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무실한 ‘자기결정권’ >
70대 후반의 할아버지가 기관지삽관 상태로 응급실에 도착했다.
의식은 없었고 요양병원에서 구급차로 이송되었다.
10년전 편도선암으로 수술과 방사선치료를 받고 큰 문제없이 지내왔다.
금년초 가슴통증이 있어 검사결과 편도선암과 별개로 폐암이 발견되었다.
이미 뼈와 간 전이가 있어 항암제치료만 받기로 하였다.
항암제치료는 3주 간격으로 이루어졌는데,
거동이 점점 힘들어져 치료를 받지 않는 기간에는 요양병원에 입원하여 간병을 받고 있었다.
3차 항암제치료를 받은 뒤 요양병원에서 폐렴 의심소견이 있었고 전신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일요일 오후6시 의식이 저하되고 산소포화도가 떨어졌다.
맥박이 거의 만져지지 않게 되자 요양병원 당직의사는 심폐소생술을 15분간하고 기관지삽관을 했다.
인공호흡기가 없는 요양병원에서는 더 이상 진료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구급차를 불러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전원하였다.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져 인공호흡기 등 연명의료가 시작되었다.
문제는 환자가 폐암으로 진단된 직후에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여 무의미한 연명의료는 받지 않겠다는 본인의사를 분명히 했고,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전산망에도 등록해 두었다.
환자는 사망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인공호흡기를 중단하고 편안히 임종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3주간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채 여러 가지 연명의료를 받았으며 고통스럽게 사망하였다.
1) 요양병원 당직의사의 입장:
환자가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 두었다고 보호자들이 당직의사에게 구두로 이야기하였으나,
임종기임에도 심폐소생술과 기관지삽관을 했다.
왜냐하면, 요양병원의 경우,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구성할 수 없는 병원이 대부분이어서,
환자가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 전산망에 등록해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고,
해당병원은 임종기 판단이나 연명의료결정을 할 법적 자격이 없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2) 환자 가족의 입장:
환자가 법정 서식을 이미 작성해 두었음에도,
보호자 (직계 자녀들)중 어느 누구도 나서서 이미 적용된 인공호흡기를 중단하자는 의견을 주도적으로 제안하지 못하였다
3) 서울대병원 의료진의 입장:
환자상태가 임종기라는 사실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으나,
환자 가족들이 적극적으로 중단의사를 표현하지 않은 상황에서 의료진이 강제로 중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4) 의료기관 윤리위원회의 입장:
환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의료를 원하지 않는다고 표현하였으나, 가족들이 중단결정에 미온적이었다.
사안은 윤리위원회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환자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여 중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결론지었다.
문제는 환자 가족의 협조없이 강제집행할 방법이 없었다.
정부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로 본인 의사를 문서화하면 불필요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고 편하게 임종할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그러나, 의료기관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여부를 전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병원은 4.3%에 불과하다.
요양병원이나 호스피스와 같은 작은 규모의 의료기관은 의료기관윤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연명의료결정을 할 법적권한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기관에서 작성해 전산시스템에 입력해둔 연명의료관련 서류조차 열람할 권한도 없다.
2000년부터 말기 환자에 대해 연명의료결정법을 실시해온 대만의 경우,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건강보험카드를 전자화하여 환자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전자카드에 내장하도록하여
어느 의료기관이나 어떤 상황에서도 전산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게 제도화하였다.
자기결정권에 의해 연명의료결정을 할 수 있게 한다고 법을 만들었으나,
진료현장에서 입법취지가 제대로 지켜지고 있지 못하다.
관련 절차를 합리적으로 개선하여, 말기 환자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겪으면서 임종하는 일을 최소화하는 제도개선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