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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의 고금명성도] 136 (조선전기왕조실록) 4대왕 세종대왕
세종실록 1권 총서에 ‘태조6년 정축(1397년) 4월 임진(4월10일)에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탄생’으로 되어 있고 매년 4월10일 탄신일에 하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정사엔 생시에 관한 언급이 없다. 참고로 세종대왕의 양력 생일은 당시 서양에서 쓰던 율리우스력으로 양력 5월7일이지만 현재 쓰이고 있는 그레고리력 양력으로는 5월15일이 되어 우리나라 스승의 날을 이 날로 잡았다. 인터넷 상에 진시생으로 많이 나오는데 출처는 없다. 아마도 실록의 임진에 태어났다고 하는 것을 진시생으로 잘못 본 것은 아닌가 하다. 임진은 태어난 날이다.
12개의 생시를 전부 검증해본 결과, 축시생이다. 그 상세한 검증 과정은 편의상 후반부에 넣었다.
[간략연보]
1세 (1397 정축년) 4월10일 이방원과 민씨부인(원경왕후) 사이의 3째 아들로 출생. 충녕대군.
2세 (1398 무인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아버지 이방원이 권력을 잡음.
8세 (1404 갑신년) 형 양녕대군 세자로 책봉.
12세 (1408 무자년) 음력 2월 심온의 딸과 혼인 (후에 소헌왕후). 음력 5월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 승하
21세 (1417 정유년) 양녕대군 폐세자
22세 (1418 무술년) 음력2월 우애가 깊었던 동생 성녕대군 14살의 나이로 사망. 8월 왕위를 태종에게서 승계함. 음력 12월 세종의 장인 심온, 태종에게 죽임 당함.
23세 (1419 기해년) 큰아버지 정종 승하
24세 (1420 경자년) 음력 7월 생모 원경왕후 사망
26세 (1422 임인년) 아버지 태종 음력 5월10일 승하. 이후 태종의 신하들과 조정에서 힘겨루기가 이루어짐.
28세 (1424 갑진년) 큰 딸 정소공주 사망
31세 (1427 정미년) 전년도의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으로 태종의 신하들을 몰아내고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을 기용하면서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 진입.
40세 (1436 병진년) 6조 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 서사제 실시로 왕의 업무를 줄이기 시작
41세 (1437 정사년) 세자 문종에게 서무결제권을 넘겨 업무를 줄이려고 시도하나 신하들 반대
46세 (1442 임술년) 세자에게 대리청정이 기정사실화 됨. 이듬 해 대리청정 시행. 이후 온천 등에서 요양
47세 (1443 계해년) 한글 창제
48세 (1444 갑자년) 5남 광평대군 사망
49세 (1445 을축년) 7남 평원대군 사망
50세 (1446 병인년) 왕비 소헌왕후 사망
54세 (1450 경오년) 음력2월 승하
태종(당시 정안군)과 원경왕후(당시 민씨 부인)의 6번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앞의 세 아들은 요절하여 양녕, 효령, 다음의 사실상의 3남이다. 아래로는 성녕대군이 있었으나 역시나 14살에 요절했다. 집현전을 설치하여 학문의 기틀을 잡고, 각종 과학기술을 발전시켰고, 4군6진을 개척하여 지금의 우리나라 영토가 확정되었으며, 결정적으로 훈민정음 창제로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이 되었다. 후대 왕들이 세종대왕의 업적을 언급하는 장면이 실록에 자주 나온다.
하지만 세종대왕이 ‘수령고소금지법’과 ‘노비종모법’을 고수하여 양민과 노비를 위한 나라는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만백성을 위한 정책이 아닌 사대부만을 위한 정책이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수령을 고소하면 고소한 이를 처벌하는 법이다. 후자는 노비인 어머니만으로 아버지가 어떤 신분이건 그 자식이 노비가 되는 것인데, 노비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고 그 노비의 주인인 양반에게는 자신의 재산이 불어나는 기쁨이 되는 제도이다. 그리고 국가 입장에서는 세금을 내지 않는 노비의 수가 늘어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양반이 아닌 장영실을 중용했던 세종이 왜 이런 정책을 펼쳤을까?
이는 시대적 한계이기도 했고 철저한 보수주의자인 세종대왕의 당시 사고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유교에서는 윗사람에게 대드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개별 사안에 관해서는 능력만 있으면 등용을 하지만 제도적으로 신분제에 위협을 가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 유교를 숭상하는 왕이 해야 할 일이라고 세종은 생각했다. 그는 선왕들과는 달리 왕족으로 태어났다. 조선이 건국된 5년 뒤인 1397년에 태어나, 선왕들과는 달리 그는 최초로 태어나자마자 왕족인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지독한 독서광이어서 건강을 걱정한 아버지 태종이 책을 그만 읽으라 명하며 방안의 책을 다 압수했으나 병풍 뒤에 숨겨놓은 책 하나를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는 이야기는 실록에도 실려 있다. 나중엔 태종도 여러 분야의 여러 책을 접하는 것을 적극 지원했다.
형이자 당시 세자였던 양녕대군과 계속 비교가 되었다. 세종(당시 충녕)도 형 양녕에게 직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럴 때마다 양녕은 심사가 뒤틀렸으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신의왕후 제삿날에 매형이 거느린 기생을 양녕이 데리고 나가려 하니 ‘한 집안에서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형을 꾸짖은 적이 있으며, 멋진 옷을 입고 자랑하는 형에게 신하들 앞에서 ‘마음부터 닦으시라’고 충고한 이야기들이 있다.
어긋난 기행을 저지르는 양녕과 성군의 기질이 보이는 충녕의 이야기는 비단 이 둘만의 문제가 아니라 태종과 대신들 전체의 화두였다. 양녕이 폐세자가 되기 2년 전인 태종실록 1415년 12월30일 기사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충녕대군이 의령부원군 남재(개국공신이자, 이방원이 명나라에 갈 때 유일하게 자청해서 수행한 신하)에게 연향(잔치를 베풀어 손님을 접대함)하였다. 대군이 남재를 그 집에서 연향하는데, 남재가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대군에게 이르기를, ‘옛날 주상(태종 이방원)께서 잠저(왕이 되기 전 거처한 사저)에 계실 때에 내가 학문을 권하니, 주상께서 말하시길 ‘왕자는 참여할 데가 없으니 학문은 무엇하겠느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군왕의 아들이 누가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하였는데, 지금 대군이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내 마음이 기쁩니다‘하니 뒤에 임금이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과감하다! 이 늙은이가.’하였다”
남재가 예전에 이방원에게 세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지만 대권에 도전해보라 부추겨 현재 왕이 되었는데, 충녕 역시 예전의 이방원처럼 세자도 아니고 장남도 아니지만 충분히 보위를 이을 가능성이 있다고 부추기는 것을 여러 명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말하는 장면이다. 당시의 양녕과 충녕에 대한 조정에서의 분위기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로 보인다. 그리고 이미 태종이 충녕에게 보위를 이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을 죽였을 때 내세웠던 것이 ‘적장자 계승’이었다는 점이다. 그 정신대로라면 장남 양녕에게 보위를 이어야 하는데 워낙 양녕이 왕의 자질과는 반대의 기질을 보인터라 충녕에게 왕위를 잇는 것이 태종 뿐 아니라 당시 대신들의 전반적인 여론이었다. 어차피 적장자가 못 잇는다면 택현인데, 이는 둘째건 셋째건 상관없이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하는 것이 그 원칙이었다.
