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성 1939~전 국무총리, 서울대학교 총장,대학병원이사장
새마을운동중앙회 회장,200717대 대통령 선거 출마
선친 이충영 친일인명사전 사법부 수록 1908~ ?경북 칠곡,조선총독부 판사,대구부,함흥부,광주부,평양부
1950판사경력 체포되었다가 인민군 후퇴 북조선 납북추정
윤인구 1972년~KBS 아나운서,배우자:[전경은](1980년 ~ 플로리스트, 2007년 결혼)
조부 [윤치영]이토치에이(伊東致映)1898-1996,전쟁지원과 참가 독려,시국강연,친일 기고문 발표,여운형과 김구의 암살 배후 지목(저술가 겸 시민운동가 정경모)+[이은혜](1898년 4월 21일~1980년)
부친 [윤인선]국회 사무처 서기관 1948년 1월 9일 ~[노호경]1948년 10월 23일 ~
문태준 [현 뉴라이트의사연합 회원 및 특별고문](이명박 & 박근혜 측근 및 후원자)
1928~경북영덕 태생. 의사,제7대~제10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
연세대학교 주임교수 외래교수,1979년 대한의사협회 회장(3선),보건복지부장관,한국사회복지협의회 회장
부친 문명기 (후미아키 이치로),1878년 6월 18일 ~ 1968년 10월 6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조선국방비행헌납회를 조직하여 비행기 헌납
본관은 남평, 본적은 경상북도 영덕군 영덕면(현재의 영덕읍)이며 평안남도 안주군 출신
김광명 1943~ [뉴라이트의사연합 상임대표]{이명박 & 박근혜 측근 및 후원자}대한신경외과학회 전 이사장.
대한야뇨증협회회장,2003 청신경초종 제거술을 받은 환자가 뇌출혈로 사망,대법원 2003. 11. 27. 선고 2001다20127
부친 김동인 1900~1951 친일문학인, 문단사절 조직 중국화북 주둔 황군위문 제안,
조선총독부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 제안 1945
자녀 김경인 (김광명의 딸)1972~ 시인,서울출생,2001년 계간<문예중앙>을 통해 등단,<감자> <배따라기><그래 바람은 그래서 부는 거야><올해의좋은 시100선(2011)-한양대학교대학원 국문과 졸
김동명 1950~육군사관학교졸업, 중화민국지휘참모대학졸, 주 중화민국 국방무관, 제1기갑 여단장 및 육군훈련소 부사단장, 2004년 준장 예편, 국방과학연구소 자문위원, 함경북도 중앙도민회 부회장, 함경북도 명천군민회 고문,
(사)흥남철수작전기념회부회장 역임,2009년 11월 이명박정부 함경북도 지사 취임
부친 김백일 1917~1951.3만주국봉천군관, 간도특설대, 남조선국방경비대연대장, (여순14연대반란사건 진압}
만주 지린 성 옌지 출생, 원적지 함경북도 명천군, 해방직후 일제만주군 상위, [박정희] 상관.
1946년 10월 이리에서 군 보급품을 처분하여 화려한 결혼식을 한 것 때문에 연대장에서 해임, 강원도 대관령 인근의 상공에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 안장,
이순자 1939년생~영부인(전두환의 처) 이창석 1951년(이순자의 동생)~ 기업인, 현 삼원코리아대표이사
선친 이규동 1911년 11월 7일 ~ 2001년 9월 11일, 일본만주군 경리관 출신, 대한노인회, 육군준장 예편, 연희동자택(500평) 사위 [전두환]물려줌
김옥숙 1935년 8월 11일 ~ (노태우의 처) 경북 청송출생 [김진동]1927~ [김익동]1931~ [김복동]1933~2000 김옥숙의 오빠
동생 김정숙 1937~배우자 금진호 국무총리 비서실장(제10대) 상공부장관(제31대) 재) 한ㆍ호재단 이사장(현)
선친 김영한 1857년 음력 6월 14일 ~ 1927년 양력 8월 19일, 일제시대 중추원 참의,
일본 정부로부터 1921 한일병합기념장 수여받았으며, 1918년 종4위 서위, 1920년, 1926년 각각 훈4등과 훈3등 서보장 서훈
이건개 1941~(박근혜 측근) 법관, 정치(15대국회의원) 나라미래준비모임, 대전고검장,
법무법인 주원 대표변호사 (박근혜 올케 서향희(박지만의 처)와 주원 설립}
1993년 슬롯머신업자(빠찡꼬)인 정덕진,정덕일 형제로부터 뇌물을 받아 구속 실형 1년6월 (대전고검장,차기 검찰총장 거론)
부친 이용문 1916~1953(山本健雄 야마토모 겐오), 본관은 수안(遂安), 일본육군사관(50기1937) 기병연대, 만주일본군참모본부 소좌, 광복후1947귀국, 초대 기갑연대장, 9사단,수도사단장, 남부지구경비사령관, 빨치산 토벌 중 비행기 사고 사망
이현 1950~ 가수, 기업인, 1970년 TBC가요대상 남자신인상 수상, 히트곡 '똑같애' '잊지마', '잘있어요' [이미경]여 1940~ [이훈]1947~ [이애경]여 1953~
부친 이형근 1920~2002 일본육군사관학교 1942 일본 육군야전포병졸, 일본대령,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1기, 미국육군참모대, 국방경비대제2연대장, 육군참모총장1956대장예편, 육군사관학교 교장 1959
진영호 1948~ 전북고창 "학원농장"(20만평) (선친토지 20만평 상속) 청보리밭 대표
배우자 : 나란희 (금호그룹 회장 부속실이사)
[진영삼]1952~ 한국코카콜라
[진진숙]1944~ 여,화가, 전 한양대학교 산업미술대 공예과 부교수 , 배우자:-[이헌재]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
[진선희] 여,현 배화여대 전통의상과 교수(서양의복구성ㆍ패턴CADㆍ의류상품기획)(사단법인:한국 전통 한복문화원 이사)
부친 진의종 陳懿鍾, (大原敏亨 오하라 빈쿄) 1921~1995,전북 고창 출신.경 성제대(서울대)졸, 1945일본북해도청 농무과장, 해방 후 1971,8,9,11,12대국회의원(전북고창)5공화국 민주정의당 대표위원, 1979년 보사부장관 1983년 제17대 국무총리, 1995년 국립현충원 안장 (1945 일본 북해도청 농무과장 1948 상공부 전정과장 1952 상공부 광무국장 1971, 1973, 1981, 1985 국회의원 1979 10ㆍ26이후 보사부 장관 1981 11대 민정당 국회의원 1983 국무총리)
1대 -[소진은] 1892~ ? 조선총독부 경찰간부
소진은 - 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조선총독부 군수를 지낸 소진하와는 형제 관계이다. 1911년에 문관보통시험에 합격하여 총독부 관리가 되었다. 1912년에 총독부 군서기로 임명되어 김천군에서 근무했다.
