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주 |
8월 3일연중 제18주일 |
마태 14,13-21 |
성가 431, 504 |
둘째주 |
8월 10일 연중 제19주일 |
마태 14,22-33 |
성가 401, 437 |
셋째주 |
8월 17일 연중 제20주일 |
마태 15,21-28 |
성가 1, 399 |
넷째주 |
8월 24일 연중 제21주일 |
마태 16,13-20 |
성가 32, 61 |
다섯째주 |
8월 31일 연중 제22주일 |
마태 16,21-27 |
성가 19, 445 |
●● 말씀나눔 l 연중 제18주일~연중 제22주일 함께하는 복음묵상
허영엽 신부
(서울대교구 문화홍보국장)
<빵의 기적은 사랑의 기적>
8월 3일 / 연중 제18주일
마태 14,13-21
오늘 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서 빵의 기적을 베푸신다. 오늘 군중을 배불리 먹여 주시는 주님께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영혼의 목마름과 배고픔도 해결해 주신다. 예수님은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우리에게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대해 다분히 인간적인 계산과 방법으로만 생각하고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실 우리는 늘 이런 실수를 한다. 주님과 함께 계시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으로만 무언가를 하려는 습관에 빠져 있을 때가 많다.
주님은 기적을 이루시는 능력의 하느님이란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고 산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믿음이 없는 태도이다. 오히려 우리는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쳐 주십시오, 도와 주십시오”라는 겸손과 믿음의 마음을 지녀야 하지 않을까?
빵의 기적은 어떤 아이가 갖고 있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즉, 기적은 하찮은 것, 보잘것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손에 얹어졌을 때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 비록 내 자신이 부족하고 보잘것 없다하더라도 나의 능력과 시간과 재물을 주님께 봉헌하고, 주님이 쓰시도록 했을 때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큰 능력과 결과로 바꾸어 주신다.
우리 신앙인들은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작은 정성과 힘을 모아도 큰 결과가 나온다. 그 남은 열 두 광주리의 빵은 또 다른 배고픈 사람들의 몫이 된다. 우리는 쪼들리지 않고 돈이 넉넉하다고 낭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큰 죄악이다.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낭비하는 시간과 돈이 다른 이에게는 생명처럼 소중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주위에는 마음과 영혼이 배고픈 이들이 많다. 그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나눌 때, 우리는 복음의 예수님처럼 사랑의 빵의 기적을 이루게 된다. 우리 공동체,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이 항상 배고픔이 없는 공동체와 가족이 되도록 서로 나누고 도움을 주어야 한다. 사랑은 나눌수록 더 커진다는 사랑의 신비를 몸소 실천하도록 해야겠다.
● 묵상 : 나는 무엇을 나누면서 살고 있는가?
<손을 잡아 주시는 주님>
8월 10일 / 연중 제19주일
마태 14,22-33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물위를 걷다가 의심이 생겨 물에 빠져 허우적댄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물에 빠져 허덕이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신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믿음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배는 자주 교회를 상징한다. 어떻게 보면 곤경과 수난에 처한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 교회가 위험과 고통을 당할 때 가장 큰 위로와 힘은 무엇일까? 믿음이다. 믿음이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풍랑에 허덕이는 제자들의 배에 예수님은 다가오셨다. 그리고 겁에 질린 제자들에게 “나다. 안심하여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하십시오”라고 간청한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다. 그러나 거센 바람이 불자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지게 된다.
베드로에게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믿음은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물에 빠진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께 구조 요청을 한다. 그가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을 찾고 살려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손을 잡아 주셨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 믿음이 약하냐?” 예수님의 이 말씀은 질책이라기보다 격려의 말씀으로 들린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위험하고 어려운 상황에 빠져도 결국 지켜 주신다는 것이 신앙인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져 허덕이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다. 어쩌면 우리는 물 위를 걷는 것은 시도조차 못할지도 모른다. 쉽게 유혹에 빠지고 늘 흔들리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것이 우리의 약한 모습이다. 사실 주님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우리의 주위에는 믿음을 해치는 요소가 너무 많고 자신 안에도 늘 부족함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도와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하고 주님께 손을 내미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물에 빠졌을 때 비로소 주님께 손을 내밀게 된다. 역경과 고통 중에 주님을 더 간절히 원하고, 그분의 도움을 절실하게 찾는다. 어려움이나 고통이 와도 좌절할 필요가 없다. 나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발버둥 쳐서는 안 된다. 손은 내밀기만 하면 잡아주시는 주님이 늘 우리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 묵상 : 나는 언제 주님께 손을 내밀었나?
