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강해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에베소서 5:5-14
우리는 지난 두 주일 아침에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영혼이 극단적인 변화를 받은 새사람의 삶의 방식 여섯 가지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새사람은 거짓을 말하지 말고 돌이켜 참된 것을 말해야 하고,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수고하며 주는 자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선한 말을 하여야 하고, 모든 악독과 분노와 비방과 악을 버리고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행하여야 하고, 음행과 관련된 말을 하지 말고 감사하는 말을 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서 중생하게 하시는 은혜를 따라서 죄와 허물로 죽었던 옛사람이 새사람이 되었으므로 더럽고 몸에 맞지 않은 옛사람의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하고 몸에 적합한 새사람의 옷을 입어야 하듯이 새사람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는 앞에서 말한 것과 다소 중복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사람의 삶, 즉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강력한 이유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심판을 받아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5-7절에서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에베소서 5:3-4에서 성적인 방탕함은 새사람의 새로운 삶의 방식이 아니라 옛사람의 삶의 방식이므로 합당한 삶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7절에서는 ‘음행하는 사람’과 ‘더러운 사람’과 ‘탐욕으로 가득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로운 나라이므로 음행과 더러움과 탐욕으로 가득한 불의한 자들은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말하는 “음행하는 자”는 성적으로 타락한 자로서 반복적으로 성적인 죄를 범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주의해서 성적으로 타락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반복적으로 죄를 짓지 않습니다. 이것이 옛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주의해서 혹 의도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내주해 계시는 성령님께서 음행에 대해서 탄식하시고 근심하시며 깨닫게 하심으로 자신의 행위가 죄인 줄 알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옛사람에 속한 사람들은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고 반복적이고 상습적으로 죄를 범하는 태도를 보이며 살아가며 더 강력하고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따라서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더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절에서 말하는 “더러운 자”는 윤리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특별히 성적으로 추한 행위를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서 아무런 부끄러움이나 뉘우침도 없이 더러운 일들에 자신을 내맡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 역시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더러운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5절에서 특별히 “탐하는 자”를 우상 숭배자라고 했습니다(골 3:5). 탐욕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말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탐욕은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 끊임없이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자는 욕심을 이루기까지 멈추지 않습니다. 아니 탐욕이라는 죄의 성격상 중단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탐하는 것을 얻기까지 멈추지 않기 때문에 탐하는 그것을 전부로 알고 살아갑니다. 즉 탐하는 것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돈과 명예를 탐하는 사람에게는 돈과 명예가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탐심은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탐심은 필요 이상으로 무언가를 가지려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탐심에 빠지지 않으려고 하면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가르치기 위하여 마태복음 6:25-27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32-34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절제할 수 없는 탐욕은 우상 숭배로 이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결국 음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멸시하는 자이며,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멸시하는 자이며,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사람입니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으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제외되는 것은 정해진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6절에서 에베소교회에 침투해 들어온 거짓 선생들에게 경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하나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거짓 진리를 가르치는 자들을 경계하고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속아 죄악에 빠지지 말고 진리에 굳게 서 있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헛된 말”(kenoi'" lovgoi")은 ‘진실이 없는 말’, ‘실제와 다르게 과장된 말’, ‘정죄 받을 만한 죄를 부정하거나 가볍게 만드는 말’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쓸데없는 말’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이 말은 ‘영적으로 부유함이 없는 말로서 저속하고 어리석고 추잡한 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가면 음행과 더러운 말과 탐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흔한 일이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가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죄를 용인하는 삶이 지속된다면, 그다음에는 거짓의 아비로서 속임수의 명수인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져 죄를 짓고도 회개함이 없이 오히려 괜찮다고 하면서 자신을 위로하게 되고 더 나아가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 데까지 이르게 되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최근에 국내 “온라인동영상서비스”를 OTT라고 하는데, 이 온라인동영상서비스에서 퀴어 콘텐츠가 드라마와 영화를 넘어서 리얼리티 쇼까지 등장하고 있습니다. 지상파 3사(KBS, MBC, SBS)와 SK텔레콤이 합작해 만든 OTT 웨이브(wavve)가 7월부터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예능프로그램을 방영하였습니다. 7월 8일과 15일, 일주일 간격으로 방송한 ‘메리 퀴어’와 ‘남의 연애’를 방영하였습니다.
