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0.22(토) 날씨 : 비 기온 : 섭씨 15~18도 산행거리 : 14.2km 산행시간 : 6시간 동행 : 21명 | |||
구덕령 |
09 : 55 |
아미산 |
14 : 10 |
구덕산(565m) |
10 : 38 |
봉수대 |
14 : 23 |
괴정시장 |
11 : 50 |
몰운대 전망대 |
15 : 03 |
괴정고개 |
12 : 50 |
다대포 |
15 : 25 |
장림고개 |
13 : 23 |
몰운대 |
15 : 50 |
서림사 입구 |
13 : 52 |
주차장 |
16 : 10 |
바위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哀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이 깎이는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라.
- 유치환 -
<구덕령에서 마지막 구간을 출발하는 귀연산꾼들>
<구덕산을 오르는 우중산행>
<구덕산에 오르는 낙동의 마지막 행보>
긴 대장정을 끝내는 날 하늘은 무심하게도 가을비를 내린다.
처음 낙동정맥을 시작할 때 내렸던 비는 중간의 폭우를 낳더니 결국 끝내기 우중 산행을 순산했다.
긴 노정이어서일까!
구덕령에서 시작하는 낙동의 마지막 종주는 단출하다는 표현을 떠나 산꾼의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현수막을 잡고 비바람을 맞으며 인증샷을 찍는다.
우중 산행이어서 극적인 감흥도 설레임도 많이 가셨다.
우산을 쓰고 종주를 한다?
실제 가능하다는 결론을 창출한다.
잔뜩 가리워진 구름과 운무는 전혀 시야를 확보할 수 없다.
산허리를 돌아 우린 항공무선 표지소가 위치한 구덕산에 올랐다.
해발 565m의 구덕산은 바닷가여서 상당히 높은 편이다.
하지만 주변의 조망은 전혀 볼 수 없다.
긴 행보를 마치는 부산의 마지막 장정은 이렇게 빗속에서 걷는 답답함의 연속이었다.
기상레이더관측소를 지나 능선을 따라 산자락을 넘으니 부산 동주대학교가 나온다.
어디가 대티고개인지 예측을 못한다. 산자락을 찾으니 대티고개는 벌써 지났다.
<구덕산 정상>
<비내리는 구덕산에서 대티고개를 바라보며>
<대티고개에서 괴정고개로 이어진 낙동>
<다대포로 향하는 부산 시내 낙동길>
동주대학교를 내려와 시내를 살피니 건너에 세봉우리가 지나는 능선을 발견한다.
능선은 결국 괴정고개로 이어지는데 우린 괴정시장에 들러 이른 점심을 든다.
너무도 맛있는 순대국밥집이어서 우린 횡재했다.
왕순대가 든 국밥은 우중 산행으로 지친 일행의 입맛을 최고조로 고조시켰다.
시내를 가로질러 괴정(감천)고개에서 낙동의 진로를 확인하고 대동중고교로 빠져 나와 장림고개로 향했다.
길을 따라 지나는데 비바람은 더둑 거세다.
S오일 주유소를 지나 다대포로 무작정 길을 찾아 나서며 왼편으로 줄지어선 봉화산을 확인한다.
다대포로 넘어가는 언덕에서 서림사를 용케도 찾았다.
고개를 넘어 아파트 뒷길을 따라 낙동정맥 줄기를 확인한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낙동길>
<능선을 내려와 다시 도심으로>
<장림고개를 넘어 다대포로 향하고>
<낙동의 끝자락을 찾아>
<아미산 서림사 입구>
산자락을 따라 아미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가파른 마지막 언덕은 낙동의 마지막 용트림을 보여주려는 듯 땀을 요구한다.
모두들 목적지가 멀지않다는 기대로 봉우리에 오르지만 약간의 바다를 보여주곤 시야가 없다.
표지석도 없는 아미산을 지나 능선을 따르니 하얀 등대 모양의 물체가 보인다.
약간의 시야가 살아나서 낙동강 모래톱도 보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당도한 봉수대는 일행들을 환호하게 한다.
<봉수대에서 낙동의 졸업을 축하하며>
<다대포>
<응봉 봉수대>
응봉 봉수대(鷹峰 烽燧臺)는 낙동강 하구 일대와 몰운대 앞바다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맑은 날에는 거제도 연안과 대마도까지 감시할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응봉 봉수대는 전국 5개 봉수대 중에서 직종 제2로 기점으로 한낮에 올린 봉수는 해지기 전에 최종 집결지인 서울 남산 봉수대에 도착하는 게 원칙이었다고 한다.
