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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소설/원영
산속에 파묻힌 흙벽돌집은 말이 집이지 그냥 움막 같은 곳이다 멍석을 깔아 장판대용으로 사용했으며 방과 부엌은 호롱불로 어둠을 밝혔다. 아침이 되면 처마 밑에 스피커에서 들리는 이장의 목 멘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깼다. 한 집에 한 사람씩 삽과 빗자루를 들고 ‘새벽종이 울렸네!’ 구령을 맞추어 부역을 나가면서 일과가 시작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을 마룻바닥에 던져놓고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송장 산자락에 있는 움막집에는 할아버지가 살고 계셨다.
손자 녀석이 보이는 순간 “뉘 왔느냐?” 마당 위에 깔아놓은 멍석. 그 위에 놓여 있는 안주라고는 풋고추와 된장, 막걸리를 친구삼아 드시면서 소일하고 계셨다. 할아버지 곁에 다가서자 할아버지가 막걸리 사발을 들어 올리며 말씀하신다.
“너 한잔 마실래?
정지 속으로 들어가시더니 설탕을 막걸리에 넣고 저으셨다.
“먹어라, 맛있다.”
나는 산길을 따라 올라와 때마침 갈증이 나던 차에 할아버지가 건네주는 막걸리를 몇 잔 뚝 들이꼈다. 그리고는 알코올기운에 밀려오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그냥 쓰러져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눈을 떠보니 하늘의 별이 총총히 쏟아지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바람이 되어 헐떡거리면 산길을 내려왔다.
“너 어디서 오느냐?”
“할아버지 집이요.”
겨울이 돌아오면 5일 장날에 돈을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산속에가 칡뿌리를 두고 실랑이를 벌인다. 칡뿌리는 바위를 붙들고 안 뽑혀 나오려고 애쓴다. 일주일 동안에 모아둔 뿌리를 메고, 새벽길 따라 할머니하고 장항선 침목을 밟으며 먼 길 동행했다.
“너 힘드냐?”
“괜찮아요.”
“할머니는 기분이 좋아.”
“왜요?”
“돈을 버니까.”
대천시장 바닥에 물건을 펴 놓으니 이 사람이 와 밀어내고 저 사람이 와 밀어내어 구석으로 밀려갔다. 신체 건강한 두 사람이 나타나서 다짜고짜 말할 것 없이
“장세를 내세요.”
“다 팔고 드리면 안 될까요?”
“물결은 팔든 안 팔든 당신네 사정이니 빨리 내세요.”
“이따가 드리면 안 될까요?”
“빨리 내!, 시간이 없다.”
어린 소년을 보고 혀를 차는 이가 안 됐다며, 다른 분들보다 나는 빨리 물건을 팔았다. 할머니의 물건은 오후가 되어서야 찾는 사람이 있어 나는 할머니를 도와서 빨리 팔아 드렸다. 측은한 마음으로 손님을 유도했나 보다. 우리 집 능선 너머에 사시는 할머니,
“원영아 가자.”
“어디로요?”
“국수 한 그릇 먹으러.”
시장골목 가판대에 앉아 할머니가 사주신 국수를 먹으니 꿀맛이었다. 한나절 만에 아침 겸 점심밥으로 허기를 채웠으니 그럴 만했다. 돌아오는 길에 밀가루 한 포대를 사서 멜빵 메고 20리길 걸어오는데 발바닥에 불이 나면서 입속의 구린내가 하늘을 덮었다.
추운 날에 시간이 나는 대로 산을 더듬어서 토끼를 잡아다가 죽을 쑤어 생계를 이었으며 썩은 나무뿌리와 솔방울을 주워 다가 양조장에 내다 팔았다. 또는 삭정이를 해다가 허청에 쌓아 두는 게 원영이의 하루 삶이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개울에 가 가재와 중태기를 잡아다 밥상 반찬이 되었고 동네에 경사가 있는 날에는 아이들 여럿이 양조장으로 달려가 막걸리 심부름하는 일로 들고 오다 허기가 나면 아기처럼 젖꼭지를 붙들고 빨아먹었다 먹다 보면 삽시간에 반통이 되었다. 그냥 맹물을 채워다 어른 앞에 드렸더니 맛이 쓰다면 없는 인상을 다 쓰시는 얼굴을 볼 때마다 쑥스러웠다.
