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간 163.6]
동학소설
고요히 흐르는 금강
이상면_작가, 전 서울대교수
제22화 남북접 군이 전라도로 몰렸다
서로군 중대장 모리오(森尾) 대위가 11월 15일 삼경三更 노성산에 집결해 있는 전봉준 군을 공격하기로 작정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보름달 아래 서 로군 본대와 통위영 군, 경리청 군 및 내포에서 온 장위영 군이 속속 공주 남쪽 30리 밖 용수막龍水幕에 집결했다. 그런데, 자정이 되어도 정작 선봉장 이규태李圭泰가 나타나지 않았다. 모리오(森尾)는 가끔 회중시계를 꺼내 보며 그를 기다렸다. 얼마 후 그가 사 인교四人轎를 타고 나타났다.
“선봉장이 뒤늦게 가마를 타고 오시오?”
“전봉준도 가마를 타고 전장에 나오던데, 뭐가 어떻단 말이오?”
“내가 앞장서서 지휘할 텐데, 가마를 타고 어쩌자는 거요.”
“나는 순무巡撫 선봉장先鋒將이오. 당신의 지휘를 받을 수가 없소.”
“그러면 당신이 지휘할 셈이오?”
“내 병사를 내드릴 테니 당신이 지휘하시오. 나는 공주성이 비어서 이만돌아가리다.”
이규태는 3백여 통위영 군을 현장에 두고, 경리청 군 호위를 받아 공주 로 돌아갔다.
모리오(森尾)는 사경四更에 서로군 본대를 이끌고 노성산으로 향했다. 통 위영 군을 경천으로 보내 서진케 하고, 장위영 군을 노성 쪽으로 보내 동 진케 하여, 삼면에서 협공할 셈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노성산 봉화대에 오르고 보니, 동학군이 보이지 않았다. 보름달 아래 하늘에 정성을 드리던 사람들이 전봉준 군은 어제 저녁 논산 쪽으로 갔다고 일러주었다. 모리오(森尾)는 하릴없이 서로군 본대를 이끌고 노성 쪽으로 내려갔다. 경천으로 우회해서 서진해 온 통위영 군도, 노성에서 봉화대로 올라오던 장위영 군도, 모리오(森尾) 군이 하산하는 것을 보고 맥이 빠져 공연히 허 공에 공포를 쏘고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랐다.
*
모리오(森尾)는 예하 장졸과 노성에서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한 다음, 8(辰)시경 다시 길을 나섰다. 동학군이 논산 못미처 어느 큰 마을에 있다 는 정보를 입수했다. 한낮이 다 되어 관군 일본군이 나타나자, 동학군은 놀라서 벌판에 우뚝 솟은 소토산小土山으로 올라갔다.
뒤를 따라 온다던 장위영 군이 나타나지 않자, 모리오(森尾)는 통위영 군 더러 소토산 서남에서 서북으로 에워싸게 하고, 니시오카(西岡) 조장더러 소대를 이끌고 소토산 동쪽에 포진케 했다.
모리오(森尾)의 신호에 따라 서로군과 통위영 군이 동시에 기슭으로 올 라가자, 동학군이 거세게 사격을 했다. 관군 일본군이 무장에 우세했지만, 동학군이 고지의 이점을 갖고 있어, 빗발치는 총탄 속에 가파른 산허리를 오르기 어려웠다.
3시 반경 동학군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모리오(森尾)가 통위영 군 에 돌격 명령을 내렸다. 마침내 통위영 군이 서남 서북 양쪽에서 돌진해 정상으로 올라가며 난사하자, 동학군은 기겁을 하고 대장기와 목인木印도 수습하지 못한 채 남쪽으로 달아났다.
동학군은 오리 남짓 내려가 은진 가도에 우뚝 솟은 황화대黃華臺로 올라 갔다. 그곳은 예로부터 강경산과 노성산을 잇는 봉화대로 사용된 명산으 로 정상에 돌무지로 둘러싸인 작은 분지가 있었다. 황화대는 소토산보다 훨씬 더 높고 기슭이 가팔라서 서로군과 통위영 군만으로 쉽게 공격할 수 가 없었다. 얼마 후 8백여 장위영 군이 당도하자, 모리오(森尾)는 그들에게 황화대 서쪽과 북쪽 기슭을 에워싸게 한 후, 통위영 군을 동남쪽에 포진케 했다.
