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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卦(임괘) 第十九(제19)
(地澤臨, 坤上兌下 ; 땅과 못이 임괘가 되니, 땅은 위에 있고 못은 아래에 있다)
[傳] 臨은 序卦에 有事而後可大라 故受之以臨이라하니라 臨者는 大也요 蠱者는 事也니 有事則可大矣라 故受之以臨也라 韓康伯云 可大之業이 由事而生이라하니라 二陽方長而盛大라 故爲臨也라 爲卦 澤上有地하니 澤上之地는 岸也니 與水相際하여 臨近乎水라 故爲臨이라 天下之物이 密近[一作邇]相臨者 莫若地與水라 故地上有水則爲比요 澤上有地則爲臨也라 臨者는 臨民臨事 凡所臨皆是로되 在卦엔 取自上臨下하니 臨民之義라
[程頤의 설명] 임괘(臨卦)는 <서괘전(序卦傳)>에 “일이 있은 뒤에 클 수 있으므로 임괘(臨卦)로 받았다.” 하였다. 임(臨)은 큼이요 고(蠱)는 일이니, 일이 있으면 클 수 있기 때문에 임괘(臨卦)로 받은 것이다. 한강백(韓康伯)은 이르기를 “큰 사업은 일로 말미암아 생긴다.” 하였다. 두 양(陽)이 막 자라나 성대하기 때문에 임(臨)이라고 한 것이다. 괘(卦)됨이 못 위에 땅이 있으니, 못 위의 땅은 강안(江岸)이니, 물과 서로 접해서 물에 임(臨)하여 가까이 있기 때문에 임(臨)이라 한 것이다. 천하의 물건이 가까이 서로 임(臨)한 것은 땅과 물 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땅 위에 물이 있으면 비괘(比卦;䷇)가 되고, 못 위에 땅이 있으면 임괘(臨卦)가 된 것이다. 임(臨)은 백성에게 임(臨)하고 일에 임(臨)하는 것이니, 무릇 임(臨)하는 것이 모두 해당되는데, 괘(卦)에 있어서는 위에서 아래에 임(臨)함을 취하였으니, 백성에게 임(臨)하는 뜻이다.
臨은 元亨하고 利貞하니
임(臨)은 크게 형통(亨通)하고 정(貞)함이 이로우니
[傳] 以卦才言也라 臨之道如卦之才면 則大亨而正也라
[程頤의 설명] 괘재(卦才)로 말하였다. 임(臨)는 도(道)가 괘(卦)의 재질과 같으면 크게 형통(亨通)하고 바르다.
至于八月하여는 有凶하리라
8월(八月 ; 8개월)에 이르면 흉함이 있으리라.
[傳] 二陽方長於下하여 陽道嚮盛之時어늘 聖人豫爲之戒曰 陽雖方盛이나 至於八月則其道消矣니 是有凶也라 大率聖人爲戒는 必於方盛之時하나니 方盛而慮衰면 則可以防其滿極而圖其永久요 若旣衰而後戒면 亦无及矣라 自古天下安治에 未有久而不亂者하니 蓋不能戒於盛也일새라 方其盛而不知戒라 故狃安富則驕侈生하고 樂舒肆則綱紀壞하고 忘禍亂則釁孽萌하나니 是以浸淫하여 不知亂之至也라
[程頤의 설명] 두 양(陽)이 막 아래에서 자라나 양도(陽道)가 성할 때인데, 성인(聖人)이 미리 경계하기를 “양(陽)이 비록 성하나 8월(八月 ; 8개월)에 지나면 그 도(道)가 사라지니, 이는 흉함이 있는 것이다.” 한 것이다. 대체로 성인(聖人)이 경계함은 반드시 막 성할 때에 하니, 막 성할 때에 쇠할 것을 염려하면 가득하고 궁극함을 방비하여 영구함을 도모할 수 있고, 만약 이미 쇠한 뒤에 경계하면 또한 미칠 수 없다. 