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樹谷菴記
수곡암기
龍頭之山, 峙禮北境, 氣雄而勢尊, 其一脈之南來臨溪而止者曰“樹谷”, 以樹1) 而名谷也. 谷之南, 有洞曰“溫溪”, 因溪而呼洞也. 溪山形勢, 拱揖環抱, 其中廓而有容, 可居可耕也.
용두산(龍頭山)2) 이 예안(禮安) 북쪽 경계에 우뚝 솟아있는데 그 기세(氣勢)가 웅장(雄壯)하고 높다. 이 산의 한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내려 온계(溫溪)에 임하여 멈춘 곳이 수곡(樹谷)이니 나무로써 골짜기를 이름 붙인 것이다. 수곡의 남쪽에 있는 동네[洞]가 온계(溫溪)이니 시내로 인(因)하여 동네를 호칭(呼稱)한 것이다. 시내와 산은 그 형세(形勢)가 두 손을 마주잡고 인사하는 듯하며 또 서로 마주하고 껴안는 듯하다. 그 안은 넓고 평평하여 사람들이 거주(居住)할 만하며 농사(農事)지을 수 있다.
始吾先祖自安東來居於洞, 而因葬於谷, 先考及叔父, 皆從葬於是, 三塋六墓, 並考前而妣後, 子孫之居, 列於山之趾焉. 每當拜掃, 具饌於家, 載熟於器而來薦之, 爲其近且便也. 然而於禮有礙, 於事多苟.
처음 우리 선조(先祖)들께서 안동(安東)으로부터 이 동네로 이사하여 사셨으며 돌아가시면 따라서 이 수곡(樹谷)에 장사(葬事)지냈다. 선고(先考) 및 숙부(叔父)도 모두 이곳에 장사지냈다. 세 묘역(墓域)의 여섯 분묘(墳墓)가 모두 고위(考位)가 앞이고 비위(妣位)는 뒤이다. 자손들의 집은 그 산 발치에 줄지어 있다. 성묘(省墓)할 때마다 집에서 음식을 마련하였고 익힌 것은 그릇에 담아 와서 올렸으니 거리가 가깝고 편(便)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禮)에 구애(拘碍)됨이 있고 일에는 구차(苟且)함이 많았다.
*趾[발 지], 礙[거리낄 애]
歲之庚戌, 合族謀議立齋舍, 以供祀事, 蓄穀陶瓦, 令孤山僧雪熙幹其事. 適連歲大侵, 力不能贍.
경술년(1550)에 집안사람들이 ‘재사(齋舍)를 세워서 향사를 받들자’고 모의하였다. 곡물을 모으고 기와 굽는 일을 고산(孤山)의 승려 설희(雪熙)로 하여금 주간(主幹)하게 하였다. 그런데 마침 해마다 큰 흉년이 들어 모두들 재력(財力)이 넉넉하지 못하였다.
*贍[넉넉할 섬]
癸丑, 滉繫官于朝, 我兄寄書云, “度時量力, 今可舉矣.” 滉喜劇而贊成之, 子姪稟兄意, 憑․騫․㝯前後監董, 而完與沖亦間檢事, 經始於二月十三日, 覆瓦於四月十四日.
계축년(1553)에 내가 조정(朝廷)에 벼슬하고 있을 때 우리 형님께서 서한(書翰)을 보내어 이르기를 “때와 재력(財力)을 헤아려보니 지금 착공하는 것이 좋겠다” 하시므로 내가 너무도 즐거워 찬성(贊成)하였다. 자식들과 조카들이 형님의 뜻에 따라 빙(憑) ・ 건(蹇) ・ 교(㝯)가 전후(前後)로 감독(監督)하고 완(完)과 충(沖)3) 또한 간간(間間)이 점검(點檢)하였다. 2월 13일에 일을 시작하여 4월 14일 기와를 올렸다.
*覆[뒤집을 복]:덮을 부
乙卯春, 滉始來歸而覩其制, 則當中南面, 闢五架三間爲堂若序, 以奉祭也. 東偏淨室, 以齊宿也. 其西四間南三間, 以爲僧寮廚竈庫藏之屬, 使僧德淵者守之.
을묘년(1555) 봄에 내가 처음으로 와서 그 지은 제도(制度)를 보니, 재사(齋舍)를 중앙에 앉히고 남향으로 5가(架) 3칸[間]을 열어 당(堂)과 서(序)로 하여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고, 동편의 정실(淨室)은 재숙(齋宿)으로 쓰게 했다. 서쪽의 4칸과 남쪽의 3칸은 승방(僧房) ・ 주방(廚房) ・ 창고(倉庫) 등으로 쓰게 했는데 승려(僧侶) 덕연(德淵)으로 하여금 이를 지키게 하였다.
