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12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고고학 문화 유물로 나타나는 배달나라 1 번조선은 농사로 풍족해진 삶을 누리면서, 번조선 지역에 번조선 문화를 남겼다. 이 문화가 여러 문화로 나뉘어 임자 없는 중원 역사로 기록되었다. 중원문화는 인류 역사가 중원 역사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8300년 전에 후이문화(后李文化)로 개시되었다고 기록하였다. 후이문화에 대하여 『유기백과』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是中国 黄河下游地区的新石器时代文化,得名于山东 临淄 后李遗址,主要分布于山东泰沂山脉以北、小清河以南的冲积地带,经碳十四测定,年代约为距今8400-7700年之间。 후이문화(后李文化)는 황하(黄河) 하류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말한다. 산동성 임치(临淄) 후이유지에서 이름을 얻었다. 이 후이문화의 주요 분포 지역은 태기산맥(泰沂山脉) 이북이다. 소청하(小清河) 이남의 충적지대(冲积地带)다. 탄소 측정 결과 년대가 약 8400년~7700년에 해당한다. (노중평의 주, 이때라면, 조선을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한 견융족이 아직 양자강 서남쪽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을 때로 보인다. 그러므로 원시 원주민 시대에 해당한다. 원시 원주민 시대는 한국시대(桓國時代)로 볼 수 있다. 이때는 홍산문화가 시작된 시대에 해당한다.) 从距今8300年前的後李文化開始,历经北辛文化(距今约7300年)、大汶口文化(距今约6500年)、龙山文化(距今约4500年)、岳石文化(距今约3900年),都是东夷人所创造出来的不同阶段的文化。东夷文化从古至今对中华文化的影响意义相当重大,从鸟圖騰的崇拜,到各种手工艺、建筑工艺的发展,到文字的创造、八卦的创造、医学的创造,再到禮制的出现、聚落和城市的分化乃至早期国家的形成,无不对中华文化起到重大深远的影响。[3] 다음 시대는 북신문화(北辛文化(지금으로부터 약 7300年전) 시대로 들어간다, 북신문화시대를 『유기백과』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북신문화는 산동반도에 있는 태산 서쪽 지역에 해당한다. 北辛文化的主要遗址位于山东省 滕州市 官桥镇北辛村北部,因北辛村而得名“北辛文化”。是距今约七千年前至六千年前的一个母系氏族部落的聚居地遗址[1]。部分特色與仰韶文化接近,屬於新石器時代早期的文化[2]。 베이신 문화(北辛文化)의 주요 유적은 산둥성(山东省) 텅저우시(滕州市) 관차오진(官桥镇) 베이신촌(北辛村) 북쪽에 있으며 베이신촌(北辛村)에서 북신문화(北辛文化)라는 이름을 얻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7000년 전부터 6000년 전의 한 모계씨족(母系氏族)의 취거지(聚居地) 유지(遗址)[1다. 부분적인 특색은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와 가깝고 신석기 초기 문화에 속한다. (노중평의 주, 지금으로부터 7000년~6000년 전의 문화라면 배달나라 문화로 볼 수 있다. 배달나라는 한웅천왕이 세운 나라이고, 복희와 신농의 농경문화가 다 이시대에 속했다. 이 시대를 모계씨족 취거지라고 했는데, 모계족성이 먼저 생기고, 뒤를 이어 씨칭이 생겼음을 말한다. 배달나라 시대에 제일 먼저 세력을 잡은 성은 풍성(風姓)과 강성(姜姓)이다. 이때 이름을 썼는데, 이름의 머리에는 모계족성을 썼고, 가운데에는 이름을 썼고, 끝에는 부계씨칭(父系氏稱)을 썼다.) 앙소문화는 복희문화로 볼 수 있는데, 복희는 배달나라의 제6세 천왕이다. 『유기백과』는 앙소문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1918年進行恐龍化石調查的瑞典地質學者安特生偶然在洛陽市西边,也就是在河南三门峡地区的仰韶村黃河河岸附近挖到後來被稱為彩陶的陶器。 1918년 공룡 화석(恐龍化石) 조사를 한 스웨덴(瑞典) 지질학자 안터생(安特生)은 우연히 뤄양시(洛陽市) 서쪽, 즉 허난성(河南省) 싼먼샤(三门峡) 지역의 양사오촌(仰韶村) 황하(黃河) 강둑 부근(河岸附近)에서 훗날 채도(彩陶)라 불리는 도기(陶器)를 파냈다. 仰韶文化分佈是以渭、汾、洛等黃河支流的流域地區為中心,北達今長城沿線和河套地區,南達鄂北,東至豫東一帶,西至河湟地帶。 양사오 문화(仰韶文化)의 분포는 웨이(渭), 펀(汾), 뤄(洛) 등 황하 지류의 유역 지역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지금의 만리장성연선(長城沿線)과 허타오(河套) 지역, 남쪽으로는 어북(鄂北), 동쪽으로는 예동(豫東) 일대, 서쪽으로는 허황(河湟) 지대에 이른다. (노중평의 주, 이 지역은 배달나라의 중심지로 볼 수 있는 지역이다. 특이하게 생긴 도기들이 많이 발굴되었는데, 배달나라의 문화를 설명하기에 충분한 토기들로 볼 수 있다. )느낌0