1920년에 총독부 도경부에 임명되면서 왜관경찰서에 발령받아 경찰 간부로 이동했다. 상주경찰서, 포항경찰서를 거쳐 경상북도 경찰부 보안과에 근무하며 정치범을 담당했다. 1933년에는 도경시로 승진하여 전북순사교습소장에 임명되었다.
1934년에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이동했다. 평남 보안과장을 지내던 1935년에 총독부가 시정 25주년을 기념하여 표창한 표창자 명단에도 들어 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다시 관계로 돌아와 총독부 군수직을 지냈다. 평안북도 선천군과 의주군 군수를 역임했다. 의주군수이던 1941년에 정6위 훈6등에 서위되어 있었다.
2대 - [소상영]1922~2008 대구출생,대한적십자사 부총재.전 요르단 대사
3대 - [소병희]1951~국민대 교수
[소정희]미국 샌프란시스코주립대 교수
[소명희][여]1949~동국대 교수
[소윤희]차병원 중문의대 교수
1대 - [신응균] 1921~1996 부친 : 친일매국노 [신태영] 1891년 ∼ 1959년) 일본육사 졸, 중좌,
일본육군사관학교(1940제53기)
중포부대 소속
육군 소좌
종전 후 오키나와섬 산속에서 숨어지내다 1946년 귀국
포병사령부 설치,포병 사령관
1961국방부차관,주독일대사,터키대사
재향군인회 회장
·육군중장예편
·前 전쟁기념사업회장·
한자교육진흥회장
외교안보원장
과학기술연구소 부소장
국방과학연구소 초대회장
1985.국제로타리365지구 총재
1990년: 대한민국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한국군 포병의 아버지"라고 불림. (친일매국노 신격우상화 작업)
2대 - [신현범]플로비통상 대표
[신현명]1953~ 계명대 기계자동차공학부 교수
1대 -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조남숙(1910결혼)(육군참장 조성근의 장녀)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활동, 식민사관 총서 《조선사》 간행 참여, 일제 학풍을 잔존시킨 국사학계 대부 이병도.
1927 '조선사편수회'로 국사 연구 시작 1934 진단학회 창설, 대표 1945∼62 서울대 문리대 교수 1955∼82 국사편찬위원 1960 문교부 장관 충무공훈장, 문화훈장대한민국장, 학술원상, 국민훈장무궁화장, 인촌(仁村) 문화상, 5·16 민족상 수상
2대 - 1남-[이기녕]1914. 7. 16 서울~ 2002. 1. 29 +한지혜
1936년에 경성의전을 마친 후 1941년에 일본 나가사키[長崎]의과대학 생화학 교실에서 근무한 후 1945년부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교수로 재직했다. 1956년에 〈각종 미생물 핵산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프랑스 파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8년에 생화학회장, 1979년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되었고 1981년 영남대학교 의과대학 교수를 지냈다. 1989년부터 인제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동 대학교 유전공학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직했으며, 생화학부문 학술원 회원을 지냈다. 프랑스 정부 문화훈장, 국민훈장 동백장, 과학기술상, 교육부장관 표창장 등을 수상했다. 주요저서로는〈생화학〉이 있다.
2남 [이춘녕]1917~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서울대학교 농과대학 학장
3대 - [이기녕]의 자- [이웅무] 아주대학교 자연과학대 화학전공 교수
[이춘녕]의 자 - [이장무]전 서울대학교총장
[이춘녕]의 자 - [이건무] 문화재청 청장
1대 -[현제명] 현제명 (창씨명 玄山濟明, 1902-1970) 친일음악가
1930조선음악가협회 초대이사장,조선총독부 조선문예회, 해방후 서울대학음악대학예술학초대학부장
친일행적 : 조선문예회 1937년 5월 가입 교화 활동의 일환으로 천황 폐하 중심의 일본 정신을 국체 관념을 뚜렷이해 시국 인식을 고취하고 황군을 격려한다는 취지로 가는 비, 서울(이상 최남선 작시), 전송(("ィ見送"�) 등을 작곡해 발표함.
대동 민우회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기소되었다가, 홍난파, 전영택 등과 함께 이듬해 6월 29일 전향 선언 발표를 전후해 가입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1938년 결성 당시에 경성 지부 간사로 피선
경성 후생 실내악단 1943년 국민 총력 조선 연맹 후원의 (일본)국민음악 연주회에서 개창 지도. 1944년에 이사장에 취임.
1945년 결전 음악회 개최 등 (일본) 국민 음악 보급에 기여한 공로로 경성 후생 실내 악단이 조선 예술상 수상
조선 음악 협회 1944년 개편시 조선인으로서 유일하게 이사로 피선
1944년 7월 남산의 조선 신궁에서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 봉납식에 이사로 참여
1944년 음악가 숙정 사업에 심사 위원으로 참여 국민 총력 조선 동맹과 공동으로 영미의 음악을 몰아내고 태평양 전쟁에 대한 결전 결의 앙양을 위해 국민 개창 운동을 벌이고,일본 국민 가요 보급을 위한 순회 가창 지도자로 나섬.
