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본향을 향해 달리는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 . . . . . 주은 예화 스크랩 [대통령 부인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일생
큰 바위 추천 0 조회 10 11.07.29 15: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비서로...민간외교관으로...든든한 그림자 역할 ‘톡톡’
부잣집 셋째딸서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축첩 타파· 부부동반 문화 만들기에 애써
▲ 34년 10월 뉴욕에서의 결혼식 후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 박사 부부. 신랑은 59세, 신부는 34세였다.

유언으로 남편인 이승만 대통령이 독립운동 시절 사용하던 ‘바른 태극기’를 자신의 관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던 프란체스카 여사.

 

아들 이인수 박사(정치학)· 조혜자 부부는 “어머님께선 아버님을 뵈러 매주 금요일 국립묘지에 가시곤 했는데, 80년대 초 거기서 만난 한 오스트리아인이 어머님께 ‘오스트리아인이시죠?’했더니 대번에 ‘아니요, 난 한국인이예요’하실 정도로 한국 사랑이 끔찍하셨다”고 회상한다. 그런만큼 이들은 ‘오스트리아’(Austria)와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 호주)를 구별 못하고 편의대로 프란체스카 여사를 ‘호주댁’으로 불렀던 한국 국민의 무신경이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시정 물가를 몰랐다던가 한국어를 배우려 하지 않았다는 것,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과잉보호로 인의 장막을 쳤다는 등 세간에 떠도는 프란체스카 여사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에 대해서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혈육으로서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초대 대통령 부인으로 기록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90여 년 삶을 이화장의 이인수· 조혜자 부부의 증언을 중심으로 여러 자료를 취합해 재구성해본다.


결혼 이전

프란체스카 도너는 1900년 6.1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생장했다. 중고시절 수학성적은 ‘수학의 진주’라는 애칭을 얻었고 상업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스코틀랜드에 3년간 영어 연수를 하여 영어 통역사자격과 타자-속기자 자격을 취득하였고 모국어인 독어와 불어를 구사하고 철물 무역과 청량음료 공장을 운영한 아버지 사업의 후계자로 현장 수업을 받아 행정과 사무의 능력을 고루 갖추었던 학식과 교양을 갖춘 부잣집 셋째 딸이었다.

이승만 박사를 만나다

 

1933년 2월 어머니와 함께 파리 경유 스위스 여행길에 레만 호반의 뤼씨 호텔엘 묵었다. 국제 연맹 회의에 참석하는 세계 각국 사람들로 호텔식당은 만원을 이루고 있었고 프란체스카 모녀가 앉은 4인용 식탁 빈자리로 이승만 박사가 합석하게 되었다.


이 박사는 이틀 동안 국제연맹이 다루는 일본의 만주침략 건과 관련하여 만주의 한국동포들이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는 사연을 홍보하고 극동의 평화를 위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러 미국서 급히 날라 와 국제연맹 방송, 각국 대표와 신문기자들과의 면담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프란체스카가 다음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전면 인터뷰 기사와 사진을 보고 이승만을 위해 스크랩해서 호텔 안내에 전하고 또 다른 신문에 난 기사도 잘라서 보내자 답례의 차대접으로 발전했다. 프란체스카 어머니는 여행을 중단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으나 프란체스카는 제네바의 이승만과 서신 연락을 계속했다. 7월 초에는 소련 입국비자를 받으러 비엔나에 온 이승만과 재회할 수 있었다.


프란체스카는 일손과 돈이 한없이 필요한 이 독립투사를 위해 자기의 시간과 능력을 제공하였고 마침내 1년 3개월을 지나 두 사람은 34살, 59살로 사랑하는 가족의 반대와 한국인 동지들과 동포들의 반발을 받으며 1934년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반지도 여자가 준비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아내로 험난한 인생행로를 시작하는 것이다.


1910년 한국 최초의 미국 박사학위를 얻은 이승만은 미국 정관계, 언론계를 통해 일제의 학정을 알리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1913년부터 39년까지 하와이를 근거지로 민족교육과 홍보활동을 통한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기독교를 통한 한국민족의 갱생을 목표로 한인기독교회(KCC)를 세우고 선교단을 만들어 하와이 뿐 아니라 아이오와, LA로 확산시켰고 또 한국 민족화를 위해 기독교 학교인 한인 기독학원을 만들어 하와이 일대에 있는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과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한편 1921년에는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 독립만세 때 서재필과 함께 필라델피아 한인대표자 대회에서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20년에는 상해에 가서 임시정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였다.

독립운동가의 아내가 되다

 

결혼 직후 하와이 동포들은 서양부인을 데리고 오지 말라고 전보를 두 번씩이나 쳤으나 이 박사는 아내와 같이 승선을 했다. 프란체스카는 수심 가득했던 어머니 얼굴을 떠올리며 눈물을 많이 흘렸다. 부두에는 뜻밖에도 수많은 동포들이 나와 마중을 했고 1천명이 넘는 하와이 동포들이 큰 잔치도 벌여주었다.