그 당시에는 전화도 없었으며 밤이 되면 호롱불 밑에 앉아서 나는 눈물을 훔쳤다. 공부할 소년에게 주어진 산촌생활이 날마다 괴로웠고, 답답함에 활짝 핀 꽃을 보면 끊어 놓고 호박, 가지, 토마토가 웃고 있어도 막대기를 박아 스트레스를 해결했다.
틈을 내 친구하고 놀면 여동생을 시켜서 불러대는 어머니. 더 놀고 싶지만 혼나는 게 두려워서 송아지 끌려가듯이 지냈다.
“너 어디 있었느냐?”
“효순이네 뒷마당이요.”
“뭐했느냐?”
“자치기 놀이요.”
“앞으로 그렇게 놀기만 하면 혼날 줄 알아라.”
“예”
날마다 지청구를 듣다 보니 나의 행동에 주눅이 들어 있었다. 학교 갔다 돌아오는 하굣길에 둑을 거닐며 뱀을 잡아 허기를 맛볼까 하는 순간에 머리를 쳐들고 달려들어 나란히 도망을 가는 뱀의 콱콱 소리에 혼이 빠지는 찰나, 어른들 말씀에 혹시 뱀이 쫓아오면 각을 이용해라 그렇지 않으면 물린다. 그렇게 간신히 그날을 나는 모면했다. 산나물 죽으로 사는 원영이네. 일 년이 다 가도록 점심 도시락을 한 번도 못 싸서 학교에 갔었다. 운동장 끝자락 수돗가에 앉아 물로 헛배를 채우는 개구리 소년, 담임선생님께서 땀방울 훔치며 준비물 안 가져 왔다고 야단을 맞으며 울분을 참느냐 땀으로 목욕을 했다.
나는 교실 당번이 되어 혼자서 청소하다가 선생님 교탁 밑에 빵 뭉치 자루를 봤다. 굶주림으로 고양이가 되어 한 개를 꺼내 드는 순간 들켰다. 다가오시는 선생님의 발걸음 소리에 오금을 저렸다.
“너만 하루에 두 개씩을 꺼내 먹으라, 친구들한테 소문 안 나게 해라.”
놀라웠다. 그 무서웠던 김명신 선생이 저렇게 인자한 면이 계시다니―. 단숨에 집으로 달려갔다. 허기가 지면 매일같이 산속으로 가 송진을 씹어서 먹었다. 그리고 시향 풀과 칡넝쿨, 정금나무 열매 등으로 군것질거리로 그 시절에 통했다. 해가 질 무렵에 빗방울이 떨어지자
“원영 아 논갈이 가자.”
바작 속에 두엄을 지고 아버지는 둑길을 걸어갔고 나는 황소를 끌고 뒤따라 논배미 속으로 소를 몰아넣고 쟁기를 걸었다. 코뚜레를 붙들고 쟁기로 고랑을 만드는데
“야 인마 똑바로 잡아!”
인상을 붉히며 속으로 일하기 싫었는데 갑자기 해머 같은 주먹이 날아와 얼굴에 스쳤다. “아야!” 하면서 코뚜레를 패대기치고 나는 달아났다. 이 사실을 어머니께 알렸더니 두 부부는 밤새도록 전쟁을 치렀다.
다음날이 되자 서울에 사시는 당숙이 시골집에 찾아오셨다. 막내 삼촌께서 살아가는 환경이 어려운지라 차 정비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려고 할머니께 사정했으나 거절을 당했다. 당숙 말에 의하면 돈 많이 번다는 말씀에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이웃집으로 달려가 학원비를 빌려다 아버지 손에 쥐어 주며 돈을 벌 수 있는 서울로 내몰았다.
