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인 강괴 다뉴브 강의 크루즈 낭만여행
- 제19화 예술의 도시 비엔나 3 -
2016년 6월 29일
우리 크루즈 선박은 비엔나에서 1일 더 체류하며 관광하기로 되어 있지만
우리의 오늘 스케줄은 크루즈팀과는 별도로 한국 현지 가이드를 예약하여
어제 보지 못한 관광을 시작 하려고 아침 일찍부터 현지 모모투어 한국
가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린 D번 트램을 타고 오이겐 거리의 벨베데레 역에서 내려 밸베데레 궁전으로
들어가니 전쟁 영웅 오이겐 공의 저택이었든 상부 벨베데레 궁전이 바로 나타나고
궁전 앞에서 보이는 한폭의 그림과 같은 프랑스식 정원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아래쪽으로 길게 펼쳐져 있는데 그 뒤에는 비엔나의 시가지가 한눈에
보이고 성 슈테판 성당의 첨탑도 수평선을 보완 하듯이 아련하게 보였다
원래 이곳은 초지와 농지였든 곳으로 30세에 비엔나의 총사령관이 된
오이겐 공이 34세때 1697년 이곳을 군사시설의 목적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구입하였다가 여름 별장을 짓기 위하여 건축가 힐데부란트(Hildebrandt)를
불러 하궁을 먼저 건축하고 정원도 프랑스 벨사이유 궁 정원을 만든
도미니크 지라르(Dominique Girard)의 정원사에게 이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게 하였다고 한다
1717년 하궁을 완성하고 정원 윈쪽에 이탈리아 건축가들에 의하여 화려한 상궁을
착공하여 1723년 완공되었는데 화려한 정원과 잘 어울리는예술작품으로 평가하여
상궁의 이름이 그 당시에는 카르텐 팔레(Gartenpalais)“정원 궁전“이란 이름으로
뷸려 졌다고 한다
벨베데레(Belvedere)란 “좋은 전망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란 이탈리아어라
하며 스핑크스의 조각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는데 스핑크스의 의미는 지혜를
상징한다고 하여 이곳도 지혜가 샘 솟는 원천이라는 의미가 깊다고 한다
원래 합스부르그 가가 오스트리아를 지배할 당시 기초 과학에 많은 투자를
하여 원천기술을 많이 확보한 관계로 지금도 세게적으로 원천기술 로얄티가
재정수입의 1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한 예로 우리나라도 굴착기의 필수 원천 부품 사용료를 지불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 상궁은 바로크 식으로 세력의 과시용으로 화려하게 지었으며 하궁은
주거의 목적으로 정교한 크로테스크한 양식으로 지었다고 한다
1736년 오이겐공이 자식도 없이 유서도 없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이 궁전은
조카딸 빅토리아가 상속을 받았으나 이곳의 거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이 궁전을 매도하였으며 이 매도증명서에 처음으로
벨베델레 궁전이라는 이름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합스 브르그 가의 여름별장 궁전으로 사용하다가 1776년 테레지아 여제와
요세프 3세의 호프 부르그에서 소지하고 있든 미술품과 귀중품을 이곳으로 옮겨
와 일반에게 공개 함으로서 오스트리아 미술관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궁은 19-20세기 미술품을 전시하고 하궁은 중세에서 바로크 시대의 예술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이 미술관에서는 그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 원본이 전시되어 있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금속세공업자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 어마니
사이에서 1862년에 테여난 그는 세공사의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많은 작품에
많은 금 은등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1888년 비엔나 시립극장의 벽화를 아카데미풍으로 그려 많은 호평을 받고
유명해졌으며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화 1”
1907년 유대계 부호 페르디난트 블로흐-바우어는 화가 클림트의 후원자였으며
부인의 초상화를 부탁하여 그리게 하였고 그의 작품을 5점이나 소유하고 있다가
2차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압수 당하고 피신하여 살다가 1945년 사망했는데 그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자기가 상속자라면서 2000년 오스트리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고 2006년 소유권이 인정되어 반환하기로 결정하자
이 그림을 너무 좋아하는 비엔나 시민들은 아델레 안녕(Ciao Adele)이라는
프랑카드를 걸고 반환을 아쉬워 헸으며 “현대판 모나리자”라는 유명한 그림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하여 인산 인해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 그림이 반환되자 미국의 사업가 로널드 로더에게 1억3천5백만 딸러에
매각되어 세계에서 6번째로 높은 가격의 그림으로 더욱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클림트은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나는 그림의 주제로서 나 자신에게는
흥미가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더 흥미가 있다. 특히 여자들에게.”
