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시 10인선
김규은 김순권
김용엽 김정원
남근영 노종래
윤용순 이혜선
정연국 황다연
금언(金言)
김규은
흰 동전 반듯하다
동그스름한 깃
남납한 섶하며
완만한 도련
진동 끝에서 궁글린 배래가
반달 같은 옷소매 펼쳐 만져본다
수복(壽福), 금가루 눌러눌러 기원하신 금언(金言)
꽃자주 옷고름에 끝동에 판박은 금박 무늬
긴 세월 이리도 역력한 당부이신지
획수 어김없이 두렷히 반짝인다
“어머니 옷고름은 흐드러지게 달아주세요”
“넘치면 밟힐라”
“곱고 음전하게 달아야 하느니”
쌓이는 세월 켜켜에 넣어둔 약내 같은 조바심
눈시울 섬벅섬벅 알싸하다.
『월간문학』등단(1991년). 시집『냉과리의 노래』외 다수. kyueunk@daum.net
영국의 풍경
김순권
영국은
신사의 바바리 코트, 모자 위에
송알송알 맺히는
물방울에서 돋보인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을비
지하철 깊이로
세계에서 으뜸인
피카딜리 서커스
옥스퍼드 서커스는
에스켈레이터로 내려오는
까만 두더지를 닮았다.
땅속에서도
우산을 턱에 고인 채
셰익스피어를 읽는 독서광들.
영국은
신으로 묻어오는
감사의 입에서 배우게 한다.
숱한 세월을 서두르지 않으며
여유 만만히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세계적 기질을 역사로 엮는다.
영국 사람들은
침묵 속에 감격케 하는 웅변이다.
월간『한국시』등단(1990년). CBS 이사장 역임. CSI 스위스 본부이사. 경희대동문회 자문위원. kcbible@hanmail.net
파적(破寂)
김용엽
이른 아침
양철지붕 위 땡감 떨어지는 소리에
헛간 옆 돼지 잠 깨고
한복에 흰 앞치마 두르고
짚 소쿠리로
재치는 새댁
헛간에 버린
푸르스럼한 수국색
그 위에 맘껏 갈긴 오줌
사르르
남은 불씨 꺼지는 소리에
화들짝 놀란
가죽나무 위 참새 한 마리.
대구 달성 출생. 동국대학교 일어문학과 졸업.『 농민문학』등단(1991년). 남해문인협회 사무국장. 한국문인협회 회원. 남해향토역사관 관장 역임. 시집『정신병원 풍경』『쪽빛 바다의 섬 남해도』『일본 유배 이야기』외 공저 시집 20여 권, 논문 <일본용신사상연구> <문화예술교육을 통한 청소년 교육방안연구> 외 다수. kyys56@hanmail.net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올라
김정원
지고 뜬
해와 달
왕조(王朝) 하나 뒤엎고
긴 성벽으로 남아섰네
솔바람
진눈깨비 흩날리며
어진 임금의 눈물을 더하냐
수어장대(守禦將臺)
핏자국의 그 둘레
쑥덤불 이룬다
후손들
애써 눈감으려 해도
옛일
소줏잔에 떠오르는
치욕.
경북 포항 출생.『 월간문학』등단(1985년). 율목문학상, 민족문학상, 소월문학상 수상. 여성문학인회 이사. 미래시 동인. 성균관대학교, 명지대학교 강사 역임. 시집『삶의 지느러미』, 한영시집『분신(The Alter Ego)』외 다수. wooajnee@hanmail.net
무궁화 밭
隱山 남근영
2차 대전 동양이 보물처럼 나눠 가질
세 대충(大蟲) 협정해 무궁화 갉을
왜충(倭蟲)*에 36년간 수탈당했으니
뭉쳐야 얼씬 못하련만 두 대충(大蟲)*
장에 지목된 두 권욕들에 왕관 씌워
구국 임정 독립군 몫을 관동군 쓰니
편 가른 싸움에 무궁화 몸살 앓고
남쪽 울타리 내 도와줌도 옥죄니 괴롭구려
왜충이 약속 무시 더 커질까
두려운 욕심에 대충(大蟲)이 왜충 내쳤지만
욕심끼리 큰 싸움 결정 무렵, 우린
해방이라 외쳤건만 더 큰 두 대충(大蟲)
남북 침탈에 무궁화 밭 다시 피울음
갈라진 무궁화 밭 70년 돼도 끝이 안 뵈네
왜구 해충 쫓았으면 그 굴 분단 몫을
우린 독립할 몫인 무궁화 밭 갈라
어깨 해 살자더니 이젠 그 대가와
강한 우산강매 흡습에 무궁화 맥이 없구나
무궁화 꽃 아름답고 끈질기건만
같은 나무끼리 자리 쟁탈전에
뭉칠 날 휘청거림 보이니
바다 건너 대소 태풍들 연거푸
진탕 침도 끈질기게 생존했지만
아─ 무궁화 밭 분열에 분열 어찌되려나?
*왜충(倭蟲) : 무궁화 잎 갉아먹을 왜군. 한국을 침략한 일본. 즉 왜구.