마침내 1417 정유년 (세종 나이 21세) 태종은 양녕을 폐세자로 만들고 이듬해 무술년 6월 충녕을 세자로 책봉한 뒤, 두 달만에 군권을 제외한 모든 왕권을 빠르게 충녕에게 넘긴다. 공식적으로는 세종이 왕이 되었다. 그리고는 같은 해 태종은 12월 충녕의 장인인 심온을 죽인다.
마치 영화 서편제에서 소리꾼 유봉이 소리의 완성에 대한 강박이 있어 그의 양딸 송화의 눈을 멀게 하여 이를 이루게 하듯, 외척 발호에 강박이 있는 태종은 충녕의 장인 심온은 죽이고 장모는 노비로 만들어 충녕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충녕의 왕권 강화에 집착한다. 심온은 죽으면서 자신을 이렇게 무고하여 엮어 죽게 한 박은의 본관인 반남박씨와는 앞으로 결혼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지금까지도 청송심씨와 반남박씨는 혼인이 쉽지 않다. 하지만 이는 외척발호에 강박이 있는 태종의 계략이니 심온은 말을 잘못했다고 보여진다. 앞으로 전주이씨와는 혼인하지 말라고 했어야지 싶다, 물론 그런 말을 했으면 3족이 아닌 30족이 멸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세종은 26세에 아버지 태종이 승하한 뒤에도 태종의 신하들과 힘겨루기를 해야 했다. 세종 나이 31세, 김도련 노비 뇌물사건을 계기로 태종의 신하들을 내치고 자신의 신하인 황희와 맹사성을 재상으로 임명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세종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 후 각종 업적을 쌓았으나 어렸을 때부터 가만히 앉아 책읽기를 좋아하고 사냥은 싫어하며 고기를 즐겨 비만을 비롯 각종 성인병을 달고 살았던 세종은 40세 되는 해,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는 6조 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해서 업무를 줄이기 시작하고 급기야 46세에는 세자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시켜 자신은 온천 등에서 요양을 했다. 그래서 조금은 여유로와서인지 세종대왕 최대의 업적인 훈민정음 창제는 47세에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48, 49, 50세에 연이어 5남, 7남, 왕비가 사망하고 세종 자신도 54세를 일기로 승하한다.
[선천명반 분석]
2대왕 정종은 1357 정유년 생이고, 3대왕 태종은 1367 정미년 생, 그리고 세종은 1397 정축년 생으로, 세 분 모두 천기화과와 거문화기를 가지고 있다. 어느 궁인가 악사위천리가 되기 쉬운데, 정종은 형노선이, 태종은 명궁이, 그리고 세종은 형제궁이 그러하다. 정종 입장에서 악사위천리는 동생 태종 이방원이었으며, 태종은 자신이 악사위천리였고, 세종은 망나니 형인 양녕대군과 아버지에 의해 몰살된 외가댁이 악사위천리였다.
일반적인 정황에서의 왕 명반의 특징 중 하나는 주요 궁으로 각종 협이 들어와 무슨 일을 하건 지근거리에서 도와주는 이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세종대왕 명반은 그 정도가 아니다.
부모궁 삼기가회협 형화상봉협 -> 身복덕궁 양타협 작사전도협 -> 전택 身복덕궁 허모 -> 전택궁 권기협 -> 관록궁 작사전도협 -> 노복궁 악사위천리협-> 천이궁 괴월협 -> 칠액천이궁 화령 -> 질액궁 공겁협 형화상봉협 삼기가회협 -> 재백궁 영탐협 -> 자녀궁 권기협, 으로 사오미신유술해자축궁으로 도미노격이 형성되었다.
명신궁에서 화성, 공겁, 천형을 보면서 육길성을 보지 않아 특수격의 조건이 형성되었다. 특수격 중에서도 화기를 보거나 록존이 깨져있는 등, 깨질대로 깨진 듯이 보여야 상격 특수격이고, 또한 괴월이 어느 궁을 협하면 역시나 상격 특수격이다 (자미심전1, p.274-277). 세종대왕의 명반은 부관선에 화기가 좌하고 천이궁을 괴월이 협해주고 있다.
명궁인 진궁의 기량은 고담준론선담병이라고 하여 이런 저런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를 잘 하는 명이다. 특히나 이 명반에선 천기화과로 그러한 지식이 잘 드러난다. 삼태팔좌까지 있으니 얼마나 고상한 지식이었겠는가. 세종대왕은 각종 서적을 섭렵했는데, 특히나 역사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신하들과의 경연에서 각종 역사적 사실을 내밀면서 토론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또한 요즘 말로 정조는 문과1등, 세종은 이과1등이라는 말이 있는데, 세종이 역사 뿐 아니라 각종 기술, 천문, 심지어 음악 분야에서도 일가견이 있어 이와 관련된 기구와 서적 집필을 명하기도 한다. 각 분야의 문화가 꽃 피우던 시절이었다.
고담준론이란 ‘뜻이 높고 바르며 엄숙하고 날카로운 말’이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는 ‘거리낌 없이 잘난 체하며 과장해서 떠벌리는 말’이다. 세종의 명궁에는 기량에 화과까지 있으니 그러한 성향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더욱 강하다. 사실 충녕은 형인 양녕을 대놓고 까는 말을 말이 했다. 대신들이 있는 앞에서도 새 옷을 자랑하는 양녕에게 ‘겉 보다는 마음을 닦으시라’고 얘기했고 대신들도 동조하여 한 마디씩 거들었다는 실록의 기록이 있다.
부모궁은 강왕한 자미칠살에 삼방에서 영창타무를 보아 명궁 입장에서 부모궁을 바라보면 감정적으로 좌절을 느끼기 쉽다. 특히나 명궁 화성이 부모궁 칠살을 보는 순간 감정적으로 좋을 수 없다. 칠살화성은 한의학에서는 침이다. 날카로움을 상징한다. 부모궁 협으로 나의 명궁과 身복덕궁에, 다시 말해 나의 인생과 몸 그리고 정신세계에, 삼기가회와 형화상봉을 주기도 하지만 형화상봉 격발은 감정에 안 좋다. 아버지 태종의 존재는 이처럼 이중적이다. 이 중 좋은 측면에 관해 첨언을 하자면, 자부살은 인인위귀로 사람으로 인해 귀하게 된다는 암시는 띠는데, 자부살이 나의 명신복덕궁에 주는 삼기가회는 태종이 깔아 놓은 사람과 상황을 의미한다. 아버지 태종이 황희를 중히 쓰라고 유언을 남겼고 외척 발호가 있을까봐 세종의 외가집과 처갓집을 거의 멸족시켜 버렸다. 애증이 교차하는 부모궁이다.