<구원의 기적>
8월 17일 / 연중 제20주일
마태 15,21-28
구원은 철저히 하느님의 몫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고유영역인 구원의 성취를 간섭할 수 없다. 유다인들은 인간의 구원은 율법을 철저히 지켜서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 반면에 예수님은 회개와 믿음이 구원을 가져온다고 가르치셨다. 유다인들은 구원의 주체를 인간 중심으로 보았던 것이다. 즉 인간이 열심히 율법을 지키는 노력을 통해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완전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 즉 은총없이는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서 죄인이다.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교만하고 모순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형제들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관대하게 감싸 주어야 한다. 그들의 부족함은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된다. 또한 누구를 단죄하거나 멸시해서도 안 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선교 무대가 이스라엘 선민사상에서 탈피하여 이방인 지역으로 확대되어 나가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 당시 띠로 지방과 시돈 지방은 이방인 지역이었다. 그리고 시로페니키아라는 지역은 시리아 지방의 일부로서 더 멀리 있는 이방인 지역이었다. 오늘 복음은 이방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거부당하고, 이스라엘 백성이라 해서 무조건 다 구원받는다는 집단 이기주의 사상이 무너지는 현장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을 진실한 희망의 대상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의 보편사상이 드러난다. 유다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깨끗하고, 이방인이라 해서 무조건 다 불결하다는 사고방식도 깨버리신 사건이다.
유다인들은 구원이란 자기네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주님께 대한 참을성 있고 확고부동한 믿음은 결과적으로는 위대한 구원의 기적을 낳게 했다. 우리도 이방인 여인의 믿음처럼 끈기 있고, 용감하게 오로지 주님께로만 나아갈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다.
● 묵상 : 나는 인내를 지닌 믿음의 소유자인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8월 24일 / 연중 제21주일
마태 16,13-20
예수님의 설교와 기적 등을 경험하고도 사람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에 대해 바르게 파악하지 못했다. 마침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합니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마태 16,13-15) 예수님의 질문은 제자들의 생각을 아는 것보다 자신의 신비에 다다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제자들의 대답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를 예언자로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언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가장 큰 명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를 이스라엘이 고백하던 메시아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참 하느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이다.
그런데 이 베드로의 고백 뒤에는 인간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관하신다. 다만 인간은 하느님의 계시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에 이어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주고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신다. 베드로는 이제부터 교회의 반석이 되며 이 공동체는 예수님이 세운 구원의 새로운 공동체가 된다. 마태오 복음에서만 나오는 교회라는 단어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의 공동체이며 그리스도와 교회는 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니게 된다.
우리는 세례성사를 받을 때, 또한 주일 미사 때마다 신앙고백을 한다. 우리의 고백은 입으로 고백한 것에 그치지 않고 결단의 삶을 요구한다. 삶에 있어서 과거의 기준은 모두 버리고 그리스도가 최고의 가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님이요, 하느님이시다”는 고백은 내 삶의 구원이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는 뜻은 내 삶에 세속적인 의미로 도움과 행복을 주는 대상의 의미 이상이다. 즉 우리 삶의 모든 것을 걸고 희생과 고통을 감수하고라도 주님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내 마음 안에 계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의 주님, 나의 모든 것이라고 생각될 때 비로소 내가 보이고 이웃이 보이는 참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내가 보이고 이웃이 보인다는 것은 공동체의 인식이며, 자기의 중요성과 더불어 이웃의 중요성을 함께 인식하는 것이다. 이 공동체의 삶이 바로 교회의 참모습인 것이다.
● 묵상 : 주님은 나에게 어떤 존재인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십자가의 길>
8월 31일 / 연중 제22주일
마태 16,21-27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예고하신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며 주님이 그런 일을 당해선 안 된다며 만류한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에 대해 예수님은 심한 꾸지람을 하신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구나.” 베드로는 왜 항의했을까? 베드로도 당시 유다인이나 제자들처럼 정치적이고 현세적인 메시아로 예수님을 생각했던 것 같다. 따라서 베드로의 인간적 생각으로 메시아가 고난을 당하고 죽는 것을 도대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어서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자기 결단이며, 적극적인 삶의 실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의 자유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다. 물론 인간적인 판단이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든 길이었다(이사 55,8 참조).
하느님의 뜻을 따르게 되면 세상 속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길을 가야 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인간의 욕심만을 쫓아가면 결국 패망하고 만다는 가르침이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된다. 신앙인이 가야 하는 길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즉 주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셈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보통 세상에서 죄와 악의 유혹을 받고 있다. 아직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 상태는 아니고 구원으로 가는 과정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이냐 세속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늘 서 있게 된다. 때로는 세속 안에 나 자신이 포함된다. 사실 마지막의 선택은 항상 하느님과 나 자신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세속 안에서 쉽지 않고 힘들며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 안에 결과는 분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참다운 행복의 삶이 되려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 길의 결과는 주님께서 이미 증거해 주셨다. 참다운 삶은 영원한 영혼의 평화와 기쁨을 지향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 되려면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다.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고 은총을 구할 때 말이다.
