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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1
하란에 도착한 야곱(창세기 29:1-8)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이르는 매단계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벧엘 이후의 야곱의 행로는 특별한 여행이 아니었다. 벧엘에서 겪었던 그처럼 행복했던 밤도 없고, 그때 뵙던 전능하신 하나님의 모습도 다시 뵙지 못한다. 그러한 경험은 마치 성대한 잔치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런 잔치를 끼니마다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1. 우리는 야곱이 벧엘에서 가진 하나님과의 행복한 교제를 가진 뒤에 얼마나 즐겁게 여행을 계속했는가를 살펴 볼 수 있다. "그때에 야곱이 그의 발을 들었다"라고 했다(1절) 난외에는 그렇게 읽고 있다(히브리 원문). 그때 그는 근심의 무거운 짐에 짓눌리지도 않고, 두려움에 시달리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다는 확신을 가지고 즐겁고 쾌활하게 그의 여행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환상을 보고 났을 때에는, 엄숙한 규례로 하나님께 서약을 해야 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그가 명령한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히 12:4).
2. 그는 참으로 행복하게 여행의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그의 삼촌의 양떼들이 물을 먹는 바로 그 들판으로 데려다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야곱은 자기의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났다.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보기로 하자.
(1) 우리의 여행이나 다른 어떤 사업이 순탄하고 평안하게 되었다면, 우리는 그간의 모든 사소한 형편 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깃들어 있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가 길을 잃고 있을 때에 우리를 인도해 줄 자들을 때마침 만났다면 우리가 역경을 만났는데 구원의 손길이 다가오고 있다든가. 그것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신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의 길 속에 언제나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의 행로는 즐거움의 길이 될 것이다.
(2) 양떼를 치는 사람들은 양들을 잘 돌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양들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펴야만 하는 것이다(잠 27:23). 목자가 자기 양들을 한결같이 돌보고 있다는 점이 본문에 나타나 있다(2, 3, 7, 8절). 그것은 위대하신 목자이신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양인 교회들을 돌보시는 그 사랑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예수님은 자기의 양들을 알고, 양들은 또 그를 아는,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이다(요 19:14). 여기에서 자주 언급되고 있는 우물 입구의 돌은 우물물을 다른 사람들이 퍼가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한 것이든가(물이 아주 부족했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물은 usus Communis aquarum 공동 사용을 위한 것이 못되었다) 아니면, 태양의 열 때문에 물이 더워진다든가, 불결한 손으로 물을 더럽힌다든가, 양이 우물물에 빠진다든가 하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일 것이다.
(3) 각자의 이해 관계가 우리의 상호 협력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목자들이 자기들의 양 떼를 끌고 다들 왔을 때가 물 먹일 수 있는 때요, 저들은 이웃을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때에야 양 떼에게 함께 물을 먹였던 것이다.
(4) 여기에서 우리는 낯선 사람들에게 친절하고 예의 바르게 대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비록 야곱이 귀한 사람도 아니고 장막을 치고 사는 그저 평민이었으며, 낯선자이지만,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에게 매우 정중히 말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을 형제라고 불렀다(4절). 인애의 법이 혀에 있을 때, 그것은 위력을 발휘한다(잠 31:26). 어떤 사람들은 야곱이 그들을 형제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자기와 같은 직업, 곧 목자들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고 있었지만, 자기 본래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5) 흔히 남을 존경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다. 야곱이 그들을 예의 바르게 대했기 때문에 그들도 야곱에게 예절 있는 태도를 취했다. 야곱이 그들에게 빨리 일을 처리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을 때(7절), 그들은 간섭하지 말고 놔두라고 하지 않고, 비록 야곱이 낯선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네들이 일을 지연시키고 있는 까닭을 잘 설명해 주었다(8절). 남에게 친절하고 다정한 자들은 친절하고 정다운 대우를 받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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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한 라헬(창세기 29:9-14)
여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라헬의 겸손과 근면성이다. "그녀는 자기 양을 쳤다" 고 했다(9절). 즉 양을 치는 많은 종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헬은 스스로 양을 돌보고 있었던 것이다. 라헬이라는 이름은 양을 뜻한다. 정직하고 유용한 노동은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 그것이 높은 지위에 있는 자의 명예 훼손일 수는 없다.
2. 야곱의 온유하고 따뜻한 사랑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사람이 자기의 친척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이미 라헬의 이름을 들은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가 그곳에 온 임무를 알고 있었으므로, 이 사람이 바로 자기의 아내가 될 사람이라는 것을 즉각적으로 알았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미 야곱은 라헬의 솔직하고 귀여운 인상(비록 햇빛에 거슬리고 집에서 마구 입는 목자의 옷을 입고 있었겠지만)에 이끌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지극히 친절하게 라헬을 도와주고(10절),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사랑의 입을 맞추면서 자기를 소개하였던 것이다(11절). 라헬은 이 일을 아버지에게 고하려고 급히 달려갔다. 아버지가 알고 허락하지 않는 한, 아버지께서 자기 친척이라고 하는 이 사람의 말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행복한 부부가 될 것이라는 길조였다.