호놀룰루에서의 생활이 시작됐다. 첫 번째 한 것이 한국말을 배우려 노력하고 한복을 입고 김치를 담구는 것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주부로 안주할 수가 없었다. 세 기관을 움직이는 남편을 따라 할 일이 많았고, 특히 한인기독학원의 실무를 지원했다.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아이들 머리도 감겨주고 식사도 준비했다.

대한YWCA 고문을 한 박에스더는 10살부터 한인기독학원 기숙사 생활 중에 일본으로부터 빼앗긴 주권을 찾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교장선생의 외침이 어린 마음에도 민족에 대한 어떤 자각심을 싹트게 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이박사 내외는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워싱턴 D.C.로 옮겼다. 41년에 이 박사는 태평양 전쟁을 예언하는 영문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Japan Inside Out)을 발간하여 미국 국무부와 의회에 경고를 주었고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는 “무서운 예언서”라고 평가했다. 세 번의 타이핑에 아내의 손끝은 무르고 터졌다. 베스트셀러가 되자 독립운동 자금도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아내에게도 여윳돈을 주어서 이때 맞춘 검정 예복이 40년을 넘어 며느리가 물려받아 입고 있다. .
이 박사의 집은 지식인들이 모이는 장소가 되었다. 이들이 공통으로 말하는 프란체스카 여사의 인상은 “웃음으로 반짝이는 눈, 남편에 대한 사랑의 충만, 남편과 남편의 일에의 전력투구”를 꼽고 있다. 프란체스카는 미모와 능란한 사교로 워싱턴의 저명인사의 부인들과도 교제를 했다. 가난한 독립운동가의 생활은 내핍과 검약뿐이었고  독립운동을 위해 밤낮없이 넓은 미국 땅을 이동할 때 프란체스카는 운전을 담당하였으며 무릎 담요는 온기 없는 차에서 남편을 기다릴 때의 필수 품목이었다.
45년 해방되던 날 이승만 박사는 워싱턴의 신문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아내의 지혜와 용기, 인내와 슬픔, 노력이 나로 하여금 오늘 이날을 맞게 했다”고 하며 아내의 은공을 높이 치하하였다.

해방 대한민국에서 남편이자 대통령의 일등 비서가 되다

 

53년 11월 13일 정원사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 부부와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 여사는 막힘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6·25 전쟁 전후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다.
▲ 53년 11월 13일 정원사를 방문한 리처드 닉슨 미국 부통령 부부와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 부부. 프란체스카 여사는 막힘없는 영어 구사력으로 6·25 전쟁 전후 세계 각지에 구호를 요청하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을 활발히 수행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 이박사는 긴 해외생활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신탁통치반대, 모스크바 3상결정 취소 요구, 국토분단과 공산테러, 폭력, 혼돈이 난무하는 미군정 치하에서 이 박사는 좌우합작을 강요하는 하지중장과 결별을 선언하고 민족자결주의를 표방,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제헌국회구성 총선거가 유엔한국임시위원단 감시아래 48년 5월 10일 실시하여 198명의 국회의원을 선출했다.
프란체스카는 처음 돈암장에 거주하고 다음해에 마포장으로 2개월간 이사했다가 10월에 이화장에 정착한다. 그녀는 한국이 독립하여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아담한 내 집을 갖는 것이 꿈이어서 “돈암장의 안마당 청소하던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기억한다.
해방 당시 훈련된 비서가 없었던 시절로 남편의 영문 구술에 따라 외교 문서를 타자기로 쳐서 정리하는 일이 많았다. 요인 암살과 정치인에 대한 총격이 난무하던 이 시기에 70세의 이승만 옆에는 프란체스카 여사는 총받이로 자처하며 붙어 다녔다.

영부인 시절 축첩 타파에 힘써...임영신 초대 상공장관 임명에 영향력
 
1948년 8.15일 대통령 취임으로 서양계 영부인에 대한 비판이 들끓었다. 그녀는 꿋꿋했다.
대통령이 된 후 미 군정으로부터 모든 것을 이양받는 과정에서 프란체스카 여사가 타이핑은 도맡았다.


