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중국 현대의 '신시기 문학'의 정치적 배경에 대하여
1976년 9월 9일 모택동이 사망하고 같은 해 10월 6일 모택동이 후계자로 지명한 화국봉(华国锋)이 주은래(周恩来)와 가까웠던 엽검영(叶剑英), 이선념(李先念) 등의 도움을 받아 사인방(四人幇)을 전격적으로 체포하여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문화대혁명은 종결되었다. 사인방의 체포 소식에 중국 인민들은 폭발적인 환성으로 화답했고, 거리는 기쁨으로 넘쳤으며, 문혁의 종결을 소리 높여 환영했다. 화국봉은 권력 장악 후에 공산당 안에서 권력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모택동의 후광에 의해 그림자 같은 권력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모택동의 권위를 내세워 '양개범시(两个凡是)'의 구호를 제창했다. '양개범시'란 "모 주석이 결정한 것은 모두 확고히 지켜야 하며, 모 주석의 지시는 모두 변함없이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화국봉이 권력을 장악한 후 직면한 최대의 난제는 등소평의 복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등소평은 화국봉의 '양개범시'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화국봉은 등소평을 복권시키지 않으려 했지만, 당내 유력 인물들의 주장 때문에 결국은 등소평을 정치 일선에 복권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등소평은 권력의 일선에 복귀한 지 얼마 후 화국봉의 '양개범시'가 모택동 사상의 껍데기만을 재탕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모택동 사상의 핵심은 '실사구시'라고 말하면서 국가의 대방침과 발전 전략은 항시 실제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화국봉은 경제 건설과 함께 계급 투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이에 대해 등소평은 노동에 따른 분재 원칙을 강조하고 화국봉의 신약진(新跃进) 경제 정책을 무모한 경제 목표를 설정했다고 비판했다. 화국봉은 등소평의 비판을 반박하는 데 실패했고, 새로운 시대의 인민의 요구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등소평은 자신의 인맥을 당내 요소요소에 심어서 지반을 굳혀 나갔고, 정책의 제시에 있어서도 대담한 개혁을 내세우며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고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1978년 11-12월에 개최된 공산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정식으로 화국봉의 '양개범시'와 문화대혁명의 좌경 착오를 비판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의 계속 혁명론 대신 '4개 현대화 건설'에 매진할 것이 결정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서 현대화 건설을 내건 등소평은 공산당 지도부의 전면에 복귀하고 권력을 사실상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런 정치 풍향의 급변에 따라 중국의 문예계도 커다란 변화가 나타났다. 10년 대란의 문혁의 종결과 개혁파의 권력 장악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변화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지향하며 출현한 것이 소위 '신시기문학(新时期文学)라는 것이다. 신기시 문학이란 1976년 이후의 중국 문학 창작 활동 전반을 폭넓게 가리키는 말이다. 1976년을 분기점으로 하여 중국의 당대(当代) 문학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문혁의 종료와 뒤 이은 개혁 개방은 중국 정치의 일대 전환점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중국 문학에도 전과는 다른 문학 활동의 여건을 제공했다. 중국 공산당은 당 창립 이후 항시 문예 공작을 매우 중시했다. 문예란 사상의 문제와 맞닿아 있으며, 사상적 지도 없이는 국민을 하나의 정신으로 묶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의 풍향이 등소평을 위시한 개혁파에게 유리하게 바뀌는 상황 속에서 1979년 10월에 제4차 문대회(文代會)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공산당은 문학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고 그 활동의 새로운 시작을 지지하였다. '문대회'는 '중화전국문학예술공작자대표대회(中华全国文学艺术工作者代表大会)'의 약칭이다. 이 대회에서 문혁 기간에 탄압 받았던 지식인과 문인 및 예술가들이 명예를 회복했고 예전의 지위를 되찾았다. 공산당에게는 등소평이 제기한 '4개 현대화 건설' 노선을 선전하고 또 여전히 사인방을 지지하며 온존한 구세력에 대한 사상 공세를 강화하기 위하여 개혁파들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이 대회에서는 문련(文联)과 작가협회(作家协会)의 지도부가 새로 선출되었고, 문혁 기간 중에 비판대에 올랐던 모순(矛盾)이 문련의 명예주석과 작가협회의 주석으로 선출되었으며, 또한 문혁 중에 극심한 고통을 겪었던 파금(巴金)도 문련과 작가협회의 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신시기 문학의 발단은 그 근원을 추구하면 1976년 4월의 천안문(天安门) 혁명시가(革命诗歌)의 창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6년 1월에 주은래(周恩来)가 사망하자 같은 해 4월 5일 청명절(清明节)에 그를 추모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운집한 군중들이 주은래를 추모하는 시를 낭독하고, 추도 연설을 하고, 표어를 내걸어 사인방을 위시한 문혁의 주도 세력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사인방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했지만, 오히려 그들의 무리수가 자신들의 몰락을 초래하게 된다. 상흔문학(傷痕文學)은 이런 사회 분위기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상흔문학'이란 말은 은 지난 10년간의 문혁 기간을 암흑과 재난의 시기로 간주하고, 문혁 기간 중에 행해진 만행과 폭력에 의해 중국 인민이 겪은 상처를 여과 없이 폭로한 노신화(卢新华)의 단편 소설 『상흔(伤痕)』에서 비롯한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제4차 문대회에서는 상흔문학과 같은 문혁 비판의 문학의 대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런 작가의 활동을 정식으로 공인했다. 등소평은 축사에서 서로 다른 문학적 주장을 인정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져야 문학이 발전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그의 발언은 신중국 출현 이래 중국의 문단은 줄곧 사회주의 현실주의에 의해 독점되어 왔는데, 이제는 이런 제약과 통제에서 벗어나 문학에서도 사상 해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기도 했다. 당시 중국 문단 내부에는 여전히 군중 동원과 대중 선전에 동원된 관례에 익숙해져 있었고, 문혁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좌파 세력 문인들이 적잖게 자리잡고 있었다. 등소평을 위시한 개혁파들은 문학의 사상 해방을 통해서 문단 내에 온존하는 문혁의 잔존 세력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는 이런 문학의 자유도 어디까지나 공산주의 사상이라는 틀 안에서 용인되는 것이었고 4개 현대화를 정신적으로 지원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함으로써 문학의 완전한 자유와 공산당의 사상적 영도라는 모순 사이에서 문학의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는 또 다른 제한선이 그어졌다. 제4차 문대회는 문학 활동의 자유를 천명하고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문학을 '4개 현대화'라는 새로운 국가 건설의 대방침에 종속시키는 모순을 안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제4차 문대회 이후로 중국 문단은 대체로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결정과 지원에 힘입어 문혁 때와는 매우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향후의 문학 발전의 길을 더듬게 된다.
----
(위의 글을 무단으로 퍼 거거나 허가 없이 전재하면 관계 법률의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