3. 야곱이 목적지에 도달하자마자, 야곱의 마음을 속히 만족하게 해주는 하나님의 섭리우연이나 행운처럼 보였지만-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종이 비슷한 심부름으로 왔을 때도, 이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격려해 주심을 얻었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눈 여기시어 인도하고 계신다(사 32:8). 야곱이 라헬을 만나 입을 맞추며 운 것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에서의 큰아들인 엘리바스가 야곱에게 여행을 시켰는데, 그의 어머니가 그를 보내면서 준 돈과 보석을 중도에서 모두 도둑을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어떤 유대 저작가들의 말은 근거 없는 공상이다. 야곱이 눈물을 흘린 것은 라헬에 대한 그의 사랑과 이렇게 행복한 만남이 너무나 갑자기 이루어진 때문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야곱은 이 행복한 만남에 놀라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던 것이다.
4. 라반은 결코 쾌활한 삶은 아니었지만, 야곱 자신과 그가 이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온 이유를 듣고 나자, 그를 기쁨으로 맞이했다. 우리는 경솔하게 사람을 믿어버리는 극단을 피해야 하려니와, 또 한편 무자비하게 사람을 믿어버리는 극단을 피해야 하려니와, 또 한편 무자비하게 질투한다거나 의심하는 또 다른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라반은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이라" (14절)고 외치면서, 야곱이 자기의 친척임을 인정했다. 자기 친척에게 불친절한 사람들이야말로 마음이 강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그리고 그들은 "자기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는 사람들"이다(사 5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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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결혼(창세기 29:15-30)
Ⅰ. 야곱이 그 곳에서 손님으로 머물고 있던 그 달에 라반과 야곱은 공정한 계약을 맺었다(14절). 이것을 보면 야곱은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는 자기의 시간적인 여유를 그저 수일 하면서 보낸 것이 아니라, 사업가처럼, 비록 자기의 재산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양 떼에게 물을 먹여 주었을 때" 이미 시작한 바와 같이(10절) 자기의 외삼촌을 돕겠다고 자청했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어떤 유용한 일을 찾아 거기에 전념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참으로 좋은 일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생각건대 라반은 야곱이 소탈하고 근면하게 자기의 양 떼를 돌보는 것을 보고 함께 있기를 원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극히 합리적으로 "네가 비록 나의 생질이지만" 그렇다고 "어찌 공으로만 일을 하겠느냐" (15절), 그럴 수가 없다. 무엇을 바라는가? 하고 그는 묻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야곱이 그의 외삼촌을 지극히 존경하여 거저 일을 해 줄 수 있다 할지라도 라반은 야곱이 그럴 수밖에 없다든가, 그의 성질이 좋아서 그렇다든가, 어쨌든 간에 아무리 생질이라도 부당하게 그로부터 자기의 이익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손아래 친척이라고 하여 안 된다는 것을 알자. 그들에게는 속여서는 우리를 섬겨야 할 의무가 있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보상을 해 줄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제 야곱은 라반에게 자기가 그의 딸 라헬을 사랑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만났다. 그리고(결혼하면) 라헬에게 줄 수 있는 아무런 재산도 자기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7년 동안 외삼촌 일을 하고 그 기간이 끝나면 라헬을 아내로 줄 것을 조건으로 제시한다. 계산해 보면 아내를 얻기 위하여 약속을 했을 때가, 야곱이 일흔일곱 살 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내를 얻기 위하여 양을 쳤다" (호 12:12). 오랜 후에 그의 후손들은 이 사실을 가리켜 자기의 조상의 미천함을 보여 준 한 실례였다고 회상한다. 아마 야곱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라헬은 아직 결혼할 나이에 이르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는 보다 기꺼이 7년 동안의 품 일을 계속했을 것이다.