부자(父子)는 대천발 서울행 열차에 몸을 싫었다. 몇 시간 만에 도착한 서울역앞 거리를 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약도를 봐가며 청계천 3가 천일 차량정비학원을 찾아갔다. 4층 계단을 올라가 원장님 사무실로 안내받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선생님께서 각종 자격증에 대해서 설명을 하셨다.
“후회하지 않게 선택을 하세요.”
“자동차 정비를 하겠습니다. “
나는 원서접수를 마친 후
“시골이라서 기숙사 생활을 해야 하는데요.”
“학원에서 운영하는 달동네에 방이 있어요. 정비반에 만표가 조금만 있으면 수강이 끝나는 대로 올 테니 같이 가세요.”
나는 계단을 내려와 버스를 같이 타고 1시간 만에 찾아간 기숙사는 흙으로 성벽을 이룬 집 한 채였다. 오르고 미끄러지니 자취하는 환경이 힘이 들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봉천고갯마루 있는 기숙사로 가 있으라고 했다.
“만덕이도 같이 간다고 말을 해 달래요.”
“그럼! 함께 가요.”
우리는 원장님의 지시대로 수강을 마치고 하루 만에 바뀐 기숙사 위치를 약도대로 버스를 타고 2명이서 동방 고개 마루에 내렸다.
그때의 주변경관이 아름다웠고 골목을 더듬어 찾아 들어가다 보니 기와집 안에는 마당과 마루가 있었다. 기존에 있는 분들을 포함해서 5명이어서 자취를 하는데 막내는 나였다. 그러나 바닷가 살았던 이는 생선을 좋아하고 산자락에 살았던 이는 육류를 좋아했다. 여럿이서 식생활을 맞추기란 여간 힘들지 않았다. 1개월이 지날 때쯤에 반찬을 통일시킨 것이 청국장과 된장찌개였다. 그렇다고 해서 각자 사용할 수가 없었으며 대다수가 처음 겪는 공동생활이니 불편이야 생각하면 뭐하나, 오직 자격증을 취득한다는 목표 앞에 누구나 무릎을 꿇었다. 가끔으로 설익은 밥과 탄 밥을 즐겨야 했으며 지각을 하면서까지 학원을 열심히 다녔다. 때로는 사람이니까 불평도 있었겠지만 겉으로 내색이 없이 6개월 동안 무사히 과정을 잘 넘긴 후 시험을 봤지만 다들 떨어져 각자 인생길 짊어지고 어디로든 떠났다.
나는 초등학교시절을 제외하고 유년시절을 타관에서 보냈지만 8년 만에 고향인 김제 가는 열차에 몸을 싫었다. 그리고 고향의 황금 버스회사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오셨나요.”
“취직을 하려고 왔어요.”
“고향이 어딘가요.”
“황금벌판인데요.”
“안 받아요.”
“왜! 그러죠.”
“돈 뜯어내니까요.”
“아! 그런 일이― 안녕히 계세요.”
나는 노을과 어둠을 밟으며 버스에 올랐다. 얼마나 갔을까? 도착한 바다항구에서 유람선 상으로 바라본 거기 언제 또 기약이랄까? 서해 버스에 서류를 넣었다. 배운 기술이야 정비학원에 다녔던 기술이 전부인 힘만 가지고 조수로 따라다녔다. 5일 장날이 되면 개, 닭을 가지고 승차하려는 승객한테, 오늘 재수가 없다. 찐 고구마와 홍시로 입막음하니 대가로 통과시킨 실내는 고통의 소리가 다 가도록 들렸다.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면 1일 입금액 6만 원을 빼고 남은 돈으로 운전사 1만 5천 원을 드리고 조수는 5천원 차장은 빵으로 얼마를 가져가는지 모른다. 운행하는 도중에 개와리 가을 산길을 스쳐 가는데 배선 합선으로 불꽃이 피었다. 번개처럼 전기가 통하지 않게 제거를 한 후 이론으로 배운 기술을 직선 연결하므로 시동이 살아나니 운전사로부터 기술을 인정받았다. 종착지 식당에 가면 말복탕으로 끼니를 즐기다 보니 나는 그 순간에 임금님이 된 기분이었다. 차고지에 이르러 주차장에서 밤을 새우고 나면 타이어 바퀴는 홀쭉해져서 차고지를 변동시켰다. 그러고 일하는 사람들과 똑같은 밥상이지만 원영이한테는 최고의 밥상이니 근무는 힘이 들지만 목구멍은 풍요로웠다.
