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호]
우리 시대 지식인의 내면 풍경을 스케치하다
― 박상·조현·원종국·김병덕의 소설집을 읽다
임종욱
서울역 앞 노숙자를 약 올리는 것보다 재벌그룹 회장을 약 올리는 게 수십 배나 더 흥미로운 건 매우 어렵고 뒷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박상의 소설 「연애왕 C」에서
1
작년 연말에 후배이자 제자이기도 하면서 시인인 친구를 만났다. 소설 취재차 중국에 갔다가 돌아온 길이었다. 늦은 밤 추운 날씨에 진눈깨비 같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 앉아 뜨끈한 국물 안주를 마주한 채 술을 마셨다.
그 친구는 늦은 나이에 대학에 들어와 이런저런 풍파 끝에 올해 대학을 졸업할 참이었다. 우리는 내가 새로 쓸 소설 얘기며 그가 곧 낸다는 시집 소식을 화제 삼아 술잔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무슨 얘기 끝에 ‘문단 활동’ 얘기가 나왔다. 요지인즉 앞으로 나도 문단 생활을 해야 하니 이런 점은 깔끔하게 마무리해야 하지 않나 하는 뜻이었다. 나는 그의 입에서 나온 문단 활동이란 말이 너무나 생소해 그 진의를 파악하느라 잠깐 혼란스러웠다.
문단 생활 운운하는 말이 나온 이유를 여기서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그 친구의 조언 때문에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연 나는 문단 생활이란 것을 하고 있으며, 할 생각이라도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더듬어보니 우리나라에 문단文壇이란 개념이 자리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였던 것 같다. 서양(또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문예잡지가 발간되고, 거기에 시나 소설 등을 써서 발표하는 일군의 집단이 형성되기 시작한 때가 그 무렵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에서 문단의 역사도 그럭저럭 90년이 지난 셈이다.(내 개인적인 추측이니 기원이나 숫자가 다를 수도 있겠다.)
백여 년이 다 되가는 이 시점에서 ‘문단’이라는 용어가 가진 내포와 외연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도 문단이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존재하는지조차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예전에도 그랬겠지만 왠지 지금은 훨씬 더 많은 분파分派로 잘디잘게 쪼개지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이념이나 지역에 따른 자기분열도 있겠지만 문예지별로 갈라져 세력과 자장을 형성하고, 그 영향력이 좋든 싫든 우리 문단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지금은 그나마도 해체 과정에 접어든 느낌이다.) 더욱이 요즘 문단하면 꼭 정계政界가 주는 이미지와 별다를 게 없어 계파니 패거리들이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조리한 모습도 종종 보여주지 않은가.
아무려나 나는 그 어떤 영향권에도 속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스스로 ‘나는 문인文人이다’라고 하는 정체성조차 뚜렷하지 않으니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문단이 글 쓰는 일을 천업天業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나도 그런 사람 몇몇은 알고 있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아주 오래 알고 지내면서 그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보는 이들로 국한하면 숫자는 훨씬 줄어든다.
후배 시인을 만난 다음 날 내가 새로 글 쓰는 터전으로 삼은 고장인 남해로 내려오는 시외버스 안에서 내가 한번쯤 얼굴을 마주치거나 인사를 나눈 작가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저렇게 기억들을 정리하고 나니, 박상과 조현, 원종국, 김병덕 네 사람이 한데 묶여졌다.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고, 일부러라도 만나기도 어려운 그들이지만 나는 그들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낸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게 되었다.
