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선(新羅四仙)2- 사선(四仙)의 유적
금강산과 동해안 일대에는 영랑(永郎)·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 安常) 등 ‘신라사선(新羅四仙)’이 수도하며 유람을 했다는 전설과 함께 많은 유적지들이 있다. 비록 신라사선에 대한 문자 기록은 전하는 바가 별로 없지만, 그들의 행적을 알리는 여러 유적을 통해 우리는 2천 년 전 사선(四仙)들을 시공을 넘어 만나볼 수 있다.
1. 금강산 일대의 사선(四仙) 유적
금강산의 산봉우리와 명소들에는 유독 ‘선(仙)’자가 많이 발견된다. 그 곳곳에서 신라 사선과 화랑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신라시대에는 화랑들이 금강산에 들러 수련을 했다는 기록들이 문헌에도 전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금강산의 지명 가운데 사선(四仙)과 관련한 이름으로는 영랑봉(永郎峰), 영랑현(永郞峴), 사선정(四仙亭), 선창산(仙蒼山), 삼선암(三仙岩), 육선암(六仙岩), 천선대(天仙臺), 강선대(降仙臺), 승선대(昇仙臺), 사선봉(四仙峰), 집선봉(集仙峰), 선하계(仙霞溪), 환선(喚仙)폭포, 사선교(四仙橋) 등이 있다.
- 영랑봉(永郎峰)
금강산은 주봉인 비로봉(1,638m)을 비롯해 해발 1천5백m 이상의 거봉들이 10개에 이른다. 그 중에 영랑봉(1,601m)은 서쪽 내금강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비로봉 다음으로 높은 봉우리이다. 옛날 영랑선인이 그곳에서 대도를 수도했다는 전설이 있으며, 노년에도 그곳에서 지낸 듯하다. 후일 영랑 선인이 거기서 원효를 만났다는 전설도 있다(이 전설은 아마도 불가 쪽에서 지어낸 것으로 보인다).
영랑봉으로는 은사다리금사다리를 지나 오른 등성이에서 왼쪽으로 돌아서, 등마루를 따라 갈 수 있다. 영랑봉은 내금강에서 가장 좋은 전망대의 하나로 꼽힌다. 영랑봉에는 장군성과 장군봉, 일출봉, 월출봉, 백화담, 금사정 등 명소가 많이 있다.
- 총석정(叢石亭) 사선봉(四仙峰)
수많은 돌기둥들(石柱)로 이루어진 총석정은 강원도 통천군 통천항에서 2km 떨어진 해금강에 있으며, 북한 명승지 제13호이자 천연기념물 제214호이다. 총석정의 돌기둥들이 푸른 바다 물결 위에 용궁의 수정문처럼 솟아오른 장관은 예로부터 관동팔경 중에 으뜸이라 했다. 총석정은 원래 이곳 절벽 위에 세운 정자 이름이었지만 지금은 없고, 단지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의 그림 등에서 볼 수 있다.
사선봉은 총석 중 바다 가운데 15~20m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4개 석주(石柱)를 말한다. 전설에 따르면 신라 사선(四仙)이 총석정에 와서, 특히 이 4개 돌기둥 꼭대기에서 가장 많이 수도하며 놀고 갔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을 사선봉(四仙峰)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선봉의 네 기둥(石柱)은 마치 스스로도 신선이 된 듯, 늘 푸른 파도를 굽어보며 아름답고 늠름하게 서 있다.
옛 기록에는 사선봉 꼭대기에 네 신선이 심었다는 한 그루 노송(老松)이 해풍에 가지를 맡긴 채 외로이 서 있었다고 한다(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송강 정철(鄭澈, 1536~1593)은 『관동별곡』에서 총석정의 절경을 이렇게 읊었다.
금란굴 돌아들어 총석정 올라가니,
백옥루(白玉樓: 옥황상제 거처) 남은 기둥 다만 넷이 서 있구나!
공수(工倕, 순임금 때 목수)의 솜씨인가 귀신 도끼로 다듬은 것인가.
구태여 육면은 무엇을 본뜬 것인가.
2. 고성(高城)의 사선(四仙 ) 유적
- 삼일포(三日浦)
삼일포(三日浦)는 강원도 고성 금강산 가(해금강)의 호수(석호)로 관동팔경의 하나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경치가 아름다운 호수로 이름났다. 현재 휴전선 이북에 있으며, 북한의 천연기념물 제218호로 지정되었다. 삼일포 주변에는 장군대와 봉래대, 연화대, 금강문, 몽천, 와우도, 단서암, 무선대, 사선정, 매향비 등 명소가 많다.
옛날 신라사선이 관동팔경을 돌아보면서 한 경치마다 하루씩 머물기로 약속했는데, 이곳에서는 너무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해 약속을 잊고 3일 동안 머물며 놀았다는 전설에서 삼일포 이름이 유래한다.
호수에는 사사선(四四仙) · 무선대(舞仙臺) · 봉락대(鳳樂臺) · 석대(石臺) 등 4개 섬이 있고, 그중 한 섬에 신라사선 영랑(永郞) · 술랑(述郞) · 안상(安祥) · 남랑(南郞)이 놀고 갔다는 사선정(四仙亭)이 있다. 호수 북쪽 석면에는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 영랑의 무리 남석행)’이라고 새겨져 있고, 그중 2자는 단서(丹書)로 되어 있어 단서석(丹書石)이라 부른다. [*남석행(南石行)은 남랑(南郞)이라고도 하며, 영랑을 따르던 선인이다.]