● 묵상 :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버리고 사는가?
●● 소공동체 l 대부모(代父母, god parents)
대부모란?
대부모는 교회에서 세례와 견진을 받은 자에게, 장차 신앙생활의 길잡이가 되어 줄 사람을 선정하여, 영적인 어버이와 같은 관계를 맺어 준 자를 말합니다. - 대부 한 명만 또는 대모 한 명만 또는 대부와 대모 한 명씩만 두어야 합니다. (교회법 제873조) |
대부모의 필요성
교회의 오랜 관습에 따라 세례를 받을 사람에게 대부나 대모가 있어야 합니다. 대부모는 대자녀가 세례를 준비하는 동안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 뿐 아니라, 일생 동안 한 후견인으로 영적인 모든 것을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므로 영적인 어버이 또는 선배로서 매우 중요한 몫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린이가 세례를 받는 경우, 대부모는 세례 받을 어린이 가정의 영적 가족이 되며, 어린이가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아기와 그 부모를 이끌어주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
대부 대모의 자격 (교회법 제874조)
- 세례 받을 본인이나 그의 부모 또는 그들을 대신하는 이에 의하여 지정되고 이 임무를 수행할 적성과 의향을 가진 사람. - 16세를 채운 사람. (단, 교구장 주교가 나이를 달리 정하였을 경우는 예외입니다) - 가톨릭 신자로서 견진과 성체성사를 이미 받았고 신앙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 - 신앙생활을 돈독히 하여 대자녀에게 신앙의 모범이 될 수 있는 사람. - 세례 받을 이의 부모가 아닌 사람. |
대부모가 할 일
대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대자녀가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느님의 축복을 받도록 하고 올바른 신앙인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명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대자녀를 위한 기도입니다. 기도를 함으로써 자신이 먼저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하느님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고 좋은 표양이 되도록 노력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대자녀가 자신을 대부모로 모시는 만큼 그 영향이 크기 때문입니다. |
견진성사의 대부모
세례 때 대부모의 임무를 맡은 이를 견진 대부모로 정하는 것이 유리하다. (교회법 제893조 ②) 초대교회에서는 세례성사를 받고 즉시 견진성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세례성사를 받고 얼마동안의 신앙생활을 한 다음에 다시 성숙된 신앙인으로서의 교리과정을 거쳐서 견진성사를 받게 됩니다. 물론 요즘도 급한 경우에 또한 특수한 경우에는 세례 후 즉시 견진성사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정신은 가능하면 영세 때의 대부모님을 세워서 계속 신앙생활을 잘 지도해 주기를 바라지만 꼭 그렇게 될 수는 없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세 대부모가 아닌 사람도 대부모의 자격이 채워지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부모를 형식상 세우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비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나 교회생활을 인도해 줄 수 있는 사람 가운데 정해지는 것이 좋겠습니다. 대부모는 대자녀에게 영신적인 모든 것을 보살펴 주고 길잡이 노릇을 해 주어야 하며 대자녀도 신친(神親)관계로 맺어진 대부모에게서 영신적인 가르침을 잘 받고 따르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 |
●● 소공동체 전례 시안 l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
준 비 물 | 성경, 초, 큰 유리그릇, 주전자, 수건
준비기도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느님께서 함께 하셨던 때를 기억해 봅니다.
그리고 그분께 마음을 향하도록 합니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살며시 물을 붓습니다.
떨어지는 물소리와 유리그릇을 통해 반사되는 보이는 물빛을 바라봅니다.
독서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야 55,1)
기도
은총을 베푸시는 하느님,
이 물과 같이 당신의 사랑을 목마른 영혼들에게 부어주십시오.
씻어서 새로 나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찾을 때 함께 하여 주시어 당신을 알고 사랑하게 하시고
무한한 당신의 사랑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독서
다음 구절들을 기도하듯이 읽으십시오.
한 구절이 끝나면 잠시 침묵 한 뒤 다음 구절로 넘어가십시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시편 42,2) 함께 :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야 55,1)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시편 42,3) 함께 :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야 55,1) |
(잠시 묵상합니다.)
신앙 나눔
하느님을 목말라 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때의 심경을 옆 사람과 나누어 봅니다.
물의 예식
(부드러운 곡으로 음악을 튼다.)
함께 :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요한 7,38)
물이 담긴 유리그릇 앞으로 한 사람씩 나와서 손을 씻는다.