결전 의식 고취와 일본 음악 보급을 위한 결전 음악회, 경성 부민 대회 등을 기획,개최하고 출연. 각종 보국 음악회 출연
1941년 11월, 경성대화숙 주최 (일본) 국민 음악의 밤에서 독창
1942년 1월, 군가 강연회에서 일본 국가와 군가 독창
1943년 8월, 총독부 주최 징병실시 감사 주간 행사에서 항공 일본의 노래와 대일본의 노래를 부름
현제명의 친일 작품과 글
조선 문예회 회원으로서 발표한 작품 : 가는 비,서울 (이상 최남선 작시), 전송("ィ見送"�),土生"�ヒ"ウ"ュ 등
후지산을 바라보며 1941년 6월 조선 음악 협회 주최의 '음악 보국'을 위한 음악회에서 자신이 직접 시연한 성악곡
싱가포르 함락 감상 1942년 3월호 동양지광에 일본어로 발표
조선 문예회 결성 취지문 1941년 친일 단체 조선 문예회 결성 당시 현제명이 취지문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제명 해방후 행적 : 한국 민주당 문교 위원 경성 음악 학교 교장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초대 음악학부장 고려 교향악 협회와 산하 고려교향악단 창설 한국 음악가 협회 이사장 제 1 회 예술원상 수상 예술원 종신 회원
2대 - [현상열]한양대교수,영화감독
[현해은]1938~ 서울대음대교수
[현해진]1940~ 재미교포
[현해영]1942~ 재미교포
[현해옥]1944~ 재미교포
1대 - [임문환] 1907년 6월 11일 ~ 1993년 6월 19일 일본 고등문관 행정과, 용인 군수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 조선총독부 광공국 서기관․适ㅀ�
1935년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1934년 :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경기도 용인군 군수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 조선총독부 광공국 서기관,민정관 1948년 : 제헌국회법 기초전문위원 1950년 :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1950년 : 보건부 차관 1951년 : 농림부 장관 1952년 : 조선상선 사장 1953년 : 한국무역협회 회장 1958년 : 동화제지 사장 1966년 :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부회장 1966년 : 삼양관광 사장 1972년 : 부산프라자호텔 사장 1977년 : 부산프라자호텔 회장
2대 - [임우재]장남,삼양관광(주) 대표이사,삼양관광프라자호텔(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 1213-14 프라자호텔)
[임철재]
[임순미]-장녀
[임한미]
[임경미] 배우자- [홍사덕] 전 한나라당의원,새누리당 국회의원후보 낙선,2012년 박근혜캠프 공동선대위원장
[임윤미]
[임상미]
1대 - [현상윤]1893~1950 황국신민화의무교육실시, 경성대예과부장, 중앙고 교장, 고려대학교 초대총장
민족대표 48인중 1인, 독립투사였으나 변절, 1950년 친일인사로 북한으로 납북, 피폭사망으로 추정되나
사인불명, 교육/학술분야 친일인명사전 등재
2대 - [현인섭] 사망,이화여대의대 교수
3대 - [현재천]1944~고려대학장,고려대화공생명공학과명예교수
[현재민]1946~KAIST공과대학기계공학교수
[현재현]1949~1975년 부산지방검찰청 검사,동양그룹 회장.동양그룹 창업주 고 [이양구] 회장의 첫째 사위.
2011년 한일경제협회 부회장,2009년 전경련 한미재계회의 위원장
[현재희]1954~세종대교수
[현재란]1956~이화의원원장
4대 - [현정담] 1977~녀 스탠퍼드대학교경영대학원,동양매직& 동양 마케팅 전략본부장(상무)상무,미러스MRO(비상장
계열사,최대주주 지분14.27%)
[현승담] 1980~ 스탠퍼드대학교,동양 상무보,동양시멘트 부장,미러스MRO(비상장 계열사,최대주주 지분14.27%)
[현경담] 1982~녀 스탠퍼드대학교,동양온라인 마케팅,미러스MRO(비상장 계열사,최대주주 지분14.27%)
[현행담] 1987~ 스탠퍼드대학교,미러스MRO(비상장 계열사,최대주주 지분14.27%)
1대 - [안석주] (安碩柱, 安田 榮, 야스다 사카에), 1901년 ~ 1950년 일제 강점기 화가, 영화 각본가 겸 영화 감독,작곡가,삽화가 조선일보,동아일보 학예부장
한성부 출신으로 교동보통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과 미술 수업 후에 언론사 삽화 작가로 일했다. 안석영은 예술 다방면에 다양한 재주를 지닌 팔방미인형의 인물이었다. 일본 유학 후 미술, 영화, 문학, 연극의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이념적으로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계열에 속해 있었다.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참가자들 각자의 이름 머릿글자를 따서 작명한 파스큘라에 참가하여 카프로 발전시키는 등 문예 운동 부문에서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삽화가로는 나도향, 이무영, 박종화, 백철 등의 글에 그림을 그렸고, 한국 최초의 아동 만화로 알려진 〈씨동이의 말타기〉를 내놓았다. 《개벽》, 《백조》, 《학생》, 《어린이》, 《별건곤》 등 유명한 잡지의 표지화도 그렸다. 특히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연재한 시사만화로 이름을 알렸다.
영화계에는 미술감독으로 참여하다가, 1937년 《심청전》을 연출해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1년, 조선인은 지원병으로 갈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던 조선 청년이 마침내 지원병 제도의 문호 개방에 힘입어 지원병으로 참전한다는 내용의 어용 영화 《지원병》의 영화 각본을 쓰고 연출했다. 이 영화에는 최운봉과 문예봉이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안석영은 《지원병》과 《흙에 산다》와 같은 친일 영화 제작 외에도 황도학회 결성식에 참가하고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신시대》의 표지화도 그려[1],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다. 광복 후에는 조선 영화인 동맹에 참가했다가 좌익 계열이 주도권을 잡아가자 탈퇴하여 우익 영화인들을 규합하여 영화감독구락부를 조직하였고, 우익 계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2대 - [안병원]1926~ 캐나다거주 + 배우자 [노선영] 서울대 성악과 졸
작곡가 1947년<우리의 소원은 통일>〈구슬비〉작곡,[안석주] 작사
[안희복]한세대 음대 교수,안희복오페라단
[안희숙]연세대 음대 피아노과 교수,연세대학교 명예교수
1대 - [이유태]1916~1999 친일 화가,서울태생 이당 [김은호]제자, 해방 후 이화여대미대 교수, 퇴계 이황 선생 표준영정 그림
호는 현초(玄艸). 20세 때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웠으며 1937년 〈가두 街頭〉로 제16회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입선한 것을 시작으로 1940~44년 계속 입선했으며 일본 도쿄데이코쿠 미술학교[東京帝國美術學校]에서 공부했다. 1943년까지 선전에서 3차례의 특선과 2차례의 창덕궁상을 받았으며, 마지막 선전에서도 특선을 받았다. 194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8·15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미술과 교수를 지냈다. 1955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추천작가·초대작가로 활동했으며 김기창과 함께 백양회(白陽會)를 조직했다. 1965년 신문회관·신세계화랑, 1972년 현대화랑, 1983년 동산방화랑·문예진흥원 등에서 개인전을 7번 열었다. 국전 운영위원, 예술원 회원을 지냈으며, 이화여자대학교에서 32년 동안 후진을 양성하다가 1979년 미술대학 학장으로 정년 퇴임했다
2대 - [이필중] 1951~포항공과대학교 전자전기공학과 교수
1대 - [김동하] 1919~1995 (가네모리 다케오 金森武雄) 만주신경군관(1기)대위. 박정희 1년 선배 광복후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2기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미국 해병참모대학교 졸업 해병1사단장 1958 박정희 516 쿠데타 동참 대한체육회회장 1963 해병중장(해병대), 박정희 정권하에서 한국마사회회장,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
원적지는 함경북도 무산군이며 역시 함경북도 무산군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린 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다.[2]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인 1942년에 만주의 신경군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하고 만주군 장교로 임관했다. 박정희의 신경군관학교 1년 선배이다.