라고 말할 정도로 모텔 아텔레와의 염문이 사실로 들어나며 100년의 세월을
거슬러 클림트가 이 여인과 사랑에 빠져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완성된 그림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남편 페르디난트와 달콤했든 시간들을 음미하는 주인공
아텔레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가 있다고 한다
클림트는 한번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는데 바우어 부인을 비롯해
사교계의 여인들, 작품의 모델 등 여러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고 하며
그가 사망했을 당시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생전에 연인 마리아 짐머만이 낳은 두 아들만을 자신의 자식으로 인정했다
하며 1897년 빈 대학으로 부터 “철학”이라는 그림을 의뢰받고 고민하다가
분리파에 물들어 있든 시기에 킅팀트는 벌거벗은 인간들의 불안과 고뇌를
상상하는 외설적인 그림을 그려 평생 동안 대중들과 주류 미술계의 입에
오르 내렸으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사랑받는 화가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한다
이곳 상궁에 원본으로 전시하고 있는 클림트의 “키스” 그림 앞에는 앞에는
많은 관람객이 설명을 듣고 있었으며 클림트의 대표작으로 클림트가 연인
에밀리에를 켜안고 키스하려는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림으로 남자의 옷에는
네모난 모형이 그려져 있고 여자의 옷에는 둥근 무뉘가 그려져 있으며 여자의
손과 발만 보이고 옷과 다른 부분은 화려한 장식의 아름다운 색채로 도금된
모습만 보아도 사랑이라는 환상을 느낄 만 한 분위기인 것 같았다
이 그림은 180cm의 정사각형 약1평 정도의 틀 속에 전시되어 있으며 1908년에
이 미술관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 미술관의 대표 그림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같은 시대에 살았든 에콘 쉴레( Egon Schiele 1890-1918)도 너무나 유명한
분리파 화가로써 클림트보다 28년이나 적은 나이이기에 클림트은 그의
스승이자 멘토로 항상 존경의 대상이며 화풍도 비숫 해 그도 외설적인 여인의
그림을 그려유명해 졌지만 공공장소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고 하여
24일간의 감옥 신세를 지기도 한 천재화가 였다고 한다
상궁은 1955년 4대 강국의 외무장관이 모여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부여한
장소도 유명하며 합스브르그 가의 마지막 황태자 페르디난트가 잠시
거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전시실의 이외에도 한 코너에는 황실 예배당이었든 곳에는 아직도 예배를
볼 수 있도록 모든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 서둘러 벨베데레궁전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쉰브룬 궁전
(Schloss Schonbrunn)을 칮아 지하철을 타고 비엔나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동하였다
17세기 후반 레오폴드 1세는 합스브르그가의 대 번영의 시대에 걸맛는
웅대한 황궁을 짓기 위하여 당대 오스트리아 최고의 건축가 JB 피샤 폰
에를라흐에게 황궁 설계를 맡겼다
그는 프랑스의 페르샤이유 궁전보다 더 화려한 궁전을 설계하여 하였으나
합스브르그 가의 검소한 모습도 보여주어야 한다며 다소 축소하여 1695년
착공을 하였으나 황제 요세프1세, 황제 카롤6세를 거쳐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시대에 이탈리아 건축가 니콜로 파카시에 의하여 정원과 함께 궁전이
완성되었다
로코코 양식으로 완성된 궁정과 황실 장원 그리고 방이 1441개나 되는
황실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으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왕족과
수많은 대신들과 시중들이 함께 거주하는 작은 도시였다고 하면 이곳은
합스브르그 가의 가족들만이 오붓하게 즐기는 큰 저택의 여름 궁전이었다
고한다
황궁의 뒤편에 정원과 호수를 만들고 경사진 맨 위쪽에는 마리아 테레시아
여제시대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개선문의 형식으로
1775년 그리스 신전형식의 글로리에테(Gloriette)를 만들었다고
중앙외벽에는 "황제 요제프 2세와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하인 1775년에 세워졌다"