마침 기도
하느님,
당신의 사랑이 피조물에 쏟아질 때 당신은 저를 생각하셨습니다.
저는 사랑으로부터 나와 사랑을 통해 살아가고 사랑을 향해 서 있습니다.
하느님 저의 마음이 항상 모든 피조물 안에서 당신의 선하심을 알고
감사하며, 즐거워하게 하소서.
제가 힘을 다하여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살아계신 하느님,
건강도 아픔도 부도 가난도 명예도 수치도 장수도 단명도
아무것도 당신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떼어놓지 못하게 하소서.
저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찾지 않고 선택하지 않겠습니다.
아멘.
●● 문화산책 l 바오로에 대한 101가지 질문과 응답
바오로에 대한 전체적 개관을 그리며 평소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다양한 주제들을 101가지 질문과 응답으로 풀어나갑니다. 제7장에 걸쳐 전개되는 논제는 “미사 때 바오로 서간을 자주 읽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오로는 몇 개의 서간을, 언제 썼는가?” “복음서가 바오로 서간보다 더 중요하지 않는가?”처럼 단순한 질문에서 “바오로가 사용한 ‘영’과 ‘육’의 개념은 무슨 뜻인가?” “바오로의 윤리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어떻게 다른가?”라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을 다룹니다.
저자는 신학생과 사제, 사목 종사자와 일반 신자들에게 바오로 서간을 가르치면서 받은 질문과 그 질문에서 유추해 낸 내용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리스도교 윤리에 대한 현대의 관심사에서 비롯된 각 질문은 무엇보다 바오로 서간 본문에 충실하며 바오로의 신학적 관점을 쉽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질문이 다양하여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며 종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오랜 강의를 바탕으로 핵심을 간단명료하게 요약하여 가능한 한 바오로가 직접 말하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바오로의 관점과 사상을 파악하기 위해 신약성경을 자주 언급하고 있어 서간 말씀을 깊이 알게 되는데도 도움이 됩니다.
교황 베네딕도 16세에 의해 바오로의 탄생 2천년을 맞아 선포된 특별성년 ‘바오로의 해’를 보내는 그리스도인들이 바오로 사도를 알고 본받으며 은총의 때를 지낼 수 있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바오로 서간을 공부하거나 성경을 필사하는 분들이 보조 자료로 활용하면 좋습니다.
□ 구입문의 : 02)944-0944 또는 바오로딸 인터넷서점 (http://www.pauline.or.kr)
로널드 위드럽/ 임숙희 / 152×225 / 332쪽 / 9,500원 / 2008년 5월 15일/ 바오로딸
●● 가정기도 l ‘ 없는 세상’
가정에서 온 가족이 동그랗게 모여 앉아서 진행합니다.
1. 시작기도
[진행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 중의 한분이 주님을 초대하는 기도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생활 말씀
[진행자] 한 구절씩 돌아가면서 성경 말씀을 읽겠습니다.
† 창세 6, 5-9. 13-14. 22 <인류의 타락> 5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6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 7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8 그러나 노아만은 주님의 눈에 들었다. 9 노아의 역사는 이러하다.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다. 노아는 하느님과 함께 살아갔다. 13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 14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22 노아는 그대로 하였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하였다. |
[진행자] 이번엔 다함께 소리 내어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다 읽은 후) 약 2분 정도 성경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겠습니다.(묵상을 끝내고 다음의 나눔을 진행합니다)
나눔
① 성경 말씀을 읽고 느낀 점을 이야기해 봅시다.
② 하느님께서 보시고 가슴 아파 하실 현대 사회의 어두운 점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서로의 의견을 모아봅시다.
③ ‘노아’는 평소에 어떻게 살아왔기에 하느님 눈에 쏙 들게 되었을까요?
3. 함께 생각해 봅시다
[진행자] 오늘의 주제는 ‘ 없는 세상’입니다. 다음의 내용을 함께 살펴봅시다.
이제 우리 인류는 곧 ‘ 없는 세상’ 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 없는 세상’ 이란 금속과 종이, 유리로 만든 물건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 없는 세상’ 이란 TV, 핸드폰, 전화기, 컴퓨터, 비디오, 라디오, MP3, 게임기, 디지털 카메라, 자동차, 오토바이, 비행기, 화장품, 각종 의료기기, 쓰레기봉투, 각종 플라스틱 제품 등을 사용하지 못하는 세상을 의미합니다.
‘ 없는 세상’ 은 2020년부터 현실화된다고 합니다. 시간을 되돌리기엔 우리 인류가 너무 멀리 와버렸습니다.