봉수대는 나라에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거나 외적의 침입이나 변란이 일어났을 때 그 사실을 낮에는 연기, 밤에는 횃불로 신호하여 중앙으로 알리는 옛 통신시설의 하나였다.
우리나라에는 전국에 총 673개의 봉수대가 있었다.
참고로 봉수대의 전달 경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제1로 : 경흥-회령-북청-함흥-평강-철원-포천-양주-남산
제2로 : 다대포-양산-경주-영천-안동-단양-충부-광주-남산
제3로 : 강계-초산-의부-선천-평양-개성-고양-안산-남산
제4로 : 의주-철산-정주-평양-옹진-해주-개성-안산-남산
제5로 : 순천-고흥-강진-해남-목포-영광-천안-김포-남산
<다대포항>
<낙동강 하구 모래톱>
봉수대를 내려오니 몰운대 롯데 캐슬 아파트 지역이다.
지척에 거제도와 가덕도 그리고 낙동강에서 하구 모래톱이 장관이다.
아파트를 가로질러 몰운대 전망대에 도착하니 우리의 대장정의 끝자락인 다대포 모래사장이 코앞이다.
그 옆에 몰운대가 마지막 산자락을 형성하고 바다와 조우한다.
근처의 부산신항, 녹산국가산업단지, 명지오션시티, 을숙도가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새로운 도시를 형성하고 있다.
멀리 태백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유유히 흘러 남해로 빠져 드는 대장관을 보는 것이다.
<몰운대 전망대>
<다대포 해수욕장과 몰운대>
다대포(多大浦)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에 있는 옛 포구.
낙동강하구 최남단에 있는 다대반도와 두송반도로 둘러싸여 있으며, 다시 5개의 작은 만으로 구분된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한적한 어항이었으나, 최근에 조선소와 제재소가 들어서면서 공업지역으로 탈바꿈했다.
반도목재·다대물산 등의 큰 공장이 있으며, 다대아파트단지가 들어서 택지로도 개발되고 있다.
주위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몰운대와 흰 모래사장이 펼쳐진 다대포해수욕장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만포진과 함께 군사상의 요지였으며, 정운장군유적비·윤공단 등 임진왜란 때의 유적이 남아 있다.
다대포는 한국의 문헌보다 일본의 역사책에 더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다대포는 한일통교상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다대포 객사(多大浦客:부산유형문화재 3)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서 마을 수령이 초하루와 보름에 망배를 드린 곳이며, 사신의 숙소로도 이용을 하였다.
다대포 후리소리(부산무형문화재 7)는 어로작업에 곁들인 노래를 중심으로 멸치잡이 후리작업의 순서에 따라 부르는 소리에 작업의 동작을 곁들인 민속이다.
몰운대(沒雲臺:부산기념물 27)는 낙동강 하구의 최남단에 있으며 안개, 구름이 끼는 날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여 몰운대하는데 처음에는 섬이었으나 낙동강에서 내려오는 흙과 모래 등이 쌓이며 육지와 연결되었다.
<몰운대 가는 길>
<몰운대 공원 광장>
낙동강 하구 모래톱과 만나는 다대포는 진정 420km의 산줄기 흐름에 마침표를 찍는 곳인 것이다.
지금도 지형이 변하고 있는 낙동가 하구.
먼 옛날 가야의 수도였던 김해는 두 개의 산줄기인 낙남정맥과 낙동정맥의 용트림이 합쳐져 부강한 나라를 건설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곳이다.
지금의 부산은 이런 역사적, 지리적 여건과 정치적 사건들이 결합하여 탄생한 도시인 것이다.
산을 내려와 바다를 만나는 감흥은 대단하다.
멀고 긴 흐름이 끝나는 종착역!
몰운대의 진한 바다내음이 대종주의 마지막 행보를 축하라도 하듯 가슴속에 짠하게 밀려든다.
몰운대 표지석을 만지며 긴 행로의 대단원을 마침에 감격한다.
황지연못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이곳 다대포 몰운대에서 바다에 빠지던 날!
우린 그렇게 빗속을 뚫고 다다랐다.
전체 종주 거리 420.4km, 걸린 시간 166시간이다.
