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는 장자의 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자에게만 부어주시는 특별한 축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허기진 배를 달래기 위해서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습니다. 야곱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반드시 차지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간절히 원했습니다. 사모했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눠지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창25:23b)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호시탐탐 차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집요하게 추구했습니다. 하루는, 사냥에서 돌아온 에서가 무엇이든지 먹지 않으면 당장 쓰러질 정도로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당연히 불쌍히 여겨주어야 마땅했습니다. 불쌍하게 여기기는커녕 드디어 오랫동안 엿보며 기다리고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판단했습니다. 끓이고 있었던 팥죽 한 그릇을 에서 앞에 던지듯 내놓았습니다. 대가로 장자의 권리와 함께 하나님께 축복받을 권리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지나친 제안이었습니다. 에서는 다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장자의 권리와 축복받을 권리가 무슨 소용이겠느냐고 판단했습니다.
자신이 죽게 된다면 어차피 야곱에게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판단했습니다. 야곱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팥죽 한 그릇을 받아들었습니다. 정신없이 먹어치웠습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 세상의 자랑을 손에 움켜쥐기 위하여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너무나 소중한 권리를 너무나 쉽게 내팽개쳐버렸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얼마나 가볍고 또 하찮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서는 설마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와 따라는 축복이 넘어가겠느냐고 생각했었는지도 모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거래가 이루어졌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장자의 권리와 함께 주어지는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물론, 이때도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았습니다. 형은 물론 눈이 어두워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던 아버지까지 기만欺瞞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명백한 범죄를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야곱의 만행을 알게 된 에서는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오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가로챈 야곱을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잃어버린 장자의 권리와 함께 잃어버린 축복까지 보상받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계시는 상황에서는 차마 죽일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만 기다렸습니다. 야곱에 대한 살기殺氣는 말과 행동 속에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이를 눈치 챈 리브가는 은밀하게 야곱을 불러냈습니다.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마음을 달래려고 한다. 그러니...지금 당장 하란에 사시는 내 오빠 라반에게로 가거라. 형의 화가 풀릴 때까지 당분간만 외삼촌과 함께 있어라.”(창27:42b-44)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 예상했었습니다. 벌어지면 자신이 책임지겠다고 말했었습니다.
막상 우려했던 상황이 벌어지자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책임질 수 없었습니다. 리브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그렇습니다. 거기다 리브가는 성급하지만 쉽게 풀리는 기질의 소유자였던 에서가 당장만 그렇지 며칠 지나면 화를 풀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착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삶의 길을 계획하지만 그 계획대로 살 수 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잠16:9)라는 지혜의 선포에 따르면,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결정하십니다. 지시하십니다. 인도하십니다. 그를 위해서 세워놓으신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주십니다.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만 지나고 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그녀의 착각은 결과적으로 이십년이라는 너무나도 긴 세월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 상황을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 주셨습니다. 리브가의 말을 들은 야곱은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엄청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당장 필요한 몇 가지 물건만 겨우 챙겨들었습니다. 뒤도 돌아보지 못한 채 허겁지겁 아버지 집을 떠났습니다. “떠나יָצָא(야챠)”를 직역하면 “밖으로 나가”입니다.
“특정 지역으로부터 나가다, 어떤 사람 앞에서 물러나다.” 등의 뜻입니다. 사역형으로 쓰이게 되면 의미가 달라집니다. “내던지다, 토해내다” 등의 뜻입니다. 자신에게 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오랫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했던 소중한 권리를 지극히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손에 쥐었습니다.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조금도 누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원하는 축복이 있었던 아버지의 집 밖으로 내던져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치 앞도 예측하기 어려운 황량한 광야로 토해내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려 85km에 이르는 길을, 약 삼일에 걸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습니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얼마나 크게 다가왔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파김치가 된 그는 그대로 쓰러졌습니다.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언약과 관계가 없었던 에서는 편안했습니다. 아버지의 막대한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한 그는 험악한 나그네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어디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낯선 땅에 쓰러진 채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자신이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대로 쓰러질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꿈을 꾸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꿈속에 여호와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당신을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28:13a)라고 소개하셨습니다. 여호와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을 부르셨습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셨습니다.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한 번 맺은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네가 누워있는 땅을...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 주기 전까지 너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창28:13b-15)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가 지금 지쳐 쓰러져 자고 있었던 땅을 주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열방이 당신의 복을 받게 하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어디를 가든지 절대로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그가 당신이 허락해 주신 땅으로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떠나지 않고 함께 하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그를 위한 당신의 계획이 완벽하게 다 이루어질 때까지 절대로 떠나지 않고 함께 하겠다고 언약해 주셨습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생각조차도 해보지 못해봤었던 그야말로 엄청난 언약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히13:5b)라는 증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어져 있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결코 버리지 못하십니다.