올해가 벌써 2008년이니까 이제 10년 정도 남았습니다. 저의 얘기가 불편하게 들리시겠지만 이것이 불편한 진실입니다. 자연의 시계는 결코 우리들을 기다려 주지 않으니까요.
나눔
① 37페이지에 보시면 에 들어가는 단어가 무엇인지 나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내용을 살펴보고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서로 이야기해 봅시다.
② ‘ 없는 세상’ 에 대비해서 우리 인류가, 우리나라가, 그리고 우리 가정이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4. 함께 실천합시다
[진행자] 다음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에너지 경제, 한번 쓰고 버리는 자원 낭비의 습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사실 우리는 지금 기후를 교란시키지 않고, 공기를 오염시키지 않고, 새로운 에너지 경제를 만들 수 있는 기술과 자본을 가지고 있다. 한 예로 지구에서 사용할 수 있는 풍력 에너지의 5분의 1만 활용해도 현재 전 세계에서 쓰고 있는 전력의 7배를 공급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에너지 경제를 발전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 없는 세상’ 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 전에 우리가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풍력, 태양열, 지력 등 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경제를 개편하고 지구 생태계를 소생시키는 일은 돈이 많이 드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 전 세계는 2020년까지 매년 1900억 달러, 한화로 약 195조 원을 투자해야 한다. 그렇다면 누가 그 돈을 내야 할 것인가?
전 세계가 2006년도에 국방비로 사용한 돈은 무려 1조 2350억 달러, 한화로 약 1268조 원에 달한다. 다시 말하면 총과 탱크와 미사일을 만들어서 지구 곳곳에서 전쟁을 하는 데 쓰는 돈의 6분의 1이 채 안 되는 돈으로 우리는 ‘ 없는 세상’ 에 직면한 지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단, 우리가 지금 당장, 신속하게 행동하기만 한다면…
- 래스터 브라운의 「플랜 B 3.0」 참조
‘ 없는 세상’ 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기 위해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곧바로 실천합시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자연의 시계는 결코 우리들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5. 가족 회의 시간
[진행자] 가족 회의 시간입니다. 가족이 함께 알아야 할 사항이나 논의가 필요한 일들, 가족 친지들의 생일, 축일 소식이나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 가족에 바라는 점 등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해 주시기 바랍니다.(자녀에 대한 훈계의 시간이 되지 않도록 주의합니다)
6. 가족 평화의 인사
[진행자] 지금부터 평화의 인사를 나누겠습니다.(온 가족이 돌아가면서 포옹을 하며 평화의 인사를 나눕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해줍니다)
7. 마침기도
[진행자] 다함께 손을 잡고 주모경을 바치겠습니다.
●● 노년의 향기 l 서로 돕고 의지하며
우리나라의 고령화 비율은 2008년 10.3%에서, 2018년 14.3%로 증가하여 고령사회에 진입하게 되고, 2026년에는 20.8%로 초고령사회에 이를 정도로 노인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습니다. 노인단독가구는 1995년 36.6%에서 2000년 44.9%, 2004년에는 51.2%로 증가하고 있으나 가족의 노인부양에 대한 의식이 약화되고 있어 노인 돌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노년기는 개인의 삶을 되돌아보고 마무리하는 중요한 시기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노년기를 보내게 된다는 점에서 볼 때, 활기차고 보람된 노년기를 향유하는 것은 개개인의 인생에 서, 그리고 전체 노인복지의 질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활이 불편한 노인들을 돌보는 데 주로 젊은 사람들의 역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들이 느끼는 어려운 부분은 같은 노인들이 제일 잘 알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의 역할과 같은 또래 노인도우미의 역할을 적절히 조합하여 노인 문제를 노인 스스로 극복한다면 노인 돌봄의 시너지 효과가 한층 증대할 것입니다.
2008년 독거노인은 전체 노인의 18.6%인 93만 명이고, 매년 5만 명씩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역사회에서는 만 65세 이상의 노인이 비슷한 연령대의 노인을 돌보는 공공근로사업인 ‘노-노 케어(老-老 Care) 사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거동이 자유로운 노인이 보호가 필요한 홀몸, 영세 노인들의 집을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청소, 빨래, 목욕, 건강 체크, 말동무, 도시락 배달 등으로 가사도 돕고, 각종 사소한 집안 수리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노인들의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고, 유휴노인들에게 소득 기회를 부여함으로써 사회역할로부터 소외되어 가고 있는 노인들에게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노인복지 증진에 기여하는 바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유료 사업은 도우미와 수혜 대상이 한정적이므로 노인 신자들의 자발적인 봉사활동과 미수혜대상자로의 봉사영역의 확대가 필요합니다.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자원봉사활동은 노인에 대한 일반적인 사회적 이미지를 “도움을 주어야 하는 대상”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상”으로 전환시켜 나갈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네가 할 수만 있다면 도와야 할 이에게 선행을 거절하지 마라(잠언 3,27)”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이는 형식적인 자기 규제에 불과합니다. 각자의 경험을 살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에 따라 봉사를 하는 것(1베드로4,10)은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노인사목부 명예기자 임승욱(하상바오로)
다음 호에서는 ‘고령 장애인’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 나눔 : 본당 내에 ‘실버봉사자모임의 결성’에 대하여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 노년의 향기 l ‘듣는 귀만 열어 놓으십시오.’