5백여 전봉준 군은 3배가 넘는 관군 일본군이 쳐 올라가자, 돌무지 성벽 에 기대서 사격을 하며 거세게 저항했다. 동학군은 그러나 한 시간쯤 버티 다가 관군 일본군이 정상으로 돌격하자 서남쪽으로 달아났다. 강경 쪽으 로 간 손병희 군과 김개남 군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저녁에 모리오(森尾)는 그날 거둔 두 승전에 관해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튿날 16일 오전 아직 노성에 있는 미나미(南) 소좌에게 찾아가 그간의 전 황을 보고했다.
미나미(南)는 그의 전공을 칭찬하고,
“동학군은 필경 전주에 가서 다시 항전할 것이오. 용담 고산을 토벌하는 중로군 지대와 계룡산 동쪽에서 김개남 군의 행방을 쫓고 있는 서로군 지 대가 수일 내 삼례와 은진으로 집결할 것이오. 나는 미리 은진에 내려가 있을 테니, 귀관은 공주에 가서 여태껏 출진하지 않고 있는 선봉장 이규태 를 설득해서 은진으로 오도록 조치하시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
이규태가 17일 오후 금영錦營에서 중군中軍 이기준과 담소하고 있었다. 그는 8월 1일 정안에서 기포하여 공주성을 일시 점령하고, 일본군이 평양 성을 놓고 청군과 대결 중이니 북진하자고 외쳤지만, 전봉준이 호응을 하 지 않자 크게 실망하고 스스로 동학군을 해산했다.
그러자 박제순 감사는 그를 회유해 금영 중군으로 삼았다. 그런 일로 인 해서, 뒤늦게 척왜 항전에 나선 남북접 동학군은 그를 배신자로 치부했다. 금영에서도 그를 중군으로 예우하고도 동학군과 내통하지 않나 늘 감시했 다. 이규태가 그런 임기준과 담소하고 있다가 모리오(森尾) 대위가 불쑥 나 타나자, 적지 않게 놀랐다.
모리오(森尾)는 살기 찬 눈초리로,
“미나미(南) 사령관이 은진에서 출격을 앞두고 있는데, 선봉장이 여기서 이래도 되는 거요?”
“그렇지 않아도 차차 내려가 볼 참이었소.”
“차차라니. 내일 당장 길을 나서시오.”
모리오(森尾)가 물러가자, 이규태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저 자가 나더러 지휘를 받으라니…”
“말도 안 됩니다. 도둑이 주인행세를 하려고 들다니….”
이규태는 왜적의 지휘를 받아서 동포를 살육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사표를 낼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그것은 참극을 넘기는 것이지 막는 길이 아니었다. 어떻게든지 그 자신이 그 지위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비극을 막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임기준은 이규태가 여전히 지휘권 문제로 고민하는 것을 보고,
“내포 송악에서 복무하는 한량閑良이 일시 귀향했는데, 무과에서 실기 만점을 받은 자입니다. 그의 부친이 승문원 전 교리관이라 만국공법에 견 문이 있을 듯합니다. 외국군 지위에 관해 소견을 들어보시면 어떻겠습니 까?”
“의견을 듣는데 나쁠 게 뭐가 있겠소.”
이규태는 21일 눈 내리는 아침 노성으로 내려갔다.
신도안에 와 있던 이 종만이 관군 복장을 하고 적토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가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목표물을 맞히는 묘기를 보이자,
“궁술이 대단하오. 춘부장께서 승문원에 계셨다는데 함자가 어떻게 되 시오?”
“규圭자 복福자입니다.”
“잘 압니다. 나도 경주 이가요. 같은 돌림자로 서울에서 가까이 살아 친 하게 지냈어요.”
“어릴 적에 삼청동 취운정 활터에서 뵌 것 같습니다.”
“음-, 요즈음 일본군 대위가 순무巡撫 선봉장先鋒將인 나더러 지휘를 받 으라는데….”
“안 됩니다. ‘병자수호조규丙子修護條規에 조선은 자주국이니 일본과 평등 지례平等之禮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작전상 양해 사항이 있더라도 양국 기관에 평등권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지휘를 거부하니까, 위혁威嚇을 가하려고 합디다.”