만주군 대위일 때 일본군이 전쟁에서 패하자 귀국하여 1946년 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 후 미국 육군참모대학교를 졸업하였고 1949년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요원으로 참여하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참전하여 인천 상륙 작전, 서울 탈환, 도솔산 전투, 대우산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가하였다. 1951년에는 펀치볼 전투에서 승리하여 수훈을 세웠다.
1953년에는 교육단장을 역임했고, 휴전 협정 체결 후인 1958년에 해병 제1상륙사단장에 올랐다. 1961년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에 해병대를 이끌고 동참했다. 당시 계급은 해병 소장이었으며 박정희와 함께 한강대교를 건넌 정변의 핵심 세력 중 한 명이었다. 정변 성공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 고문과 최고회의 운영기획위원장, 재정경제위원장, 외무국방위원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을 차례로 지내고 1963년 해병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러나 1963년에 박임항 등 정변 세력 내의 함경도 인맥이 대거 숙청된 반혁명사건에 연루되면서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권력에서 멀어졌다. 당시 김동하는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제3공화국 정권의 2인자로 부상한 김종필을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후 풀려나 박정희의 배려로 한국마사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재단법인 5·16민족상 이사로도 활동했다. 한국 전쟁에서 세운 공로로 을지무공훈장을 받았고, 전쟁기념관은 2001년 12월에 김동하를 '이 달의 호국인물'로 선정하여 현양행사를 거행한 바 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대 - [김유]1944~ 충남대기계공학교수
[김준] 삼미아트라스(삼미특수강)사장
[김인] 순화의원 부원장
1대 - [서종철] 1924~2010 경남양산, 일본군 소좌, 해방후 민간인 일본도로 학살, 국방경비대1기(46) 육군참모총장(69∼72 박정희정권) 국방부장관(73∼77박정희정권) 박정희정권 대통령 안보담당 특별보좌관(박정희정권) 초대~2대 한국야구위원회(KBO)총재(1981년 12월 11일 ~ 1988년 3월 27일) 대전현충원 안장
일본도로 학생들 목을 친 국군 친일 장교 - http://www.vop.co.kr/view.php?cid=A00000474594
2대 - [서정환] 서일환경 대표
[서국환] 개인사업
[서진환] 재미교포
[서승환] 연세대 교수
[서주환] 경희대 교수
[서성림] 주부
가수 서지영의 부친은 [서승환] 아니면 [서주환]입니다.족보에 서지영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1대 - [원윤수](元胤洙,1887~1940)+[최송자] 광산업(백년금광)부호, 일본군에 군량미, 비행기, 군대금 등 헌납 (민대식, 이석구와 함께 일본에 <경성 제2호기>(비행기) 구입비로 1만원을 헌납) 친일부역자[최창학] 친일부역자[방응모] (조선일보)와 함께 광산 성금으로 이름을 날린 부호, 친일부역자 [김석원]과(일제군인)원석학원(성남중고등학교(대방동) 설립1938년1월,원석학원은 원윤수의 "원" 김석원의 "석"짜를 따서 지은 이름}
현재의 서울 용산구 도동 지역 출신이다.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7년 경부터 경성부 남대문시장에서 잡화상을 운영했다. 20대 후반인 1915년 무렵에는 과일 위탁 판매업을 경영하면서 기업인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932년 경에는 광업을 겸하였는데, 황해도 곡산군 백년산에서 텅스텐을 발견하여 백년광산으로 개발하면서 더욱 큰 부를 쌓게 되었다. 광업 기업인으로 크게 성공하여 함경남도 안변군, 강원도 횡성군, 경상북도 김천군 등에 100광구 이상을 보유하게 되었다. 광산 경영과 함께 해산물 도매상과 모피 무역상 운영도 병행하였다.
1922년에 설립되어 과일 위탁 및 중개를 맡은 경성흥업과, 중석 채굴과 판매를 주로 담당한 합작회사 일화광업상회, 해산물 모피 회사로 1935년에 설립된 대창상회의 세 회사가 주요 사업 분야였다.[1] 1937년 이후 백년광산을 매각하고, 금융신탁, 요식업, 제조공업, 상업 등 여러 분야에 분산 투자하였다.
중일 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국방열을 보급"한다는 취지로 창립된 조선국방협회 발기인을 지냈다.[2] 일본군에 군량미와 비행기 대금 등을 헌납하여, 이 무렵 최창학, 방응모와 함께 광산 성금으로 이름을 날린 부호들 중 한 명이었다.[3]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4]에는 353명의 조선인 공로자 중 한 명으로 기재되어 있다.
1934년에 백년학교를 설립[5]하고 학교 사업에 사재를 여러 차례 내어놓는 등 교육에 큰 관심을 보였고, 1938년에는 성남고등학교의 전신인 원석학원을 설립하였으며, 1940년 1월 5일 사망했다.
2008년에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지역유력자 부문에 선정되었다.
