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한석산
22. 아버지의 등/ 이정하
23. 어머니라는 말/ 이대흠
24. 옮겨가는 초원/ 문태준
25.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이채
26. 직소포에 들다/ 천양희
27. 천년의 잠/ 오세영
28.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김기택
29. 한강 아리랑/ 한석산
30. 황옥의 사랑가/ 정일근
21.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 한석산
엄마 아이구 내 새끼 나 어떤 여자랑 살까
음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음식 솜씨 좋은 여자가 으뜸이란다.
응 엄마 같은 여자! 아야, 징그럽다
곁에서 잠잠히 있던 아빠
야 이놈아 세상에 엄마 같은 여자는 없다.
청 보릿대 같던 시절 엄마와 할머니가 담근
김장김치 밑반찬 간장 된장 고추장
귀 떨어진 뚝배기 보글보글 된장찌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 눈물 나게 그립다.
어머니의 젖내 나는 그 품속이 그리워 운다.
투정 부리면 달래주고,
칭얼거리면 젖가슴을 내주시던
그리운 어머니 엄마가 보고 싶다.
오늘 저녁 밥상은 엄마 손맛 같은 여자
밥숟가락에 묵은지 쭉 찢어 얹어주는
아내가 차려주는
자글자글한 고등어구이 한 손
된장찌개 호박잎 상추쌈에 보리막장
열무김치 배추 겉절이 곁들인 보리 밥상이면 좋겠다.
풍금/ 한석산/ 한국문학신문/ 2020
22. 아버지의 등
-수없이 업힌 어머니의 등보다 더 기억나는 것은
단 한 번 업힌 아버지의 등이다
/ 이정하
일곱 살 되던 해 겨울,
눈보라치는 들판을 건너가기 위해
아버지는 처음 내게 등을 내주셨다
심한 고열로 밤을 꼬박 새웠던 나는
아버지의 넓은 등판에 뺨을 댄 채 잠이 들었고
읍내 병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내 병은 말끔히 나아 있었다
객지에 계신 아버지가 집에 오는 것은
일 년에 어쩌다 한두 번
그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 가고 싶어 하셨고
나는 그때마다 부리나케 도망쳐
혼자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곤 했다
막노동 탓에 표시나게 굽어 있는 등을
세월이 한참 흘러
아버지와 함께 간 동네 목욕탕
그때도 나는
늙고 말라빠진 아버지의 몸을 외면했다
야야, 쓸데없는 돈 말라꼬 써
등만 밀어주면 되는데
세신사에 이끌려가며 힘없이 남긴
아버지의 말씀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세월이 더 흐르고 흘러
아들과 함께 간 동네 목욕탕
자식새끼의 등을 때수건으로 벌겋게 밀며
나는 소리 없이 눈물 흘렸다
샤워기 세차게 틀어놓고 목 놓아 울었다
어릴 적 그 따스했던 아버지의 등
이제는 밀어드릴 수도 없는 아버지의
그 굽은 등이 간절히 생각나서....