경무대 안주인이 되면서 한 가지 관행을 바꾸려 애썼다. 손님을 초대할 때 부부 동반을 원칙으로 했다.  남자들의 회합에 기생이 노래와 춤을 하고 첩이 동행하는 풍습을 바꾸려 한 것이다. 축첩을 금지하는 내용을 임시국회 첫 회기에 반영시키려 하였다. 아내의 보좌를 받아온 이 대통령은 여성에 대한 신뢰가 높아 초대 상공장관에 임영신 여사를 임명하였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내핍과 검약으로 경무대 안살림을 꾸렸고 ‘쪼끔,쪼끔 사모님’으로 별칭을 얻었다. 나이가 많은 대통령의 건강과 식사에 제일 많이 신경을 썼다. 일본 총독과 미군정 하지 준장이 살았던 경무대를 전혀 수리하지 않고 지냈으며 목욕통이 짧아서 다리를 펼수 있도록 구멍을 더 파는 것으로 만족했다. 미장원엔 가지를 않고 블라우스는 천을 끊어서 만들어 입고 옷, 양말은 기워 입었고 내외의 내의와 양말은 직접 손으로 세탁하였다.

허술한 데가 없었다. 장교들의 도미시찰 여비를 일찍 귀국한 날짜만큼 반납을 받았고 도미유학장교단의 여비가 1.3배 과다 청구되었다고 미국 지도를 펴놓고 설명할 정도로 “돈 한 푼 물건 하나 절약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여성계에서는 박마리아 여사만이 아니라 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씨 등 영어가 통하는 사람들과는 교류가 많은 편이었다.

6.25전쟁 초기 석달 간 비망록 기록...영문편지로 세계 각지에 구호손길 요청
 
6.25 전쟁이 발발하자 27일 새벽 3시 경무대를 떠나 기차로 대구를 향했다. 작전상 탈출이었으나 이 결정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무초대사가 영부인의 도쿄 피난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수원, 대전, 부산으로 임시 정부수도를 옮겨가는 누추하고 헐벗은 피난생활은 대통령 부부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그녀의 검은 머리는 은색으로 변해갔으나 그의 명랑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녀의 웃음과 재빠른 언변은 남편을 늘 생기 있게 하였고, 남편이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매일 최선을 다했다.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일선 장병, 부상병, 포로 등을  접해야하는 최전방의 영부인이었고 학교, 병원 고아원, 30만명의 과부와 10만명의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에 한국부인회가 함께 하기도 했다. 피난민의 생활을 둘러보고 미군 병사들도 방문하는 일정도 바쁘다. 항상 한복 긴치마, 앞섭이 긴 저고리, 손에 든 큰가방, 검은 선글라스의 차림이다. 부산에서의 생활환경은 척박했다. 여사는 남편의 체력과 건강을 위한 스케줄을 관리하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이대통령을 위로하는 세계 각지로부터 답지하는 글에 답장을 쓴다. 영어로 바로 쓸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하루는 대통령과 같이 밤새워 하와이와 미주에 있는 친지들에게 그리고 빈에 있는 친정가족에게 우리 부상병들을 위한 담요와 구호품을 보대달라고 37통의 편지를 썼다. 대통령의 편지를 받은 우리 동포들은 모두 울었다고 한다. 여사의 친정에서 제일 먼저 구호품을 보내왔고 하와이 미주에서도 속속 구호품이 도착했다
전쟁 중에 미국사령관을 만나는 등 미국과의 관계도 내외가 함께 나서서 많이 풀어나갔다.


영부인은 6.25일부터 9월 5일까지 전쟁 비망록을 써놓았다. 9.28 수복을 앞두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는 희망과 기쁨을 김활란 박사와 나누기도 했다. 서울 환도 짐 속에 제일 먼저 타이프라이터를 챙기고 대통령의 낡은 스프링 코트을 접다가는 석달 전 한강철교를 건너 남하할 때 침통한 표정으로 자꾸 서울 쪽을 바라보던 대통령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괴었다.


‘이제 다시 한강을 건너 서울로 돌아가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YWCA, 한국부인회 등의 활동…박에스더, 김활란, 김신실, 임영신, 편정희 등과 교우

 

서울YWCA 회관건립 건축모금 위원회가 프란체스카 여사를 명예회장, 다울링 대사부인을 회장으로 한 국제바자를 57년 5월 25일 미 대사관저에서 3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었고 이날 모인 1만2천 달러는 최이권 회장에게 건축기금으로 전달되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후원금을 박마리아 연합회 회장에게 전달하고 다음해 1958년 6월 23일 기공식에 박에스터와 함께 회관 건설의 첫 삽을 함께 떴다. 임영신이 회장인 한국부인회와의 교류 정도로 관계를 맺었다.

한국으로의 영구 귀국 후 81년 여름, 아들 이인수씨·며느리 조혜자씨, 두 손자들과 함께 한 이화장 앞뜰에서의 행복한 산책.
▲ 한국으로의 영구 귀국 후 81년 여름, 아들 이인수씨·며느리 조혜자씨, 두 손자들과 함께 한 이화장 앞뜰에서의 행복한 산책.
60년 대통령 하야 후 하와이 병상의 ‘베스트 와이프’로 헌신 간호

 

1960년 4.26 하야 성명을 내고 28일 이화장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의 건강과 휴양을 위해 하와이에 다녀가라는 제의를 받고 한 달 후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기고 5월 29일 출발했다.