2대 - [원정숙] 본처의 딸
[원동희] 첩(박복순)의 아들
3대 - [원승욱] 현 원석학원(서울대방동 성남중고교) 이사
1대 - [최남선]1890년 ~1957년 10월 10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주국 건국대학 교수,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잡지《소년》을 창간,〈해에게서 소년에게〉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 하나였지만 변절 1943 도쿄 재일조선인유학생 학병지원 권고 강연 1949 친일 반민족 행위로 기소, 병보석 석방 1950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
2대 - [최한웅]
3대 - [최학주]1932~미국 이민
[최국주] 뉴라이트전국의사연합 간부, 출판사 동명사 대표, 최국주피부과 원장
[최득주] 경기대 경영학부 교수
1대 - [유치진] 1905~1974 친일극작가. 아호 동랑, 해방후 반공작품 몰두, 한국연극협회회장, 동국대학교교수
1945 ~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1944 ~ 조선문인보국회 극문학부 회장 1941 ~ 문인협회 간사
극예술연구회 현대극장 서울예술대학 동랑청소년종합예술제
경상남도 통영군 충무읍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한 뒤 10대에 일본에 유학하여 릿쿄 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1931년 귀국하여 곧바로 극예술연구회를 조직하고, 《문예월간》에 연재한 〈토막 (土幕)〉을 시작으로 농촌을 무대로 한 사실주의 작품을 발표하며 극작가로 활동했다. 〈토막〉을 비롯하여 〈버드나무 선 동리 풍경〉(1933), 〈빈민가〉(1935), 〈소〉(1935) 등 1930년대 초중반에 발표한 작품들은 식민지의 농촌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하여 카프와 같은 경향파적 특성을 보이고 있는데, 이 때문에 카프 문인들로부터 동반자 작가로 평가 받기도 했다. 이 무렵 발표한 평론인 〈노동자 구락부극에 대한 고찰〉(1932) 등에도 계몽적 한계는 엿보이나 진보적인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유치진의 초기 성향이 잘 드러나 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친일 연극을 다수 공연했다. 예를 들어 1942년 발표한 〈북진대〉는 일진회 회장 이용구의 생애를 찬양한 작품이다. 관제 연극 공연을 위한 현대극장을 주도했고, 현대극장 창립 작품으로 일본의 만주 침략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흑룡강〉의 희곡을 썼으며, 함세덕, 조천석 등의 친일 작품을 연출하고 친일 수필도 발표한 기록이 있다. 조선연극협회, 조선문인협회의 간부를 지냈고, 1944년에는 어용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의 소설·희곡부 회장이 되었다. 광복 후 우익 연극계에서 활동하며 반공 작품을 공연했고, 대한민국 연극계의 기초를 닦았다. 해방기의 대표 희곡으로는 좌익 측에 대한 비판 의식이 포함된 〈조국〉(1946), 〈자명고〉(1946), 〈별〉(1948), 〈흔들리는 지축〉(1949)이 있다. 한국 전쟁 이후로는 우파적 경향성은 희석되고 영화, 음악, 무용 등 인접 장르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실험적 기법을 시도했다. 1958년에는 서울예술대학의 전신이 되는 한국연극연구소를 설립하였고, 1960년대 이후로는 희곡 창작보다 드라마 센터 건립 등 연극 교육에 몰두했다. 국립극장 극장장, 한국연극협회 회장, 동국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도 역임했다. 유치진은 일제 강점기 당시 현대극장을 중심으로 한 친일 행적이 뚜렷한 편이었기 때문에 반공주의가 다른 이념이나 논리에 앞서던 1950년대에 극예술연구회 시절부터의 동료인 김광섭과 희곡 〈왜 싸워〉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등 이미 연극계 친일 논란의 중심이었다. 1991년 대한민국 문화부가 유치진을 4월의 문화 인물로 선정했지만 경상남도 충무시(현재의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 예술인들이 유치진의 친일 행적을 문제삼는 바람에 김정호로 교체되는 일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연극 부문에 포함되었다. 총 12편의 친일 저작물이 밝혀져,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2대 - [유인형][여자]1936~1968서울예대교장,서울예술대학연극과 교수
[유덕형]1938~현 (2013년)서울예대학장,이사장,학장,총장,연극연출가
[유세형]영화인 "유인촌은 유치진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1대 - [김대우] (金大羽, 1900년 7월 10일 ~ 1976년 4월 22일) 일제강점기관료,경상북도 지사, 경북지사 근무 공금 횡령, 1960년 제5대국회의원 선거 출마했으나 낙선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평안남도 강동군 출신이며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이다. 191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 광산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일 때 3·1 운동이 일어났다. 김대우는 탑골 공원 시위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7개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러나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공학부를 졸업한 1925년 조선총독부 관리로 임명되면서부터는 유명한 친일파 관료가 되었다. 김대우는 총독부 임야조사위원회에서 관직을 시작하여 평안북도 박천군의 군수(1928), 평안북도 내무부 산업과장(1930)으로 승진했다. 1936년 총독부 학무국의 사회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는데, 황민화 정책의 첨병인 이 자리는 일본 고등문관시험 출신들이 앉는 요직이었다. 김대우는 이 직위에 근무하면서 1937년 학무부 촉탁 이각종에게 〈황국신민의 서사〉를 작성하도록 하고, 각급 학교 등에서 이를 암기, 제창하고 출판되는 모든 서적에도 반드시 실을 것을 강요하였다. 1939년에는 전라남도 참여관 겸 내무부장, 금융조합연합회 전남 감리관, 전남 방공위원회 위원, 광주 사상보호관찰심사회 예비위원에 임명되었고, 1940년 경상남도 참여관 및 산업부장을 거쳐 1943년 전라북도 지사에까지 올랐다. 전북 지사를 지낼 때는 징용을 관장하는 근로동원원호회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김대우의 빠른 승진 비결은 일제에 대한 특별한 충성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군수를 지내고 광복 후 여러 차례 당시의 행적을 참회한 이항녕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경상남도 하동군 군수로 있을 때 경남 산업부장으로 근무하던 김대우가 군별로 공출미를 강제로 할당한 것은 물론, 보고된 재고량을 못 믿겠다며 할당량을 터무니 없이 늘려 수탈을 조장한 바 있다고 한다.이렇게 승진을 거듭하던 김대우는 태평양 전쟁 종전 두달 전인 1945년 6월 경상북도 지사에 임명되어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 총독 아베 노부유키의 지시에 따라 임시로 경무국장 대리에 임명되어 행정권 인수 인계를 위한 송진우 등과의 협상에 참가했으며, 미군정이 총독부의 행정 기능을 그대로 인수하면서 그도 계속 경북 지사로 근무하다가 10월 19일에야 미군 도지사의 고문으로 물러났다. 미군정 경북지사로 근무할 때 공금을 횡령한 것이 드러나 1946년부터 도피 생활을 하였고,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처벌은 받지 않고 풀려났다. 이후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대 - [김광연]1929~서울송도병원(대장항문) 원장 + 배우자[이영희]
[김광순]한국하우톤(충남아산) 회장
[김숙연][여] 재미교포
1대 - [심종협](친일매국노) (沈鍾協, 1882년 음력 9월 ~ ?) 조선총독부 관리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의 관료이다. 본관은 청송이며 출신지는 경기도 죽산군이다. 심종협의 집안은 현재의 용인시인 죽산군 근이면의 지주 가문으로, 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다. 한학을 공부하여 1905년에 조선 덕종의 묘인 경릉 참봉에 임명되었고, 1906년에는 탁지부 주사를 지내는 등 대한제국 말기에 관리로 일했다. 1907년에는 9품인 탁지부 서기랑에 올랐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로 조선총독부 체제가 출범하여 총독부 군서기로 이동하게 되었다. 경기도 양천군과 죽산군, 가평군, 양주군 서기를 차례로 지내던 중 고등관 8등의 총독부 군수로 승진하여 광주군 군수로 발령받았다. 1923년에 광주군수를 마지막으로 퇴관할 때 종7위에 서위되어 있었다. 서양화가 심형구는 심종협의 아들이다.[1] 심형구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보였으나, 집안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다가 형의 지원으로 화가로 성장하게 되었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포함되었다. 이 명단의 문화/예술 부문에는 아들 심형구도 들어 있다
2대 - [심형구] (친일매국노) 1908. 6. 4 ~ 1962. 8. 6. 서양화가 + [김자경] 1917 ~ 1999 성악가
심형구 : 1929년 미술수업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1931년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했다. 이때 김인승을 만나 평생 교우관계를 맺게 되었다. 1936년 재학중에 조선미술전람회(선전)에 〈노어부 老漁夫〉를 출품해 특선을 차지했고, 이듬해 16회 선전에 〈해변〉·〈부인상〉을 출품하여 조선총독부상을 받았다. 그후 해방되기 전까지 선전에 계속 특선되어 재능을 인정받았다. 1938년 도쿄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5년간 이화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있었다. 1939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고 1940년 선전의 추천작가가 되었다. 일본이 전시체제를 구축해가던 무렵에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선전의 한국인 추천작가는 이인성·김인승·심형구뿐이었는데, 이에 걸맞게 태평양전쟁에 복무하는 군인을 그린 〈흥아(興亞)를 지키다〉를 1940년 19회 선전에 출품하는 등 친일적인 행각도 벌였다. 1941년 성악가 김자경과 결혼, 1945~50년 이화여자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서울시 문화위원을 지냈다. 1949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고 1949~58년 미국 일리노이 주 애들피대학교에서 객원교수로 있었다. 귀국 후 심장마비로 죽을 때까지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관전(官展)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크게 활약했다. 1963년 신문회관에서 '심형구 유작전'을 열었다.