이들 네 사람은 박상을 제외하고는 다들 한 권의 소설집만 냈다.(김병덕은 평론가로서 활동을 먼저 시작한 사람이지만, 창작으로만 국한하면 역시 이번 소설집이 처녀작이 된다.) 후배 시인과의 우연한 대화에서 자극을 받아 시작된 책읽기였으니 이들의 작품에 아무런 공통분모도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고(이 말에 담긴 불온한 함의는 지우고 이해하길 바란다.) 우연한 만남에서 비롯되어 읽은 그들의 소설 속에서 나는 어떤 동질적인 체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소설 속에서 펼쳐놓았고 눙쳐놓은 이야기와 고민들이 내 마음에 진지하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2
소설가 박상을 만난 것은 2010년 12월 언저리였을 것이다. 내가 소설을 낸 출판사가 주선한 망년회 비슷한 모임에서였다. 많은 사람이 모인 것은 아니었음에도 박상은 이질적이었다. 그새 3년의 세월이 지났으니 외모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봉두난발에 구레나룻을 아무렇게나 방치한 얼굴하며 과장된 몸짓과 어투가 30년대의 작가 이상李箱을 연상시켰다. 개성을 주체하지 못하는 유별난 친구라고 생각했었는데, 술자리에서 들으니 그 즈음 락밴드를 결성하려고(이미 결성했거나) 분주한 모양이었다. 외모나 복색에 어울리는 취향이었는데, 그것도 글 쓰는 사람들로만 조직해보겠다니 꽤 대담한 발상이었다.
얘기를 나누다보니 박상과 나 사이에 공통 관심사가 있었다. 한 마디로 그는 ‘야구광’이었다. 문인들만으로 구성된 사회인 야구팀이 있는데, 그는 거기서 활동하고 있었다. 나도 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라 구미가 확 당겼다. 문인 야구단 얘기는 전부터 듣고 있었고, 나도 소설 몇 권을 낸 처지라 가입할 자격은 있다고 여겨 동참할 요량으로 다른 문인을 통해 몇 번 의사를 물어본 적도 있었다.(내가 왕따를 당한 건지 야구단 모임이 활발하지 않은 탓인지 그 꿈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바로 그 야구단 소속이라니, 갑자기 동지애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야구광답게 박상이 쓴 소설도 야구 소재로 도배되어 있었다.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이룸, 2009년)에 실린 단편의 반수 이상에서 야구선수거나 야구팬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다. 장편소설 『말이 되냐』(새파란상상, 2010년)는 위대한 야구선수가 되려는 한 무명청년의 고투기다. 나중에 그 소설을 읽으면서 ‘이 친구 정말 야구에 미쳤구나.’ 하면서 속으로 실소를 금하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박상은 야구와 락 음악 두 가지에 미친 사람이다. 그때의 짧은 만남 이후 나는 그를 다시는 해후하지 못했다. 박상은 2011년에도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자음과모음)(작품 제목에서도 괴짜 냄새가 물씬 풍긴다.)를 출간했다.
『15번 진짜 안 와』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제외해야겠지만, 앞 선 두 편의 작품, 특히 소설집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꿈과 좌절’이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그의 언행만큼이나 과장을 주 무기로 삼고 있다. 그의 소설은 ‘떠벌리기’의 경연장이라도 연 것 마냥 요란하다. 더구나 그의 문장은 정제된 표현이나 묘사를 능사로 삼지 않는다. 독백체에 가깝게 펼쳐지는 언어는 아직 회도 뜨지 않은 심해어가 도마 위에서 몸부림치는 것처럼 관능적이다. 언어의 원시림을 맨발로 걷는 듯한 어투에서 나는 무더운 여름날 발가벗고 삼림욕을 하는 청량감을 느꼈다. 그렇게 보면 그의 언어가 주는 첫인상은 밝고 청소년적이다.
우스꽝스러운 타격 자세로 상대 투수와 수비수의 혼을 빼놓아 ‘야구 경기를 말아먹은’ 이원식이나 프로야구 팀의 간판 홈런 타자이면서 야구를 양파에 비유하는 이원식(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대부분 ‘이원식’이다. 박상이 등장인물 이름 짓기가 따분했거나 하나의 맥락 위에 인물상을 구축하고자 했던 탓이겠다.)은 제대로 야구를 못 해 퇴출 위기에 몰린 용병 타자를 위로한답시고 ‘너는 위대한 벤치워머’라며 독자들을 웃긴다. 어릴 때 이상한 일을 계기로 아빠가 사라져 버린 뒤 그 아빠가 가 있다는 외계로 가기 위해 ‘외계로의 문이 열리는 순간’을 찾아 헤매는 ‘사차원 야구소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혼신의 뜀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저마다 자기만의 꿈을 가지고 사는 군상들이 그 꿈의 실현으로 가는 미로 속을 활보하다 결국 경찰서 유치장에 모이는데, ‘체면을 세운다’는 역설적인 외침으로 그 꿈을 향해 횡보橫步한다. 개다리춤을 완벽하게 익혀 꿈의 신공神功을 펼치려는 세속의 추위를 이겨내고자 한다. 하드락 밴드를 유지하기 위해 트럭 택배를 하고, 고달픈 현실에서 애인과 직업마저 잃을 처지에 놓인 록커는 한강에 나가 락커에 어울리는 득음을 얻고자 혼신의 힘을 쏟아낸다.
