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가의 차( 7 ) 2008/7/8 차인
500년 전 차노래 <<茶(다)賦(부)>>남긴 조선의 선비
전주 이씨 한재 이목 종가 제사에 차를 올리다
글/ 이연자 . 한배달우리차문화원장
오는 음력 7월26일 양력 8월 26일 <,다부>>를 쓴 한재 이목(1471~1498)선생의
509번째 맞이하는 불천지위(영원히 제사를 지내다)제사이다.
기제사는 일반적으로 4대 봉제사로 끝이 나지만
나라에 공헌이 큰 인물은 임금이 직접 불천지위 교지를 내려 영원히 기리도록
허락해 후손들은 긍지를 가지고 제사를 받든다.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종가란 불천지위 제례를 모시는 집을 말한다.
‘차를 사랑해 차노래를 짓는다.’며 1300여 자나 되는 차 글을 남긴
이목의 종가는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에 있다.
이목의 종가는 선생의 묘와 위패를 모신 사당, 제사를 받드는 후손이 살고 있다.
사당 텃밭에는 잎새 푸른 차나무가 선생의 기개를 상징하듯 서 있고,
연못가엔 서정적인 다정도 있다. 특히 선생의제사상엔 차가 의례 물로 올려 진다.
차문화 유적 1번지라 해도 무리가 아닌 선생의 사당을 찾아 영혼이라도 뵙기를
청해 보는 것, 이게 바로 차인들의 덕목이 아닐까 싶다.
푸른 찻잎이 조상을 맞이하다
지난 2004년 9월10일 이목 선생의 기일날, 김포에 있는 선생의 종가에 취재를 갔다.
김포시에서 애기봉 방향으로 승용차로 20여 분 달리면 왼편에 높다란 홍살문이
눈길을 끈다, 높이 200m의 월금산 나직한 자락 양지바른 곳에
한재 선생의 묘가 있고, 그 발 아래엔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인 한재당이 있다.
그의 호를 딴 한재당은 경기도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놀랍게도 사당 앞뜰에는 푸른 잎을 자랑하는 차나무 100여 그루가 자란다.
사철 푸른 차나무는 섭씨 영하 5도가 넘으면 얼어 죽는 품종이라
겨울에는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애지중지 돌본다.
이 차나무에서 딴 찻잎으로 차를 덖어 선생의 제사상에 올린다고 한다.
차나무뿐 아니라 정취로운 다정도 있다.
<<다부>>를 통해 우리 차문화에 큰 영향을 끼친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세워 둔 정자에서 이곳을 찾는 그 누구라도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도록 했다.
이날 제례에는 전국에 있는 후손 50여 명이 참석해
조선시대 선비의 일상복인 하얀 심의를 제복으로 입어 경건함이 더해졌다.
<<다부>>로 병풍 꾸민 제례상의 ‘茶(차)’
제례는 정오에 시작됐다.
<<다부>>1.300여 자가 빼곡히 쓰인 병풍은 신주로부터 왼쪽에 두었고,
오른쪽에는 선생의도 다른 시가 돋보이는 병풍을 쳤다.
그 가운데 놓인 제상에는 식어도 관계없는 음식부터 차려졌다.
제사음식은 신주 오른쪽 끝줄로부터
대추. 밤. 배. 곶감, 사과. 은행, 포도, 약과, 유과 순으로 올렸다.
과일 앞줄에는 명태포와 고사리. 숙주. 도라지나물을 각각의 그릇에 담아 올렸다.
간장과 나박김치, 식혜도 그 줄에 있었다.
탕 줄에는 육탕. 어탕. 소탕 3탕을 따로 담아 올렸고, 생선전과 녹두전,
가운데는 쇠고기 적도 있었다.
구운두부와 숭어 한 마리, 닭 한 마리도 올려 졌고,
국수 두 그릇, 떡 두 틀도 올렸다. 거피한 팥고물의 본편 위엔
커다랗게 구운 찹쌀 부꾸미 다섯 장을 웃기떡으로 올렸다.
신주의 맨 앞줄에는 밥.. 국. 술잔이 있는데 떡과 국수,
밥은 각각 두 그릇씩 올려 부부합설임을 보여준다.
진설이 끝나자 정각 12시, 제관 모두 손을 씻는 관세로부터 시작해
동쪽 계단에는제사 순서를 적은 홀기를 읽었고,
그 홀기 순서대로 제례는 진행됐다.
분향, 강신 다음 첫 잔은 당시 문중회장 이 병덕 씨가 올렸다.
