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김서린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아니 그녀의 목소리를 처음 들은 것은, 대학원 4 학기차 첫날인 8월 29일, 4교시 수업 시간이었다. 첫 수업 시간에는 늘 그렇듯이 수업을 듣는 모든 이들의 간단한 자기소개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한 두 학기를 같이 듣는 사람들은 서로 잘 알지만, 같은 수업을 들은 적이 없거나 새로 입학한 새내기들은 잘 모를 수 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서 전공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으라는 교수님의 배려인 것이다. 나는 이 시간이 썩 내키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내가 장님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라고는 신입생들뿐일 텐데 자랑도 아닌 일을 굳이 내입으로 몇 번씩 되풀이하기도 싫거니와, 보이지는 않지만 매번 그들의 따가운 동정 어린 눈빛을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소개를 시작한 후 두 세 명쯤 지났을까? 복잡해진 머릿속을 뚫고, 나의 귀를 사로잡는 한 목소리가 있었다. “제 이름은 김서린이라고 하구요, 이번 후반기에 기독교교육으로 입학한 신입생입니다. 학부에서는 유아교육을 전공 했구요, 현재 고양시에 살고 있습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 나에게는 이상한 능력이 하나 생겼는데, 목소리만 듣고 그 사람의 됨됨이나 기질, 그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 등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삼 년 동안 시험해 봤는데 99% 일치했다. 예를 들면 ‘아, 이 사람이 지금 나에게 진실을 숨기고 있구나’, 혹은 ‘이 사람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지금 불안해하고 있구나.’ 등등, 5분 미만의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상대방의 됨됨이와 의도가 파악 되어지곤 하는 이러한 감각은, 시력을 잃기 전에는 없던 특이한 능력이다.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나의 온 몸의 감각을 총동원해서 상대방의 말을 들으려는 나의 의지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함에 따라 이러한 능력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그녀의 짧고 일상적인 몇 마디의 인사말 어디에 그러한 특별함이 실려 있었을까? 은쟁반에 굴러가는 구슬 같이 맑은 목소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난히 우렁차거나, 허스키한 보이스도 아니고, 특별한 억양은 더더욱 아닌데, 도대체 그녀의 음색 중 어느 부분이 나의 귀를 사로잡았을까? 부드러우면서도 다부지고, 친근하게 다가오면서도 신선한, 그처럼 상반된 이미지의 흡인력 있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열심히 분석하고 있는 동안, 나를 소개할 차례가 되었음을, 옆에 있는 친구 근호가 알려주었다. “아, 저는 성경태라고 합니다. 마지막 학기이고 기독교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이 선글라스는 폼이 아닙니다. 저는 이년 전부터 앞이 보이질 않습니다. 함께 공부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예상했듯이 새내기들의 동정 어린 시선이 내게로 쏟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마 이 수업에서는 새내기들이 두세 명에 불과한 것이 다행이었다. “자, 그러면 오늘은 첫 시간이니만큼 나누어드린 실라부스(syllabus)를 참조하시면, 대략 한 학기 동안 강의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대략적인 개요만 설명하고 여러분의 질문을 받겠습니다.” 교수님의 첫 수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간간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질문도 하면서 자신이 강의할 내용에 대한 학생들의 사전지식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아내려고 애쓰셨다. 대학원 수업을 듣는 학생의 개인차는 그 학생들의 나이 편차만큼이나 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입학하는 대학과는 다르게 대학원에 입학하는 학생들은 대학을 갓 졸업한 이십 대 중반의 학생부터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 오십 대 혹은 은퇴하고 더 공부하기를 원하는 육십 대까지 다양하다. 그러니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문이나 교양의 수준도 제 각각이다. 어떤 사람은 정말 그 과목에 대해 사전지식이 전무한 경우도 있고, 어떤 학생은 박사과정에 들어가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학문적인 수준을 갖춘 경우도 있다. 이러한 학생들의 수준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질문’이다. 질문하는 내용을 보면 그 학생의 수준을 가늠해 볼 수 있다. 교수에게 있어서 가장 가르치기 어려운 학생이 바로 질문하지 않는 학생일 것이다. 