복덕궁을 중심으로 보자면 정성이 없는 록존이 있어 매우 보수적이기 쉽다. 앞서 언급한 세종대왕의 한계인 ‘수령고소금지법’과 ‘노비종모법’은 그러한 성리학과 유교의 틀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시대적 그리고 왕족으로 태어난 자신의 한계였다. 부모궁의 타라와 전택궁 경양의 협은 아버지와 집안 혹은 조정의 압박을 느끼게 한다.
세종은 각종 질병을 안고 살았다. 형제궁 천상이 악사위천리 협을 받아 인감노출격이 되어 질액궁 천부는 위축되고 심하면 털린다. 천부 협으로 삼기가회가 들어오기는 하지만 영성이 있고 공겁이 협을 하며 삼방에서 편사식으로 양타가 비추니 공고와 노고가 된다. 身궁도 양타협을 받아 위축되어 있으니 이러한 질액身궁의 상황을 종합해 볼 때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명확하다.
부처궁 거문화기는 언 듯 생각하면 배우자와의 불화가 있다고 보기 쉽다. 특히나 태종이 장인 심온을 죽이고 장모는 공노로 만들어 버렸으니 세종과 사이가 안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부처궁 화기는 배우자에 대한 애틋함으로 자주 발현된다. 이는 화기(化忌)의 기(忌)는 나의(己) 마음(心)이 가는 곳이라는 파자만으로도 설명된다. 하지만 진짜 그랬을까?
부처궁 묘왕지 태양은 명궁 천량, 身궁재복선의 태음에 그리고 심지어 동궁한 거문화기에 빛을 주어 명반 전체를 광명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세종대왕의 위대함에 소헌왕후의 역할이 대단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실제 소헌왕후는 나중에라도 세종에게 친정아버지를 죽이고 자신을 폐비로 만들려고 했던 대신들인 박은이나 유정현 등을 처벌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없다. 실록에 ‘나는 매양 중궁의 내조에 힘입었다.’는 세종의 언급이 실려 있다.
조선에서는 양로연을 열어 80세 이상의 노인들에게 잔치를 내리는 행사가 있었다. 양로연은 보통 할아버지들을 위한 행사인데, 양로연을 벌인 며칠 뒤 소헌왕후는 할머니들을 위한 양로연도 베풀었다. 이는 유교 국가에서는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그녀는 또한 명나라에 궁녀로 가는 처녀들과 가족들에게 전별연을 열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1426년 도성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에도 엄청난 활약을 했다. 실록에 의하면 당시 세종과 병조판서 조말생은 강원도에서 강무 중이었고 요즘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부판윤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정승들도 손을 놓고 있었다. 이에 임신 7개월의 소현왕후는 대신들에게 일의 순서를 정해 주었다. 식량을 구하기보다 종묘와 창덕궁을 먼저 구하라고 명하면서 진두지휘 했다. 큰 도움을 받는 세종은 나중에 ‘앞으로 큰 일이 닥치면 중궁의 명령을 받들어 시행하라’고 교시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부처궁 묘왕지 태양이 물심양면으로 명반 전체를 밝혀준다.
여기서 잠깐 박영규 작가의 ‘조선 왕실 로맨스’라는 책에 언급된 특이한 세종의 여성 편력에 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궁녀는 궁에 들어온지 15년 뒤에 나인이 되고, 나인이 된지 15년이 지나야 상궁이 된다. 상궁은 왕의 전문비서직이다. 30은 넘어야 이러한 직함을 얻게 되는데, 조선시대엔 손주를 볼 나이이다. 세종은 그런 궁녀들과도 나이를 가리지 않고 잠자리를 많이 가졌다.
간택으로 궁녀가 된 귀인 박씨와 귀인 최씨를 제외하고 나머지 8명의 후궁들은 대부분 궁녀였고 그 면면이 특이하다. 상침 송씨는 이부자리를 깔아 주는 상궁이었고, 사기 차씨는 왕의 기록물을 관리하는 상궁이었다. 그 밖에도 수라를 챙겨주는 상궁에게 그리고 왕에게 책을 가져다주는 상궁에게 세종은 성은을 내렸다. 이렇게 나이 30이 훌쩍 넘은 지밀상궁 뿐 아니라 정식 후궁이 된 혜빈 양씨는 세자였던 문종의 어린 시절 간병을 도와준 궁녀였고, 신빈 김씨는 소헌왕후의 수족인 중궁전의 궁녀로써 당시 13살이었다. 이렇게 생활하면서 자주 양기가 동하여 방출한 것이 세종의 40대 이후 많은 질병의 원인이기도 했다고 책에서는 얘기한다.
가뜩이나 질액궁의 천부는 인감노출격으로 위축이 되고 공겁협으로 공고가 되어 텅 비게 되는데, 부처궁의 거문화기와 암함을 한다 (질액궁에 천무가 있으니 암합을 격외로 중요하게 봐야 한다). 거문의 어두운 음기에 의해 정력을 소비할수록 또한 그러한 거문화기와 동궁한 마약성계 중 하나인 천월에 의해 중독적으로 소비할수록 건강은 악화되기 마련이다. 참고로 질액궁의 영성 역시 마약성계 중 하나이고 그 대궁의 면면한 성질의 타라 역시 그러하다. 세종은 수라상을 받을 때건, 책 심부름을 시킬 때건, 침상을 정리하는 모습을 볼 때건, 중궁전에서 기별이 올 때건 때를 가리지 않고 몸이 동했으며 심지어 나이도 가리지 않았다는 사실로도 이는 충분히 증명된다. 애초에 취향이 없었다. 중독이었을 뿐이다. 왕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는 조선 왕들 중에서도 특이한 여성편력이었다. 필자가 존경하는 세종대왕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를 이야기 하려는 것 뿐이다.
부처궁의 태양은 국정의 동반자 소헌왕후였고 거문화기는 그 밖의 나(己)의 마음(心)이 중독적으로(천월) 간 후궁들이었다. 부처궁에 정성이 두 개인 점은 세종의 명반에서 특히나 의미심장하다.
자녀궁 자체는 별 문제 없어 보이나, 북파관점에서 자녀의 부처궁인 해궁이 문제다. 또한 자녀궁의 협으로는 화권화기 과강필절이 되었고, 무탐의 삼방사정에서 보이는 창곡으로 탐창탐곡 작사전도가 되고 무곡양타로 인재지도가 되었다. 세종은 며느리 때문에 몇 번이나 골머리를 앓았다. 문종이 세자시절 맞이한 세자빈 첫번째 며느리는 문종이 궁녀들과 가깝게 지내자 투기와 음탕한 비술로 폐위 당했고 (1429년, 세종 나이 33세), 두번째 며느리는 동성애로 폐위했다. (1436년, 세종 나이 40세) 이에 따로 세자빈을 간택하지 않고 후궁 중 유일하게 자식을 낳은 권씨를 세자빈으로 삼았고 이후 단종을 낳았는데, 출산 후 4일만에 권씨가 사망한다. 문종은 그 후 더 이상 세자빈을 두지 않고 왕위에 오른다. 세종은 이외에도 임영대군의 아내 남씨도 이혼시키고 영응대군의 아내 송씨도 병이 있다는 사유로 이혼시킨다.