“순무 선봉장은 높은 관직입니다. 조미우호통상조규 등 열강과 맺은 조 약에 ‘조선이 타국의 위혁을 받게 되면, 만국공법 상 공평과 선으로 조처 한다(中善爲措處).’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국왕을 욕보이고 경군을 마구 부리는 데….”
“만국공법으로 항변하고, 미국 등 열강의 협조를 받아 항의해 나가야 합 니다.”
“고맙소.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하시오.”
*
이규태는 그날 박제순 감사에게 편지를 보내, 동학군이 이미 논산, 은진 에서 패전하고 남녘으로 달아났으니, 우선 그 일대를 돌아보며 주민을 선 무하는 것이 좋겠다는 품의를 올렸다.
23일 감사의 결재가 나오자 대뜸 논산으로 갔다. 동학군이 항전하던 소 토산과 황화대 일대를 돌아보았다. 24일에는 강경 장에 가서 전일 전봉준 군이 황화대에서 달아나 손병희 김개남 군과 합류했던 곳도 둘러보았다. 장꾼들에게 안심하고 일상에 복귀하라는 방문을 내걸었다.
그날 오후 여산으로 내려갔더니, 이틀 전 미나미(南) 소좌가 중로군 본대 를 이끌고 그곳을 지나 삼례로 갔다고 했다. 이튿날 다시 삼례로 내려갔더 니, 미나미(南) 군이 역시 이틀 전 23일 그곳에 와서 묵었다고 했다.
삼례는 사통팔방 요지로 미나미(南)가 강 건너 전주로 들어가는 교두보 였다. 서로군도 장위영 군도 인근에 와 있고, 이규태의 통위영 군만 없을 뿐, 십여 일 전 금산에서 산악 지대로 보낸 시라키(白木) 지대도 그날 교도 중대와 함께 삼례로 와서 합류했다.
정토군이 대거 삼례로 당도하자, 전봉준 군이 겁을 먹고 23일 오후 전주 를 떠나 원평으로 옮겨 갔다. 미나미(南)는 24일 오전 예하 중로군과 서로 군을 이끌고 유유히 전주로 들어갔다.
이두황도 25일 8백여 장위영 군을 이끌고 전주에 입성했다. 그는 미나 미(南)에게 장위영 군을 쪼개 일본군 소대에 붙여서 동비東匪 토벌을 용이케 했고, 또 자신도 인근 지역애서 동비를 토벌을 했다고 보고했다. 미나 미는 환한 얼굴로 그의 어깨에 손을 얹어 치하했다.
‘선봉장 이규태가 동비 토벌에 나서지 않고 자신이 불러도 불응하는 것 에 비해, 이두황은 척척 알아서 일을 잘 처리하니 얼마나 훌륭한가….’
미나미는 즉시 이노우에(井上) 공사에게 선봉장 이규태를 좌선봉으로 강 등시키고 이두황을 우선봉으로 승진시켜 달라고 타전했다. 공사는 바로 그날 국왕의 윤허를 받아냈다.
이규태는 그런 것을 모른 채 26일 오후가 되자 통위영 군을 이끌고 삼례 를 떠나 해거름에 전주에 입성했다.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과 전일 원평 전 투에서 승전한 교도중대장 이진호가 영접을 했다. 이규태는 그들을 대동 하고 선화당으로 가서 이임을 앞두고 있는 김학진 감사를 예방했다.
김학진은 그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이규태가 최근 동학군이 휩쓸고 간 논산 은진과 강경 일대를 돌아보고 백성을 선무한 것을 보고했다. 교도중 대장 이진호는 전일 원평 전투에서 동학군을 물리친 경과를 상세히 보고 했다.
“미나미(南) 소좌가 24일 전주에 입성하여 그날 밤 교도중대에 일본군 을 붙여서 남문 앞산 ‘용머리 고개’로 진출시키자, 전봉준 군이 25일 새벽 6(卯)시 원평 동쪽 구미란 마을 뒷산자락에 포진했습니다. 8(辰)시 교도중 대 3백여 명이 시라키(白木) 중위와 하사들 지도로 공격에 나섰습니다. 김 개남 군과 손병희 군도 주력군의 좌우 산자락에 품品자 진을 쳤습니다.”
“동도東徒 3군이 다 모였던 게로군.”
“3천여 동학군이 세 줄기 산자락에 올라가서 거세게 저항하자, 정토군 이 산 아래서 효과적으로 공격하기 어려웠습니다. 미나미(南) 소좌는 오후 에 스즈키(杉木) 대위가 이끄는 특공대 40명을 더 투입했어도, 공방전이 길어지고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찌 했소?”