축을 읽은 후 두 번째 잔은 문중 어른이,
종헌은 외부 손님 중에 한 분이 올렸다.
국 내리고 차를 올리시오
제레 풍경이야 흔히 볼 수 있는 일이자만
차인들이 주목해야 하는 건 바로 차를 올리는 ‘철갱봉다’ 순서다,
국을 내리고 숭늉을 올리는 제례 순서에서 제주가 꿇어앉아 미리 준비된
차병의 차를 두 개의 찻잔에 따라 집사에게 주어 제상에 올리도록 했다.
“茶(차)禮(례)”의 본뜻이 살아나는 풍경이다.
한재 선생의 기일 제례에 차를 올리게 된 건 지난 99년부터다.
<<다부>>를 지었다는 선생의 제상에 차가 오르는지 궁금해 취재를 갔다가
제상에 차 올리는 것을 볼 수 없었고 홀기 속에 기록된 “철갱봉다”를 찾아냈다.
지난해 타계한 전 회장 이 현 씨와 원로차인 윤 경혁 씨도 이날 함께 참석해
홀기 속에 나타난 찻잔을 확인하고 문중회의를 거듭한 끝에
500주년 기일부터 차를 오릴게 된 것이라 한다.
종친회 전 회장 이병덕 씨는 “홀기란 제례의 순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330년 전에 만든 ‘홀기’에도 ‘철갱봉다’ 순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제례에
차가 분명 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수많은 국난으로 차를 구하기 어렵게 되자 차 대신 숭늉을 올린 것이
관례로 돼 할아버지 제상에 차가 오르지 못했습니다.“고 말했다.
앞으로는 제사뿐 아니라 설, 추석 ‘차례’ 상에도 차를 올릴 것이며,
“한식차례”에도 차로써 예를 다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정자에서 새하얀 심의를 입은 제관들이
제상에 오른 푸른 차를 마시는 풍경은
마치 조선시대 노선비들의 기로연을 보는 듯 아름다웠다.
스승에게 차를 배우고 , 스승 때문에 목숨을 잃다
이목과 차와의 인연은 14세 때부터 시작됐다.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문하생이 되고부터다.
이목은 스승인 김종직에게서 차를 배웠고
스승 때문에 목숨을 잃은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차가 자라는 밀양이 고향인 스승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부임한 후
관비로 백성들의 차 세금을 탕감해 주는 어진 관리였다.
하지만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빗대 지은 조의제문으로 자신도 부관참시라는
극형을 당했고 그 문(화)하생들도 억울하게 처형되는‘무오사화’의 희생자이다.
이목은 대쪽 같은 자신의 성품과 뿌리 곧은 차나무의 성품과 닮았음에 매료된다.
<,다부>>에서 “차를 일생동안 즐겨 마셔도 싫증이 나지 않는 것은
그 성품 때문이라”며 차 사랑이 극진했다.
차생할에서 얻은 차의 진수를 다섯 가지 공과 여섯 가지 덕으로 요약하고 있다.
“책을 볼 때 갈증을 없애주고/ 울분을 풀어주고/
손님과 주인의 정을 화합하게 하며./ 뱃속 기생충으로 인한 고통을 없애고/
취한 술을 깨게 한다.”는 다섯 가지 공과
‘사람으로 하여금 오래 살게 하고 /병을 낫게 하고/기운을 맑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며/ 신선과 같게 하고/ 차는 예의롭게 한다“ 는
여섯 가지 덕을 강조하고 있다.
<,다부> 서문에는
‘이태백은 달을, 유백륜은 술을 좋아하듯, 나는 차를 잘 알지 못하다가
육우의<다경>을 읽고 부터 그 성품을 깨닫고 마음으로 귀히 여기게 됐다.
옛날에 중산 선생이 거문고를 좋아해 賦(부)를 지은 것과 ,
도연명이 국화를 사랑해 노래한 것은 은밀한 것을 드러나게 한 것이거늘
하물며 차는 그 공덕이 높음에도 아직 찬송하는 자 없으니
이는 어진 이를 버림과 같아 또한 잘못이 아닌가.
<다부>에는 두금. 납면. 소척 등 생경한 차 이름도 32가지가 보인다.
차산지를 설명하고, 차밭 풍경도 눈앞에 보이는 듯 사실적으로 묘사돼 있다.
차 달이기와 일곱 주발의 차 노래와
마음의 차임을 강조하는 ‘道(도)의 경지’까지 펴력했다,
<<다부>.는 한재 선생 문집 3건 중 1권에 수록돼 있다.