[계묘대한(16-25세)]
21세 (1417 정유년) 양녕대군 폐세자
22세 (1418 무술년) 음력2월 우애가 깊었던 동생 성녕대군 14살의 나이로 사망. 음력 6월 세자책봉. 8월 왕위를 태종에게서 승계함. 세종의 장인 심온, 태종에게 죽임 당함.
23세 (1419 기해년) 큰아버지 정종 승하
24세 (1420 경자년) 음력 7월 생모 원경왕후 사망
계묘대한 명궁은 악사위천리 협을 받은 천상이다. 이로 인해 인감노출격이 되어 대한 재백궁 천부는 위축된다. 복덕궁의 현실투영궁인 재백궁의 위축 문제는 자신의 지위로 인해 생각을 표출하는 것에 견제가 들어가서 마음대로 사냥도 못했던 아버지 이방원의 선천 명반 상황과 유사하다. 이 대한 중에 충녕대군은 형인 양녕이 폐세자가 될듯 하면서도 태종이 이를 미루고 미뤄서 피를 말리는 상황을 나타낸다. 결국 22세에 왕위를 물려받지만 여전히 군권을 쥐고 있는 아버지의 압박 역시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아버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기는 다음 대한 첫해인 26살 태종의 승하 이후부터이다.
선천 형제궁 묘궁 악사위천리가 대한 형제궁 인궁 홍란(천희) 운으로 오니 형제궁에서의 유사대폭발격이 형성되었다. 앞서 선천 분석에서 인궁과 해궁의 암합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계묘대한은 마침 인해암합이 형제궁과 재백궁으로 여기서의 형제궁은 양녕대군이고 재백궁은 나의 생각의 표출궁이다. 대한 형제궁 인궁은 역시나 앞서 봤듯 중독적으로 뒤에서 시비구설이 나는 짓을 하는 거문화기이기에 이 대한 내내 그러한 형제궁의 견제는 끊임이 없었다. 세종이 왕위에 등극하기 전까지는 그래도 적장자인 양녕이 경쟁상대였었고, 왕위 등극 후에도 국왕을 위협하는 존재로 대신들의 잦은 탄핵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세종이 양녕을 적극 비호하느라 진땀을 뺐다.
실제 태종은 양녕의 비행을 자주 눈감아 주었다. 처가집 식구들을 단호하고 잔인하게 대한 것과 대조가 된다. 결정적으로 양녕이 멀쩡하게 남의 첩으로 있던 유부녀 어리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아이를 임신시키고 본처 장인어른인 김한로의 집에 숨겨두는 등의 일로 질책을 받았을 때, 평소에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반성문도 잘 쓰던 양녕은 이 때만은 달랐다. '아버지는 그렇게 많은 후궁들을 두면서 나는 왜 뭐라 하느냐'는 반성문이 아닌 반항문을 보고나서야 태종은 마지막 미련을 놓았다. 이때가 1418 무술년, 동생 충녕의 나이 22세 때였다.
여기서 잠시 옆길로 새자면, 당시 황희는 양녕 세자 폐위를 끝까지 반대해서 유배 보내졌다. 그러면 세종 즉위 후 황희는 관직의 기회를 영원히 얻지 못할듯 했지만, 세종은 자신의 국정 운영 양날개 축인 황희-맹사성 팀으로 기용하여 본격적인 세종 시대에 가장 중용한 재상이 되었다.
대한 명궁은 주변 세파에 휘달리기 쉬운 천상이지만 대한 관록궁은 강왕한 묘왕지 경양이 있으면서 보필도 함께하니 태종이 얼마나 세종에게 많은 도움을 줬는지 알 수 있다. 동궁한 천수를 보면 경양이건 보필이건 오래된 권력과 신하들이고 이는 아버지 태종이 밀어주지 않으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대한 중에 괴월이 내궁으로 들어오는데, 이는 부모의 천이궁인 술궁의 복선궁의 현현 덕분이다. 아버지의 활동무대에서 나에게 기회가 오는 형상으로 선천 명궁에 천기가 있는 충녕으로써는 괴월의 향배가 매우 중요하다. 또한 자미심전2에서 밝힌 바와 같이 질액궁의 액운은 길할 때는 행운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p.140-142). 선천 질액궁이 선천 재백과 천이에 주는 삼기가회는 대한 질액궁에서 이번엔 기회를 의미하는 괴월을 각기 주게 되니, 이 대한 중에 행운이 찾아오기도 한다. 첫째 형인 양녕이 그 기행으로 인해 폐세자가 되고, 어차피 적장자 계승이 안 되면 ‘택현’을 해야 하는데, 이는 둘째건 셋째건 어진이를 왕으로 앉히는 것이다. 괴월이 이 대한에 비추지 않았으면 어떠한 운으로건 왕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 조정에선 충녕이 보위를 이를 것이라는 여론이 팽배하긴 했지만 최종 결단은 태종의 몫이었고, 태종 자신도 적장자 원칙에 의해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입장에서 적장자가 아닌 충녕에게 왕위를 잇게 하는 것이 명분상 쉬운 결단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 파군화록으로 상문백호가 있는 선천 형노선인 묘유궁을 인동한다. 거상연동으로 대한 형노이자 선천 부관선인 인신궁 거일의 거문화기를 인동하여 록기전도가 된다. 이에 대한 탐랑화기는 발생의 의미를 갖는데, 이 발생 궁선인 축미궁은 부관의 자전으로 전택의 관록은 이두문파 징험에 의하면 직업에 관한 일이다. 물론 이러한 발생궁에 보필이 있으니 한 두가지 일이 아니다. 내 집안과 배우자의 집안 문제도 염두 해야 한다. 축미궁은 그래서 관록적으로 길하지만 집안 문제로도 봐야 하는데, 후자의 경우 축궁의 삼방사정으로 보이는 작사전도 등으로 인해 흉하다. 이중적이다.
록기전도를 감안한 최종결과는 인신궁으로 관록의 변화, 부처의 변화, 형노의 문제 등을 암시한다. 특히나 신궁을 중심으로 보자면 삼방사정에서 외궁의 쌍화과뿐 아니라 외궁의 쌍화권을 보니, 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닌 남에 의해 주도 당하는 상황이 있으며 외궁화권은 육친에게 매우 불리하고 그 상망에 자주 관여되니 육친적으로도 불리하다.
상관궁의 완성 측면에서 육친 상망 관련해서는 질액궁 그리고 왕위 등극 관련해선 문서궁인 부모궁이 암동만 되었다 (대한 파군화록이 대한 명천선이니 선천 명천이자 대한 부질인 진술궁이 공명된다). 또한 자오궁 재복身궁선도 대한 탐랑화기로 인해 선천자전-대한자전으로 궁간공명된다. 22세 무술년은 부질선에 좌하면서 유년 명궁을 보면, 천량의 웃어른, 화성의 육친 불리, 그리고 화과 문서의 암시 등 여러 의미를 띤다. 또한 이러한 사안들이 동궁한 해신으로 인해 풀어지게 되어 몇 해를 기다려 온 세자책봉의 문제도 해결되지만 질병에 걸린 육친은 죽음으로 그 고통이 풀린다.