박남석 가브리엘(62, 역삼성당)형제님은
한림원 노인대학의 유일한 남자 봉사자이십니다.
형제님은 어릴 적 할아버지의 강압적인 신앙권유에 반감을 사 한동안 교회를 등한시 하다가 개인적인 어려움에 봉착 하였을 때 성모님 앞에 서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1992년도에 영세를 받은 후 1년 남짓 레지오 활동을 하면서 좀 더 깊이 있는 신앙생활을 위해 교리공부를 시작하셨습니다. 그 후 교리신학원을 졸업하고 통신으로 교리교육을 접할 수 있는 성 바오로 딸 수도회의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을 통해 성경공부를 하면서 노인들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경제적, 사회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지내왔던 현재의 노인세대들은 힘든 시기를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어르신들이 외로움과 소외 속에 있더군요. 남은 인생은 그분들이 아름다움을 꿈 꿀 수 있도록 하느님 말씀을 전하고, 접할 수 있게 도와 드리고 싶었습니다.”
성 바오로 딸 수도회에서는 청.장년층 위주로 이뤄지던 성경공부를 노인들에게 확산시키기 위해 ‘새로 나는 성경공부’를 출간하였습니다. 가브리엘 형제님은 이 책을 교재로 삼아 시청각통신성서교육원 동기 다섯 분과 함께 매주 1회 종로성당에서 어르신들에게 성경 공부를 가르치십니다. “저는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르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하시며 어르신들과 함께 시간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봉사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주 1회의 봉사로 만족하지 못하신 형제님께서는 본당 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노인대학의 봉사자를 지원하였고 처음 2년간은 학생신분으로 노인대학을 다니셨습니다. 대다수의 노인대학 봉사자가 여성들로 이루어져있어 어색한 부분이나 편견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이셨다고 합니다. 짧지 않은 2년의 시간을 학생으로 보내신 가브리엘 형제님께서는 올해부터는 노인대학 선생님이 되셨습니다. “학생으로 노인대학을 다녔던 경험이 오히려 큰 도움이 됩니다. 같이 어우러지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가브리엘 형제님께서는 봉사자의 일이 항상 기쁘다고 하십니다. “더 내려갈 수 없이 낮은 자세로 어르신들을 대하고 그분들과 함께 하는 것이 봉사자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듣는 귀만 열어 놓으세요. 어르신들은 정답을 요구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들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지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형제님은 “어느 분야에서 활동을 했던 사람이든 자신의 장점을 살려 봉사 할 곳은 많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찾아 가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 때문에 못 한다는 것은 변명입니다. 노력해야지요.” 하시며 하느님이 주신 역량을 교회에 다시 환원해야 함은 당연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가정이 제일 중요하시다는 가브리엘 형제님. “제 반려자와 함께 같은 것을 추구하며 남은 인생을 살고 싶어요.” 하시며 아직까지는 부족한 신랑이라며 웃으십니다. 진정한 봉사는 누군가가 시켜서, 생색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는 것임을 형제님을 통해 다시 배우게 됩니다.
노인사목부 명예기자 박혜연 (아가다)
●● 단계적 입교예식 l 에파타(열려라) 예식
이 예식은 그 상징적 표지로써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 고백하며 구원을 얻으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어른 입교 예식서 200항)
적합한 성가를 부른 다음에 집전자는 마르코 복음 7,31-37절을 봉독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이어서 간단한 설명을 한 다음에 집전자는 엄지 손가락으로 예비신자들의 오른 귀와 입 다문 두 입술을 만지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주님, 이 귀와 입을 열어 주시어, 이들로 하여금 귀로 들은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예비신자들의 수가 많은 경우에는 첫 사람에게만 위와 같이 말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래와 같이 간단히 말합니다. † 주님, 이 귀와 입을 열어 주소서. |
초대교회 때 이 예식은 입술 대신 코를 만지며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이 예식을 통해 예비신자가 앞으로 미사 중에 듣게 될 말씀을 이해할 능력을 얻게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1코린 2,15)를 맡을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하였습니다. 또한 어떤 전승에 따르면 기름으로 귀와 코를 도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1)
다음 호에서는 ‘세례명 정하기’를 소개합니다.