말하자면 한족의 족보를 동이족의 족보로 바꾼 것이다. 어째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놀라울 뿐이다. 지금으로부터 5 천 년 전에 성과 이름을 바꾼 사람이 5 천 년 후에 자기의 성과 이름을 되찾은 것과 같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가짜 족보를 가지고 행세해 오다가 진짜 족보를 찾았다고 떠들어 대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무녀가 군웅이 들어와 작두 위에 올라섰다. 구천현녀자부비결이라는 책에도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기주에서 싸워 이겼고, 치우천왕의 시신을 토막을 내어 묻었다. 탁록에 네 분시(分屍),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關鄕城)에 한 분시, 또 다른 곳에 한 분시가 묻혀 있다고 한다. 동에 청제 들어오는 군웅 남에 적제 들어오는 군웅 서에 백제 들어오는 군웅 북에 흑제 들어오는 군웅 군웅은 탁록의 싸움에서 황제에게 패하여 육시(六屍)를 당한 치우 천왕의 조각난 몸을 하나하나 불러들이는 무가에 나온다. 군웅은 군제(軍帝)를 군웅(軍雄)으로 폄훼시킨 말이다. 웅(雄)자는 운회(韻會)에서 ‘본탁군지주치웅주(本郡地周置雄州)라 하였다. “본래 탁군 땅 주변에 웅주를 두었다”는 말이다. 탁군은 탁록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탁록 주변에 웅주를 두었다는 것은 치우천왕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치우천왕을 군웅 이라 한 것이다. 요즈음도 무인(巫人)들이 부적을 그린다. 부적은 그 원조를 찾아가면 첫 째가 별을 그린 부적이고, 둘째가 짐승을 그린 부적이다. 이들 부적은 그 기원이 종족을 상징하는 그림에서 나온다. 부족이 가지고 있는 아이콘이 부적이 되는 것이다. 후에 문자가 나오면서 별과 동물에 문자가 추가되었다. 단군 왕검 이전 시대엔 오가(五加)라는 관직이 있어서 오가를 나타내는 그림이 부적이 되었다. 그러나 단군 왕검 시대에 와서 단군 왕검에게 귀속한 부족이 늘어나서 오가가 팔가(八加)로 증가하였다. 따라서 팔가 부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팔가는 모두 짐승으로 족표를 삼았으므로 여덟 종의 짐승 그림이 부적이 되었다. 이들 부적은 대부분 벽사 부적으로 쓰였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 부족들의 부적을 예로 들어 본다. 龍加 龍 降龍符 虎加 虎 家內安寧三災消滅符, 富貴 業障消滅符, 萬福雲興千災雲消符 牛加 天輔 符, 丁丑神將符 馬加 白馬 降神符 狗加 戌 忍符 鶴加 鶴 召鶴符, 天地大明德符 팔가 중에서 지금도 남아 있는 부적을 찾으니 위에 기록한 육가(六加)의 부적은 찾아지고 다른 이가(二加)의 부적은 과문한 탓에 찾아지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치우 천왕과 관련이 있는 부족은 우가이다. 우가는 치우 천왕의 족표이다. 따라서 소의 머리가 부적이나 부작에 쓰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아마 종이가 발명 되기 이전에는 바위나 나무나 가죽에 부적이 그려지고, 소의 머리가 부작으로 쓰이다가 종이가 발명이 되면서 부적은 종이에만 그려지고 부작은 제사 상에 올리는 것으로 그 역할이 축소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가의 부적은 천보부(天輔符)이다. 하늘의 도움을 청하는 부적이다. 그 형상은 소의 형상에서 무신(武神)으로 변한 치우 천왕의 형상이 더해져 오늘날의 도깨비 부적이 된다.느낌0
리매와 군웅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치우가 리매(魑魅)를 거느렸다”고 하였다. 리매는 도깨비라는 뜻이다. 뱀(蛇)·소(牛)·새(鳥)·짐승(獸)의 가면을 쓴 장수들을 의미한다. 옛날에 신을 천신, 지신, 인신으로 표현하였는데, 이분들이 땅에 하강하면 천황天王, 지황地王, 인황人王이라 하였다. 천왕은 한인천제에 해당하고, 지왕은 한웅천왕에 해당하고, 인왕은 단군왕검에 해당한다. 치우천왕은 한인천제 계열의 천왕이었다. 그가 탁록에서 전사하여 세상을 떠나자 황제는 그를 군웅(軍雄)이라 하였다. 이때 차(車)라는 말, 군(軍)이라는 말을 황제가 처음 사용하였다. 차(車)는 당시에 황제만이 배달나라 영역에서 제작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황제만이 제작하였다. 그는 이 차에 지남(指南)을 올렸다. 이 지남을 올린 차를 운영하는 무리를 군(軍)이라 하였다. 그래서 군대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웅(雄)이란 말은 웅(熊)의 변음이다. 웅족(熊族)이라는 말이다. 웅족(熊族)에서 분화하여 웅족(雄族)이 나왔음을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웅(熊) 별자리에서 새를 의미하는 조(鳥, 隹) 별자리가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이 조(鳥) 별자리를 익수(翼宿)로 볼 수 있다. 머리는 없고 날개만 있는 이상한 새가 익조(翼鳥)이다. 머리인 치우천왕을 잃은 청구(靑邱)의 백성으로 볼 수 있다. 백성은 남쪽으로 피신하고, 치우천왕은 북쪽으로 가서 현무의 신이 되었다. 그렇다면 치우천왕의 머리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귀수 안에 있는 적시에 묻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우리 굿에서 도깨비 대왕이라 하였다. 치우천왕이 굿 판에 도깨비 대왕이 되어 나타나는 데엔 무엇인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탁록의 전투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황제가 반란을 일으켜 유망을 아우를 적에 치우천왕은 다음과 같이 황제를 토벌해야 하는 이유를 밝혔다. “너희 헌구는 짐의 깨우침을 분명히 들을 지어다. 