유년 탐랑화록 발생으로 축미궁 유년 자전선이 인동되면서 미궁 대한 관록의 경양의 길상도 있지만 작사전도와 과강필절의 문제도 있기 쉽다. 발생에서부터 일월이나 파군 혹은 보필을 인동시키면 더욱 그렇게 여러 사안이 발생할 암시가 심하다. 유년 이차발생으로 사해궁 유년선천의 부질선이자 대한의 재복선이 인동 되었다. 또한 유년 천기화기는 진술궁 대한의 부질선이고 차성이차결과는 자오궁 선천유년의 재복선이자 身궁선이다. 대한에서 암동만 되었던 身궁과 부질선이 명동이 되는 유년이다.
대한에서 록기전도되면 유년에선 수미상접할 때 해당 사안이 인동되기 쉬운데, 무술년은 수미동기가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유년은 수미동기도 되지만 수미상접도 이루어진다. 좀 복잡하지만, 유년 탐랑화록이 미궁으로 차성되면 대한 파군화록과 더불어 대한의 발생의 범주에 속한 인신궁을 인동하고, 유년 차성이차결과인 자오궁이 대한 자전선이기에 선천 자전선이자 대한의 결과인 축궁의 탐랑화기를 인동하여 수미동기가 이루어진다.
22세 무술년은 다사다난한 한 해였다. 2월엔 사랑하던 동생 성녕대군이 충녕의 살뜰한 간병에도 향년 14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6월에 세자 책봉이 된 두 달 뒤인 8월에 왕위에 등극하나, 12월엔 아버지가 세종의 장인인 심온을 사사시킨다. 유년 발생이 앞서 살펴 봤던 관록적으로 길하지만 집안의 일에서는 흉한 축미궁이면서 유년 발생부터 보필을 인동시키니 다사다난 할 수 밖에 없는 해이다.
[임인대한(26-35세)]
26세 (1422 임인년) 아버지 태종 음력 5월10일 승하. 이후 태종의 신하들과 조정에서 힘겨루기가 이루어짐.
28세 (1424 갑진년) 큰 딸 정소공주 13살의 나이로 사망
31세 (1427 정미년) 전년도의 김도련 노비 뇌물 사건으로 태종의 신하들을 몰아내고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을 기용하면서 본격적인 세종의 시대 진입.
이 대한 시작하자마자 아버지가 승하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31세까지는 태종의 신하들과 조정에서 힘겨루기가 이루어진다. 대한 부모궁의 천상 때문에 대한 내궁에 악사위천리가 들어오는데, 그러한 천상이 인감노출이 되어 신하를 의미하는 대한 자녀궁 (자녀궁은 내가 그 미래를 책임져 주는 신하를 의미하기도 한다)의 천부가 위축된다. 그러한 자녀궁인 해궁엔 천무가 있으니 물려 받은 신하들로 내 신하가 아닌 아버지의 신하들이다. 그러한 천부의 협으로 대한의 내궁에 공겁을 주니, 공겁 복선궁의 현현이 이루어진다. 아버지의 신하들 때문에 공망하게 된다. 특히 대한 관록궁엔 록존이 있어 움츠러들기 쉬운데 이 곳에서 편사식으로 자녀궁 해궁의 복선궁 현현으로 인한 공겁이 비춘다. 본격적인 세종의 정치를 하지 못했던 것은 아버지 신하들의 견제 때문이었다.
이때 신하를 의미하는 자녀궁 천부의 움츠러듦과 공겁 복선궁의 현현에는 묘한 점이 있다. 공겁이 대한 내궁으로 들어와서 내가 공망하게 된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면 움츠러드는 것은 태종의 신하들인가 명반의 주인인 세종인가? 대한 자녀궁이 인감노출이 되어 털리게 되어 신하들이 움츠러드는 것은 이해가 된다. 태종이 승하했으니 그의 충복들은 살길이 막막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복선궁 현현의 정의에 의하면, 그 복선궁 자체의 성질이 현현되는 내궁으로 들어오는 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대한의 내궁으로 들어오는 공겁에는 움츠러드는 성향을 띠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이 되는 또 다른 이유는 대한 자녀궁 대궁인 사궁에서 외궁의 자미화권을 보아 권력이 남에게 가는 상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경우 사해궁 자부살은 인인위귀가 아니라 인인위패이다.
임인대한 명궁에서 아버지 성인 태양을 깔고 앉아 있으면서 질병성인 천월과 홍란이 있고 거문화기가 있다. 임인년은 대한과 유년의 궁과 사화가 같은데 대한 록기전도를 유년에서 수미동기시킨다. 다만 이때 身재복선인 자오궁은 대한과 유년 둘 다에서 공명된 상태이다. 음력 5월 병월이 좌한 진궁에 웃어른의 천량과 육친에게 안 좋은 화성을 깔고 있으면서 상례를 주하는 화과도 있다. 그리고 유월발생 천동화록으로 대한과 유년에서 암동으로 인동된 자오궁을 물어 명동시킨다. 이것이 실전자미두수에 나오는 전실이다.
이 대한 후반부 시작인 31세 정미년에 가서야 세종이 자신의 신하로 조정을 꾸민다.
[계축대한(36-45세)]
40세 (1436 병진년) 6조 직계제를 폐지하고 의정부 서사제 실시로 왕의 업무를 줄이기 시작
41세 (1437 정사년) 세자 문종에게 서무결제권을 넘겨 업무를 줄이려고 시도하나 신하들 반대
전 대한 후반부에서 이 대한에 걸쳐, 대한 중반에 악화된 건강으로 업무를 줄이기는 했지만, 농사직설 편찬, 향악 정리, 아악보 완성, 조세제도 개편을 위한 전국민 여론조사 실시, 팔도지리지 편찬, 자격루 완성, 4군6진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평정, 등의 세종대왕의 많은 업적이 이루어진다. 세종대왕의 계축대한이 있었기에 그는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될 수 있었다.
대한 천이궁의 경양과 관록궁의 자미칠살이 세종이 얼마나 카리스마를 가지고 업무를 보았는지 잘 얘기해주고 있다. 선천 명반 상에서 가장 위권출중했던, 이 두 궁이 이번 대한에선 천이궁과 관록궁이 되었다. 원 명궁 화성이 대한에서 탐랑과 경양을 만나게되어 화탐과 화양 격발이 일어났다고도 보여진다. 원 천이궁 괴월협이 대한에서 경양을 보아 경양을 쓸 기회를 갖게된다. 원 관록궁 거일 탐창 분골쇄시협이 대한에서 자살 삼기가회협과 형화상봉협을 만나 성세가 있는 와중에 뼈가 가루가 되고 시체가 부서지도록 신하들 협의 도움 하에 위권출중하게 업무를 본다. 묘하게도 이렇게 힘이 좋고 카리스마가 있는 이 대한 세종의 활동무대와 업무를 보여주는 미궁과 사궁은 선천 전택과 부모궁으로 태종이 깔아 놓은 바탕에 이루어진 성과이다.