이렇게 박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꿈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 꿈의 내용이 평범한 우리들이 보기엔 무모하고 치졸해 보일지라도 그들에겐 절실하다. 그들이 살아가고 살 수 있게 만드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런 절실함이 말도 안 되는 상황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읽는 이에게 감동과 비애를 자아낸다. 그리고는 곧 소설 속의 ‘그들’이 남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투영임을 간파하게 된다. 그것을 간파함으로써 우리는 슬퍼진다.
박상은 이렇게 무모한 꿈을 키우면서 그 꿈의 실현을 향해 가는 도중에 무수한 시련과 실패를 겪으면서도 절망하지 않는 인간 군상들을 시원하게 작품 속에 쏟아놓았다. 그들의 미래가 결코 낙관적이지 않으며 삶을 살아갈수록 더욱 암울해지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암울함을 가리기 위해 박상은 지치지 않고 기발하고 기괴한 꿈들을 마구 양산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을 웃으면서 울거나 울면서 웃게 만든다. 그런 이들에게 독자들이 위안을 얻는 것은 그들의 꿈이 유토피아라 할지라도 결코 삶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를 듣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한 번 만난 박상은 밝은 사람이었고, 어찌 보면 허당처럼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는 남을 씹는 것으로 제 잘난 면을 드러내려는 속물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그의 헛헛한 웃음 속에서 그의 내면에서 숨 쉬고 있는 페이소스를 보았다. 그는 꿈을 성취하기란 ‘존나’ 어려운 일이며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가짜들이 세상에 판치기 때문이다.(이 말은 박상의 생각이 아니라 내 생각이니, 오해말기 바란다.)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죄다 꿈을 꾸다 좌절하고 만다. 그래도 그들은 즐겁고, 가짜가 판치는 판 위에서 회전목마를 탄 기쁨을 잃지 않으려고 버둥거린다. 그의 소설은 한 번 씹어 그 맛을 알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아직 설익은 소설만 쓰는 나도 그 진국을 맛보기 위해 다시 한 번 그의 소설을 저작咀嚼해야 할 것 같다.
3
소설가 조현도 박상을 만난 날 같이 동석해서 알게 되었다. 박상이 멀대 같이 키가 크고 수수깡처럼 비쩍 곯은 외형에 떠벌리는 스타일의 소유자라면(인신공격처럼 들릴까봐 부끄럽다.) 조현의 외모나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그는 왜소한 편이고 약간 살집도 있었다. 지금 기억에 뿔테가 가미된 안경을 썼었고, 말을 할 때 어떤 어휘를 쓸지 상당히 신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겠지만, 박상이 천방지축 홈즈라면 조현은 차분하고 사려 깊은 왓슨 박사를 닮았다. 당시까지 조현은 아직 소설집을 내지 않은 상태였다. 2008년에 동아일본 신춘으로 등단했는데, 나이를 모르긴 하지만 이른 등단은 아닌 것 같았다.
뿔뿔이 흩어져 주점으로 가는 길에 나는 그와 동행이 되었다. 나나 그나 그렇게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었고 행로가 멀지 않아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그는 나를 아는 눈치였다. 자기가 소설을 쓰는데 내 글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고 했는데, 내 어떤 글이 도움이 되었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어 이야기는 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내 글이 그의 소설 쓰기에 도움이 되었다는데 그의 소설을 읽어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의 등단작인 단편 「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을 구해 읽어보았는데, 읽어보니 의혹만 더욱 커졌다. 아주 매력적인 소설이긴 했지만, 내 글 어느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내 글과 그의 소설을 다 읽어본 사람이 있다면 당장 수긍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심 그가 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이게 정답일 것 같다.)