예로부터 천하(天下)가 편안히 다스려짐에 오래도록 혼란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는 성할 때에 경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할 때를 당하여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편안하고 부유함에 익숙하면 교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고, 풀어지고 방탕함을 좋아하면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화란(禍亂)을 잊으면 재앙이 싹트니, 이 때문에 점점 빠져서 난(亂)이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本義] 臨은 進而凌逼於物也라 二陽浸長하여 以逼於陰이라 故爲臨이니 十二月之卦也라 又其爲卦 下兌說, 上坤順이요 九二以剛居中하여 上應六五와 故占者大亨而利於正이라 然至于八月이면 當有凶也라 八月은 謂自復卦一陽之月로 至于遯卦二陰之月이니 陰長陽遯之時也라 或曰 八月은 謂夏正八月이라 하니 於卦爲觀하니 亦臨之反對야라 又因占而戒之하니라
[朱熹의 본뜻] 임(臨)은 나아가 물건을 핍박하는 것이다. 두 양(陽)이 점점 자라나 음(陰)을 핍박하기 때문에 임(臨)이라 한 것이니, 12월의 괘(卦)이다. 또 괘(卦)됨이 아래는 태(兌)여서 기뻐하고 위는 곤(坤)이어서 순하며, 구이(九二)가 강(剛)으로 중(中)에 거하여 위로 육오(육오(六五)와 응(應)한다. 이 때문에 점치는 자가 크게 형통(亨通)하고 정(貞)함이 이로운 것이다.그러나 8월에 이르면 마땅히 흉함이 있을 것이다. 팔월(八月)은 복괘(復卦; ䷗)인 일양(一陽)의 달로부터 둔괘(遯卦;䷠)인 이음(二陰)의 달에 이르는 것이니, 음(陰)이 자라고 양(陽)이 은둔할 때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팔월(八月)은 하정(夏正) 8월이다.”라고 하니, 괘(卦)에 있어서 관괘(觀卦;䷓)가 되는데 또한 임괘(臨卦)의 반대이다. 이는 점괘(占卦)를 인하여 경계한 것이다.
彖曰 臨은 剛浸而長하며
<단전(彖傳)>에 말하였다. “임(臨)은 강(剛)이 점점 자라며
[本義] 以卦體로 釋卦名이라
[朱熹의 본뜻] 괘채(卦體)로 괘명(卦名)을 해석하였다.
說而順하고 剛中而應하여
기뻐하고 순하며 강(剛) 중(中)에 있고 응(應)하여
[本義] 又以卦德卦體로 言卦之善이라.
[朱熹의 본뜻] 또 괘덕(卦德)과 괘체(卦體)로 괘(卦)의 좋음을 말하였다.
大亨以正하니 天之道也라
크게 형통(亨通)하고 바르니, 하늘의 도(道)이다.
[傳] 浸은 漸也니 二陽이 長於下而漸進也라 下兌上坤하니 和說而順也요 剛得中道而有應助라 是以能大亨而得正하니 合天之道니 剛正而和順은 天之道也라 化育之功이 所以不息者는 剛正和順而已니 以此臨人臨事臨天下면 莫不大亨而得正也라 兌爲說이니 說乃和也라 夬彖云 決而和라하니라
[程頤의 설명] 침(浸)은 점점함이니, 두 양(陽)이 아래에서 자라나 점점 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아래는 태(兌)이고 위는 곤(坤)이니, 화열(和說)하고 순하며, 강(剛)이 중도(中道)를 얻고 응조(應助)가 있다. 이 때문에 크게 형통(亨通)하고 바름을 얻은 것이니, 이는 하늘의 도(道)에 합하니, 강정(剛正)하고 화순함은 하늘의 도(道)이다. 화육(化育)하는 공(功)이 쉬지 않는 까닭은 강정(剛正)하고 화순(和順)하기 때문일 뿐이니, 이로써 사람에게 임(臨)하고 일에 임(臨)하고 천하(天下)에 임(臨)하면 크게 형통(亨通)하고 바름을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태(兌)는 기뻐함이 되니, 기뻐함은 바로 화(和)함이다. 쾌괘(夬卦)의 <단전(彖傳)>에 ”결단하고 화하다.“ 하였다.