고 세겨져 있으며 중앙 중심부는 카페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양쪽 날개 부분은 로마 신전 양식의 도리아식 기둥 사이로 12개의 아치가 있으며
12신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중앙 부분 카페테리아는 당시에도 황제들이 궁정에서 아침을 먹고 마차를
타고 와고 이곳에서 궁전과 비엔나 시내의 전경을 감상 하면서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3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곳은 비엔나의 유명 커피점으로
이름이 날 정도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기에 "비엔나 커피"라는 역사도
단순한 생각에서 나온 명사가 않인 것 같았다
비엔나 커피는 “아인스패너”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프렌치 프레스로 진하게
뽑은 커피 위에 크림을 올려서 만들며 휘핑 크림이 올라가기 때문에 느끼하지
않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라고 한다
궁전 뒤로는 1.7키로 평방미터에 이르는 정원이 나오는데 정원 한편에는
동물원, 미로 정원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리스 신들의 분수 탑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궁전의 동쪽 긑자락에는 18세기에 분수와 함게 세둬진 오벨리스크는 모조품으로
함스부르그가의 위상을 위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쉰브룬 궁전의 내부는 전채 1441개의 방중 현재 45개의 방만 개방하고
있으며 내부는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재현한 아름다운 유물들이 있다고 한다
프란츠 요제프황제는 이곳 쇤부룬궁에서 태어나 68년간 통치하다가
1916년에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18세에 제위에 오른 황제로써
그는 이곳에서 근무한 방은 4번방으로 개방되어 있어나 검소하고 가족
사진이나 자식들의 사진을 보면서 업무를 수행했다고 하며
1854년 프란츠 요세프 황제는 단숨에 반한 16세의 엘리사배스과 결혼 하여
1남2녀를 두었으며 9번방은 요세프 황제와 엘리자베스황비의 침실이며
10번방은 화랴한 장식으로 보아 접견실로 보이며
1762년10월13일 아버지를 따라 6살의 모차르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초청을 받아 쉰브룬 궁전의 16번방에 초대되어 황실가족과 대신들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첫 연주를 하였다고 한다.
연주가 끝나고 모차르트는 여황제의 무릅에 올라가 볼에 키스를 하고 내려
오다가 그만 미끄러졌는데 15번째의 어린공주 마리아 안토니아가 모차르트에게
다가가일으켜 세웠는데 어린 모차르트는 “우리커서 결혼할까”하고 말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동갑 내기였든 공주는 1770년 14세가 되든 해 정략결혼으로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혼인하여 왕비가 되어 “마리 앙투아네트”로 프랑스식
이름으로 바꾸었으며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1793년 루이 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마리도 38세의 생일을 17일 앞두고 같은 해 단두대에서 처형
당하였다고 하며 연민의 정을 느끼든 모차르트는 그보다 2년 먼저 세상을
떠났기에 마리의 슬픈 일생을 듣지 못 하였다고 한다
30번 방은 나폴레옹이 비엔나를 점령했을 때 기거 했든 방으로 프랑스와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프란츠2세는 딸 마리 루이제를 나폴레옹과 혼인시켜
평화를 정착시켰으나 나폴레옹이 실각하자 이혼하고 외아들과 이곳으로 돌아와
살았으며 그의 아들은 나폴레옹의 아들이라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하다가
1832년 21세의 나이로 절명했으며 마리 루이제도 2년 후 사망하게 되는 아픈
사연을 가진 방이라 조금은 안 쓰러웠다
39번방은 프란츠 황제와 국모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부부와 자녀들의
그림으로 채워져 있는데 마틴 판 미이텐스가 그린 가족초상화로 16명의
자녀들(아들5명 딸11명)과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대회랑인 메인홀은 21번 방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으며 이곳에서 연회나 음악회가
종종 열린다고 한다
계단도 화려하지는 않치만 프레스코화가 돋보이는 계단이었다
우린 이곳을 나와 어제 보지 못한 비엔나 중앙묘지를 보기 위하여 트랩을 타고
비엔나 Zentralfriedhof에 도착하였다