‘메리 퀴어’는 게이와 레즈비언 그리고 트랜스젠더 커플의 로맨스를 담은 연애 프로그램으로 이들의 일상을 관찰하는 방식이고, ‘남의 연애’는 최근 방송가에서 인기몰이 중인 연애 프로그램의 형식을 따라서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 남자 8명이 합숙하면서 데이트를 하고 짝을 찾는 내용입니다. 과거에는 동성애가 영화나 드라마와 웹툰과 웹소설 등에서 주제나 소재로 작가의 허구를 이야기한 적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실재하는 인물들을 등장시킴으로써 reality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것들로 동성애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시청 가능한 나이도 15세에서 12세로 낮춰놓아서 어린 청소년들이 현실을 곡해하고 모방 충동에 빠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것을 염려하는 단계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그것은 안 된다. 그것은 위험하다. 그것은 비성경적이다’라고 하면서 염려하며 살고 있지만, 우리와 우리의 어린 자녀들이 이런 내용의 방송을 계속 접하게 된다면 동성애를 죄를 여기지 않고 아주 자연스러운 사회적 혹은 개인의 취향 정도로 받아들이고, 우리 자녀들이 동생애에 빠지게 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동성애를 성 소수자라고 가르치고 있고 개인의 취향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학교 교육은 동성애가 성 소수자가 아니며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거부하도록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도전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위험 가운데 노출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심각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지않아 여자를 사위로 맞이할 수 있고, 남자를 며느리로 맞이할 수도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증오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전도의 대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병적(病的)인 것으로 생각하고 접근하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전하여서 그들의 정신이 성경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거짓의 아비로서 속임수의 명수인 사탄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는 방법에 대해서 오늘 본문 7절에서 “그러므로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지 않아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니까 그들과 거리를 두고 접촉도 하지 않고 상종도 하지 말라는 의미로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여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일은 불가능하게 되고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 구원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이 말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 사람들, 즉 옛사람의 성품을 마음에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생각이 말로서 나타나기 때문에 옛사람들과 같은 더럽고 추잡한 말을 하지 않아야 하고, 그들의 악한 행위를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우리는 될 수 있으면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머무는 것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함께 있는 사람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음행하고, 더러운 말을 상습적으로 하고, 탐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친구로 삼고 대화하며 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음행과 더러운 말과 탐욕에 대해 경계심이 풀어지게 되고, 나중에는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앞에서 예를 들어 말한 방송들을 계속해서 접하게 되면 동성애가 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개인의 취향이나 사회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죄로 여기지 않게 되면 그다음에는 우리도 자연스럽게 음행과 더러운 말과 탐욕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처음 인류인 하와가 사탄의 시험에 빠져 죄를 지을 때의 상황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사탄이 처음부터 아주 강렬하게 음행과 더러운 말과 탐욕을 행하도록 유혹했다면 넘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그들과 함께 하는 자가 되지 말라”라는 말 가운데 “함께 하는 자”(summevtocoi)는 ‘공동 참가자’로서 ‘어떤 일을 협동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새사람은 불의를 행하는 자들이 행하는 불의한 일에 마음과 힘을 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오늘 본문 8절에서 그리스도인이 부도덕한 사람들의 악한 행위에 가담하지 않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절에서 우리가 ‘어둠 안에 있었다거나 빛 안에 있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과거에는 “어둠이더니”라고 말하고 이제는 “빛이라”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과거에는 어둠 그 자체였지만, 이제는 빛 자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어둠과 빛을 대조하여 말할 때 물리적인 빛과 어둠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성경은 상징적으로 “어둠”을 ‘무지’와 ‘악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리고 “빛”은 ‘의로움’과 ‘진실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를 빛이고, 빛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받은 우리의 신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께서 중생하게 하심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어둠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이후에는 빛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빛이 되었으니까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빛이 되었습니까? 먼저 성경은 하나님은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1:5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그리고 그의 아들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5입니다.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사도 요한은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빛이시고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빛이십니다.