[本義] 當剛長之時하여 又有此善이라 故其占如此也라
[朱熹의 본뜻] 강(剛)이 자라는 때를 당하여 또 이러한 선(善)이 있으므로 그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至于八月有凶은 消不久也라
팔월(八月)에 이르러 흉함이 있다는 것은 (陽이) 사라질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傳] 臨은 二陽生하니 陽方漸盛之時라 故聖人爲之戒云 陽雖方長이나 然至于八月則消而凶矣라 八月은 謂陽生之八月이니 陽始生於復하여 自復至遯에 凡八月이니 自建子로 至建未也라 二陰長而陽消矣라 故云消不久也라 在陰陽之氣言之면 則消長如循環하여 不可易也어니와 以人事言之면 則陽爲君子요 陰爲小人하니 方君子道長之時하여 聖人爲之誡하여 使知極則有凶之理而虞備之하여 常不至於滿極이면 則无凶也라
[程頤의 설명] 임(臨)은 두 양(陽)이 생겨나니, 양(陽)이 점점 성할 때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경계하기를 “양(陽)이 비록 자라나고 있으나 팔월(八月)에 이르면 사라져 흉할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팔월(八月)은 양(陽)이 생겨난 지 8개월이 됨을 이르니, 양(陽)이 처음 복괘(復卦)에서 생겨나, 복괘(復卦)로부터 둔괘(遯卦)에 이름에 모두 8개월이니, 건자월(建子月;11월)로부터 건미월(建未月;6월)에 이르기까지이다. 두 음(陰)이 자라나 양(陽)이 사라지게 되므로 사라질 날이 멀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음양(陰陽)의 기운의 입장에서 말하면 소장(消長)은 순환함과 같아서 변역(變易)할 수 없으나, 인사(人事)로 말하면 양(陽)은 군자(君子)가 되고 음(陰)은 소인(小人)이 되니, 군자(君子)의 도(道)가 자라날 때를 당하여 성인(聖人)이 경계해서 지극하면 흉하게 되는 이치가 있음을 알아 미리 대비하여 항상 가득하고 지극함에 이르지 않게 한 것이니, 이렇게 하면 흉함이 없다.
[本義] 言雖天運之當然이나 然君子宜知所戒라
[朱熹의 본뜻] 비록 천운(天運)의 당연함이나 군자(君子)가 마땅히 경계할 줄을 알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象曰 澤上有地 臨이니 君子 以하여여 敎思 无窮하며 容保民이 无疆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못 위에 땅이 있음이 임(臨)이니, 군자(君子)가 보고서 가르치려는 생각이 다함이 없으며 백성을 용납하여 보존함이 끝이 없다.”
[傳] 澤之上有地하니 澤은 岸也니 水之際也라 物之相臨與含容이 无若水之在地라 故澤上有地爲臨也라 君子觀親臨之象하면 則敎思无窮하니 親臨於民은 則有[一无有字]敎導之意思也요 无窮은 至誠无斁也라 觀含容之象하면 則有容保民之心하니 无疆은 廣大无疆限也라 含容은 有廣大之意라 故爲无窮无疆之義라
[程頤의 설명] 목 위에 땅이 있으니, 못 언덕은 물가이다. 물건이 서로 임(臨)함과 함용(含容)함이 물이 땅에 있는 것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못 위에 땅이 있음을 임(臨)이라 한 것이다. 군자(君子)가 친히 임(臨)하는 상(象)을 보면 가르치려는 생각이 무궁하게 되니, 백성에게 친히 임(臨)함은 교도(敎導)하려는 의사가 있는 것이다. 무궁(无窮)은 지극히 정성스러워 싫어함이 없는 것이다. 함용(含容)하는 상(象)을 보면 백성을 용납하여 보존하려는 마음이 있게 된다. 무궁(无窮)은 광대하여 한계기 없는 것이다. 함용(含容)은 광대한 뜻이 있으므로 무궁(无窮)과 무강(无疆)의 뜻이 된 것이다.
[本義] 地臨於澤은 上臨下也니 二者는 皆臨下之事라 敎之无窮者는 兌也요 容之无疆者는 坤也라
[朱熹의 본뜻] 땅이 못 위에 임(臨)함은 위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임(臨)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는 다 아래에 임(臨)하는 일이다. 가르치기를 무궁(无窮)히 하는 것은 태(兌)이며, 용납하기를 끝없이 하는 것은 곤(坤)이다.
初九는 咸臨이니 貞하여 吉하니라
초구(初九)는 감동하여 임(臨)함이니, 정(貞)하여 길(吉)하다.