6개월 만에 쉬는 날이 돌아와 시골집에 들렀더니 동네사람마다 남의 집이야 기로 정자나무 밑에서 세월을 낚는다. 대상의 주인공이 나타나면
“오늘 날씨가 참 좋다.”
그렇게 말을 돌리기 일쑤였다. 아버지가 그곳을 지나는데
“순만이 아들 원영이가 기름 주머니 되어서 버스 따라 다닌 데야!”
이웃들의 말잔치가 귀에 거슬렸는지 아버지는 나를 찾았다.
“아버지”
“왜유?”
“너 지금 하는 일을 동네사람 안 보이는데 가서 할 수 없느냐!”
“거기가 어디유?”
“서울 있잖느냐!
그 한마디에 보따리 싸들고 서울로 올라왔다. 여러 직장을 떠돌아다녔으며 막일을 하니 이제 현장 근무가 신물이 났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산촌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나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9급 시험을 수없이 봤으나 헛물만 컸다.
1980년대 20명 모집에 21번째 22번째 떨어졌으나 시험을 치른 걸로 만족했다. 그 세월이 10년이 흘렀다. 부모의 집이라고 찾아갔더니 직장에 들어가 진득하지 못하는 놈 앞으로 오지 말라는 아버지였다. 그것도 부족해서 고함은 하늘을 덮었다.
‘자식 놈 하나 못 가르쳐 바보로 만든 주제에 할 말을 다하시고 사시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모님 댁도 오만 정이 떨어졌다. 어머니로부터 주입된 말
“가정사 내가 말을 안 하면 누가 알겠느냐!”
밥 먹듯이 입단속을 강조하면서 말하는 사람한테 침을 뱉는다. 장남이 된 나는 눈물이 앞길을 막았다. 누구를 원망하나 바보의 원영인데... 그래 두고도 고아다 찾아간 죗값이 다 그렇게 한 발 멀어져가는 정이었다. 고등교육만 받았더라면 합격을 하였을 텐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이가 그래도 공무원 시험을 응시해 봤다는 의미만으로 살았다. 생각이 너무나 어렸나 봐. 학원이란 상상도 그때는 안 해봤으니까? 나는 관내에 있는 구청 민원실을 찾았더니 하얀 밥으로 고학력 인테리가 나왔다.
“어떻게 오셨나요.”
“직업 소개업 허가 좀 내려고요.”
“사회 복지학과를 전공했습니까? “
“무슨 말이신지.”
“4년제 대학을 나왔느냐고요.”
“안 나왔으면요.”
“허가를 못 내주지.”
풀죽으로 배움이 없는 나는 이렇게 길을 막았다.
능력이 있고 실력이 있어도 사회는 찬바람만 불었다. 학력이 없다고 수모를 겪어야만 했던 그때 공부를 하려고 해도 길을 모르니 날짜만 흘러갔다. 오랜 세월에 식당가 물속으로만 살아가니까 무좀과 주부습진 때문에 날을 새면 쌓여가는 스트레스와 원망, 하늘을 찔렀다. 나중에 용하다는 의술과 천사약국을 찾아 헤맸지만 낫기는커녕 질병의 골짜기는 깊어만 갔다.
어렵게 배운 주방기술을 패대기치고 그곳을 떠나는 마음이 아팠다. 가을과 겨울은 식당가에서 맴돌고 봄과 여름은 종점에서 맴돌았다.
나는 하루를 안 쉬어도 모이는 돈이 없었다. 월급이라야 용돈 쓰고 나면 새 채비다. 그래서 항상 참새는 황새가 아니 되나 보다. 건강상 장애가 있어서 바닷바람이 강한 버스종점에 들어가 그 겨울철에는 영하 15도가 되었다. 구두를 신고 작업을 하는데 발과 신이 한 몸 되었다. 그 당시는 동상인 줄을 몰랐다. 반갑지 않은 손님이 때늦게 찾아오는 여름 꽃을 아는지 기숙사 시설이 완비된 회사에 들어가 정비를 하면서 시간만 되면 어떻게 해서든지 배우는 게 무식보다 나을까 뭐든지 알고 안 쓰는 것이 났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냈다.