1시간에 약 2.53km를 걸었으며 총 참여 인원은 497명이었다.
큰 잔에 부어 마시는 완주 원 샷이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다.
고생을 함께 한 귀연식들이 자랑스럽다.
옆에서 큰 도움 주신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1년 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한 귀연산꾼들은 또 하나의 역사를 쓰게 되었다.
우리 산하를 밟는 대장정!
그 큰 노정에 함께해서 기쁘다.
이제 또 다른 산하를 향하여 발걸음을 돌린다.
<몰운대 詩碑>
沒雲臺(몰운대)
浩蕩風濤千萬里(호탕풍도천만리)
白雲天半沒孤台(백운천반몰고대)
扶桑曉日車輪赤(부상효일차륜적)
常見仙人駕鶴來(상견선인가학래)
李春元(선조40년 동래부사) 지음(
번역 : 정경주 글씨 : 김준기)
호탕한 바람과 파도 천리도 만리
하늘가 몰운대는 숲가에 묻혔네
새벽 바다 돋는 해는 붉은 수레 바퀴
언제나 학을 타고 신선이 온다
<몰운대 객사>
정운(鄭運 1543~1592) 장군 순의비각
동쪽으로는 부산의 관문인 오륙도를 내려다 볼 수 있으며, 옛날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만큼 명승지였다.
부산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에 외로운 순의비각殉義碑閣이 있다
정운(鄭運 1543~1592) 장군 순의비각이다.
2004년부터 사하구청은 해군3함대와 공동으로 정운 장군 순절일인 음력 9월 1일 이 비각에서 향사를 지내고 있다.
정운 장군은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각별한 분으로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싸운 초기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다가 부산포해전 중인 1592년 음력 9월1일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하였다. (이 날은 지금 부산시민의 날이다. 그러므로 정운 제독은 부산을 상징하는 첫째 인물이라 할 만 하다)
이순신 장군이 얻은 초전의 승리인 옥포 당포 한산도 해전 등 10여 회 가까운 승첩勝捷은 실로 정운 장군이 있었기에 승리를 얻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운 장군에 대한 기록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런 기록이 있다.
선조 27년인 1594년 8월 영의정 유성룡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정운 장군이 죽은 후로 수군의 사기가 꺾여 한산도나 대아량(사량도 해역)에서 수역을 지나가는 왜선이 있어도, 교활한 적병에게 도리어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 감히 가벼이 나서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라고 보고했다.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엄연히 3도수군 통제사로서 통영에 주재해 있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군사들은 왜수군과 나서기를 꺼렸던 것이다.
돌격장이 될 만한 유능한 장수가 없었기에 지나는 왜선을 보고만 있었다는 것이다.
또 이 상소에는 영의정 유성룡 자신이 추천한 통제사 이순신 장군이 별 성과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뜻이 숨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주요 승전 전첩은 모두 11개로서 그중 7개 전첩이 정운 장군의 생존했을 때에 이룬 것이다.
정운 장군이 주도한 해전으로 1592년의 5월 옥포· 합포· 적진포· 사천해전, 6월의 당포, 당항포, 율포 해전, 7월의 견내량, 안골포 해전, 9월의 부산포 해전이다.
정운이 전사한 뒤에 통제사에 머무는 기간인 4년이나 되는 이순신 장군이 승첩한 해전은 고작 1593년 2월의 웅포해전, 1594년 3월의 2차 당항포 해전정도다.
2차 당항포 해전 이후 5개월여 성과가 없자 1594년 8월에 유성룡이 지지부진한 이순신 통제사를 책망해 선조에게 상소를 올린 것이다.
이 상소에 따른 하명으로 자극받은 이순신 장군은 그 해 9월 29일 거제도 장문포 해전(현재의 거제군 장목면에 있다)을 홍의장군 곽재우, 김덕령 등과 함께 수륙 합동 공격으로 펼치지만 실패한다.
이어 10월의 영등포 해전, 제2차 장문포 해전에서도 성과가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지지부진했다.
이순신 장군이 통제사가 된 것은 1593년 8월인데 1596년 말까지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승첩소식이 없자 4년째인 1597년 2월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교체했다.
정운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
정운 장군은 8척 장신의 거구였다고 전한다.
싸움마다 늘 앞장선 정운 장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첫째 참모이자 선봉으로서 생사를 초월한 용맹을 발휘했다.