외국과는 다르게 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학기 내내 강의를 들으면서도 전혀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도 처음에는 놀랐다. 오로지 나와 소수의 몇 사람만이 질문을 할 뿐이었다. 특히, 나는 교수님을 당황케 하는, 즉 교수님의 의견에 왜 동의해야 하는지 그 논리적인 맥락을 꼬치꼬치 따져 묻는 질문을 많이 해서 교수님들을 종종 당황케 하곤 했다. 만약 대부분의 학생들이 강의 시간 내내 교수의 강의를 듣기만 할 뿐 좀처럼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교수는 이 학생이 자신의 강의를 이해했는지, 이해했다면 어느 정도까지 이해했는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그건 너무 이 세계와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는 게 아닐까요? 실제로 천 년 전이나 이천 년 전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는 보지 않는데요. 지구는 예전보다 더 신음하고 있고, 전쟁이나 사망자도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강의시간 말미에 김서린이라는 학생이, 교수님의 말을 중간에 끊으면서 내뱉은 질문이다. 호기심에 가득 찬, 그러나 겸손하면서도 확신에 찬 목소리로 그녀는 그렇게 질문했다. 나는 속으로, 오호라! 이것 보게. 물건이 하나 들어 왔네! 쾌재를 불렀다. 그 수업에는 박사 과정생으로 본 대학에 교수로 재직 중이면서, 동시에 또 학생으로 이 수업을 듣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도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듯이 가만히 있는데, 이제 석사과정 1 학차로 갓 입학한 새내기가 교수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이다. “좋은 지적이네요. 그 내용은 마지막 16주차에 나올 이 세계관의 비평에 관한 것인데요, 맞습니다. 일각에서는 이것은 개혁주의적 세계관일 따름이라는 비판이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강의 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은 관계로, 다음 시간으로 넘기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이 교재를 읽어 오십시오.” 교수님의 목소리가 기쁨에 가득 차서 흥분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감지할 수 있었다. 스승의 입장에서는 똑똑한 제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르치는 열정이 피어 오르리라. 나는 사실 그 과목에 대한 사전 지식이 거의 전무 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녀는 단 몇 십분 만에 그 책의 내용 전부를 이해하고 그 이론의 허점을 간파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기뻤다. 첫째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이 또 한 명 생겨서 기뻤고, 둘째로, 똑똑한 신입생을, 시쳇말로 ‘개념 있는 신입생’을 동료로 두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것만으로도 이 수업은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일주일에 하루지만, 전문대학원 수업이 내게는 결코 녹록하지 않다. 왜냐하면 읽어야 할 책은 많은데, 누군가가 내 대신 소리 내어 읽어주지 않으면, 나는 그 책의 내용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점자를 거의 익히지 상황에서 대학원 수업을 따라 가려면 누군가의 절대적인 도움이 필요했다. 게다가 마지막 학기이니만큼 논문 준비도 해야 하는데, 나는 그때까지도 논문 제목조차 정하지 못했었다. 간혹 어머니가 도와주기도 하셨고, 때로는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기도 했었지만, 그 동안 대학원 수업을 따라가는데 있어서 큰 불편이 없었던 것은, 나에게 기독교 학문에 대한 열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긴 어떤 학문이었든지 간에, 그 당시 나에게 무슨 열정이 생길 수 있었으랴! 그때의 나는 죽지 못해 겨우 사는, 하루하루 목숨을 연장하는 정도의 삶이었다. 별 쓸모 없고 가족에게 짐만 되는 나를, 그래도 자식이라고 나 하나만 바라보는 부모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는 인생이었다. 아무런 희망이나 기쁨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게 목적인 사람처럼, 나는 그렇게 살아내는 중이었다. 그런 나에게 어머니는 신앙을 권유하셨다. 어머니는 내가 기독교전문대학원에서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공부 하다 보면 신앙을 갖게 될 것이라고 여기셨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학기에 들어서면서 까지도 신에 대해 원망과 회의만 더 커져갈 뿐이었다. 하나님에 대해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오기가 생기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좋은 하나님이라면서요? 모든 고난에는 이유가 있다면서요? 고난이 위장된 축복이라고요? 그럼 저의 눈이 먼 것도 축복인가요? 