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평 선교사가 구암예수병원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동안 본 필자가 여러 이유로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를 집중하지 못하였다.
산발적으로 이것저것 자료들을 모아놓긴 했지만, 이제야 이 연구를 하려고 8월 24일,
남장로교 군산 선교센터가 있었다는 구암지역을 방문하였다.
여기에는 구암교회, 구암예수병원, 영명학교, 멜보딘여학교 등이 있었는데
우선 현존하는 구암교회를 방문하였다.
멀리서 바라보면, 구암교회가 주변 환경과 맞지 않게 떨렁 고층건물처럼 서 있고
호남 선교 기념 교회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었다.
교회 입구를 향하여 걸어가자 그 입구에 3.1운동역사관이 있었다.
구암교회 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군산 3.1운동을 일으켰다는 것,
이는 서울 이외 지역과 호남에서 최초로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환경 상, 서서평 연구는 다소 복잡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초기 목사 선교사들, 의료선교사들과 간호선교사들 파악하기와 이들의 이동,
식민지 수탈 지역으로 개발된 군산, 그로 인한 선교부의 이전,
개복교회와 구암교회 중 어느 교회가 먼저냐는 갈등,
서서평의 원 소속이 군산지부냐 목포지부냐 광주지부냐의 문제,
언제부터 서서평은 실제로 군산으로 와서 사역을 했는가?
구암예수병원의 선교사적 위치와 특성, 서서평은 이 좋은 병원에서 어떻게 스푸르 병이 걸렸고,
무슨 사역을 했고, 특히 전주지부와 관련하여 어떤 사역을 했는가?
세브란스로 사역지가 바뀌는데 왜, 어떻게, 무슨 사역을 했는가?
군산 3.1운동과 그 지도자들과 얼마정도 관련이 되어 있는가?
그리고 왜 서울 세브란스를 떠나야 했는가? 1919년 이후 사역지가 왜 군산이 아니라 광주였는가?
본 필자는 몇몇 자료를 모았고 이들을 이리저리 엮어서 읽고 나름대로 가닥을 잡고 있지만,
확인되지 않은 추측, 논리가 생겼다. 이들에 대한 확인의 필요성, 불확실하거나 부실한 자료들에 대한 보충의 필요성,
이로 인하여 첫 날은 구암교회, 그 다음 날에 개복교회를 방문하였다.
그러나 담임목사님들과 관계자들을 만나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휴가중이란다. 이에 따라 자료얻기가 쉽지 않았다.
다시 방문하여 자료얻기와 더나가 사업 논의를 좀 해야 할 듯하다. 다음 주에나 방문 약속을 잡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