*覩[볼 도], 寮[벼슬아치 료]:집. 동료. 廚[부억 주]. 주방(廚房). 竈[부억 조]
自是又更三歲, 乃克粗完, 而垣墉塈雘, 猶有待而訖工. 其所以然者, 何也? 家傳儒素, 族多窮約, 滉於中間, 竊祿數年, 而又不能身任其責, 以故營立之難, 累變星霜, 而尙有未備, 是則滉之罪也.
이로부터 또 3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대강 완성하고 담장도 치장(治裝)하였으니 마치 때를 기다려 공사를 마친 것 같았다. 그렇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집안은 유학(儒學)을 전(傳)하고 일가들은 빈곤(貧困)한 자가 많았으며 나는 그간 수년 동안 관직(官職)에 있었고 또 능히 몸소 그 책임을 맡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그 건립이 어려웠으며 여러 해를 지났으나 아직도 미비(未備)함이 있으니 이는 나의 잘못인 것이다.
*垣[담 원], 墍[맥질할 기]:발라서 꾸미다, 雘[진사(辰砂) 확]:질이 좋은 적황색의 찰흙.
抑嘗聞之, 古者宗法大明, 葬於野而祭於廟, 宗子有四時之享, 則羣昭羣穆, 咸得以展誠, 故雖支子不祭, 祭不就墓, 而人情安焉. 至於後世, 宗法壞而祭禮缺, 忽廟崇野之俗有作. 程․朱之興, 述古禮重廟祭, 然而墓祭之法, 載在《家禮》而不廢, 因時損益, 不得已也.
또 일찍이 듣건대 “옛날에는 종법(宗法)이 몹시 밝아 야외(野外)에 장례(葬禮)하고 가묘(家廟)에 제사하여 종자(宗子)가 사시(四時)의 제사를 받들면 여러 자손이 모두 그 정성을 펼 수 있기 때문에 지자(支子)가 제사하지 않고 제사 때에 묘역(墓域)에 나가지 않아도 마음이 편하였다” 하는데, 후세(後世)에 와서는 종법이 무너지고 제례(祭禮)가 결여(缺如)되어 가묘(家廟)의 제사는 소홀히 하고 교외(郊外)의 묘사(墓祀)를 숭상(崇尙)하는 풍속이 유행하였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일어나 고례(古禮)를 이어 가묘의 제사를 중히 여겼다. 그러나 묘제(墓祭)의 예법이 주자(朱子)의 《가례(家禮)》에 실려 있어 없어지지 않았으니 시대에 따라 절충(折衷)하는 것은 부득이 한 일이다.
今我聖朝以孝爲治, 士大夫家, 無不立廟, 蓋髣髴有宗法之遺意, 故唯宗子得祭於廟, 而墓則宗子支子, 皆可以祭也. 古禮未易卒復, 而人情所不能遏, 此今日墓祭之所以盛行也.
지금 우리 조정(朝廷)이 효(孝)로써 다스리는 이념(理念)을 삼아 사대부(士大夫)집이 모두 가묘를 세우니 비슷하게나마 종법의 취지를 유지하기 때문에 오직 종자(宗子)만이 가묘에 제사할 수 있으나 묘사에는 종자(宗子)와 지자(支子)가 모두 제사할 수 있다. 옛날의 예법을 쉽게 갑자기 회복하기 어렵고 인정상 막지 못할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묘사가 성행(盛行)되는 이유이다.
*髣髴(방불). 遏[막을 알]
夫旣祭於野, 則齊戒滌濯, 宜有其所, 釜鼎牀席, 宜有其藏, 典守之人, 又不可無所於寓, 此又齋舍之所以不得不作也. 惟世之爲是者, 或出於佞佛求福之意, 則大不可. 今是菴也. 未免守之以其徒, 故置僧寮, 然堂爲主而寮爲附, 一嚴於奉先之體, 而供薦之事, 未嘗及焉. 則亦何嫌之有哉?
이처럼 이미 교외에서 묘사를 지내게 되었으니 재계(齋戒)하고 세척(洗滌)할 곳이 의당 있어야 하고 가마솥과 자리를 간직할 곳이 의당 있어야 하고 이를 맡아 지키는 사람 또한 거처(居處)할 곳이 없을 수 없다. 이것이 또 재사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오직 세상에서 이 재사를 만드는 것이 혹시라도 부처에 아첨하여 복을 구하는 뜻에서 나온다면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지금 이 수곡암이 승도로 하여금 지키게 하는 것을 면할 수 없기 때문에 승방(僧房)을 설치한 것이다. 그러나 당(堂)을 주(主)로 하고 승방을 부속(附屬)으로 삼아 한결같이 조상을 받드는 의식(儀式)에 엄격하게 하고 공양하는 일은 일찍이 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또한 무슨 혐의(嫌疑)가 있겠는가!
