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끓여 먹으러 오세요!”
방구석 캠핑장 초대장은 ‘라면 끓여 먹으러 오라’였다. 순한 맛 라면 반 개, 수프 조금, 달걀 하나.
방구석 캠핑장, 민서 캠핑장, 가족 캠핑장. 이름도 다양하게 불렀다. 넓은 거실 전체를 캠핑 장으로 만들었다.
올봄에 새로 이사 온 집은 주위에 나무들이 많았다. 소나무, 키 큰 잣나무, 단풍나무 등이 삐죽삐죽 커서 서로 그 손을 내밀었다. 창문을 열면 숲속에 있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밤에 달이 높은 아파트 사이로 보일 때는 깊은 산속에 들어앉은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다.
늦은 밤 모두 잠들었을 때, 캠핑용 식탁에서 캠핑용 의자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면 앞에 보이는 아파트의 가장 높은 층이 도깨비 집 같아 보였다. 밑에 층들은 불이 꺼져서 보이지 않았다. 달은 도깨비 집보다 아래에 둥둥 떠다녔다. 거실을 꾸미지 않았으면 창가에 앉지도 않았을 거고 이런 이상한 광경을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한쪽 구석에 서 있는 에어컨에 반짝이 알전구를 길게 늘어뜨렸다. 그 옆에는 원래부터 있었던 턴테이블이 무심히 앉았고. 창에 붙여 놓은 ‘민서 캠핑 장’이 중요하다. 학원을 세 개 돌고 저녁 먹으러 올 때가 되면 알전구가 반짝이며 캠핑장 문을 열었다.
남편은 청바지에 붉은색 면티를 입고 분주하게 왔다 갔다 했다. 민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서 학원 가방을 거실 바닥에 툭 던지니 얼른 주워서 걸고 외투도 받았다. 얼굴에는 웃음기가 한가득 이고 민서에게 무엇인가를 자꾸 물었다.
전화기를 두 개 놓고 게임을 시작했다. 할아버지 전화기로는 게임을 하고 민서 전화기로는 친구들하고 게임 진행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할아버지는 옆에서 민서에게 줄 가래떡을 굽고, 그 모습은 캠핑 장에 딱 어울렸다.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가 띵했다. 꿈을 꾼 듯 하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간신히 잠에서 깨어나 주위를 살펴보니 태어나서 사십 년 넘게 살았던 산골이 아니었다. ‘여기가 어디지?’ 정신을 차리고 나니 가슴이 둥둥거리고 눈물이 나왔다. 남편은 예나 지금이나 가만 바라만 보았다.
“그만하고 싶어요!”
남편은 한참을 더 바라보았다.
“그래 그렇게 해”
나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우리 집 앞에 사는 딸 집으로 갔다. 전화를 걸어서 집 밖으로 좀 나오라고 했다.
“엄마에게 휴가를 좀 주라!”
경주에 있는 정 선생 집에 가서 한 달을 살다 오고 싶다고 나직이 말했다. 정선생은 남편의 친구다. 사모님이 하늘나라로 가고 혼자 외롭게 지냈다.
카드를 돌려주었다. 십 년 넘게 가지고 있던 딸 카드다. 그것으로 아가들 반찬거리를 샀다. 딸은 언제 가냐고 하면서 카드를 받았다.
‘끝이다’ 이렇게 하면 되는 것을. 그동안 몇 번 말을 했었다. ‘이제 너희들끼리 살아보라고’ 딸은 저희를 돌봐주는 엄마가 사라지는 불안감에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서울 올라오던 해에 태어난 첫째 손녀가 벌써 중학생이 되었다. 둘째 민서는 초등 삼학년이다. 남편은 불안한 얼굴로 내 표정만 살피고 말이 없었다.
옷가지를 조금 싸서 집을 나섰다. 경주까지는 너무 멀어서 가지 않고 소백산 자락에 있는 이선생 집에 가서 하루 묵었다. 별도 보고 마당에 꽃들도 보고 하니 마음이 좀 가라앉는 것 같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다시 어디로 갈지 집에 가서 생각해 보자고.
무슨 죄짓고 도망갔다 온 것 같다. 민서가 친구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 불빛 보고 “할머니!”하고 찾아 들어 올까 봐 커튼을 꼼꼼히 쳤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여행 갔다고 당분간 할머니 집에 가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튿날부터 여행사도 찾아가 보고 인터넷으로 여기저기 뒤적였다. 여기도 마음에 안 들고, 저기도 재미없고 우리는 마냥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십 오 년 만의 휴가라고 하면서 홀가분하게 좀 다녀오자고 하지만 말 뿐이었다. 어쩌면 이제부터는 계속 휴가가 될지도 모르긴 하지만.
일주일 동안 서울 시내 맛집만 찾아다녔다. 밤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서 불도 잘 켜지도 못했다. 며칠 동안 그는 없는 말이 더 없어졌다. 우리는 싸운 사람 같이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말 없는 그와 사느라고 눈치가 생겼다.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표정만으로 느낄 수 있었다. ‘우리가 민서를 돌봐주는 일 외에는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은 일주일을 간신히 버텼다. 손주들은 언젠가는 우리 곁을 떠날 건데.
다시 돌아오는 민서를 위해 거실을 캠핑 장으로 꾸며 달라고 했다. 움직이는 자연 속이 아니라 아주 새롭지는 않겠지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민서가 보고 싶어졌다. 할머니는.
태어난 곳, 산골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방구석에 캠핑 장을 만들었다. 캠핑에 필요한 온갖 도구를 다 들여다 놓았다. 내가 하고 싶다고 하면 할머니가 정신 줄 잡으라고 할 것 같아서 놀이터에서 친구들하고 멀쩡히 잘 놀고 있는 손녀를 들쳤다.
이쪽 부엌에서 맞은편 창가를 바라보았다. 그의 편안한 모습이 보였다. 그래 방구석이면 어떠냐 나는 민서 캠핑 장에서 ‘장 박’을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