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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동학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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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 스크랩 동학군 전봉준 탄생설화 허장군. 홍길동역사 모방
추연창 (淵庵) 추천 0 조회 190 14.06.09 15: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동학군 전봉준 탄생설화  허장군. 홍길동역사 모방

동학 전봉준 옹동면 탄생신화 를  김일성 탄생지로  1950년 6.25 남침시  고처서  교육시켜

민주당이 버린 전라도 무소속 재선의원 유성엽 .이석연,고향  옹동면의 역사이야기(4)

 

 

 

산성리 우동마을  전씨의 묘역  왼쪽에 잔디에  작은 봉분 보이는데  전봉준 장군의 유골을 암매장하였다 함

                                  이곳 산 골짜기 배미골과 시양골에 동학군 갑옷을 묻고 이곳에 전장군의 유골을 묻었다는  전설묘

 

 

 

동학군은  이처럼 처형하여  목을 메달아 전시하고 나서   후에 두골을  지게에 지고   버리려 간다

이를 보고 동학군 잔병이  전장군 유골을  숨겨와 매장했다고도 전한다

 

김유신이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치로 가는데 옹동산성 에서  백제군이 항거하는 기록문

<백제(百濟)의 잔적(殘賊)이 옹산성(瓮山城)에 모여 주둔하며 길을 막는데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에 유신(庾信)이 병사들을 앞세워 나아가 성을 포위하여 사람을 시켜 성아래 가까이 보내어 적장(賊將)에게 말하기를 "네 나라가 공손치 않아 대국의 토평됨에 이르렀다. 순명(順命)하는 자는 상(賞)주고 불순명(不順命)하는 자는 주륙을 당할 것이다. 지금 너히가 홀로 외딴 성을 지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 것이냐? 그치고 땅으로 내려와 성문을 열고 항복함만 못하다. 이는 목숨을 보존할 뿐 아니라 부귀(富貴)를 기약할 수 있느니라"라 하였다. 적(賊)이 이에 큰 소리로 말하기를 "비록 초라한 성이나 병기와 식량이 이미 구족되었다. 사졸들은 의기와 용맹하다. 죽기로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서 항복하지 않으리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살아나간 허세신 부족  걸시비우가  당나라 에서 허국공으로 그 용맹으로  당나라 에서 그부족  종소경의 허씨부인 이 당현종의 구테타에  성공시켜  후손 허기 장군이 당현종의 태자 숙종의 황제 찬탈에 반기 신라 경덕왕때  동방예의지국 성왕으로 신라의 마을을 군현으로  당과 동등하게 승격   장보고에서 최치원으로 이어진 후백제 세력 구성되어  고려 왕건의 사위로 허사문이  태인허씨로 금산사 - 태산태수로 사실상 할거 세력이엿다

글안군  고려현종 나주 피난시 왕림 마을에서  현종의 왕비를 허사문의 외손녀로 2을 갈아 이후에 태인허씨 족  이한 이자겸 이의방 으로   최충헌 정권을  물리친 원종에게 정권을 되찾아준 이장용이  고려 충신 정몽주  두문동의 허중민으로 이어지나  이성계와 아들 이방원이  구테타에  모두 태산 세력 이화 등을 이용하고  그 태산 세력을  두려워하여 태산군을 없애고  들판에  태인현으로   이주시킨다

그러나 세종대왕이 권채 최항 안지 황희등  이곳사람으로 한글 창조와 국악을  부흥하려 하자 최만리 박연이 중국맹종 문화로 고수하였다

이를 보고 자라나는 수양대군이  어린 왕자시절 이곳에서  근빈박씨와 동거 가야금 계면조를 배우고 이곳  송씨 친구 송현수의  누이는 제수 딸은 단종왕비로 결맹하여 구테타에 성공 국악과 한글의 대부흥을 시켰다

