다. 이러한 일화까지 회자될 정도로 이 노래를 자신의 대표곡으로 여긴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작사한 남국인은 또 어떤가. 그는 이후 남진에게 72년 최대 히트곡 ‘임과 함께’를 주어 ‘MBC 가수왕’ 트로피를 안겨준 당사자다. 남진과 나훈아, 그리고 나훈아와 남진에게 있어 이 둘은 또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들이다. 이 둘에 관련한 일화는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한다. ‘피로 물든 휴일’, 나훈아 시민회관 피습사건 6월 4일, 가요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른바 ‘나훈아 시민회관 피습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나훈아는 시민회관의 ‘쇼 스타 페스티벌’ 무대에 출연 중이었다. 사건은 ‘사랑은 눈물의 씨앗’에 이어 ‘물레방아 도는데’를 막 부르는 도중에 벌어졌다. 한 건장한 사내가 무대로 뛰어올랐다. 나훈아는 악수를 청하러온 줄 알고 오른손에 잡고 있던 마이크를 왼손으로 옮기며 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괴한이 깨진 사이다병을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이 사고로 나훈아는 얼굴을 72바늘이나 꿰매야 하는 상처를 입었다. 다음날 ‘피로 물든 휴일무대’라는 섬뜩한 제목의 기사(일간스포츠 6월5일 자)‘에서 현장에서 잡힌 범인은 ‘인기연예인의 피를 보고 싶었고 그래서 유명해지고 싶었다.’며 순순히 범행동기를 자백했다고 보도했다. 그럼에도 세간에는 온갖 추측이 나돌았다. 배후가 있다,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다, 그 자신이 주구의 팬이라더라... 등등. 남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의해 ‘아니면 말고’식의 ‘카더라통신’이 난무했다. 때문에 골목의 꼬마들까지 남진, 나훈아라는 이름을 알게 될 정도였다. 끼리끼리 모이면 누가 더 나은지, 누구 노래를 더 좋아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건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이 일로 인해 둘 간의 라이벌전은 일거수일투족, 세간에 화제를 모았다. 정작 피해자는 나훈아였지만 남진 또한 그 못지않은 피해자였다. 둘 다 힘든 순간이자 위기였다. 나훈아는 사고 12일 만인 6월 16일, 다시 무대에 선다. TBC 라디오 공개방송을 통해서였다. 당시 나훈아는 마취 없이 꿰매야 상처가 빨리 아문다며 마취 없이 고통을 참았고 현재까지도 왼쪽 뺨의 흉터는 그대로 남아있다. 이 사건은 이후 모든 것이 해명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자국만큼이나 이 피습사건의 여운이 길었던 것은 온갖 추측과 유언비어가 난무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TBC 방송가요대상 대 MBC 10대가수상 이 해 8월에 들어서면서 남진이 MBC TV 화면에 첫 모습을 드러낸다. TBC와의 전속계약이 만료됨에 따라 프리로 나섰기 때문이다. MBC 문화방송은 1966년부터 '10대가수청백전'이라는 이름으로 개최, 시민회관으로부터 전국에 생중계되었다. 그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남녀 각 5명씩 10명의 가수를 선정한 뒤 그중 최고 인기가수 한 명을 ‘가수왕'으로 뽑았다. 1974년부터는 ‘10대가수가요제’로 이름을 바꿨다. TBC 방송가요대상은 아홉 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에서 후보를 1차 선정한 뒤, 문화계 170명의 투표인단과 엽서 투표에서 뽑아낸 30표를 더해 200표로 수상자를 결정했고 MBC 10대가수청백전은 시청자 인기투표 집계결과의 득표수를 70%, 방송기여도를 30%로 선정기준을 정했다. 또한 방송가요대상 규약 제1장 제1조에는 가요대상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방송가요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고 창작활동과 의욕을 불어넣어 해마다 방송가요의 풍성한 잔치를 베풀며 가요의 새로운 방향 제시와 그 터전을 마련하는데 있다.’고. 그러나 워낙 가요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던 만큼 공정성에 대한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1972년 9월과 12월, 시민회관에서 각각 열린 이 두 방송사의 시상식에서 나훈아와 남진의 각축전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참고로 이때까지 각각 활동을 시작한 이래 75년까지 둘의 수상 결과를 살펴보자. 먼저 동양방송 주최 ‘방송가요대상’. 남진이 먼저 데뷔해 스타덤에 올랐던 만큼 10대가수상에 먼저 이름을 올린다. 1969년 남진은 최고 남자가수에게 주는 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 이때 여자가수상 수상자는 이미자. 69년 이 해에 나훈아 또한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발표하며 신인상 후보에 오른다. 