오늘 자식이 있도록 오직 짐 한 사람만이 만세를 위하고 공정한 의리를 위하여 인간의 마음을 씻는 맹세를 지었다. 너희 헌구는 삼신일체의 원리를 기하고, 삼륜구서(三倫九誓)를 행하는 것을 태만히 하였으므로, 삼신이 그 더러움을 싫어하며 짐 한 사람에게 명하여 토벌을 행하게 하였으니, 너희는 마음을 씻어 행동을 고치고, 자성으로 백성을 구하라. 너희의 뇌 속에 신이 내려 있으니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천인이 함께 노하여 그 명이 범상치 못할 것인 즉 너희는 두려움이 없느냐.”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위 글에서 삼신(三神)은 우주가 생성하고 운행하는 이치인 일석삼극의 원리를 인간에게 가르치기 위하여 조화(造化)하고, 교화(敎化)하고, 치화(治化) 하는 신이다. 조선에서 조화의 신을 한인천제라고 하였고, 교화의 신을 한웅천왕이라고 하였고, 치화의 신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삼륜구서는 애륜(愛倫)의 사랑이요, 예륜(禮倫)의 도요, 도륜(道倫)의 도리이고, 구서(九誓)는 효(孝), 우(友), 신(信), 충(忠), 손(遜), 지(知,) 용(勇), 렴(廉), 의(義)의 아홉 가지를 말한다. 인용문에서 밝혔듯이 치우천왕은 삼신일체의 원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반란을 일으킨 황제를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탁록에 있는 기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치우천왕이 전사하게 된 데엔 이유가 있었다. ▲ 황제가 치우천왕을 전사시킨 비법이 기록된 육정육갑금쇄경 서문. 황제가 하늘에 기도하여 치우천왕이 이끄는 도깨비부대를 격파할 수 있는 비결을 전수했기 때문이었다. 그 비결이 육정육갑금쇄경이다. 필자가 1999년 6월 10일 한배달역사천문학회회원들과 황제현에 있는 황제능을 찾아 갔을 때, 황제능이 가까워 오니 도로 사용료를 징수하는 톨게이트의 이름이 금쇄수비처(金鎖收費處)였고, 그 근처에 있는 차를 수리 하는 집에 금쇄진수리(金鎖鎭修理)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 이곳이 옛날에 황제가 칠성단을 쌓고 하늘에 기도하여 육정육갑금쇄경을 받은 장소인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황제능까지는 자동차로 2시간 반 거리였다. 치우천왕은 삼신일체의 원리를 수호하고자 하였으나 육정육갑금쇄 경에서 새로운 전술을 개발한 황제와 싸워서 이기지 못하고 패하였다. 육정육갑금쇄경은 귀신을 부리는 비결을 쓴 책인데 황제가 이 책에 의지하여 치우천왕이 이끄는 도깨비 부대를 전멸 시킬 수 있었다면 황제가 이끄는 부대는 아마 귀신 부대라는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패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이족의 역사는 쇠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이족에서 나와 반란을 일으켜 세상을 장악한 황제는 화이(華夷)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기 시작하였다. 삼신일체의 원리 즉 일석삼극의 원리는 파괴되었고 정체성은 사라졌다. 평생을 이 원리를 지키고자 헌신했던 치우천왕으로서는 본인의 육신이 죽은 이후에도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무당을 통하여 군웅으로 나타나고 군웅거리를 통하여 <삼신일체의 원리>를 복원하고자 애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인들은 하북성河北省 탁록현(涿鹿縣)에 있는 탁록을 중화문명이 시작된 곳이라고 하여 소중하게 여긴다. 중화문명을 시작한 사람을 황제(黃帝)라 생각하여, 지나 5천년 역사의 머리에 올려 놓았다. 적어도 1980년대 초까지 지나인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 동이족의 시조 계통도. 동이족은 마고족, 한인족(구한족, 풍이족), 한웅족(배달족, 구려족), 으로 이어져 내려왔다. 염제 유망과 황제 헌원은 배 다른 형제 사이이고, 치우천왕(자오지한웅)과는 혈족의 계통이 다르다. 그러나 2000년대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있는 지금 중국인은 황제 만을 자기의 조상이라고 고집해 오던 생각을 바꾸었다. 1980년대 초까지 그들은 스스로 황제의 자손(黃帝之孫)이라고 옹고집을 부리다가, 1980년대 말부터 갑자기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之孫)임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를 밀어내고 그 위에 그들이 동이족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5 천년 동안 버렸던 염제신농(炎帝神農, 여기에서 말하는 신농은 시조 신농이 아니라 시조 신농의 8대 손인 유망楡罔이다)을 복권 시켜 황제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느낌0