*두 대충(大蟲) : 무궁화 잎 갉아먹을 큰 해충, 미국과 소련.
『한맥문학』등단(1989년). 한국문인협회 회원. nky5955@naver.com
역사의 땅
노종래
민초들은 격문을 받고 벌 떼같이 일어서서
대창 들고 찔러대다 서로 엉긴 황토현은
통한도 시퍼렇게 산 서슬 퍼런 역사의 땅.
의 하나로 죽고 살던 우금치* 과녁빼기서
녹두꽃이 푸른 피를 한 입 물고 내뿜을 때
그들은 쩔쩔매다가 하루만에 물러났다.
쉬쉬하다 숨을 거둔 이름 모를 봉분 앞에
휘일같이 공근하게 잔 올리고 일어설 적
어디서 메뻐꾸기가 잠길 듯이 울었다.
*우금치 : 동학혁명군과 관군이 치열하게 싸운 곳.
월간『새벗』동시 부문(1952년), 월간『문학세계』·『월간문학』시조 부문(1994년) 등단. 경북예술상, 경주시예술상, 경주시문학상 수상. 영남시조문학회 회장 역임, 경주문인협회 지부회장 역임. 시조집『일어서는 풀잎 무늬』외 다수. njl2172@daum.net
사금파리
윤용순
사금파리에 빗물이 고인다
사금파리는
깨어진 사기그릇 조각이다
내버리면서도
잊지 않으려고 붙여진 이름이다
정(情)으로 사는 사람들은
사금파리 조각들이
어디에
어떻게 버려져 있는 것까지도 안다
소낙비 한 줄기 지나가는
풀숲 길
손때 묻은 사기그릇 조각에
빗물이 고인다
잊지 않으려고 하는 그 정(情) 때문인가.
『자유문학』등단(1960년). 공무원 30년, 정당 활동 10년. 시집『신주말에, 고려청자에게 바치는 노래』yoonys5891@hanmail.net
금강산 기슭에서 꿈꾸다
이혜선
어둠살 깃드는 금강산 기슭
온정리 돌담 뒤뜰에 컹컹 개 짖는 소리,
저녁 먹으라고 부르는 어머니 목소리 들린다
불빛 환한 어느 초가집 처마 아래 귀 기울이면
안방에서 새어나는 웃음소리 숟가락 부딪는 소리
도래밥상에 둘러앉은 희야 선이 훈이…
잃어버린 내 유년이 거기 오롯이
남아 숨 쉬고 있다
미국 원조품 내리닫이* 입고 학교 갔다 오는 길에
‘죽도록 사랑하련다’
눈밭 위에 손가락 글씨 쓰던 열두 살의 내가
언니, 동생과 거기 웃고 있다
1960년대 내 어린 시절처럼
벌거숭이 뒷산에서 땔나무하고
앞 냇가에 방망이 두드리며 빨래하는 동족들
자전거 위에 싣고 가는 큰 포대
포대화상 풀어놓는 포대 속에
가난 대신 새 꿈이 가득하기를, 어서 빨리 하나 되기를,
비로봉 위에 둥실 뜬 보름달이
나와 함께 두 손 모은다
*내리닫이 : 바지와 저고리를 한데 붙이고 뒤를 터서 똥이나 오줌을 누기에 편하게 만든 어린아이의 옷.
문학박사. 월간『시문학』등단(1981년). 동국문학인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세계일보>‘ 이혜선의 한 주의 시’연재. 시집『神한 마리』『바람 한 분 만나시거든』『새소리 택배』외 다수. hs920@hanmail.net http://blog.daum.net/hs920
소금꽃
정연국
솔꽃 가루 불새 깃에 흩날리니
느티는 대를 이어 고이
또 한 끼의 소금밥을 짓는데
해밀을 누빌 땐 거침없던
즈믄 바다는 아스라이
한 땀 한 땀 저미던 볕
가시 등골만 선하고
자벌레 걸음 한 발 한 발
느티에 오롯이 길 여는
소금꽃 발자국 소리는
하도 깊고 커서 막막해
바람 잦은 날 마음 밖으로
나 아닌 날 소롯이 놔주며
검은 바다를 품은 곡신은
무심히 사뭇 적요할 뿐
소금꽃은 비움으로 가득 차
바다숲을 벗어나니 바다가
산을 벗어나니 산이 보이네.
월간『풀과 별』로 작품 활동 시작(1974년). 대한민국 불후명작상, 대한민국 문학예술대상, 세종문화예술대상 외 다수 수상. 한국문인협회 재정위원.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건국대학교 행정대학원 총동문회 부회장. 시집『살맛나는 세상 만들기』『침묵의 밀어』『꽃등 혜유미』외 다수. jung.poet@daum.net
늦가을, 천년의 빛깔
황다연
산과 물빛 깊어지더니
그림자도 바쁜 늦가을
땅에 엎드린 가랑잎 천년의 빛깔이라고
온몸의 부드러움까지
내려놓고 그윽해진다
『시조문학』천료 등단(1975년). 부산시민의 종 종신에 시조 헌정 각인. 작품집『생명의 파도』『고전의 숲에서 만난 행복』외 다수. daboyeo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