조선 현종 때의 대학자인 백호 윤휴는 그의 저서 백호전서 제장전에 정운 장군의 일대기를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정운 장군은 전라도 영암 출신으로 성격이 강개하여, 일찍이 보검을 얻자 보검에 ‘진충보국’이라고 새겼다고 했다.
무과에 급제한 후 제주도 대정현감으로 근무할 때 청렴하기 이를 데 없어, 현감 직을 그만 두고 돌아올 적에 가져 온 것은 오직 해진 이불 한 채뿐이었다.
그가 함경도의 역로를 관리하는 거산도 찰방으로 있을 때, 함경도병마절도사의 하인이 자신의 신분을 뛰어넘는 횡포를 부리자 잡아다가 장(杖)을 치다가 그만 죽이고 말았다.
이후 정운 장군은 동료나 선배장수들로부터 기피대상이 되었고 벼슬자리도 변방을 돌고 도는 형편이 되었다.
그러다가 겨우 녹도만호가 되었는데 이순신이 전라도 수군절도사가 되어 온다고 하자, 정운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제 귀의歸依할 곳을 얻었다. 이순신 장군 같은 이를 위해 죽는다면 다행이다.” 하였다.
자신보다 두 살 연하의 이순신에 대한 존경심이 정운에게 있었다.
신망 받던 인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있었기에 이순신-정운 팀웍은 가동되어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1592년 4월말일 이순신 장군이 주재하던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회의가 열렸다. 좌수영 산하의 장수와 군수, 진장들이 모여 왜적을 칠 대책을 협의했다.
장수들의 중론은
"왜적이 예리하여 싸우기 쉽지 않으니 전라우수사 이억기를 기다려 함께 진격합시다.”
하였다.
이순신 장군도 휘하 장수와 장교들의 뜻을 꺾고 출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자 정운 만호는 궁도를 차고 뜰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본진인 녹도진(鹿島鎭)으로 돌아 갈 것을 이순신 장군에게 요청한다. (당시 정운은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에 있던 녹도만호로 있었다)
이순신 장군이 연유를 물으니 정운은 말하기를,
“영남은 이미 적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호남과 영남이 모두 우리 땅인데 어찌 월나라 사람이 진나라 사람 야윈 것보듯이 할 수 있겠습니까? 울타리 밖에서 적을 방어하기가 낫습니다. 지금 적이 영남에 있을 때 급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들을 공격해야 호남도 지키고 영남도 구합니다. 지금 실기失機한다면 저는 여기 있지 않겠습니다.” 하니,
이순신 장군이, “정만호의 말이 맞다."하고는, 명을 내려 당일로 왜적토벌의 배를 출발시키도록 하였다.
그러자 여러 장수들이 감히 말은 못 하고, 몰래 욕하기를, “왜적보다 두려운 것이 정운의 눈이다.”하였다.
정운 장군의 활약은 익히 알려졌듯 1차 옥포해전의 첫 접전이 그의 돌격에 의해 시작된 것이며 한산도해전의 학익진이 그의 제안이었다.
정운 장군은 8척 장신의 체구답게 무용이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재적인 전략가이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 이순신 장군은 그 자취가 성역화 되고 민족의 성웅으로 모셔지고 있지만 정운 장군은 아는 이도 그리 많지 않다.
얼마 전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장군 때문에 좀 알려졌을 뿐이다.
부산 사하구 다대포 몰운대에서 외로운 제사만이 정운 장군을 기릴 뿐이다.
이순신 장군의 그늘에 묻힌 정운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같은 반열에 모셔져야
할 분이다.
전술한 17세기 유학자 백호 윤휴가 지은 백호전서 제장전에 따르면, 원균이 가장 두려워 한 이가 정운 장군이었다고 했다.
정운 장군의 생존시에는 정운이 두려워 원균이 이순신 장군을 참소하거나 훼방할 수 없었다.
정운 장군이 죽자 원균이 비로소 마음 놓고 이순신 장군에 대해 폄훼의 모략을 꾸미고 욕하기 시작했다고 백호전서는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정운 장군은 이순신 장군의 보호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윤공단(尹公壇: 부산기념물 9)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다대첨사 윤흥신(尹興信)공과 군고나민을 모기시 위하여 쌓은 제단이며 정운공 순의비(鄭運公殉義碑:부산기념물 20)는 임진왜란 때 순절한 정운공(鄭運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몰운대 절경>
몰운대
부산광역시기념물 제27호. 낙동강 하구와 바다가 맞닿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부산시의 중심가에서 서남쪽으로 약 16㎞ 떨어진 다대포와 인접하고 있으며 그 넓이는 14만평에 이른다.