나는 존재한다고 믿지도 않으면서 존재하지도 않는 하나님께 날마다 이런 저런 불만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9월 신학기가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난 두 번째 수업, 3교시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어? 안녕하세요? 저, 지난 주에 기독교세계관 수업, 같이 들었었는데..... 선배님도 이 수업 들으시나 봐요....이 수업 어때요? 들을 만 한가요?” 지난 한 주를 지내면서, 그녀의 이름은 잊혀 졌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아, 네에....근데 이름이....” “김서린이라고 해요. 선배님 성함이, 성…경…태… 맞지요?” “네 맞아요. 내 이름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 때 같이 수업 듣는 분들 이름을 전부 다 적어놨었거든요.” “아, 네에.....근데 이 수업 들어요? 지난 시간엔 안보이던데....” “지난 시간에는 다른 과목 들었는데요, 한 번 들어보고 영 아니다 싶으면 이번 주까지는 과목을 변경할 수 있다고 해서 리더십 한 번 들어 보려고요.” “그래요? 이 수업 괜찮은 것 같아요. 교수님도 좋으시고, 뭐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럼 오늘 한 번 들어보고 괜찮으면 이번 학기 계속 듣고, 아니면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지난주에 신청했던 거 들어야겠네요. 근데 선배님은 늘 이렇게 강의실에 일찍 오시나 봐요?” “주로 그래요. 어머니가 점심시간에 점심 먹는 거 도와주시고, 또 바로 강의하러 가셔야 하기 때문에, 후다닥 점심을 해치우고 저를 강의실에 데려다 주시고 곧바로 운전해서 가시거든요” “어머님이 무슨 강의를 하시는 데요?” “다른 대학에서 여성학 강의를 하십니다.” “우와, 여성학이요? 그거 제가 관심 있는 분야인데요. 그럼 어머님이 여성학자시네요. 대단한 어머님을 두셨는데요? 한번 뵙고 싶어요. 여성학에 대해서 궁금한 게 엄청 많은데…” “네. 대단한 어머님이죠. 곧 뵐 수 있을 겁니다. 오늘도 수업이 끝나는 다섯 시쯤 ‘짠’하고 나타나실 테니까요.” “다섯 시면 저는 못 뵙겠는데요. 제가 알바 하는 시간이 다섯 시부터라서 4시 30분에는 나가야 되거든요. 그래서 마지막 교시 수업은 끝나기 10분전쯤 먼저 일어서야 돼요. 다행히 지난주에는 첫 시간이라서 교수님께서 일찍 끝내주셔서 괜찮았는데, 이번 주부터는 교수님께 양해를 좀 구하려고요.” “무슨 아르바이트인지 물어봐도 돼요?” “학교 앞 스타벅스 아시죠? 아니, 모르시겠구나. 거기서 5시부터 11시까지 알바 하구요. 화요일부터 토요일에는 아침 9시부터 2시까지 어린이집에서 보조 선생님으로 일해요. 지난주 화요일 아침에는 일어나기 너무 힘들었어요. 일주일에 하루니까 괜찮겠지 했는데, 월요일 하루 수업 더 듣는 것이 이렇게 힘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어요. 읽어야 할 책 분량도 장난 아니고, 교수님들마다 과제물이 너무 많아요. 계속 약을 먹고는 있는데 지난주에 걸린 몸살감기가 아직도 안 났네요.” 시간을 대충 계산해보니 그녀는 하루에 무려 11시간이나 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삶의 고단함이 묻어났다. “대학원 공부 이거 장난 아니에요. 그렇게 계속 하다간 몸이 견디질 못할 걸요? 공부도 시작했으니 알바를 하나로 줄여야 하지 않을까요?” “호호. 저는 알바를 하나 더 늘려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는걸요.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으니까, 그 학비까지 벌려면 앞으로 알바를 세 개는 뛰어야 돼요.” 아르바이트를 세 개씩이나? 이렇게 열심히 사는 친구도 있었다. 그녀에 비하면 나는 부모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 하면서 일찍 조기 유학의 혜택도 보고 이 수업도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다니면서 학비만 축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가 너무 안일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우리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학비는 부모님께 좀 도와달라고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막 이야기를 꺼내려는 순간,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이야기가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곧이어 교수님이 들어 오셨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교수님! 그런데 성경에 보면 많은 리더들이 교수님께서 방금 전에 말씀하신 이러한 자질들을 갖고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리더들로 세워진 사례가 많습니다. 삼손이나 많은 사사들은 인격적으로 흠이 많고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리더로 세우셨지 않습니까? 즉 그들에게 선천적으로 또는 후천적으로 어떤 리더로서의 자질이 있어서 리더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자격이 없는데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께서 리더로 선택하신 경우들도 많이 있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