성경은 우리가 빛이 되고 빛의 자녀가 되는 것에 관하여 요한복음 12:36에서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생명으로서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이 사실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8절에서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사도 바울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사도 바울이 지금 자기 말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빛이신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임을 당하면 빛의 자녀가 됩니다. 이렇게 해서 빛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빛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인 영원한 생명,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이 있게 되고,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음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둠은 사탄에게 연결되어 있고, 빛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어둠의 일은 사탄의 일이고 빛의 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구원과 소명에 대해서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하면서 사도행전 26:17-18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이 말씀에 의하면 ‘어둠’은 ‘사탄의 권세’와 한 짝을 이루고 있고, ‘빛’은 ‘하나님’과 한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둠’은 ‘무지와 악함’이고, ‘빛’은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어둠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빛은 그와 반대로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어둠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빛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고 빛이 되었음에도 어둠의 자녀로 살던 삶에 익숙해 있습니다. 여전히 익숙했던 과거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따라서 살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사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우리를 결박했던 악함과 불의와 거짓에 익숙해져 있고, 길들어져 있고, 그 결박을 끊지 못하는 연약함 가운데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빛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빛이 된 우리가 여전히 어둠의 일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빛의 신분에 맞지 않은 행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현재의 신분에 맞게 행동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빛이 된 우리를 향하여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 빛의 자녀들처럼 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어둠이 사탄과 무지와 악이라고 했고, 빛이 하나님과 의와 진실함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빛으로 행하는 것은 사탄을 떠나고 무지에서 벗어나고 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점에 대해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9절에서 빛을 따라 살아가면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마태복음 5:16에서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세상의 빛으로 오셔서 빛으로서 충실한 삶을 사셨듯이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의 빛으로서 어둠의 세상에서 주님을 따라서 빛으로서 충성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나타내 보임으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어둠의 사람들이 빛이신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존재의 의미이며 삶의 의미입니다.
빛이신 여러분들은 빛의 열매인 착함과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시고 선을 베풀며 살아야 합니다. 악하게 살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고 진실하게 대하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자녀들은 특별히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에 힘쓰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처럼 빛의 자녀들은 교회 안에서나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대하여야 하고 선을 베푸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선하고 의로우시고 신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선하고 의롭고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빛의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주를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를 시험하여 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해 보라”(dokimavzonte")는 말은 금속의 질을 판명할 때 쓰이는 단어로써 실험을 통해서 무엇을 ‘시험하다’, ‘입증하다’, ‘규명하다’, ‘정밀하게 조사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빛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정말로 빛으로서, 빛의 자녀로서 잘살고 있는가를 늘 살펴서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일에 힘쓰라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신앙 생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충대충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나 하고자 하는 일을 정밀하게 살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가를 생각해 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그때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서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롬 12:2).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히 11:6).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사는 것입니다. 자기를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자기를 성령님께 드려서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도구로써 사용하도록 우리 자신을 성령님께 온전 내어드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롬 6:13).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라고 합니다. 빛의 자녀들은 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9절). 그리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어둠에 참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내 삶의 모든 것은 바로 여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빛으로서 빛의 열매를 맺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한 삶을 사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빛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일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면 멈추고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 빛의 열매를 맺도록 하여야 합니다. 어둠에 속한 사람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12절).