 세조대왕은 도원군 세자 (산외 도원마을  출생 )를  옹동거주자  최항  안지    산외면 민하동 거주 유자광  송현수 조카 이구  신숙주 아들 신면등으로 내각을 구성하여 주었으나 명나라 후궁한씨 족 한명회 세력의 조작으로  예종을 독살 신면을 저격시켜  인수대비 명나라 세력 대명률로 살인 통치하여 태산 세력은  유자광이 악학괘범을 만들고 연산군을  음악부흥 왕으로  한류예술 역사를 이어왔다

그러나 유자광이  중종반정에 이용당하고  숙청되었다

성종때 유자광을  숙청하려 유배되어  유자광이   부산 동래 기장군 철마면 유배지  에서도   국방을 상소를 올려 외치고 서민 도공에게도   한글을 가르친 동래정씨 백성들이  유자광을  따라서  옹동면 상두산 속 닥배미 마을에서  동래정씨 집성 종주 마을로   유자광의  국방 전투기술은 정여립에 계승되고  정여립파 전라도 선비가 이곳에서  이일제 제자로   송상현이 살아 남아서  임진난에   최전방 적지에  동래부사 이곳사람 송상현이 동래부사로  사지에 달려가서  전사했다 전봉준  조상 천안전씨 전덕린  .백광현  최응립 이시지 권극평 장군이 임진난 의병장으로   선조왕을  구하여 호종하고 용인과 평양에서 전사했다  

그공으로   정읍군 옹동면 닥배미  모충사에 모셔저있다

그래서 이곳 출신 영조왕의 모친  '동이' 즉 숙종의 후궁 최상궁은  장희빈을 제거하고 1702년 모충사를 상두산 닥배미 마을에 세워 전덕린 .백광현  최응립을 모시게 했다

이러한 정읍군 옹동면 한글 창조자 후손 최씨 최상궁 아들 영조, 정조대왕이  이런 내용을 알고 세워준  닥배미  모충사를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로  없앴다

 대원군이 대대로 전해온 고려-조선왕족역사서를 읽어 알고있기에 깨닫고  염치없이도   1894년  정권을 민비에게 빼았기고  닥배미마을 이웃 산외 지금실 전봉준 김개남에  접근하여  동학의병이 일어나   대원군을 살린다

임진난에   대공을 세운  유자광과 정여립계 호남  용사는  소멸되고  덕수이씨  이율곡  사촌조부  이행 이기 가  송사련 송익필 부자를 간첩으로  증거조작  조광조 안당 안처겸 정여립에 역모조작으로  전라도 능력자는 거의 숙청했다

그래서 덕수이씨 이순신 마을 삽교천에  살던 송익필과 그제자 김장생의  글을 근거로 이순신과 이율곡 신사임당  국사 우상화  교과서 100년이 되었다

 

 

 

 

 

 

 전봉준의 후처, 사위 전주이씨  전처 송씨 선산(정읍 옹동면 비봉산)에    천안전씨 전장군의 묘비가 있다     묘 위는 김개남장군의  선산땅 아래는 전봉준전처 송씨의 선산땅  이마을 거주 송씨 송기준이 관리하다가   2000년대 부터 전주이씨이재식 가문에서 관리 모두 전봉준의 두 처가 가문이 관리했다

1905년  

 

 유성엽은 모충사에 모신  임진난 의병장 전덕린 백광현 권극평의 산성리 마을이며 정읍 옹동면 농악대 권오채와 한마을 사람이다 

 

유성엽의 증조 할머니 전주이씨는 " 지금실댁"이라고 부르는데 1894년 동학군 김개남장군 마을에서 살앗다

산성리 전봉준이   산외면 지금실 김개남 마을에 자주왕래 하여  혼인하게되엇다고 한다

동학군 대장 전봉준은 유성엽 이웃마을 산성리 산성굴 우동마을 약방산에서 한약방을 하는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마을은 태인현 남창(南倉庫)터로 천안전씨 문중묘역은  '노탄산성'전시 예비군량창(豫備軍糧倉)으로 전씨 집성촌으로 부유한 세력이엿다