[本義] 초구(初九)는 다 임(臨)함이니
[傳] 咸은 感也니 陽長之時에 感動於陰이라 四應於初하니 感之者也니 比他卦에 相應尤重이라 四는 近君之位어늘 初得正位하고 與四感應하니 是는 以正道爲當位所信任하여 得行其志하니 獲乎上而得行其正道라 是以吉也라 他卦는 初上爻에 不言得位失位하니 蓋初終之義爲重也요 臨則以初得位居正爲重이라 凡言貞吉은 有旣正且吉者하고 有得正則吉者하고 有貞固守之則吉者하니 各隨其事[一作時]也라
[程頤의 설명] 함(咸)은 감동함이니, 양(陽)이 자라는 때에 음(陰)에게 감동하는 것이다. 육사(六四)가 초구(初九)에 응하니 감동시키는 자이니, 다른 괘(卦)에 비함에 서로 응(應)함이 매우 중하다, 사(四)는 군주(君主)와 가까운 자리인데, 초(初)가 정위(正位)를 얻고 사(四)와 감응하니, 이는 정도(正道)로써 지위를 담당한 자에게 신임을 받아 그 뜻을 행하는 것이니, 위의 신임을 얻어 정도(正道)를 행할 수 있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다. 다른 괘(卦)에서는 초효(初爻)와 상효(上爻)애 득위(得位)와 싱위(失位)를 말하지 않았으니, 이는 초(初)와 종(終)의 뜻이 중하기 때문이고, 임괘(臨卦)는 초효(初爻)가 지위를 얻고 정(正)에 거함을 중함으로 삼은ㄴ 것이다. 무릇 ‘정길(貞吉)’이라고 말한 것은 이미 바르고 또 길(吉)한 경우가 있고, 바름을 얻으면 길(吉)한 경우가 있고, 정고(貞固)히 지키면 길(吉)한 경우가 있으니, 각각 그 일애 따른다.
[本義] 卦唯二陽이 徧臨四陰이라 故二爻皆有咸臨之象이라 初九剛而得正이라 故其占爲貞吉이라
[朱熹의 본뜻] 괘(卦)에 오직 두 양(陽)이 네 음(陰)에 두루 임(臨)함으로 두 효(爻)가 모두 다 임(臨)하는 상(象)이 있는 것이다. 초구(初九)가 강(剛)으로 정(正)을 얻었기 때문에 그 점(占)이 정(貞)하여 길(吉)한 것이다.
象曰 咸臨貞吉은 志行正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함임정길(咸臨貞吉)’은 뜻이 정도(正道)를 행하려 하는 것이다.”
[傳] 所謂貞吉은 九之志在於行正也라 以九居陽하고 又應四之正하니 其志正也라
[程頤의 설명] 이른바 ‘정길(貞吉)’은 초구(初九)의 뜻이 정도(正道)를 행함에 있는 것이다. 구(九)로서 양(陽)의 자리에 거하고 또 사(四)의 정(正)과 응(應)하니, 그 뜻이 바른 것이다.
九二는 咸臨이니 吉하여 无不利하리라
구이(九二)는 ‘함임(咸臨)’이니,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으리라.
[傳] 二方陽長而漸盛하여 感[一作咸]動於六五中順之君하여 其交之親이라 故見信任하여 得行其志하니 所臨이 吉而无不利也라 吉者는 已然이니 如是故吉也요 无不利者는 將然이니 於所施爲에 无所不利也라
[程頤의 설명] 구이(九二)는 막 양(陽)이 자라나 점점 성하여 육오(六五)인 중순(中順)의 군주(君主)를 감동시켜 그 사귐이 친밀하므로 신임(信任)을 받아 그 뜻을 행하니, 임(臨)하는 바가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다. 길(吉)하다는 것은 이미 그러한 것이니 이와 같기 때문에 길(吉)한 것이요,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장차 그러한 것이니 시행하는 바에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本義] 剛得中而勢上進이라 故其占吉而无不利也라
[朱熹의 본뜻] 강(剛)이 중(中)을 얻고 세(勢)가 위로 나아가지 때문에 그 점(占)이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象曰 咸臨吉无不利는 未順命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함임길무불리(咸臨吉无不利)’는 명령을 순히 하려고 한 것이 아니다.