조현은 2011년에 첫 소설집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민음사)를 출간했다.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구입했다. 나는 바로 그의 소설이 내뿜는 마력에 푹 빠졌다.
앞에 소개한 두 편의 소설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그의 소설은 대학원생이 써낸 보고서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조현 이전에도 논문 투의 소설을 쓴 사람이 없진 않지만, 페이지를 몇 장 넘기지 않고도 논문 투의 망상에서 곧바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점에서 우선 그의 소설은 다르다.
논문 투라는 범박한 지적이 암시하듯 그의 소설은 문체나 구성이 아주 정교하고 치밀하게 엮여져 있다. 감정은 최대한 억제하면서 사실의 고리들을 교묘하게 연결시킴으로서 리얼리티를 확장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이 그의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실화와 대면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냅킨’이나 ‘햄버거’는 귀족적인 취향과 자본주의 상권이 장악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한 단면을 상기시킨다. 그러면서도 조현은 대단히 광범위한 역사적 배경들을 적절하게 사건들 속에 녹여버림으로써 주제의 정치성을 위장할 줄도 안다.
조현은 재미있게도 스스로 ‘현재 클라투 행성 지구 주제 특파원’임을 자처하고 있는데, 그 진위야 차치하더라도 이 소설집에는 정체가 외계인인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이 두 편이나 실려 있다. 과학이 발전하여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우주 공간이 계속 확장되고 있는 현실에서 이런 장치를 도입한 것은 단순히 작가의 호사 취미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것이다. 이제 소설은 전 지구적인 권역을 벗어나 우주의 한 구성원으로써 행동하는 지구인의 의태意態를 다뤄야 한다는 발언을 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박상의 소설에도 외계인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인물이 나오는데, 그 유사성도 흥미롭다.)
역사적 사실을 집요하게 강조하고 과학적 진실들과 이를 직면하는 인류의 반응을 암시하면서도 조현의 소설에는 기본적으로 판타지적인 요소가 강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런 외형은 나로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형태긴 하지만, 젊은 독자들의 눈높이로 보자면 크게 흥미를 유발시키는 요소가 될 것이다. 게임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에게 판타지와 리얼리티는 극점에 서 있는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처럼 같은 공간에서 공존할 수 있는 패러다임으로 보일 게 분하기 때문이다.
조현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흥미 유발 요소를 많이 장착한 특징을 가지면서도 진지하다. 그래서 어떤 면으로는 소설이 플롯이 다양하게 전개되거나 서스펜스나 미스터리 같은 극적인 반전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점은 그의 소설을 다소 지루하게 만들 여지도 야기하는데, 그런 단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작가의 엄격하면서도 과장되지 않는 학자적인 탐구정신과 빈틈을 보이지 않고 빚어지는 지식에 대한 검색, 그리고 이를 적절하게 배분하는 끈질김이다. 그의 소설은 전반적으로 상상하기 쉽지 않은 소재들을 활용하지만 그런 낯선 소재들이 별로 어색하지 않은 것도 이미 검증된(또는 검증되었다고 여기거나 믿게 만드는) 객관적 정보들이 단단한 성벽처럼 소설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은 비현실성을 인식하면서도 진실이라고 믿게 만드는 묘한 중독성을 발휘하게 된다. 이런 점이 조현 소설의 큰 미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에 「초설행」이라는 단편이 실려 있다. 이 작품은 『성종실록』에 실린 한 기사에서 착안해 써낸 일종의 팩션이다. 역적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쓰고 살면서 아버지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주려는 한 남자의 욕망과 그 실패를 큰 얼개로 삼고 있다. 