하와이에서는 옛 친구들, 한인기독학원의 옛 제자들이 공경과 사랑으로 받들었으나 고국을 그리는 마음과 나라 걱정만 커져갔다.


양자를 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주 이씨 양녕대군 문중에서 추진하여 17대 손 중에서 조카뻘 되는 청년 이인수씨를 입적시키고 12월 13일에 하와이에서 처음 대면했다. 이박사는 자나깨나 귀국만 생각하여 여비를 생각해서 이발비도 아꼈다. ‘내가 우리 땅을 밟고 죽는 것이 소원인데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해’ 상기된 눈에 눈물이 가득 맺혔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마우날라니 요양원에서 남편을 보살피고 방문객을 맞고 감사한 분들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 일과였다. 주치의의 조언을 받고  62년 3월 17일 출발 준비를 마쳤는데 박정희 정부가 귀국을 만류한다는 전갈을 갖고 총영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후 이 박사는 다시는 혼자서 일어나지 못했다. 65년 6월 말에 병세가 위독하여 인수씨가 다시 왔고 7월 19일 0시 35분에 임종했다. 조국의 품안에서 생을 마감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설움으로 남아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의식을 잃었다. 실의에 차고 병들기까지 한 남편을 헌신적으로 돌본 프란체스카여사의  별명은 '베스트 와이프'(best wife)였다.


그녀는 탈진하여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후 모국 오스트리아 빈으로 돌아가 여동생과 조카의 보살핌과 한국 유양수 대사 내외의 염려 속에 잘 지냈다.
아들 이인수씨는 68년에 조혜자씨와 결혼을 하고 70년에 첫 아들을 낳았고 프란체스카 여사는 5월 16일에 한국으로 영구 귀국하여 70회 생일을 맞이했다.

 

이화장에 다시 돌아와 ‘행복한 할머니’로 20여 년 여생 보내

 

나이와 국경을 초월한 국제결혼으로 32년 같이 보낸 사랑하는 남편인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추방지 하와이에서 한스럽게 떠나보내고 마지막 귀착지 이화장의 22년간은 행복한 할머니로서의 생활이었다.


아들 이인수 씨와 며느리 조혜자씨의 극진한 보살핌 속에 손자 병구와 병조를 1살 때부터 장성할 때까지 옆에서 지켜보며 가족의 기쁨을 맛보았다.
근검절약의 정신과 가족 건강을 지키는 우리 음식 솜씨는 며느리가 고스란히 전수받았고 기운 양말과 내복은 손자들도 다 수용한다.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 국립묘지 공작봉을 매주 찾으며 날마다 남북통일과 집없는 사람을 잘 살게 해달라는 기도를 빼지 않고 쪽진 머리와 한복을 입고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여인이 되어 한국을 사랑했다. 이화장 뜨락에 꽃이 만발할 때 많은 손님을 맞는 것이 늘 가족보듯 반가운 일이다. 안분지족을 잘 아는 분인 것 같다. 1992년 3월 19일 이화장에서 가족의 기도 속에 영면하고 사랑하는 남편 곁에 묻혔다.


프란체스카 여사 일대기


16년 제복 차림의 소녀 시절의 프란체스카.
▲ 16년 제복 차림의 소녀 시절의 프란체스카.
1900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 빈에서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막내딸로 출생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기 위해 상업전문대학 졸업 후 스코틀랜드에서 유학
1920년  개신교 자동차경주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
1923년  헬무트 뵈룅과 이혼
1933년  2월 어머니와 구라파 여행 중 스위스 제네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방문한 이승만 박사 만남
1934년  10월 8일 뉴욕 클레어몬트 호텔에서 이 박사와 결혼
1934년  워싱턴으로 독립운동 근거지 옮김
1940년  이 박사의 저서 ‘일본 군국주의의 실상’(원제: Japan Inside Out) 원고 타자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워싱턴 이승만 박사의 독립운동 도움
1945년  8월 15일 광복 / 10월 16일 이 박사와 함께 귀국
1947년  겨울부터 이화장에 기거
1948년  7월 20일 이승만박사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
1950년  6·25 전쟁 발발. 임시수도 부산 피난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발발
           4월 27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
           5월29일 이승만 박사와 하와이 망명길 동행
1965년  7월 19일 이승만 박사 별세
1970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귀국. 20여년 간 이화장에서 생활
1990년  소피텔 엠배서더 호텔에서 90회 생일 축하연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92세의 나이로 타계
1992년  3월 23일 정동제일교회에서 영결식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