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1 외 4편 / 이하석(1948- )

[葆光]

(葆光의 수요 시 산책 21)

밥1

오셨소?

내려놓고 밥상부터 받으소

구절양장 밟아 왔으니 얼마나 허기진가

앞날이 만 리 길이니 배부터 채우소

최보따리

보따리로 전전했네 머슴으로 일관했네

일하는 사람이 바로 한울님이라고

기어이 한울님 일을 맡은 머슴 교주라네

길

고샅길 빠져나와 구절구절 묏길로

뒷길도 밝히고 앞길조차 감추며

가시네 보따리 할배

큰일 내려 가시네

처형

쫓기고 쫓기고 쫓기고 또 쫓겨도

우리 삶 한복판의 마당놀이 안 벗어나

이 마당 한복판에서

꽃처럼

떨어지네

해월

그는 늘 있네 여전히 가고 오네

산과 들길에

오일장 길모퉁이에

그림자조차 숨기며

사랑 빛 애련 붉어라 불현듯 드러내네

     - 이하석(1948- ), 서사시집 『해월, 길노래』, 한티재,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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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월 선생은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흥해, 신광 등지를 떠돌며 머슴살이도 하고, 제지소 심부름꾼 노릇도 하며 힘들게 살아갔다. 이런 떠돌이 삶을 살아가던 신유년辛酉年(1861년) 6월, 경주 용담에서 수운 최제우라는 사람이 새로운 가르침을 편다는 소문을 듣고 수운 선생이 있는 경주 용담으로 찾아가 동학에 입도한다.

   동학에 입도한 이후 스승인 수운 선생의 가르침에 따라 지극한 수련에 임하였고, 입도한 지 불과 3년이 되지 않아 스승인 수운 선생으로부터 도통道統을 물려받아 동학의 2세 교주가 되었다. 그 후 수운 선생이 조선조 조정에 의하여 참형을 당하여 동학 교단은 풍비박산이 났고, 해월 선생은 관의 추적을 피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어우러지는 강원도, 경상도, 충청도 산간 마을 50여 군데를 전전하며 살아갔다.

   그러나 그는 다만 추적을 피해 도망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가는 곳마다 가르침의 말씀을 폈고, 괴멸 상태의 동학 교단을 다시 일으켰다. 그가 산간 오지를 헤매면서 펼쳐 보였던 삶의 모습, 또는 그가 세상을 향해 펼친 가르침의 말씀들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 마음의 움직임은 당시 소외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하였고, 해월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로 하여금 한국 근대사라는 한 격동의 역사 속을 헤쳐나가는 주체로 떠오르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또한 해월 선생은 흩어진 동학교도들을 모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 힘을 휘몰아 척양척왜斥洋斥倭와 함께 교조 신원 운동敎祖伸冤運動을 펼쳤고, 갑오동학혁명 등을 주도함으로써, 한국의 근대 형성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역사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그가 펼친 가르침의 말씀들은 오늘에도 매우 유용한, 현대가 지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오늘의 많은 지성들에 의하여 논의되고 있다. 해월 선생이 지난至難한 삶을 헤치며 펼친 가르침은 과거와 현재의 속박을 떨쳐 내고 떠오르는, 새로움을 향한 열망이었으며, 지금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신선한 에너지이다. (윤석산, 위 시집 「발문」 일부)

이하석 시인이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1827-1898) 선생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그린 서사시집을 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하석 시인은 평소 시조를 써 온 시인이 아닙니다만 이번 서사시는 54편의 단시조로 엮었습니다. 시조 시인이 아님에도 시조를 썼다는 것에 대하여 시인은 시조 시인들에게 폐를 끼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누차 걱정을 표했습니다. 하지만 읽기는 하지만 시조를 따로 배운 적이 없는 저는 잘 읽혔고, 좋았습니다. 10월에 발간했으나 11월 12일 시집을 출간한 출판사의 13주년 창립 기념 공연이 있던 행사장에서 처음 배포되었는데, 받아들고 오면서부터 읽기 시작한 시들이 너무 맛깔나서 지금까지 여러 번 읽고 또 읽고 있습니다. 이율배반적이게도 정형시에서 어떤 자유스러운 맛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가 동학에 대해 알게 된 건 물론 동학혁명 때문이었지만, 끌린 건 하느님을 내 마음속에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크게 끌린 건 시에서도 나오지만 향아설위向我設位라는 제사법이었습니다. 제사상을 벽에 차리지 않고 ‘나’를 향해 차리는 거지요. 저는 이 향아설위의 제사법을 어느 책에선가 읽고 무릎을 쳤습니다. 제삿날 상을 방안 가운데 차려놓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둘러서서 마주보고 절을 하는 진기한 광경이었지요. 이때 둘러선 사람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도 신분의 높고 낮음도 없었습니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상하귀천上下貴賤을 막론하고 그냥 다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시지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절을 하는 건 별것 아니라도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향해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요. 오늘은 시를 알리기보다는 시집을 알린다는 심사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여러 편의 시를 소개했는데 마음 같아서는 전부를 옮겨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발문을 쓴 윤석산 선생이 밝힌 바로는 그간 동학에 관한 시집은 몇몇 출간이 되었으나 해월 선생에 관한 시집은 처음이랍니다. 이 가을 시집 한 권 집안에 들여놓고 읽으시기를 권해봅니다. (20231122)

[열행]

어제 영양 일월산 아래 용화 자생화공원에 해월 최시형 선생 은거 유허비가 세워졌습니다.
포항에서 영양으로 가서 1865-1871년간 은거하며 여러 준비를 하였지요. 영양에서 강원도로 갔고요.

의암 손병희의 '인내천' 전에 해월의 '인시천'이 철학화되었지요.
'향아설위'도 그렇고 종교적 천재성이 해월에게 있었습니다.
영성이 밝았습니다. 저도 방송에 나가 해월에 대해 조금 말했습니다만, 해월 시집 소개 고맙습니다.

[열행]

유허비 설치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촬영한 것이라 주위가 정돈되어 있지 않습니다.

[열행]

동학은 영남학파의 사상적 덕화를 입었습니다. 물론 주문과 같은 것은 불교밀교적인 것이고요.

최시형은 최제우에 연원하고, 최제우는 아버지 근암 최옥에 연원하고, 근암 최옥은 영남학파 밀암 이재(갈암 이현일 아들)의 아들 기와 이상원(대산 이상정의 제자)의 제자이니, 동학은 영남학파의 사상적 덕화를 입었고, 이 사실은 이제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