그가 나를 처음 만났을 때 소설을 쓰는 데 도움을 받았다는 언질이 이 소설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여겨졌다. 다만 이 소설은 작가의 의욕에 비해서는 이야기의 전개나 결말이 다소 평이하여 나로서는 실망스러웠다. 작가마다 자기가 자신 있게 잘 쓸 수 있는 분야가 따로 있는 모양이다. 지나치게 흥미 위주거나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남발되고 있는 우리 팩션 역사소설의 현실을 생각하면 재능 있는 작가들이 우리 역사를 재해석한 소설을 많이 써주기를 기대하지만, 섣부른 접근은 조금 자제해주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조현의 소설은 등단한지 얼마 안 된 신진 작가가 보여주어야 할 가능성과 기대치를 충분히 달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의 역량과 상상력을 충분히 발휘한 작품들을 계속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작가의 지적 유희가 성공적으로 발휘되었을 때 성취할 수 있는 깊이를 그의 소설은 이미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4
소설가 원종국을 알게 된 것은 그가 동국대학교 문예대학원에서 소설 창작 강의를 하고 있던 덕분이었다. 몇 년 동안 나도 강의 과목은 달라도 그곳에서 강의를 했다. 학교에서는 개강 때와 종강 때 출강한 강사들과 학생들이 모여 다과회를 가지는데(물론 술이 빠지진 않는다.) 그곳에서 그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
ㅜ원종국에 대한 첫인상은 전형적인 모범생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모임은 으레 떠들썩하기 마련인데, 그런 분위기에서도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말수마저 적어 대화에도 그리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 자리가 불편해서라기보다는 워낙 조용한 성격 때문으로 보였다. 옷차림새도 단정했고, 머리 모양새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처음 봤을 때 나는 그가 강사가 아니라 새로 입학한 대학원생으로 생각했을 정도였다.(나쁜 뜻으로 쓴 글은 아니니 오해가 없기 바란다.)
ㅜ원종국은 청주대학교 신문방속학과를 나왔는데, 청주대학교는 나와도 조금 인연이 있는 학교다. 썩 좋은 추억을 남기고 떠나진 못했지만, 2년 정도 그 대학에 적을 두고 학생들을 가르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청주대 출신이란 얘기 들었을 땐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꼈다. 또 그의 성씨가 원元씨란 점도 호감이 갔다. 내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고려 말 때의 시인 원천석元天錫의 한시였는데, 원씨는 모두 원주 원씨고, 원천석의 후손들이다. 내가 박사가 될 수 있게 해준 분의 후손이니 괜한 고마움과 애정을 느꼈다. 이런 사실은 나의 개인적인 체험이니 그의 소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긴 하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가 꽤 오래 전에 냈다는 소설집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기에는 충분했다.
원종국은 1999년 진주신문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기둥」이 당선되고, 다음해 『작가세계』 신인상에 단편 「용꿈」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근 15년의 필력을 가진 작가인데, 소설집은 2006년에 출간된 『용꿈』(문학과지성사)이 유일하다. 과작寡作 스타일이라고 해도 너무 뜸해 물어봤더니 곧 새 소설집이 출간될 예정이란다.(그 얘기를 들은 것도 시간이 좀 지났는데, 정말 그의 소설집 읽기가 어렵다. 누구보다 나도 그의 소설집 출간을 기다리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의 소설집을 읽으면서 나는 약간 충격을 받았다. 그의 조용한 품성에서 나는 그의 소설도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을 충실히 지키리라 예상했었다.(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뭐랄까 굳이 예를 든다면 윤흥길의 소설 작풍을 떠올렸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그런데 첫 머리에 나오는 세 편의 연작 단편부터 내용이나 형식이 예사롭지 않았다.