“오후 늦게 동학군이 동요하는 기색을 보이자, 교도병 돌격조가 일시에 여러 갈래로 산기슭을 올라갔습니다. 동학군은 온종일 산록에서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다가, 교도병이 돌격해 올라오자 거세게 저항했으나, 날이 저물자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달아났습니다.”
“허-, 그 많은 동도가 어둠 속으로….”
“양총 10정과 화승총 60정을 비롯해서 200자루가 넘는 도창刀槍을 노획 해서 일본군 측에 넘겼습니다. 게다가 동학군이 숨겨놓은 쌀 500석과 납 탄 7섬과 화약 7궤도 조선 돈 3천 냥과 함께 고스란히 일본군 차지가 되었 습니다.”
만찬 후 이규태는 미나미(南) 사령관을 예방했다. 미나미는 그를 보자 대 뜸 여러 날 늦게 온 사연을 물었다. 그가 충청감사 요청으로 논산, 은진 전장 및 동학군이 거쳐 간 강경 장을 돌아보며 백성을 선무했다고 말하자, 미나미는 인상을 찌푸리고,
“지휘관에게 일선 전투가 먼저요, 아니면 후방 선무가 먼저요?”
이규태가 대답을 못하자, 그는 다시
“동학군이 태인으로 달아나 내일도 전투가 벌어질 모양인데, 선봉은 어 떻게 할 작정이오?”
이규태가 어물어물 답변을 제대로 못하자,
“경군 2개 소대에 일본군을 좀 붙여서 보낼까 하오. 선봉은 어찌 하겠 소?”
“전주에 금방 도착한 터라, 밤새 궁리를 해보겠습니다.”
“기다리겠소.”
이규태는 밤늦도록 생각에 잠겼다.
‘동학군이 전주에 들어와서 근 열흘 전투를 준비하고도 결국엔 크게 패 했고, 군량미 500석도 납탄 7섬도 화약 7궤도 다 포기하고 달아났으니, 태인에 간들 얼마나 버티겠는가.’
*
이규태는 27일 이른 아침 미나미(南) 사령관을 찾아갔다.
“김개남 군이 그제 대개 남원으로 내려갔고, 손병희 군도 어제 먼 남쪽 으로 떠났답니다. 전봉준 잔당은 원평에서 군량미와 탄약도 다 포기하고 달아났으니, 별 힘을 못 쓸 것 같습니다.”
“태인보다 나주가 문제입니다. 나주 목사 민종렬이 손화중 군이 대거 오 고 있다며 원군을 요청하고 있으니, 달려가서 후원해야 하겠습니다.”
“나도 며칠 후 남원으로 가서 경상도 쪽에서 오는 동로군과 함께 나주로 가려고 합니다. 선봉께서 내일쯤 통위영 군과 서로군을 인솔하고 먼저 내 려가시지요. 그런데 모리오(森尾) 대위와 지휘 문제로 견해 차이가 있다면 서요….”
“본관은 순무사巡撫使로 여러 대대를 거느리는 선봉장인데, 모리오(森尾) 중대장이 그 위에 서겠다면, 만국공법 상 ‘공평과 선’에 맞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선봉장 고견을 존중하리다.”
미나미(南)는 이규태가 나간 후, 모리오(森尾) 대위를 불렀다.
“이규태 선봉장을 모시고 남쪽으로 진출하면 어떻겠소?”
“그런데 그분이 동학당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좀 힘듭니다.”
“무슨 증거를 갖고 하는 소리요? 잘못하면 무고가 될 터인데….”
“그분은 지금껏 한 번도 전장에 나가서 동학군과 싸운 적이 없습니다. 지난 15일 논산 전투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7일 공주에 가서 은진에 사령관께서 오셨다며 가자고 했더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차 가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전부터 유심히 살펴보니까 접주였다가 전향한 중 군 임기준과 담소를 많이 하는 등 좀 수상해서, 그날 사람을 사서 미행케 했습니다.”