김자경 : 성악가, 홍난파의 권유로 이화여고 음악선생 재직, 별거중인 심형구와 혼인. 김자경오페라단 창단 단장·이사장, 피플투피플 한국본부 부총재 대한민국 예술원상(1974), 은관문화훈장(1974), 중앙일보 문화대상(1976), 국민훈장 석류장(1983), 올해의 음악가상(1984), 황도학회 발기인, 조선미술가협회이사, 단광회(친일미술인모임)
3대 - [심용식]
[심영혜] 여 1943~
[심홍] 1945~독일부시 한국지사 전무
[심현식] 1954~김자경오페라단이사
1대 - [이익흥] (李益興, 1905년 3월 10일 ~ 1993년 11월 27일, 평북 선천)
해방후 죽음을 피해 월남한 후 이승만 정권에서 치안국장, 경기도 지사등 내무부장관, (4.19혁명때 발포명령}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과 졸업 동대문 경찰서장 경기.경남 경찰청장 헌병부사령관 겸 서울헌병대장 치안국장 경기도지사 4대 민의원 내무부장관
일제강점기, 친일경찰로 독립운동가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으며, 훗날 제1공화국에서 이승만 정권에 아부하여 고급경찰간부로 활동하였고 사사오입 개헌의 공로로 제13대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평북 선천에서 태어났다. 일본 규슈 제국대학 법과 졸업한 후 총독부 경찰관이 되어 조선인으로서는 이례적으로 평북 박천군 경찰서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월남하였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에는 치안국장, 경기도 지사등을 거쳐 내무부 장관 직에 임명된다. 내무부 장관 시절 그는 야당(민주당)을 가혹하게 탄압했는데, 특히 1956년 9월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주모자 가운데 한사람. 1960년 4.19 혁명 후 체포되었지만, 이듬해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석방되었다. 1993년 사망했다
2대 - [이광조]1935~미대지여행사 대표
1대 - [홍사익] (洪思翊, 1889 ~ 1946) 일본군 중장, 일본 육군사관학교, 일본육군대학 출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필리핀 연합국 전범재판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함. 남양홍씨 토홍계 26대 손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 을사조약 체결 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 재학 중 능력을 인정 받아 1909년 이응준, 김석원과 함께 국비 유학생으로 뽑혔다. 영친왕이 일본 중앙유년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되면서 유학 동반자로 선발된 것이다.
그는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14년 5월 28일 졸업(제26기)하고 임관했다. 함께 졸업한 한국인은 13명이었고, 이 가운데는 독립운동가 지청천과, 이응준, 신태영, 조철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941년 소장이 되었고 1944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엘리트 군간부를 양성하는 일본육군대학에서도 수학했는데, 일제 강점기 동안 육군대학에 입학한 조선인은 영친왕, 이건, 이우와 홍사익 네 명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왕족이므로 평민 출신은 홍사익 한 명이었다. 태평양 전쟁 중에 중국에서 여단장으로 근무하다가, 1944년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남방군 총사령부의 병참총감에 임명되었고, 연합군 포로수용소 소장을 겸직했다. 이 때문에 종전 후에 필리핀에서 열린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포로 학대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홍사익은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B·C급 전범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군 내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었던 한국인이었다. 2005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1차 명단 중 군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2대 - [홍국선] ?~1984 와세다대학, 광복 후 한국은행 근무, 경기도 안성
[홍현선] ?~ 재미교포(로스앤젤러스)
1대 - [김창룡] 1916~1956 + [도상원](都相媛)(미망인)(대전거주) 만주관동군헌병보조원 1940헌병오장(伍長) 광복후 귀국(함경) 북한에서 사형선고받았으나탈출, 월남. 1946 조선경비사관졸 1947 방첩대장 1949,한국독립당 김구 암살배후 특무대장
"나의 남편이 나쁜사람이었다면 좋은 가문출신의 나와 맺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우리 남편의 묘를 왜 자꾸 현충원에서 이장하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공산당 때려잡은게 왜 죄인가요?조작하지마세요.사람들, 이해할 수 없어요. 해마다 대전 현충원에 몰려와서 데모하고 남편 묘를 파내라는 겁니다. 실제로 그들이 묘를 파헤치기도 했지요. 억울하고 부끄럽고 분통 터지고 나라 꼴이 한심합니다.“� - 김창룡 미망인 도상원 (85세) (2009년5월)
2대 - [김재중] 再重 남 - 외국거주
[김현득] 顯得 여 - 외국거주
[김정기] 挺起 여 - 대전거주 + 배우자[김ㅇㅇ)(교수)
1대 - [김석원] 1893∼1978 (창씨명 가네야마) 일본 육사, 만주군 독립군 토벌, 이태원초등학교,원석학원 성남중고교(서울대방)설립 1945년일본육군대좌 광복 1956 소장 예편, 안중근숭모회 이사장
한성부 출생이다. 1909년 일본에 유학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1915년 일본 육사를 제27기로 졸업하고 1917년에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 중대장으로 화려한 전과를 기록했고, 1937년 중일 전쟁 때는 대대장으로 출전했다. 일본군에서 제대할 때까지 별은 달지 못했으며, 최종 계급은 일본군 대좌(대령)였으므로 중장이었던 홍사익에 이어 일본군에 복무한 조선인 중 최고위급 인물이다. 김석원은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정도를 지나 침략 전쟁에 일선 지휘관으로 적극 뛰어들어서 훈장을 받았고, 특히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들과 직접 전투를 벌인 인물로 잘 알려져 있으나 그가 세운 대부분의 전공은 중국군을 상대로 한 것이다. 김석원은 2개 중대의 병력으로 1개 사단의 중국군을 쫓아버리는 등 눈에 뜨이는 전공을 올려 〈김부대장 분전기〉, 〈김석원 부대 격전기〉, 〈전진여담(戰塵餘談)〉 등의 기사가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그리고 실제로 위에서 거론한 <金部隊의 奮戰記(매일신보, 1938년 03월 11일 3면 1단)>, <전진여담(매일신보, 1939년 03월 29일 3면 3단)> 등은 모두 만주에서의 독립군 토벌이 아닌 북중국 전선에서의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올린 전공을 다룬 것이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학병으로 참전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회에 이응준 등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대좌 계급으로 평양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광복 후 바로 상경하여 이응준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임시군사위원회에 참가했다. 이 조직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 모임인 계림회가 주도하여 조직한 군사 단체였다. 그는 대한민국 국군 대령으로 임관하여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 국군의 중추를 형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1949년 10월 한국군이 북한 상인과 북한산 북어를 밀무역하여 이익을 챙긴 이른바 '북어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두고 국방부 참모총장이었던 채병덕 장군을 거론하였다가 강제 예편 당하였다. 이듬해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사단장으로 현역 복귀하여 조선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가 김일성의 아내 김혜순의 죽음과 상관이 있다는 루머가 있다고 말했다.