1) Edward yarnold, The awe-inspiring rites of initiation, Minnesota, 2001, p.17-18.
●● 계절의 성가 l 가톨릭성가 259번 “성모 승천”
백남용 신부 (가톨릭대학교 교회음악대학원장)
전례달력을 보면 대축일이라는 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법에는 “모든 축일과 대축일에는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대축일이 주일이 아닌 경우들이 있는데, 이럴 경우 우리나라에서는 이 법규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주일로 옮겨서 지내기를 허락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중에 그냥 지내는 대축일도 있는데, 12월 25일인 예수 성탄 대축일과 8월 15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들입니다. 이 두 날이 우리나라에서도 공휴일인 덕분입니다. 한국교회의 수호자이신 성모 마리아께서 승천하신 것을 기념하는 대축일에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을 그저 우연으로만 볼 것일까요 아니면 큰 은총으로 볼 것일까요?
불과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성모승천 대축일은 신자들의 마음속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때는 땀나는 더운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판공성사 때처럼 고백성사를 보려는 교우들이 고해소 앞에 줄을 서 있었습니다. 그 후에 갑작스런 신자 증가가 있었고, 개신교에서 개종해 오는 신자들도 많아지면서 기존 신자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어졌고, 그래서 많은 전통적인 신심들이 이어져 내려오지를 못했습니다.
“성모여 너를 천당에까지 모셔가기 원하오니, 네 앞에 천주를 뵈옵게 날 데려가소서.” 이미 듣기에 민망한 말투가 되어버렸지만 저희는 이 노래를 열심히 불렀습니다. 성모님께서 하늘에 올림을 받으실 때 가방 담당으로라도 모시며 따라가 덤으로 하느님을 뵙고 싶다는 소망을 담은 가사입니다. 성모승천의 의미가 잘 나타나기도 하고요. 힘든 시절의 사람들은 내세에 희망을 두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 때문이었을까요? 살기 좋아진 요즈음엔 수명이 엄청 늘어났어도 장수에 대한 애착은 더 커져서 오래 오래 건강하게 살고 또 가능하면 죽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지금 당장에라도 같이 천당에 가자고 성모님께서 손을 내미시면 아마도 다들 손을 뒤로 감추고, 성모님이나 잘 가시라고 하지 않을까요? 이런 시대 조류를 미리 예감이나 한 듯이 1986년도에 성가책을 개정할 때 이 가사 부분을 현대어로 바꾸면서 내용도 “성모 마리아 하늘나라에 들어올림 받으시니, 우리도 천국을 그리며 주 찬미하리라.”라고 아주 은근한 표현으로 했습니다.
‘승천’이 이 성가의 주제이듯이 이 노래는 아주 가볍게 불러야 마땅합니다. 저는 농담삼아 ‘너무 무겁게 부르면 성모님께 승천하시다가 떨어지실라!’라고 합니다. 이 가벼움은 어디서 드러날까요? 첫째는 붓점 음표입니다. 흔히 행진곡이나 춤곡들에 많이 사용되는 이 붓점 음표는 그 가벼운 리듬감으로 인하여 노래하는 이들에게 흥을 돋우어줍니다. 둘째는 ‘성자 잉태하신’에서와 ‘천사 두루 옹위’에서 나타나는 ‘미,파,솔,라,시,도’의 상향음계입니다. 그야말로 하늘로 올라가는 기분이 나게 멜로디도 위로 올라가도록 했습니다. 셋째는 ‘우리도 천국을 그리며’의 후렴 가사에서 ‘천국’이라는 곳의 음이 갑자기 위로 껑충 뛰는 것을 유의할 필요도 있습니다. 천국은 그렇게 높은 곳이고,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은 이 땅위가 아니라 저 높은 천국이라는 믿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을 담아 우리도 이 성가를 크게, 그러나 가볍게 불러봅시다.
●● 사목국 교육안내 8월
사목국 일반교육부 -문 의 : 727-2062~3 |
●● 8월 월례연수는 없습니다.