유전자 변형을 통해 복제 인간의 탄생이 자유로워진 시대가 배경인 이 일군의 소설들에서 나는 어딘가 음산하고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그런 하이테크가 지배하는 시대가 가져올 부조리나 문제점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비판하지는 않는다. 마치 전기電氣 시대가 그렇고 원자력 시대가 그랬듯이 당연하게 와야 할 시대가 온 것으로 작가는 간주하고 있었다. 부작용과 불합리가 사람들의 삶을 왜곡시킨다고 해도 그런 시대가 오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연작소설의 주인공인 달리와 유리는 태생부터 개인 본연의 삶을 박탈당했다. 천재 소년이었던 형 명주가 불의의 사고로 죽자 그의 부모는 전 재산을 털어 명주의 유전자를 이용해 복제인간 달리를 만들어냈다. 기대와는 달리 달리는 천재가 아니었고, 갑자기 그는 부모와 사회로부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된다. 기형적인 유전자를 몸에 안고 태어난 유리는 출생하자마자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세상에 대해 알만한 나이가 되어서야 동성애 부부인 두 여인의 가정에 입양된다. 나이가 스물이 되자 그녀는 예상대로 헌팅턴 무도병이라는 질병이 발병하고 마는데, 아무도 그런 그녀의 고통과 고민에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이 겪는 비극은 어쩌면 ‘출생의 비밀과 그에 따른 갈등’이라는 해묵은 소재의 반복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생적인 파탄은 치환되거나 치유될 수 없는 불가역적인 상황이었다. 서로의 상처를 잘 아는 두 사람은 어떻게 하든 이 억울한 상황에서 빠져나가고자 해답을 찾고자 발버둥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이 줄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감수해야 했다. 고통은 고통일 뿐 어떤 위안이나 대안도 그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박탈당한 사람들의 비참한 삶은 그의 소설이 담아내고 있는 일관된 주제라고 할 수 있다. 딸아이를 낳다가 죽은 아내의 흔적을 좇아가는 한 남자의 쓰디쓴 추억을 그려낸 「소멸의 흔적」이나 참된 사랑을 찾아 방황하다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리는 중학생의 우울한 몰락을 그린 「용꿈」,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체제가 다른 세상을 꿈꾸다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남자가 등장하는 「연」 등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인생행로는 끝에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맴돌고 있다. 어두운 인간의 내면을 작가는 진저리쳐질 만큼 냉혹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 또는 미래를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잔혹한 천형天刑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원종국의 소설에는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게임이라고는 예전에 테트리스나 갤러그(이 용어가 맞는지 모르겠다.)밖에는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작가 원종국이 요즘 유행하는 게임에 대해 상당히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것에 놀랐다. 그는 보기와는 달리 실험정신이 강한 작가였던 것이다.
이처럼 그의 소설에는 발판으로 삼을 현실 기반을 잃고 허공에서 떠도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출몰한다. 그런 인물들은 어쩌면 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변하고 잠깐 걸음을 멈췄다가는 여지없이 소외되거나 ‘게임 오버’가 되고마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가 왜 이렇게 세상을 어둡게 구현하고 있는지는 물을 수도 없고 물어본들 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서 나는 원종국 소설의 주인공들이 그 막막한 미로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아 새로운 지평의 세계로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올해쯤에는 출간될 그의 두 번째 소설집이 그런 바람을 이뤄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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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이자 소설가인 김병덕을 만난 것은 아주 최근의 일이다. 작년 10월 초에 학회 행사가 있어 경주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과묵한 사람이었고 어떤 면에서는 우직해 보였다. 명지대학교 문창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에서 문학창작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는 이미 여러 권의 평론집과 연구서를 내놓고 있었다. 미안하게도 나는 그의 저서들을 그때까지 접해보지 못했다. 그러니 더 나눌 화제가 없어 궁색했는데, 그가 얼마 전에 소설집을 냈다는 말을 듣자 호기심이 부쩍 일었다. 더구나 그의 소설집이 나온 출판사는 나도 얼마 전에 소설을 출간한 곳이었다.
비평 활동을 하는 사람이 창작에 손을 대는 일이 아주 드물지는 않다. 그러나 이 양자를 모두 잘해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늘은 그렇게 재능을 한 사람에게만 바겐세일하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김병덕은 꾸준히 비평 활동을 하다가 때늦게 창작에 뛰어들었다.
그는 2007년 계간 《문학나무》 여름호에 단편 「인간과 다른 인간」을 발표 등단했다. 1967년에 태어났으니 마흔 나이에 새로운(꼭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세계에 도전한 것이다. 나는 그보다 훨씬 더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겠다고 기염을 토했으니, 그의 등단이 늦었다고 타박한 처지는 아니다. 그러나 비평 활동 끝에 시작한 소설 창작이라니, 나는 무엇 때문에 변화를 택했고, 어떤 갈증을 풀고자 허구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의 소설집을 구입해 읽었다.