북한에서는 한국 전쟁의 발발 원인을 미군 주도의 북침으로 보고 있으며, 이때 북침 계획 과정에 참가한 대한민국 국군 측 인물로 김석원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의 항일 투쟁 경력과 대한민국 국군 장성을 지낸 김석원의 독립 운동 탄압 경력을 종종 대비시키고 있는데, 보천보 전투 이후 김석원이 김일성 부대 토벌에 나서면서 함흥에서 혈서로 쓴 "무운장구"라는 깃발을 들고 성대한 장행식을 가졌다가 결국 패퇴했다는 등의 일화가 인용된다.[5] 그러나 당시 복무 기록 등에는 김석원이 함흥에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또한 북한 측이 일본군 74연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간삼봉 전투"가 있었다고 하는 날짜(1937년 6월 30일) 직후인 1936년 7월 15일자 동아일보는 "78연대 소속 대대장인 김석원 소좌"가 탑골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했음을 보도하고 있다. 일본어 버전 역시 간삼봉에 김석원이 참가했다는 주장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실제 간삼봉 전투가 일부 일본군 파견대와 김일성 부대 사이의 소소한 총격전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1956년 예편한 뒤 이후 동업자 원윤수와 함께 설립한 성남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도 역임했다. 김석원 생존 중에 성남고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가 2003년 친일파 논란과 관련된 항의 를 받고 철거된 일화가 있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중위로 참전했다가 필리핀에서 전사한 그의 차남 김영수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저서로 회고록인 《노병의 한(恨)》(1977)을 남겼다
2대 - [김영철] 1923~ ? 전 성남중학교 및 고등학교 교장
[김영수] 1924~1945.4.16 (친일매국노) 1942년 4월까지 일본 육군예관사관학교(옛 일본 육군사관학교 예과) 재학. 1942년 10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1944년 4월 육군사관학교를 제57기 졸업. 1944년 7월 일본 제국 육군 소위로 임관, 전쟁 당시 일본 제국 육군 중위로 참전했다. 1945년 4월 16일 필리핀 레이테 섬에서 연합군과 교전을 벌이던 도중에 전사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군 부문 포함
3대 - [김명선] 2013년 현 원석학원 이사장
4대 - [김성민]
[김성환]
1대 - [이용] 1923~2009 함경경성군, 간도특설대1기, 해방후 친일파숙청두려워월남, 육군사관졸 1948수도사단기갑연대장,지리산공벌투입 5•16군사정변후 강원도지사,육군소장예편, 철도청청장,인천제철사장 제13대 강원도지사 1961년 8월 25일 ~ 1963년 12월 16일 제16대 교통부 차관 1966년 9월 28일 ~ 1970년 10월 21일 제6대 철도청장 1970년 10월 22일 ~ 1971년 6월 12일
2대 - [이만석] 자영업
[이화석] 자영업
[이창석] 연세프라임치과의원 치과원장
1대 - [차남진] 1893년 2월 2일 ~ 1970년 3월 6일
1917년 전후에 일본 메이지 대학 법학과를 졸업했으며 해동물산 감사(1919년 ~ 1923년), 목포창고금융 감사(1919년 ~ 1931년), 호남은행 이사 및 감사(1920년 ~ 1939년), 동아호모(護謨, 고무)공업 이사(1925년 ~ 1935년), 목포양주 사장과 전무이사, 목포양조 이사(1929년 ~ 1942년), 전남신탁 이사(1929년 ~ 1931년), 전남백화점 이사(1930년 ~ 1933년), 목포곡자(麯�, 누룩)합동 이사(1933년 ~ 1939년),동아약업 이사(1937년 ~ 1942년), 호남제탄 사장과 호남정광 사장(1938년 ~ 1939년), 목포해운 이사(1940년 ~ 1942년) 등을 역임했다. 목포청년회 총무(1920년 5월) 및 부회장(1922년 9월), 목포소비조합 발기인(1920년 5월), 목포교육협회 상무이사(1923년 4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목포지방부 발기인 및 집행위원(1923년 ~ 1924년), 동아일보 목포지국장(1928년 8월 ~ 1938년 10월), 목포부협의회원(1927년 ~ 1931년), 목포부회의원(1931년 ~ 1941년), 전라남도 관선 도회의원(1933년 5월 11일, 1937년 5월 11일 임명), 목포상업회의소 부회장(1935년 9월) 및 의원(1935년 9월 ~ 1938년), 목포중등학교기성회 위원장(1937년 2월), 목포경방단장(1939년 ~ 1941년), 평의원(1941년 10월)을 역임하는 등 전라남도 목포 지역의 유력자로 성장했고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평의원을 역임했다. 1926년 7월 28일과 8월 27일 일본 정부로부터 전라남도 무안군 일대 간석지 개간을 허가받는 특혜를 얻기도 했으며 1941년 8월 15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기도 했지만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기타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 경제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대 - [차범석]1924~2006 극작가,[배우자] [박옥순] 1924년 전남 목포 출생,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 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희곡 당선 1963-1983년 극단 ’산하’ 대표. 광화문포럼 회장,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문화방송 편성부국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부회장, 국제극예술협회 한국본부 부회장,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극작가협회 회장, 한국방송광고공사 심의위원장, 서울예술단장,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이사장, 예술원 회장 청주대 연극영화과 교수, 서울예술전문대 극작과 교수
3대 - [차순주] 1957~인제대학교 의과대학 의학과 영상의학과학교실 교수
[차순규] 동남해운㈜ 사장,(대원마리타임(해상운송)(서울 무교동)대표
[차혜영] 딸
[차혜진] 딸
1대 - [구자옥] (具家滋玉 구쓰이에 치다마) 1887.3.30일 ~ 1950년,본관은 능성(綾城), + 배우자 [박인숙] 朴仁淑, 1889년 ~?)