이 일대는 지형상의 여건으로 인하여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모든 것이 시야에서 가리워지기 때문에 ‘몰운대’라는 명칭이 붙여졌다고 한다.
다대포와 몰운대는 조선시대 국방의 요충지로서 임진왜란 때는 격전이 벌어졌으며, 이순신(李舜臣)의 선봉장이었던 정운(鄭運)도 이 앞바다에서 500여척의 왜선을 맞아 힘껏 싸우다가 순국하였다.
그는 이곳의 지명을 몰운대라 한다는 말을 듣고 ‘운(雲)’자와 자기 이름의 ‘운(運)’자가 같은 음이라는 점에서, “내가 이 대에서 죽을 것이다(我沒此臺).”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래서 이곳에는 정운을 위한 사당이 세워졌다고 하며 지금은 그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유적비가 서 있다. 이곳은 16세기까지는 몰운도(沒雲島)라는 섬이었으나, 그 뒤 낙동강의 물에 밀려 내려오는 토사의 퇴적으로 인하여 다대포와 연결되어 육지가 되었다고 한다.
<다대포 일몰>
<낙동정맥 졸업식>
<낙동정맥 피날래>
부산
남쪽은 바다에 면하고, 서쪽은 김해시 장유면과 창원시 진해구, 북쪽은 양산시 물금읍과 김해시 대동면, 동쪽은 울산광역시 서생면·온양읍에 접한다. 한국 제2의 도시이자, 제1의 무역항이다. 한반도 남동단의 관문으로 서울특별시에서 남동쪽으로 약 450km, 대한해협을 끼고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와 약 250km 떨어져 있다.
2004년 현재 1군 15구로 이루어져 있으며, 시청 소재지는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5동 1000번지이다.
1876년 일본에 의해 개항장(開港場)이 된 뒤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여 경인공업지대와 더불어 2대 공업지대의 하나인 남동임해공업지대의 중심도시가 되어 서울권에 버금가는 부산권을 형성하였다. 직접적인 영향권은 경상남도 일원으로 볼 수 있으나, 교통망의 발달로 간접적인 영향이 전국적인 범위에 미치고 있어 서울특별시·대구광역시·울산광역시·창원시·진주시·사천시·통영시 등의 도시가 산업·문화면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포항시·경주시·제주도·진해시·여수시 등도 영향이 미치는 도시들이다.
한국 제일의 우수한 무역항으로, 천연조건 및 국내 경제의 급속한 발전에 힘입어 국제적으로도 태평양 연안의 유수한 항구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 시모노세키와는 페리로, 그밖에 도쿄[東京]·오사카[大阪] 등지와는 항공로로 연결되는 국제도시이다.
시를 상징하는 꽃은 동백꽃이고, 나무는 동백나무, 새는 갈매기이다.
[출처] 부산광역시 [釜山廣域市, Busan ] | 네이버 백과사전
부산(釜山)은 대한민국 제 2의 도시로, 삼한 시대 변한의 거칠산국의 작은 지역으로부터 시작하여, 조선 시대는 부산진으로 발전하였고, 조선 통신사의 출항지가 되었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조일강화조약으로 인한 삼포 개항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1963년 《부산직할시》로 승격이 되었으며, 1995년 《부산광역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부산이란 지명은?
1402년(태종 2) 1월 28일『태종실록』에 富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이며,『경상도지리지(1425)』『세종실록지리지(1454)』『경상도속찬지리지(1469)』등에 "동래부산포(東萊富山浦)"라 하였고, 1471년 편찬된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동래지부산포(東萊之富山浦)"라 하고, 같은 책「삼포왜관도(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부자 富''를 사용하였다.
1470년(성종 1년) 12월 15일자의『성종실록』에 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데, 1474년 4월 남제(南悌)가 그린「부산포지도」에는 여전히 富山이라 쓰고 있어 이시기는 富山과 釜山을 혼용하여 쓰여졌다. 그러나 이후의 기록은 부산포(釜山浦)로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산의 지명변천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동국여지승람(1481)』이 완성된 15세기 말엽부터는 釜山이라는 지명이 일반화 된 것으로 추정된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된『동국여지승람』산천조에 보면, "釜山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지역이 중심지였음)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일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釜山浦)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 그 후 기록들은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釜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일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兩鎭)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동국여지승람(1481)』편찬 이전에는 富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이후 어느 시기에 釜山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부산의 해안 팔대와 내육팔대(海岸 八臺 & 內陸 八臺)
臺(대)란 : 부산에는 대(臺)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 많다.