중앙묘지는 크기가 2,4키로 평방미트나 되어 유럽에서도 두 번째로 큰 공동묘지
이며 "죽은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잠자는 장려한 도시"로 1875년 정식으로 문을
열었으나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였으며 당시 비엔나 시장인 칼 뤼거(Karl Lueger)
는 음악의 도시인 비엔나에서 유명을 달리한 음악가들의 무덤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것을 이곳으로 이장하여 음악가의 묘역을 만들어 유명한 음악가들을
추모하니 단번에 이 묘역이 활성화 되면서 지금은 비앤나 인구보다 많은 330만구
의 묘소가 있다고 한다
묘역 32A는 음악가의 묘역으로 묘역 한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었고 모차르트의 묘지는 중앙묘지로 오는 길옆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1791년 사망한 모차르트는 슈테판 성당 뒤편 시신 보관소에 있다가 이름 없는
행려 병자와 함께 성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묻혀 버리는데 그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 콘스단체와 친구들이 시신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1902년 성 마르코스
공동묘지의 언덕위에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기념비 뒤에는 베토벤의 묘비석과 프란츠 슈베르트의 묘비석가 있었다
베토벤은 성악가인 아버지에게서 엄한 교육을 받았고 하이든의 사사를 받았으며
비엔나에서 음악 공부를 하며 활동하였다고 한다
20세부터 귓병을 알아온 그는 1814년 완전히 청력을 잃어 버리고 글로만 대화를
나누었으며 1824년 교항곡 제9번의 초연을 지휘한 그는 청중의 환호성도 듣지
못하고 관중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뒤로 돌아섰을 때 관중의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달리 1827년 서거한 베토벤은 당시 비엔나 인구의 10/1에 해당하는
약2만명이 운구행열에 애도를 표시했을 정도로 화려하게 장례식을 치루었으며
시체도 3번이나 다시 묻었다 처음 1827년 베링공동묘지에 묻혔는데 1863년
금속관을 만들어 다시 묻었으며 1888년에 세 번째로 이곳 음악가 묘역에 이장
하였다고 한다
슈벨르트는 1797년 비엔나에서 음악가 집안에 태여나서 11세때 황싷 합창단원
으로 뽑히는 수재였으며 항상 존경하며 사사하든 베토벤을 죽기 1년 전에 만나
자신이 작곡한 곡을 몇곡 보고 베토벤이 극찬하였다하며 그도 1년반 후에
알수 없는 병에 걸려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며 “가곡의 왕“답게
600어곡의 가곡과 8곡의 교향곡과 소나타 오페라등이 있다고 한다
원래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존경하였기 때문에 그의 소원대로 베토벤의 옆에
안치되었으며 1년전 베토벤을 운구한 음악가중에서 제일 많이 알려진 사람은
제자 피아니스트 후멜이었고 가장 알려지지 얺은 사람이 슈베르트였으나 사후
그의 작품이 높이 평가되어 묘석도 화려하게 음악의 여신이 월계관을 씌우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비엔나의 싱징인 “푸른 도나우 강의 왈츠”의 작곡가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1825년 비엔나 근교에서 태여 났으며 은행가가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 몰래
음악공부를 하였으며 “숲속 이야기” 오페라 “박쥐”등 400여곡의 왈츠를
작곡하여 왈츠의 왕으로 알려져 있으며 첫 부인과 사별한 후 둘째부인과는
성격차이로 이혼하고 그의 음악활동을 크게 뒷받침한 셋째 부인과는 아름다운
말년을 보냈다고 하여 이곳 묘비 석에도 그의 세째 부인 아델레(Adele) 의
모습도 조각 되어있었다
비엔나 중앙묘지는 음악가 묘역이 조성된 이후 비엔나의 명소로 알려지고
있었으며 1945년부터는 카를로 보로메오 성당(이제는 중앙 묘지를 건설한
시장 칼 뤼가를 기리기 위하여 현재는 뤼거 교회Lueger Kirche라고함)
앞에 오스트리아 공화국 역대 대통령의 묘지도 조성되어 국가적인 성소가
되었다고 한다
우린 이것으로 대략적인 비엔나를 관광하고 남은 시간은 거리 뷰로
비엔나 관광을 마무리 하려고 한다
성곽도시인 비엔나도 오스트리아의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세프1세가
도시성벽을 허물고 대로를 만들어 근대 도시로 탈바꿈하는 량슈트라세
계획을 1857년에 추진하여 1865년 량슈트라제 거리가 탄생하여
완공식에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데몰리아 폴카”가 연주되었다고 하며
지금은 이 대로변이 비엔나의 중심부가 되어 있으며 헌정 성당, 대학.