다만 이러한 미궁과 사궁의 성세가 강하면 강할수록 양타의 힘이 커져 오궁 身복덕궁, 즉 몸과 마음이 피해를 입는다. 오궁은 대한의 노복궁이다. 노복은 나의 말이나 글을 전달하거나 아니면 가마태워서 내 몸을 이동시켜주는 사람으로 노복궁은 그래서 교통통신궁이다. 나의 생각을 전달해서 정책을 펼치거나 누군가를 시켜 무언가를 조사케하고 농사직설, 아악보, 등의 책을 집필하게 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현대인이라면 회사의 간부가 출중한 부하직원을 데리고 여러 부서와 업무 협조 요청하면서 보고서도 작성케하여 상사에게 보고하는 등의 일처리를 하게 하는 중요한 궁이다. 그러한 오궁이 '크게 소모됨'을 의미하는 대모가 있는 와중에 피해궁이 되었다. 즉, 나의 대한 내궁에 양타를 맞아 피해를 주는 원인이 되는 피해궁이 오궁이다. 하지만 양타의 상황이 좋으면 역으로 해석해야한다. 오궁의 록존이 깨지고 난뒤에 길한 양타를 내가 얻게된다.
이 대한에선 오궁을 내가 이곳 저곳에서 업무에 맞게 인재를 찾아내고 일을 시키고 여러 부처가 이러저러한 업무를 협조 하라고 조율하고, 올라오는 상소를 꼼꼼이 읽는 등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면서 (대한 노복궁), 나의 몸과 (身궁) 마음을 (선천 복덕궁) 병적으로 (차성된 병부) 갈아 넣은 후에 (대모) 나의 관록과 천이에서 강왕한 권위를 발산하고 업적을 쌓게 된다. 묘하게도 자오궁 동월은 수징계악 청요지직이라하여 청렴한 공무직을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이 대한 중에 일벌레가 되어 몸과 마음이 지치게되기 쉽다. 현대인들도 이런 때에 잘나간다고 몸을 갈아 넣어 일을하면 큰일난다. 코로나가 한창일 때 아는 분이 재택근무를 하다가 임원으로 승진을 해서 좋아했는데, 어느날 여러 부처에서 올라오는 이메일이 하루에도 수 백통이 쌓이는 것을 보고 '일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회사를 그만둔 적이 있다. 그 분은 일보다는 몸과 마음의 평안함을 생각했다. 하지만 세종은 몸과 마음을 갈아 넣었고, 조선 최고의 성군이 되었다.
대한 복덕의 악사위천리 천상으로 인감이 노출되어 대한 부처궁의 공겁협을 받아 고립된 천부는 더욱 위축된다. 선천 복덕궁에 대모와 함지 등이 있어 도화를 띠는데 그래도 록존이 있어 양타가 협이 되어 그러한 도화를 잡아주었다. 하지만 선천 복덕궁이 계축대한 복덕궁으로 와서 천상의 인감이 악사위천리로 노출이 되니 도화를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어 부처궁은 잔뜩 위축된 형상이다. 아마도 이 대한 중에 여성 편력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 아닌가 싶다.
[임자대한(46-55세)]
46세 (1442 임술년) 세자에게 대리청정이 기정사실화 됨. 이듬 해 대리청정 시행. 이후 온천 등에서 요양
47세 (1443 계해년) 한글 창제
48세 (1444 갑자년) 5남 광평대군 사망
49세 (1445 을축년) 7남 평원대군 사망
50세 (1446 병인년) 왕비 소헌왕후 사망
54세 (1450 경오년) 소헌왕후 사망 이후 몸이 더욱 쇠약해지면서 계속 병에 시달리다 음력2월 승하
선천 身복덕궁의 록존이 대한 복덕궁에 와서 선천 화기를 만나 복덕과 몸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기 있기 쉬운, 그래서 자신의 상망 위험도 있는 대한이다. 참고로 김정일도 이런 대한에서 사망했다 (자미심전1, p.294-295).
대한 명궁에 천형과 병부의 질병성이 있는데, 정성으로 천동과 태음이 있으니 자식과 배우자의 질병이 화두가 되기 쉬운 대한이다. 록기전도를 감안한 대한의 발생은 축궁의 무곡화기로 이곳은 자전부질선인데, 미궁의 보필로 인해 집안 식구 여러명의 질병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대한의 록기전도를 감안한 최종결과는 인신궁인데 이곳은 부처의 복덕이다.
공교롭게도 임인대한때와 대한의 궁만 다르고 사회의 궤적이 같다. 이로 인해 두 대한 다 축궁이 발생궁이 되는 것이 묘하다. 축미궁의 보필로 인해 다사다난함을 암시하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미궁의 경양이 내궁으로 들어 올 때는 관록적으로 혹은 활동무대에서 다사다난하게 길하지만 (계묘대한 관록궁 왕위등극과 계축대한 천이궁 성군으로서의 업적), 외궁으로 빠질때는 육친형극이 다사다난하게 발생한다 (임인대한 아버지 승하와 큰딸 사망 그리고 임자대한 자녀와 부인의 줄초상).
특히나 축미궁이 외궁이 될 때인 임자대한과 임인대한엔 임간 자미화권이 있는 강왕한 사해궁마저 외궁으로 빠지니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외궁인 사궁 자미화권이 보는 영창타무가 징험을 발휘하기 쉽다. 반면 영창타무의 사궁이 내궁으로 들어오는 계묘대한과 계축대한에서는 그나마 화기도 없고하여 삼방에서 보이는 탐창탐곡의 분골쇄시의 의미대로 뼈를 갈아 넣는 노력 정도의 의미가 있을 뿐이다 (계간 탐랑화기는 록기전도로인해 온전한 내궁의 화기가 아닌 발생의 의미가 있다). 어찌보면 '자미두수'는 왕이라고 전부 자미명인 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록존과 이를 협하는 양타의 향배가 더욱 중요하니 '록존두수'로 이름을 바꿔야하지 않나 싶을 정도이다.
갑자년은 천동이 있는데 발생이 유년 자녀궁이고, 을축년은 선천 자녀에 대한 부질선인데 발생이 유년 자전선이고, 병인년은 선천 부처의 복덕선인데 발생이 유년 부처궁이다. 대한에서 암동된 자오궁 身궁선은 갑자년엔 록기전도로 발생의 의미가 있는 유년태양화기와 진궁에서 술궁으로 차성된 대한 천량화록으로인한 차성이차결과로 명동되고, 을축년엔 유년 태음화기로 명동되며, 병인년엔 유년 천동화록으로 명동된다. 갑자년엔 5남 광평대군이, 을축년엔 7남 평원대군이, 그리고 병인년엔 소헌왕후가 사망하여 줄초상이 났다.
이 때문이었을까, 이후 나빠진 건강에도 생을 유지하다가 세종대왕 나이 54세 경오년 오궁의 근본적인 변화를 암시한다는 록존궁으로 유년이 올 때, 승하한다.
선왕들인 태조, 정종, 태종과는 다르게 태어날 때부터 왕족인 최초의 조선 왕이었다. 그래서 한계도 있었다. 사대부들을 위한 수령고소금지법과 노비종모법을 통해 사대부들의 비리를 방관하고 재산을 더 불릴 수 있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세종대왕은 진정한 보수의 모습이 무엇인지 우리들에게 일깨워준다. 탁월한 국정운영 능력을 바탕으로 몸과 마음을 다해 업무를 보며 능력있는 인재는 신분귀천에 상관 없이 등용하는 성군이었다.
