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 수필)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설경 김영월 인간의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해서 누구나 살 만큼 살고 고종명을 기대할 수 없으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와서 제 수명을 다 못 채우고 아까운 죽음을 맞이하는지 모른다. 이런 예측불허의 위험사회에서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고희라는 인생의 산봉우리에 오르게 됨을 어찌 자축하지 않으랴. 전라남도 함평에서 시골 초등학교 (향교면) 교장 선생님의 8남매 중 나는 넷째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연세 차이가 20년이나 되었고 5.16 군사혁명 조치로 부친의 정년이 갑자기 60세로 앞당겨져 우리 가정은 위기를 맞았다. 퇴직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노후대책이 전혀 없었던 아버님은 직장을 잃고 속수무책인 탓에 아직 학업이 한창 진행 중인 우리 형제자매들은 학비마련이 막연했다. 큰 형님은 대학 재학 중이었고 나머지 형제들은 중고등학교만 마칠 수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결국 이런 형편에 내 바로 위아래 형과 동생이 비관 자살하거나 조현병을 앓아 세상을 일찍 마감했다. 함평 중학교에 다니는 동안 열심히 공부한 탓에 광주고등학교에 진학의 꿈을 이루게 되어 나로선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몰랐다. 명문고교로 알려진 도시 학교에 합격할 수 있는 학생은 시골 중학교에서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그 중에 내가 어떻게 턱걸이로 끼었다고 생각하니 믿기지 않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나는 독서를 좋아했고 일기를 쓰며 생각에 잠긴 채 언제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자살충동도 가졌지만 혼자 가끔 동네 뒷산에 올라 가 기도할 때 괴테나 톨스토이 같은 작가의 꿈을 이루게 해달라고 빌며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 마음을 추스르지 않았나 싶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진로를 선택할 때 문과를 지원해야 하는데 이과를 선택한 것은 약사가 되어 가난에서 벗어나 안정된 생활을 하며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입원서 접수를 하는 시점에서 안과 쪽 신체검사 결과 색약임이 판명되어 약대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할 수없이 문과 쪽 독어 독문학과를 응시했지만 실력 부족으로 실패했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 재수는 생각도 못하고 현실에 쫓겨 그 당시 5급 공무원(현재 9급 해당) 지방직과 국가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두 군데 무난히 합격했다. 지방직 공무원으로서 첫 발령은 목포항에서 여객선을 타고 6시간 이상 걸리는 낙월도 라는 벽지 섬마을이었다. 그 곳 면사무소에서 약 두 달 동안 호적계 일을 하고 있는데 다시 육지로(영광군 백수면) 발령이 났다. 그러나 한 달도 되지 않아 다시 국가 공무원으로 발령을 받은 곳이 문교부 산하 국립 서울대학교 사무직이었다. 비록 서울대 학생 뱃지를 달지 못했지만 역설적으로 교무행정을 담당하는 교직원이 되었다. 서울대에 다니는 고교 동창생들이 수강신청을 하러 올 때 뭔가 착잡하기도 했다. 병역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휴직계를 낸 다음 군복무 중에 서울대부설 한국 방송통신대학교가 설립되어 원서접수를 했더니 행정학과에 합격했다. 제대 후 복직하여 라디오 방송을 통한 2년제 통신대학을 무사히 졸업하고 4년제 야간대학(국제대학. 현 서경대학)에 편입하여 주경야독의 고된 행군을 했다. 어려운 법학공부를 마치고 4년제 학사자격증을 따니 얼마나 가슴이 뿌듯했던가. 향학열을 불태워 대학원 진학도 하고 싶었으나 결혼도 해야 하고 학비 걱정도 만만치 않아 그냥 쉬는 쪽을 택했다. 나의 좌우명인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을 간직한 채 결코 환경을 탓하지 않고 자신의 발전향상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탓에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지 싶다. 이렇듯 대학 졸업장을 어렵게 얻고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되었다. 행정고시를 준비하느냐 마느냐 고민하다가 현재의 말단 행정직을 박차고 나서기엔 주어진 경제적 형편이 쉽지 않았다. 마침 모교 학생과에 들렸더니 은행원 모집 공채가 있다는 얘길 듣고 신분보장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국책은행인 한국주택은행에 응시했다. 합격통보를 받고 공무원에서 은행원으로 막상 직장을 옮긴다는 게 나로선 모험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입행하여 낯선 업무를 익히고 적응하느라 무척 고생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생각으로 잘 참아 낸 것 같았다. 꿈을 간직하면 언젠가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삭막한 숫자와 돈다발 속에 묻혀 살면서도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 결과 1996년도에 한국수필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하고 1997년도에 시 전문 문예지에 시인으로 등단했다. 1998년도 국가적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강제 퇴직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2001년도에 명예퇴직의 길을 택하여 이제 18년째에 이르고 있다. 금융업무가 적성도 맞지 않고 사고의 위험 등에 항상 스트레스도 받는 터에 조기퇴직하고 자유인이 되니 차라리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했는지 모른다. 그 동안 퇴직금과 저축을 통해 절제 있는 생활을 하며 딸은 시집보내고 아들은 3전4기 끝에 마침내 어려운 관세사 시험을 통과하여 해당직종에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 내 고향 함평에서 이웃한 무안 출신인 아내와의 만남은 큰 형님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나의 부족함에도 묵묵히 참고 인생행로를 함께 해 준 아내는 초등학교 교사 출신답게 성실하고 모범적인 성격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신앙심이 돈독하여 교회의 중직자로 여성 리더 역할을 맡고 있다. 53세에 직장을 정리한 후 인생 이모작을 그런대로 아직까지 바람직하게 살아냈다고 여긴다. 보수는 전혀 없지만 사회활동 차원에서 마지막 공직생활이라 여기고 서울 노원구 문화원에서 부원장으로 8년째 봉사했고 문단활동도 왕성하게 펼쳤다. 그 동안 수필집 9권과 시집 8권에 이르는 집필활동과 문단 사회에서 제 18대 한국수필작가회 회장직, 제6대 한국문인협회 도봉구 지부장, 한국수필가협회 감사직을 오래동안 수행했다. 2013년도부터 2018년 현재까지 서울 강남구 시니어 플라자(사회복지관)에서 수필창작 및 자서전쓰기반 지도강사로 봉사하고 있다. 인생 여정을 돌아보면 오직 자신의 의지로 달려온 것 같지만 결국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싶다. 4년 전에 갑자기 심근경색으로 병원 응급실에 실려 가 죽을 고비를 넘긴 탓에 앞으로 여생은 그저 덤이라 여기고 살아간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에 나오는 시처럼 내가 두 갈래 길에서 어떤 한 길을 택하지 못한 후회는 없다. 어쩌면 인생은 전화위복의 묘미가 있는 듯하다. 어린 시절에 가슴에 간직한 꿈의 씨앗은 사라진 듯해도 결국 때가 되면 생명력을 발휘하여 싹이 트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다준다. 중학교 때 영어 문장으로 배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SLOW AND STEADY)라는 한 마디가 나라는 노력형 인간을 만들어 내지 않았나 싶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문학을 사랑하며 인생에 대한 신뢰감 속에서 굳건하게 살아 갈 것이다. *내가 평생 간직한 영어 문장 한 마디 * THE DROP HOLLOWS THE STONE NOT BY ITS FORCE, BUT BY ITS FREQENCY.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은 힘이 아니고 꾸준한 빈도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