[傳] 未者는 非遽之辭라 孟子에 或問勸齊伐燕이라하니 有諸잇가 曰未也라하고 又云 仲子所食之粟은 伯夷之所樹歟아 抑亦盜跖之所樹歟아 是未可知也라하며 史記에 侯嬴曰 人固未易知라하니 古人用字之意 皆如此라 今人은 大率用對已字라 故意似異나 然實不殊也라 九二與五感應以臨下하니 蓋以剛德之長而又得中하여 至誠相感이요 非由順上之命也라 是以吉而无不利라 五順體而二說體요 又陰陽相應이라 故象特明其非由說順也라
[程頤의 설명] 미(未)는 갑자기 그러한 것이 아니란 말이다. <맹자(孟子)>에 ”혹자가 묻기를 ‘제(齊)나라를 권하여 연(燕)나라를 치게 했다고 하니, 그러한 일이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아니다[未也]’“라 하였고, 또 이르기를 ”중자(仲子)가 먹는 곡식은 백이(伯夷)가 심은 것인가? 아니면 도척(盜跖)이 심은 것인가? 이를 알 수 없다.[是未可知也] 하였으며, <사기(史記)>에 후영(侯嬴)이 말하기를 “사람은 진실로 알기가 쉽지 않다. [人固未易知]” 하였으니, 옛 사람이 글자를 쓴 뜻이 모두 이와 같다. 지금 사람들은 대체로 이자(已字)와 상대하여 쓰기 때문애 뜻이 다른 듯하나 실제는 다르지 않다. 구이(九二)는 육오(六五)와 감응(感應)하여 아래에 임(臨)하니, 강덕(剛德)이 자라나고 또 중(中)을 얻어서 지성(至誠)으로 서로 감동하는 것이요, 윗사람의 명령을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러므로 길(吉)하여 이롭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오(五)는 순체(順體)이고 이(二)는 열체(說體)이며, 또 음(陰)과 양(陽0이 서로 응(應)하기 때문에 <상전(象傳)>에서는 다만 열순(說順)을 말미암음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六三은 甘臨이라 无攸利하니 旣憂之라 无咎리라
육삼(六三)은 닮으로(기쁨으로) 임(臨)하여 이로운 바가 없으나 이미 근심하므로 허물이 없으리라.
[傳] 三居下之上하니 臨人者也라 陰柔而說體요 又處不中正하니 以甘說로 臨人者也라 在上而[一无而字]以甘說臨下면 失德之甚이니 无所利也라 兌性旣說하고 又乘二陽之上하니 陽方長而上進이라 故不安而益甘이나 旣知危懼而憂之하니 若能持謙守正하고 至誠以自處則无咎也라 邪說由己어늘 能憂而改之면 復何咎乎리오
[程頤의 설명] 삼(三)은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였으니, 사람에게 임(臨)하는 자이다. 음유(陰柔)이면서 열체(說體)이고 또 처함이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달고 기쁨으로 남에게 임(臨)하는 자이다. 위에 있으면서 달고 기쁨으로 아랫사람들에게 임(臨)하면 실덕(失德)함이 심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태(兌)의 성질은 이미 기뻐하고 또 두 양(陽)의 위를 타고 있는데, 양(陽)이 막 자라나 위로 나아가기 때문에 불안하여 더욱 달게 하나 이미 위태로움과 두려움을 알고 근심하니, 만약 겸손한 마음을 갖고 정도(正道)를 지키며 지성(至誠)으로 자처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간사하게 기뻐함이 자신으로 말미암았는데, 능히 근심하고 고친다면 다시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本義] 陰柔不中正而居下之上하여 爲以甘說臨人之象이니 其占固无所利나 然能憂而改之則无咎也라 勉人遷善하니 爲敎深矣라
[朱熹의 본뜻] 음유(陰柔)로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여 감열(甘說)로 사람에게 임(臨)하는 상(象)이 되니, 그 점(占)이 진실로 이로운 바가 없다. 그러나 걱정하여 고치면 허물이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권면하였으니, 가르침이 크다.
象曰 甘臨은 位不當也요 旣憂之하니 咎不長也리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기쁨으로 임(臨)함은 자리가 마땅하지 않기 때문이요, 이미 걱정하니 허물이 오래가지 않으리라.”
[傳] 陰柔之人이 處不中正而居下之上하고 復乘二陽하니 是處不當位也라 旣能知懼而憂之면 則必强勉自改라 故其過咎不長也라
[程頤의 설명] 음유(陰柔)한 사람이 처함이 중정(中正)하지 못하면서 하괘(下卦)의 위에 거하고 다시 두 양(陽)을 탔으니, 이는 처함이 자리에 마땅하지 않은 것이다. 이미 두려움을 알고 근심하면 반드시 힘써 스스로 고칠 것이다. 그러므로 그 허물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다.