당시 남자신인상 후보로는 나훈아를 비롯해 조영남, 차중광, 차도균, 박건이었고 신인상은 ‘딜라일라’로 혜서처럼 등장한 조영남에게 돌아갔다. 또한 남진은 이때 이미 월남으로 떠났기 때문에 직접 수상하지는 못했다. 가수가 데뷔해 받을 수 있는 단 한 번 기회의 상인 신인상의 경우는 둘 다 받지 못했다. 남진이 데뷔하던 65년에는 조애희가, 66년에는 문주란, 67년은 차중락이 이 신인상을 가져갔다. 남자가수상의 경우는 70년엔 최희준이, 그리고 71년 들어 월남에서 돌아온 남진이 다시 차지했다. 그 뿐 아니라 MBC 또한 71년도에 남녀를 통틀어 최고인기가수에게 주는 ‘가수왕’ 수상자로 남진이 결정, 두 양대 산맥의 상을 모두 독식했다. 방송에 대한 기여도와 국가에 대한 공헌도를 인정받은 것일까, 결과적으로 나훈아는 이때까지 ‘무관의 제왕’일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투표인단의 공정성도 예외 없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방송가요대상에 이어 MBC 가수왕까지 남진이 거머쥐자 ‘의외’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특히 나훈아가 소속되어 있는 오아시스 입장에서는 ‘9월 이후 복귀한 남진이 1년을 뛴 나훈아를 제친 것은 희극’이라며 거칠게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2년, 이 해 ‘지독히도 상복이 없다’는 나훈아가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한다. 남진을 제치고 거머쥔 유일한 상이기도 했다. 이때 남자가수부문 후보는 나훈아를 비롯해 남진, 박건, 조영남, 한상일. 그리고 여자가수 후보는 김상희, 문정선, 이미자, 정훈희, 하춘화로 여자가수상은 하춘화가 차지했다. 또 하나의 반전, MBC 10대가수청백전 시상식 1972년 10월, ‘박춘석 작곡생활 20년 기념음악회’가 열렸다. 박춘석 사단의 핵심멤버로 이미자, 하춘화, 김상진, 문주란 등과 함께 축하무대에 오른 남진, 나훈아는 이어 ‘10월 유신’과 함께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되며 때맞춰 전개된 가요정화운동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가요정화운동과 함께 속칭 ‘유행가’로 불리는 대중가요는 사회분위기를 저해시키는 퇴폐문화로 내몰리며 많은 노래들이 금지곡 리스트에 올랐고 때문에 인기판도 또한 어떻게 변할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리고 한 해를 결산하는 12월, MBC 문화방송이 주최하는 '10대가수청백전' 명단이 발표되었다. 남자가수는 김상진, 나훈아, 남진, 이상열, 이용복. 여자가수는 김상희,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조미미였다. 남녀 신인상엔 김세환, 정미조. 특별상엔 김추자가 선정되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톱 여가수 이미자는 행사가 열리는 시간에 미국공연 일정이 잡혀 있어 아예 10대가수 명단에서 빠졌고 김추자가 근 1년의 공백기에도 10위권에 올라 특별상을 받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이 자리에서 남녀가수 중 최다 득표의 ‘가수왕’이 탄생될 것이다. 그러나 이 날, 행사 관계자들을 몹시 당황시켰던 사건이 예고 없이 발생했다. 바로 나훈아가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그 시각에 나훈아는 월남으로 위문공연을 떠나 퀴논의 한 부대에 있었다. 이미 행사 이틀 전에 출국한 것이다. 드디어 10대가수청백전이 화려한 조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 최다 득표를 받은 ‘가수왕’의 주인공은 남진이었다. 그리고 1972년 12월 2일 토요일 오후 8시 28분. 남진이 ‘가수왕’으로 발표되어 박수를 받고 있던 중 시민회관은 순간 화염에 휩싸였다. 모두 53명이 사망하고 76명이 중경상을 입은 이 화재는 순식간에 지하 1층, 지상 4층 중 소강당을 제외한 3,000여 평을 모두 태운 뒤 2시간여 만에 진화되었다. 당시 국내 최대공연장이었던 서울시민회관이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이자 무대와 관중석은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같은 시간, 1972년 12월 2일 토요일 오후 8시 35분. TBC에서는 ‘쇼쇼쇼’가 시작되었고 이어 나훈아가 화면에 등장했다. 월남공연을 떠나는 나훈아를 위한 특집쇼였다. 이봉조의 색소폰과 박춘석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나훈아는 자신의 히트송을 부르고 있었다. 영사운드와 히파이브도 함께 출연했다. 결국 그날 밤, 한국 대중가요 공연의 메카였던 시민회관은 그렇게 역사 뒤안길로 사라졌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 1972년 초, 일간스포츠에서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사와 MBC, 남진은 지구레코드사와 TBC가 적극 지원했다’고 보도했었다.(1972년 2월 19일 자) 그러나 1972년 그 해가 다 가기도 전에 MBC와 TBC는 이처럼 서로 엇갈린 행보를 보였다. |
|
첫댓글 위에글을 읽으면서
새로운거 ~
다시알게되서
그랬었구나
새로운거 뭘 알으셨다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