청구국 그는 청구국靑丘國 출신으로 배달나라(신시)의 자오지한웅천왕慈烏支桓雄天王이었다. 자오慈烏와 치蚩는 같은 듯으로 쓴다. 자慈자를 오烏자와 관련하여 보면, 오烏가 태양을 의미하므로, 자미원紫微垣을 의미하는 자紫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자오慈烏는 자미원 밖을 두르고 있는 황도대黃道帶를 운행하는 태양으로 볼 수 있다. 지支는 어디에선가 갈라져 나왔다는 뜻으로 본다. 그가 갈라져 나온 곳은 자미원 밖을 지나다니는 태양이다. 또 오烏는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의 부인 항영姮英을 배출한 오이족烏夷族(조이족鳥夷族, 태양족이라는 뜻)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의 출신이 한인천제시대에 풍이족에 흡수된 오이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2011062813189425.jpg ▲ 산동반도山東半島(태산 동쪽에 있는 반도라는 뜻)는 치우천왕의 땅이었고 기주冀州가 중심지였다. 청구靑邱가 기주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해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황제는 성을 희姬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음으로 해라는 뜻이다. 치우 황제 두 분이 다 스스로 해임을 표방했으니, 하나의 하늘 아래에 2개의 해가 없는 법이라, 필연적으로 전쟁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치우천왕의 근거지 발해만 조이족은 발해만渤海灣(발渤은 발發, 족足을 의미하였다)에 살았던 종족이다. 그러므로 풍이족은 발해만 연안에 살았던 종족으로 볼 수 있다. 이들 종족을 후에 발족發族이라고 하였다. 관자管子는 발족을 발인發人이라고 하였고, 발인을 동이東夷로 해석하였다. 이렇게 보면, 발해만의 발해渤海도 발해發海가 발해渤海로 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떠올리게 된다. 발해는 순수한 우리 말 발·바다라는 뜻이다. 발·바다는 “발(足)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쓰는 종족이 사는 바다”라는 뜻이다. 2011062813328402.jpg ▲ 금문 발(足). 동이 위에 올라섰음을 나타낸 문자이다. 자오지한웅천왕이 발해만에 살았으므로, 그가 세운 나라인 청구가 발해만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실제로 쇠머리 형상의 청구섬이 황하입구에 있었다. 그러나 청구가 침몰하는 바람에 북경 북쪽에 있는 탁록涿鹿으로 청구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와의 10년 전쟁은 치우천왕이 국도 청구를 탁록으로 옮기면서 촉발된 전쟁으로 본다. 치우천왕을 도깨비로 신화화神話化했는데, 도깨비의 원형이 쇠머리를 가진 소였음이 청구의 형상에서 드러난다. 치우천왕의 변신 뇌공·우사 <삼성기三聖紀>에서는 그를 “치우는 전하는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일으키는데, 산과 강을 크게 바꾼다는 뜻을 가진다”고 하였다. 이 말은 그가 뇌공雷公과 우사雨師의 일을 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관자는 “치우가 천도天道에 밝다”고 하였다. 그가 황제와 싸울 때 탁록에 잘 끼는 안개를 이용하는 작전을 폈기 때문에 그런 말을 듣게 된 것이다. 2011062813479598.jpg 치우천왕이 곤오족에 전수한 청동기 솥 치우상은 지금 우리에겐, ① 신라 안압지에서 출토된 와당에 도깨비얼굴로, ② 백제 절터에서 발굴된 전석의 도철전신상으로, ③ 고구려 망와의 도철얼굴로, ④ 신라 돌장승 외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장승인 천하대장군상, 지하여장군상으로, ⑤ 고구려 안악 제3호 벽화무덤의 기둥에 그린 도깨비얼굴로 ⑥후조선 창경궁 교각에 새겨진 해치의 얼굴 등으로 남아 있다. 치우상은 지나족에겐 ① 상대商代의 청동기에 새겨진 도철문으로, ② 정주鄭州에서 발굴한 우수정牛首鼎의 쇠머리로, ③ 남북조시대 화상전의 치우문으로 남아 있다. ① 상대는 하대夏代로, 이때는 하화(화하)족시대가 아니라 동이족시대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상대 청동기에 도철문이 나타났던 것이다. 또한 청동기를 발명한 분이 치우천왕이고, 그 기술이 정주鄭州(새 나라라는 뜻)에 살았던 곤오昆吾(한인천제의 61대 손, <扶蘇譜序> 太夏公卽赤帝祝融之六十一世孫彼卽風夷人也)에게 계승되었으므로, 정주의 우수정에 새겨진 2개의 쇠머리도철문양은 치우문이다. ② 정주의 언어로 볼 수 있는 국어 정어<國語 鄭語>에 기성곤오己姓昆吾(족성인 기성에 곤오라는 사람이 있다는 뜻)라는 말이 남아 있으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 청동기를 주조한 치우의 청동기 주조기술을 계승한 곤오가 정주에서 솥을 주조할 때 치우문양인 도철문양을 남겼으리라고 생각된다. 곤오가 솥(鼎)을 주조했을 때는 그가 이미 단국의 홍제로부터 소성蘇姓을 사성賜姓하여 소성을 쓰고 있을 대였다. 그러므로 정주鄭州(새나라)의 정鼎을 솥으로 불렀던 것이다. 솥은 ‘소씨가 만든 터’라는 뜻이다. 곧 정鄭을 그렇게 말했다고 볼 수 있다. 중원에 남아 있는 치우도철문은 도깨비상이다. 신라의 와당과 망와에 새겨진 도철문은 도깨비가면이고, 신라의 전석에 새겨진 도깨비상은 장군도깨비상이다. 장승의 상도 도깨비로 볼 수 있다.느낌0