철종왕비 조대비 세력이 득세 부임한 태인현감 조순규가 남창(노탄산성) 창고 관리자로 보이는 전창혁에게 상납이 부족하다하여 구타하여 죽엿다

이를 본 아들 전봉준이 영원면 감곡면등으로 찾아 글을 배우고 억울함을 대원군에게 찾아가서 호소했다

그러나 대원군도 며느리와 조대비의 합세 공격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대원군이 털려나서 대원군이 전라도 전봉준의 손을 잡는다

재집권을  하려고 시도한다

그래서  태인현 최고의 세력 도강김씨로    산외면 지금실마을 김개남 친구를 찾아간다

그때에 김개남은  산외면 정냥굴 마을에서 서당훈장을 하며 한문글을 가르친다

여기 정냥굴에서 전봉준이 김개남의   중매로 여산송씨와  결혼한 전봉준 처가집 마을이다

그러나 상처하여   아래마을 들징이 마을   전주이씨 후처와   재혼하여    옹동면과  원평 산외 산내면에 주로 살앗다

이 마을에서 정월 줄다리기 굿이 엄청나게  큰행사로 열리는데  그 줄굿 행사하는    산외면과 옹동면 청년 들에게  대원군의 배경으로 소집하여 1894년 1  밤밥 지어 먹여 걸어서   이평면 이평장에 모여  성토하고  고부관아를 습격햇다

그래서 동학군은 원평 태인전투에서 완패   정읍군 옹동면 산성리 배미골(수자원공사 터)와 비봉리 삼거리 시양산에 갑옷을 뭍고  빗재를 넘어 산외  산내 에 은신 햇다  김개남이 산내종성 산성에서 있다는 연락에 만나려다  모두 채포되엇다

 그러나 한일합방이되자 

강력한 전봉준이 아닌 항복한 강증산의 부하   차경석을 조선황제(차천자)로  종교로 인정 만주국의 부의황제와 같이 이용하려 했으나  차경석이 농악으로 독립군자금을   보내려다  발각되어  강제 철거 당했다    

그래서 옹동면 산성리 산성골 이름  우동(소골) 이름으로  일제가 이곳 전봉준 마을을 옹동면 공동묘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곳에 사는 노인 이백돌과 한씨 고부양반 그리고  이곳 전봉준(전장군) 문중묘를 관리하는 권치도 노인 1960년대 80대 나이 노인과  

유성엽 증조할머니 처녀시절  전봉준, 김개남이야기를 1957년 필자에게 들려주어 정리하여 적어본다

 

 

 전봉준 가문 옹동면 탄생 이야기

 

전봉준  조상 천안전씨 전덕린 장군이 임진난 의병장으로   선조왕을  구하여 호종하고 그공으로   정읍군 옹동면 유성엽마을 모충사에 모셔저있다

그래서 이곳 출신 영조왕의 모친  '동이' 즉 숙종의 후궁 최상궁은 장희빈을 제거하고 1702년 모충사를 세워 전덕린 .백광현  최응립을 모시게 했다

 

유자광. 정여립의 무술계보로서 임진 병자 국난의 호남의병 공적을 매장하여  최숙빈이 1701년 장희빈을 제거한 해에야  전덕린

최응립 백광현등을 옹동면에 세우고 전씨 최씨 백씨 권씨등 의병장 후손이 정착하여 사는  산성리 모충사 전경 

 

한글 용비어천가를 지은을  최항의 후손으로  옹동면 갈미마을에 사는  최응립이 영조의 모친의 친족임이 분명하다

태인현 대각다리는  백암리 박인걸이 만든   피동물 다리에서  갈미 최응립  후손 미녀를  민유중이  데려가서 미인 장희빈을  미녀 최상궁이  왕비를 차지 영조를 낳고 고향인  태인출신 전덕린 최응립등 호남의병의 모충사 사당을 세운다 

민유중의 후손이 대원군과 고종왕의 처가족이며  옹동과  칠보 검단 민씨 친족이기에  민유중은  옹동 피동몰  다리를 건너다 갈미 최씨 예쁜 미여아를 만나 민유중이 수양딸로 삼아  미녀 왕비 장희빈의  공격에  딸대신 숙종의 마음에 들어  왕후가되어 영조를 낳았다 

