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투에서 한국해병대원의 소실은
10명의 전사자와 30여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입니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한 이래 인간들 끼리의 사투는
당연 지사로 신도 인정하고 있읍니다
필생불사 라면 어쩔수 없겠지요 세니어 들의 옛날 기억을 더믐어 보시기를.....
장진호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혹한의 17일 (17 Days of
Winter)'
3D 입체영화가 2012년도에 상영된줄로 압니다
1950년 원산에 상륙한 미 해병대 1사단은 북상하여 함흥에서 좌회전
북상,
장진호로 들어서는 긴 협곡으로 들어섰다.
일로 서북진하여 평안도에서 북상하는 제 8군과 링크하라는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소장은 협곡에 대부대를 투입하는 것을 불안하게
생각한데다가 중공군이 출현하자 무턱대고
맹진격을 지시하는 알몬드 장군에
항명하다 시피 천천히 전진하였다.
보급품 기지를 중간중간 만들고 하갈우리에
도착하자 서둘러서 활주로 1,500미터의
간이 비행장을 만들었다
.이 비행장은 보급과 환자수송으롤 거대한 기여를 하게된다.
스미스 장군의 조심성이 해병1사단의 중공군 포위 탈출에 큰 역할을 했다.
중공군은 9병단을 이 방면에 투입했었다
. 그 병력은 엄청나서 무려 6개 사단, 총 60,000명이었다.
사령관은 마흔 두살의 송시륜 [성씨룬] 장군. 모택동의
대장정때 이미 20대의
어린 나이로 연대장을 했던 능력있는 지휘관이었다. 장진호 계곡에서
중공군에게 포위된 미군 병력은 해병 13,500명, 육군 4,500명이었다.
해병 3개 연대중 2개 연대와 육군 부대[7사단 31연대]가 더 북상하여 장진호
좌측과 우측으로 들어서자 11월27일,중공군은 대규모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동시에 길게 배치된 해병대의 토막 내기
위해서 유담리, 하갈우리,고토리등
도처에서 기습을 해왔다.
이중 해병대 주력 5연대,7연대가 있던 유담리에 대한 공세가 극심했다.
그러나 유담리의 해병대는 사투를 벌이며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했고 호수
우측에 전개했던 육군 7사단 31연대도 심한 피해를 입었지만
하갈우리로 철수를 했다.다음은 그 남쪽 고토리로 철수해야 했다.
[31연대는 연대기를 유실했다.
이를 주은 중공군 병사가 보자기로 쓰다가 지휘관에 발견되어 지금은 중국
모 군사박물관에 자랑스럽게 전시되어있다.]
미국내 신문에서 해병 1사단의 운명에 대해 극히 비관적인 보도를 하고 미국민들도
절망적 분위기에 있었는데도 1사단은중공군의 인해전술과 북극을 뛰어넘는
엄청난 추위와 싸우면서 다음 목표인 고토리로
철수하던 길에서 격돌했던 이야기다
1950년 12월 7일.
미리 짜여진 차량 행군 계획에 따라 미 해병 포병들이 장진호 바로 밑의
하갈우리에서 그 아래 고토리로 후퇴하던
도중이었다.그 북쪽 유담리에서
부터 살인적인 추위를 아랑 곳 하지 않고
악착같이 습격해오는
중공군과 싸우며 후퇴하던 해병들은 아직도
최종 도착지 흥남까지는 갈 길은 멀었다.
장진호에서 후퇴하는 해병들 이들이 입은
긴 파카는 해병대 것이 아니라 해군용
동계 피복이었다.
차량들은 행렬을 지어 좁은 도로를 전진과 정지를 되풀이하며 천천히 행군했다.
좌우 산악에는 미리 매복했거나 뒤에서
추격해오는 중공군들로 붐볐다.
약점이 발견되는 결정적일 때 중공군들은
매복 병력을 풀어 공격할 것이었다.
왼쪽 위 유담리까지 진격했던 미 해병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호수밑 하갈우리에 집결, 아래 고토리로 철수했다. 이 구간에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이 있었다.
포병대 공격도 이 구간에서 있었다.