●● 구역장·반장학교 3단계
대 상 : 구역장·반장학교 2단계를 수료한 구역장·반장
날 짜 : 8. 28.-9. 25.(매주 목, 5주간)
시 간 : 10:30~12:3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2층 대교육관
교육비 : 20,000원 (접수마감 8/21)
문 의 : 727-2062~3
●● 전교수녀연수
대 상 : 각 본당 전교수녀
주 제 : 생명(출산·성), 낙태치유
날 짜 : 2008. 9. 2.(화)
시 간 : 14:00~17:0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2층 대교육관
교육비 : 없음 (접수마감 8/26)
문 의 : 727-2062~3
●● 성경나눔학교
내 용 : 성경 개요 및 말씀나누기의 다양한 방법 안내
대 상 : 구역장, 반장 및 관심 있는 신자
날 짜 : 9. 4.-9. 25.(매주 목, 4주간)
시 간 : 14:00~16:3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2층 대교육관
교육비 : 20,000원 (접수마감 8/28)
문 의 : 727-2062~3
사목국 가정사목부 -문 의 : 727-2069~71 |
●● 가정성화 생명수호 월례특강 및 미사
날 짜 : 8. 5.(화)
시 간 : 13:30~16:3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1층 중교육관
준비물 : 미사보, 성가책 (회비 없음)
문 의 : 727-2071 (www.ihome.or.kr)
●● 낙태치유 프로그램 및 월례미사
대 상 : 낙태의 상처로 고통 받고 있는 이들
내 용 : 생명의 소중함, 화해 및 치유 프로그램, 미사
날 짜 : 8. 12.(화)
시 간 : 13:30~16:3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6층 소성당
준비물 : 미사보, 성가책 (회비 없음)
문 의 : 727-2071 (www.ihome.or.kr)
●● 제4차 [부부여정] 운영자양성교육
대 상 : 향후 본당에서 [부부여정]을 운영 할 수 있는 본당 주임신부의 추천을 받은 부부, 본당 사제, 수도자 (성직자, 수도자를 제외한 개인 단위 참여 불가)
날 짜 : 8. 9.-9. 6.(매주 토, 5주간)
시 간 : 18:00~22:0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2층 대교육관
준비물 : 부부당 10만원
문 의 : 727-2070 (www.ihome.or.kr)
사목국 노인사목부 -문 의 : 727-2119 / 727-2386(노인대학연합회) |
●● 노인대학연합회 봉사자 특별교육
대 상 : 노인대학 학장 및 봉사자
날 짜 : 8. 12.(화)
시 간 : 9:30~16:00
장 소 : 우리은행 본점 4층 대강당
교육비 : 10,000원
문 의 : 727-2386 (노인대학연합회)
●● 노인대학연합회 <성경73 Ⅲ> 봉사자 교육
대 상 : 노인대학 학장 및 봉사자
날 짜 : 8. 25.(월)
시 간 : 10:00~15:00
장 소 : 서울대교구 사목센터 소교육관 1호
교육비 : 30,000원(중식제공, 교제비 10,000원 포함)
문 의 : 727-2386 (노인대학연합회)
※가정기도 정답 ‘ 없는 세상’의 정답은 ‘석유’ 입니다.
●● 성화에 담긴 영성 l 성모 승천
14세기, 터키 이스탄불, 코라 구세주 수도원
장긍선 신부 (이콘연구소 책임)
초대교회의 성화에 나타나는 성모님의 승천 성화는 이번호에 소개되는 형태였습니다. 동방교회만이 아니라 가톨릭도 역시 같은 묘사를 했었음을 유럽의 여러 성당들의 조각과 회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이태리 시에나의 두치오라는 화가의 작품에서도 역시 같은 묘사가 이루어 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서방 가톨릭 교회에서는 전혀다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오늘날 특히 한국사람들에게는 스페인의 화가 뮤릴료의 많은 천사들에 둘러 싸인채 하늘에 오르는 앳된 얼굴의 성모님의 모습이 성모승천화의 전부로 인식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코라 구세주 성당의 모자이크는 초대교회시대의 묘사가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앙에는 침상에 누워 세상을 떠나시는 성모님의 모습이 있고, 그 바로 뒤에는 작은 아기로 묘사된 성모님의 영혼을 안은 예수님이 많은 천사들의 옹위 속에 하늘로 오르시는 모습이 묘사되어있어 천국으로의 승천은 인간이었던 성모님 스스로는 결코 오를 수 없고 오직 예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것, 즉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하늘로 모셔갔다는 믿음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이 누워 계시는 침상 주위에는 성모님을 떠나보내는 사도들의 애도하는 모습과 왼쪽 하단에는 한손으로는 눈물을 닦으며 향로를 흔들어 향을 피우는 사도 베드로가 보입니다.
여기에는 함께 묘사하지 않았지만 동방교회의 같은 주제의 성화들 중에는 성모님의 침상 정면에서 손으로 침상을 밀어 넘어트리려는 사람과 이 사람의 손목을 칼로 내리쳐 잘라내는 미카엘 대천사가 함께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는 성모님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부정하려고만 하는 이단자들과 그에 맞서 정통신앙을 미카엘 대천사가 수호하는 모습입니다.
※ 표지 뒷면에서 큰 그림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