나는 2년 동안에 검정고시 학원주변을 맴돌았다. 또는 떨리는 모습으로 학원 문을 두드렸다.
“어서 와요.”
“나 같은 사람이 공부할 수 있나요.”
“예!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졸업장도 없는데,”
“교과 과정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시험이 1년에 한 번 있거든요. 접수하실 거예요.
“네!”
“시작이 반이죠.”
내일부터 수강하기로 하고 학원을 빠져나오는데, 세상을 다 얻은 듯한 마음으로 돌아왔다.
나는 관리과 이 부장님 사무실을 찾아 들어가 뵈었다.
“뭐냐!”
“졸업장이 없어요. 검정고시를 하려고요.”
“맡은 임무는 손색없이 하고 다녀!”
“예! 감사합니다.”
너무나 부장님이 고마웠다.
나는 날마다 오후만 되면 구두와 복장을 깔끔히 갖춰서 입고 학원으로 달려가 열심히 중등과정을 배웠더니 6개월 만에 합격증을 받았다. 얼마 만에 내게 주워진 귀한 선물인가! 감격의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행복도 잠깐, 어두워질 무렵이 되자, 이기복이가 다가와
“원영 아 나 좀 보자.”
“왜?”
“따라와 봐!”
의심도 없이 따라간 곳은 어두운 창고였다. 네 명이서 함께 나를 봐 주려고 짰나보다. 한 놈의 말투가 거칠게 나왔다.
“야! 인마 여기가 어딘데 학원에 다녀?”
“다니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러고 허락을 맡고 다닌다.”
“싹수없는 놈 봐라, 복싱으로 싸워 볼래?”
“그래!”
돌아가면서 4대1로 싸웠으나 그놈들이 20분 동안 맞으니까? 한 놈이 던진 쇠뭉치가 날아와 원영이의 옆구리를 스치는 순간에 쓰러졌다. 하이에나들이 달려들어 진흙을 만들어 놓았으나 순찰하는 경찰관에 의해서 발견되어 소생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몇 시간 만에 정신이 돌아와 몸을 살피니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소변 줄기가 막혀서 오줌보가 터져나가는 것 같았다. 또는 땀만 삐질삐질 나왔다.
“간호사님 오줌이 안 나와요. “
“줄기가 막혔으니 호수를 사용해야 해요. “
놈들을 집단행동 혐의로 구속하게 했더니 가해자 가족들이 날마다 병동을 에워싸면서 합의 좀 해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나는 병동에 누워서 이런 사항을 사복형사인 삼촌한테 말씀을 드렸더니
“1년 동안 치료하면서 합의는 하지 마라.”
“왜요.”
“징을 쳐야 그런 짓 못 할 거다.”
“삼촌 감사합니다.”
그날을 생각해보면 영원히 콩밥을 먹이고 싶었지만 식솔들이 무슨 죄냐 싶어서 5개월 만에 합의서를 해주고 나는 연고가 있는 한강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았다. 한두 달쯤 몸조리하다가 군대에 갈 나이가 임박해져서 담당병무청을 물어서 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나요.”
“지원하려고요.”
“주민등록번호 좀 불러주세요.”
조회를 해보더니
“자격이 되지 않으니 돌아가세요.”
“지원이 통과되면 말뚝을 박으려고요.”
“당신 같은 분이 군대에 가면 질서가 문란해져!”
“왜?”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
“여기서 듣고 있잖아요.”
“중학교 이상 학력소지자들만 갈 수가 있어요.”
“어떻게 해서든지 갈 수만 있게 해주세요. “
“영장이 나오면 그때 오세요. 지금은 자격이 안 되니 포기하고 돌아가세요. 내가 차비와 막걸리 값을 줄 테니까 가다가 사서 먹고 가세요. 그러고 앞으로 오지 마세요. 안되니까?”