 

최응립(崔應立:1599∼1637):관 삭령(朔寧),이괄의 란 백함생(白咸生)과 창의하여 전공(戰功)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때 강화 싸움에서 순절했다

덕수이씨  이행 이기 이율곡 세력이  대를이어 전라도  유관(유성엽의원 조상), 안당,  정여립을 숙청하여 전덕린 백함생 최응립등 국방공신을 기록을  삭제하여 버린것을 숙종후궁  최상궁이 영조왕을 낳아서야  숙종이 전덕린 등 호남의병의 모충사 사당을 세우는데

.백광현 백함생  가문으로  대대로 이곳의 무술 훈련을 정조왕이 전주대사습대회 근본으로 이어진다 

전봉준의 할머니는 김병로 김성수와 같은 순창 울산(경주)김씨이며   전봉준 어머니는 광산김씨 집성촌으로 산내면 능교리 소금실인데 이곳에 본처 송씨와 할머니 김씨 묘와 어머니 고향이였다

전봉준 재판의 기록문에서  나온 산외면 거주지등 연고지 내용이 일치하는 기록이다

전봉준이 순창 피노리와 정읍산내면  묘덕산은 김병로 김성수 조상묘지 선산이다

 

고창 .순창. 고부지역이  아전인수적. 쟁탈전만 벌이고  역사 고증이 희박하기에  일본에 넘어간 한국을  구해낸  김병로 김성수  가문이 

전봉준과 인척으로  조병갑 가문의 행패에 할머니 친족 김병로 아버지 사간원정언 김상희를 찾아가고  거기서 대원군의 협조를 부탁하여

전라도 무력 전봉준과   대원군이 친교를 이루어 ?다 

 망해버린 조선을  김병로 김성수 신익희 조만식 이시영등이 3.1운동과 임시정부의 기본이 된다

 

전봉준 옹동면 노탄산성 탄생설화

 전봉준 아버지 전창혁이 한약방을 하다 조병갑 부친 조규순 태인현감이  매질하여 죽인 약방산  소나무 아래 집터 전경

 

노탄산성 절터에서  어떤 여자가  홀로 아기를 낳아서  안고 걸어서 산 아래에 있는  새터(우동)마을 한복수씨  집으로 들어가서  산모가 척국밥을 얻어 먹고 걸어서   나갔다 이이가 전봉준 어머니 광산김씨 란다

마을앞  당산 앞길을 지나려니 1000년 수령의거목  마을당산나무가  저절로  쪼개저서  움막집이 되어 전봉준이 탄생기거했다는  유적  전설이 있었다

1950년 김일성이  6.25 남침으로  3개월간 통치하면서  매일밤 마을에서 공산당 교육을 하였다 

어느날 평양에서 온  고위 공산교육간부가 옹동면 사람 전북도당위원 김호금 권호성의 안내로  찾아와서 옹동면 노탄산성산 아래  전봉준장군 탄생설화를  비교  단군성조 탄생설화 "마늘하고 쑥하고 먹어서" 라고말하며   이야기한 김일성 우상화 교육하던 밤을 기억한다 

그리고 나서 옹동면 공산당이 전장군을 김일성 장군탄생으로  유포시켰다

현시대  박정희 전두환에서  김대중 노무현까지 전봉준 정신 후계자 이미지로  정치화 선전하엿다

 

이곳 우동마을에는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한약방이 있는 산을 약방산이 있고   조병갑 부친 태인현감 조순규가  사람을 시켜 이마을

조씨 집만 빼고 모두를  산골짜기에 한집씩 씩 불러내어 사람을   꺼꾸로 메달아  몽둥이로 구타하여  요구하는 만족 돈 액수가 나올때 까지 때려서  이때에   전창혁은 죽었다고 이백돌(1890-) 옹이 나에게 전했다 