동이족 탄생의 모체가 된 ‘춘분의 기’운영자 별과 군웅이 된 치우천왕 노중평의 우리 별 이야기<26> '해'라 자칭한 치우와 황제간 탁록대전 1980년대 한족의 족보를 동이족의 족보로 바꾼 중국인... 부적의 기원은? 노중평 2002년 월드컵 축구 때 국민을 이상한 열기로 몰아갔던 붉은 도깨비 탈이 치우천왕(배달나라에 속한 청구국의 자오지천왕, BC 2707 경에 활동하였다)이다. 내가 속해서 문화역사운동을 벌였던 한배달에서 1999년에 역사천문학회를 결성하여 회원들이 탁록에 가서, 치우천왕을 모신 사당 귀근원歸根苑의 삼조당三祖堂에 참배하였다. 우리는 한국이 중국과 수교한 후에 탁록을 찾아 간 첫 번째 방문객이었다. 귀국하여 ‘귀근원 참배기參拜記’를 써서 한배달의 기관지 <월간 한배달>에 올렸다. 나는 이 글에서 치우천왕과 황제가 싸웠던 탁록대전涿鹿大戰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탁록대전涿鹿大戰은 치우천왕과 황제가 중원中原의 지배권을 놓고 싸운 상고시대 최초의 전쟁다운 전쟁이었다. 이 싸움엔 청동기시대에 발명한 모든 첨단무기들이 동원되었다. 황제는 이 고장의 토박이인 응룡족應龍族을 동원하여 치우천왕군에게 수공전水攻戰을 감행하여 공격군인 치우천왕군을 괴멸시켰다. 황제는 치우천왕과 10년 동안 72회나 싸웠지만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지남거指南車를 발명하여 태양을 등지고 치우천왕과 싸워 승리하였다. 지남거란 나침반羅針盤을 장착한 수레라는 뜻이다. 나침반이 남쪽을 가리키고 있으므로 이 시간을 피하여 태양을 등지는 방위로 이동하면서 싸울 수 있도록 고안하여 만든 수레이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 치우천왕과 싸워서 치우천왕의 군대를 괴멸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금쇄金鎖 황토고원黃土高原에 칠성단을 쌓고 7일 동안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러자 하늘에서 <육정육갑경>(작전지침)과 천부영장天符靈章(부적)이 내려와 치우천왕의 군대인 도깨비부대와 싸웠다. 당시에 하늘의 별들도 이 싸움에 동원되어 치우천왕과 황제 양편으로 갈라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남방주작칠수에는 치우천왕과 황제의 부대배치가 그대로 그려져 있다. 치우천왕의 별자리는 귀鬼로 표현되어 있고, 황제의 별자리는 헌원軒轅 으로 표현되어 있다. 헌원성은 28수에는 속하지 못했지만, 뱀처럼 꾸불거리며 ‘남방주작칠수’인 정수井宿, 귀수鬼宿, 유수柳宿, 성수星宿, 장수張宿, 익수翼宿, 진수軫宿 중에서 유수柳宿, 성수星宿, 장수張宿 위를 덮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귀수鬼宿는 ‘남방주작칠수’ 7별 중에서 2번째별이다. 다이아몬드처럼 생긴 4개의 별 안에 적시積尸라는 별이 들어 있다. 적시는 탁록대전에서 전사한 치우천왕의 군대의 시신을 쌓아 둔 곳이라는 뜻이다. <사기史記>에 치우천왕의 라이벌이었던 황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산을 뚫어 길을 내고 한 번도 편안히 있은 적이 없다. 탁록의 강에 도읍하고 옮겨 다니며 항상 거처를 안정시키지 못하고 장수와 사병을 시켜 지키게 하는 전장에서 살았다.” 황제가 치우천왕을 이기기 전까지 전전긍긍하며 살았다는 글이다. 황제는 먼저 유망을 아우르고, 유망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동한 치우천왕과 무려 10년 동안 73회나 싸웠으나 한 번도 이기지 못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싸움에서 치우천왕을 패배시켜 목숨을 빼앗았다. 그가 다시 살아날까 두려워 하여 시신을 토막 내어 네 부위를 탁록의 네 군데에 묻고, 다른 부위를 다른 두 곳으로 나누어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진의 <천문지>는 치우천왕의 죽음에 대하여, “치우전왕이 승천하여 별이되었다(蚩尤天王上爲列宿 )”고 하였다. 옛날 사람들은 신神과 귀鬼에 대하여 <정몽正蒙>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은 귀다(人曰鬼) <正蒙> 神化 45쪽” 지나인支那人은 신화에서 치우 천왕을 鬼로 기록하였다. “키가 여러 장이나 되고, 불사신처럼 용맹스러웠다. 머리에는 두 개의 뿔이 나 있고, 귀 밑의 털은 마치 칼날처럼 빳빳하게 서 있고, 눈이 네 개나 되며, 손이 여섯이나 되고, 발은 소의 발 같았다. 먹는 음식은 주로 모래와 쇳덩이, 바위 등이었다.” 이 기록은 치우천왕이 청동기시대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가 처음으로 청동을 주조하여 무기와 장구를 만들어 썼음을 위와 같이 기록한 것이다. 치우蚩尤의 치蚩는 풍이족風夷族이라는 뜻이다. 작은 뱀을 뜻하는 충虫자가 이를 말하고 있다. 풍이족은 뱀을 종족의 아이콘으로 가지고 있던 종족이었다. 이 종족에서 강姜·기己·희姬와 같은 성이 나왔다. 치우천왕은 풍이족의 강성姜姓을 가졌고, 그의 라이벌인 황제는 희성姬姓을 가졌다. 치蚩자에는 다스린다는 의미가 있어서 치治자와 같은 뜻으로 쓴다. 