떠나지 못하십니다. 버린다면 저와 여러분이 버리는 것입니다. 떠난다면 저와 여러분이 떠나는 것입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하나님의 언약이 선포됨과 동시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고백이 이어졌습니다. 야곱은 “여호와께서 분명히 이곳에 (친히 임재 하여 함께) 계시는데 나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이곳은 두려운 곳이다. 이곳은 하나님의 전이다. (이곳은) 하늘의 문이다.”(창28:16b-17)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쳐 쓰러진 채 자고 있던 자신에게 친히 임재 하셔서 함께 동행 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임재 하여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지친 자신이 널브러지듯 쓰러져 있던 바로 그 자리가, 두려워 떨고 있던 바로 그 자리가, 내놓을만한 자랑거리 하나 없는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 성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무수히 많은 벽돌을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쌓아올린 건물이 아닙니다. 제한된 특별한 공간도 아닙니다. 한 번 본 사람들은 누구나 다 환호성을 지를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하고, 거대하며, 아름다울지라도 하나님께서 임재 하여 계시지 않는다면 성전이 아닙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 하셔서 함께 하시는 곳이라고 한다면 어디든지 다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초라하고 구차한 곳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특히, 승천을 앞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마28:20b)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항상πάσας τας ἡμέρας”을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입니다. 장차 주어지게 될 먼 미래는 물론 현재 쉽지 않게 살아내고 있는 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임재는 세상 끝 날까지 이어집니다. 역사의 종말 때까지 이어집니다. 다시는 사망이나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오히려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과 평안과 안식과 쉼은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까지 이어집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라.”(요16:7b)라는 약속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 가운데 임재 하십니다.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고후6:16a),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며, 여러분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십니까?”(고전6:19a)라는 증거에 따르면,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습니다.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께서 친히 임재 하십니다. 영원히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은 어떤 특별한 공간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모셔 들인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킵니다.
공간은 하나님의 성전으로 거듭난 믿음의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정의定義가 달라집니다. 있으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없으면 하나님의 성전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이기적이고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원하는 권리를 손에 넣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누려보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사로잡힌 도망자 신세로 전락해버린 야곱에게 친히 임재 해주셨습니다. 친히 함께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해주셨습니다. 거룩한 성전인 그가 잠들어 있었던 자리 역시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해주셨습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녀로 거듭난 저와 여러분에게도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셔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면 여호와께서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창28:20-22)라는 고백에 따르면, 야곱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큰 위로와 격려를 받았습니다.
큰 꿈과 소망에 부풀었습니다. 천근만근 무거웠던 발걸음은 새털처럼 가벼워졌습니다. 약 20여 일 동안 720Km나 이어졌던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최종적인 목적지였던 하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를 거룩한 성전 삼고 친히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한 순간도 떠나지 않고 함께 동행 하여 주신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다른Another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충만하게 임재 해주시고 함께 동행 해주시는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까?