그런데 사실 이런 자세는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더 적극적으로 열매 없는 어둠의 일을 책망하여야 합니다. 여기 “책망하라”라고 할 때 “책망”(ejlevgcw)은 ‘반박하다’, ‘드러내다’, ‘잘못을 찾아내다’, ‘폭로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어둠의 일이 무엇인가를 분별하여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둠의 일을 멈추고 빛의 일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열매가 없이 어둠의 일들을 행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 책망과 관련해서 몇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가정에서 빛의 열매가 없음을 책망해야 합니다. 부모들은 어둠의 일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어둠의 일을 분별해서 어둠의 일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빛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때 어둠의 일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빛의 열매가 없이 어둠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들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우리 교회에서 빛의 열매가 없음을 책망해야 합니다. 함께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빛의 자녀들이 여전히 어둠의 삶을 살고 있다면, 적극적으로 권면하여 어둠의 자리에서 빠져나와 빛의 자녀로서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서 빛의 자녀로서의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아 알고 그렇게 살면서 더 적극적으로 어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그런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은 여전히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형제자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함께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교회의 지체로서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입니다(고전 13:6). 그래서 한 몸을 이룬 교회가 정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함께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고 있는 교회의 지체들 가운데 어둠의 일을 행하는 지체가 있다면 침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책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책망하기 전에 먼저는 그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잠언 6:23의 말씀, 즉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라고 하신 말씀을 힘입어서 잘못에 대해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권면하시기를 바랍니다. 비겁하게 침묵으로 방조하거나 동조하거나 승인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의 부끄러운 죄악에 물들어서도 안 되고 침묵으로 방조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교회는 죄악에 빠져서 사는 지체들에게 말씀에 근거하여 신실하게 권징을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비방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비방하지 않고 권면할 수 있으려면 먼저는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조금 힘이 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 어둠의 일인 악을 책망해야 할 당위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빛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면 어둠의 일인 악이 드러나게 될 때 그것이 바로 어둠에 속한 악을 책망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은 빛의 자녀들이 어둠의 일을 책망해야 이유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때문입니다. 하나는 어둠의 일은 반드시 빛을 통하여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있으면 볼 수가 없으니까 주변에 무엇이 있고 또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빛이 비추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어둠의 일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어둠에 갇혀 있는 사람이 자신이 어둠에 갇혀 사는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빛의 사람들은 그렇게 빛을 비추며 살아서 어둠의 실체에 대해 폭로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둠의 일이 드러나 보이게 되고, 그 드러난 어둠의 일이 빛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죄악도 치료가 될 수 있으므로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둠을 폭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책망을 받으면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워서 죄의 뒤에 숨겨나 아니면 공격적으로 변합니다. 하지만 사실은 어둠 가운데 살면서 어둠의 일을 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어둠의 일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비로소 알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책망은 그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죄악을 회개하고 깨닫게 된 빛의 일을 따라서 살아가게 하는 유익이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행하는 권징을 잘 받으면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이 됩니다. 어둠으로 갇혀버린 영이 어둠에서 벗어나 다시 성령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되는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욥기 5:17-18입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징계를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의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러분, 이런 사실을 다른 데에서 그 증거를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여기 이 자리에서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주일 아침에 영광스러운 자리에 나와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을 보면 분명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어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심으로 빛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교회의 권징이라는 책망도 마찬가지입니다.
셋째는 우리 설교가 바로 빛의 열매가 없음을 책망하는 도구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설교 본문 11절에서 “책망하라”라고 할 때 혹은 “책망하다”라고 할 때 교회의 설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책망한다는 것은 빛이 무엇인가를 드러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물러나고 어둠으로 덮어져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사실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복음 설교를 통하여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드러내 주면, 사람들은 그 말씀의 빛 앞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빛의 열매가 없음에 관한 일종의 책망입니다.
그리고 우리 개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므로 빛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도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지체들을 책망하는 것이 됩니다. 좀 더 강력하게 말한다면 교회가 복음 설교를 통하여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드러내 주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살므로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드러내 주면, 그것이 어둠의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의 죄악을 폭로하는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설교는 여러분이 지금 죄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폭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귀에 듣기에 좋은 소리만 하는 것이 설교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그 어둠, 그 죄악을 폭로하는 것이 설교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둠에 갇혀 있음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빛의 세계로 나가 빛의 열매를 맺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빛은 또 다른 사람을 빛으로 만드는 것입니다”(Foulkes).
그리스도의 빛이 여러분에게 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여러분의 말과 여러분의 행위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측면이 그 빛에 의해 노출되고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빛을 사랑하든지 아니면 미워하든지 해야 합니다. 빛에 거하여 빛의 열매를 맺고 살아갈 때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자연스럽게 이렇게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이 빛의 생활이 아니고 마치 죽은 자와 같이 살아가고 있다면, 즉 영적으로 잠을 자는 것과 같은 상태에 있다면 깨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마치 죽은 자와 같이 영적으로 죽어 있다면 이제 일어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고 마치 죽은 자와 같은 상태에 있다면 깨어나시고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의 일을 중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빛의 자녀로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자녀로서 빛의 열매를 맺으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열매인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사신다면 사나 죽으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자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빛을 비춰주셔서 여러분의 삶을 안정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봄의 따스한 빛이 겨우내 동안 얼었던 생명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주셔서 아름다운 꽃이 피게 하여 주듯이 우리 주님이 우리를 따스한 손으로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행복이고 복입니다. 아멘.
(2022. 8. 7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