치蚩를 치治의 의미로 쓸 때는 그가 배달나라의 천왕직天王職에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하화족(화하족, 지나족)은 蚩尤의 蚩는 어리석다는 뜻으로, 우尤는 더욱 이라는 뜻으로 써서, 치우를 어리석은 임금, 벌레처럼 하찮은 임금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치蚩의 근원을 따지면 풍이족을 의미하고, 우尤는 견족犬族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치우라는 이름은 풍이족과 견족을 다스리는 임금이라는 뜻으로 해석해야 한다. 견족은 단군시대엔 조선의 종족을 구성하는 오가五加 중의 하나인 구가狗加라는 말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구가가 치우천왕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고 하겠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10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동이(東夷) 설명 계속 -東夷,或稱夷、夷人,先秦時是指居住在黄河流域下游(青、兖、徐三州[a])的人。夷的最早記錄在商甲骨文記錄中,夷曾與商人發生戰爭,有稱為夷方的國家,傳説有九夷、淮夷、鳥夷、嵎夷、萊夷之分。周朝時稱為“东夷”,有徐國、萊國、郯国等諸侯國家,是今日漢族的祖源之一。 -동이(東夷), 또는 이인(夷人)이라 칭한다. 선진(先时) 때는 황하 유역의 하류(청(靑), 연(兖), 서(徐)의 3주(三州))에 사는 사람을 가리켰다. 이(夷)의 최초 기록은 상국(商國)갑골문(甲骨文) 기록에 있다. 이족(夷族)이 인구가 증가하여 장사하는 자들이 생겨나 상인(商人)이라 하였다. 상인이 반란을 일으켜 전쟁을 치렀다. 이방(夷方)을 국가로 칭했다. 이방에는 구이(九夷)가 있었는데, 회이(淮夷), 조이(鳥夷), 우이(嵎夷), 래이(萊夷)로 구분했다. 주나라(周朝) 때 '동이(東东)'라고 불렀는데, 서국(徐國), 래국(萊國), 담국(郯国) 등 제후국들이 있었다. 오늘날 한족의 조상 중 하나이다. (노중평의 주, 1. 선진 때는 주로 단군조선+삼조선 때를 지나의 학자들이 부르는 호칭이다. 청(靑)은 당시의 청주(청주+하북성)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연(兗)은 연주(燕州)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서(徐)는 서주(徐州)지역이다. 선진시대 이 지역은 모두 조선지역이었다. 북쪽은 진조선, 남쪽은 번조선에 해당했다.연주는 원래 단국의 고토였다.) (주, 2. 이족의 인구가 증가한 이유는 서융(西戎)이 이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구이(九夷)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 9개의 인종 단위로 볼 수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서융에서 갈라져 나간 인종과 단군조선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인종과, 원래 그곳에 살았던 인종을 합하여 구이로 호칭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히 이들 사이에서 인종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이 제준(帝俊)이었다. 제준은 신화에 나오는 인명인데. 제곡고신(帝嚳高辛)이다. “태양을 쏜 예(羿)의 신화”는 제곡고신에게서 나온다. 그는 본래 기성(己姓) 문중 사람이었다. 그가 9개의 동이족을 하나로 통일하였다. 이 이야기가 요(堯)에게 옮겨 가서 요가 진접 구이를 통일했다고 말해지기도 하고, 요가 예를 시켜 구이를 통일했다는 이야기로 전해 오기도 한다.)느낌0
9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이 생기기 이전 삼한 주변에서 시작된 역사 오래당 노중평 이종환 박소헌 박공수 9-9 춘추시대 이전부터 춘추시대까지, 우체모탁국(優體牟涿國)의 탁(涿)에 들어 있는 주류(主流) 인종 탁인(涿人) 동이에 대한 역사 기록 东夷 徐昭峰, 商王朝东征与商夷关系 《史记·卷三十二·齐太公世家 第二》: 于是武王已平商而王天下,封师尚父于齐营丘。东就国,道宿行迟。逆旅之人曰:“吾闻时难得而易失。客寝甚安,殆非就国者也。”太公闻之,夜衣而行,犁明至国。莱侯来伐,与之争营丘。营丘边莱。莱人,夷也,会纣之乱而周初定,未能集远方,是以与太公争国。… 동이 서소봉(徐昭峰), 상왕조(商王朝)의 래국(萊國) 동정(东征)과 상이(商夷-장사꾼)의 관계: 『사기(史记)』 · 권삼십이(卷三十二)· 제태공 세가(齐太公世家) 두 번째(第二). 그리하여 무왕(武王)은 이미 천하를 평정하여 상왕천하(商而王天下)를 만들었다. 스승 상부(尚父)를 제(齊)의 땅 영구(营丘)에 봉하였다. 동쪽은 나라의 끝에 다다랐으나, 하루 밤길에 오갈 수 있었다. 장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이 말했다. "내가 들으니, 얻기 쉬우니 잃기도 쉽습니다. 객은 밤길을 가지 않고 자는 것이 편안합니다. 나라에 들어오는 자는 위태롭지 않습니다.“ 태공이 이말을 듣고 밤옷을 입고 나가 밝을 녁에 국도에 도착했다. 래이족의 제후가 처들어와 영구(营丘)에서 싸웠다. 래국(萊國)은 영구의 변방에 있었다. 그들을 래인(莱人), 이(夷-東夷)라 하였다. (노중평의 주, 상국(商國)이 역사에 나타나 존속했던 시기는 BC 1600년경~BC 1046년경)이다. 