“21일 함박눈 내리는 오전 임기준이 노성에서 말 탄 젊은 경군 하나를 데리고 와서 이규태에게 활 쏘는 묘기를 보였는데, 그자가 동비로 보였습니다. 요새는 관군 복장을 한 동비가 하도 많아서 경군에게 비표로 왼쪽 소매를 걷게 했는데, 그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자가 이규태와 한동안 벌판에서 담소하고서 동비 소굴인 신도안으로 간 것도 수상합니다.”
“선봉장을 모시고 가되, 기밀에 유의하고 늘 감시하시오.”
28일 오전 전주성 선화당 앞에 정토군이 다 도열했다. 미나미(南) 소좌 가 단 위에 올랐다.
“선봉장과 예하 장졸 제군의 장도에 신의 가호가 따르기 바랍니다. 나는 내일 부임하는 신임 이도재 감사를 예방하고, 모레쯤 중로군과 장위영 군 을 이끌고 남원으로 가서 동부에서 오는 동로군과 함께 동비를 서남으로 몰면서 나주로 갈 것입니다. 가급적 연말까지 동비를 초멸剿滅하고 거괴巨 魁를 잡아 사명을 다하도록 노력합시다."
선봉장 이규태가 말을 이었다.
“이두황 부영관 이하 장위영 장병과 이진호 영관 및 교도중대 제군은 미 나미 사령관의 뜻을 받들어, 모두가 무사히 서남으로 진출해서 건강한 모 습으로 다시 만나기 바랍니다.”
*
이규태는 통위영 군과 서로군을 이끌고 전주에서 길을 나서 원평을 거 쳐 오후 늦게 태인 석현점石峴店에 도착했다. 연도에는 거의 모든 집이 불에 탔고, 길거리는 한산했다.
장위영 군 일부가 아직도 전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장위영 장령들을 만찬에 초대해서 작일 전투 상황을 듣기로 했다.
“어제 오전 태인에 와서 보니까 동도 천여 명이 주산 성황산(城隍 山,126.4m)과 동남 인근 한가산(閑加山,126.8m) 및 읍내 남쪽에 봉긋이 솟 아오른 도리산道理山에 포진해 있었습니다. 장위영 군 230명이 두 패로 나 뉘어 일본군의 보조를 받아 먼저 한가산에 포진한 동학군을 협공해 올라 갔습니다. 동학군이 고지의 이점을 활용해서 천보총과 화승총과 양총을 난사하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정오가 지나 관군 일본군이 포복, 공격하 며 산허리에 오르자, 동학군은 놀라서 깃발을 걷어 남쪽 도리산 무리들과 북쪽 성황산 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전봉준이 성황산에 있었나보죠?”
“정토군이 다시 양쪽에서 산기슭으로 포복해 올라가며 사격하자, 동학 군은 납탄이 소진된 듯 양총만 난사하며 저항했습니다. 관군 일본군이 빗 발치는 사격을 무릅쓰고 8부 능선에 다다르자, 동학군이 마구 덤벼 육박 전이 벌어졌습니다. 동학군은 결국 해 질 무렵 9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전장을 정리하다 살펴보니, 태인 전투에서는 동학군 수가 원평 전투 때 보다 훨씬 적었는데도 사상자가 아주 많았습니다. 노획품 가운데, 양총 15 정과 조총 200정 및 도창 죽창 수백 개가 나왔는데, 양곡이나 총탄이나 화약 등 기본 군수품이 거의 없었습니다.”
태인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잔여 동도와 함께 한 많은 최후의 항전을 하다가 결국엔 해산하고 말았지만, 남북접 동학군은 이틀 전 원평에서 사실상 마지막 전투를 벌인 것이었다. 그날 저녁 전봉준과 김개남이 원평에서 서쪽으로 달아나는 것을 보고, 손병희가 적토마를 몰고 달려가서
“형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우리는 고향으로 가려고 하오. 동생은 어서 남으로 가서 해월 선생님을 모시고 올라가서 항전하시오. 도를 세우고 왜적과 싸워 나라와 민족을 구 해야지요.”
“해월 선생님을 찾으러 가겠습니다. 노령(蘆嶺, 276m)을 넘어 산맥을 타 고 오세요.”
*
이규태는 29일 통위영 군과 서로군을 이끌고 태인을 떠나 정읍으로 내 려갔다. 읍내 초입 전점前店에서 머물까 하다가 20리를 더 가서 중흥리中興 里에서 유진했다. 서로군은 노령(蘆嶺,갈재)에 좀 더 가까운 인근 천원점川原 店에 머물기로 했다. 동남에 입암산笠岩山이 보이는 풍광이 좋은 곳이었다.
