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으로 남은 자리들
살다 보니 내 자리가 참 많이도 생겨나고 진화하고 변화했다. 가만히 턱 괴고 앉아, 마치 볍씨의 행보 같았던 나의 자리들을 회상해 보았다.
될성부르다는 소리에 취해, 대갓집 밥상에 윤기로 오르는 꿈을 꾼 것은 세상모르던 시절이었다. 꼼짝달싹 못하고 모판에 줄 섯다가 바람 찬 언덕배기 논에 옮겨졌던 형세로 보아, 생은 시작부터 녹록지 않았었나 보다. 각종 병충해쯤은 이길 수 있다, 이겨낸다, 이 악물고 자리 지킴 하다 보니 운명의 장난이려나? 체험학습 나온 어린아이 손에 뽑혀 찰나에 화초 노릇도 해봤었는데, 것도 때깔 좋은 꽃가지에 밀려 내동댕이쳐질 때는 끝인가, 싶었다.
비록 척박한 곳으로 버려졌어도 기적 같은 도움의 손길과 끈질긴 생명력으로 소생하여 황숙기를 지나 드디어 완숙기에 이르렀다.
앞으로 더 어떤 모양새로 메겨져 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자리에 따라 역할과 처세가 바뀌곤 하니 때마다 본색을 달리해 가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현답(賢答)은 아니겠으나 경험으로 미루어 한 색깔로만은 살 수가 없었다.
동등한 입장이 맞을까? 경우마다 셈하게 되는 아내 자리, 시각과 청각의 모서리를 싹싹 갈아가며 지켜온 며느리 자리, Shut up 덕으로 이룬 좋은 시누이 자리, 바늘방석 올케 자리, 봉숭아 꽃물 들여 실로 챙챙 감아주던 정겨운 누이 자리, 늘 안쓰러운 맘길로 바라보게 되는 친정엄마 자리에서 절로 따라붙는 후덕 장모님 자리와 밉상 시어머니 자리, 세월 가도 좁혀지지 않는 외숙모 자리, 왠지 끈끈한 작은 엄마 자리, 언제나 신바람 친구 자리, 배려와 이해로 굳힌 1101호 아줌마 자리, 친절 앞치마를 두른 편의점 카운터 자리, 모피를 걸쳐야 주눅 들지 않는 남편의 부인 자리 등등 기억을 캐내어 보면 수없이 많을 것 같다. 참? 눈이 마주칠 때마다 가슴 도곤거리던 잊히지 않는 자리 하나가 더 있다. 50여 년이 지났는데도 6학년 7반 남자 반장에 이름이 또렷하게 남아있어 수상한 자리다. 여자로 가는 분홍에 시작점이었나 보다.
추수철로 접어드니, 앙금 앉은 자리라도 모두가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지금 나에게 가장 편한 자리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넋을 놓는 자리이고 가장 행복한 자리는 우리 매장 뒤편 골방 자리다.
내 유년에 강아지 메리가 맘 놓고 낮잠을 즐기던 대청마루 깊숙한 그곳 닮은, 이곳이 젤루 좋다.
10cm 소녀 ‘마루 밑 아리에티’처럼 불안하지도 않고 겁낼 것도 없다. 아무도 침범하지 않고 엿 뵐 수도 없는 피안의 세상! 평온한 나만의 자리, 거기에 숨구멍처럼 뚫려 있는 작은 창을 통해 세상을 보며 글을 쓴다.
폐지 줍는 노인의 등 굽은 겸손이 보이고 휠체어에 강아지를 매달고 산책하는 맑은 인사 소리가 들리는 곳.
규모가 제법 큰 카페 사장님의 느끼한 걸음새와 평수에 밀려 스스로 기가 죽은 김밥집 주인에 곱지 않은 눈길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친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그들만의 간판 자리 기(氣)다툼이 나만 보이는걸.
그런가 하면, 초저녁부터 불그레 취한 얼굴로 ‘인생 뭐 있나요?’를 반복하는 자전거포 아저씨의 걱정 없는 얼굴을 보노라면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자리에서 저마다의 색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들이 영화처럼 흘러간다.