수없는 중공군들이 파리목숨으로 죽어갔던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트레이드 마크인 인해전술이 처음으로 적극
구사되었다
날이 밝았을 때 행군 종대는 동쪽 고지에서
쏟아지는 적군의 집중사격으로
갑자기 전진을 멈추어야 했다. 그들의 화력의 강도로 포병의 G포대와 H포대를
목표로 매복했던 중공군이 공격할 것이
틀림없어 보였다.
중공군이 사격을 잠시 멈추고 돌격선으로 기동하는 동안 포병 지휘관 제임스
캘린더 소령과 어네스트 페인 대위,벤자민 리드 대위는 포대 소속들의 포를 끌고
가던 포차에서 포들을 즉시 분리하여 방어준비를
갖추었다.
운전병들이 트럭들을 전진과 후퇴를 재빠르게
해서 정차시켜 트럭들 사이로
야포 9문을 포구가 적을 향하도록 정렬하는 동안 포병들은 숨 넘어 가는
속도로 포탄 운반 트럭에서 포탄 박스를
옮겨 내렸다. 트럭들은 방호벽 역할을 했다.
전우의 시체와 부상병은 트럭에 태우고
신체가 건강한 장병은 차량 좌우에서
도보로 후퇴하였다.
역사에 희귀한 포병과 보병의 직접 격돌하는 결투가 눈 덮인 이 계곡에서 펼쳐졌다.
적은 중공군 보병 1개 대대, 그 부대가 노리는 것은 하갈우리에서 후퇴중인
미 해병 포병 2개 포대였다.
지난 2주간 집요하게 시도하던 인해 전술 공격을 또 다시 포병들에게 시도하는 중이었다.
포병을 고른 것은 악착같이 반격하던 미
해병 보병들과는 달리 중장비를 다루는
포병들은 중공군 식의 인해 전술식 공격에는
약하다고 본 것 같았다.
날이 완전히 환해지자 러슬 런 하사가 지휘하는 기관총반 사수들은 중공군이
철도를 넘어 떼 지어 몰려오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리드 대위가 앞으로
돌출된 런 하사에게 그 기관총 진지를
도로 건너 뒤로 후퇴시키도록 명령했다.
그 도로 뒤에는 트럭 운전병만으로 구성된
부대가 도로를 방어물로 방어선을
구성해놓은 상태였다.
후랜시스 페리 대위의 회고담이다. “너무 급했습니다. 중공군들은 그 때 철도
뚝 위로 머리를 들락거리며 돌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고 성질 급한 지휘관들은
철로 위로 뛰어 올라 오기도 했습니다.
" 해병 포병들은 중공군들의 살기등등한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사거리는 불과 수 백 미터였다. 포의 통상적인 간접사격이 아니라 포구를 내리고
목측으로 조준경으로 조준하는 직접사격이었다. 포탄이 부산하게 포탄 박스에서
꺼내지면서 9문의 포는 계속 사격을 했다.
그들을 제압 사격해서 철도 뚝 뒤에 머리를
박아 놓아 봇물 같은 인해전술식
돌격을 못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포 다리를 제대로 펴고 포판을 땅에 박고
방열을 할 시간도 없었다.
사격 구역도 할당할 여유조차도 없는 돌발
상황이었다.
포들은 마치 자동소총처럼 난사되었다. 난사에도 중공군은 기죽지 않았다.
맹렬한 포 사격에도 중공군은 대대 병력
전원이 철로 둑을 넘어 돌격을 개시했다.
포병들의 전방 시계는 흰색의 동계 전투복을 입은 중공군들로 가득
찼다
생사 기로가 눈앞에 어른 거리는지라 각 포병들의 포사격도 필사적이었다.
도로 뒤는 금새 화약 냄새로 가득 찼다. 각 야포의 포수들은 포 방어 판에 달려들어
육탄으로 발사시의 반동을 온몸으로 흡수해서
포의 후퇴를 최소화 시켰다.
그래도 포탄 발사를 할 때마다 포는 포병들을
매달고 뒤로 수 미터씩
후퇴하였다. 몇 발을 발사하면 포병들은 포를 앞으로 밀어내서 본래의 자리로
원위치하고 사격을 하고 또 매달려서 뒤로
후퇴했다. 난사라고 표현할 만큼
정신없는 사격 속에서 포탄을 가리고 자시고
할 여유도 없었다.