지나 역사에서 최초의 왕조로 소개되어 있다. 반경(盤庚)이 마지막으로 옮긴 수도가 은(殷)이기 때문에 은국(殷國)으로 부르기도 한다. BC 1600년이면, 단군조선 18세 위나 재위 때에 해당한다.) 『유기백과』는 동이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是中国中国 先秦时期,中原居民对黄河流域下游(青 [a]、兖 [b]、徐 [c]三州)居民的总称。最先在夏商朝期称为“夷”,不带有外族观念,只是作为部落联盟的称呼,自周朝时首次出现“东夷”一词,是周人对黄河流域下游,非炎黄后裔的称呼, 중국 선진(先秦) 시대에 중원(中原)의 주민들은 황하 유역 하류에 살았다. 주민을 총칭하여 동이라 했다. (그곳은 청(靑), 연(兗), 쉬(徐) 3개 주였다) 하상조(夏商朝) 때 처음으로 외족(外族)이라는 연대감을 갖지 않고, 부족연맹의 호칭으로 '동이'라는 말을 만들어 썼다. 주조 시기에 동이라는 말이 출현하였다. 주국인(周人)은 황하유역 하류에 살면서 염황후예(炎黄后裔)에 속하지 않는 자들을 동이로 호칭하였다. (노중평의 주, 지나인은 탁록대전으로 배달나라가 지나인(之那人)과 지나인(支那人)으로 갈라진 후에, 지나인(支那人)을 염치족(炎蚩族)과 황제족(黃帝族)으로 불렀다. 자신들을 염황후예(炎黄后裔)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였다.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涿鹿)에 귀근원(歸根苑),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을 짓고 나서는 자신을 염황치후예(炎黃蚩後裔)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考古上有一种观点认为,东夷是指自后李文化始至岳石文化的承载者。但因为东夷族群原本就有一部分来源于炎黄,东夷文化里也有很多中原文化的影子,东夷祖先有很多既是东夷首领,又是炎黄后裔,比如东夷少昊是黄帝之子,伯益是黄帝重孙,所以此观点受到质疑,非主流观点}},东周时期,经齐、鲁等国在山东地区的多年经营,夷、夏逐渐融合。秦 汉以后,东夷多指居住于中国东方的朝鲜半岛、日本列岛及琉球群岛等地的外族或中国东北的少数民族。 .그러나 동이의 선조들은 원래 염황에서 유래한 것이 있고, 동이의 문화에도 중원문화의 그림자가 많기 때문에 동이의 선조들은 동이의 수령이자 염황의 후예가 많다. 예를 들면 동의 소호는 황제의 아들이고 백익은 황제의 중손이기 때문에 이 관점은 의문시되고 비주류 관점은 동주 때 제(齊)를 거쳐 노(魯) 등, 을 거쳐 산동지방에서 다년간 영(营)에 살았다. 점차 이(夷), 하(夏)가 융합되었다. 진한(秦漢) 이후 동이는 중국 동방의 한반도, 일본 열도 및 류큐제도(琉球群岛) 등에 거주하는 외족이나 중국 동북부의 소수민족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느낌0
노석태 2019년 9월 14일 · 공유 대상: 전체 공개 反中 親美 44 우리민족 DNA 집단무의식에서 사라진 초기대륙백제역사와 중국 공산당의 백제역사를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中國覇權主義化 전략 (中) - 우리민족 DNA에 집단무의식으로 각인되어 있는 地名에 대한 향수 노중평 우리 조상은 나라 이름을 정할 때, 지명을 따서 국명을 지었고, 또한 성(姓)을 정하고 문중(門中)을 만들 때, 지명을 따서 성과 문중을 만들었다. 백제는 이 원칙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래서 사라진 백제의 역사를 복원하려면 이 원리를 따라 역사를 복원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소서노(召西弩)와 제수(濟水) 백제에서 백(百)은 100개의 성(姓)이라는 뜻이다. 백제로 불리기 전에는 십제(十濟)로 불렸다. 십제에는 “제수를 건너간 10개의 성”이라는 뜻이 있다. 이때의 성에는 문중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 10개의 성의 우두머리 성이 소서노(召西弩)를 배출한 소성이었다. 소성들이 모여 사는 곳을 소(邵)라 하였다. 제수가 있는 하북성(河北省)에 소원진(召源鎭)이 있는데, 소원진은 소서노의 성씨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다. 소서노가 우무머리인 10개의 문중 가운데에 온조가 출생한 곳으로 볼 수 있는 온향(溫鄕)이 있다. 소원진에서 제수를 따라 발해만 쪽으로 오면 온향이 있다. 제수는 황하(黃河)남쪽 가까이에 있고, 황하와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흘러가다가 발해로 들어간다. 온조(溫祚)의 조(祚)자에는 삼신(三神)이 만든 사제(司祭)라는 뜻이 있다. 소서노의 소자에는 칼을 입에 물고 춤을 추는 무무(巫舞)라는 뜻이 있다. 소서노가 무당이라는 뜻이 된다. 온조라는 문자에는 어머니 소서노의 신아들이라는 뜻도 있다. 소서노와 온조의 뜻을 합하면 신이 내린 모자관계가 된다. 나는 백제의 시조가 된 온조와 소서노의 관계는 신이 내린 모자 관계라고 생각한다. 두 사람이 모자관계가 되었을 때는 산동반도 일대가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혼란기(混亂期)에 처해 있을 때였다. 소서노와 온조가 만나서 모자관계가 되기 전 시대의 제수 인근의 땅은 조선이 멸망하기 전에는 번조선의 영토였고, 번조선이 들어서기 전에는 단국의 영토였다. 조선(朝鮮)과 대청하(大淸河) 제수를 속칭(俗稱) 대청하(大淸河)라고 한다.(濟水俗稱大淸河) 대청하에 대조선하(大朝鮮河)라는 의미가 있다. 