六四는 至臨이니 无咎니라
육사(六四)는 임(臨)함이 지극함이니, 허물이 없다.
[傳] 四居上之下하여 與下體相比하니 是切臨於下니 臨之至也라 臨道尙近이라 故以比爲至라 四居正位而下應於剛陽之初하고 處近君之位하여 守正而任賢하여 以親臨於下라 是以无咎하니 所處當也라
[程頤의 설명] 사(四)는 상괘(上卦)의 아래에 거하여 하체(下體)와 서로 가까우니, 이는 아래에 간절히 임(臨)하는 것으므로 임(臨)함이 지극한 것이다. 임(臨)하는 도(道)는 가까이 함을 숭상하기 때문에 가까움을 지극하다고 한 것이다. 사(四)는 정위(正位)에 거하고 아래로 양강(陽剛)의 초(初)와 응(應)하며, 군주(君主)와 가까운 자리에 처하여 정도(正道)를 지키고 현자(賢者)에게 맡겨서 아래에 친히 임(臨)한다. 이 때문에 허물이 없으니, 처한 바가 마땅한 것이다.
[本義] 處得其位하고 下應初九하여 相臨之至하니 宜无咎者也라
[朱熹의 본뜻] 처함이 제자리를 얻고 아래로 초구(初九)와 응(應)하여 서로 임(臨)함이 지극하니, 마땅히 허물이 없을 것이다.
象曰 至臨无咎는 位當也일세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지임무구(至臨无咎)’는 자리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傳] 居近君之位는 爲得其任이요 以陰處四는 爲得其正이요 與初相應은 爲下賢이니 所以无咎니 蓋由位之當也라
[程頤의 설명] 군주(君主)와 가까운 자리에 거함은 임무를 얻음이 되고 음(陰)으로 사(四)에 처함은 정(正)을 얻음이 되며 초(初)와 서로 응(應)함은 현자(賢者)에게 낮춤이 된다. 이 때문에 허물이 없는 것이니, 이는 지위가 마땅하기 때문이다.
六五는 知(智)臨이니 大君之宜니 吉하니라
육오(六五)는 지혜로 임(臨)함이니, 대군(大君)의 마땅함이니 길(吉)하다.
[傳] 五以柔中順體로 居尊位而下應於二剛中之臣하니 是能倚任於二하여 不勞而治하여 以知臨下者也라 夫以一人之身으로 臨乎天下之廣하니 若區區自任이면 豈能周於萬事리오 故自任其知者는 適足爲不知요 唯能取天下之善하여 任天下之聰明이면 則无所不周니 是不自任其知면 則其知大矣라 五順應於九二剛中之賢하여 任之以臨下하니 乃己以明知로 臨天下니 大君之所宜也라 其吉可知니라
[程頤의 설명] 육오(六五)는 유중(柔中) 순체(順體)로서 존위(尊位)에 거하고 아래로 강중(剛中)한 신하(臣下)인 구이(九二)에게 응(應)하니, 이는 구이(九二)에게 의지하고 맡겨서 수고롭지 않고도 다스려 지혜로써 아래에 임(臨)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몸으로 넓은 천하(天下)에 군림(君臨)하니, 만약 구구히 자임(自任)한다면 어찌 만사(萬事)에 두루하겠는가.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지혜만을 믿는 자는 다만 지혜롭지 못함이 될 뿐이요, 오직 천하(天下)의 선(善)을 위하여 천하(天下)의 총명한 자에게 맡기면 두루하지 않음이 없으니, 이는 스스로 자신의 지혜만을 믿지 않으면 그 지혜가 크게 되는 것이다. 육오(六五)는 강중(剛中)한 현자(賢者)인 구이(九二)에게 순응(順應)하여 맡겨서 아래에 임(臨)하니, 이는 자신이 밝은 지혜로 천하(天下)에 임(臨)하는 것이다. 이는 대군(大君)의 마땅함이니, 길(吉)함을 알 수 있다.