그저 포탄 박스 안에서 황급히 꺼낸 탄들이
손에 닿는 대로 발사하였다.
돌격하는 중공군에게 퍼부어진 포탄들은
각양각색이어서 고폭탄, 대전차 고폭탄,
백린 연막탄등 닥치는 대로폐쇄기에 장전하여
몰려드는 중공군들에게 발사했는데
근거리 사격이라서 포탄 파편들이 포병진지까지
날아왔다.
그러나 포병들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장전과 사격과 포의 원위치를 계속하였다.
지근 거리까지 접근한 중공군이 물뿌리듯이
쏴대는 다발총의 총탄이 주변에
마구 날아들며 포병 여러 명이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그러나 총탄이 아니라 포탄의 소나기를
맞은 중공군의 피해는 훨씬 더 컸다.
근거리에서 포탄의 불벼락을 뒤집어쓰고
숱한 중공군들은 비명 속에 죽어나갔다.
누비옷을 입은 중공군의 사지가 잘려서
사방으로 날아가고 조각난 신체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처절한 비명과 시체 토막이 주변에 무더기로
난비하자 중공군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중공군 지휘관은 안될 전투라고 판단하고
후퇴 나팔을 불어 누더기가 된 부대를
철도를 넘어 산으로 퇴각시켰다.
그 뒤를 간접사격으로 사법을 바뀐 포병들의
포탄이 간격을 두지않고 뒤따랐다.
공격을 개시한 중공군 대부대에서 나팔
소리를 따라 안전하게 후퇴한 생존자들은 소수였다.
중공군이 퇴각한 뒤 전장 정리를 하면서
세어보니 처참하게 죽은 중공군의 사체가 500구가 넘었다.
보병들과의 전투가 아니라 포병들에게 돌격하다가
포탄들에 당했기 때문에 갈기갈기 찢어진 사체들 태반이 눈을 뜨고 볼 수없을 정도로 참혹한 상태였다.
미 해병의 G포대와 H포대가 짧은 시간동안 돌격하던 중공군에게
발사한 포탄은
총 합계가 600발 이상이었다
해병대의 사상자는 전사 3명과 34명의 부상자뿐이었다.
전투 지휘를 했던 페리 대위는 이 전투를
이렇게 자체 평가하였다.
“포병 전투사에 야전 포병이 돌격하는
보병들을 상대로 그런 엄청난 전과를
거둔 적이 없었습니다.
” 이 전투 후 해병대는 고토리에 도착했고 거기서 다시 남쪽의 진흥리로
철수해서 마침내 중공군의 마수에서 벗어났다.
해병대는 트럭 일천여대에 해병들은 모든
군수품과 부상자와 사망자의
사체까지도 대부분 다 데리고 나왔다.
이 장진호 전투에서 강인한 해병들은 미 8군이 서부전선에서 당했듯
와해된 중대 단위 소부대가 단하나도 없이
중공군을 격퇴하고 공격했다.
해병대의 2주간에 걸친 철수 작전에서 격렬한 전투를 수 십회를 되풀이 했는데도
해병대의 전사자는 700명에 실종자 200명의 손실만을 입었다.
반면 중공군의 전사자는 거의 투입병력
절반에 달하는 2만 5천명 전사와
부상자 1만 2천 500명의 대 손실을
당했다. 더해서 해병의 철수 작전 동안
미 해병대를 끊임없이 괴롭혔던 잔혹한 추위는 방한장구가 부실했던 중공군 대부분을 동상 환자로 만들어 버렸다.
장진호 전역에 동원된 중공군은 대 참패를 당한 부대나 입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대 병단의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결국 몸만 망치고 닭쫓던 개 지붕쳐다
보는 꼴이 장진호 전투 뒤에 중공군에게
내려진 세인의 평가였다.
그들이 쫓던 해병대가 흥남 부두를 떠나고
나서도 만신창이가 된 중공군 9병단은
다른 작전에서 제외되어 4개월이나 함흥 평야에 머물며 휴식과 재정비만을 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