 전봉준이 모신 조상 문묘  이 지역산을 '역적'의 묘역으로  일제가 전씨 토지를 압류하여 옹동면 공동묘지로  만들어서 이곳 마을 호족 권치도 세력으로 전씨의 묘를 비밀보호 관리하며 한약의술 기능은 백암리 새울 전씨한약방이 전창혁 의술을  최근까지 계승하였다

 

 

이마을 전봉준 동학군 천안전씨 마을은 후에  몰수되어  공동묘지가 되었고   동학군 패잔병이  갑옷을 이마을 우물에 묻고 전봉준의 묘를 산성아래 전씨 조상묘 에 평장(봉분없이 묻는묘)하여  전봉준 재림의 날을 기원하여 전장군의 묘라고   칠보면 백암리 전씨들이 제사를 지내었는데 

 이 전설은 1906년에는  임병찬 최익현  양반계급 의병이 너무 무력하자  다시 정부에서 전봉준 잔존 세력을 규합하기 위하여 역적으로 처형된  항일 규합 선전용으로 전봉준을 '장군천안전씨지묘'라고 비를  전봉준의 후처  전주이씨 산에  또하나의 묘를 만들기도 했다

 

(전봉준의 묘는  역적이기에 숨기려고  1동곡마을과 2산성리 우동, 3비봉산 이씨산,등 세곳에 암장하였는데  동곡리 묘를 정치가 임광순이 제주가 되어  파묘하여 기와장 두장이 나와서 1974년 정읍덕천면 전봉준기념관에 이장했다)

 

 

이처럼 전봉준 장군 전설신화는   이곳  손오공 학바위 전설과  태인허씨 시조 허기장군(칠보면  장군봉)신화를  너디마을 홍길동 전설을 그대로  전봉준의 재림하여   이곳 사람 허장군과 홍길동 처럼  나타나서 천하평정을 기원하는  전통적 설화이다

이 전봉준 신화를  강증산교 차경석 차천자교 원불교 에서 그리고 1950년 6.25 공산치하에서  옹동면 공산당 당 3개월 김일성 탄생지로 위장 교육으로   산성마을 교육장에서  주민 학생에게 유포하게 하였고   후에   김일성 우상화정책에서  노탄 우동산을  백두산 탄생지로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에 서울 종로3가 역앞  전주식당에서 모인 전봉준 탄생전설을 이야기하였던  서울거주 산성리 사람들

 

남한에서 유일한 김일성 탄생지는  전봉준 탄생지를  신격화 전설로 우상화 조한 이야기 뿐이다

1907년이후는 사실상  조선운명은 6.25 남침시대 부산 정부처럼 1906년은  청나라 러시아 미국도 떠나서 오로지 전봉준장군이 홍길동처럼 나타나  정읍 지역의 의병 모집에 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2013년  오늘 북한의 위협에 미국만 오로지 바라보는 한국과 같은 역사이다

이  무력한 말뿐인 최익현의병을 본  청년 김병로  김성수 김씨가 선교사에서 배워 신익희 장덕수 백관수등이  무지해서 망한조선 조국에서  동경유학으로  1919 년 삼일운동과  조국광복의  길을 열엇다 이것이 우리선배 조상동경유학생 들의 애국정신이엿다  

 

 

그리고  동학군 전봉준의 부하로서 항복한  강증산과  차경석은 종교와  자금모금 농악 걸굿을 하고  전해산 이용구등이 독립군으로   

활동한다

동학군 강증산은 공주전투에 따라가다가  점을처보고 실패를 예상하고  여산역에서 후퇴하여  정읍 칠보면 백암리  전봉준 천안전씨

 집성촌에 강증산교당을 짓고  차경석은 입암면에 보천교당을 지어 전봉준을 신으로 섬기다가 차경석을 조선 황제라는 의미로  차천자교

집성촌에 강증산교당을 짓고 차경석은 입암면에 보천교당을 지어 전봉준을 신으로 섬기다가 차경석을 조선 황제라는 의미로 차천자교당(車天子敎)을지어 전국의 600만 신도를 모아 농악을 가르치고 걸궁 독립군 자금을 모금했다