Ⅱ. 야곱은 정직하게 계약된 자기의 의무를 완수하였다(20절). 그는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 동안 일을 하였다. 만약, 그 동안에도 여전히 라헬이 계속 그의 아버지의 양들을 쳤다면(9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야곱과 라헬이 양 떼를 몰면서 서로 나눈 순수하고 경건한 대화들이 서로를 더 좀 잘 이해하고 서로를 더욱 사랑하게 해 주었을 것이다(솔로몬의 아가는 목가적인 것이다). 혹 라헬이 양치는 일을 이미 그만두었다 할지라도, 야곱은 그녀를 매우 정중히 돌보아 주었을 것이다. 야곱은 나이가 많았지만 정직하게 7년을 봉사하여 약속을 조금도 훼손하지 않았다. 그는 정직하게 그 기간을 지켰을 뿐만 아니라 즐겁게 봉사를 했다. "라헬을 사랑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 같이 여겼어라"라고 했다. 마치 그것은 그가 라헬을 그저 얻는 것이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데려 오려했었던 것 같이 생각된다. 사랑은 지루하고 고생스러운 일을 짧고 손쉽게 해 준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의 섬김"이라는 말을 읽을 수가 있는 것이다(히 6:10). 만약 우리가 하늘의 축복의 진가를 깨닫는다면, 현재의 괴로움은 그 축복에 비해 아무것도 아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수고하고 고생하는 긴 생애가 불과 며칠로밖에 느껴지지 않는다.
Ⅲ. 계약된 기간이 다 끝났을 때, 라반은 비열하게도 야곱을 속였다. 그는 라헬 대신에 레아를 야곱에게 보냈다(23절). 이것은 라반의 범죄였다. 그는 서로 사랑하는 야곱이나 라헬에게 뿐만 아니라 만약 어떤 사람들이 말하듯이, 이때 레아는 간음을 범한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면, 라반은 레아에게도 큰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또 야곱의 불행이기도 하였다 즐거운 결혼 잔치가 다 끝나고 새벽에 보니 그것은 레아였던 것이다(25절).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야곱이 어떻게 (자기의 행위에) 보복을 당했는가 하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에서인 체하고 자기의 아버지를 속였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기의 장인이 자기를 속인 것이다. 라반은 불의했다고 하자. 그러나 사사기 10장 7절에 있는 말씀과 같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 비록 올바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만약 그릇된 길을 걸으면, 때때로 이 땅 위에서도 보응을 받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야곱처럼, 그 사람 자체에서는 실망을 당하지 않으나 사람들의 품격에서는 슬플 정도로 실망을 당하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망을 당하여 실수했다고 괴로워하지 않기 위해서는, 인간관계의 선택을 언제나 사람의 됨됨이와 성품을 심사숙고하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Ⅳ. 라반은 자기가 속인 것에 대하여 변명을 하고 거기에 대한 보상을 한다.
1. 그의 변명은 천박한 것이었다. "이는 우리 지방에서 하지 않는 바이라" (26절). 그가 주장한 것처럼 그러한 관습이 그 지방에는 없었다고 생각한다면, 다만 이런 말로 그는 야곱을 희롱한 것이며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실수조차도 비웃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악한 짓을 하고도 그것을 농담으로 웃어넘기려는 사람은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을지언정, 마침내는 하나님을 조롱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날이 온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정말 그 지방에 그런 관습이 있고, 라반이 이 관습을 준수하려 했었던 것이라 면, 야곱이 작은딸을 얻으려고 그를 위해 일을 하기로 약속을 했을 때, 이미 그런 사정을 이야기했어야 옳았을 것이다. 옛 속담에 말한 바와 같이 "악은 악인에게서 나온다" (삼상 24:13) 남을 배반하는 사람은 언젠가 자기도 배반당하리라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라반은 일을 수습하려 하였으나 그러한 타협은 사태를 더욱 그르치고 말았다. "우리가 그도 네게 주리라" (27절). 여기에서 라반은 야곱으로 많은 아내를 갖는 죄를 짓게 하고, 그로 하여금 불명예스러운 오점을 짓고 세상 끝날까지 그 불명예를 지니고 살게 했다. 정직한 야곱은 이런 일을 생각지도 못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리브가에게 행한 것처럼 그렇게 라헬에게 성실하려 했었고 또한 여든네살까지 혼자 살아온 야곱은 한 아내와 더불어 만족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라반은 지참금 없이 두 딸을 시집보내고, 야곱을 7년 동안 더 일을 시키려고 이렇게 그를 속여서 궁지에 넣었다. 그래서 그럴듯한 이유를 들어 두 사람에게 모두 결혼시킨 것이다(이때까지만 해도 혼인법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것은 후에 레위기 18장 18절에서, 우리 주님에 의하여 마태복음 19장 5절에서 보라 충실히 하나님의 율법에 의하여 규정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라헬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미 그 와는 약혼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레아를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이미 그는 레아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은 이에 "만족하고, 두 달란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왕하 5:23). 한 죄는 또 하나의 죄를 낳는 것이 일쑤임을 명심하자. 하나의 악의 문을 들어선 자는 대개 또 하나의 악의 문을 통과한다. 족장들의 일부다처는 어떤 기준에서 보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주 옛날의 아담의 결혼에 대해서처럼 그에 대한 반대의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말 2:15), 일부다처를 반대하는 분명한 계명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다처는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에 지은 죄이다. 그것은 죄악에 가득 찬 육욕에 좇아서 행하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나님의 섭리는 그런 일에서 선한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이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이 함께 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명백하게 알려진 오늘날에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고전 7:2). 