궁정극장. 국회의사당, 왕궁, 마리아광장. 국립 오페라 극장등 유명 건축물
들이 모여 있는 곳이기도 하다
궁정극장(Burgtheatre)은 합스브르그 가의 극장으로써 황궁의 정문인
미하엘 광장 오른쪽에 1741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설립하였으며
여제의 아들인 황제 요섭2세는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의 작곡을
요청하여 1782년 에는 “후궁에서의 도주“1786년은 “휘가로의 결혼‘
1790년에는 “여자는 다 그래“를 초연하였다고 한다
오스트리아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셉황제는 이 극장이 협소하여 건축가
코르트리트 젬페르(Gottfried Semper)와 카롤 폰 하제나우어(Karl von Hasenauer)
에게 랑슈트라세 거리에 화려하고 아름다운 네오 바로크양식의 건물을 짓도록
하여 이곳에 궁정극장을 이전하여 연극 전용 극장은 물론과 오페라 음악회등
궁정 무도회까지 다양하게 사용하였다고 한다
1945년 대전으로 파괴되었으나 비엔나 시민의 힘으로 1955년 현재의 보습으로
재현되었으며 특히 ‘디오니소스의 제단“을 주제로 한 구스타프 클림트의
프레스코 천정화가 유명하다고 한다
궁정극장 맞은편에는 비엔나 국회의사당(Vienna Parlament)이 세워져 있다
1873년 파르테논 신전을 모방하여 기둥을 세우고 신들을 조각하여
오스트리아에도 민주주의가 조기에 정착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의사당을
그리스 신전과 같이 건축가 테오 한젠(Theo Hansen)이 설계하여 건축하였다고
하며 의사당 전면에는 지혜의 여신인 Pallas Athene의 대리석 석상이 있고
여신의 왼쪽 손에는 정의의 창을 잡고 있으며 어른쪽 손에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들고 있는 석상이며 발아래에는 4개의 분수가 오스트리아를 관통하는
도나우강 인강 엘베강 몰다우강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이곳에서는 1918년 11월 11일 합스브르그가의 멸망과 함께 오스트리아
연방 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한 곳으로 역사적인 장소이라고 한다
링 슈트라제 거리를 따라가면 비엔나 시청사 (Rathous Vienna)나타난다
1872년에서 1888년에 완공한 네오 고딕식으로 중세도시 암스텔담의
시청을 모방하여 프리드리히 슈미트의 걸작이라고도 하는 이 시청사는
마치 중세 성당과 같은 105M나 되는 바로크 첨탑이 7개나 있어 외관이
아름다울 뿐아니라 처음보는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비엔나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시청사 정원에서는 종종 음악회가 열리고 겨울철이면 크리스마스 장이 열려
야간의 조명과 함게 겨울의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시청사 바로 옆에는 비엔나 대학(University Vienna)이다
1365년 합스브르그가의 루돌프 4세가 형제인 알베르트3세 레오폴드 3세와
함께 대공시절 비엔나에 대학을 설립하였으며 18세기 마리아 체레지아
여제 시대에는 교육 개혁으로 인하여 비엔나 학파가 생길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고 독일 문화권 대학으로는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라고 한다
1877년부터 1884년 링 슈트라제 거리에 세워진 비엔나 대학의 메인 건물은
대학의 행정업무 도서실 부대시설로는 스포츠센터가 있으며 비엔나 시내
60여개소에 대학 캠퍼스가 나누어 져 있다고 한다
우린 선박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어 스테판 광장 근처에 있는 모차르트 기념관만
관광하고 귀선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는 이곳 2층에서 1784년부터 1787년까지 살면서 “휘가로의 결혼”
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하면서 이곳에서는 행복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이 건물은 5층 건물로 모차르트의 기념관으로 만들어 져 있으며
3층에는 전시회나 음악회도 종종 열린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음악가들중에서도 대표적인 음악가로
쵸코렛에도 모차르트 쵸코렛이라는 상표가 있을 만큼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비록 짧은 인생을 살다간 불행했든 천제 음악가이지만 지금까지도 모든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비엔나 관광을 마치고 서둘러 선박으로 돌아와 출항시간을 기다렸다
비엔나 이야기
비에나는 1276년 부터 650년간 유러을 지배해온 합스부러가의 황제의 도시이며
역사의 도시 음악의 되 예술의 도시 건축위 도시이다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세계적인 음악가 화가 예술가 들을 불러 들여 후원하면서
예술의 꽃을 피운 위대한 지도자이며 이 당시에는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 슈벨트
글룩 브람스 말러 수트라우스등 많은 음악가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궤테는 물론
클림트 쉴레등의 화가도 활동한 문화의 전성기를 만든 여장부이다
또한 매년 수억명의 지구촌 사람들이 지켜보는 신년 음악회가 열리는 도시이며
왈츠의 도시이다
죽어스도 외롭지 않는 다는 "죽은 자들의 도시"가 아니라 "잠자는 장려한
도시"를 만든 중앙 묘지는 명예묘역을 만들어 유명한 음악가는 음악가 묘역
예술가는 예술가 묘역, 역사가 묘역등을 만들어 죽어서도 그들의 높은 명예를
지켜주는 도시이다
합스부르그가 왕조의 영광스런 역사는 왕가의 장례 관습에 따라 심장은
아우구스틴 성당에 내장은 슈테판 대성당에 유골은 황실 납골당에
시대별로 안치하여 왕조의 영광을 죽어서도 누릴 수 있도록 만든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