미나미(南) 소좌가 새로 부임한 이도재 감사를 면담하고 남원으로 가기 에 그런지, 일본군은 저녁에도 파발을 연신 받고 띄우며 부산히 움직였다.
30일 아침 날이 맑고 한결 푹했다. 노령을 넘어 장성으로 가기에 좋은 날씨였다. 그런데 모리오(森尾) 대위가 이규태에게 찾아와서 전주에서 자 기네 동료 패가 와야 한다며 하루를 더 묵고 가자고 했다. 이규태도 모처 럼 쉬고 싶었다.
서로군은 여전히 파발을 연신 보내며 받으며 온종일 부산히 움직였다.
무슨 연유가 있었을까?
모리오(森尾)가 그곳에서 서쪽으로 50리 밖 산내면 종송리에 김개남 은 신처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규태 몰래 파발을 전주로 띄워 신임 감사 이도재가 강화도에서 온 심영군沁營軍을 파견해 오게 했다.
12월 1일 새벽 눈보라가 세차게 날리는 속에, 심영군 포도대가 정읍에 달려왔다. 모리오(森尾)가 다시 이규태에게 찾아와 악천후라 좀 더 기다렸 다가 날이 개면 노령을 넘자고 말했다.
그 사이 서로군 내 조선 관리가 심영군을 안내해 김개남이 숨어 있는 종 송리로 달려갔다. 그들은 즉각 김개남 은신처를 포위하고 그의 이름을 크 게 불렀다.
“그럴 줄 알았네. 나는 지금 뒷간에 있는데,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 네….”
김개남은 뒷간을 나와 허허 웃으며 오랏줄을 받고 나서, 포졸들에게 일기가 불순한데 자기 때문에 수고한다며 위로했다. 결국 그는 형틀에 실려 달구지 편에 정읍으로 압송되었다.
이튿날 그가 다시 형틀에 실려 전주로 이동하자, 연도에 백성들이 나와 눈물로 배웅했다. 허공에 손을 저으며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그 소리 소리가 결국에 노래가 되었다. 신임 감사 이도재는 김개남이 잡혀 오자,
“반란의 거괴巨魁로다. 능지처참 해야겠다.”
“반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 봄에는 폐정 개혁을 위해 항쟁했고 가을에는 왜적에 항전했다.”
“누가 시켜서 그랬느냐, 아니면 스스로 저질렀느냐?”
“지난 8월 대원군이 보내온 국왕의 밀지를 받고 애국충정에 거병해서 왜적과 싸웠다.”
“지껄이면 다 말이 되는 줄 아느냐? 살려두면 조가朝家를 크게 해할 놈이 로구나.“
얼마 전에 새로 부임해 오던 남원부사가 김개남이 보낸 자객에 운명했 는데, 그의 아들이 마침 김개남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이도재 감사에게 김개남의 머리를 베어 아버지 원수를 갚게 해달라고 애원을 했 다. 이도재는 그의 효성을 평가하고 그에게 검을 주어 김개남의 목을 치게 했다.
그 수급은 소금 궤에 넣어 서울로 실려 보냈다.
*
비바람이 몰아치던 30일 그 그믐밤, 심영군이 김개남을 잡으러 정읍으 로 향할 무렵, 천원점川原店 가까이 있던 이규태에게 전봉준이 멀리 보일 듯한 입암산에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비바람이 세찬데 횃불을 밝힐 수가 있겠느냐?”
“날이 밝는 대로 출동하도록 하겠습니다.”
12월 1일 새벽 눈보라를 무릅쓰고 선봉장 포도대가 입암산성에 다녀와 서,
“전봉준이 누구와 입암산성에서 묵었는데, 아침밥을 일찍 먹고 어디론 지 사라졌답니다.”
‘허-, 오늘 우리는 노령을 넘어 장성으로 가야 하는데….“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잘못 되면 큰 탈이다. 극비에 붙이도록 해라.”
모리오(森尾)가 다시금 풍설이 세차니 좀 더 기다리자는 쪽지를 보내왔 다.
사실은 그가 전봉준이 누구와 30리 밖 백양사에 나타났다는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었다. 그는 급히 포도대를 보냈다. 그러나 오후가 되어 양진兩陣이 노령으로 가는데 그들이 돌아와서 모리 오(森尾)에게
“전봉준이 누구와 백양사에서 점심을 먹고 담양 쪽으로 갔답니다.”