[참고: 생시 검증]
세종대왕의 생애는 크게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다.
1-22세: 왕자로 성장하면서 각종 서적을 섭렵하고 형 양녕과 비교되는 시기
22-31세: 22세 무술년 6월에 세자가 되고 8월에 왕위 승계. 장인 심온 사사되고, 이후 26세 임인년에 태종이 승하하고, 세종의 신하들로 본격적인 세종시대를 열기 시작하는 31세까지의 휘몰아치는 과도기 기간
31-48세: 40세 병진년 6조 직계제를 폐지하여 업무를 줄이기 시작하여 46세 임술년 문종에게 대리청청을 맡기는 업무량의 완급조절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군사, 정치, 문화, 경제, 등의 분야에서 찬란한 업적을 이루는 시기
48-54세: 48-50세까지 3년간 왕비를 포함, 가족들의 줄초상이 있던 시기와, 이후 병에 시달리다 54세 경오년 음력 2월 승하하기까지 시기
유년운은 1) 22세 무술년 세자가 되고, 이후 2달 만에 왕이 되지만, 장인이 사사된 해, 2) 48,49,50세 갑자,을축,병인년 연달아 가족이 사망한 3년, 3) 54세 경오년 음력 2월 승하. 이 세 가지 위주로 살펴보겠다.
자시: 사궁 자미칠살이다. 복덕궁의 경양이 보필과 동궁하고 있지만 형기협을 받고 있다. 참을성이 없고 생각한 바를 바로 행동으로 옮기려는 성향이 있기 쉽다. 세종의 모습과 안 맞는다. 부처궁의 천상이 인감노출격이 되어 천이궁 천부는 매우 위축된다. 특히나 천부에 공겁이 동궁하여 고립의 암시는 배가된다. 역시나 세종 인생과는 안 맞는다.
자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갑진대한으로 삼태팔좌로 지위가 올라가는 암시가 있고 천량을 깔고 있어 웃어른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무술년 왕이 되고 장인이 사망하는 상을 읽기는 쉽지 않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계축대한으로 대한 명궁 앉은 자리에서 상망이나 질병의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대한 질액궁에 선천화기가 좌하는 정도로는 3년 연속 상을 당하는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인시: 묘궁 양양이다. 앞서 고찰했던 태종 명반의 관록궁 경양을 통해 보았듯, 이 명반도 관록궁 경양이 두드러지는데, 이런 경우 권력을 잡으면 유감없이 휘두르는 경향이 있다. 세종과는 맞지 않는다.
인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임인대한으로 파조파가 무파상의 궁에 왔다. 대한 관록궁은 자미 록존으로 왕이 되기는 했지만 양타협으로 견제를 받는 형상이다. 하지만 관록적 길상이 있다면 무술년이 아닌 기해년이 더 적당하다. 기해년에 자오궁선의 대한 자미화권을 유년 결과로 인동시키는데, 이곳이 대한의 관록이자 유년의 문서궁이기 때문이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신해대한으로, 대한 질액궁이자 선천 전택궁인 오궁이 피해궁이 되면서 대한 명궁 앉은 자리가 십이운의 병부이니 건강이 문제되는 대한이기는하다. 하지만 갑자, 을축, 병인년 3년 연달아 줄초상의 암시는 찾기 힘들다.
묘시: 인궁 무곡천상인데 특수격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형제궁 거문화기때문에 형기협인이 되었는데, 이는 양녕대군으로부터 세자위를 가져올 당시의 팽팽한 대립의 정황으로 볼 여지도 있다.
묘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계축대한으로 대한 명궁에서 거동 감정성계에 역시나 감정에 안 좋은 파쇄가 있고 육친에게 안 좋은 영성이 있으면서 대한 발생 파군화록으로 질액신궁이 움직이니 육친 문제가 화두가 되지 자신의 관록에서의 길상이 더 크지는 않아 보인다. 대한 관록의 천기화과만으로 왕위 등극을 논하기는 쉽지 않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경술대한으로 이 대한 중의 줄초상은 가늠하지 쉽지 않다.
진시: 축궁 천상으로 형노선에 악사위천리가 있고 거문화기로인해 형기협인 당하는 등, 형인 양녕대군에게 압박을 느낀 형상이 있다. 천이궁 삼기가회협과 창곡협을 받은 화양격발이 보필과 동궁하고 있어 매우 폭발적으로 길하다. 노복궁의 함지 대모와 질액궁의 홍란천희의 도화협도 받고 있기에 이러한 천이궁은 주변에 사람들이 꼬인다. 천이궁이 이런 모습이면 현대인이라면 되도록 먼 곳에서 영업을 하면 좋다. 왕의 명반이라기 보다는 행동대장 혹은 무관의 모습이다. 세종은 무인성향과 거리가 있으니 안 맞는다.
진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임자대한으로 석중은옥의 거문 명궁이다. 시비구설이 많은 대한으로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고 자신이 세자가 된 뒤 왕위에 오르느라 시비구설이 있다고 볼 수 있으나 관록적 길상은 찾기 힘들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기유대한으로 대한 전택궁엔 거문화기가 그리고 자녀궁엔 록존이 있다. 대한 무곡화록 발생이 身궁선의 상문백호이고 대한 문곡화기 결과는 선천 질액궁이니 자녀의 흉상이 보이기는 하니, 이 대한 중 자녀의 흉이 보이기는하다. 3) 54세 경오년은 무신대한으로 상망의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굳이 찾아보자면 54세 경오년이 아닌 59세 을해년 정도가 조금 위험해 보이기는하다. 문제의 자오궁이 유년의 부질선이 되면서 수미상접되기 때문이다.
사시: 자궁 거문으로 석중은옥격이고 특수격의 조건을 갖추었다. 석중은옥의 의미답게 조용히 자신의 실력을 쌓다보니 이미 세자였던 형 양녕대군이 폐위되고 세종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니 이 명반의 주인이 세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질액身궁을 살펴보니 건강상의 문제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사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신해대한으로 대한 부질선인 자오궁이 깨져있다. 문서운이 좋지 않은 시기이다. 무술년은 선천 부관 대한 형노선에 좌하는데, 사해궁과 첩궁공명된다. 유년 탐랑화록으로 대한 문창화기가 있는 사해궁이 인동되며 유년 천기화기로 대한 거문화록이 있는 자오궁이 인동되니 수미상접이 되는 해이다. 유년 특수이차결과인 축미궁의 형상으로 보건데 집안의 웃어른의 질병 문제는 있어보이나 상문백호가 있는 묘유궁선이 인동된 것도 아니고하여 장인이 죽는 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물론 왕위를 물려 받는 모습도 찾기 힘들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무신대한으로 육친에 안 좋은 화성이 독좌하면서 차성한 별 중 천월이 있으니 질병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줄초상의 모습은 아니다.
오시: 해궁 태음이다. 세종이 꼼꼼한 성격이니 태음명일 수도 있다. 재백궁 경양이 있어 돈 자랑하기 쉬운 명이고, 왕이라는 단초는 찾기 힘들다.