[本義] 以柔居中하고 下應九二하여 不自用而任人하니 乃知之事而大君之宜니 吉之道也라
[朱熹의 본뜻] 유(柔)로서 중(中)에 거하고 아래로 구이(九二)d[ 응(應)하여 스스로 지혜를 쓰지 않고 남에게 맡기니, 이는 지혜로운 일로 대군(大君)의 마땅함이니, 길(吉)한 도(道)이다.
象曰 大君之宜는 行中之謂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대군(大君)의 마땅함은 중도(中道)를 행함을 이른다.”
[傳] 君臣道合은 蓋以氣類相求라 五有中德이라 故能倚任剛中之賢하여 得大君之宜하여 成知臨之功하니 蓋由行其中德也라 人君之於賢才에 非道同德合이면 豈能用也리오
[程頤의 설명] 군신(君臣)이 도(道)가 함함은, 기류(氣類)로써 서로 구하는 것이다. 오(五)가 중덕(中德)이 있기 때문에 강중(剛中)한 현자(賢者)에게 의지하고 맡겨서 대군(大君)의 마땅함을 얻어 지혜로 임(臨)하는 공(功)을 이루는 것이니, 중덕(中德)을 행하기 때문이다. 인군(人君)이 현재(賢才)에게 있어서 도(道)가 같고 덕(德)이 합하지 않는다면 어찌 등용(登用)하겠는가.
上六은 敦臨이니 吉하여 无咎하니라
상육(上六)은 임(臨)함에 돈독함이니, 길(吉)하여 허물이 없다.
[傳] 上六은 坤之極이니 順之至也어늘 而居臨之終하니 敦厚於臨也라 與初二로 雖非正應이나 然大率陰求於陽하고 又其至順이라 故志在從乎二陽하니 尊而應卑하고 高而從下하며 尊賢取善은 敦厚之至也라 故曰敦臨이니 所以吉而无咎라 陰柔在上하여 非能臨者니 宜有咎也로되 以其敦厚於順剛이라 是以吉而无咎라 六居臨之終이어늘 而不取極義는 臨无過極이라 故止爲厚義요 上은 无位之地니 止以在上言이라
[程頤의 설명] 상육(上六)은 곤(坤)의 극(極)이니 순함이 지극한데 임(臨)의 마지막에 거하였으니, 임(臨)함에 돈후(敦厚)한 것이다. 초효(初爻)·이효(二爻)와 비록 정응(正應)이 아니나 대체로 음(陰)은 양(陽)을 구하고 또 지극히 순(順)하기 때문에 뜻이 두 양(陽)을 따름에 있으니, 존귀하면서 비천한 자에게 응(應)하고 높으면서 아래에 따르며, 현자(賢者)을 높이고 선(善)을 취함은 돈후(敦厚)함이 지극한 것이다. 그러므로 ‘돈임(敦臨)’이라 하였으니, 이 때문에 길(吉)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다. 음유(陰柔)로서 위에 있어 능히 임(臨)할 수 있는 자가 아니니 허물이 없을 것이나, 강(剛)을 순종함에 돈후(敦厚)하기 때문에 길(吉)하여 허물이 없는 것이다. 육(六)이 임(臨)의 종(終)에 거하였으나 극(極)의 뜻을 취하지 않은 것은 임(臨)은 지나치게 극(極)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만 후한 뜻이 되고, 상(上)은 지위가 없는 자리이므로 다만 위에 있는 것으로 말했을 뿐이다.
[本義] 居卦之上하고 處臨之終하여 敦厚於臨하니 吉而无咎之道也라 故其象占如此하니라
[朱熹의 본뜻] 괘(卦)의 위에 거하고 임(臨)의 마지막에 처하여 임(臨)함에 돈후(敦厚)히 하니, 길(吉)하여 허물이 없는 도(道)이다. 그러므로 그 상(象)과 점(占)이 이와 같은 것이다.
象曰 敦臨之吉은 志在內也라
<상전(象傳)>에 말하였다. “돈임(敦臨)의 길(吉)함은 뜻이 안에 있기 때문이다.”
[傳] 志在內는 應乎初與二也니 志順剛陽而敦篤이면 其吉可知也라
[程頤의 설명] 뜻이 안에 있다는 것은 쵸효(初爻)와 이효(二爻)에 응(應)함이니, 뜻이 강양(剛陽)에게 순종하여 돈독하면 그 길(吉)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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