그런 후로 나는 수십 번 병무청 담당자를 찾아가 떼를 썼건만 허탕이었다.
얼마 후 신병검사통지서가 나와서 받았더니 갑종에 4급이었다.
“왜! 4급입니까?”
“학력 미달이야!”
“군대에 병역 좀 하게 올려주세요. “
“안 돼, 내가 죽는 꼴 볼 거야,”
나는 하는 수 없이 돌아 나오면서 안 될 말을 했나! 그런 생각이 여러 날 들었다. 며칠도 되지 않아서 실비교육을 받으라고 통지서가 나와 플라타너스 복을 입고 찾아간 혈기 왕성한 군기 교육장에 집합했다. 날마다 교관도 교육 프로그램도 바뀌니 견디기가 힘이 들었다. 나는 전 교육생들로부터 1천 원씩을 갹출해서 교관한테 노비를 부리면 편안하지 않을까? 생각을 현실로 들었겠다. 그날따라 빗방울이 황토를 으깨놓았으며 교육생더러 맨 땅에 누우라고 소리쳤다. 반격에 나선 교육생들이 셋이서 있었다.
“비를 맞고 대가리 세운 동네가 어디냐!”
“김제읍내입니다. “
“알았다.”
“저지를까? “
“뭘?”
“살인,”
“당신들 교육이 끝나면 일반인이잖아!”
속으로 너는 대가리 한번 좋다.
“원영아 참아!”
“오늘 저녁에 저놈들 똥집 골목으로 몰아넣자.”
“민영이가 데리고 나왔다.”
“너는 구경만 해!”
교관이란 자와 사병 놈들, 지금부터는 죽어봐라! 어둠 속의 빛이 찬란한 네온 거리 아래 나체 한 모습이 다가올 무렵,
“환장한 눈빛 봐라!”
“뭐랬나! “
“맞았지.”
“이 병장 눈깔 봐!”
“김 상병도 아가씨 젖가슴을 보고 혓바닥을 뺀다.”
유리문을 밀고 포주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갔다.
몇 시간 후,
“죽은 병아리가 되었다. “
“미친놈들 봐!”
“원영이 형님을 미처 몰라 뵈서 죄송해요.”
그러고 악수를 청했다.
군홧발 샌 놈들도 밑구멍 앞에는 별 볼일 없이 고개를 숙였다. 또는 배웠다고 깝죽거리는데 한 마디로 맹물이야 그동안 저것들한테 당한 수모로 기죽어 있었다.
나는 8살 때 할아버지한테 배운 술버릇이 기분이 좋아 한잔, 기분이 나빠 한잔 하다 보니 중요할 시기에 나이를 먹는 줄을 몰랐다. 청춘을 그렇게 생각 없이 싸움으로 세월이 흘렀고 때늦은 후회를 하니 무슨 소용이 있겠나! 향으로 취해 좋아하니까? 주변에 술친구만 모여들었다. 돈 버리고 몸 망가지니 참으로 바보와 같이 삶을 오랜 기간 살아왔다. 바보는 동료가 울면 따라 울고 웃으면 따라 웃고 나는 그런 것이 살아가는 것을 배우는 거구나 했다. 날이 갈수록 마음속으로 새겼다.
나는 열차에 몸을 싫었다. 새벽잠에 빠진 객실 속으로 아이의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통로에 끼어 있었다. 얼마만큼 스쳐 갔을까? 멈춰 버린 열차, 빼어낸 4살 난 아이 다리는 핏방울만 떨어져 간 자리 꽃향기 헝겊에 싸여 구급차로 실려 갔으나 영원히 외발 장애인이 되어 어딘가에 살아갈 거다.
어느 날 나는 트럭을 끌고 구부러진 산길을 내려오는데 먼발치 그림자가 아른거리더니 생쥐 같은 아가씨가 차를 세웠다.
“아저씨 고마워요.”
“어디가 집이요. “
“전주예요.”
“그리로 태워다 줄까요. “
“싫어요, 집에 가면 맞아 죽어요.”
