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배(빌 길버트/류광현 옮김) -08-
그들이 어디서 도망쳐 나왔는지, 그들이 어떤 정보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러나는 그 지역의 지도를 펴보였다. 그들의 반응을 볼 때 북한을 위해 싸워야 할 그들은 모두 징집된 신병들로서 전쟁에 대해 무식하고 왜 싸워야 하며, 그들이 현재 어디에 있는지, 적이 누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러니도 기가 막혔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지도를 펴 보였을 때 그들은 마치 달의 표면을 보는 듯 어리둥절해 하더라고요."
탁월한 작전으로 큰 성공을 거둔 맥아더의 기발한 상륙작전은 전세계의 칭송을 받았다. 그런 기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 대통령은 그의 5성 장군에게 축하의 전문을 보냈다. 그의 전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귀관은 휘하의 전투력을 증강시킬 목적으로 시간 확보를 위해 지연작전을 취하고, 눈부신 작전을 수행하여 서울을 해방시켰는데, 그 검은 전쟁사상(戰爭史上) 유례를 찾기 힘든 전과(戰果)입니다. 참으로 숭고하게 잘 해내셨습니다.
북의 인민군들은 급속도로 전진하는 바이스(vise: 물체를 사이에 넣고 틀어서 죄는 기계: 역자)의 양쪽 날 사이에 끼이고 말았다. 미국과 남한의 연합군은 서울과 38선 방향으로 돌진 작전을 개시했다. 전진로 상의 적군을 모조리 소탕하고 지난 3개월 간에 그들에게 빼앗겼던 모든 것을 되찾고, 서울을 2주 만에 탈환했다.
9월 25일에는 맥아더의 비상한 인천상륙작전 성공 한 방에 전세가 역전되어 기대했던 결과 이상의 작전으로 바뀌었다. 즉, 미국의 합동참모본부는 38선을 넘어 적진 속으로 전투를 확대하라고 명령했다. 트루먼 대통령, 애치슨 국무장관, 새로 임명된 조지 마셜 (George Marshall) 국방장관, 이 세 사람이 북진 작전을 결정하는 데 의견일치를 본 것이다.
전쟁 초기 국면에서 침략군에게 다 빼앗겼던 남한 영토를 탈환한 기세를 몰아 주로 미군으로 형성된 유엔군은 북한 전역을 장악하는 작전을 개시했다.
합동참모본부의 일원으로 복무하고 퇴역한 칼 스파츠(Carl Spaatz) 장군이 한국의 모처(某處)"에서 9월 25일 <뉴스위크>에 기고한 칼럼은 전투 현장의 미군 지휘관들이 승전에 도취되어 있었음을 잘 반영하고 있었다.
스파츠는 예언하기를 "북한군이 스탈린 원수로부터 직접 즉각적인 군사 원조를 받지 못하는 한, 그들의 운명은 시간문제다. 그러한 조속한 도움이 없으면 북의 인민군은 완전히 괴멸될 것이다. 그는 열흘 전의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은 "한국전 종식의 시발점이었다."라고 말했다.
스파츠는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편집인들이 공동으로 서명한 같은 주간지 기사에는 일주일 전의 특보(特報)"를 인용했다. 즉, 미국은 이미 '새로운 한국이 태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한국 전승일'을 'V-K Day' (Victory in Korea)로 정하자"고 UN총회
에 제안을 해놓은 상태였다.
UN군이 북한과 중국 간의 국경선인 압록강을 향해 쾌속으로 전진하는 흥분된 분위기의 와중에 중국이 목소리를 냈다. UN군에 대한 그들의 엄중한 경고는 "들어오지 마라! 국경을 범하지 마라!"였다. 이제는 붉은
중국(Red China)"으로 불릴 만큼 공산당이 중국 본토를 장악하고 나서 1주년을 기념한 중공이 대담해졌다.
UN군이 계속 북진하여 중국 조선 국경에 위협을 가할 경우에는 군사행동으로 응징하겠다"고 경고했다. UN군은 개의치 않고 복진을 계속했다. 막강한 양쪽 군대가 충돌 코스로 치닫고 있었다.
2개월 후, 그 결과로 10만 명에 달하는 공포에 질린 피난민이 화염에 휩쌓인 도시와 마을과 폭격으로 파괴된 집에서 도망쳐 나와 흥남항을 향해 추위에 떨며 위태롭고 예측할 수 없는 끝없는 피난길에 오르게 되었다.
1952년 한국전 참전용사 한 사람은 필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1950년 9월과 10월에 걸쳐 압록강으로 진격하는 과정에 맥아더가 작전상 큰 실수를 범했다.
"그의 부하 장병들 간의 간격을 거의 100미터 씩 떨어지게 만들었고 우리의 군수품이 우리를 전혀 지탱해 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중공군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나팔을 불며 "만세(萬歲)"를 외치며 북한 땅으로 쳐들어 왔지요"
헤이그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중공군 개입이 가져온 대참사는 그 개입 자체가 문제가 아니고 그들이 효과를 노린 전략적 기습을 문제 삼아야 한다. 확장된 포진 형태의 이점을 노리고 아군이 병력을 넓게 배치한 것도 문제였다.
북한 땅 전역에 걸쳐 포진하며 압록강까지 북진한 미 9군단의 경우가 이 사실을 입증했고, 북한 북부지역 오른쪽 측면을 맡은 10군단의 경우가 그랬다.
이 두 군단의 병력이 서로 격리된 위치에 있을 때 중공군의 압도적인 공격 앞에 무너졌다. 미군이 막강한 화력을 집중시킬 전투태세를 갖추기 전에 갑자기 다른 국면에 빠지게 된 것이다."
1995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바하노프 박사는 스탈린은 북한의 급속히 악화된 전세(戰勢)를 본 중공군이 10월 1일까지는 북조선군을 구출하기 위해 참전하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맥아더의 병력이 북한 전역에 걸쳐 인민군을 모조리 소탕할 기세였으므로, 이승만과 UN연합군은 힘을 합쳐서 한국을 하나의 통일국가로 수립할 수 있는 전망이 보였다.
바하노프 박사의 글에 의하면, 스탈린은 10월 1일 모택동과 주은래 수상에게 "귀국 장병들의 보호 아래 북조선 동무들이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최소한 5~6개 사단의 귀국 장병들을 38선 일대로 급파해 주시기를 촉구합니다."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모택동은 그러한 작전은 "소련을 워싱턴과의 전쟁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주장으로 거절하여 크렘린을 놀라게 했다는 것이다.
소련은 이 예기치 못했던 중공의 입장 변화에 놀라서 당황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 부터의 끈질긴 설득과 압력에 굴하여 2주 후에 소련 공군이 중공군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의 대가로 반대를 철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