소설집의 제목이 『지식인의 언어생활』이라니, 비평가가 쓴 소설의 제목에 어울리는 듯하기도 하고 조금은 당돌한 제목이기도 해서 책장을 넘기면서부터 마음을 다잡았다.
소설을 다 읽고 난 느낌은 작가가 욕심을 많이 부렸다는 것이었다. 비평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작품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자기 나름의 기준이 있다. 물론 그런 것이야 누구에게나 다 있기는 하다. 그러나 비평가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읽은 이론서든 독서 경험이 제공한 것이든 작품은 이래야 한다는 어떤 틀을 갖게 된다.(그런 것이 없으면 어떻게 비평을 하겠는가.) 그런데 그것이 자신이 창작을 하게 될 때는 덫으로 작용하기 쉽다. 자신이 알고 있고 기대하는 소설의 형식에 자기 작품을 맞춰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창작에는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이 말 때문에 김병덕의 소설이 판에 박힌 모습을 띠고 있고 별다른 재미를 느낄 수 없다고 예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소설에는 다른 작가에게서는 볼 수 없는 자기만의 공간과 관점이 있으며, 그것을 풀어놓은 이야기는 충분히 흥미롭다. 다만 아직 칼질이 충분치 않거나 능란하지 못한 데서 오는 생경함이 독서의 흐름을 편안하게 해주지 못할 뿐이다.
그의 소설에는 일종의 ‘현실의 벽’을 넘어서는 데 실패하거나 넘어서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현실의 벽.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울타리에 갇혀 사는 존재다. 울타리는 나를 저 밖의 새로운 세계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면서 나를 안전하게 이 세계에 머물게 해주는 방어막이기도 하다. 그 안과 밖은 미묘한 길항작용을 하면서 자신의 현재를 위태롭게 흔든다. 안이 불만스런 사람은 밖으로 나가고자 하고, 안에서 자족하는 사람은 굳이 밖을 넘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데 김병덕 소설의 주인공들은 애석하게도 모두 나가려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당연히 지금 이곳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밖에서 안온하게 자기 세계의 안정을 구가하는 사람들로서는 이런 틈입자가 전혀 반갑지 않다. 이 때문에 양자 사이에는 반목과 대립이 생기는데, 항상 밖에 있는 사람에게 이 게임이 유리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싸울 때마다 지는 경기는 하는 사람은 패배감과 모멸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이런 강박관념이 지속되면 그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적개심을 품게 되며, 결국 자기 파괴적인 모순에 빠지고 만다.
김병덕의 소설은 이런 자기 분열의 모순에 빠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 사람들의 여정을 지켜보는 일은 괴롭고 우울하다. 바로 나 자신이 그런 부류라는 자각이 속절없이 들기 때문이다.
김병덕이 소설을 쓰게 된 궁극적인 동기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소설 속에서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특히 실패가 저주처럼 주어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벗어날 수 없는 주술의 세계에 뛰어들었다고 나는 보고 싶다. 비극은 현대 사회가 터부시하는 구조이지만, 가장 이 사회의 고질적인 암종을 진단하고 제거하는 데 적절한 수술 칼이다. 이 칼을 그가 더욱 예리하게 벼려 서슴없이 썩고 묵은 상처를 도려내기를 기대한다.
6
작가란 어떤 이유 때문이든 이승에서 받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들은 그 상처의 치유 방식으로 소설을 택했다. 참으로 역겨운(?) 직업이다.
근래에 우연찮게 네 사람의 작가를 만난 것은 나로서는 큰 행운이었다. 허연 이빨을 드러낸 채 밀려오는 쓰나미 앞에서 손발을 놓고 있던 내게 그들의 소설은 어떤 방향을 제시해주었다. 내가 가지 못해 아쉬웠던 길의 내면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즐겁게 그들의 소설 세계에 동참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이 그려낸 고통과 신음 소리는 울림을 가지는 것이다. 그 울림이 비단 나만의 반응이 아닌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진정한 ‘문단’은 바로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임종욱 한문학자, 소설가. 『동양 문학 비평 용어 사전』, 장편소설 『이상은 왜?』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