여기에1922년 정읍 내장사 여자 스님 윤세만이 불교농악대를 인솔하여 독립자금을 모아서 김도삼  북면한다리 농악대, 칠보산 보림사농악대에서 모은 돈을 만주독립군 이시영에게 보내?다

전봉준을  태인(산외),고창, 부안, 순창, 정읍,서로 자기 고향사람이라고 전봉준 기념관에 대 경쟁 건축 축제시대다

 

전봉준은 고창 고부보다 순창 피노리 피체지와 태인현 옹동. 산외. 산내.의  의병이 중심세력이라서  그 일본  재판판결자료가  전봉준 생활지라는 신빙성이 더 있다

전봉준 어머니 정읍군 제일다수  광산김씨 집성지역 산내면 소금실은 60년대 광산김씨  김광효가 정읍광산김씨 표로 당선가능하여 국회의원을 출마한 지역이였다

또한   김병로가문과  피노리, 단종왕비 송씨가문 전주이씨 등 두처의  처가 집성촌 조모 모친 두처의 가문세력이 대단한 태인현에 대원군이 구테타를  시도를 부탁하였다

전봉준을 이용한 지역감정 전투 정치판의  승자의 현시대 이제는  전봉준 동학군을 제멋대로   꾸며 선전하여 민주주의 창시자로  자기가 전봉준으로 여  선전보다 현장역사를 확실히  연구하자

 

 

 

           전주에서 순창. 광주로 가는 조선시대 국도 가룻재 성황당 고개길 길가에 전봉준 부친 전창혁  우동마을 약방산 집터

 

전봉준처럼  권력을 버리고 애국 만을  외치다 간 사람을, 능력 있는력자를   골라라 

 권력사욕이 없는 전봉준의  애국 의병은  고종왕 명으로 자진 해산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을 들여와 동학군 참여자를 처형하여 버렸다

 이것이 백제에서 전봉준까지의 호남역사이다

그 일본의 야심으로  민비시해와 나라가 1906년 일본에 넘어가자  그제야 동학군을 숙청한 민비세력 최익현이 대원군을 찾아와서  애국을 내세워 다시 태인현 전봉준세력을 규합하려고 태인현감으로  홍범식을 보내어 구국의병을 외친다

 

최익현을 부른 양반 선비는  싸움도 못하고 항복해 버린다 

동학군 전봉준을 죽이고  청나라와 러시아 마저 도망하자   오직 전라도 전봉준의 재림기원 같은  함성으로 외치며  전봉준 신앙이 일제하에서  동학군 부하 강증산,차경석 보천교(차천자교) 원불교등의 종교로 발전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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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옹동면 역사  참고자료

 

 

정읍군 옹동면은 고려 충열왕 시대 시무비시대와  1948 나용균의원 시대 처럼 한국 최고의 문화를 누리는 시대를 기대한다

정읍군 옹동면은 고려시대 충열왕을 구타한 왕비 몽고공주를 배격ㅎ 독살한 시무비 태산군 옹동면 능향시씨 고향이다

 충열왕의 애첩 시씨 무비 능향시씨는  옹동면 능향마을이며  산성재 정상 산성성은 '능성' 즉 능성골로 불럿다

 옹동면 능향, 능향시씨 시무비(충열왕애첩)가 몽고 공주를 독살시키고  이후에 이곳 주민 세력이 몽고 쿠빌라이 황제 황후로  기황후가 들어간다

이런 세력이 옹동면 능향 출신 미녀  태산군 능양시씨의 힘으로   능향  능성산성이 능향마을 앞산 산성아래 유성엽 마을이다

 

세종대왕 승지 권채, 그리고 한글 용비어천가 작자 최항, 안지,

임진난 의병의 스승 정여립이 친족 거주지 상두산 옹동면  닥배미 마을

임진난 조선왕조실록을 구출한 안의, 진주성과 용인전투 3의병장  모충사

호남의 여사당 지강내 농악단패 연고지

 