번조선의 강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대청하로 불렸다가 조선이 진에게 멸망하고 전국시대에 제국(濟國)이 역사에 등장하면서 대청하가 제수로 불리게 되었다. 제수가 발원한 곳이 중국의 하남성 제원시 서북쪽이다. 제원에서 제수라는 이름이 나왔다. (濟水發源於中國河南省濟源市區西北,濟源也因此而得名.) 제수는 탁류(濁流)로 발해, 강수(江水-長江), 하수(河水-黃河), 회수(淮水-淮河)에 흘러들었다. 화하(華夏)에서는 이를 사독(四瀆)이라고 하였다. 제원시에서 건설한 제독묘(濟瀆廟)가 있다. 제수를 따라가는 제수고도(濟水古道)가 있다. 제수가 흐르는 성시(城市)는 제원시, 제남시, 제녕시, 제양현인데, 모두 제수에서 얻은 이름이다. (俗稱大清河。濟水在古時獨流入海,與江水(長江)、河水(黃河)、淮水(淮河) 並稱華夏「四瀆」。在現在濟水發源地,濟源市還建有濟瀆廟。今天的黃河下游是當年的濟水古道。濟水流經的城市濟源市、濟南市、濟寧市、濟陽縣都是以濟水而得名的明顯例子.) 조선과 래이족(萊夷族) 진조선과 번조선은 진시황 8년에 진(秦)에게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의 이명(異名)인 청(淸)으로 불렸다. 청에는 모국(牟國), 추국(鄒國), 등의 소국(小國)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의 인종을 래산(萊山) 밑에 산다고 하여 래이(萊夷)로 불렀다.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백제의 역사가 시작된 때는 고구려의 시조로 알려진 고주몽이 요서지방(遼西地方)의 서남쪽 끝에 있는 고죽(孤竹)에 고구려(高句麗-고래라는 뜻)를 세우고 통치를 시작했을 때였다. 고주몽은 자기보다 연상의 여자인 소서노(召西弩)와 부부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제 역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 본토의 중원(中原)에서 발해만으로 흘러드는 제수(濟水)를 끼고 있는 산동반도(山東半島)와 산동반도 주변 지역이다. 이 지역이 연주(兗州)로 알려진 지역이다. 조선의 전신 단국(檀國)과 단국인(檀國人) 중국의 지방정부 사이트에 연주인(兗州人)이라는 사이트가 있다, 이 사이트에 “兖州古城为古檀国地, 少昊之墟。史称夏邑.”라는 문장이 있다. “연주 고성은 옛 단국의 땅이다. 소호의 터요, 역사는 하나라(夏邑의 읍은 성을 쌓아 방어하는 나라라는 뜻) 칭한다.”라는 뜻이다. 단국은 배달나라 말기에 있었던 나라이고, 단국의 역사는 배달나라 말기의 역사와 조선 초기의 역사 사이에 맞물려 있다. 단국은 천일 태제, 지일 홍제, 태일 단군왕검의 3세만 역사에 기록을 남긴 나라였다. 천일 태제는 배달나라 제16세 축다리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고, 지일 홍제는 제17세 혁다세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고, 태일 단군왕검은 거불단 한웅으로 볼 수 있는 분이다. 이들 세 분의 배달나라의 한웅들이 다스린 단국을 중국의 연주인 사이트에서 연주라 한 것이다. 『진서·지리지(晋书·地理志)』는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에서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연(兖)자는 본래의 모양새가 끝과 단정함과 믿음의 의미가 함의(含意)된 말이다. 『사원(辞源)』의 주석에 따르면, “이순(李巡)이 말하기를, ‘제(濟)는 제수와 황하 사이 있는 땅에 사는 사람들의 기질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의 성격은 신의가 있고 공손하다. 그래서 연(兖)이라 하였다. 의사설(意思说)에 따르면, 제수와 황하 사이는 조건이 좋은 곳이었다. 사람의 기질은 실익을 따지지 않고 근신하여, 이런 이유로 연주라 하였다. 명조(明朝) 만력년간(万历年间)에 산동감찰어사(山东监察御史) 순안조은인(巡按姚恩仁)이 『연주부지(兖州府志)』를 찬하였다. 서문에서, “연군(兖郡)은 노국의 옛 도읍지(鲁之故都)이다. 오부자(吾夫子之)의 고향이다.” 허다한 역사가들이 말한 정론은 “연은 천하의 으뜸이다”, 연주는 4천년 동안 단정하고 신의가 있었다“고 말하였다. 연주가 중국 유교문화의 발상지라는 말이 긍정적인 말로 들리는 이유이다. 연주는 중국 역사문화의 이름있는 성(城)이다. 역사 이래 역사에 감격하여 저술하였다고 말하였다. 이 글은 단국의 위치가 제수와 황하 사이에 있었고, 여기에 살았던 단국 사람의 기질이 단정하고 근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단국(檀國)의 단(檀)이 단(端)으로 바뀌었다고 본다. 『史记』는 단국의 역사를 하나라의 역사로 둔갑시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부하(负夏)、부하(负瑕)、하구(瑕丘)、하현(瑕县)、동노( 东鲁)、사구성(沙丘城)、노군(鲁郡)、동군(东郡)、연군(兖郡)、하양(嵫阳)、자양(滋阳), 역사는 요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4번이나 5번째 성을 쌓으면서, 약 4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历史可追溯到尧舜时代, 经过了四迁五筑的变化. 距今约四千多年历史〟)느낌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