오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경술대한인데 대한 관록궁에 대한 무곡화권으로 왕이 되는 대한이라고 보기 힘들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정미대한인데 거동이 감정적으로 안 좋은 것이라는 점 말고는 육친 질병이나 상망, 특히나 줄초상의 암시는 찾을 수 없다. 3) 54세 경오년 음력 2월 역시 정미대한인데 대한 태음화록 발생이 身궁이고 거문화기 결과에 대한 특수이차결과가 대한의 질액궁이기에 가벼운 질병의 암시는 있지만 본인 상망으로 보이는 점은 찾기 힘들다.
미시: 술궁 염정천부로 특수격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명궁협으로 정승발탁격이 들어오니 염정이 관록의 의미를 지닌 점을 체로 높고 볼 때, 노력 없이 관록적 발탁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다. 아버지 직업을 이어받았으니 가능한 명반일 수도 있다.
미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기유대한으로 천이궁에서 양양창록을 보지만 대한 관록궁이 과강필절이기에 관록적으로 길한 상이 불분명하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병오대한으로 대한 질액궁에 선천 화기가 있다는 것 외에 다른 줄초상의 암시는 찾기 쉽지 않다. 3) 54세 경오년 음력 2월 역시 병오대한으로 상망의 암시가 없다.
신시: 묘궁에서 유궁으로 차성한 자탐명인데, 명궁이 삼기가회협이고, 身관록궁이 창곡협, 부처궁이 쌍록과협, 재백궁이 형기협, 천이궁이 악사위천리협이기에 지근거리에서 일거수일투족을 보조하는 내시와 궁녀들이 있거나 왕이시니 자중하시라는 간언을 하는 대신들이 있는 왕으로 볼 여지는 있다.
신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무신대한으로 양양창록이기는 하나 대한의 명궁이나 관록궁에 격발이나 경양 등의 별이 보이지 않아 왕위를 물려 받는 암시는 찾기 쉽지 않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 그리고 3) 54세 경오년은 공히 을사대한으로 대한의 앉은 자리도 그렇고 질병이나 상망의 암시를 찾기 쉽지 않다.
유시: 인궁에서 신궁으로 차성한 기월명이다. 특수격의 조건이 이루어졌지만, 기월명은 일반적인 기월동량 조합 중에서도 자미와 천부의 협을 받기에 왕이 이런 조합을 가지면 경종처럼 세파에 휘달리다 가는 왕이 되기 쉽다. 세종의 모습은 아니다.
유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정미대한으로 명궁에 경양이 쌍록협 록과협을 받고 있는 등 강왕해 보인다. 하지만 무술년은 유년 관록궁이 외궁인데 각종 길성이 있는 등 왕위를 물려 받는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 그리고 3) 54세 경오년은 갑진대한으로 대한 명궁 거문화기만으로 육친 불리나 질병, 줄초상, 등의 암시를 찾기 힘들다.
술시: 축궁에서 미궁으로 차성한 거동명이다. 명궁의 경양이 보필과 동궁하여 위권출중하지만, 기본적으로 거동명은 남모르는 고충이 있다. 이외에도 특수격이 아닌 이상 명천선의 거화양 종신액사의 흉은 그대로 읽어 줘야하니 세종의 인생으로 보이지 않는다.
술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을사대한으로 명궁이나 관록궁에 강왕한 별들이 보이지 않아 왕위를 물려 받는 모습이 아니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계묘대한으로 부처궁의 상황이 안 좋아 보이고 자녀궁에 록존이 있어 자녀 흉상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50세 병인년 배우자의 상망의 유년 록기를 돌려 보아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해시: 오궁 자미로 특수격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특수격 중에서도 상격 특수격의 특징 중 하나는 괴월이 중요한 궁을 협한다는 점인데, 이 명반에선 괴월이 각기 창곡과 동궁하면서 관록궁을 협한다. 굳이 노력을 하지 않아도 관록에 있어 기회가 생기는 강왕한 오궁 자미명이면서 그러한 자미는 록존과 같이 있어 부모와 형제의 압박을 받는 성향까지 갖춘 세종의 인생과 유사하다. 하지만 복덕궁의 록존은 단순히 보수적 사고방식을 의미하는데, 이 명반처럼 명궁 록존은 동궁한 정성의 성질을 얼어붙게 만든다. 자미의 영도력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는 세종의 명반인지 의문이 든다.
해시 유년운: 1) 22세 무술년은 갑진대한으로 본인변화 그리고 육친불리를 암시하는 칠살운이다. 무술년 유년 부관선인 인신궁에 대한의 파군화권과와 무곡화과가 있는 등, 관록적으로는 길한 상이 보이기는 하다. 2) 48,49,50세 갑자, 을축, 병인년은 임인대한으로 십이운의 병지에 천월과 화성이 있다. 하지만 48,49,50세에 누군가 질병 문제가 있다는 것까지는 알 수 있는데, 역시나 축시 명반처럼 각 유년 자녀, 자녀, 부인의 상망까지 축시명반처럼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3) 54세 경오년은 계축대한으로 사망의 상관궁인 身궁이 인동되지 않는다. 상관궁의 완성 측면에서 이 대한 중에 승하한다면 身궁자리에 오면서 身궁이 인동되는 해인 52세 무진년이나 58세 갑술년 정도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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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도 있거니와 참 정밀하게 글을 잘 뽑아쓰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잘 읽었고 또 다시 읽고 또 읽어 보겠습니다.
생시검증 부분은 아직 제 수준엔 이른감이 듭니다. 나머지 11개 시간을 보다가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12개 생시검증은 어렵진 않습니다. 다만 방대할 뿐입니다^^;; 이런 연습도 해보면 앞뒤 생시를 검증해보는 정도는 쉬워보일겁니다!~ 감사합니다~
고수님들 의견 하나하나 따라가 보는 흥미가 제법 쏠쏠합니다.
오늘도 여전히 좋은 의견 잘 보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언제쯤 카페 글 올리기 방법 등이 정상화 되려나?
심곡님은 어떤 방법으로 글을 올리셨는지 모르겟지만
글 올리기도 안되는 상황에서
간신히 댓글 다는 것은 가능한 방법을 찾았다나 뭐라나...
웃자둔둥...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며칠 전까지 글쓰기는 되는데 댓글을 못 썼어요..^^;; 기다려 보시면 될 듯 합니다...안드로이드, 크롬, iOS 등등 여러 개 복구가 한꺼번에 되지는 않은 듯 싶네요
좋은 자료, 좋은 분석 감사합니다. ^^
옙...감사합니다!~
늘 좋은자료와 분석 감사드립니다.
옙 감사합니다~
대단하십니다! 감사히 잘 보았습니다. ^^
덕분에 테블릿에서 명반 프로그램 자유롭게 이용하고 있어요...감사합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27 06:48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2.10.27 08:07
대단하십니다. 벼르고 보려다가 차일 피일 미뤘는데 오늘은 꼭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한시간 넘게 꼼꼼히 읽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축시 기량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 같습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쓰시느라 너무 너무고생하셧습니다.
가히 이 심곡의 고금 명성도가 완성되면 한국 자미사에 대단한 한획을 그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생시가 확실한 조선27대왕 몇 명 분석해보다가 결국 생시불명인 분들 12개생시검증까지 하게되었는데, 저도 많이 늘었습니다... "문단세" 세 분 남았어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항상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