일부다처제를 승인하는 마호메트 교도들처럼 육욕적이고 관능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많은 아내를 갖는다는 것이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그리스도를 배우지는 않았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레아와 라헬을 율법 아래 있는 유대인과 복음 아래 있는 이방인의 두 교회의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그리스도께서 종의 형제로 오셨을 때에도, 어린 자가 더욱 아름다웠고, 그리스도를 더 많이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 많은 자가 레아처럼 먼저 그리스도를 포옹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유는 이방인들 곧 어린 자의 자녀가 더욱 많아진다(갈 4:27)는 사실을 뒷받침해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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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되는 야곱의 식구(창세기 29:31-35)
이 곳에는 레아에게서 야곱의 네 아들이 태어난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1. 라헬보다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레아는 자식을 많이 낳는 축복을 받았다. 그러나 라헬은 그러한 축복을 받지 못했다(31절).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게 어느 누구도 너무 의기양양하지도 않고, 너무 좌절감에 빠져 실망하지도 않도록, 그 각각의 차지한 몫을 살피셔서 위로해 주시고 축복하시는 평형을 주시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라헬은 자식을 갖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는 남편의 사랑을 받는 축복을 받았을 뿐이고,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바랐으나 많은 자손의 축복만을 받았다. 엘가나의 두 아내 사이의 관계도 그러하였다(삼상 1:5). 하나님은 현명하고 공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증오받는 것을 보셨을 때"라고 했다. 즉 레아가 라헬보다 사랑을 받지 못함을 보신 때이다. 이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리스도보다 부모를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요청을 의미해 준다(눅 14:26). 그때에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아이를 허락해 주셨다고 했다. 이 사실은 야곱에 대한 견책, 즉 자기와 대등하게 관계를 맺고 있는 두 여자를 그처럼 심하게 차별하는 데 대하여 야곱을 질책하신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은 그런 관계 때문에 자기 언니를 멸시했을지도 모르는 라헬에 대한 경고이기도 했던 것이며, 레아에게는 자기가 당하는 멸시 때문에 좌절하지 않도록 해주는 위로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시는 법이다" (고전 12:24).
2. 레아가 자기 아들들에게 지어준 이름을 보면 그가 하나님과 자기 남편을 얼마나 존경했는가를 알 수 있다.
(1) 레아는 무척 남편의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랑 받지 못하는 이 사실이 늘 그의 괴로움이었다(32절). 그러나, 그것이 남편의 잘못이라고 야곱을 꾸짖거나 그를 비난하여 야곱을 귀찮게 하는 여자가 된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 슬픔을 감추고 있었다. 또 그렇게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것은, 자기가 정당하게 그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초래되는 고통은 인내심을 가지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레아는 자기가 아이들을 낳으면 야곱의 사랑을 얻게 되리라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첫아들을, "이제는 남편이 나를 사랑하리로다" 하는 즐거운 기대를 가지고 르우벤(보라, 아들이라)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셋째 아들은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34절)하는 기대를 가지고 레위(연합이)라 불렀다. 부부간에는 서로가 사랑하고 서로가 위로해야 한다. 일방적이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부부간의 의무이다. 한 멍에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서로를 기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전 7:33, 34).
(2) 레아는 자기에게 아들을 낳게 해준 하나님의 친절하신 섭리에 감사를 드렸다. "여호와께서 나의 괴로움을 돌아보셨다"라고 했다(32절). "주께서 들어주셨다. 즉 내가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을 아셨다(우리의 고통은 하나님의 눈앞에 있고, 또한 고통이 하나님의 위에 큰소리로 부르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게 아들을 주셨도다"라고 했다. 우리가 고통 속에서 어떤 도움이나 위로를 받든 지, 또는 그 고통 속에서 해방을 받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 특히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한 긍휼임을 알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레아는 넷째 아들을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양하리이다" 하고 말하면서(35절), 유다(찬송함)라고 불렀다. 그런데 육신으로 말하면 바로 이 유다의 후손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신 것이다. 다음 사실을 명심해 두자.
[1] 우리에게 즐거움이 있을 때는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새로운 은총을 입으면, 우리는 이미 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서도 찬양을 드리도록 해야 한다. 레아는 내가 이전에 드린 찬양보다 더욱 감사하고 더욱 드높은 "찬양을 드리겠노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우리의 모든 찬송은 그 찬송의 제목이시오 그 찬송의 중보자되시는 그리스도 안에 중심을 두고 드려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찬양을 드려야 할 바로 그분에게서 오신 분이고, 동시에 우리가 찬송을 드려야 하는 바로 그분 자신이시기 때문이라. 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속에 계신가를 스스로 물어보라. "내가 이제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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