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교정을 둘러본 날이다
중앙대학교는 창학자인 승당 임영신 박사에 대해 이렇게 홍보해왔다
승당의 80평생(1899∼1977)은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가 로서 영광과 시련·고난의 일생이었다. 승당은 전북 금산읍(현 충남 금산) 상옥리에서 아버지 임구환씨와 어머니 김경순씨 사이에 둘째딸로 태어났다. 승당 부모는 개신교를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사상에도 적극적이었으나 딸은 가정적이고 평범한 여성으로 커주기를 바랐기에 유난히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던 승당은 진학문제로 아버지와 자주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
승당은 14살때 금산을 방문해서 금산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있던 전주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미스 골든 (기전여학교 설립자)을 찾아 공부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토로, 골든 선교사가 전주 기전여학교 입학원서와 초청장을 보내옴으로써 결혼을 강요하며 진학을 극구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서 1914년 기전여학교에 입학, 중·고등 4년과정을 거쳐 1918년 졸업하게 된다.
승당의 인물됨과 애국정신은 학교생활에서부터 나타난다.
일본어시간에 입을 열지 않는 등 혼자 항일의식을 다지고 있었던 승당은 같은 반 동무인 김연실 집을 방문했다가 연실의 아버지인 김인전 서문교회목사 (후에 임시의정원 의장과 학무총장 대리 등 역임)를 만나면서 한국역사에 제대로 눈을 떴다. 기전여학교사 박현숙선생을 중심으로 승당과 유현정 오자현 송귀내 유채룡 등 6명이 기도회를 조직, 나라를 구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매일 드렸으며 김목사에게서 ‘동국역사’책을 얻어다가 이를 여러 권 베껴서 전교생에게 돌려 읽도록 하다가 골든교장에게 들통 나 책을 서문교회에 모두 파묻는 사건도 있었다.
승당을 비롯한 기도회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공주회(公主會)라는 비밀결사대를 조직, 매일 아침 조회시간에 부르는 일본국가를 부르지 않고 신사참배도 거부했으며 교실에 붙어있는 일본천황 사진의 눈을 뾰족하게 깎은 연필로 찔러 장님을 만들어놓는 등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들은 또 보수적이고 전근대적인 풍습에도 과감히 반대, 쓰개치마 벗기 시위를 벌였다.
학교에 많은 기부금을 낸 아버지 덕분에 퇴학을 면한 승당이지만 이 일로 학생 5명이 퇴학처분을 당하자 승당은 퇴학처분 철회를 요구하며 등교거부운동, 동맹휴학운동을 주동했으며 결국 학교측으로부터 쓰개치마를 입지 않아도 되고 아무도 퇴학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졸업 후 기전여학교 은사인 이순길 교사의 소개로 충남 천안의 직산 근처 양대라고 하는 광산촌에 신설된 감리교계 소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이곳에서 자취 생활을 하며 생도들을 지도하고 기도회를 조직하여 어린 가슴에 민족혼을 심고 있었다.
3.1독립운동 직전인 1919년 2월에 밀사로 온, 전라도의 독립만세 책임자인 함태영으로부터 3.1독립선언문을 전달받아 기독동지회와 함께 등사·배포하여 천안, 양대 지역에서의 3.1독립운동을 유발시켰다. 이어 독립선언문을 전주로 운반하는 동시에, 전주기전여학교의 졸업생 및 재학생들과 더불어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살포하여 1919년 3월 13일 전주에서의 3.1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승당이 일본 경찰에 발각될 고비를 여러번 넘기고 무사히 전주에 도착함으로써 전주 장날인 3월13일 정오 남문 인경소리를 신호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울려퍼진 것이다.
이 만세운동으로 승당을 비롯한 여학생 13명을 포함, 3백여명이 검속됐고 일본 형사의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소요죄와 보안법 위반죄로 기소당한 이들 여학생들에게 전주지방공판에서 일본인 판사는 승당에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그리고 다른 동지들에게는 1년에서 2년의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른 승당은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검찰이 원심 판결에 불복함으로써 1919년 9월3일 대구복심재판소에서 있었던 재판에서도 원심을 확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승당은 일경의 감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으로 그해 11월 일본 히로시마고등여학교 (히로시마여자전문학교)에 편입해서 2년만에 졸업하고 충남 공주의 영명학교 교사를 지냈다가 1923년 도미 길에 오른다. 유태영에게서 건네받은 관동 대지진때 학살된 수천명의 한국사람 사진첩과 사건자료를 가지고.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승당은 이승만을 만나 서울에서 갖고 온 편지와 사진 등을 건넸으며 이승만은 제네바의 국제연맹에서 이 자료를 보이며 일본의 만행을 규탄, 대한민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미국 남가주대학에 입학해서도 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할 생각으로 학업 외 청과물장사, 주유소 경영, 불도저 운전까지 돈버는 일에 열중하는 한편으로 한인교회를 세워 선교사업을 전개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업무를 뒷받침했다. 미국생활 중 이승만의 청혼을 받기도 했던 승당은(이승만의 ‘승’을 따서 호를 지음) 남가주대학원까지 졸업하고 고향을 떠난지 10년 만에 귀국, 서울YMCA 총무에 취임했다.
진정한 민족교육을 위해 학교설립에 대한 생각을 떨치지 않고 있던 승당은 서울 흑석동일대의 토지 20만평을 매입해서 운영난을 겪고 있던 중앙보육학교(1918년 설립)를 1933년에 인수하는 것으로 ‘의에 죽고 참에 살자’는 이념을 펼치게 된다. 승당은 모자라는 학교건립비를 충당하기 위해 또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루스벨트대통령 부인을 만나는 등 노력 끝에 후원회를 조직하고 중앙보육학교 교사와 기숙사 유치원을 세웠으며 현재의 중앙대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모금운동 중 재미실업가 한순교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처음부터 가정생활이 원만치 못했으며 3년도 채 지나지 않아 승당의 귀국을 계기로 혼인생활은 마감된다.
일제 치하의 한국땅에서 승당은 항일운동을 위한 만남 내용이 담긴 편지를 핑계로 일본경찰에게 고문을 당해 폐인 상태까지 가게 됐다.
미주에서 활동하는 이승만을 지지하던 승당은 광복 후 이승만 중심의대한민국대표민주의원 의장(이승만)비서로 일하면서 유엔대표로 유엔총회에 참석하는 등 그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승당은 이 때 조선여자국민당을 창당, 전국 여성들의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평등하게 확보할 수 있는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적 정치체제 건설을 표명한다.
승당은 1960년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정치에서 손을 떼기 시작해서 교육에 전념하기 시작했으며 대한교육연합회장, 상공일보 경제일보 등의 사장, 한국부인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68년 아이젠하워상, 69년 대한민국 청조근정훈장 등을 수상 했다.
이상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후광으로 중앙대학교 창학자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