*佞[아첨할 녕], 嫌[싫어할 혐]
嗚呼. 茲菴之制, 樸而簡矣. 雖然, 奉先主於誠敬, 而不貴於物侈, 守業在於繼述, 而每患於終怠. 子孫之於祖考, 履霜露而心愴, 聞風樹而懷悲, 羹墻若見, 如恐失之. 則於斯也不忘其始之不易, 而圖傳於永久者, 爲4)如何哉?
아! 이 수곡암의 규모는 소박(素朴)하며 간소하다. 비록 그러나 조상을 받듦에 정성을 주로 해야지 건물의 사치(奢侈)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가업(家業)을 지키는 것은 계승(繼承)에 달려있는 것이니 종말(終末)에 가서 태만(怠慢)해질까 늘 걱정이다. 자손이 조상에 대하여 서리와 이슬을 밟고는 처창(悽愴)함을 느끼며5) 나무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고는 슬픔을 머금어6) 조상의 모습이 국그릇에 나타나고 담벼락에 보이는 듯7) 간절(懇切)하여 혹시라도 잃을까 두려워한다면 이에 초창(初創)이 쉽지 않음을 잊지 않고 영구히 전할 계책을 도모(圖謀)할 것이다. 마땅히 어찌해야 하겠는가!
《詩》曰 “無念爾祖, 聿修厥德”, 又曰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苟能持是心, 各思樹立, 無貽門戶羞, 則保業守祭之道, 不外於是, 其亦庶乎其可矣.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너의 조상을 잊지 말고 너의 덕행(德行)을 닦아라”8) 하고, 또 이르기를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 너의 부모를 욕되이 말라”9) 하였으니 진실로 능히 이 마음을 가져 각자 수립(樹立)할 것을 생각하며 가문에 수치(羞恥)를 끼치지 않는다면 가업(家業)을 보존하고 제사(祭祀)를 지키는 방법이 이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 또한 거의 가당(可當)하리라.
*聿[붓 율]:드디어. 마침내, 忝[더럽힐 첨], 貽[끼칠 이], 羞[바칠 수]
嘉靖三十六年歲在丁巳春三月晦, 滉記. 〖退溪先生文集卷之四十二〗
가정 36년 정사[1557] 봄 3월 그믐에 황(滉)은 쓴다.
1) 下樹字, 一本作植
2) 용두산(龍頭山) : 경상북도 안동시의 녹전면 매정리에 있는 산. 고도 665m. 이 산을 경계로 녹전면과 도산면이 나뉜다.
3) 이충(李沖) : 송재공(松齋公) 휘 우(堣)의 손자로서, 휘 빙(憑)의 아우이다.
4) 爲, 一本作宜
5) 원문의 ‘상로(霜露)’는 ‘상로지감(霜露之感)’ 혹은 ‘상로지비(霜露之悲)’의 뜻으로, 세월의 변화함에 부모님이나 조상의 생각이 간절하다는 의미이다. 《예기》 〈제의(祭義)〉에 “가을에 서리와 이슬이 내리거든 군자가 그것을 밟아보고 반드시 슬픈 마음이 생기나니, 이는 날이 추워져서 그런 것이 아니다. 또 봄에 비와 이슬이 내려 땅이 축축해지거든 군자가 그것을 밟아보고 반드시 섬뜩하게 두려운 마음이 생겨 마치 죽은 부모를 곧 만날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된다〔霜露旣降, 君子履之, 必有悽愴之心, 非其寒之謂也. 春雨露旣濡, 君子履之, 必有怵惕之心, 如將見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정현(鄭玄)이 해설하기를 “추운 계절이 돌아오자 어버이 생각이 사무치는 것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6) 공자가 주(周)나라 우구에게 슬피 통곡하는 이유를 물으니, “나무가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夫樹欲靜而風不停 子欲養而親不待〕”라고 대답했다고 하며, 이를 풍수지탄이라 한다. 《孔子家語 致思》
7) 갱장(羹墻) : 요 임금이 죽은 뒤에 순 임금이 담장을 대해도 요 임금의 모습이 보이고 국을 대해도 요 임금이 보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늘 사모하는 마음을 말한다.
8) 《시경》 〈문왕(文王)〉에 “너의 조상을 생각하지 않느냐, 그 덕을 닦을지어다. 길이 천명에 짝하는 것이,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는 길이니라〔無念爾祖 聿修厥德 永言配命 自求多福〕”라는 말이 있다.
9) 《시경》 〈소완(小宛)〉에 “내 날로 매진하거든 너도 날로 매진하라.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자서 너를 낳아 주신 분을 욕되게 하지 말라〔我日斯邁 而月斯征 夙興夜寐 無忝爾所生〕” 하였다. 늘 노력하여 부모를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