 

옹동면 능향   충열왕비 몽고공주를  배척한 태인시씨 본관 마을

 

2011년 서울시장보궐선거 후보에  정읍 옹동면 촌사람 이석연을 버리고  한나라당  측근 나경원의원을  내 세워  민주당 박원순에게 넘어갔다

6.25학살의 현장에서 태어나 가장가난한 민중운동의 청렴한 대변자  이석연을 버리고 귀족형 나경원을  공천했지만 서울시민이 거부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후보에 고건  전 서울 시장이 여론조사에서 이명박보다  우세하였어도  자기측근 정동영을 세워 참패하고 지금   정동영은  국회의원도 아니다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민주당후보에 고건  전 서울 시장이 당선 여론조사가   김대중 안철수 처럼 월등한 1위로  전국의 지지를 받았다

  옹동면 촌사람 유성엽의원을 민주당에서 입당조차 거부한 호남유일의 무소속 재선 기적의 중견의원이다

유성엽은 정읍시장 당선까지 합하면 3선의원 중견의원과 같다

 

민주당 천국 전라도에서  두번이나  무소속 당선 유성엽의원

2007년 고건이  대통령 후보  1등 여론조사시에 고건은  대권에 당선하면 옹동면 촌사람 유성엽을  중용하려 했다

전라도 교육을 망치고  뺑소니친 부패 전북교유감의 친형도 민주당 공천주어도  지역감전만 외치면 당선되는  곳  유성엽은 철저히 무소속 당선도 막았다  

초중고 수업경험도 없는자를 교육감으로 당선시켜 전국꼴치 전라도 교육에 다투어 떠나려고 한다

 민주당 입당에서  그 토록  무참히 배격당한 유성엽이 이제  민주당 문재인 대통령 후보 전라도 유세에  가장 강하게 돕고 있다

'죽이려고한 서모에 대한 순임금 효성 이야기'

'아비가 자식을 버린  당금애기 효도이야기'

 

이와 같은 현실이  아인 전설속에나 잇는  순임금과 당금애기 같이  지금 전라도에  유성엽 의원 민주당 돕기로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여야 공천 혜택으로 은헤를 입은  현역의원도   뒷짐지고 바라만 보고  있는자가 많은 데도   무소속으로 호남유일의  재선의원에 당선되엇어도  선거에 임박해서야  안철수에 손벌리면서  간신히 입당햇다 

민주당이 그토록 막아도 두번이나 무소속으로 당선된 유성엽의원이다

유네스코 한국민요 아리랑가사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이를 두고 말햇나 보다

MB 보다 가난해서  숙부가  데려다 가르친 가난뱅이  

흔한   중학교도  없는  정읍군 옹동면사람은   태인면이나.칠보면 학교로  타향 통학의  왕따 고난!!  이석연  유성엽은  정치에서도 왕따  버려진 것이다

 유성엽의원 모교 페교된  옹동면 산성초등학교  

 그래서 옹동면 사람은 부끄러워서  정읍 , 전주에 가서는  태인면 칠보면 사람이라고들 거짓 말해야  인정 했었다

6.25학살과 왕따의 옹동면 고향    유성엽은  효자 순임금 효도처럼 오늘도  대통령 유세전에 목이 쉬어도 외친다

그래서  서울대 동문에서도  미래 대선 후보 인재로  보고 있다고도  말도 들린다

김대중 김영삼 박정희 모두 섬이나 산골인것으로 보아   옹동면 사람  정치계 여야에서 버린 이석연  유성엽 양심의 이미지 시대가

 오리라고 말 들을 한다 

 

거짓말 경쟁 서로 욕설하는 시대는 미디어 발전으로 이제는 마감한다

임진왜란에 옹동면 산성리  의병장 권극평이   진주성에서  농악소리로 신호하였고

조선왕조 실록을 임진난 풍파속에 유일하게 구해내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재에 등재한  옹동면사람 안의 였다