“내가 비록 그들을 멀리 이방인 가운데로 쫓아내어 여러 나라에 흩었으나 그들이 도달한 나라들에서 내가 잠깐 그들에게 성소가 되리라.”(겔11:16)라는 선포에 따르면, 여호와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을 이방인들이 다스리는 여러 나라로 흩어버리셨습니다. 당신이 여러 나라로 흩어버리신 그들 가운데 친히 임재 해주셨습니다. 그들을 친히 보호해주셨습니다. 그들을 친히 다스려주셨습니다. 친히 그들을 위한 성소 곧 성전이 되어주셨습니다. 잠깐 동안만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땅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에서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모아내고 이스라엘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겔11:17)라고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는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와중에도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을 지켜주셨습니다. 마침내 약속한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이방인인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그때까지 살아남아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 가운데 마음에 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재건해도 좋다는 조서를 내리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날, 성민 이스라엘은 마치 꿈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입은 함박웃음으로 귀까지 찢어져 있었습니다. 혀는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쁘던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동원한다 할지라도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편이 되어 큰일을 해주셨다.”는 외침이 거침없이 쏟아졌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자기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던 날,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기뻤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습니다. 무엇 하나도 부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의 모든 미운 물건과 모든 가증한 것을 제거하여 버릴지라.”(겔11:18)라는 증거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성민 이스라엘은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심에도 불구하고 버리지 못한 채 은밀하게 섬기고 있었던 우상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남김없이 제거했습니다. 불신앙과 못된 습관들을 버렸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누가 시켰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신 은혜가 풍성하게 임하자 저절로 되어졌습니다.
지극히 자발적으로 되어졌습니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되어졌습니다. 성경은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겔11:19)라고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형태의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 하나로 통합된 새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새 영 곧 성령으로 친히 임재 하여 주셨습니다. 돌 같이 딱딱하던 마음을 완전히 제거해 주셨습니다.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부어주셨습니다. 당신이 주신 율법대로 살아내라고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겔11:20a)라는 증거에 따르면, 성민 이스라엘이 율법대로 살아낼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셨습니다. 사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는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온전히 따를 수 없습니다. 온전히 지킬 수 없습니다. 온전히 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간절한 마음으로 원한다 할지라도,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며 수고하고 또 몸부림친다 할지라도 조금도 달라질 수 없습니다. 지극히 무기력합니다. 지극히 무능합니다. 지극히 불가항력적입니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부어주시는 은혜가 임하는 순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여러분을 해방시켰기 때문입니다.”(롬8:1-2)라는 증거대로, 성령께서 충만하게 임하시는 순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속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대로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불가능했었던 일들이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겔11:20b)라는 증거대로,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거듭납니다.
여호와는 성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은 성민 이스라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는 내 안에, 나는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다.”(요14:20)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완벽한 하나로 연합합니다. 영원히 이어집니다. 죽음도 파괴할 수 없습니다. “내가”라는 단어에 주의해야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전체의 주어입니다. 여호와를 가리킵니다. 회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겠다.”라고 의역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라는 증거에 따르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거룩한 희생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 시온, 하나님 나라에 친히 임재 하십니다. 함께 하십니다. 동행하십니다. 거룩한 성전이십니다. 요셉이 빠졌던 물 없는 구덩이에 임재 하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지키고 보호하는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팔린 보디발의 집에 임재 하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지키고 보호하는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더럽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갇힌 옥에 임재 하셨습니다. 함께 하셨습니다. 지키고 보호하는 성전이 되어 주셨습니다. 은혜였습니다. 당장에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도래하자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집트 전국을 실질적으로 다스리는 총리가 되었습니다. 삶의 내용이, 가치가,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해주셨습니다. 낡은 예배당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새 의자가 들어왔습니다.
한 장로는 의자를 하나님을 위해서 거룩하게 구별된 성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조심성 없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흠집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아이들의 출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급기야 교회 학교 예배를 아예 중단시켜버리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보다 예배를 위해 필요한 많은 도구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의자가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성물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전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왜곡되어 있습니다. 성전은 벽돌을 쌓아올린 건물이 아닙니다.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으로 저와 여러분에게 친히 임재 해주십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동행 해주십니다. 지켜주십니다. 보호해주십니다. 인도해주십니다. 찰나의 순간조차도 절대로 떠나지 않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당신을 섬길 때는 물론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문제를 일으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당신의 거룩한 성전으로 구별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일들을 한 가지도 빼놓지 않고 완벽하게 다해주십니다. 은혜를 값없이 선물로 베풀어주십니다.
다른 그 무엇보다 은혜를 구해야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임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거듭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부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모든 일들을 기꺼이 다해 주시는 하나님 한 분만 속으로부터 지극히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뜨거운 마음으로 섬기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