아마도 가출한 아가씨 같았다. 집으로는 갈 것 같지 않고 그냥 아무데서나 유하면 유하리라는 생각으로 집을 뛰쳐나온 처녀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갔다. 그 아가씨는 차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나에게 구제를 요청하고 있었다.
“나 아가씨인데 둘이서 자취하면 안 될까요?”
나는 뜻밖의 아가씨의 요구에 그냥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인생 뭐 별거던가 외로운 사람끼리 만나 서로 위로하면서 살면 그 뿐이지.
때마침 혈기가 왕성한 총각인지라 넝쿨째 굴러온 이 아가씨와 월세 방을 얻어 동거가 시작되었다. 소위 말하면 신접살림을 차린 것이다. 그럭저럭 6개월이란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보 친정에 다녀올게요.”
“느닷없이 왜!”
“볼일이 있어서요. “
“그럼! 갔다가 일찍이 와 신랑이 안 기다리게.”
“알았어요.”
친정에 다녀온다고 나간 아가씨는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이튿날이 되자 마음의 걱정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현관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누구세요. “
“경찰관입니다. “
“누구를 찾나요.”
“원영 씨 맞습니까? “
“네! 맞는 데요.”
“관할경찰서로 가봐야겠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잘못이 있고 없고는 가보면 알지.”
경찰차에 나는 올랐다. 그곳에 도착을 하고 보니 아가씨였다.
“친정에 갔다 온다더니!”
“이 인간이 사람을 잡네, 남의 유부녀 간통을 해놓고 그래 이분이 내 남편이다, 이놈아 잘 걸렸다. 너 눈깔 삐었냐!”
떨리는 몸이 어안이 벙벙하면서 말문이 막혔다. TV 뉴스에 나오는 꽃뱀한테 물린 것이다.
“어떻게 할래! 콩밥을 원하느냐! 아니면 내일까지 합의금으로 3천만 원을 내놓을래?”
나에겐 청천병력과 같은 돈이었다. 그 밤을 꼬박 새우고 나를 자책했다. 그러나 3천만 원을 해주지 않으면 콩밥신세를 져야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나는 전봇대와 싸우면서 흔들거리며 홀어머니 집을 찾아갔다. 세상을 원망하며 종일 마신 술에 취해 밤인지 낮인지도 구분할 능력이 없었다. 어머니는 통곡을 하며 시골에 부치던 전답을 급히 싸게 팔아 돈을 마련해 주셨다.
“별 수 있느냐! 물어줘야지.”
“억울한데요.”
“아깝지만 어쩌느냐! “
돈으로 콩밥을 면했지만 어머니는 당분간 일가 집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일해서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싶었다.
자동차 공업사에 들어가 미친 듯이 일했다. 숙식까지 제공되는 공업사에서 4년을 밤을 낮삼아 일하니 은행통장에 잔고가 조금씩 불어났다. 마음 적으로도 조금의 여유가 생기니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고 싶어 졌다. 그래서 생활지 귀퉁이 광고에 만남을 원하는 광고를 냈는데 며칠이 지난 후 어느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시내의 한 다방으로 그 여인을 만나러 갔다.
“좀 늦어서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선택한 커피 한 잔으로 얼굴을 익혔다.
“저는 원영이라고 해요.”
“저는 최말이라고 해요.”
첫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자기소개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다음 만날 약속을 하면서 그날은 그냥 헤어졌다. 주일날이 돌아와 만남이 깊어갈수록 사랑이 쌓여갔다. 그라나 그녀에겐 또 다른 아픔을 안고 있는 여자였다.
믿은 만큼 실망도 컸다.
결혼날짜를 잡자는 나의 제의에 그녀는 뭐가 그리 급하냐는 대답을 할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그녀의 뱃속에는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믿기 힘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딸이 하나 있고 배속의 아이까지 있는데 남자가 바람을 피워 헤어졌다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를 시댁에 주고 나왔단다.
나는 간이 콩알 같았다. 속으로 이걸 어떻게 수습할까? 딸아이 아빠가 알면 간통죄로 엮을 텐데 상상만 하여도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단념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쉽게 단념할 수가 없었다.