臺의 사전적 해석은 "흙이나 돌을 높이 쌓아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을 말한다.
지역 향토학자이며 소설가인 최해군씨는 "해안 8대와 내륙 8대"로 제안 분류했다.
해안 8대 : 해운대. 태종대.몰운대.신선대.이기대.연대.시랑대.점이대
내육 8대 : 자성대.의상대.오륜대.동대.장군대.동장대.학소대.강선대를 추천한다.
(2003.6.1 부산일보)
부산의 명소 18대
1. 해운대
동백섬과 해수욕을 하는 모래사장과 그 주변 도시 전체를 해운대라고 지칭하지만 실은 꼬집어 말하면 동백섬이라 불리는 곳이 海雲臺이다. 신라말 문성왕시절 고운 최치원선생님이 자주 놀러 오셔서 현 누리마루 등대 옆 황옥인어 바위에 음각 글씨로 해운대라는 글을 쓰신 후 지명화가 되었습니다.
장산의 양운폭포를 거처 흐르는 장산천과 우동, 좌동의 물을 모아 흐르던 春川이 실어 나른 모래가 이 섬까지 연결시킨 육계도로써 생긴 모습이 다리미 같다하여 "다리미산"으로 불렀다.
2. 태종대
삼국을 통일한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이 자주 휴식을 취하던 곳으로 이곳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기우제를 지내 비가 오게 하였다하여 "태종우"라는 말도 생겼다. 현 등대 옆의 평편한 신선바위, 왜구에 끌려간 남편을 애타게 기다리던 여인이 돌로 변하였다고 하여 망부석, 바로 뒤에 우뚝 솟은 시루떡 모양 층층인 태운감 등이 있으며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3. 몰운대
사하구 다대동 산114 일대에 있는 몰운도였으나 낙동강 토사가 쌓여 다대포구와 연결된 육계도로써 "몰운대(沒雲臺)"란 지명은 낙동강 하구에 안개와 구름 끼는 날에는 이 일대가 그 선경 속에 잠겨 보이지 않는 데에 비롯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장군의 부산포 해전시 장군의 우부장이였던 녹도만호 정운장군이 순직한 장소이기도 하다.
4. 이기대
二妓臺는 남구 용호3동에 있으며 해운대 동백섬과 광안리에서 마주 보이는 곳이다. 임진 왜란 때 좌수영 관기 두 명이 술취한 왜장을 안고 물에 빠져 죽은 무덤이 있다하여 의기대(義妓臺)혹은 이기대라고 불리게 되었다.
5. 오륜대
금정구 오륜동 일대 회동수원지 부근의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 곳으로 강변일대가 기암 절벽이었고, 학이 날라 다녔으며. 철마면 아홉 산이 병풍처럼 둘러 절경이다.
1931년 일제 강점기 수영강 수원지 공사로 댐 밑으로 수몰되기 전에는 부근 주민들에게 삼강오륜을 가르치던 다섯 노인이 배를 타고 신선처럼 오래 살았다는 전설이 있는 절경지이다.
6. 오랑대
경북 포항 호미곶에 가시면 세오녀와 세오랑의 비석과 전설이 있지만, 부산에도 다섯 총각 랑도(郞徒)들이 배를 타고 유람을 한 자리라 하여 오랑대라 하며 용궁사에서 기장 대변마을로 가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다가 해광사 사찰이 있는 곳에 있다.
7. 시랑대
조선 영조 9년(1733) 시랑 권적이 이곳 경치에 반해 바위에 자기벼슬 시랑을 넣어 시랑대라고 새겼다.
현 용궁사자리의 윗쪽은 비오리들이 많았다는 비오포(飛烏浦) 즉, 원앙대(현 수산진흥원자리)와 남쪽 송정 쪽에 侍郞臺가 있어 2대가 경승지였다.