미국 군정청 통치시대 1947  세계음악수준을 보아온  옥스포드 대학출신 나용균 정읍국회의원이  2000년 역사 백제가요 정읍사 멜로디 농악으로  국가대표격으로 옹동면  농악 공연했다

1947 제주도 4.3 반란사건 제주국민위안 공연단으로  그 당시 소리를   정읍 옹동면 유성엽마을 농악대는   권오채 박판쇠 전광문의 구술로  재 구성한 그 소리를 1977년에야  칠보중악교에서  재현하였다

   2005년  유성엽이 정읍시장이되어  백제가요 정읍을 관현악 연주를 강력 계승과 연주 지시했으나  겨우 한번 연주하고  유성엽시장이 물러나고  지금껏  그곡 정읍곡 연주는 없다 

 

 옹동면 사람  유성엽 정읍시장이   2005년 문화국장  경질로야 겨우 한번 공연한  정읍 공연자료

 

8.15 해방후 미군통치 최초로 시행한 위문공연단 옹동면 농악대 제주도 4.3 전투현지  공연한

박판쇠 문기수 최덕암 권오채 등 농악수들이 활동햇다

이농악을 1961 서울대음대 정회갑 교수가 녹음하여  김양곤교수가 무용곡으로 무용교과서 책을 만들어 냇다

백제가요 정읍사 멜러디로 정읍농악이 성행 제주도 위문공연을  이런 음악 태평소소리 엿는데

그 농악단이 서울시장 후보에 오른 가난한 집  이석연 고향!! 옹동면농악대 그 소리 동영상이다

백제가요 멜러디의 반주리듬이 정읍옹동농악에 이런소리로 남아잇었다

 

 

 

정읍시 옹동면   산성리 서낭당  고개   '약방산'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이 한약방을 하였던 곳

 

1950년  6.25 전투시절 양민 학살 등으로 생존의 길은 법관 뿐이라고 부모는 생각햇다

그래서 주민은 누구나 자식들에게 법관이 목표 그래서 전북에서  면단위 최다수 법관배출이 옹동면이라고 한다

 

현재 지방법원 정읍지원 법원장도 옹동면 옷밭골  권씨 출신 권혁중판사이다

지금도 정읍 옹동면에는 중학교도 없는곳, 사법고시 도내 최다1위 합격율 고수한 옹동면의 슬픈역사

옹동면 북부지역은 태인중학으로 남부지역은 칠보중학으로 원거리통학 언제나 이들 텃세 폭력에 시달리며 살았고

이석연은 태인 중학교도 아닌 고입검정고시를 합격 해야하는 "고등공민학교'를 다닌 MB보다도 더 가난한 산골아이였다

 

 

여기서 이듬해 옹동면 사람 권정연이 제주도 제1훈련소 전투 운전병으로 위문활동을 하여 그 농악을 보고 저런 멜로디 피리소리가

울리는 농악치는 마을에서 살고 싶어서 지금의 K_POP에 매료되어 있듯이  1953년  미모의 제주여고생이 권정연에게 무작정 따라 달려 와서 옹동면에서 살았다

필자가 보아도 그 당시 여고생이 옹동면에는 하나도 없는데  그녀는 잘생긴 8등신체격 제주도 처녀로 지금은 부천에서 할머니로 산다고하였다

그리고 제주사람 마부 박언영 일가족등이 말과 마차를 가지고 이 농악에 매료되어 옹동면으로 이사 와서 살앗다

미국이 제주도 4.3 반란군 위급한 시기에 서양식 국민음악 위안팀으로 찾아내 가장 뛰어난 멜로디가 유창한 한국고유농악 옹동면 농악이였다

그런 한국예술이 지금도 고령에 계승되어 이런 소리로 옹동면과 원촌 민속마을 무성서원에서 멜로디를 이어간

판소리 옹동면 청년 왕기철 왕기수 3형제가 서울로 가서 판소리 중심축을 잇고 잇다

 

 

권희덕 notany35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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