다시 사랑이 온다/ 이정하/ 문이당/ 2016
23. 어머니라는 말 / 이대흠
어머니라는 말을 떠올려보면
입이 울리고 코가 울리고 머리가 울리고
이내 가슴속에서 낮은 종소리가 울려나온다
어머니라는 말을 가만히 떠올려보면
웅웅거리는 종소리 온몸을 물들이고
어와 머 사이 머와 니 사이
어머니의 굵은 주름살 같은 그 말의 사이에
따스함이라든가 한없음이라든가
이런 말들이 고랑고랑 이랑이랑
어머니라는 말을 나직이 발음해보면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진다
어머니라는 말을 또 혀로 굴리다보면
물결소리 출렁출렁 너울거리고
맘속 깊은 바람에 파도가 인다
그렇게 출렁대는 파도소리 아래엔
멸치도 갈치도 무럭무럭 자라는 바다의 깊은 속내
어머니라는 말 어머니라는
그 바다 깊은 속에는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매운 파도의 외침이 있다
귀가 서럽다/ 창비시선311 / 이대흠/ 창비/ 2017
24.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니
그대는 그대의 양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오후 세시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구름 그림자나 되어서
그대와 나도 구름 그림자 같은 천막이나 옮겨가며 살자
그대의 천막은 나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있고
나의 천막은 그대의 천막으로부터 지평선 너머에 두고 살자
서로가 초원 양편으로 멀찍멀찍이 물러나 외면할 듯이 살자
멀고 먼 그대의 천막에서 아스라이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면
나도 그때는 그대의 저녁을 마주 대하고 나의 저녁밥을 지을 것이니
그립고 그리운 날에 내가 그대를 부르고 부르더라도
막막한 초원에 천둥이 구르고 굴러
내가 그대를 길게 호명하는 목소리를 그대는 듣지 못하여도 좋다
그대와 나 사이 옮겨가는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먼 곳/ 문태준 / 창비/ 2012
25.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 / 이채
깊어서 고요한 것이 있다면
바다만이 아닐 것이며
넓어서 편안한 것이 있다면
하늘만이 아닐 것입니다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눈빛이 그러하고 가슴이 그러하고
중년에 온화한 당신의
표정이 그러하고 생각이 그러합니다
세월의 오랜 정을 소중히 여기고
진실한 마음의 참됨을 알기에
문득 그리워지는 사람 하나
어둠 속 별이 되어 빛날 때
깊어도 때로는 외롭던가요
외롭다가 슬프기도 한 눈빛으로
흘러도 보이지 않는 가슴 속 눈물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모습입니다
떠나간 이름 하나
긴 하루로 남았던 기억
어느 날 너와 나의 만남이
엷은 꽃잎으로 다시 피어날 때
넓어도 때로는 그립던가요
타다 남은 불씨에
실바람이 불어오면
달래고 재우는 버들잎 손길
중년에 아름다운 당신의 마음입니다
가고 오는 세월은 유수 같아라
부질없는 욕심을 버리고 나니
한줄기 노을빛이 더욱 아름다워
중년인 내 나이를 사랑하렵니다
중년의 고백/ 이채/ 도서출판행복에너지/ 2018
26. 직소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와!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정토(淨土)!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수궁(水宮)을.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둥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 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 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절창(絶唱)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마음의 수수밭/ 천양희/ 창비/ 2019
27. 천년의 잠 / 오세영
강변의 저 수 많은 돌들 중에서
당신이 집어 지금
손 안에 든 돌,
어떤 돌은
화암사(禾巖寺) 중창 미타전(彌陀殿)의 셋째 기둥 주춧돌로
놓이기를 바라고,
어떤 돌은
어느 시인의 서재 한 귀퉁이에 나붓이 앉아
시가 씌어지지 않는 밤, 그의 빈 원고지 칸을 지키기를 바라고
또 어떤 돌은
어느 순결한 죽음 앞에서 만대(萬代)의 의(義)를 그의 붉은
가슴에 새기기를 바라지만
아, 나는 다만 당신이
물수제비뜨듯 또다시 강가에 나를
팽개치지 않기만을......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천년의 잠은
죽음보다 더 잔인할지니
흙 위에 엎드려 잠들기 보다는
급류 속의 일개
징검다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님이여, 장난삼아 던질 양이면 차라리
거친 물살에 던지시라.
그리하여 먼 후일 당신이 다시 찾아오시는 날,
나는 즐겨 내 몸을 당신 앞에 바치리니
당신은 주저 말고 내 등을
밟고 건너시기를......