그놈의 정이 뭔가―.그녀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 모든 허물을 용서하고 데리고 살기로 마음먹었다. 배속의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어느새 달이 차고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철모르는 아이는 세상구경을 만끽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커갔다. 아이의 나이가 2년이 지나서야 동사무소 담당자를 찾아갔다.
“어떻게 오셨나요.”
“출생신고를 하려고 왔어요.”
“그렇게는 못 올립니다.”
“과료금을 드릴 테니 해주세요. “
“안됩니다.”
“또 아기가 있네요.”
“연년생입니다.”
“어떻게 하려고 애만 납니까?”
“글쎄요.”
나는 하는 수없이 돼지띠 윤달 아기를 과료금을 물면서까지 2살로 늦추어 올리니 기분이 묘연했다‘
속으로 풍랑은 다 지나갔나 했더니 아내의 카드빚 독촉에 우편으로 전화로 날마다 시달려야 했다. 전남편 모르게 쓴 돈이 3천만 원이 되었다.
“그런 돈을 어디다 쓴 거야?”
“생활비에 다 썼어요.”
“그럼 영수증을 보자.”
“알 거 없어, 내가 갚으면 되잖아.”
야간 잔업을 하고 돌아온 나는 새벽에 잠에 취해 있었다. 눈 위로 물체가 떠다녀 눈을 떠보니 아내의 손이었다.
“이거 뭐 하는 거야?”
말문을 돌려
“잠깐 일어나 나 좀 봅시다.”
“아침부터 왜! 이래?”
거실로 나갔다. 스포츠 두상에 검은 양복 차림으로 된 조폭 같은 두 젊은이가 나를 보자마자
“사인 좀 해주세요.”
“이거 뭡니까?”
“캠코더 생활비로 쓴 것인데 연체가 되었으니 연대 보증한다고 도장을 찍으세요.”
“영수증을 봅시다. 내용이 뭔가.”
“다음에 보시고 찍으세요,”
“그럼! 다음에 가지고 와 연대보증을 받아가세요.”
자기들끼리 안 되겠다는 눈빛으로 사인을 보내더니 귓전에 “안 되겠다.”란 말을 또 흘렸다.
“돌아가신 내 할아버지가 오셔도 지금은 보증이 안 됩니다.”
아내는 그 사람들 따라 밖에 나가면서 데려다 주고 온다더니 망을 보던 여자와 그 일행과 함께 사라졌다. 아이 셋을 놔두고 자취를 감춘 것이다. 처음엔 원망도 해봤으나 긍정적으로 생각을 해봤더니 감사했다. 난 이 아이들 셋을 잘 키울 의무가 있지 않은가!
어느 날 동네 산책길을 아이와 함께 오르는데 숨이 가빴다. 초등학교 1학년아이가
“아빠! 우리 버릴 거야?”
“아니!”
7살 아이
“아빠! 우리 보육원에 보낼 거야?”
“아니!”
막내! 3살짜리가 하는 말
“아빠! 우리를 두고 도망갈 거야?”
“그런 일 없어요.”
“정말?”
“응”
이웃에서 아직도 젊은데 어떻게 남자가 혼자서 살아 갈 수가 있느냐? 아줌마를 소개해 줄 테니 만나 보라고 하던 중에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누구셔요? “
“허창순 경찰관 아시죠? 가정사에 대해서 다 들었어요. 언제 만날까요?”
나는 머뭇거렸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초등학생 둘 딸린 엄마예요. 책임지고 가르칠 수 있나요?”
다음으로, 미루었다. 나는 딸린 식솔들도 힘든 판에 재혼이라니, 남은 삶은 취미로 삼아 행복하게 살 거라고 다짐을 하면서 이 파란만장한 나의 삶을 승화시키니 행복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날마다 눈뜨면 아름다움이 소설처럼 밀려오고 있다. 더 이상 무얼 바라겠는가. 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주고 나 또한 이 아이들을 뒷받침하며 소설 같은 나의 인생행로를 달려갈 것임에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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