“극비다. 선봉 측에 알리지 마라.”
눈보라 속에 통위영과 서로군이 노령을 넘어 날이 어두워질 무렵 장성 에 도착했다. 모리오(森尾)는 무엇이 그리 급한지 어둠 속에 서로군을 이끌 고 담양으로 가겠다고 야단이었다. 담양에 간들 한밤에 전봉준 행방을 어 떻게 찾겠는가…. 모리오는 이튿날 날이 개자 우선 미나미(南)가 간다고 한 남원으로 파발 을 띄웠다.
당시 오수에 있던 미나미(南)는 이튿날 남원에 가서 그 파발을 접했다.
전주에서 김개남을 죽일 것 같아서, 급히 파발을 띄웠지만, 그의 머리는 이미 서울로 가고 있었다.
전봉준은 그날 오후 동지와 백양사를 떠나 노령을 넘어 순창 쪽으로 갔 다. 흥복산興福山 기슭에 있는 피노리避老里로 옛 고향 부하 김경천金敬天을 찾아갔다.
김경천은 반기는 척하며 인근 주막으로 전봉준 일행을 초대해 저녁 식사를 주문했다.
김경천은 뒷간에 다녀온다고 잠깐 밖으로 나가 하인을 시켜 이웃 마을 한퇴교에게 전봉준이 온 것을 알렸다.
한퇴교는 현상금과 관직를 탐내고 여러 장정을 무장시켜 주막을 포위했다.
전봉준은 낌새를 채고 뒷담을 넘 었으나, 어둠 속에 누군가 내려친 총대에 다리가 부러졌다. 전봉준이 지난 가을 논산에서 공주로 출진할 적에, 이종만이 비결서로 점괘를 보았는데,
<경천敬天을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경천敬天에 가면 늘 하늘에 경배했건만, 알고 보니 저승사자가 김경천金 敬天이로구나.’
‘그런 걸 왜 몰랐던가.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결국에 죽을 곳을 찾아들 다니….’
*
이튿날 그들은 30리 밖 순창 관아에 연락해 포도대가 출동했다. 전봉준 을 포박해서 형틀에 넣어 달구지에 싣고 갔다. 그들은 다시 담양 서로군에 연락해서, 아카마츠(赤松) 소위가 지대를 이끌고 와서 그의 신병을 인도받 았다. 아카마츠는 즉시 남원으로 파발을 띄워 미나미(南) 소좌에게 그 사실 을 알렸다.
미나미(南)는 4일 저녁 6(酉)시 남원에서 그 파발을 접하고, 새벽 3시에 길을 나서 5일 오전 순창에 당도했다. 그는 형틀에 묶여 있는 전봉준을 확인하고,
“김개남이 그러는데 대원군이 보내온 국왕의 밀지를 받고 거병했다면 서….”
“아니다. 내가 스스로 했다.”
미나미는 순창에서 6일 새해를 맞고 이튿날 전봉준을 담양으로 압송했 다.
선봉장 이규태는 그런 걸 모르고 있다가, 미나미(南)가 상부에 보낸 급 보를 전해 듣고 비로소 알게 되었다. 미나미(南)가 그 급보와 함께 이노우에(井上) 공사에게 보낸 비밀 편지에
“각하, 선봉장 이규태는 동비입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야전에서 싸워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자를 야전에 두고 있을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그간 따돌려 장성에 있던 이규태도 참다못해 도순무사都巡撫使 신정희에 게 편지를 썼다.
“각하, 거괴 둘이 다 잡혔고, 일본군이 관군과 활동해서 동학란은 이제 거의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저는 예하 병사들과 이곳 장성에서 잘 있는데, 이제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만 서울로 올라가서 가까이서 모시고 싶 습니다. 윤허해 주십소서.”
며칠 후 이규태가 예기치 않게 미나미(南) 앞에 나타났다.
“상부 명령으로 통위영 군을 이끌고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갈 길을 좀 지휘해 주시지요.”
“지휘요? 지휘라니요. 귀국 정부에서 하는 일인데 내가 무슨 지휘를 해 요?”
“그렇소. 피차간에 만국공법을 잘 지키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간 선봉장께 함부로 말한 것을 사죄합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