얼마 전에 매끄럽지 못한 자리 하나가 또 다가왔다.
유방암으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동생의 딸내미가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나는 하나밖에 없는 고모여서 빈자리를 채워 주어야 했다. 그 자리는 혼인의 기쁨과 에미 부재의 슬픔, 중간에 있다. 더욱이 내 역할은 중간에서도 중간이어서 가늠키 애매한 표정으로 만들어진 마네킹의 모습이었다.
제대로 의관을 정제한 혼주가 어찌 얽힌 인연인지를 몰라 의아해하는 낯선 하객들 앞에서 미소는 띠되, 채 가시지 않은 비극과의 중도를 유지해야 했으며 지켜주지 못한 죄스러움에다가, 한 치 부족한 자릿세 등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사무친 이별이 축하를 덮지 못한 외가 이모들의 서러운 눈빛은, 고운 한복 차림새가 마치 춘향이 목에 두른 큰 칼의 무게로 어깨를 누른다.
예식은 화려하게 치러졌다.
신부는 아름다웠고 그녀의 아버지는 낡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왜 그리 서둘러 떠났느냐고, 이 빠진 자리를 향한 원망이 더는 참아지지 않고 눈물되었지만 끝까지 의연했던 그들 가족에게 아픈 만큼 행복하라는 기원을 아낌없이 품었다.
끝이 난 줄도 모르고 뻗댕기는 한복을 힘껏 눌러 접었다. 혼주를 빛내고자 자기 역할에 끝까지 충실하려는 꼴값이 마치 내 모습인 것 같기도 했다. 여전히 포장 상자 밖으로 나오려는 무개념 그것을 서둘러 빌려주었던 곳으로 넘기고 돌아오는데, 나는 누구였던가? 한갓 대여 한복과 같은 처지였다는 허무함이 가을바람처럼 스며든다.
자리는 혹간, 스스로 만들지 않아도 알 수 없는 곳에서 날아오는 돌팔매를 맞듯 매겨질 수 있다. 예측이라든가, 양심, 신앙이 못 미칠 길이 나타나곤 한다.
양보도 거절도 할 수 없는 자리였으나 홀로 앓은 대역이, 남겨진 동생 가족에게 오래도록 좋은 날로 남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고모라는 자리가 헹궈내도 헹궈내도 맹물처럼 맑아질 수 없어 무척 아파했지만 기쁨 또한 누구보다 컸다고 자부하며 ‘떠난 이에 날개는 그대들 가슴에 있으니...'라는 말로 그들을 고작 위안했다.
엄살쟁이 오늘은 살살 달래 재우고, 희망 쟁이 내일은 힘차게 깨워 일으키면서 얼마든지 살만한 세상으로 꾸려 갈 터이니, 수없이 씌워지는 자리들에게 또 덤벼들라고 큰소리 낸다.
첫댓글
삼일 선생님 글에서 문득 먼 옛날
6학년 7반의 그가 생각난 김에~ ㅎㅎㅎ
아주 훌륭한 수필이어요.
들고은님 만세입니다.
계속 건필하시와용~
저도 4월에 고모 자리 하러 갑니다. 큰올캐의 빈자리 너무 일찍 소풍을 끝냈어요.
남녀 80명이 성적 순으로 앉는데, 1등 반장 뒤 8번째면 공부 엄청 잘한 명당입니다. 반장이 뒤돌아보면 눈도 마주치고. ㅎ
엄마를 여읜 조카딸에게 고모라는 자리는 무척 중요하겠다 싶네요.
내가 처음부터 그랬지요. 쪼-오기 들할매 글발이 예사롭지 가 않다고
내 안목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습니다.요
문득 나를 고모라고 부르는 아이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드는군요.
감사드립니다, 두루~
칭찬일색에 몸둘바를...
제발 뱃사공님의 안목이 틀리지 않기를 ... 에이멘~ ㅋ
작가와함께 3호에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