여성의 미모로 파계시킨 미랑스님과 용왕의 딸 용녀사이에 생긴 아기를 낳은 자리가 있으며, 용녀는 아기를 안고 하늘로 승천한 태자취자리, 파계승을 용왕님이 벌하여 집어삼킨 큰 굴은 양쪽 바위를 내려가면 볼 수 있으나 기암절벽이라 보통사람은 겁에 질릴 정도라 엄두를 좀처럼 못낸다.
8. 황학대
기장 죽성마을에 있으며 기장천의 맑은 물과 송림이 우거져있었으나 신앙촌과 공장이 들어선 후 옛날의 운치는 많이 반감되었지만, 바닷가의 누런 큰 바위가 한 마리의 학처럼 생겼다고 해서 고산 윤선도님이 첫 유배지로 오신 후 붙혀진 지명이다.
9. 소학대(巢鶴臺)혹은 鶴巢臺
기장군 정관면 매학리에 있는 거대한 암산(巖山)을 매바우 혹은 소학대(巢鶴臺 )라 부른다.
100척 높이의 암벽 청솔가지 속에 학들이 둥지를 틀어 장관을 이루었다는 곳으로 백운산의 주봉이며 선여사(船餘寺)가 있는 이곳의 암자 망월암(望月庵)에서 내려다보는 동해의 떠오르는 일출과 저녁의 동해바다위로 떠오른 명월은 가히 구름속의 선경이다.
10. 적선대(謫仙臺)
기장 대변의 옆 도로를 따라가다 해안 바위 군이 돌출되어 있는 곳으로 영화 "친구"를 촬영한곳이기도 하다.
여기를 돌아 잔잔한 자갈해변이 나타나는 곳이 있고 등대가 있다. 암벽 위에 읍파정(揖波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차성가』에 "적선대 있건마는 기경선 어디간고 죽도에 우는 대는 죽지사(竹 枝詞) 노래던가 읍파정 잠깐 올라 선두포 굽어보니……"라고 되어있으나 지금 정자는 없어졌다.
11. 용두대(龍頭臺)
기장 죽성마을 황학대의 위쪽 부분(일광쪽)에 돌출되어 있는 대를 뜻한다.
용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용두대 앞에 는 옛날 어사(御使)가 놀았다는 어사암(御使岩)과 매처럼 생겼다는 응암(應岩)이 있는 곳이다.
12. 자성대(子城臺)
당감동 선암사에서 원류하는 당감천의 모래가 쌓여있고 갈대밭이 우거진 현 자성대의 바다와 강이 만나는 포구는 낮은 모래톱위에 떠 있는 하나의 섬이였으나, 범일동, 좌천동 일대의 매립으로 현재에는 시가지의 한복판이 되었다.
증산(현 좌천동위 금성고등학교 뒷산)에 위치하는 동래부의 부산진성의 본성에 따른 子城을 세웠으나 임란 때 왜군 소서행장이 본성과 자성을 증축하여 소서성으로 불리다가 왜군이 물러간 후 명나라 만세덕장군이 오래 머물렀다.
1975년 현재의 성곽으로 완전 개보수,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13. 신선대(神仙臺)
남구 용당동 산170번지 일대를 말한다. 앞 포구는 백사장과 작은 섬들이 있었으나 동명목재 공장부지로 평탄화했으며 그 주위 일대는 매축하여 신선대 콘테이너 부두로 사용중이다. 정상에서 보면 부산항 전경을 볼 수 있고 영도 해양대가 있는 조도와 마주한다.
Song Of The Reed / Tim Mac Brian
첫댓글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갓바위회장님을 비롯하여 여러 산꾼님들의 협조로 접근하기 어렵고 긴여정인 낙동정맥을 완주할 수 있음에 감사드림니다...
수고와 고생 많으셨습니다...
귀연식구들의 도움으로 낙동정맥을 마무리했네요....회장님, 대장님, 정맥을 함께한 모든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청산님께도 감사 드립니다..또한 여성분들의(나선생님과 새벽안개님,로즈마리님, 상아님, 써니님)도움이 컸습니다...모두모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마지막날 낙동신령님의 축하 세리모니 굉장했네요
정성으로 쓰신 낙동 여정 산행기 귀연의 소중한 자료가 될 것입니다.
소박한 시작과 감동의 마무리 다시한번 축하드리며
아직 남아 있는 많은 아름다움과 감동을 위한 더 큰 역할을 기대합니다.
수고많이하셨습니다... 몰운대까지 기나긴여정--- 정말 감사드리고 건강하세요!
완주를 축하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졸업식에 참석치 몬해 미안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