조선의 문인 최립(崔笠, 1539~1612)은 삼일포의 절경을 이렇게 노래했다.
비 개인 뒤 서른여섯 봉우리, 소라처럼 아름답고
백조는 쌍쌍이 거울 같은 호수를 희롱하네.
사흘간 노닐던 신선은 간 곳이 없건만
신선 사는 곳의 아름다움 이제 알겠네.
조선 선조 때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도 강원도관찰사로 부임 중 관동팔경을 유람하다가 시(詩)를 지었다.
고성(高城)을 저만치 두고 삼일포(三日浦)를 찾아가니
영랑도남석행(永郞徒南石行) 마애단서(磨崖丹書) 바위에 뚜렷한데
영랑·남랑·술랑·안상 사선은 어디로 갔는가?
여기서 삼일을 머문 후 어디로 가서 또 머물렀을까?
선유담(仙遊潭), 영랑호(永郞湖) 그곳으로 갔을까?
- 사선정(四仙亭)
사선정(四仙亭)은 신라의 사선(四仙) 영랑(永郎)·술랑(述郎)·남랑(南郎)·안상(安詳)을 추모하기 위해 삼일포(三日浦) 앞의 소도(小島)에 세워진 정자이다. 고려 충숙왕 때 강원도 존무사(存撫使)로 파견된 박숙정(朴淑貞)이 세웠다고 전한다. 휴정(休靜) 서산대사(西山大師:1520~1604)는 ‘사선정(四仙亭)’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바닷가 시든 소나무 또한 오래되었고 海枯松亦老
학이 떠나가니 구름도 유유하구나. 鶴去雲悠悠
달 속에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月中人不見
서른여섯 봉우리 세월에도 분명하네. 三十六峯秋
- 무선대(舞仙臺)
무선대(舞仙臺)는 신라사선이 삼일포에 머무는 동안 춤(仙舞)을 추고 풍류를 즐겼다고 하는 바위섬이다. 사선은 특히 풍류를 즐겨서 ‘무선(舞仙, 춤추는 선인)’이라는 별칭이 있다. 본래 무예와 무용은 근원이 하나이며, 선도 수행자들은 무예를 필수로 연마하며 또한 음악, 미술, 무용 등 예술을 즐겼다. 이를 바탕으로 풍류(風流)가 나온 것이다.
신라사선에서 비롯된 사선무(四仙舞)는 신라 궁중무용의 하나로, 향악정재(鄕樂呈才)에 속한다. 사선무는 고려에도 계승되어 팔관회(八關會) 의식에서 사선악부(四仙樂部)와 용(龍)·봉(鳳)·상(象)·마(馬)·차선(車船)과 함께 공연되었다. 이는 조선 조에도 이어져서 순조 29년(1829) ‘4선(仙)이 와서 노닐 만큼 태평성대’라는 노래를 부르며 사선무(四仙舞)를 추었다고 한다.
- 선유담(仙遊潭), 가학정(駕鶴亭)
강원도 간성(杆城 )에서 남쪽으로 4km 떨어진 곳(고성군 죽왕면 공현진리)에 있는 석호 선유담(仙遊潭)과 그 위쪽에 있던 운치있는 가학정 (駕鶴亭)이라는 정자도 사선(四仙)과 관련 깊은 유적지이다. 신라사선 영랑, 남랑, 술랑, 안상이 그곳에서 바둑과 장기를 두었으며, 학을 타고 날아갔다는 전설이 있다.
과거에 선유담에는 노송이 많고 꽃나무가 만발하였으며, 호수면을 가득 덮은 순채가 절경을 이루었다고 한다. ' 요조숙녀 같기도 하고, 덕을 숨긴 현명한 선비 같기도 한' 선유담에는 유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특히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았다고 한다. 조선의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도 이곳 경치에 반해 화폭에 담았다.
단원이 그린 가학정 그림에 보면 태백산맥의 준령들이 동해로 흘러들면서 높이가 급격히 낮아진 작은 구릉들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모래언덕) 위에 심어진 솔숲을 경계로 바깥쪽은 동해 바다와 연결되고, 안쪽으로는 선유담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 중기의 문인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은 강릉부사로 부임하면서 「유선유담(遊仙遊潭)」이라는 시를 지었다.
동해와 선유담 풍광이 한 비탈에 가로막혀 海色潭光 隔一陂
바람도 없거늘 푸른 유리가 둘로 나누었네. 無風兩段 碧琉璃
어찌해야 신선이 노닐던 그날처럼 곧장 安能直似 仙遊日
크고 작은 연못이 호응해 오가게 할까? 來往纔同 大小池
하지만 선유담이라는 아름다운 호수는 지금 대부분 경작지로 변해 있으며, 바다와 연결되는 모래언덕에는 7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그 위에 있던 가학정도 사라진지 오래다.
현재 가학정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선유담(仙遊潭)’이란 암각 글자와 함께 주위에서 기와· 자기 등 유물이 나와, 가학정 터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선유담의 신비로움에 감탄하여 우암(尤庵) 송시열(1607~1689)이 가학정 위 반석에 친필로 썼다는 ‘선유담’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로 그 반석 위에 가학정(駕鶴亭)이란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계속)
글; 무 애 (한국선도학회장)
(* 참조, 인용한 자료의 출처는 편의상 생략하오니 널리 양해 바랍니다.)