광복 후 첫 경기도지사 한국민주당 당원 경기도 지사 재임 중이던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한 뒤 조선인민군에게 이끌려 납북. 전쟁 초기 대통령 이승만이 비밀리에 피신할 때 도지사와 경찰 간부들도 대부분 몸을 피했으나 도지사 가운데 구자옥만이 방송을 믿고 경기도청에서 머무르다가 조선인민군 정치보위부 5명에 의해 피랍, 친일매국의 죄로 1950년 11월에 인민군에 의해 사망. 한국의 기독교 청년운동가이자 교육자, 상담가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며 각종 사회활동에 동참하였고, 3.1 운동과 흥업구락부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1941년 대화숙 보호관찰 처분을 계기로 전향, 친일활동을 하였으며, 광복 직후와 미군정 치하에서 경기도지사를 맡아 보았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 감리교 활동 외에 독립운동에 동참하였고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이후 대화숙에서 보호관찰처분을 받던 중 전향했다. 경기도 광주 출생이며 원적지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진동이다. 구자옥은 1887년[1] 3월 30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태어났다. 서양화가 구본웅의 숙부이다. 일제 강점기에 개신교 신자로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인 유명 인사였다. 한성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성관립영어학교 재학 중 감리교 신자가 되고, 1910년 이후 중앙기독교청년회에 참여하였으며, 졸업 후 감리교협성신학교(監理敎協成神學校)로 진학했다. 그뒤 일본으로 유학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에 입학했으나, 수료하고 귀국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靑山學院 神學部)에 입학했으나 역시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독립운동과 기독교 신앙 활동[편집]1917년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가 되었다.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혐의없음으로 풀려났다. 1920년 6월 윤치호, 김성수, 한기악(韓基岳), 조만식, 장덕수, 안재홍, 이갑성, 송진우 등과 함께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조선인 민간 자본으로 대학교를 설립하려 노력하였으나 조선총독부 학무국에서 인허가를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1921년 미국으로 유학, 시카고의 시카고 조지 윌리엄스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시카고 조지 윌리엄스 대학을 수료하고 1923년 귀국하였다. 중앙학교 학감(學監)을 지냈으며, 그뒤 경성기독교청년회에 감리교 대표로 참여하고 바로 경성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선출되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연합회 사교부 간사 등을 역임하며 기독교청년운동에 힘썼다. 1925년 흥업구락부 결성에 참가했다. 흥업구락부는 경성부와 경기도 지방의 기독교계 지도자들인 이상재, 윤치호, 신흥우, 이갑성, 유억겸 등이 이승만 노선에 따라 조직[2] 한 것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와 감리교 교회를 중심으로 온건한 민족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1927년 일찍 사망한 이상재를 제외하고는 광복 전 다양한 시기에 변절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는 이후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의 감리교측 대표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으며, 매각될 위기에 처한 이순신 장군 위토 보존 모금운동과 브나로드 운동, 농촌 계몽 활동 등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 다시 도미하여 메사추세스 기독교청년회에서 다년간 연구하고, 신학석사 학위를 수여받고 귀국하여 흥업구락부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후반 이승만이 영향을 발휘하던 독립운동단체 흥업구락부에서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서대문경찰서에 감금된 윤치영의 진술로 1938년 5월 18일자 서대문경찰서장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흥업구락부의 동지회원의 한사람으로 보고되었다. 태평양 전쟁 기간 자옥도 1938년 발생한 흥업구락부 사건을 계기로 대화숙에서 보호관찰처분을 받고 1941년 전향하여 황도학회에 참여했고, 1944년 《매일신보》에 〈필승은 신의 명령〉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하여 태평양 전쟁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전쟁 지원을 촉구하는 등 친일 활동을 했다. 임전대책협의회와 경성정동연맹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 1940년 5월 창씨개명 때는 구쓰이에 치다마로 창씨개명하였다.
1945년 8월 16일 백남훈, 김성수, 김도연, 송진우, 윤보선, 허정, 장덕수 등과 함께 정치 세력을 형성한 뒤 우익 세력 연합으로 9월 한국민주당을 창당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미군정 시기에 경기도 도지사를 역임했다. 당시 YMCA에서는 증경 총무를 맡고 있었다.
2대 - [구본준]具本俊 ?~1998 + 배우자[유경재]兪璟在) 이승만 전 대통령 대변인
LG전자대표와 동명이인, LG전자대표 구본준이 아닙니다.
3대 - [구광모]具光謨,1941년 ~전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
[구영모]具英謨,1942년 ~여자 + 배우자 [임성택] (전 삼미 三美(주)사장(1980년대)대일해운 사장)
[구윤모]具允謨,1945년 ~자영업
[구은모]具恩謨,1947년 ~여자 +배우자 [장석](전 선박해양공학연구소장,현 해양시스템안전연구소 명예연구원)
[구경모]具敬謨, 1949년 ~여자 + 배우자 [문용린](전 서울대교수,현 서울특별시 교육감)
첫댓글 그들의 능력이야 어찌되었건 친일파들이 없는 대한민국에서 살고 싶습니다.
공자는 擧直錯諸枉則民服, 擧枉錯諸直則民不服.라고 말하였는데 지금의 대한민국이 굽은자를 들어서 바른자 위에 세우는 정치를 하여 나라가 위태로운 지경에 까지 와 있습니다. 친일파들이 득세를 하여 정권과 법을 농단하니, 지금의 온갖 문제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오고, 사람들이 법을 피하긴 하여도 부끄러움은 없는 지경이 되어 통탄할 지경입니다.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