천년의 잠/ 오세영/ 시인생각/ 2013
28. 초록이 세상을 덮는다 / 김기택
잠깐 초록을 본 마음이 돌아가지 않는다
초록에 붙잡힌 마음이
초록에 붙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마음이
종일 떨어지지 않는다
여리고 연하지만 불길처럼 이글이글 휘어지는 초록
땅에 박힌 심지에서 끝없이 솟구치는 초록
나무들이 온몸의 진액을 다 쏟아내는 초록
지금 저 초록 아래에서는
얼마나 많은 잔뿌리들이 발끝에 힘주고 있을까
초록은 수많은 수직선 사이에 있다
수직선들은 조금씩 지우며 번져가고 있다
직선과 사각에 밀려 꺼졌다가는 다시 살아나고 있다
흙이란 흙은 도로와 건물로 모조리 딱딱하게 덮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초록이 갑자기 일어날 줄은 몰랐다
아무렇게나 버려지고 잘리고 갇힌 것들이
자투리땅에서 이렇게 크게 세상을 덮을 줄은 몰랐다
콘크리트 갈라진 틈에서도 솟아나고 있는
저 저돌적인 고요
단단하고 건조한 것들에게 옮겨붙고 있는
저 촉촉한 불길
소/ 김기택/ 문학과지성사/ 2010
29. 한강 아리랑 / 한석산
천년을 흘러도 한 빛깔, 물 파랑 쳐 오는
갈기 세운 물소리 조국의 아침을 깨운다.
한강 1300리 물길 하늘과 땅 이어주는
구름 머문 백두대간 두문동재 깊은 골
뜨거운 심장 울컥울컥 꺼내놓는 용틀임 춤사위
우리 겨레의 정신과 육신을 가누는
민족의 젖줄 한강 발원지 여기 검룡소.
큰 물줄기 맑고 밝게 뻗어 내리는
골지 천과 아우라지 조양 강 휘돌아 친 두물머리 이끈
한강 한복판에 떠 있는 선유도 갈대숲
물새 둥지 튼 그 속에서도 꽃 피웠네.
대한민국 서울 기적 이룬 한강
굴절된 역사의 아픈 눈물 삼키며 제 몸 뒤집는다.
이런 날에 우리 다 같이 부르는 가슴 벅찬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우리 가는 곳 어딘지 몰라도
가버린 것들은 허망하게 아름다운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청동기 문화를 세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선조
이 땅 순한 백성들이 원시생활 하던 시절부터
강에 안기던 사람 품을 내주던 강
세월이라는 깊은 강가에 서면
고요한 강물이 내 영혼을 끌고 가네.
먼 옛날 삼각산 소나무 아래 어매 아배 뼈를 묻고,
삽을 씻으며 민초의 한을 씻던 아리수
넓고 깊은 어머니 가슴 강물도 차운 날에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젖가슴 여미는 어머니 가슴 헤집는 젖둥이
온갖 풀꽃 향기에 젖은 물가에 앉아 있어도 목이 마르다.
한강아리랑/ 한석산/ 동학사/ 2013
30. 황옥黃玉의 사랑가 / 정일근
운명의 맥을 짚어 누런 바다를 건너기로 했습니다.
바다 건너 동쪽나라에 하늘에서 알이 되어 내려왔다는
수로, 그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더 먼 나라 나사렛에서 태어난 야소라는 남자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태어나고 죽는 일이 하늘에 있고
죽어서 다시 사는 일이 하늘에 있다면
제가 그대에게로 가는 것도 하늘이 정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우리 사랑이 하늘의 신탁이라면
그대는 그 나라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겠지요.
어머니가 주신 붉은 속곳을 준비하며 저는 자꾸만 붉어집니다.
그래서 바다를 건너는 두려움은 잊기로 했습니다.
이만 오천 리 뱃길 내내 초야의 뜨거움을 꿈꿀 것입니다.
첫날밤 그대가 열여섯 내 나이를 묻는다면
붉은 저 속곳보다, 바다를 건너며 붉어진 내 몸보다
더 붉은 처녀의 피로 답할 것입니다.
내 배 안에서 하늘의 흰 피와 땅의 붉은 피가 섞여
새로운 나라 새로운 왕조의 피를 만들고
그 피 세세년년 붉게 이어지길 바라겠습니다.
건강한 남자로 곧추서서 저를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지금 아유타국에서 허許씨 성을 가진 황옥이
물고기 두 마리 문양을 증표로 수로, 그대에게로 갑니다.
사과야 미안하다/ 정일근/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