여러 편의 논문과 번역서도 있다.
천재 차인 이목의 짧았던 생애
짧은 생애로 이승을 떠난 이목의 출생지는
경기도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로 사당이 있는 현재 주소와 같다.
역서 그는 참의공 이윤생과 남양 홍씨 사이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목의 자는 중옹이고 호는 한재이며 시호는 정간이다.
이목은 여덟 살에 글을 읽기 시작해 열네 살에 김종직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열아홉 되던 해에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공부를 하다 대사성 김수손의 눈에 띄어 그의 사위가 된다.
24살 때는 북경으로 유학을 가 그곳에서
중국차의 수많은 이름과 차산지도 접하게 됐을 것이다.
25세 되던 해인 1495년에는 드디어 33명 중 일등으로 대고에 장원급제를 한다.
당신 법제도에 다른 어려운 관문을 다 거친 선생은
왕손 교육을 담당하는 정 6품 벼슬로 관직생활을 시작한다.
26세엔 함격ㅇ남도 병마평사로 부임했고,
27세 되던 연산군 3년엔 호당에 들어가 학문에 전념토록 하는 사가독서를 했다.
그리고 그 해 아들 세장을 얻는다 그 아들은 후에 선친에 이어 대과에 급제한다.
시장은 명종 때 도승지와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냈고
퇴계 이황 선생과 청백리에 녹선 된 인물이다.
선생으 불의에 굽힐 줄 모르는 강직한 성품으로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던 스무 살 즈음 성종이 병석에 눕자
대비가 무당을 불러 굿을 하라고 이른다.
이에 이목은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굿당에 가서
무당을 매질해 쫒아내고 제단을 부숴 버렸다.
와가 난 대비가 성종에게 고하자 선생은 스스로 나아가
“굿으로 임금의 병환이 완쾌되지 않습니다”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자
임금은 그 책임감과 기개를 칭찬하며 포상을 내린다.
뿐만 아니라 영의정이었던 윤필상이
간신이니 처단할 것을 상소해 반감을 사게 된다.
윤필상은 이에 ‘조의제문’을 쓴 김종직의 학파임을 구실로 모함을 했고,
이목은 스물여덟이란 젊은 나이에 참형을 당한다.
그는 죽음을 앞에 두고도 의연하게 절명가를 불렀다.
“검은 까마귀 모이는 곳에 흰 갈매기야 가지 마라/
저 까마귀 성내어 너의 흰 빛을 시새음 하나니/.
맑은 강물에 깨긋이 씻은 몸이 저 더로운 피로 물들까 두렵도다,”
종손 없는 차의 종가
남편이 참혹한 죽임을 당하자 부인 김씨는
2살짜리 아들 세장을 데리고 친정인 공주에 가서 살았다.
세장에게는 다섯 자손이 있었는데 교위공파인 큰아들과 둘째 아들은 공주에 남았고,
셋째아들은 전라도로, 넷째 와 다섯째는 김포에 와서 500여 년을 세거해 왔다.
억울한 죽음을 당했지만 연산군이 폐하고 증종 원년인 1506년엔
신원이 회복되었으며 몰수 됐던 가산도 환급받았다.
세자좌빈객 오위도총부도총관 등 정 2품의 관직을 추증 받았다.
경종 2년에는 정간이란 시호도 받게 된다.
선생의 행적은 묘지명이 발굴돼 밝혀졌다.
조선시대 선비의 곧은 성품을 상징하는 인물로서
교과서에 수록되는 영광도 안게 됐다.
선생의 불천지위 제례는 공주 목동조정리 종가 댁에서 지내오다
123년 만에 종가를 이어갈 후손이 끓어지자
1849 헌종의 왕명으로 고향이자 묘소 아래에 사당을 짓고 제례를 모셔왔다.
그러나 이곳 역시 6.25때 민간인 통제구역으로
사당을 돌볼 수 없게 된 데 이어 사당 뒤로 군사도로가 생겼다.
1974년 후손들은 또다시 자리를 옮겨 지금의 자리에 사당과 재실을 앉혔다.
사당관리와 제례 음식은 이목의 16세손인 이 완병(52)씨가
그 부인 홍금희(48)씨와 함께 재실에서 생활하며 준비하고 있다.
종손이 없어 엄격하게 종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선생이 태어나고 영혼이 묻힌 이곳이야 말로 대쪽 같은
조선의 선비 차인 이목의 종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